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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이사야서 26장 4-13절, 누가복음서 18장 1-8절
한 문 덕 목사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를 여는 말]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신약성서의 본문은 흔히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라고 불립니다. 이 비유에는 과부와 재판관이 등장하고,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백성들의 권리를 얼른 찾아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보통 예수님의 비유는 결말을 예측하기가 어렵고, 예수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야 겨우 그 뜻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독특하게 처음에 비유를 말씀하신 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이 도입문 때문에 그동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비유를 잘못 이해해 왔습니다.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늘 기도하는 것”에 있을까요? 아니면 “낙심하지 말라는 것”에 있을까요? 사실은 둘 다입니다만, 그동안 많은 사람들은 이 본문을 쉬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에만 초점을 두고 읽으면서,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즉 하나님께 나아가서 계속 기도하면 무엇이든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본문으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본문의 마지막을 보면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는 질문으로 끝나기 때문에, 마치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이 믿음의 핵심적 요소인양 느껴지게 만들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당시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약 4:2-3)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누가복음서의 본문을 잘못 이해하여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더 간절히 오래도록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응답받지 못한 것이고, 끈질기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잘못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읽어 보면 이렇게 오해할 소지가 가득 들어있기도 합니다. 오늘 주인공은 남편을 잃은 여성과 불의한 재판관입니다. 성경은 재판관이 가난한 사람의 억울한 사정을 살펴서 불의한 자를 심판하는 정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도 존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에 가득 찬 인간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 전통에서 재판관에게 요구되는 가장 필수적인 덕목은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역대하 19장에는 유다 왕 여호사밧의 종교개혁 장면이 등장하는데 여호사밧 왕은 유다의 성읍에 재판관들을 임명하여 세우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들은 맡은 일을 할 때에 삼가 조심하여 하시오. 그대들이 하는 재판은 단순히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이 재판할 때에 그대들과 함께 계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명심하시오. 주님을 두려워하는 일이 한 순간이라도 그대들에게서 떠나지 않도록 하시오. 주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불의하지도 않으시며, 치우침도 없으시며, 뇌물을 받지도 않으시니, 재판할 때에 삼가 조심하여 하도록 하시오.”(대하 19:5-7)
이런 전통이 있지만 오늘 재판관은 이 말씀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들의 호소는 묵살해 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재판관을 상대하는 사람은 남편을 먼저 하늘로 보낸 한 여성입니다. 예수님께서 활약하시던 시절은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였고, 그래서 모든 경제적, 정치적 힘은 남성에게 있었습니다. 남편 없이 살 수밖에 없는 여성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당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당하였고, 어떤 힘도 가지지 못해 억울한 일들을 당하고도 하소연할 길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 여성 중에 하나가 재판관을 찾아 왔고, 끈질기게 자기 문제를 풀어달라고 합니다. 이 재판관은 이 여인의 끈질긴 요청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고, 결국은 들어 주고야 맙니다.
본문을 꼼꼼히 읽지 않으면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입니다. “못된 재판관도 무력한 여성의 끈질긴 간청에 굴복했듯이, 하나님께 밤낮으로 부르짖으면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다. 그러니 끈질기게 기도하라!” 이렇게 본문을 읽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본문의 반만을 읽고 나머지 반을 버린 것입니다.
[내 권리를 찾아 주시오]
도대체 이 여성은 무엇 때문에 재판관을 찾은 것일까요? 또 우리는 무엇을 하나님께 끈질기게 요구해야 할까요? 오늘 홀로 사는 이 여성은 재판관을 찾아가 줄곧 ‘내 적대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개역한글판 성경은 이 부분을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이 말이 또 오해를 사게 합니다. 이 여성이 마치 개인의 원한을 풀기 위해 재판관을 찾아 온 것처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적대자’, 또는 ‘원수’라고 번역된 단어는 ‘안티디코스’입니다. 이 말은 법정에서의 소송상대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여성은 법정에 공식적인 소송을 걸었던 것이고, 재판관에게 자기가 당한 부당하고 억울한 일에 대하여 정당한 재판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되찾아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내 권리를 찾아 달라는 말의 원어는 ‘에크디케손’인데 이것은 “정의를 바로 세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과부가 재판관을 찾아온 이유는 개인적인 원한 관계를 호소하여 재판관의 동정을 사서 원한을 풀어보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억울한 사정을 사회적으로 고발하여 정의로운 재판을 통하여 정정당당하게 권리를 회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법의 정신은 공평에 있고, 사회적 강자가 약자를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모든 사람을 지키고 보호하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법을 만들고 법을 운영하는 이들이 오히려 가진 자들과 힘 있는 자들 편에 서 있었음을 보여 주는 사례로 가득합니다.
예레미아스라는 학자는 이 비유와 비슷한 내용으로 된 19세기 후반 메소포타미아의 한 법정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법정 입구 맞은편에 재판관이 반쯤 쿠션에 묻혀 있고, 그의 주위에는 서기들이 둘러 앉아 있다. 법정 앞 부분에는 주민들이 몰려들어 각기 자기의 사건을 먼저 처리해 줄 것을 요구한다. 약삭빠른 자들은 서기들과 귓속말로 흥정을 하고 ‘뇌물’을 그들에게 슬쩍 집어넣어 주면 즉석에서 처리된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한쪽 구석에서는 어떤 가난한 여인이 큰 소리를 질러 공정하게 취급할 것을 호소하면 재판절차가 중단된다. 그 여인은 조용하라는 엄명을 받는다. 그리고 그 여인은 매일 온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 여인은 크게 소리친다. ‘나는 재판관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일 때까지 올 것이다.’ 결국 폐정 시간 직전에 재판관은 참다못해 물었다. ‘저 여인은 무엇을 원하는가?’ 그 여인의 사건이 곧 설명된다. 그녀의 외아들이 군대에 끌려갔는데도, 징세관은 그녀에게 납세를 강요했다. 이 사건은 그 때서야 곧 판결되었다. 이렇게 그녀의 끈기는 보답되었다. 만일 그 여인에게 돈이 있어서 서기에게 줄 수 있었더라면, 그녀는 훨씬 빨리 승소했을 것이다.” (예레미아스 <예수의 비유> 각주 3 참조)
각종 인맥이 동원되고 뇌물이 있어야만 제대로 된 재판을 받을 수 있던 시절,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은 재판정에서 이렇게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오늘 비유의 주인공도 끈질기게 간청하고 호소합니다. 재판관이 “못 견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여기에서 “못 견디게 하다.”로 번역된 ‘휘포피아조’라는 단어는 본래 ‘눈 밑을 때리다’라는 의미입니다. 눈 밑을 때리면 시퍼렇게 멍이 들겠지요. 그래서 ‘휘포피아조’는 얼굴을 흉측하게 만드는 것, 곧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여성이 자꾸 와서 떠들면 결국 재판관의 불의함, 무능함, 직무 태만이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결국 재판관의 명예에 손상을 입힐 것이고, 그것은 재판관의 자리를 위태롭게 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건이 어느 도시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도합니다. 고을은 도시를 말합니다. 로마제국이 다스리던 시절 도시는 로마가 거대제국을 이끌도록 하는데 매우 중요한 거점들이었고, 여기에는 후원자 제도(patron-client 구조)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인맥 쌓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후원을 하는 사람이 있고, 후원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원을 받는 사람은 후원을 하는 사람이 시키는 일들을 감당해야 하고, 후원자는 그 대가로 경제적 지원과 사회적 지위를 얻게 해 줍니다. 후원자는 자신이 후원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 큰 권력을 누릴 수 있고, 또 힘이 많은 후원자에게는 더 많은 사람이 몰림으로써 자연스런 확장이 이루어졌습니다. 후원자-피후원자의 관계 속에서 너그럽고 올바르고 넉넉한 후원자는 권력과 부와 더불어 명예까지 얻었고, 그것은 사회적 인정을 받는 매우 중요한 장치로 작동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에서 끈질기게 자기의 권리를 찾으려 했던 여성은 바로 후원자의 지위에 있던 재판관의 불의함을 폭로하고 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즉 사회적 불의에 대하여 그것을 고치고 올바른 재판을 해야 하는 재판관이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이 여성은 폭로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 이 재판관의 잘못을 들춰낸 다음에야 견디지 못한 재판관이 마지못해 재판을 들어 주는 당시의 현실을 다시 한 번 더 폭로하는 것이 오늘 이 여성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에 절망이란 없다]
따라서 오늘의 비유는 내용 없는 기도를 끈질기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의를 세우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해 나갈 때에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누군가 대신 해 주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기도가 내가 할 일은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떠넘겨 버리는 행위라면 그건 잘못된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함으로써 불의한 재판관의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려고 했던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에 나선 사람들은 이 여성처럼 낙심해선 안 된다. 불의한 재판관조차도 마음을 바꾸지 않느냐? 너희들이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잃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데 애를 쓴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이 아닙니다. 그러니 얼른 들어 주실 것이 확실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간구하고 기도하고 요청하는 것, 우리가 이루려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서는 9장 51절부터 19장 28절까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고난의 길을 가시는 장면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 비유는 바로 이 고난의 길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길로 들어서며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에 남겨진 그가 택한 자들에게 부탁합니다. “앞으로 어떠한 일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잘 견뎌 내거라.”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이 가신 길을 걸으려고 했던 첫 교인들에게 펼쳐진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벗어나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길은 고난을 수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낙심하는 일들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을 겪을 제자들에게 절망하지 말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지치지 말라고 예수님은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며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다 보면 ‘언젠가’, ‘예기치 않은 때’에 그것이 실현될 것이라는 그 믿음과 확신이 바로 새로운 질서를 여는 문이 됩니다. 기도야말로 바로 그러한 확신의 표현이며 또한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도구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는 말씀은 희망을 버리지 말고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엇을 믿음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여러분은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길에서 낙심하지 말고 끈질기게 나아가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교회에 와서 어떤 믿음의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것이며, 어떤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인가요?
[참된 믿음]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에 한 명인 폴 틸리히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말 가운데 ‘믿음’이라는 말만큼 신학에서나 대중에게 오해되고 왜곡되고 정의내리기 애매한 말은 없을 것이다. ‘믿음’은 사람을 치료하기 전에 먼저 치료되어야 할 용어이다. 오늘날 믿음은 건강하게하기보다 병을 만들어내는 용어가 되었다.” (믿음의 역동성)
그래서 이 신학자는 설교를 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모든 심각한 의심과 진리에 대한 실망 속에는 아직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진리에 대한 당신의 불안을 너무 빨리 해소하려는 사람들에게 굴복하지 마십시오. 비록 그 유혹자가 당신의 교회이든 당신이 속한 당파이든 아니면 당신의 부모 때부터의 전통이든 간에, 정말 당신 자신의 진리가 아니면 거기에 유혹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예수와 함께 갈 수 없다면 모든 심각함으로 진지한 회의주의자인 빌라도와 함께 가십시오.”
그동안 한국교회에서는 믿음을 잘못 가르쳐 왔습니다. 내용 없는 공허한 것을 맹목적으로 붙들게 만들고, 거기에 온갖 욕망과 허무맹랑한 것을 걸어 놓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반대말이 마치 의심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에 이르려면 틸리히의 말처럼 의심나는 것들을 진지하게 묻고 탐구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도 머리가 아니라 삶에서 말이지요.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참된 믿음이란 머리로 이해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 이해해서 입술로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말하는 믿음은 삶의 여정과도 같은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내디딘 첫발을 멈추지 말고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곳으로 계속 걸어가는 것, 그 과정에서 온갖 다양한 일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그 앎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쌓이고, 그렇게 저절로 믿어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이삭이 그러했고, 야곱이 그러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말씀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 백성들에게 너희는 영원토록 주님을 의지하라고 말하고, 유다 백성은 앞으로 자신들이 오직 주님의 이름만을 기억하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그동안 누구를 믿었고, 무엇을 믿었습니까? 대체적으로 현대인들은 자신을 믿고, 눈에 보이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줄 알면서 그것들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과 권력에 의지하지만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고, 주님의 율법을 따르며 주님의 이름에 희망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가장 높은 사랑의 에너지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그 사랑은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을 알려 주며, 인간은 바로 그 사랑의 길에서만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오늘 이사야는 이런 사실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 안에서 삶을 누리는 믿음의 사람은 근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반대말은 의심이 아니라 근심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믿는다면 걱정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자녀를 확실히 믿는 부모 또한 자녀에 대한 근심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기에 근심 걱정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충실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다른 것에 한 눈 파는 것에 대한 상징으로 ‘간음’이라는 말을 사용해 왔습니다. 참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 외에 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삶의 중심에 하나님의 뜻과 그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면서 자신의 관심이 돈이나, 가족, 사업이나 명예, 나 자신의 행복과 이익에 있다면 실제로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을 창조자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지금도 계속해서 매번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결코 세상을 비관적이거나 냉소적으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만약 창조주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의 삶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세상을 이끄시고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는 그 일에 동참해야 하고, 또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세상이 나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냐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세상은 그저 우리의 정신과는 무관한 물질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위해 우리들에게 기회를 주고 하나님과 함께 창조의 사역을 펼쳐가는 곳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을 내 삶에 익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느냐, 계시지 않느냐? 하는 물음은 매우 어리석은 물음입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과연 우리 부모가 계신가, 계시지 않은가를 묻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부모 없는 자식이 존재할 수 없듯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거이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가 묻는 질문은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가가 드러납니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가? 사랑하는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가? 근심 걱정 없는가? 불안한가? 이런 질문들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떤 삶으로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우리들을 믿음의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게 하여 주시고, 우리 스승 예수께서 걸으셨던 생명과 진리의 길을 걸어가게 하여 주소서. 세상의 악한 세력이 우리를 방해하고 박해한다 하더라도, 세상의 유혹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해도 끝까지 주어진 길을 가게 하여 주소서. 우리가 참된 믿음을 회복하게 하여 주소서. 제 자신의 신념을 주님의 뜻인양 착각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며 우리를 통해 펼쳐 가시는 주님의 놀라운 섭리를 찬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거룩하시고 좋으신 하나님! 이 좋은 날 우리 모두를 주님의 전에 불러 모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이 날마다 새로운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거룩한 영의 따뜻한 빛을 쪼이니 지난 삶의 구김살들이 살살 펴지고, 창조주의 자애로움과 미소로 우리의 굳어진 마음이 부드럽게 됩니다. 스승 예수의 말씀을 통해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지의 구름이 걷히고, 우리의 모든 이웃이 생명의 향기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은총에 감사하여 오늘 우리의 삶과 예물을 드립니다. 우리는 야훼 하나님만으로 충분하오니, 이 예물을 꼭 필요한 곳에 써 주소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곳에, 생명을 살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소식을 전하는 곳에 쓰이게 하소서. 특별히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생명사랑교회의 모든 사역을 통하여 우리가 날마다 진보하게 하시고, 더욱 더 주님과 가까워지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참 믿음으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 축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셔서 무지에서 지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행에서 평안으로, 오류에서 진리로, 죄에서 승리로 옮기셨습니다. 이제는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과 거룩한 영의 친밀한 사귐이 참된 믿음을 회복하여 근심 없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생명사랑 가족들에게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