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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유배문학 연구
자암 김구의 <화전별곡>에 나타난 찬가적 성격
(에세이문예24 여름호 발표)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화전별곡>의 장르적 성격
경기체가는 한글이 창제되기 이전에 한문을 주요 표현수단으로 한 우리말 문학으로 중세 후기를 여는 교술시라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사라진 문학 갈래라고 할 수 있다. 연이 나누어지고 여음이 있는 속악가사의 형식을 따라 만든 사대부들의 노래인 경기체가는 갈래상의 명칭이다. 이외에도 이 구절 전체를 따서 경기하여가,·경기하여체가라고 하기도 하고 노래 제목에 붙은 ’별곡‘ 때문에 별곡체,·별곡체가 등으로 불린다. 자암 김구의 <화전별곡>은 그가 유배를 산 곳 남해의 별칭인 ‘화전’을 빌려 남해의 다양한 정취를 섬세하면서도 호방하면서도 활기차게 노래한 작품이다. 김구의 유배 문학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화전별곡>이다. 모두 6장으로 나눠져 있는데, 그의 문학적 성숙기 때 몸담았던 남해의 풍광과 풍속, 인물 등을 시인의 시각으로 유려하게 녹여 놓았다. 김구에게는 문집인 자암집과 경기체가 <화전별곡>, 단가 5수가 전해진다. 자암집에는 남해에 유배를 와 쓴 시와 글이 여러 편 실려 있다.
경기체가는 수록 문헌의 성격에 의하면 궁중 종합공연예술인 정재의 일부로 악장적 성격을 띄고 있다. 이외에 족보 및 개인의 문집류에 수록되어 가문 찬양 등의 구실을 한 것도 있다. 경기체가는 위로는 향가의 전통 속에서 우리 민요의 영향과 중국의 송사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으며, 그 형성 시기는 대략 송사와 송악이 유입된 예종조에서 본격적으로 민요를 수집했던 의종조 사이로 본다. 경기체가의 갈래 성격은 일반적으로 율문으로 표출된 서정시가라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대해 조동일은 서정시가 아니라, 악장의 기능이 중요한 교술이라고 주장한다. 서정·서사·희곡 등으로 3분 하던 종래 분류체계에서 서정·서사·희곡·교술 등의 4분법을 취하면서 경기체가는 교술 갈래로 분류한다. 즉, 서정은 세계의 자아화로 이뤄지는데, 경기체가를 이루는 원리는 자아의 세계화로 수필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작품은 고려~조선시대 경기체가 작품은 모두 25편이 된다.
자암 김구(1488-1534)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잘 알려진 바, 13년 동안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치렀다. 1519년(중종 14년) 훈구파들에 의해 조광조와 김정 등 신진 사류들이 숙청당한 기묘사화는 변화가 필요한 조선 조정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조광조와 김정은 결국 사약을 받아 죽었고, 김구는 유배형을 받아 개령에 몇 개월 지내다가 남해로 유배지를 옮겼다. 김구는 일찍부터 학문과 서예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김구는 명필로도 명성이 높았다. 안평대군 이용, 양사언, 한호(그 유명한 한석봉이다.)와 함께 조선전기 4대 서예가로 꼽혔다. 김구의 서체는 매우 독특히 그가 살던 인수방(仁壽坊) 이름을 따서 인수체(仁壽體)라 불렸다.
중국에서 온 사신들도 그 명성을 익히 들어 조선에 오면 그의 글씨를 구하려 했을 정도로, 김구의 글씨는 독보적이고 시대와 지역의 한계를 넘어선 경지에 올랐다. 이처럼 다재다능했던 자암 김구가 그 능력과 자질을 다 꽃피우기도 전에 당쟁(黨爭)의 철퇴를 맞고 아까운 삶을 외롭고 쓸쓸하게 마감해야 했던 것은,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뭔가 회한과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불운이었다. 약관의 나이인 1507년에 생원과 진사 시험에서 모두 장원급제해 시험관을 놀라게 했다. 이후 중종의 개혁정치에 힘입어 승승장구했다. 홍문관정자와 이조정랑, 사간, 장악원정, 홍문관직제학, 성균관 사성, 동부승지와 좌승지, 부제학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조선을 도학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여기까지였다. 기묘사화 이후 김구는 기나긴 유배 생활을 겪었고, 해배된 지 얼마 후 47세를 일기로 굴곡 많은 삶을 마쳤다.
김구의 <화전별곡>은 경기체가로써 실제로 존재하는 작품외적 세계상을 작품 안에 그대로 옮겨놓았으며, 함축적인 서정과 달리 열거적 서술이 특징이다. 남해의 수려한 풍광과 남해인의 풍류적 기질을 예찬하고 있다. 후기 경기체가의 서정적 성격을 고려할 때 교술성과 서정성이 복합된 갈래라는 설도 있다. 경기체가의 형식은 대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작게는 4연, 많게는 12연까지로 구성되며 각 연의 형식이 일정한 정형양식이다. 한 연은 대개 6행으로 앞 4행, 뒤 2행의 전대절 후소절 형식이다. 전절과 후절은 엽(葉)이라는 음악 용어로 분절되어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은 율격으로 구성된 6행 1연의 작품적 질서의 원리로는 조동일이 ‘개별화’의 원리와 ‘장면화’의 원리를 제시하였다. 6행 가운데 1,2,3,5행은 개별화의 원리에 의해 열거된 사물 혹은 세계상을 담고 있으며, 4, 6행은 개별적으로 나열된 세계를 하나의 종합적인 개념으로 묶는 포괄화의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Ⅱ. <화전별곡>에 나타난 찬가적 성격
유배 하면 보통 갇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중죄인이 아닌 경우, 주거가 자유로웠다. 일찍이 남해로 유배 온 유배객들은 남해의 빼어난 풍광을 즐기며 유람하기를 즐겨하였다. 남해로 유배 온 유의양은 그의 ‘남해견문록’에서 남해 곳곳을 유람하고 수필사에 남을 기행문을 남겼다. 고려와 조선의 시인 묵객 사이에는 산수 유람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고, 견문을 찬가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자암 김구 선생도 이와 별 다를 바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첫손에 꼽히는 유배지가 남해찬가인 <화전별곡>이었다. 조선시대나 근대초기는 수필 하면 ‘기행’이나 ‘예찬’이라고 할 정도였다. 남해는 금강산만큼은 아니지만 이른바 화전이라 불릴 만큼 어디든지 흠모와 묘사의 대상이 되어 유배객의 마음과 시선을 가로잡았다.
기행은 일종의 구도 행위였다. 그들은 기행문은 ‘기(記)’ 앞에 ‘유(遊)’가 붙거나 뒤에 ‘별곡’이라는 말을 붙였다. 전국시대 송나라 출신으로서 노자와 더불어 도가사상의 대표작인 <장자>의 1편은 소(逍), 요(遙), 유(遊)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 글자 모두 놀다는 뜻이다. 도를 터득한 초월자의 생활이다. 장자는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노니는 것이 자기 철학의 핵심이었다. 우리나라의 옛 문인들에게 있어서도 ‘유(遊)’는 그냥 노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편안하게 자적(自適)하며 함께 어우러지는 것을 의미했다. 전통시대 문인들은 좋은 글을 짓기 위해 호연지기를 길러야 하고, 먼 곳으로의 여행이 필수적인데 이를 원유(遠遊)라고 했다. 한국과 중국문학의 전범인 사마천의 문장이 뛰어난 이유가 ‘먼 곳에 노닐어 그 기를 웅장하게 하였다’는 데서 찾았다.
<1장>
하늘의 끝, 땅의 변두리, 한 떨기 신선이 사는 섬.
왼쪽은 망운산(望雲山)이고, 오른쪽은 금산(錦山), 봉내와 고내 흐르고,
산천이 기묘하게 뛰어나 호걸과 준사(俊士)들이 모였나니, 인물이 번성했네.
아, 하늘 남쪽 경치가 아름다운 곳의 모습, 그것이 어떠합니까?
풍류와 주색을 즐기는 한 시절의 인걸들, 풍류와 주색을 즐기는 한 시절의 인걸들,
아, 나까지 몇 분입니까!
남해를 달리 부르는 이름 ‘일점선도(一點仙島)’는 <화전별곡> 제1장에 나오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처럼 김구는 남해를 단순히 유배지로서만 생각하지 않고 아름다운 자연과 준걸들, 가기(歌妓)와 무희(舞姬)들이 어우러져 술을 마시고 노래하는 지상의 별천지로 인식했다. 그리하여 그는 한양 도성의 번화한 삶보다는 이곳 남해에서의 소박하지만 활기찬 강호가도(江湖歌道)의 경지를 이상 세계로 여겼던 것이다. 김구는 남해에서 이곳 선비들과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고 경전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가 남해의 지식인들과 학문을 탐구했던 곳에 죽림서원(竹林書院)이 세워지기도 했다. 그렇게 지식층들과 어울리기도 했지만, 김구의 마음 한구석에는 남해의 민중들에 대한 애정도 깊었다. 그 예가 자암집에 실려 있는 <망운산기우문>이다. 남해 하면 교육열이 높은 곳으로 유명하고, 이는 섬마을에 여덟 개의 고등학교, 경남도립 남해대학이 있음이 증명한다. ‘풍류와 주색을 즐기는 한 시절의 인걸들’에 남해에 얼마나 많은 인재가 모여 살았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유유상종이라 했으니, 호걸 곁에 준사가 모이고, 준사 곁에 인걸들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제2장>
하별시위(河別侍衛)의 지란(芝蘭)와 영지(靈芝) 무늬를 새긴 품대(品帶), 나이와 관작이 아울러 높고,
박교수(朴敎授)가 취한 가운데 이리저리 손 휘젖는 버릇.
강륜(姜綸)의 잡담과 방훈(方勳)의 코 골며 자는 모습, 정기(鄭機)가 먹고 마시는 모습.
아, 품계를 지닌 벼슬아치들이 화목하게 모여 있는 모습, 그것이 어떠합니까!
하세연 씨(河世涓氏)가 재주를 뽐내면서 읊는 풍월, 하세연 씨가 재주를 뽐내면서 읊는 풍월.
아, 시를 지어 부르고 화답하는 모습, 그것이 어떠합니까!
제2장에는 나이와 관작이 높은 선비들이 잡담을 하고 마시고 풍류에 젖어 풍월을 읊고 춤추고 노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심지어 코를 골고 자는 모습, 시를 지어 부르고 이에 화답하는 선비문화가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순수하고 낭만적인 선비정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국사학계 거두인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는 신라왕국 1,000년, 조선왕조 500년이 영속할 수 있었던 이유와 광복 이후 높은 경제성장의 원인을 모두 선비정신에서 찾았다. 그는 "선비정신은 치열한 교육열과 성취욕, 근면성, 협동정신, 신바람의 에너지라는 문화적 유전인자를 후대에 남겼다"고 했다.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는 판소리와 전통무용, 서예 등 다양한 전통예술 속에서 선비정신의 진수를 찾고 있다. 학계의 선비정신에 대한 높은 관심에는 세월호 참사 이후 과도한 물질주의에 대한 사회적 자성의 분위기가 반영돼 있다는 의견도 있다. 사회지도층부터 공익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선비정신의 가르침이 현 시점에서 유용해졌다는 얘기다. 한영우 교수는 "세월호 참사는 사회 지도층이 선비정신을 잃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며 "선비정신은 모든 생명을 사랑하라는 '홍익인간'에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화전별곡 제2장에는 남해 문인들과 선비들이 펼치는 풍류 한마당에 홍익인간의 정신이 빛난다고 하겠다.
<제3장>
서옥비(徐玉非)와 고옥비(高玉非)의 검고 흰 피부 빛깔이 아주 다르고,
큰 은덕(銀德)과 작은 은덕의 늙고 젊은 것이 같지 아니하며,
강금(姜今)의 노래와 춤, 녹금(綠今)의 장고 솜씨, 몸맵시 잘난 학비(學非)와 못난 옥지(玉只).
아, 꽃나무와 수풀이 뛰어나게 아름다운 모습, 그것이 어떠합니까!
화전(花田)이라는 별호(別號)가 이름과 실상이 딱 맞아떨어지네. 화전이라는 별호가 이름과 실상이 딱 맞아떨어지네.
아, 철석같은 굳은 마음이라도 아니 끊어질 리 없더라.
제3장의 전반부에서 확연하게 상반되게 드러나는 검고 희고, 늙고 젊은, 크고 작은, 잘나고 못난 등의 이원대립항적 대비가 눈길을 끈다. 일반적으로 이름과 실상이 서로 다른 경우가 많은데, 자암 김구 선생은 남해는 이름과 실상이 같다는 데서 놀란다. 허풍과 과장이 많은 건 ‘천하제일’이 풍경을 설명하는 수식어로 많이 쓰였다는 데서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남해는 별호가 화전인데, 실제로 나무도 꽃도 많고 또 뛰어나게 아름답다고 적고 있다. 그는 왜 전반부에 대립항적인 진술을 놓았을까. 짐작해 보건데, 변증법적인 논리로 정반합의 탄탄한 결말부를 놓기 위함이 아닐까. 결국 다름은 일상이고 일반적인 현상인데, 이름과 실상도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경우가 많은데, 남해는 이름과 실상이 같더라는 걸 강조하기 위함이란 생각을 해본다. 그의 문장가다운 변모가 돋보이는 부분이라 하겠다. 다른 것은 모두 대조적인데, 남해의 비경을 이루는 ‘화목’은 모두 아름답다는 진술은 해석의 대상이 되고 재해석의 과정을 통해 모순율에서 동일률로 승화되기도 한다. ‘꽃’과 ‘나무’를 ‘남해’와 동일시하는 공명전략은 탁견이라 하겠다.
<제4장>
한원금(漢元今)은 글로써 노래하고, 정소(鄭韶)는 풀피리를 부는데,
때로 바릿대를 치고 소반도 두드리면서 때로 잔대도 치고,
머리를 흔들고 몸을 뒤치는 등 갖가지 취한 모습들.
아, 흥이 발하는 모습, 그것이 어떠합니까!
강윤원 씨(姜允元氏)가 스르렝뎅 거문고를 타는 소리, 강윤원 씨가 스르렝뎅 거문고를 타는 소리.
아, 듣고 난 뒤에야 잠이 들리라!
예술은 인간의 기본적인 정신활동이며 사고를 토대로 상상으로 이어지는 미적 활동이 아닌가. 따라서 위에 제4장 인용된 ‘글로써 노래하고’, ‘풀피리 부는데’ ‘바릿대를 치고’ ‘소반도 두드리면서’ ‘잔대도 치고’ 등의 진술에서 우리는 당시 모든 것이 악기로 변용되고, ‘머리를 흔들고’ ‘몸을 뒤치는’ 등 ‘갖가지 취한 모습들’ 속에서 한국인의 끼와 흥을 발견할 수 있다. 관악기와 타악기가 연주되면, 어떤 이는 시에 가사를 붙여 노래하고, 끝내는 현악기인 거문고까지 등장하면서 악기류는 세 가지 이상이나 된다. 남해의 풍류문화 그리고 남해인의 끼와 흥이 얼마나 큰지 짐작하고도 남겠다. 거문고까지 등장하는 걸 보면, 남해 사람들의 음악적 수준이 보통이 넘는다는 걸 알 수가 있다. ‘듣고 난 뒤에야 잠들리라’는 6행은 거문고 타는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한다. 유의양의 남해견문록을 읽다가 화가 났던 필자는 김구의 화전별곡을 읽으며 제대로 남해의 멋에 빠져본다. 경기체가가 교술에 속한다는 것만으로도, 풍류가 익숙한 형식으로 해석된다. <화전별곡>은 유희로서의 문학이라는 소중한 미덕을 갖는다. 문학은 인간을 탐구하는 예술이다. 인간은 고귀한 한편 비천하다. 인간은 이념을 찾는 한편 놀이에 취한다. 수필로서의 <화전별곡>은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동시에 언어의 놀이터로 기능한다.
<제5장>
녹파주(綠波酒)와 소국주(小麴酒)에 맥주(麥酒)와 탁주(濁酒)까지,
황금빛 닭과 흰 문어며, 유자잔(柚子盞)과 첩시대(貼匙臺)에
아, 잔에 가득 부어 술잔을 권하는 모습, 그것이 어떠합니까!
정희철씨(鄭希哲氏)는 밀밭만 지나가도 크게 취한다네, 정희철씨는 밀밭만 지나가도 크게 취한다네.
아, 어느 때에 슬픈 적이 있겠습니까!
술은 일부 민족을 제외한 거의 모든 민족이 지니고 있으며 그 용도도 다양하여 굿이나 관혼상제와 같은 의례적 행사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여러 경우에 두루 쓰이고 있다. 술은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선비들은 사람에게 유익한 것으로 생각해서 ‘백약지장(百藥之長)’이라 불렀다. 술을 마시니 근력이 생기고 묵은 병이 낫는다고 하여 음주를 권장함은 옛 기록에서 흔히 보는 예이다. 자암 김구 선생의 술에 대한 입장은 대단히 긍정적이다.『성호사설』에 주재(酒材)의 노인을 봉양하고 제사를 받드는 데에 술 이상 좋은 것이 없다고 하는 내용이나, 『청장관전서』에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의 기혈을 순환시키고 정을 펴며 예를 행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라 하는 내용은 모두 술을 인간생활에 필요한 것으로 보는 긍정적인 견해이다. 화전별곡 제5장에서는 술의 긍정적인 면이 부각되고 있다. 설날 아침에 차례를 마치고 마시는 찬술로,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고 한다. 이명주(耳明酒)를 마시며 또 어른께 만수무강을 빌며 술로 헌수하는 것도 모두 건강과 장수를 바라던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지막 행의 ‘어느 때에 슬픈 적이 있겠습니까!’라는 이 지점에서 화전별곡은 행복한 남해,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빛을 내면서 문학적 풍취를 갖는다. 맥주는 근대 이후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여기서의 맥주는 현대적 의미의 beer와 다른 것 같다.
<제6장>
서울의 번화함이야, 너는 부러우냐?
지체 높은 벼슬아치가 사는 붉은 대문, 술과 고기가 너는 좋으냐?
돌무더기 골라낸 밭에 띠로 엮은 작은 집, 계절마다 조화롭고 해마다 풍년이 드니,
향촌 사람들이 모여 여는 모임을 나는 좋아하노라!
역사상 예술은 현재 보이는 현실 너머를 상상하는 역할을 해왔다. 예술적 소양이 높은 작가는 다른 사람을 하나의 대상, 수치로 대하지 않는다. 그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로 대한다. 자암 김구는 특수한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많이 접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공감하기 쉽다. 서로의 이야기를 공감하고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는 사이에 들기도 철학적 소통도 쉽다. 김구는 제6장 첫행에서 ‘서울의 번화함이야, 너는 부러우냐?’로 시작한다. 역설적이게도 이 대목은 번화한 서울 생활보다 섬생활이 훨씬 더 낫다는 말이다. 문학의 힘은 철학적, 언어적 힘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독자의 정서에 울림을 주는 파도와도 같은 것이라 하겠다.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대목이 바로 제6장이다. ‘지체 높은 벼슬아치가 사는 붉은 대문, 술과 고기가 너는 좋으냐?’는 질문은 나는 지체 높은 벼슬아치가 사는 붉은 대문집과 그들이 먹는 술과 고기가 좋지 않다‘는 뜻이다. 남해는 섬이라 어업이 성행했지만, 골골마다 논과 밭이 있어 농사일도 주된 산업의 하나였다. 김구는 오랜 남해 유배생활을 하면서 남해의 곳곳을 유람하며 향촌 사람들과의 교유를 즐겼다. 그 실례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 <화전별곡>이다.
Ⅲ. 경기체가의 특성과 <화전별곡>의 성격
중세의 시작을 알리는 징표가 ‘심’의 문학, 서정문학의 등장이었다면, 교술시인 경기체가의 등장은 문학사에서 중세 후기를 여는 징표가 된다. 매력 포인트가 많아 ‘보물섬’이라 불리는 경남 남해군 지도를 펴놓으면 아기가 엄마 무릎 위에서 편히 놀고 모정이 보살피는 모양을 닮았다고 한다. 아름다운 풍경, 건강한 미식, 풍류문화를 즐기면서 독자는 <화전별곡>을 보고 남해가 신선이 사는 곳이 아닌가하는 착각에 빠졌을 것이다. 김구의 <화전별곡>은 남해찬가의 성격을 많이 띤다. 경기체가는 고려시대 문학의 일종이지만 거의 온통 한문이라 상류층이나 즐겼고 일반백성들에게 퍼지지 못했다. 거기다가 지식이나 재산 같은 것을 과시하면서 자기와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자랑하는 내용인 것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고려가요에 비해 경기체가들은 문학적인 가치를 높게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어 아쉽다.
경기체가의 이런 특징은 이 노래의 주된 창작자인 신진사대부의 존재적 특성에서 비롯된다. 신진사대부는 기존 기득권층인 권문세족에 반발해 등장하였다. 학문적 소양이 높고 행정 실무에 밝은 관료적 문인으로서 무신정권 때 등용돼 무신들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였다. 가문이 한미한 지방 향리 출신이 많았는데 고려 후기에 접어들며 중소지주 계층으로 성장하였고 무신 정권의 붕괴 후 활발히 중앙정계에 진출하며 더욱 힘을 키웠다. 사회의 새로운 주류 세력이 되고자 했던 그들은 심(心)과 리(理)보다 물(物)을 중시하였고 내면보다 외부에 치중하였는데 호탕하게 사물을 호명하는 경기체가의 형식은 자암의 진취성을 담기에 딱 들어맞는 그릇으로 보인다. 고려 말 발생하여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조까지 근 350년 동안 귀족 시가로 생명을 영위했던 <화전별곡>은 자암 김구의 남해 견문록이자 이념의 그릇이었다고 하겠다.
결론적으로 <화전별곡>은 유배문학의 산실인 남해의 금산과 망운산의 풍광, 그리고 유배객으로 있으면서 경험한 남해사람들의 풍류적 기질과 낭만적 생활의 예찬적 성격을 담고 있는 수필이다. 자암은 남해의 아름다움과 남해인들의 호방함, 순수함 등이 한국인의 멋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고 남해와 남해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착을 드러낸다. 또한 조선의 주거문화를 성찰하면서 도회지만 곱게 보려는 우리 사회의 풍조를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풍류와 낭만이 있는 시골생활이 좋다는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자암은 화전 속에서 숨 막히는 환희와 법열의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름다운 자연이었던 남해는 배례의 성스러운 대상이 되었다. 자암의 경우는 순례로, 예찬으로 남해에 접근하였던 것이다. 화전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에는 반드시 풍류가 있었다. 음주가무가 있었다. ‘화전별곡’에서 자암은 남해를 ‘일점선도’라고 했다. 꽃나무와 수풀로 형성되는 산야의 구성과 전체적인 조화에 이르기까지 그 빼어난 경치를 묘사해서 신선이 살 만한 곳으로 예찬하고 있다. 자암에게 남해는 신화적 힘이 보존되어 있는 숭고한 대상이다. 자암 김구에게 남해인은 모두가 준걸이고, 인걸이고, 호걸이고, 준사였다. 남해찬가 <화전별곡>을 쓴 자암은 수필가였고, 남해에 대해서도 모범적인 유배객이었다. 남해의 자연미를 숭고의 차원으로 고양시키고, 이를 발판 삼아 선비정신과 풍류정신이라는 문화적 실체에 접근하였다고 하겠다.
참조
한국민족문학대백과사전 <경기체가> 부분
나무위키 경기체가
손은주, 한국경제 문학이야기17 <한림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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