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35] 홍순애 (洪順愛) - 꿈에 그리던 주님을 뵈옵고
10. 대구와 제주도에서의 생활 - 2
12 친정어머니께서 이렇게 믿고 나가다는 안 되겠다고 하셔서 제주도로 들어갔다. 어머니도 전학을 시켰다. 어머니도 소학교만 졸업한 다음에는 도인을 만들려고 생각했다. 13 제주도에 가서도 삼시 납작 보리쌀을 불려가지고 무김치와 같이 먹었다. 그러면서도 그냥 있지 않았다. 제주도의 불쌍한 시민들에게 학생복과 와이셔츠 같은 것을 싸게 해주었다. 화식하는 어머니를 위해서는 좁쌀을 받아다가 밥을 해드렸다. 14 그동안에 제주도에 갔었던 남편은 기도하는 가운데 “내가 마신 잔을 너도 마시지 않겠느냐?”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길래 “마시겠습니다”라고 대답하니 “내가 마시던 잔을 너도 마셔보라”라고 하셔서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혔었다고 한다.
15 나중에 남편이 십자가에 못 박혔던 자리에 가보았다. 가시 면류관을 썼다가 파묻어 둔 자리에 가 보니 “나는 하늘의 선발대로 나선다”라고 써놓은 종이도 있었다. 선발대로 나섰는데 아직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16 그분은 예수님의 그 아픈 심정을 체휼하기 위해 십자가에까지 못 박혔는데 이까짓 생식 정도야 못 하겠느냐 하면서 나는 생식하는 중에도 불쌍한 농민들이 고생하는 것을 맛본다고 보리갈이도 해주어 보았다.
17 보리쌀에 김칫국만 먹고 하니 다리도 붓고 기가 막히게 힘이 들었다. 짐 지고 가는 사람이 있으면 집까지 져다 주었다. 그 사람들은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이 있느냐고 했다. 우리는 전도는 하지 않았지만 실행으로 그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었다.
18 그렇게 생식을 하면서 9개월을 지냈다. 어머니에게도 “생식 좀 해보겠느냐?” 하니까 못하시겠다는 것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아들 며느리가 고대광실 높은 집에서 잘 살고 있었지만, 아들 집에서 살기 싫어하셨다. 딸인 나와 맞지 며느리와 맞지 않는다고 부득이 제주도에 오시겠다고 해서 모셔 와서 함께 살고 있었다. 19 화식하는 분이 한 분 늘어서 나는 짐이 더 무거워졌다. 화식하는 분을 위해 나무도 해와야 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을 정신없이 하다 보면 어느덧 해가 다 지곤 했다. 육신은 형편없이 말랐다. 그렇지만 정신은 아주 깨끗하고 맑았다. 20 그렇게 9개월을 보내니 동생에게서 ‘어머니를 모시고 빨리 육지로 나오라’라는 편지가 왔다. 처음에는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재차 당장에 모시고 올라오라는 편지가 왔다. 할 수 없이 육지로 나가야 할 뜻이 있는가 보다 생각하고 제주도를 나왔다.
21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제주도에서 잘 나왔다. 그때 나오지 않았으면 제주도에서 그냥 살았을 것이기 때문에…. 내 동생이 나를 위해 역사를 해 준 셈이다. 22 춘천으로 나왔다. 당시 내 동생은 춘천에서 보급 창장으로 있었다. 나는 춘천에 가서도 장사를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