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설이다. 아이들은 밖을 내 달리며 환호성이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흥분에 젖어 어깨가 절로 들썩거린다. 하늘을 바라보니 하얀 털 송이가 낱장으로 분화되어 훨훨 날고 있다. 저 가벼운 비화, 잠시 유년의 창을 열고 상념에 들어있는데 문자가 왔다.
“도로테아 사망, 29일 장례” 뜻밖의 소식을 받고 보니 벌렁벌렁 가슴이 뛴다. 밖을 내다보니 함박눈이 번 듯 번 듯, 마치 영혼의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모습이다. 연이틀 따뜻한 날씨를 보이더니 갑자기 그녀의 부음 소식에 살결이 아려온다. 겨울 들판을 쓸고 가는 바람이 뼈를 저린 듯하다.
유년기에 계모 밑에서 자란 어둠으로 그녀는 늘 마음 안에 그늘이 져 있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학교 공부도 제대로 할 처지가 못 되어 주경야독으로 겨우 야간 고등학교를 나왔다.
결혼 후의 생활도 여전히 어려웠다. 두 아들을 두었으나 아이들은 성장 과정에 있었고 남편의 실직으로 생활이 궁핍했다. 그녀가 겨우 몸을 일으켜 일을 해서 생계를 이어가는 처지였다.
그녀는 일 년 전 암이라는 병을 선고받고도 살림이 어렵다는 이유로 수술은커녕 병원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여러 가지 식이요법으로 병마와 싸우더니 끝내 이겨내지 못했다. 병원 대신 신앙에 의지했다.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고 낫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조금씩 꺼져가는 생의 불을 잡고 성모님을 부르며 손에든 묵주를 놓지 않았다.
지친 몸에 혼곤한 눈은 늘 생기를 잃고 풀이 죽어 측 늘어진 모습을 살아가던 그녀에게 딸이라도 있었으면 마음 한구석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당장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지탱하고 야근까지 하며 제대로 쉬지 못한 생활을 이어갔으니 결국 암은 그녀를 완전 지배하고 말았다. 어쩌면 애초부터 야윈 가슴 언저리에 암이라는 씨앗이 집을 지어 함께 해 왔으리라.
장례식 날은 공교롭게도 주일이었다. 그때 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요일이 당직이었다. 나 대신 누가 내 일자리를 채워줄 사람이 없었다. 전날 퇴근해서 갈 수도 있었지만 차마 그녀의 영정사진을 볼 수가 없었다.
주일이라 장례미사를 성전에서 드리지 못하고, 전날 토요일 사도 예절(간단한 장례 절차)을 바쳤다. 병원에서 이승의 마지막 시간의 정리를 하고 있을 때 친구가 함께 가보자고 연락이 왔는데 나는 가지 않았다. 병마에 시들어 마른풀처럼 사위어지고 처연해진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건강했을 때의 모습 그대로 내 마음에 담아두고 싶어서였다.
몇몇 친구가 떠나기 하루 전날 다녀왔는데 바로 그 시간에 반조현상을 보이더라고 했다. 죽음 직전에 잠시 의식이 돌아와 건강이 회복된 것처럼 보이는 게 반조현상이다. 어떤 친구는 도로데아가 많이 좋아진 것 같더라고 했다.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자신을 총정리하는 인생 최후의 명징한 순간, 그때 자연과의 일치, 자기 자신과의 화해, 그리고 다른 이 와의 화해 작업도 마무리한다.
성당 친구들이 모여서 지난날 함께한 즐거웠던 일들을 떠 올리며 잘못한 일을 서로 화해하며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그때 친구들의 말을 듣고 미소를 짓더니 눈이 가물가물 혼수상태로 들어가 잠을 자더라는 것이다. 그것이 친구들이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바로 뒷날 신 새벽, 그녀는 홀연히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렇게 빨리 떠날 줄이야’ 가보지 못했다는 회한이 가슴을 쓸었다.
“마리아 이거 예쁘지, 누가 내게 준 겨울 털 코트인데 나는 죽었다, 깨나도 이런 옷은 사 입어볼 수 없어.”라며 몸에 딱 맞는 까만 털 코트를 걸치고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아주 환하게 웃던 그녀. 그 모습이 내가 본 마지막 모습이다. 얻어 입은 것이라도, 그저 좋아서 밝게 소리 내어 웃던 순수한 그녀의 행복한 미소가 가슴에 젖는다.
하늘에서 하얀 나비 떼 모양인 눈발의 군무가 끝없이 펼쳐진다. 하얀 나비는 곡예를 하다 바람에 날려 땅으로 떨어지고, 다시 훨훨 하늘로 올라간다. 상승과 하락으로 비화하는 모습이 슬프다.
친구는 저 하얀 나비를 타고 하늘나라로 갔을까. 산다는 게 뭘까. 죽음은 또한 뭘까. 이승과 저승의 길은 과연 어떤 걸까. 사람은 나이 들수록 더 슬프다고 했던가. 마음이 맑아 슬프다고 했던가.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이 젊은 나이에 떠나는 것이 제일 큰 슬픔이 아닐까.
내 마음이 찬바람 속을 자꾸만 휩쓸려 간다. 꽁꽁 언 영하의 날씨는 언제 풀릴지. 한창의 나이에 가슴 한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추운 겨울날 이승의 홀연히 떠난 친구를 생각하니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사랑하는 도로테아’ 부디 하늘나라에서 아프지 말고, 예쁜 옷도 마음대로 사 입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오늘도 마리아는 너를 위해 기도한다.
첫댓글 가슴아픈 얘기지만 우리 인간에겐 한번씩은 치러야 할 일이라 생각하시고 마음 다지십시요. 주님 앞에 가셨을 것입니다.
가신이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