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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뚜렷하게 느껴지는 게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기회가 줄어든다는 거예요. 우리는 보통 나이가 들면 재력이 많아지고 또 지위도 오르고 시간의 여유가 생기니까 기회가 많아질 거라 생각합니다.
근데 실제로는 기회가 줄어듭니다. 그래서 요즘은 누군가가 저에게 기회를 주면 예전보다 훨씬 더 감사해야 하고 훨씬 더 고마워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젊다고 해서 기회가 자연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노력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지금도 여러분과 제가 잡지 못한 온갖 종류의 기회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지난날 놓친 기회 중에 그냥 가장 아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저희 친척들이 미국에 많이 계셨어요. 제가 중학교 시절에 저에게 제가 미국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추첨이라는 제도에 의해서 이렇게 미국을 갈 때인데 저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어요.
근데 저도 이게 인생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몰랐고, 우리 부모님들도 이것이 인생에 있어서 어떤 의미인지를 전혀 몰랐습니다. 갈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인생 최대의 기회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저나 부모님은 아는 것도 없었고 더 나아가서 미지에 대한 두려움도 무척 많았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기회가 제 중학교 아마 1학년 때로 기억되는데 제 인생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수많은 기회들이 여러분과 저의 삶을 스쳐 지나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개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죽었던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되는 딸을 예수님께서 살리신 이야기고, 두 번째 이야기는 12의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예수님께서 고치신 이야기입니다.
제가 두 이야기를 짧게 설명하면서 이 짧은 설명 안에 어떤 포인트를 하나 뒀어요. 이 이야기의 포인트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제가 반복해서 언급하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누굴까요?
이 두 개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해당 장도 아니고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아닙니다.
아마 눈치를 채셨겠지만 예수님이에요. 우리가 잘못하면 회당장이나 혈류증을 앓던 여인에게 집중하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두 사람의 사건을 통해서 진짜로 집중해야 될 분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열두해 혈증을 앓고 있던 여인을 예수님이 고치신 이야기에는 조금 특별함이 있어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고침을 받은 시간은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그의 집에 갈 때였다는 거예요. 42절 상황을 보면 이 상황이 되게 긴박했어요. 그래서 12의 혈증 앓은 여인이 그러니까 끼어들어갈 자리를 차고 앉을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전혀 없을 때였습니다. 시간이 되게 긴박했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보면 지금은 12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시간이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은 백부장의 시간이지 12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시간이 아니라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결코 기회가 주어지기 어려운 시간이라는 겁니다. 42절을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이에 자기에게 12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드더라.
회당장 야이로의 12세 살 된 딸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상황이 아주 긴박하게 진행이 되고 있었어요. 이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전혀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혈증을 앓던 여인이 고침을 받았어요. 자기의 시간도 아니고 자기가 파고 들어갈 공간도 없었고, 자기에게 허락된 영역이 아닌 시간에 이 여인은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여기에도 두 가지 포인트가 있어요. 하나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자신의 소원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표현했기 때문에 고침을 받았다는 거예요. 얼마나 병 낫기를 바랐는지, 병이 낫는 것을 얼마나 간절히 소원했는지를 표현했기 때문에 고침을 받았다는 거예요.
자기의 시간도 아니고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도 없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간절함을 예수님께 표현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여인의 질병을 고쳤다는 거예요.
또 하나 예수님에게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나 죽은 상황은 별 문제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상황에 매여요. 큰일 났다.
근데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이런 상황이나 저런 상황이나 큰 차이가 없다는 거예요. 중요한 건 그런 상황적인 변화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한 거예요.
상황의 변화에 되게 민감해요. 좀 가난해지거나 좀 부해지거나 좀 어려워지거나 큰 일이 생기면 그 상황에 따라서 인생이 막 요동을 쳐요.
근데 예수님에게서 그러는 그런 상황의 변화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 상황 앞에 있는 우리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믿음의 소유자인 것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이 훨씬 상황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거예요. 상황의 전개는 중요하지 않아요. 점점점 교회가 연약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도 않고 점점 더 우리 가정에 문제가 많아지는 것도 중요하지도 않다는 거예요. 지금 내가 하나님께 어떤 믿음의 소유자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기 위해서 그의 집에 가실 때 많은 무리들이 밀려들었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일행에 끼어들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어요. 상황은 긴박했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누구든 이 시간에 이 장소에 쉽게 뛰어들기는 어려울 시간이었다는 거예요.
말씀에 보면 밀려들었다는 표현이 있어요. 이 표현으로 봐서는 혈루증 앓던 여인이 파고들 공간이 전혀 없었다는 거예요. 시간도 없었고 공간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이 여인의 자리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이 여인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시간이고 않을 장소라는 거예요. 어쩌면 노력해도 안 된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측을 하고 노력을 안 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예수님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었다는 건 대부분 고침을 받기 위해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많은 기적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잖아요. 그러면 이 여인처럼 자기 병을 고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없겠냐고요.
근데 보니까 자기 시간이 아니에요. 긴박하게 가고 있었고 자기가 파고들 공간도 없었어요. 왜냐하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어요. 어쩌면 그래서 수많은 병낫기를 구했던 사람들이 그냥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근데 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그렇게 그 상황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죠. 자기의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자기가 파고들 공간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손을 뻗쳐서 펼쳐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여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과 기회가 주어졌어요. 어떻게 보면 이 여인이 강제로 빼앗은 것과 마찬가지예요. 자기의 시간도 아니고 자기가 파고들 공간도 없었어요. 근데 강제로 손을 펼쳐서 예수님의 옷을 잡았다는 것은 이 여인이 시간을 빼앗고 기회를 빼앗았기 때문에 자기의 시간이 되고 자기의 기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여인의 간절함 때문입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가까스로 발견한 방법은 예수님의 옷에 옷을 만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다른 기회가 이 여인에게 전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순간 이 여인의 혈루증이 고쳐졌어요. 피가 흘러오는 그 근원에 피가 말라버렸던 거예요. 표현에 따르면 예수님의 능력이 예수님에게서 이 여인으로 흘러갔다 이렇게 됐습니다. 따라 하겠습니다.
간절함의 다른 이름은 신뢰입니다.
한 번 더 하겠습니다.
간절함의 다른 이름은 신뢰입니다.
이 여인이 왜 이 간절함을 놓치지 않고 있었을까요?
여러분 이거 시간이 좀 지나고 예수 믿은 지 오래되면 목사로부터 대부분의 성도들이 간절함이 사라져요. 이 간절함이 사라진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점점 더 무너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에 정말 병 고치기를 낳기를 바란다면 이 간절함이 무너지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자꾸 약해져 가고 있어요. 신뢰가 무너져 가고 있고 우리의 믿음이 무너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머리를 뚫고 예수님께 손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은 고치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고, 예수님의 옷을 만져서라도 자신의 후유증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이런 행동을 믿음이라고 표현하셨어요. 48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이르시되 따라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예수님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을 믿음으로 여겼다는 거예요. 여러분 간절함은 유치한 행동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요. 여러분 우리가 유치한 행동이 부끄럽잖아요. 나이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하면 부끄러워요.
근데 간절하면 간절하게 되면 이런 유치한 행동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는 거예요. 근데 간절함이 사라지면 부끄러운 거예요. 큰소리로 기도하는 것도 부끄럽고 소리쳐 기도하는 것도 부끄럽고, 울면서 기도하는 것도 부끄럽고, 손을 들어서 기도하는 것도 부끄럽고 다 부끄러워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의 표현이 왜 부끄러워졌느냐 성도들에게서 간절함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기 때문인 거예요.
정말 간절하면 유치한 행동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유치하게 여길 수 있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의 이런 행동을 믿음이라고 여겼어요. 믿음은 간절함은 때때로 유치한 말과 유치한 행동과 유치한 결정을 하게 만들어요.
여러분 이거 정말 간절해 보십시오. 유치한 결정을 해요. 말도 안 되는 결정을 해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유대인이 가까이하면 안 되는 불결한 여인이었어요. 이 여인의 삶이나 이 여인의 상황은 예수님께 손을 내미는 것도 안 되는 상황이었고,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것도 안 되는 상황이었고, 많은 무리가 있는 곳에 가는 것도 안 되는 상황이었어요.
혈루증은 피가 멈추지 않는 병입니다. 그래서 혈루증에 걸리면 부정하다고 여겼고요.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했고 다른 사람들과 접촉도 불가했어요. 종교적으로는 혈루증을 앓던 이 여인은 예수님께 나오면 안 되는 연인이었습니다. 만약에 이 사실이 발각이 되었다면 그녀는 율법에 의해서 정죄를 받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여인이 예수님을 향해 나왔던 것. 손을 내밀었던 것은 정제를 받을 각오를 하고 한 거예요. 심판을 받을 각오를 하고 그 일을 한 거예요.
그런데도 예수님께 손을 내밀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여인의 상황을 아셨기 때문에 여인의 행동을 범죄라고 하지도 않았고요. 여인에게 종교적인 구위를 율법을 어겼다고 하지도 않았어요. 그를 책망하거나 그녀를 꾸짖지도 않으셨어요. 오히려 그녀의 행동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혈루증을 고쳐줬을 뿐만 아니라 이 여인의 완전히 고침받았던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선포해 주셨어요. 그러니까 질병에도 자유를 얻고 그동안 자기를 구속하고 있던 종교적인 억압으로부터도 이제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됐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인의 간절함이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는 시간을 자신의 시간으로 만들었고,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는 기회를 자기의 기회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먼저 붙잡아야 할 사실은 예수님은 기회를 주시는 분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에게 충성하면 사람도 기회를 줘요. 근데 그 기회가 오래 가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사람이 변하기 때문이에요. 제가 사람에게 좀 많이 집중하지 않은 이유가 그래요. 어쩌면 저도 좀 더 사람에게 집중했다면 인간적인 기회를 얻을 기회는 많았을지도 몰라요.
제가 작은 교회에 있지는 않았고 또 큰 교회 부목사로 오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열심히 사역해서 그 당시에 저를 돕던 분들이 아주 많았어요. 저는 떠나고 그분들과 연락도 일치하지도 않고 가끔 한두 번 했는데 너무 오랜 기억이고 또 그분들이 아프고 암에 걸리면 그래도 그냥 친한 생각에 한 번쯤은 기도해야지 아고라 해서 전화해서 기도해 주고 이 정도인 거지 지속적인 만남을 유지하는 건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거예요.
일단은 여기 계신 우리 여전도사님이 그 증거 중에 한 사람이고요. 제가 그 교회와 연락한 사람이 없어요. 저의 이런 행동 중에 하나는 사람은 변한다는 거예요. 기회를 주는 것 같지만 기회는 곧 사라져요. 그래서 제가 사람을 더 의지하거나 신뢰하지 않아서 어쩌면 여러분 보시기에는 덜 인간적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조금 메마른 목회자로. 왜냐하면 사람에게 크게 사정을 하지 않으니까
제가 뭐 여행을 간다고 해서 여러분에게 뭔가 부탁을 해본 적이 있나요?
없었잖아요. 선교를 가든 그냥 광고하고 그냥 가는 거죠. 우리가 잘 알아야 할 것은 기회는 하나님이 주신다는 거예요.
사람의 기회는 금방 사라집니다. 근데 하나님이 주신 기회는 사라지지도 않고요. 내 삶에 오랫동안 남아서 내가 범죄하지 않는 한 그것은 나의 기회로 남아 있게 돼요. 그래서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꼭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은 내 인생에 기회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근데 알아야 될 사실이 또 하나 있어요. 성경 곳곳에 기회라는 단어 옆에 보면 사탄이 꼭 등장해요.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일단 리서치를 좀 해요. 말씀 준비할 때 그 기회라는 단어를 딱 쳤어요. 성경에서 요즘에 이게 막 너무 프로그램이 좋아서 제 컴퓨터도 두 개의 성경 프롬이 깔려 있어요. 치면 금방 자료를 찾아요. 그래서 기열이라는 단어를 딱 쳤더니 신기하게 기회가 단어 있는 모든 이야기 옆에는 거의 대부분은 사탄이 있더라고요.
여러분 놀랍죠. 왜 기어의 이야기 옆에 왜 굳이 사탄이 있을까?
사탄은 첫 번째로는 우리의 기회를 빼앗거나 기회를 악용하기 위해서 내 옆에서 대기 중인 거죠. 내 인생의 기회를 악용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 내 인생에서 대기 중인 존재가 사탄인 거예요. 성경에 많은 기회라는 단어 옆에는 사탄이라는 단어도 함께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진정한 기회를 잃지 않으려면 먼저 사탄을 대적해야 돼요. 사탄은 우리가 한눈 파는 사이에 기회를 빼앗아 갑니다.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빼앗아 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늘 깨어 기도해야 사단이 우리의 기회를 우리 교회에게 예수님이 주신 기회를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때로는 우리의 유치한 믿음의 결단과 헌신들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회를 얻게 하고 하나님의 시간에 주인공이 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주시는 기회를 얻은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병도 고치게 되었고, 그동안 질병으로 인해 받았던 마음과 경제적인 고통으로부터도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를 속박하는 종교적인 규범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새벽에 잠깐 이 말씀을 이미 전했어요.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특별히 새벽에도 그렇고 또 오늘 오전도 그렇지만 어떤 마음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회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이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성도들에게 이 간절한 마음만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돈이 많아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간절함이 사라지지 않고, 건강해도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이 사라지지 않고, 삶의 여유와 평안이 있어도 이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만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생겼어요.
왜냐하면 그래야 하나님의 기회가 나에게 주어지고 하나님의 시간도 나에게 주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복잡한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 예수를 오래 믿었는데도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복잡한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 불순종해요.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이 정리가 돼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 사람들은 평생 교회를 오래 다녀도 순종할 수 없습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많은 의사들에게도 고통을 받았고요. 많은 신앙인들에게도 고통을 받았어요. 이제 물질을 다 흡입했기 때문에 더 이상 소망 둘 곳도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혈루증을 든 여인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눈에 들어오자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정리된 거예요. 이분은 나에게 기회를 주실 수 있는 분, 이분은 나를 고칠 수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정리가 일어난 거예요.
사람이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 계속 우물쭈물해요. 계속 우물쭈물해요. 교회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 이 교회를 섬길까 말까 우물쭈물 해요. 사람에 대한 생각도 정리되지 않으면 계속 우물쭈물해요. 그래서 관계가 깊어지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계속 의심하니까 교회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 사람들 중심에 보면 의심이 있어요. 그래서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 거예요.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도 우리가 정확하게 볼 수도 없고, 교회에 대한 우리의 행동도 또한 정리되지도 않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행동도 정리가 되지 않아요. 그래서 늘 마음속에 불편함과 불안함과 많은 생각들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었어요. 그래서 믿음의 결단을 하게 됐고, 그래서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그 자리에 가면 율법의 정제를 받게 됨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정리되었기 때문에 손을 내밀었던 거예요. 예수님 앞에 등장한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손을 만진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소를 혼자서 이 여인을 고친 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이 여인의 손이 예수님의 옷깃에만 닿았을 뿐인 거예요.
이런 믿음의 결단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을 그녀의 시간으로 만들게 됐던 것입니다. 이거 예수님의 그리스도의 기회도 그녀의 기회가 됐어요. 예수는 여인에게 내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셨지만 정황상 본문을 잘 살피면 이 여인의 믿음이 아주 대단했던 것처럼 보이진 않아요. 어떤 면에서 보면 되게 대단했다고 보이지만 또 성경의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렇게 막 엄청난 믿음이라고 보지 않는 각도도 말씀을 보면 이렇게 있어요.
제가 왜 이렇게 이야기하냐 하면 성도들은 뭔가 큰 결단을 해야 하나님의 시간이 내 시간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작은 몸짓도 하나님의 시간을 나의 시간으로 하나님의 기회를 나의 기회로 만들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서 성경의 반대적인 영역을 잠깐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여인의 이런 행동들이 이런 거잖아요. 앞에 딱 등장한 것도 아니잖아요. 무릎을 꿇고 안수를 받은 것도 아니잖아요. 예수님 혈루증 걸렸는데 제가 이걸 뚫고 와서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나를 고쳐주십시오 이런 것도 아니에요. 예수님이 나를 고쳐 주신다면 믿습니다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한 번 한 번 뒤에서 어떻든 손을 내민 게 전부였어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기대했던 이 여인이 믿음이 잘 표현되고 잘 발현되고 잘 드러나지는 않았어요. 근데도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시간을 줬고 기회를 줬다는 거예요.
저는 우리 목장 교회가 어쩌면 예수님의 시간이 우리 교회를 이렇게 어떤 면에서는 지나갔을 수도 있을지 몰라요.
만약에 그렇다면 지나간 시간을 우리가 어떻게 가져올 수 있을까요?
다시 간절함을 회복하면 비록 지금 나의 시간이 아닐지라도 나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는 거예요. 우리의 믿음의 결단이 예수님의 시간을 우리의 시간으로 우리 목장 교회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지금은 내게 주어진 기회가 아닐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고 그것이 간절함으로 표현이 되면 비록 지금은 나의 기회가 아니지만 예수님이 나에게 기회를 줄 수도 있다는 거예요.
저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목장 교회가 예수님의 기회를 허락받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제 기회를 얻는 일이 점점 없어져요. 우리에게 기회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에게 간절함을 다시 드러내십시오. 예수님의 내 생각을 빨리 정리하십시오.
신앙에 대한 생각을 빨리 정리하십시오. 상황에 이끌려서 여러 상황에 여러분의 머리를 맡겨두지 마시고, 상황에 여러분의 마음을 맡겨두지 마시고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말이 뚜렷해지게 되고 그런 공동체에게 예수님은 그들의 시간이 아닐지라도 그들의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허락해 주실 거예요.
저는 제가 내가 시간을 만들거나 기회를 만들 만큼은 훌륭한 목회자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도움을 요청하는 거예요. 설령 우리에게 기회가 지나갔다 하더라도 태준이가 마음을 모아서 지나간 기회라도 다시 우리 교회로 가져오자 이런 열정이 이 세상이 다시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그런 기회가 주었으면 좋겠어요. 이 기회가 다 지나갔어요. 누가 봐도 목사님 저는 더 이상 이제 어떤 기회를 갖기는 어려워요. 이제 이렇게 살다가 제가 천국 가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이런 말씀하지 마시고 이 여인처럼 다시 예수님에 대한 간절함을 회복하셔서 지나간 기회라도 다시 여러분의 기회로 만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시간이 아닐지라도 여러분 시간 되게 하십시오. 우리의 시간이 아닐지라도 우리의 시간 되게 하십시오. 예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에요. 지나간 기회를 다시 여러분에게 갖다 놓으실 것이고, 놓쳐버린 시간을 다시 갖다 놓고 우리에게 기회를 또 한 번 주실 거예요.
그리고 다시 기도해 봐라 다시 열심을 내봐라 다시 부지런해 봐라 다시 열심을 내서 주의 전을 섬겨봐라고 하실 것입니다. 오늘이 그런 결단이 일어나는 예배의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