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나무위키 https://share.google/MxKVQJOJjtEkWRmOf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일본의 소설가
1892년 출생1927년 사망
주오구(도쿄) 출신 인물
일본의 자살한 인물자살한 작가
도쿄대학 출신약물
아사히 신문 선정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 5위
1. 개요
인생 비극의 제1막은, 부모와 자식이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일본인 소설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다이쇼 시대의 대표 작가.[3]
나쓰메 소세키와 모리 오가이가 메이지 정신의 화신이라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다이쇼 정신의 화신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로서의 활동 기간도 다이쇼 시대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 10년이 조금 넘는 짧은 활동 기간 동안 많은 명작을 써내었다.
합리주의와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였고, 자살로 인해 문단에 큰 충격을 안긴 작가이다.
2. 생애
본래 성은 니하라(新原)이나, 태어나기 전 누나 하츠코가 요절해버렸고 이에 충격을 받은 어머니인 후쿠가 미쳐버려 양육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자 어른들의 고민 끝에, 외삼촌에게 입양되어 외가의 성인 아쿠타가와를 쓰게 된다.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불륜, 누나의 요절로 인한 어머니의 발광 때문에 제대로 된 양육을 받을 수 없어서라고 한다. 양아버지인 외삼촌이 에도 시대 문예에 관심이 있어, 그에 영향을 받았다.
11살 무렵, 어머니 후쿠가 세상을 떠났다.
1913년,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했다.
1914년, 고등학교 동창이던 구메 마사오(久米正雄), 기쿠치 간(菊池寬)[4] 등과 제3차 '신사조(新思潮)'를 발간하여 첫 작품 〈노년〉(老年)을 발표하였다.
이어서 1915년, '데이코쿠분가쿠(帝国文学)'에 대표작 〈나생문〉을 발표하고, 그해에 나쓰메 소세키의 '목요회'[5]에 참석하게 된다.
1916년, 제4차 신사조에 〈코〉(鼻)를, 신소설에 〈참마죽〉(芋粥)을 발표하여, 나쓰메 소세키의 격찬을 받으며 문단에 진출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해군기관학교에 들어가 영어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영어강의를 했다. 그러다 1년 뒤 교직에서 물러났고[6], 오사카의 마이니치 신문[7]에 사우(社友)[8]로 들어가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돌입하며, 해외 특파원도 겸하는 등, 이 시기가 아쿠타가와에게 있어서 가장 윤택한 시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본래 늑막염, 위장병 등으로 병약했던 체질과, 죽은 어머니의 발광에 따른 신경쇠약의 악화[9]로 인해 요양생활을 하게 된다. 거기에 집안사정[10], 만년에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두 등 시대의 동향에 적응하지 못하여 회의와 초조, 불안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이 시점에 동료 문인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사이토 모키치에게 진료를 받고, 조언을 듣기도 했다. 사이토 모키치는 아쿠타가와의 신경쇠약과 불면증을 걱정하며 수면제인 바르비탈을 처방해줬는데, 이는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
모키치의 진료에도 결국 심한 신경쇠약에 빠져 몇몇 지인들에게 편지와 원고, 그리고 〈나의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僕の将来についたぼんやりとした不安)이라는 내용이 담긴 유서 <어느 옛 벗에게 남기는 수기(或舊友へ送る手記)>를 남기고 1927년 7월 24일 35세의 젊은 나이에 수면제 바르비탈 과다 복용으로 음독 자살하였다.
같은 소세키 문하의 친구이자 선배인 우치다 햣켄(内田百閒)에 따르면, 아쿠타가와가 자살하기 며칠 전 찾아갔을 때 그는 그 시점에 이미 다량의 수면제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깨어 있는가 싶으면 어느샌가 다시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11]
또한 아쿠타가와는 죽기 직전 즈음에 가까운 지인과 친구들을 방문했으나 결국 모두 만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는데, 7월 초에는 기쿠치 칸을 만나려고 두 차례 문예춘추사를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했고[12], 자살하기 바로 전날에는 한동네에 살았던 시인 무로오 사이세이(室生犀星)를 찾아갔으나, 그때 사이세이는 잡지 취재로 우에노에 나가 있었던지라 역시 만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사이세이는 당시 아쿠타가와를 만나지 못했던 일을 두고 "만약 내가 외출하지 않았다면 아쿠타가와 군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살을 말리고 싶었다"라며 만년까지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죽기 전, 친구였던 구메 마사오에게 〈어떤 바보의 일생〉(或阿呆の一生)이란 작품을 건네었다. 해당 작품을 읽어보면 냉소적인 자세와 삶에 대한 열망이 어지럽게 교차되어 묘사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톱니바퀴〉는, 그가 만년에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떠한 것에 시달렸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사후 수면제를 처방했던 모키치는 큰 충격에 빠져 그의 빈소를 방문한 이후 한동안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사이토 모키치 문서로.[13]
영화화된 '남경의 그리스도'의 남자 주인공(여기서는 양가휘가 연기했다.) 오카가와 유이치로의 캐릭터 설정이나 결말부분도 아쿠타가와를 모티브로 하였다.
3.1. 특징
널리 알려진 소설의 대부분이 단편소설이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단편과 장편의 기준이 모호했으므로 무조건 단편만 썼다고 할 수는 없으며 장편소설도 일부 미완성의 형태로 남아있다.
사실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자면 단편보다도 더 짧은 엽편소설에 가까운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흔히 사람들이 그의 대표작으로 뽑는 〈나생문〉, 〈귤〉 모두 일반적인 단편소설 분량인 원고지 100매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는 엽편소설들이다.
순수 창작도 했지만, 많은 유명한 작품들 대부분이 고전 설화 등에서 소재를 가져와 근대적으로 해석한 후, 각색한 소설이 많다. 대표적으로 〈나생문〉, 〈두자춘〉, 〈코〉, 〈지옥변〉 등이 있다. 지금은 모두 아쿠타가와의 걸작이자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이지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말년에는 '가짜 꽃'이니 '인조물'이니 하는 식으로 비판받았던 듯. 마침 그 시기가 하필 작가가 작가 개인의 실제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사소설(私小說)이 차츰 대두하던 시기이기도 했고.
그의 작품 대부분이 어둡고, 암울하며, 인간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작가가 인간 내면의 이기심이나 모순된 심리 등을 염세주의적 관점으로 묘사해내었기 때문. 많은 연구자들은 아쿠타가와가 이런 경향을 가지게 된 이유를 어머니 후쿠의 발광과 첫사랑이었던 '요시다 야요이'와의 일화가 계기라고 지적한다.
아쿠타가와의 생모인 후쿠는 그가 태어난 후 7개월이 되었을 때 발광했으며 그녀는 그가 11살일 때 사망했다. 어머니가 미쳐가며 죽은 모습은 아쿠타가와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안겨주었고, 광기의 유전으로 인해 자신도 언제 어머니처럼 미쳐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평생 동안 사로잡히게 만들었고 결국 그가 자살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요시다 야요이는 재색을 겸비한 총명한 여성이었다고 한다. 아쿠타가와는 그녀를 절실하게 사랑했고, 곧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하고 허락을 받으러 가게 되는데,[20] 아쿠타가와의 양부모(외삼촌과 외숙모)가 극심한 반대를 하며 그녀가 집에 방문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양어머니이자 외숙모가 유별나게 반대했다고. 이 사건은 아쿠타가와에게 있어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그 누구보다 사랑했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가족, 특히 양어머니가 자신의 행복을 본인의 이기심에 누구보다도 강하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고, 인간의 이기주의에 대해 처절하게 체험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다름 아닌 친가인 니하라 가와 아쿠타가와 가의 불화, 정확히는 아쿠타가와의 친부 때문이었는데, 친부가 자신의 처제(아쿠타가와에게는 이모)인 후유와 눈이 맞아 불륜관계를 맺은 게 원인이 되어 친가와 외가의 사이가 심하게 틀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요시다 야요이의 집안이 하필이면 니하라 가와 친한 사이였던 탓에, 양부모가 요시다 가 자체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갖게 되면서 두 사람의 사이를 적극 반대했다고 한다.
그는 합리주의와 예술지상주의를 주장했다. "비상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선,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까지도 감수해야 한다.", "예술에 봉사하는 이상, 우리들이 작품에 부여해야 하는 건, 무엇보다 예술적 감격이어야 한다. 만약 인도적 감격만 추구한다면, 단순히 설교를 듣는 걸로도 얻을 수 있다."라고 본인의 저서에서 밝혔듯, 아쿠타가와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했다.[21] 그리고, "예술은 무조건 의식의 안에서 이루어진다."라는 말로 합리주의를 표방하기도 했다.
그러다 만년에 들어서는 자신의 감정이나 경험, 심경 등을 소설로 써내는 장르인 '사소설'의 경향이 짙은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어느 바보의 일생〉, 〈다이도지 신스케의 반생〉, 〈톱니바퀴〉 등이 있다. 지독한 신경쇠약이 자살의 이유라고 하며, 만년의 작품들에서 아쿠타가와가 자살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6. 기타
동시대 한국 작가 중에 김동인이 이 사람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다. 특히 아쿠타가와의 대표작 지옥변과 김동인의 광염소나타, 광화사를 비교하는 연구가 상당히 활발하다. 작가로서의 김동인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보통 이 아쿠타가와의 영향력을 들어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시절 만나 짧지만 깊은 영향을 주었던 문단선배 나쓰메 소세키와 똑같이 위장병을 앓았다. 술을 멀리하고 단 음식을 좋아한 식성도 같다.[23] 다만, 소세키는 위가 안좋은데도 음식, 특히 군것질 거리 절제가 안 돼서 병이 악화된 면이 없잖아 있다면 류노스케는 가난에 시달리며 제대로 챙겨먹질 못해 병이 도졌다.
단 음식 중에서도 쿠즈모치를 특히 좋아했으며, 도쿄 가메이도에 있는 후나바시야(船橋屋)[24]라는 가게의 단골이었다고 한다. 학생 시절부터 가게 가장 안쪽의 '지정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쿠즈모치를 먹었는데, 심지어는 중학 시절 학교 체육 수업을 째고(!) 나와서까지 후나바시야에 들러 쿠즈모치를 사 먹었을 정도로 좋아했다고.[25]
엄청난 골초였다. 가장 심할 때는 하루에 무려 9갑 반의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그는 자신도 언젠가 어머니처럼 발광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평생 시달렸는데 이러한 불안감을 흡연으로 풀었다고...
속독이 특기였다고 한다. 일본어로 된 서적이나 잡지는 2~3명과 대화를 하면서 동시에 읽을 수 있었다고 하며, 어느 동인 잡지에 실린 7페이지 분량의 글을 책장을 휙휙 넘기는 것만으로 전부 읽었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영문 속독도 가능해서 한번은 오사카에 갈 일이 있었을 때 두툼한 영문 원서 4~5권 정도를 챙겨갔는데, 두께가 상당한 책들이었는데도 이걸 기차 안에서 전부 다 읽어버린 뒤 다니자키 준이치로에게 책을 빌려 읽었다고 할 정도였다. 당시 그와 교류가 있었던 의사이자 시인인 시모지마 이사오가 영문을 얼마나 빨리 읽을 수 있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아쿠타가와 曰, 일반적인 영문학 책이라면 하루에 1200~1300 페이지 정도는 쉽다(!!)고.[26] 다만 친한 사이가 아닌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하는데, 불필요한 오해를 사거나 상대방에게 실례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목욕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지간해서는 목욕을 하지 않았다. 제1고등학교 시절 동급생이었던 법철학자 쓰네토 교가 자신의 수기 '오랜 친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나마 극히 드물게 목욕을 하러 가면 항상 목욕탕에 수건을 가져가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도 목욕을 안 하다보니 늘 목욕탕에 수건을 들고 가야하는 걸 까먹어서... 또한 같은 수기에서 언급된 고교 시절의 일화 중에는 식사를 하고 나오면서 잉크병인 줄 알고 탁자에 놓여 있던 간장병을 집어들고 나왔다가 뒤늦게 깨달았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당시 여성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호감을 가진 상대에게는 상당히 적극적이었고 꼭 열렬한 연애편지를 보냈는데, 이 연애편지가 하나같이 오글거리는 문장으로 도배된 것들이었다고. 특히 후에 아내가 되는 쓰카모토 후미[27]와 어느 정도 관계가 진전된 후 보낸 연애편지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28]
후미쨩이 만약 과자였다면 머리부터 먹어 버리고 싶을 만큼 귀엽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위대한 예술가의 조건은 싸이코패스인가 지옥변?
한편 아쿠타가와 자신이 쓴 <나츠메 선생님(夏目先生)>이라는 글에서 소세키와의 에피소드가 하나 언급되는데, 한번은 동네에 불이 나서 소세키와 함께 불구경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경찰에게 직무질문을 받았다. 이때 어디서 왔느냐는 경찰의 질문에 "집이 저쪽이니까 저쪽에서 왔다고 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불은 이쪽에서 났으니 이쪽에서 왔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라는 식으로 대답했다고. 이 말을 들은 경찰은 더 상대하다가는 귀찮아지겠다 싶었는지 그만 가보라고 했지만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니 경찰서까지 가시죠! 마침 흥미도 있겠다"라고 대답해서 경찰이 난감해하는 모습을 보며 재미있어했다고.
"장례식에서 우는 사람은 위선자다"라는 말을 했는데, 정작 나쓰메 소세키의 장례식에서 오열했더라... 하는 카더라가 있다. 정확한 진위여부는 판별하기 어렵지만, 만약 그랬다면 이것도 결과적으로는 셀프디스가 된 셈.
<문예가가 되고자 하는 제군에게 보냄(文芸家たらんとする諸君に与ふ)>이라는 소품에서 문예를 지망하는 중학생들에게 수학과 체조를 열심히 배우지 않으면 훌륭한 문예가가 될 수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 해당 소품 중 "이는 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말이며, 또한 중학 시절을 유익하게 보내지 못했음을 한탄하는 것이기도 하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아쿠타가와는 졸업할 때 다년간 성적 우수자 상장을 받았을 정도로 수재였다. 이에 대해 수학자 가타노 젠이치로는 아쿠타가와가 중학 시절에 수학을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 것이 아닌가 추측했는데 아마도 다른 과목은 점수가 좋았지만 수학은 그다지 잘하지 못했던 것 같다.
죽기 얼마 전에 갑자기 짜증을 내면서 꽃병을 깬 일이 있는데, 이 일에 대해 평소 아쿠타가와가 남들에게 너무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을 걱정하던 기쿠치 칸은 평소에 꽃병을 좀 더 깼었더라면('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면'이라는 의미) 그렇게 일찍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하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일본 문학사를 논할 때에는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유명한 작가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그다지 인지도가 높지 않다.[29] 비단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뿐만 아니라 그가 활발히 창작했던 다이쇼 시대[30]는 한국 기준으로 일제강점기였던 탓에 이 시기의 일본 작가들은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사실상 일본 문학 전공자가 아니면 거의 모른다고 봐도 무방할 수준이며, 그나마 유명하다고 할 만한 작가는 천 엔 지폐의 모델이기도 했던 나쓰메 소세키와 인간실격으로 어느 정도 알려진 다자이 오사무 정도. 오히려 90년대 일본문화 개방 이후 일본 서브컬처(만화, 라이트노벨 소설 등)에 만날 "아쿠타가와상"이 언급되어 그 이름은 들어봤는데 무슨 소설을 썼는지는 모른다는 쪽이 더 많을 지경이다.
다만,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국내 문인들을 통해 이름이 종종 오르내리던 적은 있었다. 대표적으로 김사량의 일본어 소설 <빛 속으로>가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오른 적이 있으며, 오랫동안 잡지 사상계의 주필을 맡았던 김준엽 고려대 총장은 사상계의 주최로 동인문학상을 만들 때 아쿠타가와상을 언급하면서 우리도 이런 문학을 장려하는 시상식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힌 적이 있었다.[31]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리기도 할 정도이고, 수많은 문호들과 예술가들의 작품에 그의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작품이 퍼져나간 나라에서는 천재, 수재 등으로 평가받는다. 심지어 현재까지도 활발히 연구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이와 별개로 아쿠타가와는 생전 조선에 대한 에세이를 쓴 적이 있다. 제목은 <김장군>으로 김경서 장군 설화를 인용한 작품이다. 다만 나카지마 아츠시의 <호랑이 사냥>과는 달리 일제강점기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글은 아니며,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나도는 전승을 이용하여 역사 인식은 국가와 민족별로 상대적일 수 있음을 강조하는 글이다. 따라서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적이며 자국 중심적인 사관을 일정 부분 비판하는 뉘앙스도 들어있다. 링크
2000년, 아사히신문에서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은 누군가?'라는 설문조사에서 5위를 기록했다. 1위는 나쓰메 소세키였으며 2위 무라사키 시키부, 3위 시바 료타로, 4위 미야자와 겐지, 6위 마쓰오 바쇼, 7위 다자이 오사무, 8위 마쓰모토 세이초, 9위 가와바타 야스나리, 10위 미시마 유키오였다.#
2016년에 《문예적인, 너무나 문예적인》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예술에 대한 에세이집이 번역 출간되었다. 아쿠타가와 본인의 예술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으므로 관심있는 사람은 일독을 권한다. 아쿠타가와에 대한 번역 서적이 얼마 없는 걸 감안하면 정말 보물 같은 책이다.
다자이 오사무,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와는 같은 도쿄제국대학 출신이면서 자살을 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다만 자살방법은 각자 달랐다. 다자이는 투신자살, 가와바타는 가스, 미시마는 할복, 그리고 아쿠타가와는 전술하였듯이 음독.
다자이 오사무에게 많은 영향을 준 작가이기도 하다. 다자이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구름 위의 존재다. 나는 그를 모방조차 하지 못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아쿠타가와를 존경하였다. 실제로 다자이는 아쿠타가와를 보면서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하고, 아쿠타가와상을 받기 위해 계속 노력했으나 결국 받지 못하였다. 여담으로 다자이 오사무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아쿠타가와상의 첫회 심사위원이자 다자이가 떨어진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일본의 추리소설의 제왕으로 꼽히는 마쓰모토 세이초 역시 어려서 여러 소설을 탐독하는 와중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제일 좋아했었다고 밝히고 있다.[32]
또한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일본 문학에서 흔들리지 않는 정점“이라고 표현했다.
위에도 살짝 나와있지만, 그를 기리기 위해 고등학교 동문이었던 기쿠치 간[33]에 의해 1935년에 아쿠타가와상이 제정되었으며, 지금도 나오키상과 함께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두 개의 문학상 중 하나로 손꼽힌다. 주로 신인 작가의 등용문으로 인식되고 있다.
죽기 전 도플갱어를 보고 사망했다는 설이 있는데 말 그대로 문학계 혹은 일본에 구전되는 설 중 하나일 뿐 별로 신빙성은 없다.[34]
공식적 및 비공식적으로 관동 대지진 때 자경단으로 참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아쿠타가와 본인은 첫날 재일조선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자경단의 잔인한 민낯을 마주하고 질색해 바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집에 들어가 칩거 생활을 했고 평생 자신이 자경단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후회하며 지냈다고 한다. 참고로 아쿠타가와 본인이 배속되어 있던 팀은 직접 학살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도 이후 관동대지진과 관련하여 본인이 남긴 기록 등을 살펴보면 학살을 목격한 것을 암시하는 부분은 있으나 실질적으로 그가 참여했다는 내용은 없으며, 그의 일기에서도 이런 학살에 참여하는 자들에 대한 야유를 담고 있는 기록들이 있다.
아들 중 3남인 아쿠타가와 야스시(芥川也寸志, 1925-1989)는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유명하며, 태평양 전쟁 종전 후 황국 사관을 부정하고 좌파 음악 운동에 관여하는 등 사회파 성향을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소련에 불법으로 입국해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아람 하차투리안 등과 친구로 지내며 작곡활동을 했다. 또한 장남 아쿠타가와 히로시(芥川比呂志)는 배우로 활동했고, 2남 아쿠타가와 다카시(芥川多加志)는 아버지를 닮아 문학을 지망했으나, 도쿄외국어학교 불문학부 재학 중 징집되어 1945년 미얀마에서 전사했다. 세 아들의 이름의 한자 표기가 보통 인명 표기에는 잘 사용되지 않는 만요가나인데, 모두 친구들의 이름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장남은 기쿠치 간의 본명인 히로시(寛)에서, 2남 다카시는 서양화가 오아나 류이치(小穴隆一)의 이름자 중 '隆(다카시)'를, 3남 야스시는 쓰네토 교(恒藤恭)의 '恭(야스시)'에서 따 왔다.그리고 기쿠치 간은 본인 이름을 따서 지으면서 만요가나로 짓는 것에 대해 굉장히 짜증을 냈다고 한다.
세 아들 중에서 장남인 아쿠타가와 히로시가 자신을 제일 많이 닮았던 탓에 장남을 굉장히 아꼈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아버지를 꼭 닮았다. 목소리도 꼭 닮았다고 하는데, 장남의 목소리를 두고 아내 후미는 아들과 남편의 목소리가 매우 닮았지만 남편의 음성은 아들의 것보다 조금 더 둥글둥글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였다고 회고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본인의 음성은 남아 있지 않지만 아들인 히로시의 목소리는 육성테이프가 제법 남아 있으므로 이것으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목소리를 추정하는 사람도 있는 편.
1916년(다이쇼 5)부터 1919년(다이쇼 8)까지 햇수로는 4년간 요코스카에 있던 해군기관학교에서 영어강사로 근무하던 중인 1917년 8월 순양전함 콩고에 승선한 뒤 '군함 공고 항해기'라는 제목으로 체험기를 쓴 적이 있다.
이름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한자를 직역하면 개천에서 용 난다는 의미와 일치하며 실제로 이름인 류노스케(龍之介)는 용띠 해, 용의 달, 용의 날에 태어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