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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함은 놀라운 축복이다!(수정)
초라함은 놀라운 축복이다!
나의 자리는 더 높아질 곳도 없고 더 낮아질 곳도 없는 초라한 자리다. 아무도 기웃거리지 않고 탐내지 않는 자리 말이다. 보잘 것 없고 힘들고 고달프고 평범하고 자유롭게 일하며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며 자족하는 자리이다. 초라함에 도가 튼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닌 자리에서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물처럼 흐른다.
인도에서 돌아온 후에 오랜 새김질 끝에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의미에서 필명을 “초라하니”로 바꾸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라하니”가 힌디어나 산스크리트에서 나온 뜻이 있는 말로 내가 힌두교나 불교의 용어를 차용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초라하니”는 “초라한 이”를 소리 나는 그대로 적은 것이다.
어려서부터 웃는 모습이 귀엽다, 해맑다, 티 없이 밝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외모에 체구도 보통이고 옷차림마저도 수더분해서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모임을 가든지 간에 주목을 받는다거나 주인공이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재능이나 재주도 눈에 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어서 어디를 가든지 구경하는 사람이요, 박수를 쳐주는 사람이요, 들러리로서 심부름꾼으로서 섬기는 일을 맡았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 존중하며 예우하는 지에 신경 쓰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묵묵히 사람들의 필요를 살피며 채워주는 일에 집중하였다. 학교에서나 서클에서 교회에서 주인공이나 주관자가 되지 않아도 내게 주어진 일들을 묵묵히 감당하였으며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있었다.
인도에 가서는 사정이 확 달라졌다.
우리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의 경력이나 평판을 아는 사람도 없고 나의 성격이나 품성이나 자질과 성실성을 아는 사람이 없는 세계에서 나는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곧 바로 별 볼일이 없는 초라한 사람이 되었다.
안드라푸라데쉬주 데칸고원에 있는 자말라마두구에서 비숍에게 처음으로 부임 인사를 하는 날이었다. 당시 우리 이삿짐은 뉴델리에서 자말라마두구로 오는 중이었고 나는 먼저 첸나이에 도착하여 배낭 하나를 메고 캐리어가방을 들고 남편 또한 카메라가방과 캐리어가방을 단출하게 들고 빨리 현장에 도착하려는 마음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새벽에 기차에서 내려 무다누르 언덕을 지나 자말라마두구에 도착하는 동안에는 안개 속에서 모든 것이 신비하고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한 기쁨도 잠깐이었고 아침부터 우리는 모기를 비롯한 온갖 벌레와 땡볕더위에 시달리며 언제 올지 모르는 비숍을 마냥 기다렸다. 데칸고원의 자연환경과 인도인들의 시간 개념을 잘 모르는 나는 재수가 나빠서 열악한 시골에 오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도망갈 궁리를 하였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너무 거칠고 더럽고 힘들어 보여서 낭만적으로 생각하였던 데칸고원과 인도 농촌의 이미지가 잠깐 사이에 깨졌던 것이다. 파리와 모기에 둘러 싸여서 한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산적처럼 부리부리한 수염을 한 비숍이 보라색 정장을 입고 나타나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사람들이 줄을 지어 그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입맞춤의 알현이 끝났을 때 순서에 따라 환영의 행사가 진행되었다. 나는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환영사에 인사를 하고 답사를 하였다.
행사가 끝나자마자 비숍이 탐탁하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나의 도착 메시지에 아무런 프로젝트나 후원 약속이 없고 단지 기도하며 섬기겠다고 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말할 수 없었다.
비숍이 내게 얼마나 큰 집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하여 우물쭈물하였다. 그러자 그가 다시 어떤 집을 원하느냐고 재차 물었다. 나는 그에게 노회가 우리가 살 집을 제공해주기로 해서 왔는데 내가 무엇을 원하겠느냐? 노회가 결정했으면 어떤 집인지 집을 보여달라고 하였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너 살림이 얼마나 많으냐?” 고 물었다. 나는 속으로 비숍이 약속한 대로 집을 주면 되었지 왜 남의 짐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가 하면서 “Two trucks” 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런데 그는 페이퍼에 “Two trunks”라고 적었다. 나는 “트렁크”가 아니고 “트럭”이라고 재차 설명하였지만 그는 내 말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인도는 짐을 운반하는 차를 ‘트럭’이라고 부르지 않고 ‘로리“라고 불렀다. 그러니 비숍이 나의 초라한 행색 때문에 트럭을 트렁크로 오해할 만도 하였다.
나의 행색이 초라해서였을까? 나는 첫 만남과 모임에서부터 예우 받는다거나 환영 받고 있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결국 그는 화장실도 부엌도 없는 바닥이 투박한 검정색 돌로 깔려 있는 원룸스타일의 집으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화장실이 없어서 못살겠다고 하니 앞에 있는 병원 본관에 있는 화장실을 사용하라고 하였다. 부엌이 없어서 못 살겠다고 하니 병원 원장 네 하인들이 날마다 음식을 해줄 것이라고 하였다. 세면장이 없어서 못 살겠다고 하니 수도공사를 하려면 돈이 많이 드는데 그 경비를 내가 내야 한다고 하였다.
작은 읍에 머물렀지만 초라한 사람으로 국물도 없을 사람으로 낙인이 찍혀서일까?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도 없었고 잘 보이려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어쨌든 어느 누구도 프로젝트를 한다거나 특별한 지원을 해줄 거라는 기대와 주목을 하지 않으니 편하고 좋았다. 나는 언어도 되지 않고, 특별한 재능도 없고, 재원도, 프로젝트도 없었으므로 놀 수는 없고 해서 할 일 없이 작은 시골마을과 무너져가는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초라하고 무능하고 가난하고 아무 것도 아닌, 별 볼일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혔기 때문에 불가촉천민인 달리트 속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몇 년이 지났을까? 하루는 교단 본부의 어느 국장이 마드라스에서 멀지 않는 곳에 달리트 직업훈련원 원장이 훈련원 개혁과 개발을 위하여 나를 초청하였으니 가서 보고 도움을 주라고 간절히 부탁하였다.
당시 그 직업훈련원은 개점휴업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반백년이 훨씬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명성이 자자한 훈련원이었으나 옛날 것을 안일하게 답습하고 있는 사이에 프로그램과 기술이진부하고 구태의연해져서 훈련을 받으려는 지원자들이 더 이상 모이지 않아 폐원 직전에서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 가는 길에 어느 작은 도시에서 지인을 만나 함께 그곳을 방문하였다.
원장이 우리 일행을 구세주처럼 환대하였다.
나는 원장에게 정중하게 국장의 부탁으로 온 아무개라고 인사를 드렸다. 그러나 그는 나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손님으로 따라온 차림새가 훤하고 좋아 보이는 지인을 국장이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는지 그에게 먼저 숄을 걸쳐주고 화환을 걸어 주었다. 숄이나 화환은 먼저 받아도 그만 나중에 받아도 그만이므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훈련원이 직면한 문제를 이야기하며 상담과 자문을 구할 때도 그만 바라보고 말하여서 그가 사람을 착각하고 있음을 확실하게 알았다. 나는 그의 오해를 바로 잡기 위하여 오후 일정이 시작되기 전에 그에게 분명한 목소리로 본부 국장의 미션을 받고 온 사람이 나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반팔 티셔츠에 곤색 조끼를 걸치고 검정바지를 입은 나의 행색이 너무 초라하여서인지 나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무시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지인을 본부에서 파송된 사람으로 생각하고 정성껏 모시고 가이드하며 여러 훈련실의 낙후 문제를 설명하였다. 맨 나중에 프로젝트로 지원받고 싶어 하는 훈련원 부지를 안내할 때도 그는 나를 멀리하고 지인을 앞세우고 열정적으로 자신의 소신과 포부를 밝히며 도움을 호소하였다.
사실 나는 큰 부담을 가지고 그곳을 방문하였으나 나 자신의 초라한 행색 때문에 훈련원의 도움 호소에서 저절로 놓임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건을 통하여 인도 크리스천 지도자들이 초라한 옷차림의 사람을 얼마나 무시하는지? 인도사회에서 인정과 존중을 받으려면 옷차림과 장신구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절절하게 경험하였다.
인도인들은 내가 거리에서 쓰레기를 주우면 “너는 한국에서 넝마주이였느냐?” 고 물었다.
낡은 건물에 페인트를 칠하면 “너는 한국에서 칠쟁이였느냐?” 고 물었다.
나무를 심으면 “너는 한국에서 나무 심는 사람이었느냐?” 고 물었다.
청소를 하면 “한국에서 청소부였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짧은 머리에 티셔츠에 조끼를 걸친 나를 한국에서 온 불가촉천민, 달리트로 대하였다.
그들의 눈에 여성들이 선호하는 칠흑의 긴 머리채도 없고 팔꿈치까지 끼는 요란한 뱅글도 차지 않고 배꼽아래까지 내려오는 금목걸이도 걸지 않고 화려한 사리도, 펀자비 드레스도 입지 않고 하인도 부리지 않고 자가용도 없는 노란 얼굴의 외국인 여자가 초라하게 보였을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도 초라하였다.
백인 선교사들 옆에 있으면 너무 검고,
인도인들 앞에 있으면 얼굴이 너무 밋밋하고,
백인 선교사들 속에서는 영어를 못하므로 어정쩡한 반벙어리이고,
인도인들 속에서는 로칼 언어를 듣지 못해서 벙어리였다.
게다가 영어가 유창한 인도인들 특별히 박사들 앞에서 기가 팍 죽었다.
자신의 초라함을 깨달은 후, 후원도 넉넉하지 않고, 학력도 낮고, 재능도 없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자가 감히 외국에서 일할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어이없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인도 교회 총회나 노회, 각 부서의 행사에 초청받으면 나는 영어 스트레스 때문에 주눅이 들어서 벙어리처럼, 그림자처럼 존재하였다.
어느 노회 비숍이 부임하는 날, 말과 행색이 너무 초라한 나를 보고 이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첫째 내 옷차림이 너무 초라하고 둘째 프로젝트나 후원을 약속하거나 장담하며 큰 소리를 치지 않고 셋째 무엇을 요청하든지 간에 확실히 해주겠다는 언질도 없이 “기도하겠습니다.”라고만 말하고 넷째 인도인들이 천하게 여기는 청소나 나무심기나 페인트칠을 어디서든지 직접하고 다섯째 사무실 없이 현장을 중심으로 일하므로 일반 사람들 속에서 위엄도 없고 권위도 없고 명예도 영광도 없으므로 무시하였다고 토로하였다. 실제로 나를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그는 조용히 차분히 시계추처럼 움직이는 나를 지켜보고 나의 초라함이 비범함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고 말하였다. 그 후부터 그는 나에게 기도 요청을 하였고 사업에 대하여 의견을 구하였다.
어느 대학교 총장을 2년 동안 찾아다녀서 한국의 어느 대학교와 MOU 체결을 맺게 하였다.
인도의 대학교라는 것이 식민지 치하에 설립되어 ‘서구바라기’가 되었기 때문에 아시아의 대학교들을 우습게 아는 풍토가 있었다. 영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하고 서구 문화와 양식에 익숙한 그들은 서구에 있는 대학교와 교류하며 서구가 주는 이익에 길들여져 있으므로 아시아에 대하여 관심이 거의 없었다. 나는 어느 대학교 총장의 부탁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고 기도하며 한국과 인도가 함께 할 수 있는 사업을 구상하여 동반 성장할 수 있는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인도에 있는 대학교에 찾아가 말을 꺼냈으나 그들은 콧등도 뀌지 않았다. 인도 대학교는 한국의 대학교에 기대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정부에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의 일로 인하여 MOU 맺는 것을 귀찮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국과 인도 대학교의 협력이 꼭 필요하고 함께 할 일이 있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기도하며 시간이 나는 대로 총장을 찾아가서 MOU를 맺고 아시아를 위해서 함께 일할 것을 어눌한 영어로 더듬더듬 권면하였다. 그러나 한 대학교의 총장이 나의 어설픈 제안을 듣고 그런 결정을 쉽게 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총장이 한국 기업의 인도 진출과 성공 그리고 세계 속에서 한국 지위에 눈을 뜨면서 내가 그 대학교를 방문한지 2년이 다 되어 가고 있는 시점에서 총장이 MOU를 맺으러 한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나는 초라한 사람으로 그 일을 수행한 대가로 총장과 해외담당국장의 왕복항공운임까지 마련해주어야 하였다. 어쨌든 그 후 두 대학교는 MOU 근거하여 약속한 대로 프로젝트를 함께 추진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총장은 MOU가 죽은 문서로 끝나지 않고 프로젝트가 현실화되자 기대하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다며 크게 기뻐하였다. 특별히 그는 MOU를 맺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을 방문한 나를 기특하게 생각하여 여러 사람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내가 처음 자기를 방문하였을 때를 회상하였다.
화장도 하지 않고, 장신구도 걸치지 않은 초라한 여자가 한국의 대학교와 MOU를 맺자고 찾아왔는데 말조차 더듬거려서 참으로 한심하게 보였다고. 그러나 일언지하에 자를 수가 없어서 해외 담당부서 교수에게 넘겼다고. 2년 사이에 해외담당부서의 담당자 여러 번 교체되었다고. 담당자가 바뀌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므로 내가 지쳐서 포기할 줄 알았는데 끝끝내 뜻을 이루었다고. 몇 년 동안 지켜보니 그는 초라함 속에 비범함을 숨기고 있다고. 바보처럼 보이는 어리숙함 속에 탁월함이 숨어 있다고. 초라한 행색으로 무시당하여도 의연한 사람이라고. 어떤 예우나 대접에도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그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사람들 앞에서 나의 초라함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리고 기회만 되면 나의 초라함을 “OUTSTANDING”하고 “EXTRAORDINARY”하다고 칭찬하였다.
인도에서 나온 지 여러 해가 지난 지금 나는 초라함으로 평안하다. 자유롭다. 감사한다.
초라하기에 겪었던 차별과 냉대와 무관심으로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은혜와 평화, 자유와 축복을 깊이 체험하였다. 초라함은 나를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으로 인도하였다. 초라함은 나를 범사에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과 기도의 길로 나를 이끌었다. 초라함은 그리스도의 초라한 십자가, 사랑하므로 초라해질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게 해주었다.
초라함은 나를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하는 자유의 길로 인도하였다.
초라하기 때문에 외롭고,
초라하기 때문에 무능하고,
초라하기 때문에 무시당하고,
초라하기 때문에 차별당하고,
초라하기 때문에 손해를 보고,
초라하기 때문에 억울하였다.
초라하기 때문에 사람을 바라지 않고
초라하기 때문에 겸허하고,
초라하기 때문에 변명하지 않고,
초라하기 때문에 허영에 빠지지 않고,
초라하기 때문에 방만하지 않고,
초라하기 때문에 진지하고,
초라하기 때문에 강하고 담대하며,
초라하기 때문에 인내하였다.
초라하기 때문에 사모하고,
초라하기 때문에 기도하며
초라하기 때문에 감사하고,
초라하기 때문에 침묵하고,
초라하기 때문에 묵상하고,
초라하기 때문에 이해하고,
초라하기 때문에 용서하고,
초라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며,
초라하기 때문에 세상을 겁내지 않고,
초라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초라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였다.
초라하기 때문에 당당하다.
초라하기 때문에 자유하다.
초라하기 때문에 잔이 넘친다.
초라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더욱 섬긴다.
초라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며 사랑한다.
초라함의 발견!
초라함에 대한 깨달음!
초라함은 하나님께서 인도광야에서 나에게 준 은혜이며 십자가이며 부활이었다.
초라한 종과 동행하며 연단시켜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2022.9.21.수요일 아침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