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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1
요한복음 풀이 2 . 信天함석헌
나는「요한복음」을 특별히 좋아하는데, 그건 내 생각이고, 사람이란 또 각각 다른 점이 있지 않아요? 그렇지만 이거 좋아하게 된 시작이 좀 재미있어요. 어째 그랬나 하면, 지금은 뭐『파우스트』(Faust) 같은 책을 젊은 사람들이 별로 읽지는 않을 거예요. 허나 옛날에는 서양에서 젊은이가 사회로 나가려고 할 때는 그 포켓에다가 한켠에는 괴테의『파우스트』를 넣어주고 한견에는 칼라일의『의상철학』(Sartor Resartus)을 넣어주라는 말이 있을 만큼 이렇게 좋은 뭣으로 많이 읽히고 그랬어요. 나는 공부가 늦어서, 고사(高師)에 입학을 한 뒤에 그러니까 아마 스물 넷일 거요, 그때『파우스트』를 첨으로 읽게 됐는데, 일본 번역으로 읽은 거지요. 그땐 뭐 독일어를 모르던 때니까.
그런데『파우스트』를 읽어가노라면 주인공 되는 파우스트가 번민을 하는 데가 나오지 않아요? 이 사람이 뭐 철학도 법학도 신학까지도, 모든 학문의 제일 머리라는 신학까지도 다 배웠는데 왜 내 마음이 이렇게 암담하냐, 그래 지금까지의 모든 학문을 다해왔건만 학교에 가서 교수 노릇 하는 데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저렇게 말해주고, 거기 있는 말로 “학생들의 코뿌리를 쥐고 이리 끌고 저리 끌고” 그랬지만, 자기로서는 정말 생각해보면 확신이 아무것에도 가는 게 없어요. 그래 번민을 해서 죽으려고 그래요. 답답하니까 자살을 하려고, 죽으려고 독배를 마시려고 그러는데 마침 이스터(Easter), 부활절 노래가 들려와요.
그걸 들으니까 자기도 어렸을 적에 순진한 신앙으로 어린 마음에 부활절 노래를 부르고 그러던 생각이 나서, 감격이 돼서 죽으려던 것을 그만뒤요. 그만두고는 그 어릴 때 생각이 났으니까 옛날에 좋아하던 성경을 내놓고 “어디 그럼 우리 독일어로, 내 사랑하는 독일어로 번역을 해보자” 그러고 시작이 돼요.
그런데 거기「요한복음」을 펼쳐요. 펼쳐놓고는 그걸 우리 사랑하는 독일어로 번역을 해보자 그러는데,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러나 나는 첫 마디에서부터 걸려버린다” 그래요. 그 첫마디에 뭣이 나오는고 하면 “태초에 말씀이”, 우리 지금 ‘말씀’ 이라고 번역이 됐는데, 이 ‘말씀’의 본래 말로는 ‘로고스’(logos)예요, 로고스. 그런데 그건 희랍말인데, 옛날에 우리나라에 기독교 개신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이걸 번역하길, “태초에 도가 있으니” 그랬어요. 지금 노자의 도(道), “태초에 도가 있으니” 하고는 괄호를 해서 “도는 혹은 말씀이라”, ‘도’로 번역을 했지만, 한문자에 길 도(道)자란 길이란 뜻으로도 나가고 또 무슨 ‘종교의 도’ 라고 하는 종교라고 하는 의미로도 나가고, 또 그 글자가 동사로 나가면 ‘말한다’고 그래요. 그런 뜻으로 나가고 그랬는데, 그걸 ‘도’로 번역한 것은 아주 좋게, 재미있게 됐어요. 지금은 말씀이라고 번역하지만.
그래 그걸 놓고 내, 우리 독일어로 번역을 해보자 그러니까 그 첫마디부터가 그래요. “이걸 내가 뭐라고 할까” 이걸 뭐 ‘이성’이라고 그럴까, 내가 이제 뭐 그 말은 다 잊어버렸어요. 잊어버렸지만, 몇 가지 단어가 나와요. ‘의지’라 그럴까, 그렇지 않으면 ‘업’이라 그때 일본 말로 ‘업’이라 번역이 되었는데 그런 몇 가지 말로 번역을 하면서 “암만해도 그저 마음에 쑥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 말이 있어요.
이걸 내가 어려서부터 기독교 믿던 사람이니까 인상 깊게 읽었어요. 그래서「요한복음」에 대해서 이제 흥미를 느끼게 되어 괴테의『파우스트』를 읽다가 나도 또 그 생각이 났어요. 괴테 모양 어릴 적 읽던 그걸 다시 고쳐놓고 읽어보자, 그래서「요한복음」을 읽고 그랬어요.
내 심리가 왜 그렇게 됐느냐 하면 난 평생에 입학시험이란 거 한 번밖에 쳐본 적이 없어요. 뭐 국민학교 간다고 할 적엔 추천으로 간다고 그랬고, 고사(高師)에 들어갈 때만 시험을 치게 되었는데, 오산학교가 자격이 없는 학교니까 졸업을 하고도 또 그 상급학교에 지원할 자격이 없단 말이에요. 자격이 없는 학교를 나왔으니 진학을 하려면 각가지 과목을 다 쳐야 돼요.
1924년 얘긴데, 그러니까 첨에 간 해 즉 23년에 시험공부란 그때 한 번 해봤는데 그때 소감이, 이젠 일기 썼던 거 다 없어지고, 그랬어요. 내 속에서 하도 답답해서 명년에 꼭 입학은 하긴 해야겠고, 시험생각을 하려니까 기가 막히고 그래 지금도 시험 때문에 고생하는 재수생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짐작이 가요. 더구나 나는 그래도 신앙이 있어 그런 생각을 어려서부터 하던 거니까, 어느 편이냐 하면 나는 행동보다는 그래도 생각하는 편으로 생겼는데 뭐, 아무것도 생각을 할 수가 없고, 바로 그 해엔 시험준비에만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 혈안이 됐어요. 그럴려니까 이게 사람의 살림이 이럴 수가 있느냐? 그래 그걸 날마다 일기에도 쓰고 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러다가 이제 다행히 입학이라고 허락이 됐으니까 그때부터 정말 해방된 것 같았어요. 그런데 괴테의 그걸 보게 되니 “그거 정말 참 그렇겠다” 그래서 이제「요한복음」을 보게 된게 내 속에 마음의 불안이라 그럴까, 심리의 답답한게 있어서, 그러다가 그리 된 거예요. 그런데 파우스트가 번민을 하다가 그걸 읽고, 그리고 마침 이스터의 노래가 들려오는 걸 듣고 마음이 안정이 돼서 개심이 돼 죽기를 그만두고 그 됐어도 그 담에 파우스트가 시험에 빠지잖아요? 그거 파우스트 보시지 않은 분은 흥미가 없을 거요.
그러나 그래 이 세상이 뭘로 되나 이거요. 학문으로는 신학까지도 배우고 그랬지만 이 우주의 뒤에 있어서 모든 걸 주장해나가기는 누가 하냐 이걸 알아야겠는데, 학생들에겐 뭐라고뭐라고 말해주지만 나 자신으로는 당초 확신이 없고, 그래 이제「요한복음」펼쳐놓고 고쳐 읽어 보려고 그랬는데, 그러다가 그 어렸을 때의 신앙이 생각나서 마음의 안정이 된 건 좋았는데 그 담에 생각을 하려니까 메피스토펠레스가 들어와요. 그래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인데, 그 얘긴 오늘 여기엔 해당되지 않는 얘깁니다만,「요한복음」얘기를 하려니 생각이 나서…….
어제 우치무라(內村) 선생 말씀을 조선생도 하셨지만, 내가 우치무라 선생 성경 연구회 모임에 가게 된 것은, 입학이 된 다음에 가게 되었는데, 언젠가 이 얘기를 설명을 하면서 그걸 지금도 기억해요 파우스트가 이걸 번역하면서 뭘로 할까 그러다가 그중에 사업 로고스란 걸 사업으로 할까 하다가, 그래 그 마지막에 뭣인지는 지금 내가 모르겠군요. 그래 이걸로 할까 저걸로 할까 그러다가 마지막에 그중의 하나가 와자(わざ)라 그래요 일본말로 와자라 그러면 지금 우리말로 하면 사업(事業)이라 그 말인데, 무슨 일이라는 그런 단어도 나왔어요. 그래 그걸 우치무라 선생이 지적을 하면서 “이 사람이 어릴 때 신앙을 회고 해보고 강조해 그러는 건 좋지만, 이건 번역하는데 사업이라고 번역을 해보는 데가 그게 벌써 유혹에 빠지게 되는 시작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을 했기 때문에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랬어요.
공통점은 그나 나나 파우스트나 나나 생각하는 형으로 생긴 사람이니까, 생각하는 사람이 이걸 어떻게 깨닫느냐 그럴 때 그 마음의 태도가 어디에 있느냐 그게 문제예요. 그래 어떤 때는 읽어도 나는 내 나름대로 뭔가 요게 있기 때문에 이런 말씀하면 흑 어떤 분들에게는 걸림이 될 거예요. 그전에도 한 소리고 한데……. 하나, 참고로 들으시라고 하는 말이오.
뭔고 하니 늘 평탄하게 내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 듣고 가면, 되냐 하면 그건 그렇지도 않아요. 가다가는, 물론 첨부터는 그럴 수가 없지마는, 선생이 본래 가르치는 것도 그렇지요. 어느 정도 위태한 지경을 면해서 재미있어 하는 그런 것이 보이면 그 담엔 어려운 데 놓잖아요? 난(難)문제 문제 있는 데 에 들여 넣어줘요. 시련을 겪어보라고 그럭해서만 그러는데.
그러니까 그럴 만한 그 본래의 신앙이 바로 박히냐 안 박히냐 못 박히냐 그게 문제예요. 천생 그런 것을 안 당하고 그저 좋게좋게 남이 설명해주는 것만 들어가지고는 정말 깨달음에는 못 간다 그 말이에요.
말하는 나 자신도 완전한 깨달음에 갔다 그렇게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나는 내 나름대로는 그래도, “아, 이거는 내가 보기에는 이렇지” 하고 그렇게 시작이 되는 데가 그게 내가 좀 자랐다면 자라게 되는 시작인데, 이제 전체를 보면 도대체 우리나라 기독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깊이 파는 데가 늘 하는 말이지만 깊이 파는 버릇이 없어요.
우리나라 사람들 사람으로선 퍽 좋은 점도 많지요. 비교적 명랑한 국민이고, 침울해한다든지 하는 건 없어요. 또 사람에게 친절하기도 하고. 외국 사람들이 오는 사람들마다 “한국에 오면 아주 좋다. 친절하게 대해쥐서 좋다” 그래요. 그런 점도 확실히 있지만, 그 친절이 깊이 있는 친절이냐 그러면, 그렇지 못해요. 적어도 내가 보기엔.
아주 우리 큰 결점이 건성으로 도는 거예요. 뭐든지 종교까지도 건성으로 돌아요. 그저 남들이 뭐를 한다면 여기 해수욕도 건성에서 놀아요. 정말 피서를 말한다면, 피서하는 사람이 본래는 여름철에 괴롭고 그러니까 쉬는 것인데, 가을철에 활동할 것을 위해서 좀 쉬기도 하면서, 그러기 위해서 피서의 의미도 있는 것인데, 물론 그건 돈도 있고 한가한 사람들의 일이라고 그러겠지만, 아무렇거나 간에 여기 이렇게 집을 떠나서 한동안 와보는 거는 이거다 놀음으로만 하자는 거 아니오. 사람이니까 어느 때 여흥시간도 있지 없진 않아요. 그래 그렇게 너무 빡빡해가지고는 가기가 어려우니까 그런데 동정이 가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슨 일이든지 사람의 일에는 사람답게 그래 밥을 먹어도 사람답게, 잠을 자도 사람답게 그건 동물과 다르지요. 그러니까 일단 우리가 사람 된 자리에 올라왔으면 모든 문제가 사람이란 자리에서 나와야 될 거예요. 무슨 종교를 믿거나, 무슨 학문을 하거나간에. 그건 왜 그런고 하니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벌써 진화의 과정을 보게 되면 이제 거꾸로 내려가서 짐승으로 떨어질 수도 없고, 짐승으로 떨어지면 짐승도 못되고, 차라리 짐승이라도 된다면 짐승대로의 제 본성이라도 할 수가 있지만 사람이 됐다가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짐승 모양으로 그렇게 되면 그건 짐승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오. 그렇게 해가 지고는 개인으로도 내가 옳은 살림을 할 수도 없고, 또 개인만이 아니라 우리 사는 건 개인이지만 우리 살림이 전체에 유기적으로 딱 관계가 되어가지고 있는데 보통 말을 하려니까 ‘개인’이다 ‘전체’다 그러지, 개인과 전체를 떼어서 볼 수가 없지 않아요? 아무리 개인이라 그래도 전체 속에 내 살림이 있는 거고, 전체라 그래도 또 내 개인의 주체 없는 생각이나 활동은 있을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 사람으로 살아가는 거를 생각을 해야겠는데, 깊은, 무슨 체계 있는 종교에 가기 전이라도 사람인 다음에는 그래도 그 생각을 해야 돼요. “사람 노릇은 해야지.” 그건 누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속에서 나오는 거지요. 생각이 있다면 그래 사람인 다음에는 그런 생각이 나게 돼있다는 거예요.
내가 스승님으로 존경하는 남강 선생 같은 이는 나서 서당이라고는 불과 여덟 살까지밖엔 못 갔어요. 그러고 그 담엔 집안이 어려워 남의 집 심부름꾼으로 가고 그랬는데, 그래도 어디 뭐 그렇게 해서 그렇다고 그럴 수가 있나요? 자기 생각에 “나도 사람 노릇 해야지” 그때부터 그런 생각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방향이 역시 바로잡히지요. 그러면 사람이란 것이 뭐냐 그러면, 그거야 이제 가노라면 나이도 들고 학문하는 걸 따라서 많이 달라지고 풍부해지고 그러지요. 그렇지만 그건 말로라도 누가 설명을 안하고 “너도 사람이니까 사람 노릇 해야잖아?” 그러고 하면 물을 것 없이 이 속에 짐작가는 게 있는 거예요. 그런 거지, 그걸 누가 “그 사람 노릇 하는 게 어떻게 하는 겁니까?” 묻지 않아도 사람인 다음에는 “이 사람아 사람 노릇 해야지 않아? 사람답게 해야 할 거 아냐?” 하면 지식의 높고 낮고 할 것 없이, 나이가 많고 적고 할 것 없이 알아듣는 겁니다.
그런 거는 우리 속에 다 아는 거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봐도 다 아는 거고 그런 거니까 공연히 말썽을 일으켜서 “어떻게 하는 게 사람 노릇 하는 겁니까? 자세히 일러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하는 거는 물론 답답한 마음도 있어서 그러겠지만 내 속에는 사람 노릇 요거는 본래 그 본이 내가 생각해낸 것도 아니고, 본래부터 그건 하늘에서 하나님이 주셨다 그래야 하는 거예요.
사람 노릇이 뭔지 모른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무시하는 생각이지, 사람인 담에는 그래도 그걸 그 싹이 특별히 어떻게 못생겨서 정신박약아로 났다든지, 정신불구자로 났다든지 그러면 몰라요. 그런 예외가 더러 있겠지만 보통사람인 담에는 맘에 그런 생각나는 거고, 또 더구나 그걸 말해주면 자기 나름대로 그래도 듣는 거예요.
문제는 그럴 때 그걸 내가 받아들여서 키우고자 하는 노력을 하느냐 않느냐 하는 거기서 달라져요.
그런데 이제 아까 하던 말로 돌아가면 그 생각이 암만해도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부족하다 그 말이에요. 파고드는 그런 생각이 여기 이 성경을 낳게 된 선지자라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파고드는 사람들이거든요. 파고들되 이건 실천면에서, 이 사람들은 행동적으로 된 사람들이거든요. 아랍이 본래 사막지방이고 그렇기 때문에 깊은 사색보다는, 실제 문제로 심각하긴 심각한데 이 사람들은 행동적으로 된 사람들이에요.
이와 잘 대조되는 거는 인도 사람들인데, 인도는 그 사람들은 또 자연조건은 퍽 좋은 데가 있으니까, 비교적 먹고 살고 하는 데는 불안이 있다든지 그렇지는 않으니까 아무래도 생각을 자주 하게 돼요. 생각하는 데서 심각한 게 많이 오게 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도 생각 을 한다면 하지, 어찌 안하겠소? 그래도 파고들어가다 보면, 말하자면 파다 파다가 어디 가서 맺히는 여기까지 가지 않으면 마치지 않는다는 그런 것이 좀 있어야겠는데 그렇지 못해요.
사람은 호인이고, 아주 낙천적으로 된 점도 있어 낙천적이고, 친절도 하고, 재주도 있고 그래서 거 뭐 다른 데, 요새도 뭐 신문 같은 데를 보면, 세계 기술대회 같은 데 나가서 일등도 하고 그랬다는 기사들이 더러 있잖아요? 그리고 남이 하는 거면 곧잘 따라 하지요. 그런데 “나는 나로서의 뭐 깊이 들어간 데가 있어야지” 하고 바닥까지, 내가 나로서의 실질적으로 그 바닥까지 가지 않고는 말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점이 암만해도 부족하다 그 말이오.
그래 여기 공관복음 셋은 주로 바깥에 관한 것이니까 주로 “예수성이 어떤 때 이러셨대 이러셨대” 그거는 다 누구나 말하기도 좋아하고 듣기도 좋아하고, 하기도 쉬운 거예요. 그렇지만 이건 이「요한복음」은 똑 같은 예수를 놓고도 파는 편이 아니에요?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지? 왜 그게 뭐지? 그게 뭣이냐?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이 뭐냐? 어째서 자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렇게 됐느냐 그런 점을 아주 깊이 파지 않아요?
이건 그를 같이 따라다니면서, 그리 오랜 세월은 아니지만 그래도 선생님으로 섬기고, 한동안은 같이 다녔던 아마 사도 가운데 하나일 건데, 사도가 아니라도 그의 제자가 돼도 되고 어쨌거나 그 계통의 사람인데 이인 놀라운 그런 면이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특별히 내 가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또 내가 좋아하니까 그런 면에서 강조하고 싶어 이건 좀 보라는 거요.
성경에도 이제 좀 내려가면 바울 서간이 있잖아요? 바울 서간은 바울도 상당히 깊지요. 사상을 보면 아주 얼마나 깊어요? 가령 예를 든다면 “이 천지만물이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 탄식한다. 이 세상의 여기 보이지 않는 빛과 소리 속에서 이 우주 전체가 오는 무엇을 기다리면서 안타까워서 탄식을 한다” 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그건 상당히 깊이 생각을 하지 않고는 거기 가기 어려운 거 아니에요? 그런 점도 있지만 바울은 아무래도 제도적으로 됐던 구약 시대의 히브리 사람들의 종교에서 낳고, 거기서 그 문제를 당했으리만큼 그 면을 밝히기에 주로 힘을 쓴 사람이오. 그러니까 교리적으로 이런 데는 그걸 읽으면 퍽 많이 참고가 되고 그런 것이 많지만, 이 말로 할 수 없는 속의 깊은 신념 속의 깊은 데라고 하는 데는 이「요한복음」편이 훨씬 더 깊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본래 동양·서양을 달하면 동양 사람들이 속의 깊이를 파자고 하는 사람들인데, 그중에서 우리는 비교적 그런 생각이 덜한 사람들이오. 깊이 없는 민족이에요. 남이 하는 걸 보면 저건 우리도 해야지, 다른 사람이 먹는걸 보면, 그걸 내가 못 먹으면 그게 큰 수치로 알아요. 다른 사람이 입은 옷을 내가 못 입으면 그건 내가 아주 못생긴 걸로 알아요. 그런데 다른 나라에 가보면 그러냐 하면 그렇지는 않아요. 잘산다고 하는 미국 같은 나라에 가서도 보면 옷 모양이 다 같으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아 자기는 자기대로 남은 뭐 그런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 살림대로 자기 수수하면 수수한 것에 상당히 보람도 느끼고 그런 사람들이 상당수 있지요. 유행이 우리나라처럼 빨리 되는 나라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저 장사하는 사람들 장사하기에만 좋게 생겨먹은 사람들이에요.
그래 학문이나 종교 그런 점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싶어요. 천주교는 내가 모르겠고, 개신교는 우리나라에 들어오길 장로교·감리교가 먼저 들어왔는데, 같은 장로교를, 또 감리교를 우리가 전도 받아서 들어왔으면서도 일본 사람하고 우릴 비교해보면 암만해도 그 태도가 달라요. 우리나라 교회를 가면 떠들어대고 그저 흥청흥청하고 그러는 편이 많고 일본 사람들은 아무래도 우리보다는, 가면 벌써 잡소리가 없고 조용해요, 사람들 모두가. 그건 첫인상이 아주 다른 거예요. 중국은 아직 내가 가보지 않아 모르지만 중국 사람들도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데 재주는 우리가 있는 사람들인데, 어느 일면 열심은 있는데, 남이 한다면 나도 해야지, 그 의욕은 강한 국민인데, 다만 파는 그런 거는 덜한 거니까, 결심이 부족하니까 그 결과는 뭣이 되는고 하니 종교에서 종교적인 체험이 박약한 사람들이 되는 거요. 종교라는 것은 체험인데, 들어서 지식으로 아는 정도가 아니라. 체험이 됩니까? 체험하고 지식하고 어떻게 다릅니까? 그건 말로 하는 사람에게는 알게 해줄 수가 없어요, 자기가 역시 체험하기 전까지는. 하지만 그거야 환히 경계가 있는 것 아니에요? 지식적으로 그저 걸핏하면「사도신경」을 죽죽 외어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운운하고 “성경에 무슨 말 있습니까?” 그러면 그건 잘 외어요. 그리고 또 기도하라면 기도를 장강유수처럼, 청산유수처럼 한다고 그러잖아요? 그저 좔좔……‘ 그렇게 기도 잘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또 참 신앙이 반드시 있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에요.
그런 거는 곧잘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렇더라”, 그런 점은 아무래도 박약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그런 점은 그전에도 늘 하던 소리지만, 그래도 오늘 여기서도 첨 만나는 분이 있나 해서 걸림이 많이 될 줄 알면서도 일부러 이런 말 해보는 거예요. 나는 “종교가 그 종교 믿다가는 객사하고 만다” 그래요. 사람이 살다가 죽을 때 제집에서 죽어야지, 그렇지 못하고 길에서 죽으면 그런 불행이 어디 있어요 그래? 왜 갈 데를 못가고 객사 거 객사하는 것처럼 부끄러운 게 없는데, 종교란 뭐냐하면 여기 고속도로 같아서 일반 사람들이 가는데 그리 가는 게 편하니까 물론 서울서 여길 오려면 고속 타고 와야지요. 그러나 고속이 어디 내쳐 여기 이 집까지 와요? 저기 원주서 고속은 버리고 다른 차를 타고 또 그렇잖으면 걸어서 들어오다가, 천생 여기를 들어올 때는 마지막에는 내 발로 걸어서, 내 앉으라고 하는 자리엘 앉아야 이게 내 자리지, 그렇지 못한 것은 제 자리에 못간 거 아니에요? 사람이란 제 자리에 가잔 것인데 내 자리가 어디냐? 내 앉을 자리가 어디냐? 내 앉을 자리를 모르는 것은 살기를 건성으로 산 거요. 나이가 아무리 많이 들었다고 그럴지라도, 그러니까 직업을 해도 이것저것 헤매다가 가면 못 쓰는 거고. 내 할일이 뭔지, 내 타고난 천성을 찾아서 “나로서는 최대의 가장 의미 있게 할 것은 이거다.” 물론 이 사회가 어려우니까 조건대로 되지 않으니까 맘에 있으면서도 못하는 그런 거도 있지만, 그런 거는 다 그런 거로 인정을 하고라도 가능한 한도대로 나는 나로서는 나의 자리가 어딘지를 알아서 앉아야지요. 방안에 들어가서도 이 구석 저 구석 어디에든지 내가 한자리에 앉아야 안정을 하고 그러지, 앉을 자리가 없어가지고 왔다갔다해가지고는 정말 아무것도 못하고 그러잖아요.
생각이 어딘가 확신을 얻지 못하고 이럭할지 저력할지 남이 하면 하는 대로 따라가 가지고는 그건 신앙이 아니에요. 그럼 신앙이 아니면 뭐라 합니까? 그걸 가지고는 이 세상의 죄악을 이기지 못합니다. 목적은 뭐냐? 종교는 믿어 뭐합니까? 물론 종교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 그러지만 또 구원의 내용이 뭡니까? 이런 거를 자꾸 따져 물어봐야 합니다. 여기 있는 이 성경의 귀절을 그게 다된 것처럼 그렇게만 하시지 마시고.
그건 결국은 뭣이오? 따지고 따져 들어간다면 결국 종교란 살아 있는 동안에 악과 싸우라는 거요. 악과 싸워서 온전히 이겼나? 물론 완전히 이기진 못하지요. 이기진 못하더라도 싸우고 싸워 만신창이가 됐더라도 어쨌거나 그건 이 하나의 일개인으로 보면 완전한 완전한 자 리에는 아무도 갈 수가 없지만. 그래도 옳으냐 그르냐를 아는 것이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인데, 좋으냐 언짢으냐 아는 것은 그건 동물도 알아요. 그러니까 엊저녁에도 홍선생이 그랬나? 난 거 새마을 노래 “잘 살아보세 잘살아보세” 하는 것 싫어하는 사람이오. 국민을 지도한다는 데 기껏 한다는 게 그거예요? 잘사는 거야 어느 놈도 다 잘살겠다 하지 안하겠어요? 허나 잘사는 것은 적어도 사람에게 있어서는 옳게, 어느 것이 옳은 것이냐 옳은걸 하는 것을 잘산다고 하지, 옳으냐 그르냐 좋으냐 언짢으냐는 딴 거예요.
인류도 그 초기에 있어서는 그 옳은 거 그른 것 그리고 좋은 것과 언짢은 것이 일치했었어요. 착할 선(善)자, 이거는 도덕적으로 착하다고 하는 착함으로도 쓰이지만, 또 좋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도 써요.
그러나 구경(究境)에, 마지막 자리에 가면 아무래도 사람의 구경 자리는 지금의 우리로 하는 데는 도덕적으로 하는 데가 가장 높은 데니까, 그리고 그보다도 좀더 올라가면 우리가 영 (靈)이라고 하는 그 자리까지 가는데, 그렇다면 거기까지 가도록 해야 할 터인데 그 자리까지 간 사람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옛날에는 ‘승당입실’(升堂入室)이라고 그래요. 당에 오르고 방에 들어왔다 이 방에 들어와야지, 이 집에 들어와도 방엘 못 들어오면 지 자리에 못 들어온 거 아니오?
그럼 아무렇게나 종교를 믿는다고 해도 웬만한 밖의 것은 남이 하는 대로 다 알아요. 알 수가 있어서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 죄사함을 입어야 됩니다. 형제 사랑해야 됩니다” 그건 물론 누구나 다 알 수 있어요. 그거는 반드시 내 자리에 들어오지 않고 저기 이집 부근에만 와도 다 알 수 있는 거지만, 그 다음에 내가 참으로 내 마음에 안심이 되는 자리 내가 그렇다, 그렇다. 나도 이제야 내가 이것이 뭣인지 알겠다.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의 평화’ ‘평안한 자리’ ‘마음의 기쁨’ ‘하나님의 은혜’를 주는 그 자리엘 가게 되는 것, 그 자리의 맛을 다소라도 보게 되는 거는 내 자리, 소위 체험이라고 하는 그 자리를 가봐야 하겠는데, 그게 암만해도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부족하다 그 말입니다.
그거는 본래 우리나라 옛날에 있던 종교가 그런 식의 아주 낙천적인 종교예요. 낙천적이 돼서 좋은 점도 있어요. 좋은 점도 있지만 거 암만 해도 그것 가지고는 부족한데, 우리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본 거는 왜? 우리가 물론 잘못했기에 그렇지만, 잘못하는 중에도 고난이 이렇게까지 있다는 것은 웬 까닭인가? 그거는 아무래도 사람은 고생을 해봐야 철저하게 생각을 하게 되니까, 그래야 제 속의 바닥에까지 들어가보게 될 거니까, 역사가 그렇게 돼라고 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그건 물론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해서 무슨 프로그램을 짠 거 고정되어 있다 “난 그렇게는 생각을 안해요. 사람이 생각을 해가노라면 그걸 체험을 해 제가 알게 되는 거지요. 내가 체험하는 것과 객관적으로 한국 민족은 어떠할 것이다 미리 결정을 해놓은 것은 운명론이지 신앙의 생각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가 한다는 것과 하나님이 미리 알아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과가 어느 점에서 일치하나 그 자리를 알아보도록 이리 해야겠는데, 그게 암만해도 그 자리엘 못 가게 됩니다. 지금까지 온갖 어려움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 이 담에도 이 난관을 뚫고 나간다 해도 그건 역시 하다가 많은 희생을 내고, 많이 죽고, 마지막에 몇 사람이 남는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엘 가려면 “뚫고 나간다”고 하는 “이건 우리 일이다. 죽어도 이걸 위해, 살아도 이걸 위해. 이것 없이는 생존의 의미가 없다”고 하는 그런 문제를 붙잡아야 하겠는데, 그거는 “외국에도 라디오 있단다, 우리도 이제 라디오 듣는다” 그걸로 다 됐다 할 수가 없어요. 남들이 텔레비전 보니까 우리도 텔레비전 본다. 우리나라도 이제 자동차 만들 수 있다, 우리나라도 무기 만들 수 있다, 그거는 어느 나라도 다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것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는 거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사람 노릇했습니다” 그렇게는 안돼요.
각 나라의 훌륭한 점이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건 그 나라 사람이 아니고는 볼 수 없는 점이 영국이라고 한다면 영국 사람이 아니고는 볼 수 없는 다른 나라에서 흉내 낼 수 없는 무슨 특징적인 점이 있는 거고, 미국 사람은 수백 년밖에 안됐어도 미국 사람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뭣이 있고, 비록 완전은 못하다고 하지만 그런 것이 그 사상 속에, 그 행동 속에, 그 문화 속에, 그런 것이, 남는 뭣이 있어야 하겠는데, 그게 깊은 신앙이 아니고는 나올 수 없는 것인데, 그 신앙이 이런 건데 “하나님을 내가 직접 봤다. 내 눈으로 보고, 듣고.” 사마리아 여인이 가서 전도하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이 다 나오지 않았어요? 예수 만나서 일대 혁명이 일어나 가지고는, 가서 전도하니까 그 좋은 말이 “이제는 우리가 네 말을 듣고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눈으로 보고 믿는 거다” 그래요. 그러니까 눈과 귀로 어쨌든 종교의 말을 하면 본다는 것하고 듣는다는 것인데 그것은 천생 내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니까, 전해져온 것임을 알아야 할 테니까 그래 듣는다고 그래요. 불경은 시작이 될 때마다“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 “내가 들었다, 들으니까 이렇더라.” 듣는 건데 그건 뭐 개개인으로 어느 선생한테 들었다든지 그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 종교의 첨에는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까 위에서, 어디 딴 세계에서 와야 하는 것이니까 들어야 하는 거고, 들은 담에는 또 내가 보는 자리,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는 말도 있지만, 듣는 것만으로가 아니에요.
내가 체험을 하는 자리, 내가 내 눈으로 물론 보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거 아니라 내 마음으로 보는 거지만 그야말로 “참 목격” 이라고 그래요. 그렇게 된 담에야만 나와 내 종교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내 신앙이요 내 살림이요 그렇게 되는데, 그런 거를 당초 우리 선조 때부터 맨 처음에 누가 그랬는지 그건 우리가 알 수 없어요. 하지만 내려오다 불교 들어오고, 유교 들어오니까 그만 전체적으로 발달 하지 못하고 그랬겠지만 하여간 깊은 그런 발달을 못하고 불교에서도 그래요.
스님도 한 분 와 계시지만, 나는 내가 보기에는 우리나라 불교는 불교도 동양으로 와서는 아주 독특한 발전을 했거든요. 지금 인도에도 불교 뭐 도리어 그리 성하지 않아요. 다른 데도 다 있었지만 없어지고 동양에 있는 세 나라인데, 중국하고 일본하고 한국하고 세 나라인데 중국은, 중국은 그래도 있을 거요. 공산나라 됐다고 그러지만 있을 것이고. 동양에 이제 일본이 불교국 됐지, 한국에도 그래도 불교가 있기는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 결점은 한국에 들어와서 한국적으로 발전한 게 있어야겠는데, 그걸 아마 불교인더러 말하라면 있을 겁니다. 그 말 하기는 할 겁니다. 어느 정도 있겠지만, 기독교도 그렇고, 종교에서는 토착화라 말합니다만, 토착화가 과연 됐나?
그래 불교 얘길 해서 남의 종교를 확신 없는 점을 얘기해서 안 된 점도 있긴 하지만 그러나 우리나라 일로 생각을 하고 한다면 그렇잖아요? 옛날엔 우리나라에도 그렇게 훌륭한 명승들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왜 명승들이 그렇게 없나 그러면 여러 가지 얘기가 있겠지요. 하지만 중국이라든지 인도와 거래하고 왔다갔다할 때는 명승이 났는데, 그렇게 못되고, 그게 끊어진 담에는 나는 사람이 별로 없단 말이오. 최근에 뭐 이조에 들어와서 서산(西山) 하나를 들려나 모르지만, 그 담에는 명승이라는 이 옛날처럼은 못 나잖았어요?
또 기독교도 한국에 들어온 담에는 한국적으로 될수록은 토착화됐다고 그래야 좋은 거니까 될수록은 찾아보려고 그러긴 그러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공정하게 비판을 한다면 아무래도 우리가 아직 토착 못한 점이 많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전에 언제 그랬던가? 한 십년 전의 얘기지만, 내가 중앙신학에 다니던 때인데, 거기서 가르치고 하던 이로, 누구 누구라면 다 아는 이름 있는 목사였는데, 평상시엔 나하고 의견이 잘 통하지도 않는이고 해서 별 말도 없었는데, 한번은 미국을 갔다오더니 “선생님, 내 한번 써먹고 왔습니다” 그러든가 뭐라든가? 그 말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래 내가 “왜 그래요?” 그러니까, 미국에 가니까 그러더란 거예요. 어떤 사람이 묻기를 “한국에선 거 예배를 어떻게 보오?” 그러더란 거요. 그래 “예배를 어떻게 보긴 보오? 그저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 보고 그러지요” 했더니, 그 사람이 대뜸 뭐라고 하는고 하니 “선교사 그놈들이 가서 한국에다 우리 거 갖다가 강요했구나” 그러더란 거요. 그래 “건 왜 그런 거요?” 하니, “한국에는 한국의 식대로 하는 거 있잖소? 왜 여기서 하는 식대로 그렇게만 한단 말이오.”
그러고 나니까 부끄럽더란 거예요. 부끄러워서, 그래도 대답은 해야겠고 그래서 생각을 하다보니까 함 아무개가 생각이 나더래요. 그래 “우리나라에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소.” 그러고 나서 얘기를 했다는 거요. 그러면서 써먹고 왔다는 거 그 얘기인데, 그러면 그건 사람이 다르면 같은 기독교라 그러더라도 그 사람 나름대로의 시련이 있을 거 아니에요?
거 아까 “방안에 들어와 앉아야 된다” 즉 ‘큰 도’니까 종교를 도라고 그러는데, 물론 고속도로 같은 큰 도로도 도는 도지만 거기서 들어오면 갈래길로 오고, 그 담 우리집 마당으로 들어오고 문간으로 오고, 그것도 내버리고 마지막에 내 방에 들어와 딱 좌정을 하고 앉아야 하는 거예요. 이제 이 좌정하고 앉는 자리가 안신입명(安身立命), 내 노릇, 하나님 안에서 평안히 즐거움을 느끼고, 밖에 무슨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그래야 그게 사람을 살리는 종교인데 그게 자기로만 제 방에서만 하는 거예요. 남의 집 사람은 똑같은 그 자리라도, 남의 집의 자기식대로만 하겠지요. 그런 모양으로 종교도 다 생각하는 내용을 가졌으면 그 내용은 자기 나름대로 똑같은 거지만. 그래 아주 재미있는 것은 사람의 얼굴이 이날까지 이 지구에 왔다 간 인간이 얼마인가를 생각해보시오. 앞으로도 또 얼마나 오게 될는지 모르지만 똑같은 얼굴이 하나도 오지 않는 그런 재주가 어디 있어요! 어떻게 돼서 그럴까! 얼굴 생김도 그렇지만, 미국에서 몇 해 만에 전화가 와도 아무개란 것을 단박에 알아보잖아요. 음색, 소위 음색이란 건데 어째 그럴까요? 다 같은 공기파동인데, 같은 공기 파동을 가지고 어쩌면 뭘로 그렇게 다르게 조그맣게만 다른 게 아니고一특색을 낼 수 있을까요? ‘나’ 라 는 것은 그런 거니까 이제 그런 게 우리 속에, 이런 이게, 정말 생명적으로 믿음이 생겼나 안 생겼나가 중요한 거예요.
이제「요한복음」에서 좋다는 것은 그런 면에, 이게 뭐 유대교 쪽도 아니고, 외향적인 그런 것도 아니고 내적인 면을 말해주니까, 체험해서 읽어가는 그런 점에 퍽 도움이 되는 좋은 말씀이란 거예요. 그거는 왜 그런고 하니 이걸 쓰신 분이 사도 요한인지, 사도 요한의 제자인지는 모르지만 이이가 성격이 그랬던 건가 봐요.
여기서도 내려가노라면 그러잖아요? 종종 말하는 예수님의,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라 그랬는데 뭘 두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성격이 좀더 잠잠했거나, 아마 나이도 더 어리지 않았나 싶어요. 그리고 예수님 같은 이가 무슨 차별을 해서 어느 누구를 더 각별히 사랑하고 그러진 않아요. 어느 누구를 더 사랑하고 차별이 있을 리는 없지요. 그러나 어쩐지 무슨 특별한 뭣이 있었던가봐요. 그래 다른 사람들이 알기를 “저 사람은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라 그랬고, 마지막에 만찬을 할 때 얘기를 하면서도 예수님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 거다” 이러니까 베드로가 있다가 베드로는 또 아주 서슴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게 좀 궁금하니까 요한보고 “그거 좀 알아봐” 그러니까, 요한이 옆에 기대 있으면서 “그게 누구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예수님이 아마 저쪽은 들리지 않게 얘기했을 거예요 “내가 이제 빵을 포도주에 찍어서 주는 사람이다” 그러고서 주었다 그러잖아요?
그랬는데 “유다가 그걸 받아가지고 나가니까 마지막이더라” 그런 것을 보면, 근래도 이 말을 하는 사람이 여기 이걸 꺼내가지고, 우치무라와 같이 거칠지 아니한 사람도 그런 말 하는 것을 보면 성격이 독특한 내면적인 내면적인 것만이 좋다는 거 아니에요. 물론 외면적인 것도 있어야 하지요. 현실면 없이 뭐 생각만 하고 있겠어요?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근본되는 거는 그러해야 하는데, 사람이 사람 된 특색은 현상을 보고 그 뒤에 뭣이 있는지 아는 거란 말이오. 다른 건 식물이나 동물에서도 다 볼 수 있지만 깊은 내면적인 것은 볼 수가 없잖아요? 아무튼 이「요한복음」의 저자는 그런 내면적인 데가 있는가 봐요. 그러니까 같은 예수라도 마태가 전해준 것과도 다르게, 누구가 한 것과도 또 다르게, 내면적인 예수를 말한 것인지도 몰라요.
다른 복음에서 못 보게 되던 것을 여기서 보여주는 이 글을 쓴 이가 공관복음에 있는 것을 세세하게 반복하지 않은 이유는 그런 것은 거기 있으니까 봐서 다 알고, 자기로서는 자기대로 하고 싶은 말을 했겠지요. 이래서 이런 걸 쓰는데, 공관복음에 있는 거는 다 아는 걸로 그렇게 인정을 하고 쓴 거 같은 자취가 보여요.
맨 첨에 이제 첫마디, ‘로고스’부터가 중요한 거예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 이라.”(「요한복음」, 1장 1절)
내가 지금 구역을 읽는데 일부러 구역을 읽는 거는 아니에요. 하지만 이걸 좀 읽어두시오. 이게 공동번역으로 됐다 그러는데, 이건 뭐 덮어놓고 새로 됐다 그래서 다 좋은 거 아니에요.
그건 “한 처음” “맨 처음”이라고 하는 게 제일 좋을 거요. 만물이 되기 전 어쩌구 하는 것보다는 “한 처음”이라 번역했는데, 그래 이런 거는 이걸 어떻게 하나? 무슨 말로 번역을 하나 하는 게 어려운 일이에요.
왜냐하면 그거는 생각이 깊은만큼 가령 불교에서 실례를 든다면, 불교에서 얘기를 할 때 부처님이 “일시에”라고 한 말이 있다고 하는데 그걸 “한때는” 할 것이냐 “한번은” 할 것이냐 “언제는” 할 것이냐 그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래요. 그게 뭐 같은 소리로구만 그러겠지만 그러나 그걸 미묘한 데까지 따지고 들어가는 사람한테는 “어떤 날” 그러는 말과 “한 날” 그러는 말과 뜻이 다르다 그 말이오. 그건 이제 남의 글을 번역해보려고 그러면 알아요. 그러니까 번역이란 건 의미만 통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그 말하려고 하는 그 기분이라고 할까 그 맛이 어디를 겨누고 한 말이냐를 알아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를 쓰기가 어려운 거예요. 그저 흉내는 내기가 쉽지만 그저 아무것도 없는 거, 자기의 그 미묘한 것을 나타내는 것 없이 시가 될 리가 있어요? 감격이 오는 거는 그런 것에서 오는 건데.
여기 “맨 처음” 하는 거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했는데, “맨 처음”이란 것도 그렇고 말씀이란 것도, 그걸 알려면 부득이 설명을 조금 들어야 하는데 그건 여기서는, 그리고 나로서도 깊이까진 모르니까.
하지만 다른 복음에선 예수님을 말씀할 때 그렇게는 말씀 안했어요. 이건 물론 예수님이 어떤 이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이렇게 쓴 것인데, 「마태복음」에서는 아브라함까지 캐올라갔고「누가복음」에선 그것으로도 만족을 못할 것 같아서 아담까지 올라갔고,「마가복음」에는 그런 것 없이 그냥 쉬운 말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그렇게 했고 그랬지만, 이이는 어디까지 올라갔느냐 하면 천지창조 전 하나님의 그 자리까지 올라가요.
그럼 그 자리가 무슨 자리냐? 그 로고스라고 하는 그 자리는 무슨 자리냐? 그 사람도 그걸 로고스란 말로 쓰는 거는 그걸로 밖에는 표시 할 말이 없어 그랬어요. 우리가 로고스란 것은 잘 모릅니다만, 본래 이거는 히브리 말이 아니고 희랍 말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역사가 망하니까 자기 말을 잊어버리고, 뭐 특별한 사람들만 쓰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돌아다니는 희랍 말을 많이 쓰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구약을 제 나라 말로 읽지를 못하고 희랍 말로 번역을 하게 될 필요를 느끼게 돼서 그것이 벌써 예수님 나시기 몇 세기 전에 ‘70인 역’ (Septuagint) 이라는 거 됐어요. 이 로고스란 말은 70인 역에서 필로(Philo)라는 사람이 사용을 많이 해가지고 써서 그 말을 인용한 거랍니다.
그런데 그럼 본래 로고스란 말은 히브리 말이 아니고 희랍 말이니까 거기서 무슨 뜻으로 하느냐 하면 ‘이성’(理性)이란 말로 할 수도 있고 ‘말’(言語)이란 뜻으로 할 수도 있고, 철학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많이 쓰는 거예요.
여기「요한복음」에 로고스를 끌어온 것은 희랍 철학의 사상을 그대로 도입해온 거는 아니고, 그때 이 사람들도 벌써 로고스란 말을 희랍 말을 빌어 쓰지 않고는 안될 정도로 희랍 말 속에서 살고 있어요. 그러니까 자연히 이렇게 표시가 된 것인데, 공관복음과 다른 거는, 공관복음에서는 아무래도 히브리적인 옛날의 유대교적인, 구교적인 색채를 아직도 완전하게 벗어버리지 않은 것이 많이 있는데, 이건 벌써 이즈음에 오면 생각하는 것이 희랍 말을 빌어서 쓰지 않으면 안될 그런 형편이 된 거니까, 우리가 그런 것을 알고 참작을 하고 보는 게 좋을 거예요.
그래 우리말로 한다면 ‘말씀’이라 그럴 수도 있고 ‘이성’이라 그럴 수도 있고 ‘도’라 그럴 수도 있고, 그냥 한문으로 한다면 그냥 도(道)라 하면 좋아요. 그러나 지금은 또 도란 그 말이 잘 안 쓰이니까, 그말 쓸 수가 없습니다만, 말씀이란 번역으로 좋고 “말씀이 계시니까” 그러니 문제는 예수가 어떻게 돼서 왔는가, 예수의 오게 된 내력에 대해서 말 하잔 것인데. 이 태초에서부터 맨 처음 맨 처음이란 시간이 본래 없어요. 말을 하려니까 맨 처음이라 그러지요. 이걸 우주 과정으로 보려면 한이 없이 올라가는 거지, 어디 뭐 그런 거 있어요? 맨 처음이란 없는 것인데, 처음이 없는 우주인데, 말을 하려니까, 그 뜻을 말하려니까 천지고 뭐고 그것도 있기 전이니까 맨 처음이라 했는데 그때부터란 거예요.
그것을 우리가 본대부터 하던 말로 한다면 하나님이랄 수 있어요. 물론 이것은 성경이 가리키는 하나님과 좀 다르지만 그래도 비슷한 점이 많이 있어요. 이건 우리에겐 퍽 다행이에요. 비록 성경에 있는 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상과 일치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도 그런 비슷한 말이 있어서 이걸 이해하기 쉽지가 않겠나 싶어요.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쌈이 있어서 그건 좀 안됐지만, 상관은 없어요. 우리나라 말로 ‘하나님, 하느님’, ‘느’자로 하느냐 ‘나’자로 하느냐는 문제가 아니에요. ‘느’ 를 ‘나’로 발음을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라고 하는 거는 개신교가 처음 들어올 적에 번역을 할 때 하나로 썼어. ‘나’는 하나님이란 한 분이라는 그 유일사상이 좋아서, 그게 또 마침 일치도 되니까, 이날까지 써오던 거니까 그걸 버리기 싫어서 ‘나’로 하자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또 일반 사람들도 알기 쉽게 ‘느’ 로 하자는 사람도 있고 그래요. 나는 어느 편이냐 하면 ‘하나’ 라고 이때까지 신앙하면서 그래왔으니까 그대로 하자 그러는 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싸움할 필요 없고, 우리나라의 마지막 쓰는 모음, 점으로 된 글자, ‘·’ 이거 하나로 쓰면 그 문제는 자동으로 해결이 돼요. 그거는 ‘으’자도 아니고 아어오우으의 모든 모음의 기본 가는 음이니까. 그건 실제 증거도 있잖아요?
우리 그런 거 많이 있지. ‘애기를 낳는다’ 그러는데 어떤 데를 가면 ‘애기 놓는다’ 그래요. 또 ‘파리’가 있는데, 전라도에 가면 ‘포리’라 그래요. 또 ‘흙’을 가지고 ‘할’이라 하는 데도 있어요. 그런 거는 다 ‘·’ 요 음을 찍으면 악센트가 없는 거고, 큰 ‘아’ 를 쓰면 이건 아주 크게 입을 벌려가지고 하는 ‘아’고 ‘어’고 ‘오’인데, 하나님 할 때는 악센트가 안 가니까 ‘아’로 되는 때도 있고 ‘어’로 되는 때도 있고 ‘오’로 되는 때도 있고. 그래서 ‘하날' 하기도 하고 ‘하눌’ 하기도 하고 ‘하늘’ 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런 걸 알기만 하면 우리말로 아주 편하게 쓸 수도 있어, 거 뭐 그리 쌈 안해도 괜찮은데 근래에 크게 문제가 되어서 그럽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맨 처음에 나는 내가 이걸 볼 때마다 그랬더니, 다른 이도 이 말 하는 이가 있어요. 여러 해 전에 이걸 생각하다가 이건 가만히 맛을 보셔야 돼요. 다른 사람은 그 맛을 몰라요 이게 꼭 뭣 같은고 하니, 저기 음악 하는 선생이 있지만, 음악을 오케스트라 지휘하는 사람들이 이제 나서서 지휘를 하려 그러다가 탁 하는 그 순간에 해당하는 것이오. 거 생각해보시오. 그 사람 속에 음악이 잔뜩 들어 있거든. 이제 이 곡조를 가지고 그걸 지휘하려고 그러는데, 어느 순간에 가서 이걸 할 것인가?
그걸 이제 여리분이 가만히 명상을 해보면 알 거예요. 첨에는 명상이 잡념이 자꾸 나지요.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 나서 그러면 그거 별거 없습니다. 아니 아니 하고 자꾸 꺾어버리세요. 그걸 이런 생각이 왜 나나 백 날 생각해도 소용 없어요. 자꾸 꺾어버리다보면 어딘가 가다가는 줄이 잡혀서 생각을 하기 시작하잖아요? 생각이 돼서 생각이 나기 시작하면 입을 열기가 싫어지잖아요?
그걸 경험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생각나면 곧 발표하고 싶어지는 게 아니라, 할까 말까, 어쩌면 말이 나갈 듯도 싶고 하잖아요? 그저 생각나서 하는 말이라고 해서 쑥쑥 하는 말이라면 그건 마세요. 그것은 하나 마나예요. 그건 안해도 괜찮아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자는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런 그 포인트까지, 그 점에까지 가기까지는 어디 가만히 기다려보세요.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 말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저 가만히 계셔보세요. 계시려 해서가 아니라, 아마 다른 분들도 난 그런 줄 아는데, 그러니까 첨을 턱 내기가 참 어려운 말이란 거요.
구약에 “맨 처음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러면 “뭘 하나님 이 창조하기는 창조해. 하나님이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네가. 네가 가 봤냐?” 그러겠지만 그 말을 첫말로 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어느 지경에 가 있다가 그 말이 쑥 나오는 거예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