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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에 호랑이가 나타났다!
아침 9:43경. 나는 지금 사직단을 향해 접근하고 있다. 인왕산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여 5년 만에 인왕산을 다시 찾고 있는 것이다. 후후! 진짜 호랑이가 나타났을 리는 만무하고, 종로구에서 예전 인왕산 호랑이를 추억하며 호랑이 동상을 세워놓았단다. 사직단 옆 도로에는 관광버스 몇 대가 서있다. 그런데 버스 앞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는 우리말이 아니다. 중국인들이 단체로 이곳을 찾은 모양이다. 길거리에는 ‘中共必須立卽停止迫害法輪功’라고 쓰인 펼침막을 걸어놓고 몇사람이 파륜궁(法輪功)의 동작을 취하고 있다. 중국 당국이 정치세력화 할까봐 파륜궁을 박해한다고 하더니, 박해 금지를 요구하는 펼침막을 걸어놓았구나. 파륜궁에 관계되는 중국 관광객들이 단체로 인왕산을 찾은 걸까?
사직단 앞에 왔으나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 바라보기만 할 뿐. 안에는 국토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단(社壇)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직단(稷壇)의 두 개의 단이 나란히 있다. 조선은 이곳에서 매년 4번씩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리고, 그 외에도 기우제, 고유제 등을 드렸다. 사극을 보면 신하들이 종묘사직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경우를 보는데, 그만큼 농업국가인 조선에서는 사직을 왕들의 신위를 모시는 종묘만큼이나 중요시 했다는 것이다. 들어가 볼 수 없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이런 신성한 공간을 아무나 들어가게 할 수는 없겠지.
사직단 뒤에서는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이 마당 좌우에 서서 사직단을 내려다보고 있다. 부녀가 한 자리에 있긴 한데, 율곡은 수염을 기른 점잖은 양반으로 표현한 반면 신사임당은 그에 맞춰 할머니로 하지 않고 기품 있는 중년여인으로 조각하니 부녀가 아니라 부부처럼 보인다. 작년에 발권된 5만원권 지폐에 신사임당이 들어갔으니, 이미 5,000원권 지폐에 들어가 있던 율곡과 함께 우리나라 지폐에서도 부녀가 나란히 들어가 있는 게, 그만큼 우리나라의 대표적 모자지간이란 얘기이리라.
사직단 바로 뒤는 또 단군성전이다. 이정봉, 이숙봉, 이희수 세 자매가 1968년 건립하여 현정회에 이관한 성전이다. 얼마 전 3. 15.에는 이곳에서 현정회 주관으로 단군이 다시 하늘로 올라간 날을 기념하여 단기 4343년 어천절(御天節) 대제를 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어천절은 음력 3. 15.이라고 하던데?? 어차피 정확한 날이 아니기에 그냥 양력 3. 15.에 행사를 치루는 것인가? 성전 안에는 단군이 두 손을 소매 속에 넣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좌우에는 ‘弘益人間’, ‘理化世界’라는 단군왕검의 건국정신이 힘찬 붓글씨로 쓰여있다.
그러고보니 이곳은 단군왕검과 함께 토지와 곡식의 신이 같이 하는 성스로운 곳인데,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지 않았는가? 뭐~ 일제를 뭐라 할 것 없다. 광복 후 한참 세월이 지났어도 우리도 이곳을 그대로 사직공원으로 놔두고 심지어는 도로를 낸다고 사직단 정문을 14m 뒤로 후퇴시켰다. 나 역시 ‘사직단’보다는 어렸을 때부터 입에 오르내리던 ‘사직공원’이 더 자연스러웠지 아니한가?
단군성전 옆 도로를 따라 오르는데 활 쏘는 소리가 들린다. 황학정(黃鶴亭)이라는 사정(射亭)이다. 황학정에서는 3명의 남녀궁사가 건너편 과녁을 바라보며 신중하게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황학정은 원래 이곳이 아닌 경희궁 내에 있던 사정이다. 그러던 것을 1922년 일제가 황학정 자리에 총독부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황학정을 이곳으로 옮겼다. 그런데 이 자리도 원래는 등과정(登科亭)이라는 사정이 있다가, 1894년 갑오경장 이후 군대의 무기에서 활이 제외되면서 사라진 것이라 한다. 황학정이 나라 잃은 슬픔에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쫓겨났지만 그나마 아주 엉뚱한 곳으로 가지 않고 등과정이라는 사정 자리에 이주된 것을 다행이라 해야 하나?
황학정 옆으로 바위를 타고 오르니 보이는 표석에는 ‘조선의 마지막 택견 수련터“. 택견 초대 인간문화재인 송덕기 옹이 구한말 이곳에서 택견꾼 임호 선생에게 택견을 배웠다는데, 이걸 기리기 위하여 지금도 후예들이 이곳에서 수련을 하고 있다고 한다. 표석 앞으로는 수련장으로 쓰이는 듯한 둥그런 터가 조성되어 있다. 황학정만 생각하고 이곳으로 왔다가 택견 수련터까지 알고 가게 되네.
10:15경 인왕산의 허리를 지르는 북악스카이웨이로 올라서니 호랑이 한마리가 어깨를 웅크리면서 나를 노려보고 있다. 이크! 요놈이 여기에 있었구나. 호랑이가 밟고 있는 받침돌에는 ‘청와대와 경복궁을 지키는 호랑이’, ‘인왕산에 호랑이가 돌아왔다’라고 쓰여있다, 조선이 정궁인 경복궁을 만들 때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였으므로 우백호는 인왕산, 좌청룡은 낙산이 되니까 ‘청와대와 경복궁을 지키는 호랑이’라고 하였나? 그런데 조선조에는 정말 인왕산에 호랑이가 살고 있어, 태종 때에는 호랑이가 경복궁 안에까지 들어오고, 연산군 때에는 종묘까지 침입할 정도였다는데, 그런 무시무시한 호랑이를 우리 선조들은 무섭다고 멀리하지 않고 우리 민속으로 끌어들였다. 실제로 중국의 호랑이 그림은 무섭기 짝이 없는데, 우리의 민화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그런 무시함보다는 친근함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10:35경 서울시 민속자료 4호로 지정된 선(禪)바위에 도착하였다. 두 명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서있는 것처럼 보여 참선한다는 ‘禪’자를 따서 선바위라고 하는데, 선바위는 두 개의 바위가 구멍이 숭숭 뚫린 채로 우뚝 서 있는 것이 언제 보아도 기기묘묘하게 생겼다. 예부터 아이를 갖기 원하는 아낙네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많이 하여 선바위는 기자암(祈子岩)이라고도 불리는데, 지금도 4명의 아낙네들이 선바위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혹시 힘차게 우뚝 선 바위가 남자의 힘찬 물건을 연상시키기에 아이 낳기 원하는 여인들이 끌린 것은 아닐까?
선바위에 얽힌 전설 하나. 조선 건국시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도성을 쌓을 때 선바위를 도성 안으로 할 것인가, 바깥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설전(舌戰)을 벌였다고 한다. 무학대사야 당연히 성 안쪽으로 넣자고 하였을 것. 그런데 결국 정도전의 주장이 채택되어 선바위가 도성 밖으로 밀려나자, 무학대사는 이제 중들은 선비들 책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탄하였단다. 정도전과 무학대사는 경복궁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두고도 논쟁하였는데, 인왕산 밑에 두자는 무학대사의 의견 대신 북악산 밑에 두자는 정도전의 의견이 채택되어 경복궁이 지금처럼 놓이게 되었다.
이 근처에는 선바위만 기기묘묘한 것이 아니다. 선바위 오른쪽 위 능선엔 하얀 바위 뒤에 검은 바위가 바짝 붙어 있는 것이 마치 수놈 바위가 뒤에서 암놈 바위를 덮치고 있는 것 같다. 선바위 밑 국사당으로 내려간다. 국사당은 원래 남산(목멱산) 꼭대기 지금 팔각정 자리에 있었다.
이리 옮겨온 데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종묘, 사직을 정한 후 남산에 목멱신사를 세우고 매년 두 차례 남산의 산신(목멱대왕)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 후 태종 때에는 삼신(천신·산신·수신)과 함께 태조, 그리고 무학대사 등도 모시고 국사당(國師堂)이라 하였다. 그런데 1925년 일제가 지금의 남산식물원 자리에 자기들 신궁을 지으면서 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는 조선의 신사를 강제로 이리로 옮긴 것이다. 그래도 그대로 없앴다가는 후환이 두려워서 그나마 이곳으로 옮겨놓은 것이겠군.
이렇게 이곳에는 기도의 영험이 있는 선바위와 국가적 신사였던 국사당이 있기에 이 주위의 바위와 계곡 물가에는 무속인들과 이들을 따르는 기도객들이 끊이질 않는다. 이곳 국사당에선 올해 백호해를 맞이하여 음력 3. 2.(양력 4.15.) 무형문화재 20호인 이명옥 만신을 모시고 ‘천지안정, 대동화합,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인왕산 대산신제를 올린다고 한다. 올해가 60년 만에 돌아오는 백호해라고 하니 우백호인 인왕산에서 대(大) 산신제를 올리는 것이겠지?
이제 인왕산 꼭대기로 오르기 위해 서울 성곽 있는 곳으로 오니, 공사중이라며 올라가는 길을 막아놓았다. 할 수 없이 우회로를 찾아 스카이웨이를 따라 산허리를 돌아가는데 머리 위로 인왕산 정상부를 이루는 커다란 바위무리들이 나온다. 역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치마바위. 치마바위에도 애달픈 사랑의 사연이 스며있다.
중종이 쫓겨난 연산군 뒤를 이어 왕이 되고나서 왕이 되기 전에 결혼하였던 본부인 단경왕후 신씨의 고모가 연산군의 비이고 아버지가 연산군의 매부라는 이유로 강제로 이혼을 당하였다. 중종은 이렇게 헤어진 본부인이 그리워 경복궁 내 높은 누각에 올라가 인왕산 밑의 본부인 집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하였단다. 이런 소식을 들은 신씨가 궁중에 있을 때 자주 입던 분홍색 치마를 인왕산 바위에 널어 왕이 볼 수 있도록 하였고... 이런 애틋한 사연이 입을 통해 돌고 돌아 그 때부터 사람들이 신씨가 치마를 널었던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쯧! 쯧! 명색이 전제군주인데 자기가 원하지 않음에도 사랑하는 아내와 헤어져야 하다니... 하긴 쿠데타 세력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으니 중종이 무슨 힘이 있었겠는가?
11:35경 인왕산(仁王山) 정상에 서다. 조선 전기에 이 산에 인왕사(仁王寺)란 절이 있어 인왕산(仁王山)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인왕산 이름에도 장난을 쳤다. 인왕산(仁王山)의 ‘王’자를 일본이 조선의 왕을 누른다는 뜻에서 일본(日本)의 ‘日’자를 덧붙여 ‘旺’자로 하여 인왕산(仁旺山)이라고 했던 것이다. 해방 후에도 한동안 이를 모르고 ‘仁旺山’으로 그대로 쓰다가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이해서야 겨우 본래 이름을 찾았다.
정상에는 인왕산의 젖꼭지인양 바위 하나가 올려져있는데, 나는 정상에 발자국을 남기기 위해 그 바위 위까지 올라간다. 바로 앞으로는 서울 시가지와 그 건너편 남산이 옅은 안개 속에 경계를 살짝 흐리고 있다. 눈을 왼편으로 하니 푸른 기와집 청와대 위로 북악산이, 그 뒤로 서울의 외사산인 북한산이 듬직한 모습으로 서울을 호위하고 있다. 몸을 뒤로 돌리니 바로 무악재 건너에선 남산에 최종적으로 봉수를 전달해주는 안산이 나를 바라보고 있고...
이제 성벽을 따라 계속 길을 내려간다. 성벽 위로 성 밖 경치를 구경하며 가던 길은 중간에 성벽 밖으로 내려가더니 성벽 밑을 따라간다. 그러다보니 성벽의 돌들이 내뿜는 역사의 향기를 그대로 맡을 수 있어 좋다. 가다보니 네모반듯하게 잘린 돌들로 차곡차곡 쌓여 올라가던 성벽이 그 바로 옆의 성벽에선 잔돌로 올라가고 있다. 멈추어 성벽 전체에 시선을 두니 성벽 위를 나란히 달려가는 여장도 갑자기 하얀색으로 깨끗하게 목욕을 하였다. 잔돌로 쌓아올린 성벽은 태조 이성계가 빨리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기 위하여 급하게 쌓아올린 성벽이고, 네모 반듯하게 쌓아올린 성벽은 숙종 때 시간을 가지고 튼튼하게 쌓아올린 성벽이리라. 머리 위의 하얀색 여장은 물론 최근에 새로 성벽 보수하며 개축한 것이고... 마치 시간의 흐름이 내 앞에서 한 화면에 동시에 보여지고 있는 것 같다.
12:14경 내 발길이 닿은 곳은 청운공원. 원래 있던 청운아파트를 헐고 공원을 조성하였다. 여기에 오니 내 중학교 때 청운아파트에 살던 이모댁을 찾아오던 추억이 기억 저편에서 아련히 떠오른다. 청운공원에도 호랑이 한 마리가 돌아왔다. 그런데 백호다. 화강암을 깎아 조각하다보니 백호가 탄생한 것일 텐데, 올해가 백호의 해라 녀석이 더욱 빛나 보인다. 아까는 청와대와 경복궁을 지키는 녀석이더니, 지금 이 녀석의 이름은 ‘문화강국 호랑이’.
호랑이 옆에는 달걀 모양으로 선반 프레임을 짜 각 구획마다 크고 작은 돌들이 쌓여있는 작품이 있다. 제목을 보니 ‘공공의 기억 살리기 프로젝트 :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 이 작품은 2007년 공간문화기획그룹 ACIA의 건축가 조임식, 최연숙, 신승수씨가 기획하고 디자인한 것으로 전체 모양을 인왕산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담은 바위 모양으로 디자인하여, 여기에 성황당에 돌을 쌓듯이 시민들이 소망과 염원을 담아 돌을 쌓도록 한 것이다. 나도 소망과 염원을 담아 돌무더기 위에 또 하나의 돌을 올린다.
청운공원에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조성되어 있다. 윤시인이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이곳 인왕산 자락의 누상동에 있던 소설가 김송의 집에 하숙하면서 ‘서시’, ‘별 헤는 밤’ 등의 작품을 썼기에 이곳에 윤시인의 언덕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언덕에는 우리기 익히 잘 아는 ‘서시’가 돌에 새겨져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시인은 잔학한 일본놈들의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29살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지만, 시인의 문학은 이렇게 남아 여기에 문학동산을 만드는구나.
12:37경 자하문 고개를 넘어가는 찻길을 건너 1.21. 사태 때 무장공비들을 검문하다가 순직하신 당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 앞에 섰다. 그런데 동상 옆에는 순직비가 또 하나 서있다. 나는 당연히 최경무관의 순직비인가 했으나, 비에는 ‘정종수 경사 순직비’라고 쓰여있다. 정종수 경사는 당시 공비들의 흉탄에 쓰러진 또 하나의 경찰이었다. 이런! 최경무관에 가려 또 하나의 순직경관 정종수 경사를 그동안 모르고 있었구나. 죄송합니다!
동상 옆에는 또 하나의 표석이 있다. 이건 또 뭔가 하며 보니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경사와는 상관없는 것. 이곳에서 북동쪽 북악산 정상 쪽으로 약 150m 지점에 항상 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약수터가 있으므로 이를 청계천 발원지로 정하였단다.
나는 백사 이항복이 자기 집 뒤 암벽에 자기 집터를 나타내는 필운대(弼雲臺)라는 글씨를 새긴 것이 지금껏 남아있다고 하여 마지막으로 이를 보기 위하여 자하문 고개를 내려간다. 내가 지금 발길을 터벅터벅 내려가는 고개 오른쪽 계곡은 겸제 정선이 자신의 그림 청풍계도(淸風溪圖)에 담은 청풍계곡이나, 지금은 집들이 빼곡히 점령하고 있다. 겸재의 그림에 나오던 그 아름다운 계곡은 어디로 간 것인가?
고개를 바로 밑으로 숙이니 칙칙한 물이 자하문 고개를 적시며 고개 밑의 주택가로 실개천 되어 흘러가고 있다. 청계천 물은 발원지 약수터에서 출발한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 이렇게 오염이 되어 흘러가고 있는 것인가? 그나마 이렇게 흘러가던 청계천은 중간에 건천이 되어 증발되어 버리고 그 위는 복개되어버렸다. 지금 서울시민의 품에 돌아온 청계천은 무교동 동아미디어센터 앞 청계광장에서 다시 흘러내려가고 있지만 청계천을 제대로 복원하려면 여기 청계천 상류도 다시금 햇빛을 보게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서울시에서는 청계천의 상류인 백운동천과 중학천을 올 연말까지 복원한다고 한다. 복원된 청계천 상류의 모습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고개를 내려오니 길옆에 또 하나의 표석이 있다.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경사가 순직한 자리란다. 그럼 이들이 순직한 곳이 아까 고개 위의 동상이 있던 곳이 아니었구나. 이 자리에서는 바로 지척이 청와대인데 당시 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청와대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당시는 군부독재 시대인데 그런 군부독재의 시대에 무장공비가 바로 청와대 코앞까지 올 때까지 막지를 못했으니...
자하문길을 건너니 이번엔 또 뭔가? 송강 정철이 태어난 곳이란다. 청운초등학교 담을 따라 우리가 익히 아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송강의 작품들을 돌에 새겨놓았다. 그중 ‘산사에서 밤에 읊다(山寺夜吟)’는 시 하나만 여기에 옮겨본다.
우수수 지는 나뭇잎 소리를(蕭蕭落木聲)
성글은 빗소리로 그릇 알고(錯認爲疎雨)
스님 불러 문밖에 나가보라 했더니(呼僧出門看)
시내 앞 남쪽 나무에 달만 걸려있다 하네(月掛溪南樹)
시인이 비가 오냐고 물으니 시내 앞 남쪽 나무에 달만 걸려있다며 선문답식으로 비가 오지 않음을 우회적으로 답변하는 스님의 말에서 인생의 멋과 풍류를 느낄 수 있어 좋다. 어지러운 당쟁에서 물러나면 이런 좋은 시와 가사작품을 쓸 수 있으면서도, 당쟁의 한복판에 서면 시인은 왜 그렇게 상대 당파에 대해선 그렇게 잔인하고 냉정해지는 것일까? 정치란 속물은 아무리 멋을 아는 시인도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괴물인가?
송석원길을 걸어가는데 서울농학교 맞은편에 우당 이회영 선생의 기념관이 보인다. 서촌에 우당기념관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예정에 없던 것이기에 이렇게 우연히 발견하니 뜻밖의 반가움이다.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에 옮겼던 우당 선생은 백사 이항복의 10대 손이자, 내 고교 동기인 이종걸 민주당 의원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교육방송의 한국독립운동사 프로의 사회자로 나와 우당 선생의 발길을 따라가 대련에서 우당 선생의 최후를 전하며 울먹일 때 나 또한 우당 선생의 숭고하고도 비참한 삶과 그런 우당 선생을 그때까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부끄러움에 울먹였었지. 그런 우당 선생의 기념관에 들어가려니 가벼운 흥분이 인다.
중국식 방한복을 입고 털모자를 쓰고 있는 선생의 전신사진 앞에 선다. 나라가 망하자 지금의 시세로 600억원이나 되는 재산을 전부 처분하여 만주로 떠나 갖은 고초를 겪으며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우당 선생과 그 형제들, 그 많은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딸의 옷까지 팔아 입에 풀칠을 해야 할 만큼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꼿꼿한 기품을 잃지 않던 선생. 그러면서 말년에는 아나키스트로 활동하다 1932년 일경에 잡혀 모진 고문 끝에 돌아가신 선생. 나는 그런 선생의 일생을 돌아보며 새삼 선생의 사진 앞에서 고개 숙인다.
기념관 안을 둘러보며 새로 알게 된 사실. 전시물 중에는 선생이 청년시절 상동교회에서 청년부 활동을 하며 사용하던 귀퉁이가 너덜너덜한 찬송가책이 있다. 구한말의 우당 선생은 당연히 유학자일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선생은 이렇게 새로운 사상에도 열린 마음을 가지셨다. 또 멋들어지게 난을 친 난(蘭) 그림 연작도 있어, 누구 작품을 여기에 갖다놓았나 했더니 선생의 작품이다. 선생이 이렇게 예술에까지 조예가 있었을 줄이야!
잠시 선생이 1910년 만주로 떠나기 전 형제들이 모인 자리에서 하신 말씀 ‘생사 막론하고 혈투’를 생각해보자.
슬픈 일이외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가족에 대하여 말하기를 대한공신의 후예여서 국은과 세덕(世德)이 일세에 관(冠)하였다고 일컫고 있소이다. 그러므로 우리 6형제는 국가로부터 동휴척(同休戚)할 지위에 있습니다. 이제 한일합방의 괴변을 당하여 반도 산하의 판도가 왜적에 속하였습니다. 우리 형제가 당당 명족(名族)으로 대의 소재(大義所在)에 영사(寧死)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도(苟圖)하면 어찌 금수와 다르리오. 이때에 우리 형제는 당연히 생사를 막론하고, 처자노유(妻子老幼)를 인솔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차라리 중국인이 되는 것이 좋을까 하오이다. 또 나는 동지들과 상의하고 근역(槿域)에서 운동하던 제사(諸事)를 만주로 옮겨 실천코자 합니다. 만일 타년에 행운이 닥쳐와 왜적을 파멸하고 조국을 광복하면, 이것이 대한민족된 신분이요, 또 왜적과 혈투하시던 백사 이항복 공의 후손된 도리로 생각합니다. 원컨대 백중계(伯仲系) 각위(各位)는 이 뜻을 좇으시지요.
이렇게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우당 일가에도 아픔이 있다. 우당 선생이 일경에 잡히게 된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우당 선생의 둘째 형님 석영의 아들 규서가 밀고를 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삶인가! 규서도 춥고 배고픈 삶 속에서 아편에 손을 대고 일본 밀정의 끄나풀이 되고 말았다. 안중근 의사의 아들 준생은 또 어떠한가? 아버지가 하얼빈에서 이등박문을 척결하였건만, 아들은 이등박문을 위해 남산에 지은 절 박문사(현 신라호텔 자리)에 참배하며 이등박문의 아들에게 사죄하고, 또 미나미 총독의 양아들이 되어 친일파로 살아가지 않았는가!
이제 우당 기념관을 나와 필운대가 있다는 배화여자대학으로 가는데 다시 길옆의 표석 하나가 또 나를 잡아끈다. 바로 송석원(松石園) 터. 정조 때 평민시인 천수경은 자기가 사는 곳 일대를 ‘松石園’이라 부르면서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를 결성하고는, 당시 장안의 중인, 평민 시인들을 송석원에 초대하여 시회(詩會)를 벌이곤 하였다. 이들이 달밤에 모여 시회를 벌이던 아름다운 장면은 단원 김홍도의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에 잘 나와 있다. 그러나 위항문학(委巷文學)의 산실이었던 송석원도 지금은 이렇게 작은 표석 하나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배화여자대학 구내로 들어가니 웬 서양여자의 흉상이 교정에 곱게 모셔져 있다. 조세핀 필 캠벨 여사라고 1898. 10. 2. 배화학당을 설립한 선교사다. 여사는 이렇게 조선의 선교와 교육을 위해 몸을 바치다가 죽어서도 양화진 서양인 공동묘지에 몸을 묻었다.
14:26경 필운대 앞에 서다. 바위에는 사진에서 본대로 빨간색으로 ‘弼雲臺’라고 새겨져 있다. ‘弼雲“은 이항복의 또 다른 호라고 한다. 옆의 바위에는 고종 때 영의정을 지닌 이항복의 후손 이유원이 새긴 글이 있다. “우리 선조 예 살던 집에 후손이 찾아왔더니(我祖舊居後裔尋), 푸른 솔 바위벽에 흰 구름은 깊었어라(蒼松石壁白雲深)....” 봄에 이곳에서 한양을 내려다보면 복사꽃이 무리를 지어 피는 모습이 잘 보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배화여대의 건물이 필운대 바로 앞까지 바싹 다가와 필운대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꼭 이렇게 숨통을 조이도록 건물을 지었어야 하는가? 하지만 그래도 흔적조차 없어진 송석원이나 청풍계에 비하면 이나마 남은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 선조들은 어려운 삶 속에서도 선비정신을 지키며 자연과 조화되는 고결한 삶을 지켜왔건만, 못난 우리 후손들은 먹고 살기에 바쁘다는 핑계로 조상의 멋과 풍류가 담긴 이곳 인왕산 밑자락의 터를 깔아 없애버렸구나. 이렇게 선조들의 터를 없애버린 곳이 어디 이곳뿐이냐는 조금은 우울한 생각을 하면서 나는 경복궁역으로 향한다. 14:39경 필운동 골목길을 벗어나 사직단 앞 도로로 다가가니 아까 출발할 때 보았던 관광버스들이 다시 중국인들을 태우고 출발하려 하고 있다. “당신네 나라에서는 선조들의 터를 제대로 보존하고 있긴 보존하고 있소?” 나는 속으로 이들에게 물음을 주며 경복궁역 지하역사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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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도 낚시에 또 걸렸다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하하! 이번에는 알면서도 일부러 걸리신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