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친구 늘 가까이 계시도다 그의 사랑 놀랍도다 변함없는 나의 친구”
찬송가 92장 후렴입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친구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정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5:13-14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어떤 설교자가 “…저는 기도 중에 예수님이 친구라는 사실이 떠오르면 기도가 한층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친구 사이에 못할 말이 무엇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사람들은 ‘친구’라는 말에서 그런 친밀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부모에게 말하지 못하는 내용도 친구 사이에는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앞으로 친구다. 힘들거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말만 해라. 나는 항상 너희 편이다.”라고 한 게 아니라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나의 친구라”라고 했습니다.
직설적으로 하면 “앞으로 말 잘 들어라. 내 말 잘 들으면 친구 시켜줄게.”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친구가 아니라 부하 아닌가요?
대체 무슨 영문일까요?
친구 사이에는 우열이 없습니다.
둘이 동급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존재론적으로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를 메울 수 있는 방법이 순종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한테서 예수님 수준이 나옵니다.
열 번에 한 번 순종하면 열 번에 한 번 예수님 수준이 나오고, 열 번에 다섯 번 순종하면 열 번에 다섯 번 예수님 수준이 나오고, 열 번에 열 번 순종하면 열 번에 열 번 예수님 수준이 나옵니다.
기독교에서 순종을 덕목으로 얘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둘 사이의 격차를 메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순종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철저히 순종하면 우리한테서 예수님 수준이 나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동급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라고 하신 것은 우리한테 그만큼 혜택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를 예수님 수준으로 초대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과 대조되는 내용이 창세기에 나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사건이 바로 그렇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에 홀랑 넘어간 것입니다.
결국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 셈입니다.
하나는 선악과를 먹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하는 방법입니다.
물론 차이는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수준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하나님 행세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처럼 된다기보다 하나님처럼 군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면 우리는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만 나타납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처럼 됩니다.
그러면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이 왜 그랬는지 답이 나왔습니다.
사사 시대가 왕이 없었던 시대인 이유는 그들 스스로 왕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죄다 왕 행세를 했습니다.
그것이 선악과를 먹은 티를 내는 것인 줄 그들은 몰랐습니다.
그 시대는 분명 하늘은 없고 땅만 있는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입니다.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늘이 없는 삶을 살았지만 우리는 하늘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하늘과 연결된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