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하루
강현자
나뭇가지 사이를 오가는 거미가 슬금슬금 줄을 탄다. 숨을 멈춘 듯 가만있다 갑자기 쭉 오르는 녀석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침 특별한 일정이 없어 여유롭게 커피나 마시자 했다. 마당으로 나가 벤치에 앉았다. 커피잔에 한 줌 햇살이 담긴다. 끈적한 장마가 턱 아래까지 왔으니 오늘 아침 같은 볕뉘가 왜 아니 고마우랴.
아, 얼마 만에 누려보는 한가로움인가. 이럴 때 언니에게 전화라도 해볼까? 막냇동생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지난번 가족 단톡방에서 무슨 얘기가 오갔더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퍼뜩 스치는 것이 있다. 오늘인가? 다음 주인가? 19일인데 가만있자, 오늘이 19일이잖아. 맞나? 맞다.
아차 싶었다. 오늘이 아버지 기일인데 지나치리만큼 융통성 있는 친정집 장남이 낮 12시에 제사를 지낸다고 했겠다. 지금이 10시니까 두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풍선 바람 빼며 솟구치듯 잽싸게 엉덩이를 일으켰다.
오랜만에 만나는 동생들이니 뭐라도 손에 쥐여주고 싶었다. 어줍은 손길보다 마음이 저만치 앞서간다. 텃밭으로 가 상추도 따고 쑥갓도 준비했다. 마트에 가면 쉽게 구할 수 있는 흔한 채소지만 땅내 맡으며 내 손으로 키운 맛과 비교하랴. 엊그제 수확한 마늘도 조금 담고 양파도 몇 개 가방에 넣었다. 마늘보다 양파보다 더 가득 담긴 것은 초보 농사꾼의 자랑하고픈 마음이었다.
집을 나서려는데 신발이 말썽이다. 밭에서 묻어온 흙 때문에 현관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대충대충 호스로 물을 뿌려 씻어내고 시동을 걸었다. ‘어떻게 좀 해 줘, 날 좀 치료해줘. 이러다 내 가슴 다 망가져…’ 때마침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이 흘러나와 흥얼거린다.
서두른 덕에 다행히 늦진 않을 테지만 미리 가서 손을 보태지 못해 미안하다. 작은 올케도 서울에서 내려오니 큰 올케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제사나 차례에 대해 요즘은 지내니 마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세상이다. 세월 따라 방식은 조금씩 변하겠지만, 바쁘고 힘들다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왜곡하거나 없앤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하면 꼰대라고 해도 하는 수 없다. 때마다 정성으로 준비하는 올케가 미덥고 고맙기만 하다.
거의 도착할 때쯤 뒷자리를 힐끗 돌아보았다. 허전하다. 상추와 쑥갓을 잠깐 냉장고에 넣고는 그냥 왔다. 내 정신이라니…. 어쩌겠나, 이미 출발한 것을. 도착해 차에서 내리고 보니 뒷좌석 바닥에 있어야 할 마늘과 양파도 없다. 믿고 싶지 않은 황당한 이 상황은 분명한 사실이다. 신발 신을 때 물청소하느라 잠깐 손에서 내려놓고는 그대로 돌아섰나 보다. 결국 빈 손으로 인터폰을 눌렀다. 1.1.0.4. 또박또박 누르고 기다리는데 생소한 목소리가 나온다. 우리 장남네 집이 아니란다. 메모했던 주소를 확인하니 1404호였다. 이런.
오늘이 기일인 줄 모르고 미용실을 예약해 놨기에 제사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미용실로 향했다. 오늘따라 유독 잦은 실수가 예사롭지 않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머리하러 온 손님과 원장 왈, 원래 그런 날이 있단다. 나를 위로해 주려는 마음이 고맙긴 하지만 그렇다고 붕 뜬 마음이 가라앉는 것도 아니었다. 모처럼 갖는 여유로운 시간인데 뭔지 모르게 불편하다. 막 떠나려다 주저앉히기라도 한 것처럼 왠지 안절부절이다. 누가 닦달하는 것도 아닌데 마음은 붕붕 허공에 매달렸다. 아무리 눌러도 가라앉지 않는 조각난 스치로폼 같다.
머리를 손질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휴대폰이 없다. 아, 진짜 오늘 왜 이러지? 오늘의 일진을 증명해 보이듯 그대로 미용실로 되돌아가 휴대폰을 찾았다. 집으로 가는 길에 이왕이면 세차를 하고 가자 했다. 차일피일 미루던 터라 나온 김에 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세차하려는 차들이 꼬랑지를 길게 물고 섰다. 나도 꽁무니에 붙어 잠시 시동을 껐다. 조금 있으려니 앞차가 앞으로 빠져 다시 시동을 걸었다.
이상하다? 브레이크가 안 풀린다. 뭐가 잘못됐지?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해보았다. 역시 안 된다. 서비스센터에 연락했더니 견인을 해야 한단다. 여태 이런 일이 없었는데 웬일일까. 도로 한가운데서 이런 일이 생겼다면 어땠을까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긴급출동 서비스를 불러 바로 견인차가 도착했다. 몇 번 시도를 해보더니 브레이크가 풀리고 시동이 걸렸다. 내가 하면 안 되던 것이 그가 하니 된다. 내가 뭘 잘못했냐고 물었다. 이 회사의 자동차가 원래 이렇게 잔고장이 많다는 말만 남기고 그는 훌쩍 가버렸다.
이런 걸 두고 머피의 법칙이라고 하던가? 머피의 법칙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선택적 기억’이라고 한단다. 안 좋았던 일만 골라서 기억한다는. 그럼 오늘 내게 선택되지 못한 기억은 뭐였을까?
한 줌 햇살을 넣어 커피를 마시며 잠깐이지만 만용을 부릴 수 있어 좋았다. 몇 날 며칠을 벼르고 벼르다 겨우 간 미용실에서 숙제처럼 미뤄오던 머리 손질도 해치웠고 오랜만의 수다도 맛깔난 양념이었다. 시간을 재지 않고도 마음 내키는 대로 세차장으로 향할 수 있어 얼마나 느긋했던가. 이만하면 괜찮은 날 아닌가. 오늘 일어난 모든 일은 내일 다시 이어질 후유증도 없는 것들이니 이만하면 다행이다. 모처럼 주어진 한가로움이 낯설었고 익숙하지 못한 여유에 대한 낯가림이었을 게다. 하루도 다 갔으니 이제 더는 말썽 생길 일이 없으리라.
잠옷을 갈아입기 위해 서랍을 열었다. 멀쩡하던 서랍 손잡이가 툭 하고 떨어지며 나를 쏘아본다. 아, 총 맞은 기분이다. 낯선 하루여, 이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