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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 단군왕검의 신하 神誌(신지)가 지은 神誌秘史(신지비사)와
書雲觀秘記(서운관비기)에서 震檀九變圖(진단9변도)가 전하고 있습니다.
진단(震檀,震旦)은 곧 조선이라 했습니다.
즉 우리나라의 국호가 아홉번 변천하게 된다는 것을 예견하여 기록한 비기(秘記)입니다.
★우리나라 국호가 9번 변천하는 震檀九變圖(진단9변도)
1, 환인의 환국(桓國)시대[ 건국] 2, 환웅(桓雄)의 배달국시대, 3,단군왕검의 고조선3한시대, 4,해모수(解慕漱)의 북부여시대,5,기준(箕準)의 한국(韓國)시대,6,4국시대(신라,고구려,백제,가야),7,왕건의 고려시대,8,이성계의 조선시대,9,[이승만의 대한민국 김일성의 [조선인민공화국]으로 9번 변천해왔습니다. 그렇다면 10번째 국호는 누구가 정할 것인가?10번째는 수(數)의 원리(原理)는 1,2,3,4,5,6,7,8,9,10에 이르면 다시 본래 시작된 1로 되돌아 간다는 원시반본(原始返本)에 의해 첫번째로 되돌아간다.즉 환국을 건국하신 국호를 정하게 되리라 사료됩니다.
1,환인의 환국(桓國)시대, 환국(桓國)을 개국하시고 환인이 섭정했습니다.환국의 제1대 환인(桓因:B.C.7199~ 3897)부터 7대 지위리(智爲利:단인(檀因B.C 3897))까지7세의 3,301년의 역년을 계승했다. ◆환국(桓國)을 건국하시니라 http://www.daehansinbo.com/bbs/board.php?bo_table=41&wr_id=355&page=6
2, 환웅(桓雄)의 배달국시대 배달국 제1대 거발환(居發桓 BC 3897)부터 제18대 거불단(居弗檀: 단웅(檀雄:B.C.2380)까지 1.565년을 계승했다. 배달국의 제 5대 태호복희 대황조는 한때 환국의 神市(신시:천산)에서 雨師(우사)의 직책을 맡았다.西土(서토:천산)는 기후가 추워서 후에 有巢(유소)씨, 燧人(수인)씨와 함께 청구, 낙랑을 거쳐서 하남성 회양현 陳(진:곡부(曲阜)으로 도읍지를 옮기고 경인(BC 3511년)에 震旦國(진단국)을 개국하고 동방의 상제에 올랐다.
6세 다의발환웅(多儀發桓雄(BC 3418)은 태호복희( 재위 98년에 110세까지 사셨다. 7세는 거련한웅(BC 3320)이니 재위 81년에 140세까지 사셨다.
배달국의 8세 안부련은 염제신농이다 태호복희,여와(女媧) 하느님의 맏아들 안부련한웅은 원년(BC 3239)에 배달국의 8세 재위에 올랐다. 즉 소전국(小典國)임금 태호복희의 아들이 염제신농(炎帝神農)이다. 3,단군왕검의 고조선3한시대 진한왕 1대 왕검 B.C.2333~47대 고열가 B.C.295,)까지 2,096년 마한왕 1대 웅백다 B.C.2333~35대 맹남(B.C.366)까지 1,385년 변한왕 1대 치두남 B.C.2333~74대 기준(B.C.221)까지 2,138년 고조선 3한[진한,변한,마한]의 위치[고조선 3한의 진한]은 북으로 大荒(대황:러시아 지방)과 서쪽은 猰猶(알유:고비사막의 북쪽. 지금의 몽고지방에 살던 獫狁(험윤)족속에 이르고 남으로 淮岱(회대: 중국 산동성 일대의 岱山(대산:태산과 황해 사이)에 이르고 동으로 蒼海(창해:동해)에 이르렀다. [3한중 변한]은 치우씨의 후손 [치두남을 변한 왕으로 봉하여] 서남쪽 땅을 주었는데 들판이 넓고 하늘이 바다와 같이 푸르러 藍國(남국)이라 하여 奄黎忽(엄려홀: 산동성 곡부)에 도읍을 정했다. 단군이 다스린 제후국 중에 남이국이 제일 강했다.
[고조선 3한 중의 마한]은 신지씨의 후손 肅愼(숙신)에게 북동쪽 땅을 주었다. 도읍을 肅愼忽(숙신홀)에 정하고 肅愼國(숙신국)이라 했다. 이곳 숙신홀의 산하는 장엄하였으나 바람이 강하게 불고 몹시 추워 오곡이 잘 자라지 않았다. 땅은 넓고 사람의 수는 적었으나 목축을 하고 활을 메고 칼을 차고 사냥을 주업으로 삼아 사람들이 건강하고 용감하였다. 후세에 여러 나라로 진출하여 일부 종족은 흑수(흑룡강성) 땅으로 옮겨와 살았다.
高失(고시)씨의 후손은 동남쪽 땅을 주었는데 산하가 아름답고 초목이 무성하였다. 樂浪忽(낙랑홀)에 도읍을 정하고 靑丘國(청구국)이라 칭했다. 청구국 사람들은 오곡을 먹고 비단옷을 입었다. 청구국(고실)의 천제는 豎亥(수해)에게 명하여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길이를 측량하게 하였더니 5억 10만 9천8백 步(보)이었다. 수해는 오른 손에 거리를 계산하는 자를 들고 왼 손은 북두칠성을 가리키고 있다. 혹은 禹(우) 임금이 수해에게 명령을 내려 5억 10만 9천 8백 步(보)라 하였다.
주인씨 후손에게 蓋馬國(개마국) 왕으로 봉하였다. 단군 재위 11년 신해(BC 2230년)에 雲師(운사) 餘守己(여수기)에게 濊國(예국)을 다스리게 하고, 아들 아홉 명이 각각 작은 고을을 맡아 다스리게 하였다.
단군왕검단군왕검의 세 아들 부루(夫婁), 부소(夫蘇), 부여(夫餘)는 모두 서쪽 땅을 주었는데 이것이 곧 句麗(구려), 眞番(진번), 夫餘(부여)등 여러 나라가 되었다. 그 후 부루(夫婁)는 외국에서 들어온 道羅(도라), 東武(동무), 仙羅(선라)의 세 사람에게 제후로 봉해 주었는데 이 나라는 후세에 沃沮(옥저), 卒本(졸본), 沸流(비류)라 불렀다. 23년 경인(BC 2311년)에 도읍을 松花江(송화강:흑룡강성)으로 옮기고 서울을 平壤(평양)이라 하고 국호를 다시 고쳐 “ 조선 “이라 칭했다.33년 경자(BC 2301)년 고조선 3한의 변한왕 치두남은 遼中(요중:요령성과 하북성 일대)에 열두성을 쌓았는데 險凟(험독),令支(영지),湯地(탕지),桶道(통도), 渠용, 汗城(한성),蓋平(개평),帶方(대방),百濟(백제),長嶺(장령),碣山(갈산),黎城(려성)이다.
50년 정사(BC 2284년)에 지상에 대홍수로 인하여 많은 물이 범람하여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되자 천제는 잠시도 쉬지 않고 풍백 彭虞(팽우)에게 명령을 내려 홍수를 안정시켰다. 高山(고산),大川(대천)에서 백성들이 편하게 거주할 수 있게 祈雨祭(기우제)를 하였는데 그 碑銘(비명)이 중국의 牛首州(우수주:삭주)에 있다.
▲고조선 강역도고조선 단군왕검과 중국의 요(堯)임금 http://www.daehansinbo.com/bbs/board.php?bo_table=48&wr_id=16&page=9
◈ 단군왕검의 고조선 삼한 역사
고조선 단군왕검은 14세(bc 2357년)부터 무진(bc 2333년)까지 24년간 외조부 황제헌원의 비왕(裨王:사위로 왕)으로 유웅국을 섭정했습니다. 그리고 bc 2333년 10월 3일 구이(九夷)의 추대로 제위에 올라 9이의 영토를 조선이라 칭하고 삼한으로 나누어 웅백다를 마한왕으로 치두남을 변한왕으로 봉하고 진한은 단군이 친히 다스렸습니다.
진한왕(辰韓王)은 삼신(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제사장이며, 삼한의 영토를 관리하고 삼한의 왕위를 임명하는 왕권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과 삼한, 9이는 같은 나라이다. 단군왕검은 진한왕으로 93년을 제위하고 bc 2239년 3월 15일 130세로 봉정(蓬亭)에서 돌아가셨다. 한편 변한은 제1세 치두남부터 74대 기준왕까지 2138년을 계승하고, 위만에게 패한 기준왕이 전라남도 해남으로 들어가 김제 금마에 도읍한 후 후3삼한 9대 계왕까지 202년과 도합 2340년의 역사가 있습니다.
◈ 箕子(기자)는 조선 삼한의 변한왕이다.
http://www.daehansinbo.com/bbs/board.php?bo_table=48&wr_id=17&page=8
♦.일제가 말살한 기자성군(箕子聖君)의 세계 복원
1. 朝鮮太祖 箕子聖人世系(조선태조 기자성인세계)
1世 太祖文聖大王 箕子姓子氏 諱須臾又諱胥餘 商帝武乙次子 諱理子也 誕降于帝乙十七祀丙戌五十四祀 周武王己卯(b.c 1122년)痛深革殷志堅岡僕 遂東出朝鮮 都平壤國號 後朝鮮 敎民八條 變夷爲夏周成王 戊午薨在位四十祀 壽九十三 墓平壤城北王荇山負子原俗稱兎山 三十六世嘉德王追尊爲王
제 1세 太祖文聖大王(태조문성대왕) 箕子(기자)의 姓(성)은 子氏(자씨)이고 諱(휘)는 須臾(수유) 또한 諱(휘)는 胥餘(서여)이다. 商(상)나라의 황제 武乙(무을)의 둘째 아들이며, 또한 諱(휘)는 理子(리자)이다. 殷(은)나라 17세 帝乙(제을) 54년 丙戌(병술(b.c 1176년)에 태어나 周武王(주무왕) 재위 己卯(기묘:(b.c 1122년)에 제위에 올라 도읍을 平壤(평양)에 세우고 국호를 朝鮮(조선)이라 하였다.
기자는 八條禁止法(팔조금지법)을 만들어 백성들을 가르치니 문을 닫지 않아도 도적이 없었다. 周成王(주성왕) 무오(b.c 1023년) 재위 40년에 돌아가시니 수명은 93세이었다. 기자 천왕의 묘지는 平壤城(평양성) 북쪽 王荇山負子原(왕행성부자원) 속칭 兎山(토산)에 묘지가 있다. 제 36세 嘉德王(가덕왕)이 태조 기자를 文聖大王(문성대왕)으로 追尊(추존)하였다.
[고조선 3한의 변한왕 1세 箕子(기자)부터 [제 37세 가색(可索)왕(bc 375~341년)까지는 조선 삼한은 태평했다. [제 38세 해인(解仁)]왕은 일명 산한(山韓)이며, bc 341년에 즉위하여 1년 간 재위 중에 자객에게 시해 당해 돌아가셨다. 아들 수한(水韓)이 bc 340년 제 39세 변한 왕위에 즉위하여 17년 간 재위했다.
2년(bc 339) 연(燕)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 와서 안촌홀(安寸忽)을 공격했다. 또 험독(險瀆:왕험성)에서도 노략질하니 수유(須臾:기자)의 사람 기후(箕詡)가 자제들과 병사 5000명을 거느리고 전투하자 군세가 떨치기 시작했다. 곧 계성의 남쪽을 공격하자 연나라가 두려워하며 대신을 사신으로 보내 자제를 인질로 삼았다.
무술(bc 323)년에 수한이 죽었는데 후사가 없어 이에 기후가 명을 받아 군령을 대행하였다. 읍차(邑借) 기후(箕詡)가 군사를 이끌고 변한의 궁에 들어가서 스스로 조선의 변한왕이라 칭하고 사람을 진한에 보내어 윤허(允許)를 청하자 진한의 보을 임금이 이를 허락하고 연나라 침략에 대비하여 굳게 지켜라 하였다.
[제 40세 기후(箕詡)]왕은 무술(bc 323)년에 즉위했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기후왕 즉위를 축하했다. 기후가 죽자 아들 기욱이 즉위했다. [제 41세 기욱(箕煜)왕]이 죽고 신미년에 아들 기석(箕釋)이 즉위했다. 변한 제 42세 기석왕은 신미(bc 290)년에 즉위하고 39년 간 재위하였다. 각 주군에 명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자를 추천하게 하였더니 일시에 선택된 자가 270명이었다.
기석왕 재위 10년(bc 281)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介)가 공격해 들어오니, 막아 싸웠으나 대패하여 상곡군(上谷郡),어양군(漁陽郡),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遼西), 요동군의 5군을 설치하여, 연과 고조선의 변한은 서비(西鄙:돌궐)까지 천리의 땅을 잃고 하북성이 국계가 되었다. 즉 bc 4세기경 중국은 소위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제(齊), 초(楚), 진(秦), 연(燕), 중앙 위(魏)·한(韓)·조(趙) 나라 등이 활거하여 소도시 국가가 100여 개나 산재하고 있었다. bc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고조선 3한의 변한 영역의 요동지방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고 장새(障塞)를 쌓았다. 그 결과 고조선의 변한 땅은 2,000여 리의 땅을 빼앗기고 말았다.
◈ 고조선 3한 중 진한이 멸망하였다
고조선 3한의 진한 47세 고열가 단제 재위 58년(bc 238) 3월 오가(五加)와 더불어 의논하기를 옛날 우리나라는 개국초부터 여러 聖人(성인) 선조님이 대통을 계승하고 임금은 솔선수범하며 백성을 잘 다스려 그 덕이 멀리까지 미치었으나 지금 세상은 법과 王道(왕도)는 다 없어지고, 여러 제후들은 힘으로 다투는 전투장이 되었다. 짐은 덕이 없어 제후들을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민심이 떠나 백성들이 흩어지니 나라를 편안히 통치할 방책이 없도다. 너희 5가(五加)들은 어진 임금을 천거하라 하고 옥문을 활짝 열고 사형수이하 모든 포로들을 다 석방하고 이튿날 왕위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서 수도(修道)하여 신선이 되었다. 이에 조선 3한 중 진한(辰韓)은 5가들이 함께 6년 동안 공화정치로 국사를 다스렸다.
[1]. 북부여 시조 해모수[45년(bc 239-195년) 등장]
진한의 47세 단군 고열가 재위 57년 임술(bc 239년) 4월 8일 해모수가 백악산 아사달(녹산)에 도읍을 정하고 蘭邊(난변:길림성 서란)에 궁전을 건축하였다. 진한의 법통을 계승하여 제후의 왕권을 갖게 된다. 원년 임술(bc 239년)에 천제 해모수(bc 239-195년)의 자태는 영웅적 기질로서 용맹한 神人(신인)이며 사람이 바라보면 몸에서 빛이 발사되어 사람들은 天王郞(천왕낭)이라 불렀다. 그의 나이 23세 때 왕위에 올라 항상 까마귀 깃털을 의관에 꽂고 허리에 용을 새긴 빛나는 칼을 차고 오룡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시종 500명이 뒤를 따랐다.
bc 238년 3월 16일 하늘에 제사하고 烟戶法(연호법:선조묘를 지키는 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5가의 병사를 나누어 주둔하고 밭을 만들어 자급하게 하고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셨다. b.c.232년 해모수 단제께서 무리를 이끌고 진한의 옛 도읍으로 가시어 5가들을 회유하시니 마침내 5가(五加)들은 공화정치(共和政治)를 철폐하였다. 이에 만백성들이 해모수를 진한의 단군(壇君)으로 추대하였다.
11년 임신(b.c.229)년 北漠(북막)의 추장 山只喀隆(산지객융)이 寧州(영주)를 습격하여 巡察使(순찰사) 穆遠登(목원등)을 죽이고 큰 약탈을 하고 달아났다. 19년 경진(b.c.221년)에 변한의 箕丕(기비)가 죽으니 아들 箕準(기준)이 父王(부왕)의 후계를 세습하고 조선의 변한왕으로 봉하고 관리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고 연 나라의 침공에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도록 당부하였다.
20년 신사(b.c 220년)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느님에게 제사를 지내고 7월에 336간의 궁궐을 지어 이름을 천안궁(天安宮)이라 하였다. 해모수 재위 b.c.219년 한(韓)나라 張良(장량)은 한이 진시왕에게 망하자 그 원수를 갚는 다고 가재를 털어 자객을 구하고 있었다. 이때 자객으로 선발된 창해(滄海)역사 黎洪星(여홍성)은 120근의 철퇴를 만들어 하남성 동남쪽의 박랑사를 유람 중인 진시왕정을 습격했으나 빗나가 부차만 박살냈다. 장량은 거사가 미수에 그치자 그 뒤 수배자 몸이 되어 숨어오다가 한나라 시조 유방과 함께 진시왕정을 타도하고 한나라 창업공신이 된다.
북부여 해모수 재위 31년 임진(b.c.209년), 진나라 말기의 농민반란 지도자 진승(陳勝)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나라 사람들의 생활이 크게 어려워졌다. 이에 연, 제, 조나라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기준왕이 다스리는 조선의 변한 땅으로 수 만명이 귀순해 왔다. 이들을 雲障(운장) 지방에 상하로 나누어 살도록 하고 장군을 파견시켜 감독케 하였다. 38년 기해(b.c.202년), 연 나라 노관이 다시금 요동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 浿水(패수 지금의 대동강)를 경계로 삼았다.
45년 병오(b.c.195년), 연 나라 노관이 漢(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자 그의 무리인 위만(衛滿)은 [북부여 해모수 천제]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b.c.194년 조선 삼한 중 변한의 기준왕이 크게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雲障(운장) 땅을 떼어 위만에게 봉해 주었다.➤ 조선태조 기자성인세계(朝鮮太祖 箕子聖人世系)
1世 太祖文聖大王 箕子姓子氏 諱須臾又諱胥餘 己卯(b.c 1122년) 在位 40년
2世莊惠王諱松 周成王34年己未立 在位25年 諱仲封於于其子孫在鮮在于者食其二國因姓鮮于
3世 敬孝王 諱詢 康王 22年 甲申(b.c 1057)立 在位 27年
4世 恭貞王 諱伯 昭王 23年 辛亥(b.c 1030)立 在位 30年
5世 文武王 諱椿 穆王 2年 辛巳(b.c 1000)立 在位 28年
6世 太原王 諱禮 穆王 30年 己酉(b.c 972)立 在位 4年
7世 景昌王 諱莊 穆王 35年 癸丑(b.c 968)立 在位 11年
8世 興平王 諱捉 穆王 45年 甲子(b.c 957)立 在位 14年
9世 哲威王 諱調 共王 4年 戊寅(b.c 943)立 在位 18年
10世 宣惠王 諱索 懿王 14年 丙申(b.c 925)立 在位 29年
11世 誼襄王 諱師 孝王 14年 乙丑(b.c 896)立 在位 53年
12世 文惠王 諱炎 려王 36年 戊午(b.c 843)立 在位 50年
13世 盛德王 諱越 宣王 35年 戊申(b.c 793)立 在位 15年
14世 悼懷王 諱職 幽王 4年 癸亥(b.c 778)立 在位 2年
15世 文烈王 諱優 幽王 6年 乙丑(b.c 776)立 在位 15年
16世 昌國王 諱睦 平王 10年 庚辰(b.c 761)立 在位 13年
17世 武成王 諱平 平王 23年 癸巳(b.c 748)立 在位 26年
18世 貞敬王 諱闕 平王 49年 己未(b.c 722)立 在位 19年
19世 樂成王 諱懷 桓王 17年 戊寅(b.c 703)立 在位 28年
20世 孝宗王 諱存 惠王 2年 丙午(b.c 675)立 在位 17年
21世 天老王 諱孝 惠王 19年 癸亥(b.c 658)立 在位 24年
22世 修道王 諱立襄 惠王 58年 丁亥(b.c 634)立 在位 19年
23世 徽襄王 諱通 頃王 4年 丙午(b.c 615)立 在位 21年
24世 奉日王 諱參 定王 13年 丁卯(b.c 594)立 在位 16年
25世 德昌王 諱僅 簡王 8年 癸未(b.c 578)立 在位 18年
26世 壽聖王 諱翔 靈王 12年 辛丑(b.c 560)立 在位 41年
27世 英傑王 諱黎 敬王 1年 壬午(b.c 519)立 在位 16年
28世 逸民王 諱岡 敬王 17年 戊戌(b.c 503)立 在位 17年
29世 濟世王 諱混 敬王 34年 乙卯(b.c 486)立 在位 21年
30世 淸國王 諱璧 貞定王 5年 丙子(b.c 465)立 在位 33年
31世 導國王 諱澄 考王 10年 己酉(b.c 432)立 在位 19年
32世 赫聖王 諱준 威烈王 13年 戊辰(b.c 413)立 在位 28年
33世 和羅王 諱謂 安王 17年 丙申(b.c 385)立 在位 16年
34世 說文王 諱賀 烈王 7年 壬子(b.c 369)立 在位 8年
35世 慶順王 諱華 顯王 8年 庚申(b.c 361)立 在位 19年
36世 嘉德王 諱 顯王 27年 己卯(b.c 342)立 在位 27年
37世 三老王 諱 愼王 6年 丙午(b.c 315)立 在位 25年
38世 顯文王 諱釋 赫王 25年 辛未(b.c 290)立 在位 39年
39世 章平王 諱潤 東周君 5年 庚戌(b.c 251)立 在位 19年
40世 宗統王 諱丕初諱恤 秦王政 15年 己巳(b.c 232)立 在位 12年
41世 哀王 諱準(기준) 秦王政 27年 辛巳(b.c 220년) 在位 27年
➤ 41世 哀王諱準 輿地勝覽云 武康王 始皇二十七年 辛巳立 漢惠帝元年丁未燕人衛滿來侵 率佐右宮人浮海南出立國 金馬郡今益山 改國號曰馬韓 ➤ 在平壤爲王 二十七年自 箕聖東渡後 凡四十一世 歷年爲九百二十九年.
41세 애왕 휘(諱)는 준(準)이다. 輿地勝覽(여지승람)에 이르기를 武康王(무강왕:애왕)은 秦始皇(진시황) 27년 신사(b.c 220년)에 왕위에 올랐으나 漢惠帝(한혜제) 원년 정미(:(b.c 194년)에 燕(연)나라 사람 衛滿(위만)이 침략해 오자 佐右宮人(좌우궁인)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海南(해남:전라남도)에 들어가 金馬郡(금마군)의 지금 益山(익산)에서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쳐 馬韓(마한:3한)이라 했다.
➤ 41세 기준왕은 平壤(평양)에서 27년을 재위하고 바다를 건너 海南(해남:전라 남도)에 들어가 마한을 건국한 후 그해 돌아가셨다. 箕子(기자) 성군(聖君)이 해동(변한)의 역년은 무릇 41세까지 929년이 된다.
◆ 기준왕이 건국한 한국(후3한)의 세계(世系)
1世 武康王(一云 哀王) 諱準 丁未(b.c 194年)
移都馬韓其年薨哀王己入於都平壤 四十一世 則馬韓王位八世.
2世 康王 諱卓 惠帝二年 戊申(b.c 193年)立 在位 四年 --
3世 安王 諱龕 惠帝六年 壬子(b.c 190年)立 在位 三十二年
4世 惠王 諱寔 文帝後元七年 甲申(b.c 157年)立 在位 十三年
5世 明王 諱武 景帝十三年 丁酉(b.c 144年)立 在位 三十一年
6世 孝王 諱亨 武帝二十八年 戊辰(b.c 113年)立 在位 四十年
7세 襄王 諱燮 宣帝本始元年 戊申(b.c 73年)立 在位 十五年
8세 元王 諱勳 宣帝神爵四年 癸亥(b.c 58年)立 在位 二十六年
9世 稽王 諱貞 成帝建始元年 己丑(b.c 32年)立 在位 一十五年(b.c 17年)
◈ 고조선 후 3한시대
[1]. 기준(箕準)의 후 삼한(三韓) 건국
현행 국사는 위만에게 패한 준왕이 해남(海南)으로 들어가 바다에 빠져 죽은 것으로 기술돼 있습니다. 그러나 후3한은 기준 왕부터 제 9세 계왕까지 무려 211년을 존속한 한국(韓國 世系)가 뚜렷이 전하며, 한반도 전체를 통치했습니다.
➤ 기준(箕準)왕은 平壤(평양)에서 27년 재위하고 b.c 194년 위만(衛滿)에게 왕험성(관미성)을 빼앗긴 후 좌우 궁인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전라남도 海南(해남)에 들어가 금마(金馬)에 도읍을 세우고 삼한(三韓)을 건국한 후 그해 돌아가셨다.
후3한의 제 8세 元王(원왕)의 諱(휘)는 勳(훈)이고 계해(b.c 58년)에 왕위에 올라 재위는 26년이다. 마한(후3한)의 8세 원왕(元王)과 9세 계왕(稽王)은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으나 후손들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의 鮮于氏(선우씨)는 黃龍國(황룡국)에서 들어왔고 또 한 사람은 韓氏(한씨)라 칭하고 한 사람은 奇氏(기씨)라 칭했다. 수유족(須臾族)은 원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선우여(單于黎)라고 불렀다.
후3한의 후손 중 일부는 수유족(須臾族:기자족)을 선우여(單于黎)라고 불렀다 하여 성을 선우씨(鮮于氏)로 하였다. 고조선의 변한왕 기준(箕準)이 전라북도 금마(金馬:전북 익산)에 도읍을 정하고 한왕(韓王:마한왕)이라 칭하여 성을 한씨(韓氏)라고 불렀다. 기자족(箕子族)은 원래 수유족(須臾族)이라 칭하며 箕子(기자)의 성은 기씨(奇氏)이며 箕(기)와 奇(기)는 같이 쓰인다. 9세 稽王(계왕)의 휘는 貞(정)이다. 기준왕이 3한(한국 땅)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정통적 왕이다.
➤ 한편 북부여 천제 해모수 왕은 하백(河伯)의 딸이며 이름은 유화(柳花:사소(娑蘇)이며, 동신성모(東神聖母), 혹은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를 아내로 맞이하여,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과 고구려 시조 고주몽(추모왕)을 낳았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은 고조선의 삼한 유민(遊民)들의 추대로 甲子(bc 57년:기준왕이 건국한 마한 원왕 22년)에 전라북도 변산반도의 서라벌(徐羅伐:서울)에 도읍지로 정하고, 금성(金城)에 왕궁을 창설했다.
그리고 b.c 37년 고주몽(추모왕)은 갑신(b.c 37년)년에 졸본천에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또한 고구려 시조 고주몽(동명성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b.c 17년에 왕위에 올라 기준왕의 마한 땅 錦峴城(금현성:부여 금성)이 백제 온조왕에게 공격을 받아 마한의 9세 稽王(계왕)이 항복하므로서 결국 목지국(마한)은 멸망하고 말았다.
◆ 78개국은 후3한이며, 삼국의 모태가 된다.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후한서-東夷列傳], 진서사이전(晉書四夷傳)과 한전(漢傳)에 등재된 삼한을 처음 건국된 삼한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고조선 3한 중 진한의 고열가 임금이 물러난 이후의 후 3한시대에 해당한다. 즉 북부여 해모수 천제에 의해 변한의 왕위를 계승한 준왕이 위만에게 패하여 한반도 남쪽 전북 익산 금마(金馬)에 왕도를 세우고 건국한 나라가 곧 후3한 78국이며, 9대 211년을 계승했습니다.
즉 고조선 3한 중 변한 제41대 기준왕(箕準王)이 위만(衛滿)의 난(亂)을 피하여 전라북도 익산의 금마(金馬)에 천도(遷都)하여 ‘금마저(金馬渚)’라 칭하였다. 최근에 발굴된 성안에서는 왕궁평성 토성내에서 금마저성(金馬猪城)명의 기와 쪽이 출토되어 미륵산성, 왕궁평성, 그리고 우금산성과 같은 때의 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 후 삼한 78국은 기준왕이 다스린 韓國이다.
[후한서-東夷列傳][1],韓種有三: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在帶方南,東西以海爲限.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自立爲辰王......[2],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3],辰韓,耆老自言秦之亡人,避苦役, 適韓國, 馬韓割東界地與之. 其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후략] [4],弁辰與辰韓雜居, 城郭衣服皆同, 言語風俗有異. 其人形皆長大, 美髮, 衣服淸而刑法嚴峻. 其國近倭, 故頗有文身者.
[후한서-동이열전(東夷列傳)]. [고조선이 멸망한 후] [1],한(韓)은 3종류가 있다. 첫째 마한, 두째 변한, 셋째 진한이다. 진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고, 동서쪽은 바다로 한정되어 있었다. 처음 조선 준(準)왕이 위만(衛滿)에게 [왕험성]이 격파되자, 이내 장군과 나머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격 파괴하고 [금마저金馬渚]에 왕도를 세우고] 스스로 한왕(韓王:馬韓)이 되었다.
준(準)왕이 건국한 후삼한은 9대 211년을 계승하고 마한(韓한:3한) 9대 계왕(稽王)의 왕위가 단절되자 마한의 사람들과 유민들이 진한(辰韓:신라)에 귀속했다. 진한왕은 [3한의 영토를 관리하고, 3한의 왕권과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제사장의 군장(君長:거서간(居西干)이라 칭했던 것이다. [2], 마한(馬韓)은 54개국을 통치하여 3한 중에 최대로 강성 했다.] 다시 나라를 세운 진한왕(혁거세왕)은 마한의 도읍지인 목지국과 3한 지역을 관리했다.
[3], [혁거세왕이 다스린] 진한(辰韓:신라)의 기노(耆老:70세 이상된 노인들)이 말하기를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수천명을 거느리고 조선 준왕에게 망명해 오자 마한의 동쪽 경계의 雲障(운장) 지방 땅을 활당해 주었다고 한다. 진한(신라)의 사람들은 나라를 방(邦)이라 하고, 활을 호(弧)라 하며, 도적을 구(寇)라 하고, 주연회에서 술잔을 돌리는 것을 행상(行觴)이라 하고, 서로 부르기를 도(徒)라 했다. 진(秦)나라 말과 비슷하여 혹 진한(秦韓)이라 칭했으나 국명은 진한(辰韓)이다.
[4],변진(弁辰)은 곧 가야국(伽倻國)이다. 진한(신라)과 섞여 거처하며, 성곽(城郭)과 의복은 모두 같으나 언어와 풍속은 차이가 있었다. [김수로왕이 건국한 가야국]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다 키와 몸집이 크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에 의복은 희고 정결하며 깨끗하다. 죄인을 다스리는 형법은 준엄하였다. 가야국은 왜(倭)와 가까이 지냈다. 가야국 김수로왕의 부인이 아유타국 허황옥이며 인도 사람이기 때문에 키도 크고, 아름다웠으며, 혹 문신을 한 자가 제법 많았다. 고 한다. [후략]
현행 국사의 위만은 고조선 침략사로 다루어야 하고 기준왕이 건국한 마한을 당연히 우리나라의 정통적 역사로 기술해야 바른 역사입니다. 또한 북부여 이후는 곧 후 3한시대(三韓時代]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제사장(祭司長)의 진한 12국은 ⇒ 신라의 박혁거세 거서간(왕)이 다스리고, 변진(弁辰) 12국은 ⇒ 가야6국에서 다스리고, 마한의 54국은 ⇒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가 된다.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되었다
1945년 8.15 해방이후 경상북도 경주를 신라의 도읍지로 지정된 국사교육에 세뇌되어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은 참과 거짓의 역사를 분별하지 못하고, 경주(慶州)를 신라 천년의 왕도(王都)로 인식하고 “아...! 서라벌 황성 옛터 신라의 달밤 ” 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신라 천년의 도읍지 서라벌은 경주가 아니라, 전라북도 변산반도 부안으로 밝혀졌습니다.
현행 국사는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오늘날의 [국사교과서]를 편찬한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조국이 일찍 멸망해야 자손만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무려 2천여년의 고조선 역사는 삭제하고, 평양에 도읍지로 정하고 중조선을 건국한 기자성군(箕子聖君)의 무려 929년동안 한반도를 다스린 정통 역사를 말살하고, 기자(箕子)의 후손 준왕(準王)의 왕위를 찬탈했던 배은망덕한 날강도 위만(衛滿)을 고조선을 계승한 우리나라 조상으로 삼았습니다.
국토가 육체라면 국사는 민족정신(얼)입니다.
1945년 8.15 광복을 맞아 육체는 해방되었으나 일제가 말살, 왜곡된 현행 국사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일제가 만들어 준 식민지국사를 해방 64주년을 맞은 2009년까지 그대로 배우고 있다면, 대한민국이 어찌 온전한 자주 독립국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일제 압박 35년간 우리 선조님들은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그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 대한민국이 오늘의 번영을 누리는 것도 우리 선조님들의 흘린 피의 값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는 순국선열의 애국 애족정신을 계승하여 온전한 자주독립국을 완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해방 64주년을 맞은 지금까지도 온전한 독립국을 이루지 못했다. 이 어찌 순국선열님들이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본 연재는 우리나라를 겁탈한 일제 침략자가 말살한 역사는 복원하고, 왜곡, 변조한 역사는 바로잡아서 유구한 전통의 찬란한 문화를 계승한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역사가 마치 어제의 일처럼 현세의 우리 앞에 선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오욕의 역사를 깨끗이 청산하고, 일제에 의해 왜곡된 국사를 개편할 수 있는 고증서로서 대한민국 새 역사를 창조하여 백년대계를 위한 대한민국 정통역사(正統歷史)입니다.
본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 제1~6편]은 우리나라 유일한 정통사서의 [삼국사기 본문]으로 입증하여, 일제와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반민족적 범죄행각과 현행 국사의 말살, 왜곡된 실상을 누구나 두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천인공노할 일제의 만행과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반민족적 범죄 행각을 확인하고도 “정부당국자가 왜곡된 망국적 치욕의 현행 국사 ”를 개편하지 않는다면 7천만 대한민족에게 큰 죄악을 범하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당국자는 일제와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범행을 올바로 깨닫고, 왜곡된 국사는 철폐하고, 본 지침서를 근간으로 말살된 역사는 복원하고, 반드시 바른 국사를 정립하여 대한민국의 새 역사를 창조해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琇巖 朴炳譯(박병역)/올림 고조선 삼한(진한,마한,변한) 중 제사장의 나라 진한 제 47대 단군 고열가(B.C.295)임금이 진시왕정(秦始王政(BC 259~210)에게 멸망에 이르자 곧이어 북부여의 황제 해모수(BC 239~194년)가 일어나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과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추모왕,동명성왕)을 낳아 삼국시대의 역사가 펼쳐지게 됩니다. 4,해모수(解慕漱)의 북부여시대, 당시 중국 대륙은 춘추전국시대(BC 475~221)에 한(韓),위(魏),조(趙),제(齊)의 신흥국과 진(秦),초(楚),연(燕)의 7국을 '전국7웅'이라 한다. 이 7국들 간의 전쟁 끝에 BC 223년 마침내 진(秦)나라가 초(楚)나라와 전투에서 진(秦)이 승리하고, 2년 후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최초의 통일왕국을 수립했다.
진시황제 당시 인간세상은 천자(天子:단군:제사장)이 되기 위한 봉국쟁탈(封國爭奪)시대로서 지상은 이른바 전투장으로 변하여 극심한 난세(亂世)에 이르러 제사장(祭司長)의 고조선이 멸망의 위기에 처 하백(河伯)을 지상에 급파하셨습니다. 성북(城北) 청하(靑河:흑룡강)의 하백(河伯)은 매우 아름다운 세 딸이 있었다. 장녀는 유화(柳花)이고, 차녀는 훤화(萱花)이고, 계녀는 위화(葦花)라 하였다. 고조선 단군왕검은 하백(河伯)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부루,부소 두 아들을 낳고, 북부여 해모수 역시 하백의 딸 유화를 아내로 맞아 고구려 시조 고주몽(추모왕)을 낳았다.
제사를 주제한 제사장(천자=단군)의 나라 고조선 3한의 제47대 진한(辰韓)왕 고열가 임금이 멸망에 이르자 마 하백(河伯)의 딸을 인간세상에 급파하시었다. 여호와 하느님의 천명에 따라 지상에 내려온 하백의 딸(사소)은 북부여 해모수 천제를 만나 신라 박혁거세왕을 낳고, 해모수는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나 고구려의 고주몽(추모왕, 동명성왕) 두 성인(聖人)을 낳는다,
조우관을 쓴 북부여 해모수 천제
5,기준(箕準)의 한국(韓國)시대 ➤ 기준(箕準)왕의 한국은 3국생성의 모태가된다 앞서 고조선 3한 중 변한왕 箕子(기자)의 후손 箕準(기준)왕이 건국한 한국(후3한)은 기준 왕부터 제 9세 계왕(稽王-B.C 32~B.C 17年)까지 무려 211년을 존속한 한국세계(韓國世系)가 뚜렷이 전하고 있습니다.
기준왕이 건국한 한국(후3한)은 [신라, 고구려, 백제] 3국 생성의 모태로서 대한민국 국사에 매우 중요한 역사입니다.
현행 국사교과서에 기록된 소위 삼한의 마한 54개국과 진한, 변한의 각 12개국의 78개국은 모두 다 기준왕이 건국한 한국(후삼한)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현행 국사는 위만에게 패한 준왕이 해남(海南)으로 들어가 바다에 빠져 죽은 것으로 기술돼 있으며, 기준왕에 대한 역사는 단 한 줄의 기록도 없습니다.
그리고 본인도 한때 3국(신라,고구려,백제)은 중국대륙에서 건국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금도 재야사학자 들은 3국 중국대륙 건국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기준왕이 건국한 한국의 역사를 올바로 이해한다면 신라, 고구려, 백제의 3국 대륙건국설은 잘못 인식된 주장으로 입증 될 것입니다.
또한 기준왕이 건국한 한국이 도대체 어떻게 멸망하게 되었는지 ▶ 삼국사기 본문을 통해 신라, 백제역사를 관찰해 보면, 3국 중국대륙건국설 주장은 더욱 분명한 허구설로 입증 될 것입니다.
중조선[고조선 변한왕] 제 1세 太祖文聖大王(태조문성대왕) 箕子(기자)부터 41세 箕準(기준)까지 무릇 929년을 평양에서 역년하고, BC 194년 위만의 습격을 받은 기준왕은 좌우 궁인을 거느리고 배를타고 전라남도 해남으로 들어가 전북 익산 금마(金馬)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한국(후3한)이라 하고 그해 돌아가셨다.
한국의 제 8세 元王(원왕)의 諱(휘)는 勳(훈)이고 계해(B.C 58년)에 왕위에 올라 재위는 26년이다. 마한의 8세 원왕(元王)과 9세 계왕(稽王)은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으나 후손들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의 鮮于氏(선우씨)는 黃龍國(황룡국)에서 들어왔고 또 한 사람은 韓氏(한씨)라 칭하고 한 사람은 奇氏(기씨)라 칭했다.
수유족(須臾族:기자 성인 후손)은 원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선우여(單于黎)라고 불렀는데 성을 선우씨(鮮于氏)로 하였다. 고조선 변한왕 기준(箕準)이 전라북도 김제지역의 금마(金馬)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한국(韓國)이라 칭하고부터 성을 한씨(韓氏)라고 불렀다. 기자족(箕子族)은 원래 수유족(須臾族)이라 칭했으나 箕子(기자)의 성은 기씨(奇氏)이며 箕(기)와 奇(기)는 같이 쓰인다.
6,4국시대(신라,고구려,백제,가야), 삼국시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 제3대 석탈해(인도사람)과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추모왕:동명성왕)과 가락국의 김수로 왕 등은 모두다 지혜에 형통한 神人聖者(신인성자)이며, 우리나라는 모두 聖人(성인)이 개국한 나라입니다. 聖人(성인)은 一切智(일체지)에 형통하여 자유자재하며, 생사를 초월한 不滅(불멸)의 神聖(신성)입니다. [신 라] 제1대 박혁거세[BC 57]~ 56대 경순왕[서기 927]992년 [고구려] 제1대 고주몽[BC 37]~ 28대 보장왕[서기668]까지 705년 [백 제] 제1대 온조왕[BC 18]~ 31대 여풍[서기663]까지 678년 [가야] 제1대 수로왕[서기42]~10대 구형왕[서기562]까지 520년 4국시대에 고구려 28대 보장왕(642~668)이 서기 661년 신라의 문무왕에게 멸망에 이르자 곧이어 서기 669년 고왕[대조영]이 고구려 땅에 발해[대진국]를 건국했으나 당시 발해와 신라는 우리나라 남북시대로서 국호변천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또한 발해 14대 애왕이 926년 멸망하자 궁예가 901년 후고구려를 건국하고,견훤은 892년 후백제를 건국하고 왕건이 후고구려,후백제를 통일하고 918년 고려[高麗]를 건국합니다.후고구려,후백제도 우리나라 국호변천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7,왕건의 고려시대 [고 려] 제1대 왕건[918]~34대 공양왕[1392]까지 466년 계승 8,이성계의 조선시대, [조 선] 제1대 이성계[1392]~27대 순종[1910년]까지 518년 계승
9,[대한민국,조선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제1대 리승만[1948년]~11대 박근혜 [조선인민공화국] 제1대 김일성[1948년]~3대 김정은 시대 곧 환인의 환국(桓國)시대부터 대한민국까지 9번 변천했습니다★서기 2036년 대한민국 지도? 클릭-http://www.daehansinbo.com/bbs/board.php?bo_table=48&wr_id=120
육도수(六度數)로 변천하는 인류 역사 도수(度數)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계에 다다르면 다음 단계로 변화되도록 이미 천리(天理:하느님에 의해 짜여져 있는 일종의 시대적 변화 흐름을 말한다. 일찍이 중국 송대(宋代)의 현자(賢者) 소강절(邵康節)은 그의 저서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서 인류의 역사 변천 과정을 6단계로 밝혀 놓았는데, 이것이 육도수(六度數)입니다.
所謂皇帝王,覇者非搾擉謂三皇,五帝,三王,五覇而巳但用無爲則皇也 用恩信則帝也 用公正則王也用智力則覇也 覇以下則夷狄 夷狄以下 是禽獸也[소위황제왕패자 비착위삼황오제삼왕오패이사 단용무위즉황야 용은신즉제야 용공정즉왕야 용지력즉패야 패이하즉이적 이적이하 시금수야]
소위 황제왕패(皇帝王覇)는 1,황(皇)은 삼황(三皇)시대,2,제(帝)는 오제(五帝)시대,3 왕(王)은 삼왕(三王)시대, 4,패(覇)는 5패(五覇)시대만을 일컷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무위(無爲)를 쓰면 황(皇)이고, 은혜와 신뢰를 쓰면 제(帝)이고, 공정(公正)함을 쓰면 왕(王)이다.지혜(智慧)와 용력(勇力)을 쓰면 패(覇)요, 패 아래는 5,이적(夷狄)이요, 이적 아래는[태호복희, 자국의 조상인지도 깨닫지 못하고, 윤리도덕이 사라진] 6,금수(禽獸)시대이다.7,가을 추수시대
가을 추수시대 중국 소강절(邵康節)의 육도수(六度數) 이후의 인간 세상의 변화를 조선시대 이서구(李書九1754~1825)라는 분이 저술한 비기(秘記)의 [채지가(採芝歌)춘산노인(春山老人) 이야기가 전하고 있습니다.
[채지가(採芝歌) 춘산노인(春山老人) 이야기] : 천황지황(天皇地皇)개벽 후에 인황시대(人皇時代) 언제련고 반고인(盤古人)이 지낸 후에 3황시대(三皇時代:태호복희,염제신농,황제헌원)때이고 이후에 5제건곤(五帝乾坤) 어느 땐고 오제건곤 지나가고 왕패시대(王覇時代) 되었구나 왕패시대 지나가고 이적(夷狄)운수로다 이적 운수 지나가고 천지개벽이후 몇 만년에 금수시대(禽獸時代) 당했구나 금수생활 저 사람아 정신차려 생각하소 천지간(天地間) 만물 중에 최령자(最靈者)가 사람일세 인사(人事)두자를 닦자하니 3강오륜(三綱五倫)이 으뜸일세 3강(三綱)은 무엇인고 임금은 신하의 벼리이오 아비는 자식의 벼리이오 가장은 아내의 벼리이오 그물코가 많지마는 벼리 없이 아니 되고 나뭇가지 많은 가지 뿌리 없이 어이 살고
3강(三綱)을 밝혀낼 제 5륜(五倫)은 무엇인고 군신유의(君臣有義),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그 가운데 믿을 신자(信字)는 체(體)가 된다. 수화금목토(水火金木土) 5행(五行) 중에 5,10,(五.十) 토(土)가 체(體)가 되니 나무도 흙이 아니면 어느 곳에 배양하며 물도 흙이 아니면 어느 곳에 가둬놓으며 金도 흙이 아니면 어느 곳에 생성하며 불도 흙이 아니면 어느 곳에 비치리요
인의예지(仁義禮智) 4단(四端)중에 믿을 신자(信字)가 으뜸이라 믿을 신자 없고 보면 하는 일마다 이루지 못하느니라 춘하추동(春夏秋冬) 사계절은 천지(天地)의 신용(信用)이요 추위가 가면 더위가 오고 가을에는 수확하고 겨울에는 저장한다 는 한래서왕추수동장(寒來暑往秋收冬藏)은 어기지 않고 돌아오는 사계절은 신용(信用)이요 3강5륜(三綱五倫)행할 적에 인사도리(人事道理) 신용(信用)이라, 천지인天地人이 3재(三才)되니 이내 몸에 천지조화 풍부하니 이내 몸은 소천지(小天地)라 천지운기(天地運氣) 타고나서 금수행동 하지 마라
금수행동하는자 어떠한 자인고 베풀줄은 모르고 자기 배만 채우는 충복충장(充腹充臟) 그 가운데 즐기고 사랑한다는 것이 계집 자식뿐이로다. 뿌리없는 나뭇가지 잎사기(枝葉)가 어찌 무성(茂盛)할까 근원(根源)없는 저 물줄기 건천(乾川)되기 쉬우리라 복록(福祿)은 우로(雨露)과 같이 위에서 내려오고, 물과 같이 올라오지는 못 하느니라 선령신(先靈神:선천시대 태호복희,여호와 하느님)을 잊지 말고, 부모공경하듯이 지극 정성을 다 하여 모셔라. 부모에게 불효불충(不孝不忠)하는 저 사람이 장래희망(將來希望) 볼까보냐 가정이 빈천(家貧)하니 어진아내 못 만나면 너의 신세 어이하리 너의 가정 말이 아니네 아내가 영악하고 간사하면 한 가정이 어이 화목 할수 있을고 눈치싸고 말 잘해서 겉치례체면 꾸며낼 제 형제(兄弟) 동기(同氣) 정(情)이 뜨고 뿔뿔이 살아가게 된다. 수신제가(修身齊家:가정도 올바로 다스리지) 못 한 사람이 도(道)를 이루고 덕을 베푼다는 말이 무엇인고 사람이야 속지마는 신명 속을쏘냐, 지기금지(至氣今至: 심판하실 적에 사정(私情)없이 공판(公判)한다.
수신수덕(修身修德) 하자 하면 가정처리(家庭處理) 제일이라 1가춘풍(一家春風)하올 적에 하느님께 수명복록(壽命福祿) 빌어 보세 일가춘풍 아니 은혜는 이슬과 비를 내리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자고(自古)로 자신의 몸을 닦아 최선의 노력을 다한 후에 하느님의 천명(심판)을 기다린다고 수인사대천(修人事待天命)을 일러오건마는 인사(人事)는 아니 닦고 오는 운수 고대하니 닦은 공덕이 없었으니 [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선악심판] 때가 와서 당코 보면 내 차지가 얼마 되랴 무주공산(無主空山) 저문 날에 벌목(伐木)정정 나무 베어 너도 한짐 나도 한짐 여기저기 분치(分置)하고, 4정4유(四正四維) 터를 닦아 四正으로 기둥 세워 5,10(五十) 토(土)로 대공(대들보) 받쳐 五色으로 단장하고 경신금풍경(庚申金風磬)달아 금화문(金火門)을 열어 노니 풍경소리 요란하다.
도덕군자득의(道德君子得意)로다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湯文武周公) 차례차례 존공(尊公)할 제 상중하재(上中下才) 마련하니 공무사정(公務邪正) 없을쏘냐 부자유친(父子有親) 하였으나 운수(運數)조차 유친(有親)인가 동기형제일신(同氣兄弟一身)이나 운수조차 일신인가낙낙장송(落落長松) 큰 나무도 깎아야만 동양(棟梁)되고 형상백옥(荊山白玉) 묻힌 옥도 갈아야만 광채난다. 만경천리(萬頃千里) 너른 들에 많고 많은 저 농사農事를 서력기중(西力氣重)하여 갈 제 놀지 말고 어서 갈세 신농씨유업(神農氏遺業)인가 천하대본(天下大本)이 농사가 아니든가?
갈고 매고 다시 매서 쉴새없이 가꿔내어 가을 추수때(하느님의 심판때)가 당도(當到)하니 풍년풍작(豊年豊作) 추수(秋收)하여 천하군창(天下群倉) 쌓아놓고 8도인민(八道人民) 구제(救濟)할 제 억조창생 어이하리
신유지곡(辛酉之穀) 불능활(不能活)인 것을 곧 신유(辛酉)는 오행상 金으로 계절로는 가을이다. 가을에 추수한 곡식으로 살아 갈 수 없는 때가 온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알았거든 무궁무극(無窮無極)으로 깨달음을 얻어 신선이 돼야 살 수 있다는 뜻이다.
개명장성(丐命長聲)-> 심판하시는 날에 이르러서야 깊이 후회하며 긴 한 숨을 짓는 장탄식(長歎息) 소리를 내지 말고,(귀의(歸依)하여, 의지한다면 살아남아 편안히 잘 살게 될 것이니라.
춘말하초(春末夏初)는 어느때인고 소만(小滿양5월21~22),망종(芒種:양6월4일 5일)이니라 24절기가 한치의 오차도 없는 것 같이 철두철미(頭眉:徹頭徹尾)하신 정한 바라 어길 배 없건마는 미련한 세상 사람들은 여와(女媧)하느님이 강림하시어 가을 추수하듯이 선악(善惡) 심판을 어이 그리 모르는고!
선천도수(先天運數) 지나가고 후천운수(後天運數) 돌아올 때 모든정보가 노출된 大明日月 밝은 날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설명해보자 성문부자(聖門夫子) 김일부(金一夫)는 멀지 않아 다가올 개벽이치(開闢理致)와 말세 때 대한민국에 대성인(大聖人:미륵불[하느님]이 출현하여 행하실 일을 자세 자세히 설명하자면, 수조남천(水潮南天:쓰나미:지각변동)하올 적에 [대한민국은] 수석북지(水汐北地)가 되고, 북극통개3천리(北極通開三千里)요 남해개벽7천리(南海開闢七千里)라, 즉 지각변동[천지개벽]에 따라 대한민국 땅이 북쪽으로 이동하고, 남쪽에는 새로운 땅이 솟아올라 지금 대한민국의 3천리 영토는 남북으로 7천리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神誌(신지)가 지은 神誌秘史(신지비사)에서 震檀九變圖(진단9변도)를 살펴본것 같이 9,[이승만의 대한민국 김일성의 [조선인민공화국]으로 9번 변하였습니다.현재 박근혜 정부를 마지막으로 震檀九變圖(진단9변도)의 10번째는 강림하여 사정없이 공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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