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母岳山)에 있는 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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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석연대(통일신라 후기), 보물 제23호,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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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방등계단,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의 본사이다. 1635년에 기록된 〈금산사사적 金山寺事蹟〉에 의하면 600년(백제 법왕 2)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1492년에 씌어진 〈금산사5층석탑중창기〉에 의하면 과거불인 가섭불 때의 절터를 중흥한 것이라 하여 오랜 불연(佛緣)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금산사는 신라 경덕왕 때인 762년에서 766년 사이에 진표율사(眞表律師)에 의해 중창되어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후로 법상종(法相宗)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진표 이후에 후백제 견훤에 의해 부분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고려초 1079년에 법상종의 대종사(大宗師)인 혜덕(慧德)왕사가 주지로 부임해 간경·법석(法席)을 주관하는 장소인 광교원(廣敎院)을 설립하는 등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도량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석연대(石蓮臺)·5층석탑·노주(露柱) 등이 이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암자와 건물 40여 채가 불타버렸으나 1601년(선조 34) 수문대사(守文大師)가 재건을 시작하여 1635년 완공했다. 조선 고종 때 미륵전(彌勒殿)·대장전(大藏殿)·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을 보수하고 1934년 대적광전·금강문(金剛門)·미륵전 등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6년 다시 화재로 대적광전이 소실되었으며 현재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지금 절에 남아 있는 유물·유적은 석조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조형물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중요 석조유물은 노주(보물 제22호)·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 : 보물 제24호)·5층석탑(보물 제25호)·석종(石鐘 : 보물 제26호)·6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당간지주(幢竿支柱 : 보물 제28호) 등이 있다. 또한 미륵전(국보 제62호)·대적광전이 있었고, 그밖에 대장전·명부전(冥府殿)·나한전(羅漢殿)·일주문·금강문·보제루(普濟樓)·종각·중향각·칠성각 등의 건물과 수계(受戒)의식을 행하는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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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당간지주(통일신라), 보물 제28호, 높이 355cm, 전북 김제시 금산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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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노주(10세기경), 보물 제22호,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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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기와집. 우리나라 법당 가운데 규모가 큰 편에 속하나 1986년 불에 타서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장대석기단(長臺石基壇) 위에 세워진 앞면 7칸, 옆면 4칸의 단층팔작지붕 건물이다. 앞면의 7칸에는 모두 빗살 무늬로 장식된 두 짝 열개문[分閤門]을 달았는데 중앙칸만 출입문이고 나머지는 밑부분에 머름(미닫이 문지방이나 벽아래 중방에 대는 널조각)을 설치한 광창(光窓)이다. 옆면은 4칸으로 제일 앞쪽 툇간에 한 짝 출입문을 달아 사용했고 나머지는 회벽으로 위쪽에 인방(引枋)을 가로질렀다. 공포는 내외이출목이며 다포계 공포구성의 전형에서 벗어나 있다. 공간포(空間包)도 넓은 주간(柱間)에 1개씩만 두어 특수한 구조로 보이는데 중앙칸만은 공간포를 2개 두었다. 건물 내부에는 바닥에 마루를 깔고 뒷면에 6개의 기둥[高柱]을 세운 뒤 그 기둥 사이를 후불벽(後佛壁)으로 만들었다. 그앞에 불단(佛壇)을 설치하고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 2구씩 모두 5구의 불좌상과 그 사이에 보살입상 6구를 안치했는데 이러한 불상의 배치는 매우 독특하다. 그위에는 닫집을 설치했다. 대들보는 둥그스름하게 다듬어졌는데 좌우측면 평주(平柱)에서 충량(衝樑)이 3개씩 올라가 대들보에 걸리게 하였다. 충량의 형태가 곡선으로 된 점이 특이하며 건물의 크기에 어울리지 않게 나약한 맛을 갖게 한다. 천장은 불단 바로 위를 1단 더 높이고 가장자리는 대들보 위 충량 위쪽에 붙여 반자를 꾸며 전체적으로 층급천장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건물내부는 낮고 가득찬 느낌을 주고, 건물외부의 정면관도 낮고 옆으로 길게 전개되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이 건물은 1705년에 기록된 〈금산사사적〉에서 이름을 찾아볼 수 없어서 그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생각되며 18세기경의 건축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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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 미륵전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시대 소조 삼존불입상. 높이 본존상 11.82m, 좌우협시보살상 8.79m. 〈금산사사적〉에 의하면 미륵전 안에는 764년(경덕왕 23) 진표율사의 시주에 의해 766년(혜공왕 2) 완성된 미륵불상만 있었다고 한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이 불상이 타버리자 1627년(인조 5) 수문대사가 조성한 소조삼존상이 모셔졌으며, 1934년 삼존상 중 본존상이 실화로 타버리자 1938년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본존상은 기본적으로 통일신라 불상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그 기법이나 마무리솜씨에 근대조각의 요소가 가미된 상이라 할 수 있는데 현재 불단 밑에는 신라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청동대좌가 남아 있다. 본존불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앞으로 보이고 있으며 왼손은 앞으로 내밀어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오므리고 있는데,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의 변형인 듯하다. 얼굴은 풍만한 네모형이며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신체에 통견(通肩)의 법의를 걸치고 있는데 옷주름은 몸을 따라가며 부드러운 선을 이루고 있다. 특히 양다리 위에 옷을 밀착시켜 옷주름을 생략함으로써 신체의 볼륨감을 강조하였다. 좌우협시보살상이 입상인 점은 예외적이나 명칭을 알 수 있는 도상적인 특징이 없다. 네모난 얼굴형이며 복잡하게 장식된 보관의 형태 등이 조선 후기 보살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두 보살상은 손 모양만 좌우대칭이며 장식이나 천의형식이 거의 동일하다. 손 모양은 시무외·여원인의 변형으로 앞으로 내민 손이나 위로 들어올린 손이 모두 자연스럽게 반쯤 오므려진 형태이다. 어깨를 덮고 팔을 돌아내린 천의(天衣)나 배와 다리 위로 U자형 곡선을 그리며 흘러내린 옷자락이 무겁고 다소 번잡한 느낌을 준다. 그밖에 가슴 위의 천의 양쪽에 있는 보주형(寶舟形) 장식은 조선 후기 불화의 보살상 표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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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미륵전, 국보 제62호,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 금산사 경내에 있는 3층 규모의 불전. 국보 제62호. 미륵전은 신라 법상종시대에 미륵본존(彌勒本尊)을 봉안한 불전으로 사찰의 중심건물인 금당(金堂)이다. 초창(初創)된 시기나 당시의 건물형태를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진표율사가 중창시에 미륵장육불상(彌勒丈六佛像)을 조성해 3층전인 금당에 봉안했음이 〈삼국유사〉와 〈5층석탑중수기〉(1971년 발견)를 비롯한 〈금산사사적 金山寺事蹟〉(1705년)·〈금산사지 金山寺誌〉(1921년) 등에 기재되어 있다. 또 현재도 소조불상(塑造佛像)의 대좌 아래에 커다란 철제 수미좌(須彌座)가 남아 있어 과거의 장육상대좌임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의 불상은 1597년 정유재란 때 건물과 함께 소실된 후 1627년(인조 5) 소조삼존상을 조성하였다. 현건물은 1601년부터 1635년 사이에 수문에 의해 재건된 뒤 4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층은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은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은 미륵전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의 규모는 1층이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약 79평, 2층은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약 50평, 3층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약 28평 가량 된다. 건물은 총높이가 20m 가량 되는 3층인데 내부는 통층(通層)으로 거대한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당초부터 계획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구방식(架構方式)은 1층에 고주(高柱) 4개와 20개의 변주(邊柱)를 세워 이들 사이에는 굵직한 퇴보를 걸고, 그위에 2층 변주를 세우고 이를 다시 고주와 퇴보로 결구하였다. 3층은 고주가 그대로 우주(隅柱)가 되고 그위에 지붕을 올렸다. 이와 같은 가구방식은 문루(門樓)나 목조탑파에서 많이 쓰이는 방법이다. 공포는 내외이출목으로 외부첨차는 쇠서[牛舌], 내부는 운궁(雲宮)을 기본으로 여러 차례 중수됨에 따라 초가지형태나 공포짜임새에 변화된 모습이 혼재되어 있다. 1층에서는 평방(平枋) 위에 공포를 올렸으나 2층 이상에는 창방(昌枋) 위에 바로 공포를 배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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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5층석탑(고려), 보물 제25호, 높이 720cm, 전북 김제시 금산면 ... | 금산사에 있는 고려시대 석탑. 보물 제25호. 높이 7.2m. 이 탑은 금산사 경내의 뒷편 송대(松臺)라는 언덕에 있는데 불사리(佛舍利)가 봉안된 사리계단(戒壇) 남쪽에 있다. 이러한 탑과 계단의 배치방식은 경기도 개성시 근교 불일사(佛日寺)에서도 볼 수 있고, 양산(梁山) 통도사(通度寺)의 금강계단 앞에 대웅전을 건립하고 그 안에 불상을 모시지 않은 것과도 유사한 것으로 사리신앙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놓인 5층의 방형석탑이다. 갑석(甲石)과 그 위에 얹힌 1단의 괴임은 판석을 여러 개 짜맞춘 형식이며 탑신부 1층까지 여러 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옥개석은 두꺼운 편이며 밑면의 받침이 3단으로 줄어 추녀 밑이 넓어졌는데, 중앙에서 모서리를 향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점이 특이하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넓고 경사는 급한 편이다. 탑 전체를 볼 때 2층 이상부터 체감비율이 적은 편이나 1층 옥개가 넓어 안정감을 준다. 상륜부는 5층 옥개석 위의 노반(露盤)에 갑석형이 넓게 얹혀 있고 신부(身部)에 우주까지 새겨져 있어 6층으로 보기 쉽다. 복발(覆鉢)·보륜(寶輪)·보주(寶珠)가 얹혀 있는 상륜부의 모습은 라마 탑의 형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특이하다. 기본적으로 신라 석탑의 구성을 따르고 있으나 하층기단이 작아지고, 상하층 기단의 갑석 위에 판석을 삽입하여 굄으로 삼은 점, 옥개석 추녀 밑선이 곡선으로 된 점은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이다. 금산사는 후백제 견훤과 관련된 전설이 있으나 그보다는 늦은 고려 초기의 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이 탑을 1971년 해체·복원할 때 사리구와 묵서의 탑지가 발견되어 1492년(성종 23)에 중창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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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6각다층석탑(고려 초), 보물 제27호, 높이 218㎝, 전북 김제시 ... | 금산사에 있는 고려 초기의 점판암제(粘板岩製) 석탑. 보물 제27호. 높이 218cm. 현재 대적광전 앞 왼쪽에 있으나 원래는 금산사에 속했던 봉천원(奉天院)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이 탑은 탑신과 상륜부 일부가 없어져서 원래 모습과 많이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평면이 6각형인 이 탑은 고려시대에 유행된 다각형 석탑의 한 예로서 중요하며 부분적인 장식조각이 섬세하여 공예적 성격이 강한 특수한 탑이다. 기단부는 6각형의 화강석을 3단으로 쌓고 측면에 각각 사자를 양각했다. 그 윗부분부터 점판암으로 되어 있는데 맨 밑에 복련(覆蓮)과 앙련(仰蓮)을 각각 조각한 석재가 2매 놓여 있어 탑신부를 받치는 연화대석으로 보이며 그 사이에는 중석(中石)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탑신부는 옥신(屋身)이 거의 없어지고 맨 위의 2개 층만 남아 있으며 옥개석이 겹겹이 쌓여 있다. 상층부의 옥신은 각 모서리마다 기둥을 모각하고 각 면에는 둥근 테두리[圓圈] 안에 좌불(坐佛)을 선각했다. 옥개석은 추녀 밑이 수평이며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전각(轉角)에서의 반전이 뚜렷하다. 옥개석 밑면에는 초화(草花)와 용 등이 선각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둥근 보주형(寶珠形)의 화강석재가 놓여 있다. 탑 전체를 볼 때 옥개석이 이루는 점진적인 체감비례가 온화하고, 검은색 돌에 섬세한 조각장식이 어울려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이 탑의 층수는 경주 정혜사지13층석탑(淨惠寺址十三層石塔 : 국보 제40호)의 형태로 미루어 보아 13층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으며 대체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金理那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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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금산사의 대한 정보 감사히 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