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처럼 하얀 양복을 입고 오랜만에 아버지가 나타났다. 사나워진 말굽이 방 안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자 백마라사에서 사온 검정 재봉실이 거미줄처럼 계속 풀려나왔다. 엄마가 손목에다 칭칭 감곤 하던,
발정 난 도둑고양이, 아기 울음소리가 귓속을 파고들던 밤. 잠결에 아버지에게서 빠져나온 엄마의 거뭇한 아랫도리를 보았다. 피 묻은 내 얼굴이 간신히 통과한 곳, 세상의 모든 울음이 처음 터지던 곳간.
가래 끓던 바람이 문지방을 밟고 오면 도둑고양이와 생쥐와 지렁이들도 함께 울어주던, 백마라사 상표를 매단 하얀 양복이 무서웠던 집. 끊어진 검정 실을 간신히 이어가던 화평동 집.
〈2011년 '내일을여는작가' 신인상 당선작〉
▲ 이설야 시인
- 1968년 인천 출생
- 2011년 <내일을 여는 작가> 등단
- 현재 계간 <작가들> 편집주간
- 시집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 심사평 》
흔히 좋은 시를 평가하는 기준의 하나인 ‘삶의 진정성’은 단지 각자가 체험한 것들을 곡진하게 그린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대다수의 시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주관적인 체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핍진함이나 밀도와 상관없이 모두 ‘진정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삶의 진정성’은 그런 면에서 딱히 시와 체험의 진실성 또는 순수성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현실세계의 그 이해나 평가의 눈으로 가늠해보거나 양도할 수 없는, 근본적으로 고유하고 유일무이한 ‘나’와의 마주함이 참된 의미의 ‘진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응모 기간이 짧은 탓에 응모작이 적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60여 명의 예비시인들이 참여한 일정한 수준의 시들을 보면서 느낀 생각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체험이 진실하며, 그 진실이 심사위원들을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진실하다고 홍보하기보다 결코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는 꾸밈없는 마음이 시적 소통의 근본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들을 고려하면서 심사위원들은 최종 4명의 작품들을 심사대상으로 삼고 숙고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각기의 작품을 돌려 읽으면서 그 장·단점을 기탄없이 토의하는 자리를 가진 바 있다.
먼저 「가상훈련」외 4편을 응모한 이다희씨의 시들은 과장 없는 담담한 묘사와 안정적인 구성이 돋보였다. 하지만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날개를 꿈는 법’과 같은 다소 개연성 없는 돌출한 표현 등이 눈에 거슬렸으며, 저만이 개성이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는 소품들이라는 인상이었다. 또한 「해의 지문이 손등에 필 때」외 12편을 응모한 이자영씨의 시들은 다양한 소재와 상상력으로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그걸 뒷받침하는 표현력을 좀 더 갈고 닦아야 할 것으로 보였으며, 특히 서정시의 시간성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시적 집중성이나 긴장미가 떨어졌다.
당선자과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권지연씨의 「나비의 거리」외 5편은 거의 흠잡을 데 없이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한 이미저리나 무리하지 않는 상상력, 자연스런 리듬감 등 모든 면에서 월등했다. 다만 화려하고 능란한 수사가 구체적인 시공간을 확인할 수 없게 하고 있으며, 역동적이기보다 정물적인 시세계에 안주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했다.
당선작으로 뽑은 이설야씨의 「백마라사」외 4편은 사실 특별한 개성이나 기교가 드러나는 작품들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삶을 경험을 가는 실로 한 땀씩 엮고 꿰맨 듯한 시들의 보여주는 눌변訥辯의 미학에서 시적 진정성과 함께 어느 시적 유행에도 휩쓸리지 않는 저만의 시세계를 개척해갈 것 같은 정신의 강인함이 느껴져 당선작으로 선정하는데 그 뜻을 같이했다.
당선자에 축하의 말을 전하고, 아깝게 당선자에서 제외된 예비시인들에게도 격려의 박수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