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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목(巨木)이 잠들었다. 본관에는 조기가 걸렸고, 교직원들은 검정 계열의 옷을 입었다. 곳곳에 분향소가 설치되고, 현수막이 붙었다. 본교를 설립하고 한양학원 이사장을 지낸 백남 김연준 박사(이하 설립자)가 영면(永眠)했기 때문. 설립자는 지난 7일 0시 30분경에 서울캠퍼스 의료원에서 향년 94세의 나이로 세상과 이별했다. 지난 1914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난 설립자는 본교의 전신인 동아공과학원을 세워 지금의 한양대를 만들었다. 그뿐 아니라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청산에 살리라’, ‘시인의 죽음’ 등 1,600여 곡을 작곡한 뛰어난 음악가이기도 했다. 설립자를 이야기할 때 사업적인 부분도 빼놓을 수 없다. 대한일보와 기독교신문을 창간했고, 한양개발 등 여러 사업체를 운영했다. 위클리한양은 설립자가 세운 본교의 질적·양적인 성장과 더불어 설립자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평생의 꿈, 대학교육에 헌신하다.
설립자는 평생 대학교육에 매진했다. 지난 1939년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설립자는 졸업 후 서울 천도교회관에 건축, 토목, 광산 등 3개 학과를 갖춘 2년제 동아공과학원을 세웠다. 동아공과학원은 이후 1948년 한양공과대학으로 정식 인가를 받아 국내 최초 사립 공과대학이 됐다.
이 과정에서 보성전문학교 교장(現 고려대)이었던 김성수 선생이 ‘한양대 공대를 세우지 말고, 고려대에 들어와 공대를 만들고 학장을 하라’는 제의를 ‘한양대 공대를 고려대보다 크게 키우겠다’며 정중히 사양했다. 지금의 한양대 공대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후 설립자는 1957년에 문리과대와 상경대, 정경대를 설립해 한양공대를 종합대학으로 만들겠다는 방침을 굳혔다. 물론 만만치 않은 내부 반발도 있었다. 교수나 동문이 ‘한양공대는 한국의 MIT로 남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 이에 설립자는 ‘MIT에도 음악과가 있고, 공대만으로 다양한 인재를 양성할 수 없다’는 논리로 설득해 1959년 종합대 승인을 받아 지금의 4년제 종합대학인 본교가 탄생했다. 그밖에 40년대 한양 중·고등학교를 만들고, 66년 한양초등학교, 72년 의료원, 74년 한양여자대학과 2002년 한양사이버대학을 창립했다.
그렇게 탄생한 본교는 국내 3대 사학과 20만 동문 네트워크를 가진 탄탄한 대학이 됐다. 30대 기업 신임 임원 배출 2위, 코스닥 최고경영자 출신대학 2위, 최근 3년 간 언론사 입사 4위, 법조인 배출순위 4위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중앙인사위원회가 만든 ‘2007 국가인재 데이터베이스’ 출신 대학별 등록 현황 자료에서 5위를 기록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전국 법원을 대상으로 부장판사급 이상 법관 519명의 출신 대학 조사 결과, 본교는 서울대 고려대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이처럼 기업, 언론, 법조 등 다양한 분야에 포진해 있는 20만 동문들은 탄탄한 ‘한양 네트워크’를 이루며 본교의 질적인 성장을 돕고 있고, 설립자는 그 기반을 닦고, 초석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사랑의 실천’하는 지도자 양성 선두에 서다.
설립자는 대학의 양적인 성장과 더불어 건학이념인 ‘사랑의 실천’을 바탕으로 한 질적 성장을 중시했다. 과거 대학들이 지극히 ‘지식의 전달’에 치우친 상아탑에 불과할 때, 본교는 국내 대학 최초로 94년 12월 사회봉사단을 창단하며 ‘사랑의 실천’을 이웃과 함께 나누기 시작해 주목을 받았다. 이후 타 대학들 역시 봉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본교 사회봉사단의 프로그램을 상징적인 모델로 삼아 봉사활동에 뛰어들었다. 또한 ‘사랑의 실천’은 의료원의 설립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는 한국의 의사 수가 인구 1만명당 4명에 불과할 시절, 본교를 키우려면 의과대가 있는 종합대를 추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지난 20년 동안 공학이 대학을 이끌었다면, 다음 20년은 의학이 이끌 시기라고 봤던 것. 이를 반대하는 공과대 교수들을 설득한 뒤, 드디어 서울·연세·경희대에 이어 의대·의료원 설립을 정부에 허가받았다. 이는 종합대학으로서 본교가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던 토대이며, 의료 행위를 통한 또 하나의 ‘사랑의 실천’ 이념을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본교 뿐 아니라 한양 중·고등학교와 한양 사이버대학을 통한 ‘평생학습’을 구현해내고자 했다. 21세기 지식기반사회에 적합한 인재양성과 평생교육을 목표로 설립된 한양사이버대학은 한국표준협회가 주관하는 2003년 서비스품질지수 평가(사이버대학 부문)에서 1위로 선정되는 등 국내 온라인 고등교육을 선도하는 성공적인 모델로 그 입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특히 해가 갈수록 고학력·고연령 입학생이 크게 늘어 ‘재교육 산실’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와 더불어 ‘최고 경영자를 길러내는 대학’이라는 모토로 지난 해 9월, 한양리더십센터가 설립됐다. 국내 대학 최초로 리더십 인증제 ‘HELP(Hanyang Essential Leadership Plus)’를 도입해, 경영 마인드를 갖춘 인재 육성과 체계적인 리더십 계발에 박차를 가했다. 이렇게 김 설립자는 지식과 행동력뿐만 아니라 가슴이 따뜻함으로 꽉 채워진, 리더십과 다재다능함을 ‘사랑의 실천’을 위해 쓸 수 있는 인재 양성에 주력했다.
청산에 살리라’ 작곡가 청산에 잠들다.
설립자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음악이다. 그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청산에 살리라’, ‘비가’를 비롯해 가곡 1610곡 등을 작곡했다. 설립자는 연희전문학교 시절 현제명 교수 밑에서 음악을 공부했고, 국내 최초 바리톤 독창회를 열기도 했다. 지난 1979년에는 독일 보쿰대학 초청으로 7개 도시 한국음악의 밤 연주회를 열었고, 81년에는 미국 카네기홀에서 발표회를 갖기도 했다. 이처럼 음악가적 기질이 다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족이 있었다. 두만강 건너 남양에서 활동한 거상(巨商)이었던 설립자의 부친은 소리를 잘했다. 또한 6촌 형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도 했다. 덕분에 경성고보 시절 바이올린부 대표를 맡기도 했고, 대학 시절에는 오로지 음악에 빠져 지내는 밑바탕이 됐다. 음대에 열정과 애정을 쏟은 설립자의 노력에 힘입어 음대는 비상(飛上)하고 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평가한 학문분야 평가인증제 음악학 분야에서 국내 최우수 음대로 선정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 특히 최우수 음대 가운데 전 평가항목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더욱 의미 깊다. 이뿐 아니라 지난 해 세계컴퓨터음악대회(ICMC)에서 국내 음대 최초로 전자음악에 대한 보고서가 채택됐다. 함께 채택된 대학은 MIT, 스탠퍼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등이다. 이처럼 음대에 애정이 많았던 설립자는 평생 교육과 음악에 매진한 공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교육공로 봉황장(1981), 이탈리아 문화공로훈장(1991), 국민훈장 무궁화장(1996), 금관 문화훈장(1998)을 받았다. 그밖에 설립자는 대한일보와 기독교신문을 창간하고, 국제신문인협회(IPI) 이사, 기독교신문 발행인, 대한체육연맹 회장 등을 역임하는 등 사업가와 행정가를 넘나드는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백남의 열정은 영원히 의구하니 ‘청산에 살리라’
‘길고 긴 세월동안 온갖 세상 변하였어도 청산은 의구하니 청산에 살으리라’ 김연준 설립자의 가곡 ‘청산에 살리라’의 일부다. 그가 평생을 대학발전을 위해 쏟았던 열정은 이제 ‘청산’에 산다. 그가 떠난 이곳엔 또 긴 세월이 흘러 갈 것이며, 사계절이 수십 번은 모습을 달리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한들 ‘청산’이 변할쏘냐. 교육에 대한 그의 열정과 음악에 대한 사랑 또한 오래토록 ‘청산’과 같은 의구함을 간직할 것이다. 이제 그가 일생을 바쳐 쌓아온 탄탄한 토대위에, 그가 이룩한 정신을 본교 학생·교수·직원·동문의 손으로 구현해낼 일만 남았다. 모두가 새로운 발전을 위한 한양 주체임을 새기며, ‘사랑의 실천’의 영원한 푸르름이 손에 손을 거듭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
우리와 함께 3대 사학으로 꼽히는 고려대의 경우
우리와 함께 3대 사학으로 꼽히는 고려대의 경우
우리와 함께 3대 사학으로 꼽히는 고려대의 경우
한양대 홈피 펌
고려대와 한양대에 쉽게 가는 방법 | ||
노원구, 27일 노원문화예술회관서 고려대, 한양대 공동 입시설명회 개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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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만 기자, gojm0725@naver.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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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에게 고려대는 그저 3대 사학을 이루는 경쟁자일 뿐 ㅋㅋ
전통적으로 한양대는 연세대는 인정해도 고려대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있다고 함
첫댓글 고려대 안습 ㅋㅋㅋㅋㅋ
저때 한양공대가 고려공대가 됬다면 상상만해도 무시무시하네
222
개떼후기빨주제에ㅋㅋㅋ
고1때 기술선생이 한공출신이라 한공이 그렇게 멋있어보일수가 없었는데 ㅋㅋ
나 대학들어갈때 한양대학교 운동부가 그렇게 강하고 멋있을수 없었다..축구.야구.배구 모두가 실업까지 평정하며 국내 최강..거기에 혹해서 한대 갔음
저때 한양대는 문리과대 상경대 정경대를 만들지 않고 공과대만을 유지했어야 했다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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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고연경 ㅇㅇ
한양대 빅4 : 공대 법대 의대 음대 윗대학은 연고대급 명문대학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