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매지너리(Imaginary)
-01
"언어 4등급, 수리 3등급, 외국어 5등급!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 화려한 수능 성적에 진호의 시야는 이미 눈물이 앞을 가렸다. '최진호'그의 성적은 항상 777의 잭팟을 달려 왔었기에, 435라는 경이적인 등급을 보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진호의 짐승같은 외침에 수능이 끝나고 오랜만에 보는 급우 아이들이 진호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졸업도 안한 고등학생이 오랜만에 본다는 말은 어폐가 있지만, 3학년 5반 아이들의 담임교사가 출석부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놨기에 다른 과목 교사들도 출석체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대담하게 학교 따윈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보름하고도 4일이 지나자 담임교사가 단체 문자를 돌렸고 그제서야 학생들은 학교를 나왔던 것이다.
"뭐야뭐야뭐야뭐야! 진짜야!?"
한 여학생이 책상 위를 날아오면서(진호에겐 날아오는 것 처럼 보였다.)진호의 앞에 내려섰다. 또래의 여학생들과는 다르게 겨우 목선까지 올 듯한 짧은 단발머리에 억세고 고집있어 보이는 눈, 게다가 학교 체육복 추리닝 바지를 입고 마이는 어디가 내팽겨쳤는지 흰색 블라우스에 풀어진 넥타이를 한 소녀. 진호와 마찬가지로 777의 잭팟을 찍고 나란이 꼴찌를 달리던 소녀였다. 그리고 달려온 폼을 봐서 알겠지만 '누구'와는 다르게 신체적 능력으로는 말도 안될 정도로 우수하였다. 그렇다고 전국체전을 나간다거나 하는 운동선수로서의 활동은 전무하다. 이 부분이 진호와 같은 반 학우들을 포함하여 전교생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지만, 그녀는 언제나 의미심장한 미소로만 답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답게 수능이 끝나자마자 호신술 학원에서 강사를 하는 모양이다. 그런 소녀, '전여희'가 진호의 앞에 내려서자마자 성적표를 빼앗듯이 낚아챘다.
"우우와아아아아... 지,진짜네..."
진호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 여희의 어깨가 누가 봐도 안쓰러울 만큼 축 쳐졌다.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을 때마다 비슷한 성적으로 바닥을 기면서 서로 배신하지 말자는 유치한 말을 주고받던 그들이었지만 진호는 이미 그런것따위는 성적표를 받자마자 잊어버린지 오래였다. 오히려 진호는 여희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자랑스럽게 입을 열었다.
"푸하하하 내가 이 한 방을 위해서 실력을 숨겨왔었다고! 너랑 같은 수준으로 취급하…"
진호는 여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하다가 중간에 퍽 하는 꽤나 둔탁한 소리와 함께 뒤에 있던 사물함에 고꾸라졌다. '같은 수준'이라는 말에서 여희의 눈을 이미 불꽃을 방불케할 만큼 불타올랐고 '취급'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녀의 발바닥이 진호의 얼굴을 가격했다.
"어머나, 몸이 멋대로 움직여서 반응하지 못했어. 아하하하하."
라는 말과 함께 허리에 손을 얹어 경박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진호는 화를내며 벌떡 일어났고 소리를 빽 질렀다.
"야이 자식아! 한국 사람의 말… 으악!"
은 끝까지 들어봐야지 라는 말은 묻힌 체로 진호의 얼굴위로 슬리퍼가 떨어졌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여희는 발을 뻗어 슬리퍼를 날린 맨발로 진호의 얼굴에 발찌검(?)을 날렸었다. 그런데 하필 날아간 슬리퍼가 진호의 얼굴 위로 떨어져버린 것이다. 이런 것까지 계산을 하고 발을 뻗은 건지는 모르지만 만약 고의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면 정말 굉장한 운동신경이라고 진호는 생각했다. 그는 슬리퍼의 먼지가 묻은 머리카락을 털지도 않고 야희에게 악을 써댔지만 코 사이로 줄줄 흘러내리는 꼴을 보고는 여희는 차마 또 때리지는 못 했다. 대신에 혀를 차며 체육복 주머니에서 휴지를 한 움큼 꺼내서 진호의 코를 틀어막았다. 물론 진호의 입장에서 보면 휴지를 쥔 손으로 코를 다시 한 번 때린 꼴이지만.
"아팟!"
그렇게 진호와 여희가 서로 악악거리자 급우들은 익숙한 일이라는 듯이 시선을 떼고 자신들의 성적표로 눈이 향했다. 누군가의 입에서 한숨소리가 나오자 그것을 기점으로 대부분 학생들의 얼굴이 어두웠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다운되자 진호와 여희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억겁같은 침묵이 몇 분 동안 이어지졌을 때 즈음 칠판 쪽 교실 문이 드르르 열렸다. 문이 열림과 함께 캐주얼한 남방과 청바지를 입은 시원스런 인상의 30대 초반 정도의 남성이 들어와 교탁 앞에 섰다. 그는 교실을 한 번 슥 흝어보고는.
"성적표 보고 충격 좀 받았나 보지?"
그 시원스런 인상의 30대 초반의 남성, 3학년 5반의 담임교사는 피식 웃었다.
"나도 겪어봐서 다 안다. 말을 길게 해봐야 너희들 기분만 나빠질 것 같아서 짧게 이야기 하고 나가마"
그제서야 학생들은 성적표에서 시선을 떼고 자신들의 담임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출석부는 이대로 내가 쭉 들고 있을테니까 학교는 나오지말고"
우오오 하며 갑작스럽게 학생들의 분위기가 풀려나갔다. 뭐랄까, 굉장히 단순한 5반이었다.
"나오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다만 너희들 나와봐야 히타틀고 영화만 볼꺼지? 전기세 아까우니까 그냥 집에가서 등 따시게하고 컴퓨터로 다운받아서 봐라."
몇 마디만 했을 뿐인데 학생들은 이미 날아갈 듯이 기쁜 표정들 이었다. 더러는 교사의 말이 웃긴지 킥킥거리는 이도 있었다.
"자, 오늘이 너희들의 마지막 등교다. 3년, 길게는 12년 동안 수고 많았고, 졸업식 날짜 다 되가면 문자 돌릴테니까 빠짐없이 나오도록, 안나와도 집으로 '졸업장'만은 보내줄테니 걱정말고. 자 이상!"
마지막 말에 학생들과 교사 모두들 소리내어 웃었다. 반장이 일어나 차렷 경례를 힘차게 외치고 다들 삼삼오오 흩어졌다. 뒷 풀이 할 사람, 아르바이트하는 사람, 피시방 가는 사람, 놀러 가는 사람 등 여러 부류가 있었지만 진호는 날씨도 춥고 놀기도 귀찮고해서 아이들에게 인사만 해주고 혼자 터덜터덜 걸어갔다. 물론 끝까지 여희가 달라붙으며 '한턱 쏴'를 연발했지만 너는 벌써 취직도 했잖아 라도 쏘아붙인 뒤 겨우 떨궈내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는 아까부터 계속 꿈틀꿈틀 거렸다.
435라니, 다른 학생들이라면 그저 그렇거나 절망으로 눈물을 쏙 빼버릴 성적이건만 진호에게는 그야말로 꿈만 같은 등급인 것이다. 고등학교 입학하고 수능 치기 전까지 777잭팟만 찍어왔던 진호이기에 이런 행운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길은 창창한 미래 뿐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쳐들었다.
"으,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길 한복판에서 그렇게 웃어버리자 다른 사람들이 '웬 미친놈'보듯이 했지만 진호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 걷다가 멈추어서 웃고 다시 조금 걷다가 멈추어서 다시 웃고 이 쯤 되자 사람들도 '하얀 병원'에서 탈출한 정신병자 쯤으로 여기고 무시하고 지나갔다. 학생들이 보았다면 카메라로 동영상을 찍고 난리법석 떨만 했지만 지금 시간은 한참 수업할 시간이라 그럴 사람들은 없었다. 학교에서 진호의 집까지는 거리가 좀 있기에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하지만 진호는 버스를 타서도 이렇게 계속 웃어버릴 것 같아서, 민폐가 될까바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좀 멀긴 했지만, 그 정도 거리야 이 기분으로는 한 달음에 걸어가주마! 하며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진호의 주위에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어 가는데도 기분 좋게 싱글거리며 걸어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진호도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조금 이상하게 웃었다지만 주변에 노점상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설마 자신 때문에 길거리 노점상들이 옮겨갈 일은 없었기에 점점 불길한 느낌이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우연인지 자동차들도 지나가지 않았다. 아무리 오전시간 이라도 버스는 오가기 마련이건만 버스조차 다니지 않았다. 진호는 약간 불안하긴 했지만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하고 버스타고 갈 걸 후회하며 발걸음은 빨리 하려했다.
그 순간.
끼이이이이이이이!
진호는 귀청을 때리는 엄청난 고주파 소리에 깜짝놀랬다. 가끔씩 갑자기 귀에 삐 하고 들려오는 소리와는 느낌과 크기부터가 틀렸다.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그리고 진호의 눈에는 이상한 현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주파가 들려온 곳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는데, 공원에 있는 미끄럼틀이 갈라지고 있었다. 아니, '미끄럼틀이 갈라진다.'가 아니라 '미끄럼틀을 끼고 있는 공간이 갈라진다.'가 맞을 것이다. 즉….
"공간이… 갈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