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제41칙 조주화상의 크게 죽은사람
“잘못된 약으로 대선사 시험하는 건 무모”
〈벽암록〉제41칙은 조주화상과 투자(投子)화상과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주화상이 투자선사에게 질문했다. ‘크게 한번 죽은 사람이 되살아날 때는 어떻습니까?’
투자선사가 대답했다 ‘야간에 통행을 해서는 안 된다. 날이 밝으면 반드시 도착해야 한다.’
擧. 趙州問投子, 大死底人却活時如何. 投子云, 不許夜行投明須到.
조주화상에 대해서는 〈벽암록〉제2칙에서도 언급하였다. 투자선사는 서주(舒洲) 투자산(投子山)에서 활약한 대동(大同:819~914)선사로서 취미무학(翠微無學)화상의 문하에서 나아가 선종의 종지를 완전히 깨닫고, 두루 유행하다가 투자산에 초암을 짓고 살았다.
〈조당집〉제6권 투자화상전에는 조주화상과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주화상이 투자산 밑에 이르니 가게를 보는 사람이 있어 물었다. “투자산이 어디인가?” 가게 주인이 “왜 물으시오?” 라고 했다. 조주화상은 “투자화상의 명성을 오래전부터 듣고 예배하려고 하오”, 가게 주인은 “가깝기는 하나 산에 오를 필요가 없소. 내일 아침에 돈을 얻으러 올 것이니 그때 만나시요.” 조주화상이 말했다. “그러면 투자화상이 오시면, 어떤 납자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지 마시요.” 가게 주인이 승낙했다. 이튼 날 과연 투자화상은 산에서 내려와 돈을 얻으니 조주가 나서서 붙들고 말했다. “투자의 명성을 들은지 오래인데 이것뿐인가?” 투자화상은 이 말을 듣자마자 이내 몸을 숙이고 물러가서 다시 조리를 치켜들고 말했다. “소금 값을 주시오.” 조주가 곧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니 투자화상은 그대로 돌아갔다. 조주가 좀 뒤떨어져 따라가면서 투자화상에게 질문했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날 때는 어떻습니까?” 투자화상이 말했다. “야간에 통행을 해서는 안 되며, 날이 밝으면 반드시 도착해야 한다” 조주는 곧장 달아났다. 투자화상이 사미를 시켜서 조주를 쫓아가 그렇게 행동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자, 조주는 “태백(太伯)을 만났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투자화상은 크게 웃었다고 한다. ‘태백(太伯)을 만났다’는 것은 투자화상을 큰 선지식으로 존경한다는 의미이다.
먼저 조주화상이 질문한 “크게 한번 죽은 사람(大死底人)이 되살아날 때는 어떻습니까?”라는 말은 선수행을 통해서 불법의 궁극적인 경지를 체득하여 불법의 지혜작용을 자유롭게 펼치는 것을 말한다. 선어록에 크게 한번 죽어야 한다는 의미로 대사일번(大死一番)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죽음(死)은 아상(我相) 인상(人相)의 자아의식과 중생심(生滅心)을 완전히 텅 비운 공(空)의 실천수행을 말하며, 삶(活)은 일체의 번뇌 망념의 생사심(生死心, 중생심)과 사량 분별을 여의고 철저히 크게 깨달은 무심(無心)의 경지에서 불심의 지혜작용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선어록에서 사활(死活)은 번뇌 망념을 죽이는 칼(殺人刀)과 지혜작용을 살리는 칼(活人劍)과 같은 의미이며 살활자재는 뛰어난 선승의 기지(機智)로서 번뇌 망념을 죽이고, 지혜작용을 살리는 지혜를 자유자재로 한다(殺活自在)고 주장하고 있다. 사활(死活)을 육체적인 생사로 이해하여 깨닫게 되면 육체적인 생사자재(生死自在), 생사해탈을 얻은 경지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불교는 육체적인 임종을 위한 종교도 아니고, 사후의 영생을 얻기 위한 종교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불심으로 위대한 보살도의 삶을 잘 사는 지혜를 체득하는 종교이다.
조주의 ‘死活’경계 묻는 질문에
투자화상은 초월한 경지서 대답
그런데 조주는 크게 한번 죽은 사람이 되살아날 때는 어떠한가를 묻고 있다. ‘되살아났다(活)’는 것은 죽음(死)의 체험을 토대로 한 말이다. 선불교에서 죽음(死)이나,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인다(殺)는 표현은 부처나 조사라는 편견과 고정관념 등 나쁜 업장을 만드는 중생심을 텅 비우는 공(空)의 실천이며, 살린다는 것은 불심의 지혜작용을 펼치는 것을 말한다.
〈전등록〉제20권 소주 영광원의 진(眞)선사는 다음과 같이 법문하고 있다. “말끝이 조금만 어긋나도 고향(깨달음의 경지)은 만 리 밖이니, 반드시 절벽에 매달린 손을 놓아야(懸崖撒水) 스스로 깨달을 수가 있다. 죽었다 다시 소생하는 일(絶後蘇生), 그대를 속일 수가 없는데, 비상한 종지를 뉘라서 숨기랴!” 즉 ‘백 척의 장대 끝에서 다시 한걸음 더 허공에 몸을 날려야 한다(百尺竿頭 進一步)’는 말과 같이 깨달음의 경지에도 머물지 않고 초월하지 않으면 불심의 지혜의 작용은 되살아 날 수가 없는 것이다.
〈법화경〉에 몸을 불태워서 공양하는 소신(燒身)공양 이야기가 있는데, 정말 육체를 불태워 공양하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자신의 육체를 불태워 누구에게 공양하는가. 부처님께 공양하려면 부처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부처는 각자의 청정한 마음이기에 소신공양은 육체를 불태워 공양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가장 귀중한 신명(身命)까지도 아끼지 않고 불태워 공양한다는 것은 신명보다도 더 중요한 불법을 깨닫는 법공양을 말한다. 따라서 신명을 아끼는 자아의식을 갖는 마음을 불태워 멸각시키며, 아상과 아집을 완전히 불태워 버리는 공(空)의 실천을 소신공양으로 설한 것이다. 신명까지 불태워 없애버리는 소신공양은 참다운 불법을 깨달아 지혜로운 삶을 실행하는 보살도의 법공양이 되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조주가 질문한 아상 인상의 자아의식과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죽이고, 불심의 지혜작용을 되살아나도록 한 경지는 어떠한가. 사활(死活)의 어느 한 쪽에 머문다면 사활자재(死活自在)한 작용이 불가능한 것이다. 투자선사는 “한 밤중에 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니 어두운 한밤에 다니지 말고, 날이 밝으면 내일 반드시 도착해야 한다”라고 대답하고 있는데, 상당히 어려운 말이다. 밤은 암흑(暗)이고, 낮은 밝음(明)인데, 어둠을 피하고 밝음을 선택하며, 취사 분별하는 중생심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어둠과 밝음을 모두 함께 초월하라는 말이다. 조주가 죽고 사는 사활(死活)의 차별경계를 초월한 경지를 질문한 것에 대하여 투자는 명암의 차별경계를 초월한 입장으로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석두화상 〈참동계(參同契)〉에 “밝음(明) 가운데 어둠(暗)이 있거든 어둠으로 만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어둠 가운데 밝음이 있거든 밝음으로 만났다고 생각하지 말라. 밝고 어둠이 서로 각각 상대함은 마치 앞뒤의 걸음걸이와 같다”라고 읊고 있다. 조주가 제시한 사활(死活)과 투자가 대답한 명암(明暗)은 삼라만상의 차별경계를 말한다. 인간은 사바세계의 차별세계를 떠나서 살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차별경계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이 세운 원력의 보살도를 실천하는 길을 무심의 경지에서 걸어가는 것처럼, 차별경계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지혜를 체득하도록 불법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다.
원오도 ‘도적은 도적을 안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조주와 투자는 각자의 선기를 잘 파악하고 있는 선승이라고 평가하고 있으며,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살아있는 가운데 안목을 갖추면 죽은 것과 같네.” 조주는 원래 죽은 사람이 아니라 크게 살아있는 안목을 갖춘 선승인데, 지금 투자화상을 감별해보기 위해 도리어 죽은 사람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함께 먹으면 안 될 약으로 어찌 작가를 감별하려고 하는가’ 약기(藥忌)란 환자가 약을 복용할 때에 금기해야할 식물이다. 지황에 무우라든가, 철제(鐵劑)에 차(茶)를 함께 먹지 않도록 금기하는 것을 말하는데, 대승의 불법에서 사활(死活)의 차별을 논의한다는 것은 금기해야할 말이다. 불법은 사활(死活)없는 건강한 불심을 체득하는 것인데, 금기해야할 사활(死活)의 차별심을 가지고 투자와 같은 대선사를 감별해 보려고 한 것은 쓸데없이 무모한 일이었다.
‘고불(古佛)도 오히려 이르지 못했다고 했네.’ 사활(死活)을 초월한 경지는 삼세제불도 아직 도달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제불도 도달했다고 말하지 않는 경계는 어떠한 경지인가. 불법은 체득했다고 하는 것은 올바른 체득이 아니다. 그래서 불가득(不可得), 무소득(無所得)의 경지이기 때문에 불법을 체득했다고, 전해받았다고 하는 것은 사량분별의 중생심인 것이다. “그 누가 티끌 모래를 뿌리는가?” 투자는 조주의 질문에 뛰어난 안목으로 접화한 수단이 있었다고 읊고 있다.
성본 스님/ 동국대 교수
[출처] [벽암록] 제41칙 조주화상의 크게 죽은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