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줄 찾아온 한국인데” 남편의 폭행, 아이는 심장병…고려인 동포의 사연
이가영 기자2024. 11. 9. 06:00
“우리의 뿌리가 있는 곳.” 빅토리아(가명‧28)의 목소리에는 6년 전 한국행을 결심했던 순간의 설렘이 묻어났다. 한국에서 일하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찾아온 한국이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희망적이었다. 어머니와 고려인 동포들의 도움으로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고, 결혼과 출산으로 자신만의 가정도 꾸렸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출산 후부터 시작된 남편의 폭력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결국 남편은 폭행 사건으로 수감되었고, 빅토리아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이모 집으로 피신해야 했다.
이혼 소송을 시작하고, 새집을 구하면서 모아둔 돈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여기에 선천성 심장병을 안고 태어난 아들의 수술비는 감당하기 힘든 부담이었다.
빅토리아는 필사적으로 자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온라인으로 수학 강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안산 지역의 고려인 교육기관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였다. 하지만 월세와 식비, 공과금, 어린이집 비용 등 돈 써야 할 곳은 끝없이 늘어났다. 140만원의 월급으로는 빚만 늘어날 뿐이었다.
이때 이랜드복지재단의 ‘SOS 위고’가 희망의 손길을 내밀었다. 자녀 어린이집 비용과 생계비, 치료비를 지원받으며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빅토리아는 “보증금 일부를 갚을 수 있었고, 미뤄왔던 아이 심장 수술 예후 검사도 받았다. 아이가 건강하다는 결과를 들었을 때는 정말 감사해서 눈물이 났다”고 말하였다.
늘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다는 빅토리아는 내년 영주비자 취득을 꿈꾸고 있다. 그의 눈빛에서는 새로운 희망이 빛나고 있었다.
고려인 아동들에게 수학 수업을 하고 있는 빅토리아. /이랜드복지재단
◇”정착의 꿈이 흔들린다” 열악한 고려인 한부모 가정의 현실
2022년 통계에 따르면, 국내 거주 고려인 동포는 약 8만5000명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경제적 어려움과 주거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한부모 가정의 현실은 더욱 가혹하다. 고려인동포지원센터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고려인 한부모 가정의 70% 이상이 월 200만원 미만의 소득으로 생활하고 있다. 대부분 일용직이나 비정규직 등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 놓여 있다.
주거 환경도 열악하다. 조사 대상 가정의 80%가 월세에 거주하며 이중 절반은 보증금 500만원 미만의 저가 주택에서 생활한다.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은 있지만 한계가 있다. 체류자격과 거주 기간에 따라 지원 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고, 복잡한 신청 절차와 언어장벽으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고려인 동포들은 한국 정착 의지가 강하다. “우리 핏줄이라고 찾아온 한국”이라는 말에는 역사적 아픔과 함께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희망이 담겨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고, 지원의 손길은 부족하다.
◇”홀연히 사라진 남편…아이 아파서 출근 못 하자 공장 잘렸다”
또 다른 고려인 동포 따냐(가명‧30)는 2018년 세 살배기 아이를 안고 한국 땅을 밟았다.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품고 한 남자를 만나 2022년 둘째까지 얻었지만, 아이의 아버지는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혈혈단신으로 두 아이를 키워야하는 따냐의 어깨는 무거워졌다.
공장 일용직으로 일하는 따냐의 월 수입은 130만원이다. 일이 있을 때만 공장에 나간다. 월세와 관리비, 어린이집 비용을 내기에도 빠듯하였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하였다. 아이가 아파서 며칠 출근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더 이상 공장에 나오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따냐는 자녀들의 건강보험료만큼은 한 푼도 밀리지 않고 납부하였다. 아이 당 2만3000원, 매달 꼬박꼬박 내는 보험료는 자녀를 향한 따냐의 애틋한 모정이었다.
대신 자신의 건강보험료는 미뤄야 했다. 190만원의 체납금이 쌓이면서 결국 통장이 압류되었다. 따냐는 “100만원을 내야 압류가 풀린다는데 한국말은 서툴고, 분납 신청이 뭔지는 알 수도 없었다”며 울먹였다.
이때 ‘SOS 위고’가 155만원의 생계비를 지원하였다. 두 달 치 월세와 어린이집 비용, 체납 분할납부금까지 해결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따냐에게 큰 힘이 된 건 정서적 지지였다. 그는 “이제는 위기가 찾아와도 기댈 곳이 있다는 게 정말 큰 힘”이라고 하였다.
이제 매달 건강보험료를 성실히 납부하면서 남은 체납금도 차근차근 갚아 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따냐의 이야기는 적시에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게 얼마나 큰 희망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다.
이랜드복지재단 관계자는 “위기 상황에서는 지원 시기가 매우 중요하다”며 “3일 이내 골든타임을 지키는 것이 가정 해체를 막는 핵심”이라고 하였다. 재단은 ‘SOS 위고’ 사업을 통하여 앞으로도 더 많은 가정이 희망을 갖고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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