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1차 바이블파워 http://www.biblepower.co.kr/
2차 https://m.blog.naver.com/ddoksaseyo/48489734
조승규 / 킹제임스성경신학대학 교수
[“양복 입은 무당”이라는 말은 한국 교회 강단의 현실을 응축한 표현으로,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얼마 전 ‘뉴스앤조이’에 이 “양복 입은 무당”이라는 제하의 기사가 게재되어 눈길을 끌었는데, LA 서머나교회의 김성수 목사의 오디오 칼럼을 정리한 것이었다. 내용인즉, 무당이 신명나게 굿하고 작두 위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정성이 부족하다,’ ‘정성이 부족하면 복을 받지 못한다.’고 위협하며 돈을 받아 챙기는 것이나, 교회에서 성경에도 없는 이상한 짓을 하면서, 오로지 ‘복’만을 구하는 무지한 교인들에게 ‘헌금이 부족하다,’ ‘봉사가 부족하다,’ ‘기도가 부족하다.’며 ‘내말만 잘 들으면 모든 소원을 이루고 만사형통할 것이다,’ ‘삶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사랑하라.’는 추임새를 넣어 교인들의 넋을 빼앗아 버리며 돈을 받아 챙기는 것이나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강대상에서 벌이는 또 다른 무당의 신명나는 굿판에 속아 예수님을 오로지 ‘복’만 내려주면 그만인 예수님으로 여기고 있는 오늘날 교회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꼬집은 기사가 아닐 수 없었다. 본보는 바로 이 “양복 입은 무당”이 왜 한국 교회의 강단을 누비게 되었는지를 그 근원부터 착실하게 알아보고 그에 대한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선교 초기 한국 교회의 신앙과 “한국식 기독교”
영적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은 한국 교회를 성경적인 기독교라고 말하지 않는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아는 것이 성경의 원칙인데, 현재 한국 교회의 열매는 그 나무가 어떤 종류인가를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한국 교계를 “한국식 기독교”라고 부른다. 이 말은 비성경적인 열매들을 내고 있는 한국 교계를 통칭하는 표현이다. 한마디로 “비성경적인 기독교”를 말하는데, 특히 한국적인 특수한 상황에서 양산된 비정상적인 열매들을 포함한 한국 교회 전체를 평가하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의미의 “한국식”이 아니라,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의 신앙,” 즉 본래의 온전한 신앙에서 왜곡되고 떨어져 나왔다는 뜻에서 “한국식”이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이다. 이렇게 한국 교회가 “한국식 기독교”라는 평가를 받는 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한국 교회에 “샤머니즘”(무속신앙)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샤머니즘에서 비롯된 한국식 기독교를 바로잡고자 한다면, 먼저 선교 초기 한국 교회의 신앙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되었던 180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의 상황은 민족적으로 고난의 시기였으며, 사회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시대였다. 이때 한국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모습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민족적 신앙”으로, 민족의 정치 사회 현실이 반영된 신앙 형태이다. 이런 신앙은 다양한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핵심이었기 때문에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신앙 요소들을 바르게 전파하거나 적용하지 못했다. 지금도 교회 본래의 사역보다 사회 및 정치 참여에 몰두하는 교회와 단체들이 교계에 넘쳐나는 것은 선교 초기부터 이와 같은 잘못된 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이 “한국식 기독교”를 형성하게 하는 주된 요인이었다. 두 번째는 “토속적 신앙”으로, 샤머니즘적인 한국의 토속신앙이 그대로 반영된 신앙 형태이다. 무속적인 토속신앙의 요소들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옷을 바꿔 입고 교회에 그대로 유입되었기에 “한국식 기독교”를 형성하는 주된 요인이었다. 세 번째는 “복음적 신앙”으로, 복음이 개인의 믿음에 적용된 신앙 형태이다. 그러나 이런 신앙은 복음 자체가 전래되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둘 수 없으며, 그 전파정도도 미약하다. 그 이유는 앞선 두 종류의 신앙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들을 수용하거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설사 복음을 통해 구원받았다 할지라도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의 신앙”으로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바른 성경과 교리가 부재한 상황에서 지금까지 100여 년 이상 미온적인 신앙을 유지해 왔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식 기독교”가 형성되는 데 텃밭을 제공해 준 셈이다.[1]
물론 개인이나 교회의 부분적인 바른 믿음과 실행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훌륭한 신앙인들이 이 땅에도 많이 있었지만, 한국 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비성경적인 신앙 요소들을 너무나 많이 지니고 시작되었기 때문에 총체적인 평가는 처음부터 성경적 기독교에서 벗어난 “한국식 기독교”였다는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한국의 샤머니즘을 그대로 반영한 토속적 신앙은 그 폐해가 매우 크다. 이제 그 실상을 확인해 보기 바란다.
한국인의 뿌리깊은 신앙 - “샤머니즘”
“샤머니즘”(shamanism)이란 용어는 17세기 후반에 퉁구스어 사만(saman)에서 유래한 샤먼(shaman)이란 용어가 유럽에 전해짐으로써 통용되었는데, 여기서 샤먼은 무당을 일컫는 말이며 샤머니즘은 우리말로 무속신앙(巫俗信仰)이라고 한다.
한국인의 뿌리깊은 신앙, 즉 샤머니즘에 대한 증언들을 한국 교회 초기에 기록된 여러 문헌들을 통해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 「선교사 존스(G. H. Jones) -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한국인을 사로잡은 대표적인 종교 세 가지를 꼽으라면 샤머니즘과 불교와 유교다... 한국인은... 사회적으로는 유교인이며, 철학에서는 불교인이고, 곤경에 처해 여러 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는 샤머니즘 신앙인이다.」[2] 「선교사 헐버트(H.B. Hullbert) - 일반적으로 말해서 한국인들은... 고난을 당할 때는 영혼숭배자이다... 여기서 원시적인 영혼숭배라 함은 정령설, 샤머니즘, 배물교적 미신 및 자연숭배 사상을 일반적으로 포함하는 것이다... 본질적 종교성향은 샤머니즘이다.」[3] 또 선교사 빈턴(C.C. Vinton)은 <한국에서 선교사업에 방해되는 것들>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비록 나라가 정한 종교는 없어도 한국에는 군대(legion) 같은 미신들이 있다.」[4] 이와 같은 증언들이 아니라도 우리나라의 미신들과 무속적인 풍습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특히 철학의 본고장이라고 하는 그리스 아테네 사람들에 대해 사도 바울이 『매사에 너무나 미신적』(행 17:22)이라고 지적한 것과 같이 한국인도 매우 미신적이며, 이러한 성향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정착시키는 데 토대가 되었다.
초기 부흥운동 - 샤머니즘적인 은사주의 물결
“한국식 기독교”를 형성한 한국 교회가 이구동성으로 자랑하는 부흥운동이 선교 초기에 있었다. 다음은 그 실상을 확인할 수 있는 당시의 기록이다. 「(1907년 평양의 장로교 부흥운동에 대한 리 선교사의 증언) - “설교를 간단하게 한 후 우리는 통성기도를 시작했다... 이 통성기도가 집회를 특징짓는 현상이었다... 기도를 한 후 자백할 사람이 있느냐고 하는 순간, 하나님의 성령이 회중 가운데 임하셨다. 한 사람씩 일어나더니 자기 죄를 자백하고, 울음을 터뜨리더니 마루 바닥에 쓰러져 손바닥으로 마루를 치면서 괴로워 몸부림쳤다... 죄를 자백하는 중간 중간에 회중 전체가 통성기도를 하였는데... 그리고는 다시 자백을 하면서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는데 우리도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어 같이 울 뿐이었다... 한 여인이 괴로워 몸부림치다가 혼절하였고 그러자 뒤를 이어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져들었다.”」[5]
평양뿐만 아니라 초기 부흥회에는 이와 같이 죄들을 공개적으로 자백하는 행위가 있었는데, 이런 행동은 부분적으로 도덕성의 회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행위가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새로운 헌신의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유익할 수 있지만, 구원이나 거듭남 없이 죄들을 고백하는 것은 은사주의 집회에서 이뤄지는 감각적인 행동일 뿐이다. 평양과 그 외 지역의 부흥회에서 행해진 공개적인 죄의 자백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성경적 구원과는 상관 없이 단순하게 죄에 대한 찔림을 받고 죄들을 감정적으로 고백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반복적인 죄들의 고백은 단번에 이루어진 영원한 구속의 복음에 무지한 상태에서 행해지는 “회개 없는 반복적인 자백”이기 때문에 결코 한 개인이 구원받거나 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없다. 선교 초기에는 물론 지금도 새벽기도회나 철야기도회에서 반복적으로 죄들을 자백하는 사람들의 절대 다수가 구원받지 않았거나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사실은 초기 부흥운동의 영적 실상을 가늠하게 한다. (이런 이유로 ‘도둑을 잡으려면 교회의 새벽기도회나 철야기도회에 가면 된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특히 공개적인 자백과 함께 통성기도를 철야로 하거나 새벽에 하는 행위는 한국식 기독교의 샤머니즘적 유래를 더욱 분명하게 입증하는 것이다.[6] 또한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터뜨린 사람들이나,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어 같이 울기만한 선교사들, 괴로워 몸부림치다가 혼절한 여인이나,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져든 사람들의 모습에 대해 성경 어디에서도 그것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증거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영적 분별력이 결여된 초기 선교사들은 샤머니즘에서 유래한 한국 교인들의 독특하고 열성적인 행동들을 전폭적인 성령의 역사로 오해했던 것이다.
이후에도 이와 같은 형태의 부흥운동은 계속되었는데, 1920-30년대 부흥회의 특징은 초기 한국 선교의 결과로 배출된 한국인 1세대 목회자들이 개인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김익두, 이용도, 길선주 등이었는데, 각각 ‘신유와 기적을 수반한 부흥운동,’ ‘신비주의적 부흥운동,’ ‘내세지향적 부흥운동’을 한국 교회에 정착시킨 인물이라고 평가받고 있다.[7] 이들의 집회 역시 감정적 흥분과 자제하지 못하는 울음이나 몸 떨림, 질병 치유 등의 신비적인 체험들이 중요한 것이었다.[8]
해방과 한국전쟁 이전의 초기 한국 교회에서 나타난 이와 같은 신비적인 체험과 감정을 고조시키는 집회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초기 한국 교회에 나타난 신비체험과 치유 등은 오순절 교단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다. 처음 오순절파가 전래된 것은 1928년 오순절파의 선교사 럼시의 내한에서 비롯되었는데, 1931년이 돼서야 서울에 최초의 오순절교회를 설립했고, 이때부터 방언을 주장하며 오순절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38년까지 192명의 신도를 확보하는 정도였는데, 그 1930년대 후반부터는 일제의 기독교 핍박이 가중되면서 선교사들이 축출당하고 신도들도 흩어졌던 상황이었다.[9] 그러다가 해방 후 1950년 4월에 오순절교회가 재건되며 하나님의 성회가 소개되고 순복음 교회 등이 확산되었다. 따라서 오순절교회의 선교사에 의한 신비주의적 성령운동 이전에 이미 한국 교회에는 신비체험과 치유 등이 나타난 것인데, 그 기원은 다름 아니라 1세대 한국인 목회자들이 과거부터 체험했던 샤머니즘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이것은 이들 목회자들만이 아니라 개종한 교인들 역시 몸에 배어 있던 무당의 굿과 무속적 풍습들에 익숙했기에 감정의 고조와 자제하지 못하거나 돌발적인 몸동작들을 거부감 없이 잘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오늘날의 은사주의 운동에서 나타나는 체험들 역시 샤머니즘의 것과 같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다음에 계속>
****************************************************
[1] 이덕주,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pp.30-31. 이덕주(감신대 교수)는 세 가지 신앙 양태를 설명하며 복합된 신앙 양태도 있다고 말하지만, “복음적 신앙”을 다른 두 종류의 신앙 양태로부터 단절된 것으로 기술한다. 그러나 이런 판단과 평가는 그가 “한국식 기독교” 안에 속해 있기 때문에 범하게 되는 오류이다.
[2] G. H. Jones, The Korean Mission of Methodist Episcopal Church, (N.Y.: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10), p.14; 이덕주, Ibid., p.76에서 재인용.
[3] 노승욱, 「샤머니즘과 한국 기독교 문화」, 소금과 빛, (서울: 두란노서원, 2000. 6), pp.106-107. 전 교려대 총장 홍일식 박사도 그의 저서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에서 한국인의 종교를 “샤머니즘”이라고 단언한다.
[4] C.C. Vinton, Obstacles to Missionary Success in Korea,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Dec., 1894, p.841; 이덕주, op. cit., p.77에서 재인용.
[5] G. Lee, 「How the Spirit Came to Pyeng Yang」, The Korean Mission Field, Mar., 1907, pp.34,37; 이덕주, Ibid., pp.111,113에서 재인용.
[6] 조승규, 「새벽기도회, 비성경적인 종교행위」, 성경대로믿는사람들, (서울: 말씀보존학회, 2003. 1, 통권 142호), pp.10-17 참고.
[7] 한국기독교연구소, 한국 기독교의 역사 II, (서울: 기독교문사, 2002), p.187.
[8] 다음의 자료를 통해 이들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기독교연구소, Ibid., pp.187,188,189-191; 김린서, 「김익두목사소전(4)」, 신앙생활, 1941. 2, p.20; 변종호, 이용도목사전, 심우원, 1958, pp.28-31; 변종호 편, 이용도 목사의 일기, 신생관, 1966, p.63; 서정민, 「한국 교회 대부흥운동의 이해」, 한국 기독교와 민족운동, (서울: 도서출판 보성, 1986), p.253; 차재명, 조선예수교장로회사 (상), 신문례예배당, 1928, pp.180-181.
[9] 김흥수, 한국전쟁과 기복신앙 확산 연구,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9), pp.170-171.
첫댓글 오 이거 진짜 흥미롭다 미국에서 살다왔는데 미국교회랑 한국교회진짜 분위기 확 달랐거든...한국식 기독교는 확실히 많이 변질됐다거 생각함..
기독교 말고 개신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ㅜㅠㅠ
오 흥미로워서 정독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