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3당 합당이 일어났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색깔이 다른 정당끼리 합쳤다. 노태우의 민정당과 김영삼의 민주당,김종필의 자민련.
지역기반은 노태우의 대구,경북(TK),김영삼의 부산,경남(PK),김종필의 충청으로 김대중과 호남을 고립시켰다. 이때문에 김대중은 호남 색깔을 빼기위해 3당합당에 반대한 정치인들과(꼬마 민주당) 합당을 시도하게 된다.
민자당이 200석이 넘는 의석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을 합칠때 서로 다른 꿈(노태우는 퇴임후 안전보장, 김영삼은 대통령, 김종필은 내각제)을 꾸고 있었기 때문에 만들고 나서 부터 엄청난 내분에 싸인다.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볼까 한다.
1988년 헌정사상 최초로 여소야대 정국이 된다. 야당은 여당의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을 부결 시키면서 여소야대의 힘을 보여줬다.
또 그 전 정권인 제 5공화국의 의혹들을 파해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활동을 한다.
이떄 유명해진 의원은 노무현,이인제(?),이해찬등이다. 특히 노무현 의원은 치밀한 자료준비와 탄탄한 논리와 언변으로 일약 청문회 스타로 떠오른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5공청문회가 유야무야 된다. 그러다가 1990년 그동안 물밑접촉을 하던 노태우,김영삼,김종필 세 사람은 3당합당을 발표한다.
이는 국민을 배신한 것과 마찬가지 였다. 국민은 야당하라고 뽑아줬지 합당하라고 뽑아준것이 아니였기 때문이다. 사실 노태우 정부는 6공의 황태자라고 불렸던 박철언을 이용해 김대중과 접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다음과 같은 말로 거부한다. '"국민이 만든 여소야대가 불편하다고 마음대로 바꾸려 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일이고 정치윤리를 망치는 일이다." 그러자 노태우는 김영삼과 접촉을 하고 YS특유의 스타일인 혼자 생각하고 결정을 내렸다. YS의 가신들을 펄쩍 날뛰며 그것은 안된다고 했지만 결국 YS를 따른다.
이 때문에 김영삼은 지지기반이던 부산에서 견공김영삼이라는 욕을 먹는다.
그러나 모든 의원이 3당합당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노무현 의원은 3당합당을 결사 반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의가 있으면 반대토론을 해야합니다.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김영삼은 쌩까고 3당합당을 한다.
그러고 시간이 흘러 재보궐 선거에서 여당이 참패를 한다. 당연히 김영삼의 책임이 불거질수 밖에.(당시 김영삼은 총재 바로 밑인 대표최고위원이었다.)
이때 김영삼은 공작정치를 하지말라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김영삼과 박철언이 북방외교로 각을 새우기 시작한다. 김영삼은 북방외교는 자기가 다했다고 했지만 박철언은 "김영삼 그 사람 한거 없어요. 아니 근데 외교가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되도 됩니까?"라며 찬물을 끼얹어 버린다. 그러자 김덕룡의원은 "박철언 장관은 똑똑하고 다 좋은데 자기를 너무 내세우는게 흠이야. 그러다가 이기붕이 꼴 면치 못할 꺼야." 라고 말한다. 정청래 전 의원의 "공갈"발언과는 차원이 다른 말이다.
이렇게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노출한다.
그러다가 박철언이 김영삼 처럼 앞뒤 안가리고 공격을 한다.
그러다가 결국 박철언은 여론의 뭇매를 맞아 정무장관직에서 해임된다.
이로써 자신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던 박철언을 잡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아직 박철언은 의원직을 유지하고 잇었고 사조직인 월계수회도 살아있었다.
이것이 더 거대한 폭풍을 몰고 올줄 아무도 몰랐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