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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2년 8월 11일 토요일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마태 17,14-20)
Amen, I say to you,
if you have faith the size of a mustard seed,
you will say to this mountain,
‘Move from here to there,' and it will move."
말씀의 초대
하바쿡 예언자는 먼저 주님께 질문하고 도움을 청한다. 그는 주님께서 어느 날엔가는 정의를 실현하실 역사의 주인이심을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악인이 의로운 이를 여전히 집어삼킨다는 데에 있다. 언제까지 주님께서 나서시기를 기다려야 할 것인지가 하바쿡의 고민이다. 억압과 불의에 대한 하바쿡의 고민에 주님께서 결정적인 해답을 내놓으신다(제1독서). 제자들은 간질병에 걸린 아이를 치료하는 데 실패한다. 그 이유는 제자들의 믿음이 부족한 탓이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능력이 자기들의 구체적인 활동을 통하여 구현된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을 소외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믿지 않은 결과가 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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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 사명을 부여받은 제자들의 활동이 실패로 끝나는 광경을 봅니다. 그들은 주님께 부여받은 권능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셔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부끄러워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요구를 결코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찾아오는 이웃을 너그럽게 대하지 못하고, 그들이 도움을 청할 때 들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바로 그렇게 행동하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참아 주고, 기다려 주며, 사랑으로 너그럽게 이웃을 대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거기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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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는 악의 세력입니다. 악한 기운으로 사람을 불안하게 합니다. 삶의 기쁨을 깨뜨리고 영혼의 힘을 빼앗아 갑니다. 사는 것이 허무하고 두렵기만 하다면 악한 기운을 의심해야 합니다. 기도와 자선과 성사 생활을 통하여 끊임없이 선한 기운을 접해야 합니다. 인생은 악한 기운과 공존하며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아버지는 아이를 사로잡고 있는 악의 세력을 몰아내 주실 것을 예수님께 청합니다. 불 속에도 뛰어들고 물속에도 빠진다고 호소합니다. 천방지축으로 뛰는 모습은 ‘사람의 욕망’을 연상시킵니다.
삶이 불안하면 예수님께 당신의 힘을 주십사고 간절한 마음으로 청해야 합니다. 믿음은 그분께로 가는 길입니다.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이란 ‘산을 넘어 주님께로 가는 믿음’을 말합니다. 불안의 산, 질병의 산, 두려움의 산, 허무의 산입니다.
악한 기운은 아무리 강해도 우리의 생명을 죽이지는 못합니다. 그러니 언제라도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은 믿는 마음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을 믿고 사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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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신비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기적을 불러오고, 또한 기적을 보게 합니다. 『긍정적 사고의 힘』의 저자 노먼 빈센트 필은 대학의 교목을 맡으면서 많은 사람에게 설교하는 일에 지쳐 있을 때, 친구에게서 이사야서의 한 구절을 듣습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는다”(40,31). 저자는 고백합니다. “나는 친구의 충고를 따랐다. 그리고 다시는 실패하지 않았다. 나의 삶은 온통 활동으로 바쁜 나날이었지만 그 성경 말씀은 언제나 나에게 필요한 힘을 주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힘이 바로 자신의 힘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곧 신앙의 신비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 최재도 신부-
오늘은 어느 신부님의 경험담으로 시작해 볼까 합니다. 여름에 중고등부 학생들과 함께 야영장으로 수련회를 갔다고 합니다. 텐트를 치고 저녁을 해먹으려고 한창 준비를 하는데 빗방울이 떨어지더랍니다. 학생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이런 상황이면 저녁식사 준비를 할 수가 없어 신부님과 교사들은 몹시 난감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신부님이 외쳤습니다. “모두들 누워서 하늘을 향해 두 손과 두 발을 뻗어?!”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부님도 그렇게 했습니다. 신부님은 누운 채 이렇게 따라 하라고 했답니다. “아빠, 아버지?! 기다려 주세요?!” 아이들은 재미있는지 잘 따라 하더랍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비가 뚝 그친 것입니다. 신부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한 시간을 주셨다?! 한 시간 동안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아이들이 허겁지겁 한 시간 안에저녁식사를 마치니 그때부터 비가 내리더랍니다. 그때부터 신부님은 아이들에게 영웅이 되었답니다.
오늘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분명히 하느님께서 답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믿고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청하는 것에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자녀에게 좋은 것만을 주시려는 하느님 아버지를 굳게 믿고 청하는 이에게 하느님은 참으로 필요한 것을 주실 것입니다. 당장에는 내 의지와 다른 모습이라 할지라도 분명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또한 주셨다고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아버지께 대한 진정한 믿음의 자세인 것입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 그것에 대해 단순하게 감사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이것이 바로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태산을 옮기는 엄청난 일의 전부입니다.
하느님의 것
-김희준 신부-
1955년 12월 어느 날 미국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시에서 흑인 여성 한 명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유는 백인에게 자리를 비켜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부당한 처사였습니다. 그리고 이 부당함을 통감한
흑인들은 한 가지 실천을 단행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월요일에는 버스를
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매주 월요일 버스는 텅 비었고 대신 몇십 킬로미터나
되는 출근길을 걷는 흑인들이 거리를 메웠습니다. 집단 체포, 폭탄 테러, 해고와
협박 등 갖가지 제재가 가해졌지만 흑인들은 비폭력으로 맞서며 381일간 작은
실천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버스에서의
차별뿐 아니라 일상에서의 차별, 그리고 버스에서의 인종분리를 철폐하게
된 것입니다. 작은 믿음과 작은 실천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큰 권능을 체험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 안에 산을 옮길 수 있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의 작은 믿음, 작은 실천은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 있게 합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도록 작은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세상과 이웃, 그리고 자신을 위한 작은 실천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믿음을 갉아먹는 ‘죄의식’이란 걸림돌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한 이유가 믿음이 부족해서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한 사제에게는 참 가슴 아픈 진리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마귀도 쫓아내지 못하고 병도 고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정확히 말씀하셔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 외할머니는 예전에 몸속에 종양이 자란다는 말을 듣고 수술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던 중 부산 교구의 치유의 은사를 받으신 신부님을 찾아갔고 그 신부님은 종양이 있는 곳에 손을 대시고 기도를 하신다음, 걱정할 것 없다고 하셨습니다. 정말로 30년이 지난 지금도 사진을 찍어보면 종양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커지지는 않았고, 그래서 90을 바라보시면서도 지금도 생존해 계십니다.
저도 아픈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아파서, 그들을 위해서라도 믿음을 키워서 기적을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작은 것부터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밤에 촛불을 켜 놓고 기도하다가 ‘믿기만 하면 너희가 못 할 일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는 말씀에 따라 촛불을 믿음으로 꺼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촛불을 똑바로 쳐다보며 “나는 믿는다. 꺼져라! 나는 믿는다. 촛불아 꺼져라!”라고 수 없이 되풀이하였습니다. 한참동안을 해도 입김에 의해서 촛불이 조금 흔들릴 뿐 꺼지지는 않았습니다. 화가 나서 “꺼져라!”하며 훅 불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혼자 생각했습니다.
‘서서히 미쳐가는군!’
얼마 뒤 큰 수술을 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미사에 나온 자매님께서 저에게 안수를 청하셨습니다. 저는 속으로 ‘기회다. 내가 믿음으로 이 자매를 지금 당장 고쳐보리라.’라고 생각하고, 안수를 하며 ‘주님, 믿습니다. 이 자매를 지금 고쳐주소서. 믿기만 하면 불가능할 것이 없다고 했으니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머리에서 손을 떼면서 무심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수술 잘 되실 거예요.”
결국 제 자신도 모르게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혼자 그렇게 기도 한 것도 처음부터 저의 믿음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믿었다면 처음부터 “수술 안 받으셔도 됩니다.”라고 말씀드렸어야 했을 것입니다.
저는 믿음이 약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따져보았습니다. 답을 발견하였는데, 내 안에 있는 ‘죄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안수를 할 때 지었던 죄들이 모두 떠오릅니다. 어제 술 마시고 실언 한 것, 게을러 기도를 제대로 못하고, 기도할 때 분심 들었던 것들까지 모두 생각이 납니다. 그러면 안수하다가도 스스로 ‘나 같은 놈을 통해서 병이 고쳐질 리가 없지!’ 라는 생각을 스스로 하게 되고 나를 통해서는 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나의 죄들이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느님의 능력까지도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역시 죄와 믿음은 반대되는 것입니다.
한 신부님께서 마귀를 쫓아내려면 그 신부의 삶이 완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구마경을 하고 있으면 마귀들이 사람들 앞에서 그 신부가 잘못한 것들을 일일이 다 이야기 한다는 것입니다. 신부는 처음엔 아닌 척 하려해도 점점 얼굴이 붉어지고 그렇게 감추고 있는 것까지 다 알고 있는 마귀들에게 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의 제자들이 그렇게 마귀들에게 지고 말았을 수 있습니다. 다만 삶도 완전하고 그래서 믿음까지도 완전하신 그리스도만이 그 마귀들을 쫓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을 위해선 흠 없는 삶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짓는 작은 잘못들 때문에 나를 통해 이웃에게 전해져야 할 은총의 통로가 막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사제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합니다. 우리도 주위 사람들에게 은총을 나누어주기 위해서라도 먼저 양심에 거리낌 없는 삶을 살기를 결심해야겠습니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양승국신부-
<한 걸음만 더>
성난 바다, 산더미 같은 파도에 무게 중심을 잃고 난파되는 여객선 위,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이 있습니다.
‘꽉’ 붙잡는 사람입니다. 난간이든, 로프든, 구명보트든, 떨어져나간 문짝이든, 자신의 생명을 유지시켜줄 뭔가를 꽉 붙드는 사람은 일단 생명을 건집니다.
그런데 뭔가 붙들긴 붙들었는데, 엉뚱한 것을 붙드는 사람들, 썩은 동아줄이나, 물에 즉시 가라앉는 쇠판이나, 별 도움 되지 않는 것들은 아무리 꽉 붙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크나큰 풍파를 만났을 때, 엄청난 삶의 파도 앞에서 끝까지 견뎌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 역시 ‘꽉’ 붙잡는 사람입니다.
붙들긴 붙들었는데, 엉뚱한 것을 붙들면 역시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약한 것을 붙들면 힘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을 붙들 때, 인간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 때,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실망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의지처로 가장 든든한 의지처는 역시 하느님이십니다. 뭐니뭐니 해도 하느님을 붙잡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입니다. 하느님께 매달리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오늘 복음 등장하는 간질환자의 아버지는 온몸으로 이런 체험을 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간질질환에 시달리는 아들, 정말 눈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병세가 악화됨에 따라 수시로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집안에 있을 때는 그나마 안심인데, 부엌 화롯가에서, 마을 개천가에서 발작이라도 일어나면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러다보니 아버지는 늘 아들 곁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혹시라도 일어날 불상사 때문에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이런 아들 병의 치유를 위해 아버지는 별의 별 사람들을 다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당대 민간요법의 대가, 당대 최고의 무속인, 당대 최고의 의술을 자랑하는 의사...
그러나 남은 것은 또 다른 실망과 상처뿐이었습니다.
이런 아버지가 오늘은 마지막 희망을 안고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반드시 치유시켜주시리라는 확신과 함께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모든 힘을 다해 외칩니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도 방법이 없었던 간질환자의 아버지였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 그였기에, 강한 믿음과 확신을 지니고 있었던 그였기에, 하느님 은총이 손길이 아이머리 위로 내립니다.
살다보면 너무나도 큰 절벽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나로서는 정녕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는데도 결과는 초라합니다.
그럴 경우 한걸음만 더 나아가보십시오. 조금만 더 나아가보십시오. 거기 사랑의 하느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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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인 생각
-홍성남 신부-
심리치료사인 네비아 뮬란은 부정적인 생각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합니다. “첫째 자신이 재수 없는 생각을 한다고 스스로를 비난하는 것은
자신을 두 번 벌주는 것과 같다. 오히려 덜 파괴적인 방법으로 이런 상황을
해결할 수는 없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둘째 아무리 심각한 문제일지라도
절대로 잠을 설치면서까지 문제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비관적인
미래가 현실이 될 때까지 비관적 목소리와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 만약 그러지
않으면 비관적인 생각에 빠져 부정적인 결과를 과장해서 받아들이기 쉽다. 셋째
부정적인 기분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다른 건강한 부분까지
오염을 시킬 수 있다. 따라서 부정적인 생각이 들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서
다른 건강한 감정이 오염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넷째 비관적인 생각을
재구성하려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을 인정해주고 그것에
저항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머릿속에 새로운 습관의 경로를
형성하는 데는 총 21일이 소요되고 습득된 것이 머릿속에서 습관적인 활동이
되게 하는 데는 63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자신들의 능력을 한탄하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약하다고 하신 것은
제자들이 자신들에 관해 스스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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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잡는 선무당
- 이정석 신부-
두 번째 수난 예고 직전에 위치한 이 일화에서 제자들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의 답답한 심정이 잘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죽음을 향한 스승의 여정을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도무지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지지리 못난 이들 같아 보이니 3년 공부가 공염불입니다. 스승의 속은 타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는 이와 비슷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에서 이태 동안 유다인의 회당과 티란노스 학원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바오로를 통하여 비범한 기적을 일으키자 몇몇 유다인이 “바오로가 선포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령한다.”라고 말하며 바오로를 흉내 내어 구마행위를 합니다.
특히 스케우아스라는 유다인 대사제의 일곱 아들이 악령 들린 사람을 치유하려 하자 악령 들린 사람이 “나는 예수도 알고 바오로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라며 달려들어 짓누르는 바람에, 그들은 달아났습니다.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에는 관심도 없고 단순히 놀라운 능력에만 사로잡혔던 사람들이 졸지에 봉변을 당한 것입니다.
한번 꼬인 실타래를 풀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잘하려 하면 할수록 꼬이고 꼬여 실수를 연발했던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마태 10,1)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간질병에 걸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원인은 그들의 믿음에 있었습니다. 올바른 믿음과 실천 없이 말로만 예수님을 내세운다면 그 믿음이 화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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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
-경규봉 신부-
바빌론은 강대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웃 나라들을 마구 침략하여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약탈하며, 성읍을 폐허로 만들었다. 그리고 쓸만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바빌론의 이러한 만행과 하느님의 백성인 유다가 당하는 참담한 고통을 보면서 예언자 하바꾹은 하느님께 간구하며 하느님의 뜻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질문을 드린다.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어찌하여 유다백성보다 훨씬 더 나쁜 바빌론을 통하여 유다백성의 죄와 악을 벌하시는가? 공의로우신 하느님께서 어찌하여 무자비하게 뭇 민족을 마구 죽이는 나쁜 백성의 죄를 묻지 않으시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누구나 오래도록 볼 수 있도록 판에 글씨로 새겨 두라고 예언자에게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를 미리 정하셨다. 언젠가 바빌론은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고통스럽더라도 참고 기다리면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특히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고 말씀하시며 믿음으로 참고 견디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항상 정의가 승리하고, 옳고 착하게 사는 이들이 행복하게 살지는 않는다. 오히려 악한 이들이 재물과 권세를 쥐고 세상을 호령할 때가 더 많다. 법과 정의가 땅에 떨어지고, 악한 자들이 착한 이들을 괴롭히며, 힘센 자들이 약한 이들을 착취하고 못살게 굴 때가 더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대체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 ‘과연 공의로운 하느님께서 이렇게 잘못되어가는 세상을 보고도 가만히 계신가?’ ‘하느님께서는 왜 악인을 벌하시지 않고 그냥 두시는가?’ ‘그렇다면 하느님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착하고 열심히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등의 질문을 던지며, 하느님을 의심할 때가 많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장 나서시어 악을 물리치시고 정의를 행사하시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곧바로 개입하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가 진력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신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곧바로 주시지 않으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에도 곧바로 그들을 해방시키지 않으셨다. 그들을 해방시키신 다음에도 곧장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셨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랑생활을 하도록 하셨다. 하느님은 그처럼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세상 것에 얽매이지 않기를 기다리신다. 사람이 세상의 부질없음을 깨닫고 세상 것에서 행복을 찾지 않고 당신 안에서 행복을 찾기를 기다리신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고통과 악을 허락하신다. 고통과 악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세상 것에 얽매이는 것이 부질없다는 점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겸손해져서 하느님 앞에 나올 수 있기를 기다리신다. 사람은 자신이 똑똑하고 잘났기 때문에 부와 권력을 누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생각한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오만과 교만에 빠지곤 한다.
그러나 고통과 악을 겪을 때,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때, 비로소 사람은 겸손해진다. 고통과 악을 겪지 않고서는 결코 겸손할 수 없다. 겸손한 자만이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고, 겸손한 자만이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섬길 수 있다.
겸손한 자만이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할 수 있는 깊은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당하는 고통과 악을 당신이 원하시는 때까지 지켜보시며 기다리신다. 사람이 때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때를 정하신다.
그러므로 고통과 악이 우리를 덮칠 때,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믿음으로서 고통과 악의 어둠을 헤쳐 나가는 신앙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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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인간이 달걀을 품어서 부화시킬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가능할까요? 이 부분의 전문가들은 이러한 이유를 들어서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체온은 36도 전후이지만, 닭은 40도이기 때문에 인간이 달걀을 품어서 부화시킬 수 있는 확률은 전혀 없습니다.’
이를 실험으로 증명해 보자고 주장한 사람이 실제로 일본에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네 명의 실험자를 모집한 뒤에 호텔에 투숙시키며 수의사와 기록자를 동반해 지속적으로 관찰했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진 것이에요. 글쎄 20일 만에 한 할머니가 품고 있던 알에서 건강한 병아리가 나온 것이었지요.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사실 때문에 일본 전역이 들썩였고, 전 세계로 이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이 실험을 하자고 주장했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문가의 말만 따랐다면 결코 굳은 머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혁명가가 되는 기분으로 덤벼 보아야 합니다.”
저도 이 글을 보고서야 처음 알았네요. 인간도 달걀을 부화시킬 수 있다고 말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고정관념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더군다나 전문가들도 인간과 닭의 체온 차이를 이야기하면서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데, 누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문득 우리들의 믿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믿음도 나의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인해서 퇴색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사실 주님의 말씀을 모두 믿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마 이 점은 이천년 전의 예수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마귀를 쫓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그 권한을 받았다고 해서 갑자기 안 보이던 것이 눈에 보이고, 자신이 몸이 붕붕 공중으로 뜨고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 권한을 주셨지만, 제자들의 외적인 모습에는 그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 중에서는 ‘내가 무슨 능력은 받은 건가?’라는 생각을 했던 사람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 들린 사람을 데리고 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분명히 예수님으로부터 마귀를 쫓는 권한을 받았는데 말이지요. 바로 의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과연 쫓아낼 수 있을까? 나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라는 생각을 가지고 주님께서 주신 그 능력을 의심했기 때문에 마귀를 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주 자그마한 믿음만 있어도, 산도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믿음은 과연 어떠한가요?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어떠한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굳어 버린 마음이 가능할 수도 있는 것들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요?
믿음은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합니다. 그 불가능을 나의 굳쎈 믿음으로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멋질 것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 말씀을 굳게 믿음으로써, 희망을 잃지 마세요.
빠다킹신부
능력과 믿음
-서현승 신부-
제자들이 왜 자기들은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는지를 묻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이 약한 탓이라고 지적하십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루카 복음에서는 파견된 제자들이 기쁨에 가득 찬 채 돌아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 복종시켰다고 보고합니다(10,17). 그땐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제자들의 출발 조건이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행 보따리와 신발 등 인간적으로 의지할 만한 것은 어느 것도 지니지 말고 떠나라고 명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10,3)고 말씀하십니다.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면 양들더러 어떻게 하란 말인가? 가지고 가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잡아먹히든지, 아니면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란 것입니다.
결론은 아무런 능력없이 떠난 제자들의 승리였습니다. 가진 것이 없다보니 하느님께만 의지하였고, 바로 그 믿음으로 제자들은 놀라운 권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능력이 없으면 없을수록 신앙 안에서는 더욱 능력 있는 사람이 된다니,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사실입니까?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아무런 능력도 주지 않으셨음을 한탄할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하느님께 실력을 발휘하실 기회를 드리지 않았음을 먼저 탓할 일입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김흥주 신부-
◆봉성체나 병자성사를 청하는 환자들 가운데는 암으로 투병중인 분들이 의외로 많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다가 아이들도 어린데 갑자기 암에 걸린 경우라든지, 지금까지 고생하며 열심히 일해 이제는 살 만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암에 걸린 경우라든지, 아무튼 사제로서 그들을 대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에 함께 기도하지만 어떻게 위로와 용기를 주어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당사자나 가족들의 애절한 바람과 기도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사제의 역할은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함께 열심히 기도해 주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듯하다. 물론 그들 가운데 치유가 되어 건강한 모습을 되찾고 감사의 인사를 전할 때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고 사제직의 보람을 절실히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는 경우에는 사제로서 나의 한계를 느끼며 마음이 아프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이 예수께 “어찌하여 제 기도로는 그들의 병을 낫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고 말했듯이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일 때가 있다. 물론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대답이 나에게도 예외는 아닐 듯싶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는 말씀대로 사제로서 그들이 반드시 치유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지고 절실하게 기도했나 반성해 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 아들의 병을 고쳐주기를 청하는 그 사람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며, 또 그래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청을 들어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 능력과 기적 사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다. 곧 주님께서 우리의 청을 거절하시거나 치유 능력을 멈추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가지고 확신에 찬 희망으로 절실히 기도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사제로서 나 역시 이제부터라도 진정한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확신에 찬 희망과 위로를 주는 자세를 갖춰야 하겠다.
- 박호준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확신에 찬신 모습, 모든 것을 보여 주시는 모습, 반론을 제기할 방법을 찾을 수 없는 권위를 보이신다. 들을 귀가 없는 자들을 위해 비유의 말씀도 쓰지 않는다.
때가 무르익고 있었다.
더 이상 차분한 설명이 아니라 질타의 말씀을 섞으신다. 마음이 조급하시거나 몇 번 남지 않은 교육의 기회를 십순 살리시기 위한 노력이 엿보인다.
무엇을 알려 주시려고 하셨을까?
세 복음에 모두 다루고 있다.
그런데 마태오와 루카는 비슷하나 마르코는 조금 차이를 보인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들 참아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이리로 데려오너라!”라는 장면은 일치한다. 그러나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구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라는 핵심 질문에 대한 대답이 차이가 있다. 가장 핵심이 되는 복음의 말씀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마태오는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옳겨가라”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였으나 마르코는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라고 전혀 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많은 경우 마태오 복음은 마르코 복음을 설명하고 수정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기도가 필요하다는 표현은 기도를 믿기만하면 ...으로 수정 설명하려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기도의 힘, 기도는 믿기만하면 되는 것 ....과연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믿음이란 기도란 믿으며 해야 한다. 라는 말씀으로 해석 할 수 있는 것인가? 저는 기도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고 믿고 있다. 그래서 바꾸어 써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이루어 질것을 믿는 마음의 기도..... 그 기도는 무엇이든 가능하게 한 다는 사실을 믿는다.
저는 짧은 사목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많은 면담을 하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런 중에 이런 기도의 예를 여러분의 사람 속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한 가족을 회계시키는 원동력이 였다고 타인이 고백하고 자신도 그렇게 느끼는 경우의 예를 몇 차례 만나보았다.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큰 힘... 그것을 위해기도 해 본 사람이라면 그 어려움을 알 것이다. 제가 발견한 그들의 공통점은 믿었다는 것이 였다. 내가 기도하면 들어주실 것이 기에 들어 주신 것처럼 대하고 살았다 구지 만날 때마다 신앙의 필요성을 내 짧은 언어로 설파하려 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올 것이 분명하기에 온 거나 다름없이 대하고 , 걱정 없이 만났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올 때 까지 기도할 것이니 내 기도는 들어진다.라는 것은 뭐 대단한 기적적인 힘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 기도해 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큰 기적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 때가 올 때 까지 기다리면서 한 가지 핵심적인 마음이 있었다는 것 또한 잊지 말자. 그 때와 시간을 정하시는 분은 하느님이 시기에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걱정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런 마음으로 매일 매 순간 기도에 첫 자리에 ...그 들의 회두를 위한 기도로(간단히 했다고 하지만 )모든 기도의 첫 자리에 두고 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게 수 십 년을 한 결같이 믿고 행했던 것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이루워 질 것이라고 믿는 것.... 그 기도에는 이런 요소가 있었다.
그들의 기도는 오늘 예수님께서 원하셨듯이 산 보다 더 큰 사람의 마음 그것도 대여섯 명 그리고 그 집에서 태어날 수십 명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옮겨 놓았던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기도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여러분은 어떻게 믿으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임범종신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어떤 사람이 벼랑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는 밑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작은 나무의 가지를 붙잡았습니다.
거기서 그는 위로는 하늘과 아래로는 천 길이나 떨어져 있는 바위 사이에 매달려서,
그 가지를 오래는 붙잡고 있지 못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때 “하느님!”하고 그는 온 힘을 다해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 다시 하느님을 부르며 외쳤습니다.
“당신이 존재하신다면 나를 구해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을 믿고 다른 사람에게도 가르칠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엄청나게 우렁찬 목소리가 골짜기를 가로지르며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그것은 모두들 곤경에 처했을 때 하는 소리지.”
그때 그는 너무나 놀라서 하마터면 그 가지를 놓아 버릴 뻔했습니다.
“아니에요, 하느님, 그게 아니에요!” 그는 이제 좀 더 희망적으로 소리쳤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저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나니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어떠한 말씀도 믿고 따르겠습니다.
제발 저를 구해주십시요. 그러면 당신의 이름을 세상 끝까지 전하겠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좋다. 널 구해 주마. 그 가지를 놓아라.”
“가지를 놓으라고요?”하고 마음이 산란해진 그가 외쳤습니다.
“내가 미친 줄 아세요?”
우리의 신앙 또한 이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의 말씀과 행업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정작 다급한 일이 생겼을 때는 눈에 보이는 다른 무엇인가를 찾고는 합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설마 내 기도가 이루어질려고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모세가 홍해에 지팡이를 던졌을 때는 기대했던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첫 번째 사람이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에야
비로소 파도가 물러나면서 물이 저절로 갈라지며 이스라엘 민족들이
건너가도록 마른 길을 내어 주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기적은 믿는 만큼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기도와 믿음
-이수철신부-
어느 신부님의 진솔한 고백의 글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이제야 사제는 하느님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 씀씀이와 행동거지를 통해
하느님을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예수님을 닮은 사랑으로 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어른 신부님이 이런 가르침을 주셨다.
‘신부는 미사만 정성껏 드리면 돼. 다른 것은 잘못해도 괜찮아.’
강론 준비나 본당 운영에는 소홀하더라도 미사만 잘 드리라니...
그러나
그 신부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이제야 느끼고 있다(가톨릭 다이제스트 2006.8,39P)".
바로 행위이전에 존재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하기에 앞서,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게 우선이라는 말씀입니다.
활동에 앞서 하느님과 일치를 위한 기도가 중요함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사실 본질적인 것에 충실하다보면
부수적인 것들은 하느님이, 좋은 이웃들이 채워줍니다.
아무리 일 잘하고 업적 많이 쌓아도,
하느님을 가려버리고 자기만 드러난다면
마침내 그 마음의 공허감 감당하기 힘들 것입니다.
어떻게 하느님을 보여줍니까?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의 삶으로,
믿음의 삶으로,
희망의 삶으로,
사랑의 삶으로 하느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기도와 믿음의 관계에 주목합니다.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로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하느냐?”
예수님의 탄식, 여전히 오늘 날에도 해당됩니다.
믿음 없는 불신과 의심의 사람들과 지내는 것은 정말 힘들 것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추상적인 기도가 아니라 절실하고 간절한 기도여야 합니다.
주님은 즉시 응답하여 마귀를 쫓아내셔서 아이를 고쳐주셨고,
이어 아이 아버지의 믿음도 더욱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1독서의 하바쿡의 기도는 얼마나 진실하고 솔직한지요?
“나는 내 초소에 서서, 성벽 위에 자리 잡고서 살펴보리라.
그분께서 나에게 무어라 말씀하시는지,
내 하소연에 어떻게 대답하시는지 보리라.”
간절한 기도는 어떤 형태로는 응답이 있기 마련이며
이에 따른 주님의 대답입니다.
더 실감이 나는 옛 공동성서 번역 말씀을 인용합니다.
“네가 본 일은 때가 되면 이루어진다.
끝 날은 반드시 찾아온다.
쉬 오지 않더라도 기다려라.
기어이 오고야 만다.
멋대로 설치지 말아라.
나는 그런 사람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하바2,3-4).”
최후의 승리는
끝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음을 봅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게 믿음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닌 평생을 믿음 없이는 살아 갈 수 없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에 대한 질책의 말씀에서 새삼 믿음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17,20).”
매사 문제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부족, 형제들에 대한 신뢰부족에서 야기됨을 깨닫습니다.
항구한 기도 있어 굳건한 믿음입니다.
우리의 삶은 기도의 여정이자 믿음의 여정입니다.
매일 계속되는 성체성사의 은총이,
끊임없이 드리는 기도의 은총이
우리의 믿음을 북돋아 주고 성숙시켜 줍니다.
아멘.
"주님, 제 아들이 간질병으로 몹시 시달리고 있으니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양승국신부-
<세상에서 가장 가슴아픈 일>
세상에서 가장 가슴아픈 일이 있다면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일일 것입니다. 그도 아니면 시시각각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자식, 회생 불가능한 불치병에 걸린 자식 앞에서 그저 속수무책으로 지켜만 보고있어야 하는 일이겠지요.
"단장(斷腸)"이런 말이 있습니다. 장이 토막토막 난다는 말입니다. 사냥꾼들에게 생포되어 끌려가는 자신의 새끼를 눈앞에서 뻔히 보고만 있어야 했던 어미원숭이의 마음은 찢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하던 어미원숭이는 사흘밤낮을 울부짖고 펄쩍펄쩍 뛰다가 죽게 되었는데, 너무도 애간장이 탔던 나머지 장이 다 토막토막 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아이, 오랜 세월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이 아버지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효약도 없던 시대 간질병으로 인해 하루하루 죽어 가는 아들을 그저 바라만 보고있어야 했던 아버지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갔습니다.
불 속에 뛰어들기도 하고 물 속에 빠지기도 하는 증상을 봐서 아이의 상황은 상당히 심각했습니다. 이미 중증이었습니다. 수시로 넘어져 온 몸은 성한 데가 한군데도 없었습니다. 수시로 뒤로 넘어가면서 입에 거품을 무는 아이, 간질병으로 인해 하루에도 수만 개씩의 뇌세포가 죽어가던 아이의 모습에 아버지의 가슴은 철저하게도 내려앉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무런 대책 없이 쳐다만 보고 있다는 것은 차마 못할 짓이었습니다.
물론 아버지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가산을 다 탕진하면서까지 좋다는 데는 다 다녀봤을 것입니다. 급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아버지는 아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써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이 다 허사였습니다. 아이의 증세는 점점 심각해져만 갔습니다.
당시 아버지의 마음은 오직 한가지였겠지요. "차라리 내가 아이 대신 아팠으면"하는 마음 말입니다.
자식이 앓고 있는 심각한 병고로 인한 아버지의 슬픔, 안타까운 마음, 갈기갈기 찢어지는 마음은 마침내 하늘에까지 닿습니다.
아버지의 자식을 위한 간절한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발길을 예수님 앞으로 이끕니다. 이제 더 이상 체면도 부끄러움도 없이 만듭니다. 예수님 앞에 털썩 무릎을 꿇게 만듭니다. 그저 간절히 외칩니다.
"주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결국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는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치유의 원동력이 됩니다. 결국 치유의 원천은 사랑이며 자비입니다. 열정입니다.
병의 회복을 위해서 약물치료도 좋습니다. 물리치료도 좋습니다. 심리치료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치료 가운데서 가장 좋은 치료는 사랑이란 약에 의한 치료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한 인간을 향한 측은한 마음이 결국 기적을 불러옵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어야 할 믿음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마귀에게 사로잡혀 간질병으로 시달리는 소년을 치유하신 기적사화를 계기로 믿음에 관한 가르침을 들려준다. 간질병에 걸린 아들의 아버지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고쳐주시기를 청한다. 그러기에 앞서 그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다른 제자들에게 데려다 보였던 모양인데 별 효험이 없었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는 세대를 꾸짖으시고 마귀가 들려 고생하는 아이를 단번에 고쳐 주신다.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께 왜 자기들에게는 그런 치유의 능력이 없는가를 묻자 약한 믿음이 그 탓이라고 하신다. 그리고는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있기만 하다면 엄청난 결과를 보게 될 뿐 아니라 못 할 일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의 정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 자신의 거룩하게 변한 모습을 보여 주시는 동안(마태 17,1-13) 다른 9명의 제자들은 군중과 함께 산 아래에 있었을 것이다. 산 아래 남아 있던 그 제자들에게 어떤 아버지가 마귀에 사로잡혀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들을 데려온다. 그러나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제자들이 하나씩 돌아가며 예수께서 늘 하시던 구마행위를 흉내 내어 보았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윽고 예수께서 3명의 제자들과 함께 산 아래로 내려오셨다. 그러자 느닷없이 한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청하게 된 것이다.(14-16절)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르코복음(9,14-29)은 기적사화를 장황하게 보도하고 기적의 힘은 기도에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마무리된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총 16절의 긴 내용을 단 7절로 축약시키면서, 기적보다는 믿음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믿음에 관한 말씀은 마태오가 완전히 개작(改作)한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는 세대와 제자들을 나무라신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께서는 자주 이스라엘 백성들을 탓하시면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세대’(11,17),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 ‘기적을 요구하는 세대’(12,39.45; 16,4), ‘믿으려 하지 않고 비뚤어진 세대’(17,17) 등으로 표현하신다. 이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동족을 규탄하려는 마태오 자신의 표현일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이 세대의 무리와 같게 보지는 않으신다.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가진 믿음이 너무 작다는 것, 세상의 씨들 중에 가장 작은 겨자씨(마태 13,32)보다도 더 작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제자들이 가졌으니 예수님의 마음은 안타깝기 그지 없으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바라시는 믿음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하느님의 존재에 관한 그런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에 관한 믿음으로 바로 ‘여기와 지금’(here and now / hic et nunc)에 있어야 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바로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믿음이며, 바로 이 시간 구체적인 상황 안에 있어야 하는 믿음이다. 제자들이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이를 치유할 수 없었던 것은 자기들 앞에 주어진 치유과제가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는 ‘이 산을 여기서 저기로 옮기시는’, ‘못 하실 일이 하나도 없는’(20절) 지존의 권능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겨자씨보다도 작았기 때문이다. 비록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극히 작은 원인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누구나 큰 믿음을 갖고 싶어 하겠지만 그것은 작은 믿음에서 시작한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20절)부터 마음속에 간직하고 시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