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가 있는 풍경 / 김영식
8월이었다 뚝뚝 노란 선혈을 흘리며 해바라기가 지고 있었다 잘린 귀를 들고 들녘을 뛰어가는 사내 노랑은 불구의 시간 그럴 때 내 오랜 지병은 부질없음의 부질없음을 사랑하는 것 쓸쓸함의 잔해로 별들은 어두워지고 허공에 누가 검은 원반을 던진다 빛의 속도로 상실은 날아간다 영원이란 순간의 다른 이름 등 뒤에서 너는 비수를 꽂는다 짓뭉개진 얼굴의 비련 나는 눈물을 흘리다가 웃음을 흘리다가 가끔씩 아무 슬픔도 없이 꽃은 피는 것이다 단 하나의 표정도 없이 커피를 마시던 계절처럼 뙤약볕 아래서 사이클로프스*들은 오늘도 제 눈을 후벼 판다 바람의 관자놀이를 겨냥하는 플라타너스의 이별 타인이란 음반 위에 재생되는 지나간 미래의 낡은 연민 같은 것 그럴 때 모든 노래들은 왜 불면의 골짜기를 배회하는 걸까 구름의 부고를 전하는 빗방울의 공중을 버리는 낙하 패랭이꽃들은 담장 아래 시들고 눈부신 맹세들은 망각의 무덤에 깃털 같은 순장을 눕힌다 아무도 자신을 추억하지 않는 몸짓으로 하나의 기억이 하나의 기억을 배반하는 8월 정오의 단두대 위로 해바라기들이 목을 매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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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외눈박이 괴물.
—《미네르바》2012년 여름호
김영식 : 1960년 경북 구룡포 출생. 2007년 강원일보, 동양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7년 《현대시학》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