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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파괴성과 그 변형
심층심리학과 기독교신학
새로운 세기의 시작과 함께 우리는 인간의 공격성의 문제를 새롭게 돌아보아야 할 필요를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인간의 파괴성이 과연 변형될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이 우리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사실 어떤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당연시되던 생각들을 잠시 옆으로 밀어두고, 그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 그 자체가 공격성의 표현입니다. 저는 지난 삼십오년 간 정신분석가로 그리고 신학교의 교수로 일해왔습니다. 따라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심층심리학'과 '기독교신학'이라는 두 학문분야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과 영혼이라는 두 원천으로부터 통찰을 이끌어내고자 합니다.
'정신분석학'은 개인의 공격성에 관한 세밀한 연구를 통해서 공격성에 대해서 그리고 그 공격성의 변형이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키는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제공해줍니다. 우리는 이제 개인과 집단이 서로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명료한 증거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행하는 것들이 집단 안에서도 유사하게 행해지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 누구도 관계를 떠나서 존재하는 개인은 없습니다. 우리의 사회적 삶은 개인의 선택들에 크게 달려 있습니다. 인간의 파괴성의 변형에 관한 이론은 특정 국가를 초월해서 인류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들, 분단의 고통을 겪고 있는 나라, 빈부 차이에 의해 나뉘어진 나라들, 경제적 및 정치적 불안정을 겪고 있는 나라들은 정신분석가들이 그들의 상담실에서 배운 인간의 정신과 영혼 안에 있는 공격성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은 우리의 영적인 삶에 공격성을 포함할 때에만 신학 그 자체가 살아있을 수 있고 이 세계 안에 영혼의 삶을 창조할 수 있다고 증언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활기를 잃어버리고, 그저 습관적으로만 기도하고, 형식적으로만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우리가 공격성을 의식으로부터 분열시켜 버린 증거입니다.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공격성은 그때 우리 믿음의 핵심인 열정까지도 함께 가져가 버린 것입니다. 구약 성서에서 야훼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신명기 6장 4절). 신약 성서에서 예수님도 마음과 몸과 정신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첫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마태 22:37). 그렇게 말씀하신 다음에야 두 번째 계명인,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랑에 우리의 모든 공격적 에너지를 활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차지도 덥지도 않은 우리를 뱉어버리실 것입니다: 내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내가 곡을 하였으나 너희는 울지 않았다(누가 7:22).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공격성을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종류의 영적인 삶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싸움들로 가득한 세상을 삶으로부터 유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영적인 것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거나 세상의 삶은 영적인 것으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나라가 분단되어 있는데 어떻게 우리의 마음이 무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이웃들이 노숙자에게 제공되는 잠자리를 얻기 위해 다섯 시간이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면, 수 천명의 아이들이 피난민 수용소의 진흙과 먼지 구덩이에서 폭력을 통해서만 그들의 자존감을 발견할 수 있다면, 종교들이 다른 종교적 신앙을 가진 이웃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도록 세뇌교육을 시키고 있다면, 자존감의 상처를 입은 청소년들이 총으로 급우들을 향해 난사한다면, 어떻게 이 모든 일들이 우리의 영적인 삶과 상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세상에서 정의를 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적인 삶 안에 공격성을 포함해야 하며, 설령 그 공격성이 가장 파괴적인 것일지라도 그것을 제외시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우리들 자신 안에서 공격성의 뿌리를, 특히 그것의 파괴적인 측면의 뿌리를 발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우리에게 더 이상 진정한 것이 되지 못하며,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들 바깥에서 진정으로 존재하는 진정한 하나님이 되지 못합니다. 이 저녁에 저는 바로 우리들 각자로 하여금 공격성의 개인적 뿌리를 발견하기 위한 길을, 심리적인 측면과 영적인 측면에서 여러분에게 제시하고자 합니다.
공격성과 파괴성
공격성은 마티스의 “본능의 신선함”이라는 제목의 그림에서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 그림의 둥근 선들은 자발적이고, 생기있고, 빠르고, 즐거운 에너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든 심층심리학자들은 공격성이 인간의 삶의 한 부분이며, 그것이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반응적인 것인지에 대해 논쟁하기에 앞서서, 공격성이란 자발적인 몸짓과 순수한 운동성 그리고 생명 그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에서 표현되는 에너지로 보는데 동의합니다.
공격성은 우리 안에 있는 동물적인 충동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꿈에서 공격성이 동물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예컨대, 분석을 받고 있던 한 남자는 그가 어렸을 때 놀던 저수지의 울타리 너머에서 커다란 뱀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서둘러 출구를 향해 떠나려 하자 그 뱀도 반대쪽으로 잽싸게 출구를 향했습니다. 과연 뱀과 남자 중에 누가 먼저 출구에 도달할까요? 이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그 뱀은 엄청난 에너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그 뱀으로부터 도망칠까요? 아니면 그 뱀을 만날까요? 융은 말하기를, 우리의 종교에서 동물들이 떠난다면, 우리의 종교는 죽게될 것이라고 합니다(융 1976, 284). 우리는 우리의 기독교 전통 안에서 그리스도가 황소, 사자, 독수리 그리고 역시 동물인 인간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공격성을 발달적인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최초의 운동성은 유아의 단순한 몸짓에서 나타나는 운동성에서 시작되며, 이것이 차츰 어떤 의도성을 지닌 움직임으로 발달하게 되고, 자기와 자기가 아닌 것을 탐구하는데 사용되게 됩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들이 꼬물락거리는 발가락이 바로 자신의 것임을 발견하고, 그들이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기어가서 테이블의 다리가 자신의 부드러운 입과 같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며, 자신들이 의자에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 접시를 마루 바닥에 던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모습을 봅니다. 차츰 상처받음과 증오, 분노와 식욕 등, 공격성과 혼합된 행동들이 나타나며, 마침내 공격 본능과 에로스가 융합에 도달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파괴성이 타자들의 세상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 안에 있는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변형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정신분석가인 위니캇은 어린 아이들의 이러한 발달과정에 대해서 훌륭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위니캇 1950-1955). 그러나 여기에서 저는 비단 어린 시절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에서 발생하는 파괴성의 변형에 대해 그리고 이 변형에 종교가 어떤 기여를 하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삶을 시작하는 유아에게 있어서처럼, 어떤 관계라도 그 시발점에서는 파괴성과 공격성이 서로 혼합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공격성을 책임있게 받아들여 우리의 심리적 영역을 밝히고, 우리 자신의 출현하는 자기감을 지키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동일시를 이루어내고, 기술을 발달시키고,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피할지를 선택하는데 사용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차츰 공격적 에너지를 사용이 가능한 에너지의 형태로 변형시키게 됩니다. 그때 그 공격성은 우리의 자존감을 북돋워주고, 일을 해낼 수 있는 연료를 주며, 사랑하고자 하는 의욕을 주고, 우리가 믿는 것을 위해 싸울 수 있는 힘을 주고, 고통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우리는 사람과 대의 그리고 하나님께 열정적인 헌신을 바치기 위해서 공격성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사람들을 상하게 하고, 우리의 자존감을 해치고, 다른 사람의 목표와 신념을 파괴하고, 대의를 무색케 하고, 흥분과 열정을 질식시켜 죽이고,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고 보복하는데 사용되는 파괴성입니다. 우리의 파괴성이 우리를 사로잡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공격성을 통채로 분열시키도록 인도합니다. 모든 이론가들은 예외 없이 우리의 정신 건강과 사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억압된 공격성과 의식되지 못한 파괴성으로부터 온다고 말합니다(한(恨)에 관한 이재훈의 논문을 보시오, 1994).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사로잡지 못하도록 의식으로부터 몰아내지만, 그 결과 우리의 파괴적 잠재력은 우리의 의식적 자아에 의해 그리고 법과 관습과 종교 의식을 포함한 우리의 집단적 의식에 의해 중재받지 아니한 채,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게 됩니다.
억압된 공격성은 죽은 물건이거나 중립적인 정보 조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에서 계속해서 자라고 있는 동물처럼 살아있으며, 다른 사람의 무의식과 한데 섞이고 또 융이 집단 무의식이라고 부른 것과도 한데 섞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의식화되기 위해 애씁니다. 이러한 억압된 공격성의 위험을 잘 설명해주는 미국의 만담이 하나 있습니다. 플로리다로 휴가를 떠났던 사람들이 공항에서 기념으로 작은 악어들을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악어들이 자꾸 자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 악어 새끼들을 화장실에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악어들은 마치 뉴욕 사람들의 집단 무의식과 같은 뉴욕의 하수도 안에 살면서 점점 더 커졌고, 마침내 바깥으로 나오기 위해 떼거리를 형성했습니다. 억압된 공격성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의식 안으로 분출해 나오기 위해 분투합니다. 그것은 무의식 안에서 자아나 집단 무의식에 의해 제한받지 아니한 채 자라납니다. 그것이 종교적 신앙으로 스며들어갈 때, 그것은 그 믿음을 엄청나게 팽창시켜 무서운 하나님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래서 우리의 아이들을 공포에 떨게 합니다. 그때 그 하나님은 우리가 실수하는 것을 지켜 보다가 벌을 주는 하나님이 됩니다. 여기에서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될 것을 정하고, 항상 우리의 양심을 무겁게 짓누르는 규칙의 신학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우리의 파괴성을 의식으로부터 분열시켜 버린다면, 우리는 '멜라니 클라인'이 말하는 '편집-분열적 자리'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때 모든 나쁜 것은 우리의 이웃에게로 전가되고, 우리는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애쓰게 되며, 우리 자신 안에 고립된 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내지 못한 파괴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하여 만들어낸 나쁜 사람들과 싸울 때, 우리는 우리의 신과 우리 자신들 만이 선하고 의롭다는 일종의 우리 편 신학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다른 편을 실제보다 더 두려운 존재로 만들고, 그럴수록 그들을 배제시키고 제한함으로써 그들을 통제하게 되는데, 이는 더 많은 분쟁만을 가져옵니다. 이때 양편 모두는 서로에 의해 박해받는다고 느끼며, 이러한 박해 불안은 집단들 사이에서 실제적인 편견과 박해로, 심지어는 대량 살상으로 표출됩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두 바다로 밀쳐낼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우리가 팔레스타인 사람들 모두를 튼튼한 벽으로된 울타리 안에 가둘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안전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惡이라고 부르면서 우리 자신의 눈 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둘로 분단된 국가들은 우리의 내면에서 발생한 분열을 허가해줍니다. 우리의 내면에 갇혀 있는 파괴성은 계속해서 바깥의 적을 만들어내고, 우리가 그 적에게 우리의 파괴성을 투사하는 동안 그 파괴성은 더 무서운 것으로 자라게 됩니다. 파괴성은 무의식 안에 갇혀 있게 되며, 보다 원시적인 형태로 퇴행하고, 더 많은 불안을 생성해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 악의 건설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 우리의 이웃을 악 그 자체라고 부르게 됩니다. 수용되지 못한 인간의 파괴성은 개인과 사회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고 맙니다.
파괴성을 분열시킨 채 의식 안에 받아들이지 않을 때, 많은 에너지가 소실되고, 따라서 우리의 삶은 활기를 빼앗기게 됩니다. 우리는 생존할 수는 있겠지만, 살아있다는 진정한 느낌은 갖지 못합니다. 이러한 죽음의 요소가 신학이 직면할 수 있는 가장 큰 위험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지켜야 할 양들에게 우리의 파괴적인 공격성을 휘둘러댑니다. 지나치게 긴 설교로 교인들을 지루하게 만들고, 그들에게 우리 자신이 가진 신학이나 정치적 견해를 강요하며, 그들이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발견하는 신명을 경험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지 않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교인들을 우리의 억압된 공격성의 희생양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신학을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말할 수 있고, 초월의 징표들을 발견하는데 따른 놀라움의 표현이 아니라 지루한 과제로 만듭니다. 우리가 펴내는 책들은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지 못하고 기도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이러한 모든 현상은 변형된 파괴성으로부터 나오는 상상력 있는 에너지를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미명 아래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열정없는 합리적 논증으로 끌어 내림으로써, 하나님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이러한 맥빠진 논증 속에 거하지 않습니다.
파괴성의 분열은 선함 또한 침몰시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친절한 제스쳐,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도와주기, 잘 들어줌으로써 투표권을 제대로 사용하기, 시간이나 돈을 주기 등의 작은 좋은 선함 대신에, 숨도 쉬지 않고 반응도 하지 않는 황금 우상처럼 이상화되고 완전하고 정적인 선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우리는 나쁨의 위협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러한 종류의 선함에 맹렬하게 매달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규칙에 따라 살지 못합니다. 그러한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변화하고 자라는데 그 규칙은 고정되어 있어서 서로 맞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실패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공격하고 스스로 부적절하다고 느끼며, 희망 없음과 불안을 느낍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여러분의 학생이나 교인들에 의해 이상화되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은 머지않아 이러한 기준에 맞추어 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러한 완벽한 선함의 기준에 맞추어 살지 못할 때, 우리는 그들을 공격하고, 심지어 박해하고, 정죄합니다. 우리의 파괴성을 선함으로부터 분열시키는 것은 정치적 및 사회적인 영역에서 우리-그들이라는 태도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동료 피난민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공동의 죄인으로서, 서로를 돕고 지탱하고자 하는 공동의 노력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류 가족을 전쟁하는 진영들로 분열시킵니다. 그러나 완벽한 선함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유한한 것도 무한한 선함을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선함 그 자체를 공격합니다. 우리는 선함이란 존재하지 않아, 사랑이 영원하리라고 믿는 게 어리석지, 평화가 얻어질 수 있고 정의가 승리한다는 건 다 헛소리에 지나지 않아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삶의 기쁨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의로운 대의를 버리고 사랑의 능력을 포기한 채, 더 이상 자비와 용서를 바라지 않게 됩니다. (율라노프 1983,/1988. 5장을 보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의 파괴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 자신이 사소한 못된 행동을 하고, 다른 사람을 패배시키려 하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주는 척하면서 주지 않고, 세금을 줄여내고, 아이들이 하는 말에 열린 마음으로 듣지 않는 모습을 통해서 이러한 파괴성을 명료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 싸우기보다는 회피하고 싶고, 우리를 해치는 사람들에게 굴욕감을 안겨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고, 다른 사람을 의심과 결핍에 시달리게 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능가하고 그들 위에 가장 강력한 사람으로, 가장 부자로, 또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나 지식이 많은 사람으로 우뚝 서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파괴적 에너지를 의식 안에 허용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것은 통제될 수 있고, 변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만약 우리가 한번 자라나는 악어를 방 안에 들인다면, 그것에 의해 압도되지는 않을까 하고 두려워합니다. 그것은 점점 더 커질 것이고, 우리의 식량을 다 먹어치울 것이고, 결국에는 우리를 먹어치울 것입니다. 이 파충류를 왕자와 공주 또는 친절한 대모로 변형시켜줄 동화 속의 마술 지팡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하인즈 코헛'이라는 정신분석가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눈부시게 보이고 싶은 욕구, 탁월한 신학을 쓰고 싶은 욕구, 교인들에게 인정받고 칭송받고 사랑받는 강력한 인물이 되고자 하는 욕구를 부인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코헛, 1978, 620). 우리는 우리의 자기가 최선의 것이 되기를 바라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욕구들이 충분히 인정받을 때 그 욕구들은 변형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욕구들을 부인한다면, 그것들은 원시적인 상태에 머무르고, 파괴적인 것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모든 사람을 패배시켜야만 하는 전능감과 자기-확대감에 사로잡히고 항상 우리의 재능을 과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 즉 영어로 쇼-오프 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자기에 대한 사랑에 손상을 입은 사람, 즉 '자기애적 상처'를 가진 사람이 됩니다.
우리의 자존감을 지키는데 사용되고, 고유한 자기로서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원하는데 사용되어야 마땅한 이 모든 공격적 에너지를 과연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를 우리는 아직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마음이 상하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나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자신으로서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쉽게 무시당한다고 느끼고 충분히 존경받지 못한다고 느끼며 우리를 욕되게 하는 사람들에게 보복하고 싶어합니다. 그때 우리의 공격성은 강렬한 분노와 '자기애적 격노'라고 불리는 특별한 종류의 격노로 변합니다. 자기애적 격노는 평화에 대한 가장 큰 적이며 언제나 전쟁을 유발하는 요인입니다. 이런 종류의 파괴성은 완화되기가 어렵습니다(코헛 1978). 보복해야 할 필요성 또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상처 입은 것을 해제해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타협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한 수치감에 대한 보복으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기를 원하는데, 여기에는 어떤 합리적인 범위가 지켜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데 있어서 정당한 한계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무시하게 됩니다. 우리는 갈등에 대한 최선의 해결을 통해 승리하기보다는, 그들을 파괴시키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종류의 파괴적 격노는 우리의 통제를 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우리의 자아를 사로잡으며, 세상 안에서 모든 적을 지워버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적에 대해 아무런 동정심을 느끼지 아니하며, 그들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느낄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의 통제에서 벗어나거나 우리가 이상화했던 사람이 우리에게 유용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날 때 용서를 모르는 격노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변형의 공간
파괴성의 변형은 우리와 타자들 사이의 공간에서 일어납니다. 종교는 이것이 우리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서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이 공간은 우리가 아무 것도 분열시키지 아니한 채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의존할 만한 곳이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와 똑 같은 내용을 말하면서, 하나님은 우리가 변화한 이후가 아니라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공로에 의해 하나님의 사랑을 획득할 수가 없습니다.
'위니캇'은 이러한 의존에 대해 유아가 부모에게 의존하는 전적인 의존이라는 측면에서 논의합니다(위니캇 1963 a). 우리가 타자에게 의존해 있는 공간은 마치 유아가 엄마에게 의존해 있는 공간처럼 우리가 무엇을 하거나 성취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으로서 수용받는 공간입니다. 유아는 자신의 존재를 안아주는 엄마의 존재에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이 의존이 자라나는 유아로 하여금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본능의 힘을 가지고 엄마에게 나아갈 수 있도록 허용합니다. 유아는 엄마를 삼켜버리고 싶어하는데, 이것은 마치 성인이 사랑에 빠질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당신을 먹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본능이 지닌 무자비성입니다. 우리는 본능의 공격적인 힘을, 처음에 다른 사람이나 우리 자신에게 미치게 될 영향을 고려하지 아니한 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무자비한 욕망으로 경험합니다. 처음에 우리는 유아의 삶에서, 영적 삶에서, 사랑 관계에서, 또는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되는 순간에서 다른 사람이나 우리 자신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는 공격적인 에너지로 가득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욕망을 느낍니다. 우리는 막무가내로 그것을 추구합니다. 그때 타자는―그것이 엄마이든, 하나님이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든, 아니면 어떤 새로운 통찰이나 생각이든― 우리의 열광적인 공격을 받아주면서 철수하거나, 상처 입거나, 화가 나서 등을 돌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공격성 안에 있는 이 무자비한 요소를 포함해서 우리 전체로서 수용되고 허용됩니다. 여기에서 우리와 타자 사이의 공간 확장을 가져오는 두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첫 번째는 우리 자신들에게서 시작되는 것인데, 우리는 차츰 우리의 무자비한 식욕이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우리 욕망이 지닌 강제성과 우리의 욕망이 향하는 타자 사이에 틈새가 열리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능적 욕망이 지닌 강력한 힘이 우리와 타자 안에 구멍을 남기지는 않을까 염려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능적인 공격에 의해 손상 입은 타자를 회복시키기를 원하며 우리와 타자 모두가 온전한지를 확인하고자 합니다(위니캇 1963b). 아이들은 교묘한 방식으로 회복의 몸짓을 나타냅니다. 제 아들은 어렸을 때 제가 꽃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그곳에 꽃을 놓아두세요” 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흥분된 사랑에 의해 야기된 어떤 상처라도 치유하기를 원하며, 그래도 그 타자가 우리를 사랑하는지,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변하지 않았는지, 우리에게 보복하지는 않을지 확인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확장되는 틈새를 넘어서 우리가 욕망하는 타자와 안전한 접촉에 이르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그 틈새를 만남의 공간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합니다.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타자에게 어떻게 공격적으로 나아가든지, 그 타자가 우리의 본능적인 삼키기와 깨물기와 요구하기를 견뎌내고 살아남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타자가 그 공격을 우리가 공격적 본능을 자제하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때 우리는 파괴성이 전적인 파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타자가 살아남아서 우리와의 접촉을 유지하고, 보복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회복을 위한 몸짓을 받아줍니다. 그때 우리는 타자가 우리의 착함에 의존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진정한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이때 사랑은 죽은 듯이 조용한 어떤 것이 아니라 이빨을 지닌 사랑이 됩니다. 그 사랑은 본능의 힘에 의해 지원을 받습니다. 종교 생활 안에서, 우리는 때로 두려움에 하나님께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때로는 찬양의 소리를 발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의 아이를 살려달라고 빌기도 하며, 때로는 샘솟는 기쁨과 감사를 느끼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하나님은 살아남으실까요? 종교 생활 안에서, 우리는 설령 분출하는 본능적 에너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해도,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살아남으시고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의 징표를 보여주시며, 초월의 순간을 보여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율라노프, 1982 7장).
우리와 타자 사이에 있는 이 공간의 두 번째 확장은 타자 편에서 시작됩니다. 인격, 하나님, 또는 생각은 그것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이미지와 정확하게 맞지 않습니다. 타자에 대한 우리의 그림은 타자의 실제 현실에 의해 파괴됩니다. 다시금, 우리와 타자 사이에 틈새가 생기고 우리가 타자의 다름에 의해 놀라게 되는 공간이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그림과 다르며, 심지어 우리의 신학과 성서 전통이 제시하는 공적인 하나님 이미지와도 다릅니다. 예컨대, 한 작은 종교 공동체의 수도자인 한 남자가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고통과 분노에 차서 소리지르며 저주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결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꺼야”(율라노프 1986 174). 하나님은 그 무엇으로부터 생겨난 분이 아니며, 자유로우시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림을 필요로 하지만, 그 그림이 하나님을 사로잡거나 거룩하신 분을 정의 내릴 수는 결코 없습니다. 우리의 하나님 이미지들은 거룩하신 분을 가리키는 상징들이며, 그것들은 결코 그분의 현존을 우리의 유한한 어떤 것으로 축소시킬 수 없습니다.
정신분석적 언어를 사용하여 위니캇은 우리의 투사를 능가하는 대상의 실재에 대해서 말합니다(위니캇 1971 6장). 우리는 타자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이미지와 실제 타자 사이의 틈새에 의해 멍해질 정도로 놀라게 됩니다. 이 이미지가 타자에 대한 우리의 본능적 반응에 의해, 또는 타자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를 능가하는 타자의 실제 현실에 의해 파괴될 때, 우리는 우리의 투사 바깥에서 자체의 권리를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타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대상은 그 자신으로 거기에 서있는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낸 것과 다른, 진정한 주체로 변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하나님 이해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을 만들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끔찍스런 일을 만날 때, 강간 캠프를 만들어 우리를 유린하고, 잔인하게 구타하고, 가두고, 심지어 먹고 씻는 자유마저도 제한하고, 우리의 정신 건강을 위협하는 전쟁을 겪게 되거나, 홍수와 지진을 만나거나, 우리의 아이가 죽임을 당할 때,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 상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다고 느끼고, 그 하나님은 우리의 유치한 소망의 대상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환멸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를 해 받음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는 보호자로서의 하나님 상을 상실하고 맙니다. 우리의 하나님 이미지는 냉엄한 현실에 의해서 또는 마치 우리에게 상처를 준 옛 애인의 사진을 찢어버리듯 하나님의 이미지를 찢어버리는 우리 자신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파괴되고 맙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신의 실제 엄마가 상상 속의 엄마와 다르지만, 여전히 그곳에 남아서 그를 받아주는 진정한 엄마를 발견하는 어린아이와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엄마는 아이의 상상 바깥에서 진정한 권리를 지닌 사람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우리의 하나님 이미지가 파괴될 때, 우리는 혹시 하나님과의 모든 연결이 파괴된 것이 아닐까 염려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치 어린아이가 파괴해버렸다고 생각했던 엄마가 그러하듯이, 우리의 생각 바깥에서 진정되고 친밀한 존재로서 거기에 계십니다. 이러한 견고함이 바로 하나님 사랑의 특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온갖 비난을 퍼붓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 비난들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파괴는 하나님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본능이 지닌 모든 신선함과 무자비성을 가지고 영적 생활에 임하지 않는다면, 그때 우리는 공격성을 우리의 주관적인 하나님 이미지를 보존하고, 유지하는데 사용하게 됩니다. 또는 단지 공식적인 종교에서 배운 객관적인 하나님 이미지를 형성한 채, 하나님에 관해서 말은 하지만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경험과는 상관없이 소문으로만 하나님에 관해 알고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종류의 영적 생활은 질병의 충격이나 다가오는 죽음의 충격을 견뎌낼 수 있을 만치 견고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파괴한 하나님 이미지 저쪽 편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은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말하는 환하게 타오르는 호랑이처럼 항상 우리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를 뛰어넘는 하나님이요, 신학자 '틸리히'가 말하는 신들 위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신성 배후에 있는 침묵의 하나님이요, '성 어거스틴'이 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그 삼위일체를 능가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어서 우리로 하여금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이미지를 건설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미지를 건설하고 파괴하는 이 순간들은 위기의 순간들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것들은 우리의 현실 배후에서 항상 진행되는 과정인 것입니다.
'위니캇'의 이해에 따르면, 우리와 타자 사이의 이 공간에서 발생하는 파괴성의 변형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옵니다(위니캇 1971 6장). 하나는 이미 언급한 것으로서, 타자, 대상 또는 하나님이 우리의 투사에 달려있지 않은 진정한 실재 그 자체로서 우리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타자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는 파괴되고 그 대신에 우리는 진정한 타자와 직면하게 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제 타자들이 그 자체로서 진정한 대상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자원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두려움을 투사하여 적을 만들어내는 일을 중단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을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주어야만 하는 신들로 만들고, 그것들이 우리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때, 그 신들을 죽여버리는 일을 그만 두게 됩니다. 타자들을, 우리의 욕구에 따라 사용되고 통제되며, 드높여졌다가 끌어내려지는, 우리 자신의 확장으로서가 아니라 그들 자체의 권리를 지닌 독립된 주체들로 보는 것은 평화를 위한 진정한 가능성을 향한 먼길의 첫 발걸음을 옮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필요에 따라 타자들을 괴롭히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강요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을 그들 자신들로 봅니다. 우리는 더 이상 타자들에게 우리 자신이 경멸하는 부분들을 부과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이 타자들과 이 세계의 동료 시민들로서 관계 맺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과 현실을 공유합니다. 이 현실로부터 우리 사이에 상호 의존성과 공동체가 건설됩니다. 타자들을 우리와는 다른, 살아있는 실재로 보는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요소입니다.
파괴성의 변형에 따른 두 번째 결과는 우리의 무의식 안에서 창조적 상상력이 증가하는 것입니다. 타자와 만나는데 사용되고 남은 파괴성의 일부는 우리의 무의식 안으로 들어가 끊임없이 우리가 만들어낸 선입관과 이미지들을 지워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허용합니다. 파괴성은 더럽혀진 유리를 깨끗이 닦아주는 기능을 담당합니다(율라노프 2001, 5장). 본능의 모든 신선함을 그 안에 담고 있는 우리의 무자비한 파괴적 에너지는 우리의 의식 바깥에서 작용하는, 그리고 배후에서 모든 것들을 창조하고 파괴하고 다시 창조하는 상상력의 에너지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의식 바깥에서 일어나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포함하여 우리가 가진 이미지들과는 다른, 타자들의 실재를 주목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항상 새롭게 봅니다. 우리는 심지어 이십 년 동안 함께 살아온 아내라 할지라도 그녀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수십 년 동안 신학을 공부했다 하더라도, 신학의 교리를 전부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심리학 이론과 정신병리학에 정통하다 하더라도, 한 환자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놀라워하고 반응하고 신기해할 수 있도록 개방된 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이 개방성이 우리의 삶을 신명나게 만들고, 심지어 전쟁이나 질병과 같은 가장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탄력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허용합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를 새로움 속으로 안내합니다. 왜냐하면 이처럼 변형된 파괴성은 중심적인 사고 형태에 있어서 초점을 지닌 의식에 매달릴 수 있는 에너지를 주는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에너지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초점을 갖는 것과 초점을 떠나보내는 것 이 두 가지 모두를 필요로 하는데, 이것들은 마치 호흡의 리듬처럼 꾸준하게 순환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점에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이사야 43:18-19)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처럼 작은 새로움을 창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종교적 전통은 새로워지기 위해 계속해서 닦여져야 하는 자동차 앞유리 같은 것이며, 변형된 파괴성은 우리의 상상력이 됨으로써 우리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줍니다.
파괴성의 변형이 일어나는 이 공간에 대한 융의 견해 또한 유용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융에 따르면, 정신은 그가 초월적 기능이라고 부른 자연스런 능력을 갖고 있어서 두 개의 대극적인 관점, 즉 의식적 관점과 무의식적 관점 사이에 존재하는 파괴적인 갈등에 관여하고 그것의 해소를 추구합니다(융 1916/1959). 우리는 이런 종류의 갈등에 익숙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이 파괴성과 연관되어 있다고 간주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어떤 것을 하고자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다른 부분은 그 반대의 것을 하기를 원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더 열심히 일하겠노라고 결심을 하지만, 더 생산적으로 시간을 사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게으름을 피우며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쓸 데 없는 일에 시간을 보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나 하나의 신앙 체계에 충성스럽게 남아 있기를 원하지만, 다른 사람이나 다른 신앙 체계에 매력을 느끼고 그를 추종하거나 그 신앙 체계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찢겨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다른 종류의 例로는, 무의식으로부터 무언가가 분출해 나오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내게 분석을 받고 있던 한 여성은 강철 이빨을 가진 거대한 남자가 그녀가 식사를 하고 있는 까페로 돌진해 들어와서 식탁과 의자들을 부수고 접시를 집어던지며 그곳의 손님들을 공포에 몰아넣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녀는 파괴성을 생생하게 직면한 것입니다. 이 폭력은 그녀 안에 엄청난 공포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그녀는 꿈을 통해서만 폭력의 문제를 다룰 수 있었습니다. 나는 조용히 있으면서 이 파괴적인 에너지가 그녀와 나 사이에서 살아 있도록 허용했고, 이 폭력이 누구의 것인지 알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로 침잠해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그 폭력이 분석가에서 나올 때 어떻게 느껴지는지, 피분석가에게서 나올 때 어떻게 느껴지는지, 그리고 분석가와 피분석가 사이에서 나올 때 어떻게 느껴지는지를 탐구했습니다. 서서히 그녀는 그녀의 상상력 안에 있는 이 무서운 남자를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의를 갖춘 대화라기보다는 욕설과 험담으로 가득한 언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다시는 나타나서 던지고 때려부술 생각을 말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 그는 그녀에게 “그렇다면 잠에서 깨어 나를 사용해봐 아니면 내가 너를 사용하겠어”라고 되받아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들은 격렬하고 열정적으로 싸웠습니다. 그와 같은 상상 속에서의 만남은 온 몸을 땀으로 적시고 우리의 맥박을 뛰게 합니다(율라노프 1977, 127-128).
이러한 상상력의 공간은 파괴성의 변형을 허용합니다. 이 공간 안에서 우리는 무자비한 공격성의 세력을 지닌 내적 타자를 직면합니다. 만약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들 각자 안에 있는 전쟁을 직면해야 합니다. 의식적으로 내적 갈등을 직면하는 것은 새로운 것, 즉 두 개의 상반되는 견해를 모두 포함하는 제 삼의 관점이 출현하도록 촉진합니다. 방금 언급한 여성의 꿈에서 이 두 개의 상반된 견해는 두려움에 질린 여성과 강철 이빨을 지닌 거대한 남자로 나타난 폭력적인 파괴성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격렬한 정서적 대화의 공간으로부터, 갈등하고 있는 양 측면을 포함하고 능가하는 새로운 상징이 출현합니다. 이 여성에게 다음에 나타난 꿈은 한 전사가 그녀의 집에 들어와 그가 지금껏 키워오던 조그마한 아기를 그녀에게 넘겨주는 꿈이었습니다. 그 전사는 다시 싸우러 갔고, 전쟁은 끝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제 유아의 모습으로 나타난 자신의 의존적인 부분을 알고 돌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폭력은 더 이상 그녀 자신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그 병사는 더 이상 닥치는 대로 파괴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하고 있고, 유아적인 부분은 양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화해의 상징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새로운 태도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나 사고의 산물이 아니라 성격의 가장 깊은 층으로부터 오는 또는 그것의 전체성으로부터 오는 창조적 해결과 같은 것입니다(융 1958, 856).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능가하는 그 무엇, 즉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느낍니다. 이 존재가 바로 우리의 정신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입니다.
요약하면, 인간의 파괴성의 변형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다른 사람들 안에,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 있는 무자비한 파괴성을 인식하고, 그것의 현존을 부인하거나 그것의 생명력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억압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파괴성을 부인한다면, 우리는 이 에너지와의 접촉을 잃어버리게 되고, 생명력을 잃어버리며, 다른 사람들을 죽이게 됩니다. 그때 거기에는 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우리의 무자비한 본능적 공격성의 문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이 타자는 부모일 수도, 친구일 수도, 목사님일 수도, 하나님일 수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우리가 신뢰하는 선생님일 수도, 분석가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와 그들 사이의 공간에서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을 상상력을 통해서 감행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타자가 보복하거나 상처받고 철수하거나 태도를 바꾸지 아니한 채, 스스로 이 모든 것들을 살아남아 거기에 있으면서 우리가 입힌 손상을 보상하고자 하는 우리의 관심과 노력을 탄력성 있게 수용해준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타자는 이것을 행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종종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이 일을 해주는 타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서로에게 이 일을 해줍니다. 예컨대, 가까운 친구 사이에서 친구가 우리에게 덤벼들고 심한 요구를 해올 때, 우리는 잠시 동안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를 위해 참아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차이 안에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여기에 진정으로 존재하시는 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개인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개인적인 차원을 벗어나 다른 영혼에 대한 예의를 지킵니다. 이것이 우리 각자에게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갖는 이미지들 바깥에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며, 우리로 하여금 서로를 위한 진정한 원천이 되게 해줍니다. 우리는 무의식 안에서 서로에게 부과한 범주들과 전이해들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를 새롭게 바라봅니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열린 마음으로 나아올 수 있으며, 놀라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 신선함과 흥분과 놀라움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상반되는 관점들을 직면하고, 양 편 모두의 말을 듣고, 그것들 사이의 열띤 내적 대화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점진적으로 새로움의 선물을 가져다주는 상징을 통해서 새로운 관점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한 번도 전에 생각해 본적이 없는 해결 방안이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 작업은 세상을 과도한 파괴적 공격성으로부터 건지고 크건 작건 우리들 사이에서 전쟁의 위협을 줄여줍니다. 그것은 세상 안에 전쟁이 아니라 그리고 성 마른 공격성이 아니라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상상력 있는 자원을 가져다줍니다. 우리의 공격성의 이 개인적 뿌리를 발견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서로를 위한 지속적인 사랑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새로운 신학
놀랍게도 이 파괴성의 변형은 우리의 신학 안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이 변화는 우리의 정신과 영혼 모두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뚜렷이 우리 자신의 것이요,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동시에 애착과 동일시에서 벗어난 하나의 새로운 의식 상태를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는 새롭게 바라보면서도 우리가 보는 것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아가 무의식을 지배하거나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을 표현하는 기관이 되는, 일종의 포스트 모던 의식입니다. 이 의식은 마치 그것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기라도 하듯, 어떤 이론이나 하나님-이미지에도 매어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믿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주관적인 하나님 이미지와 광적으로 동일시하는 것과 반대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식을, 모든 편견들, 한계들, 이데올로기들, 우리의 자아가 사로잡히기 쉬운 중독들을 깨달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한 발작 뒤로 물러서서 우리 자신의 의식을 바라보고, 그래서 어느 정도 거리감을 소유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본능의 신선함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 우리의 아이를 위해, 우리의 하나님을 위해, 정의를 위해 열정적으로 헌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이제 역설적인 것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만들어서 하나님께 계속해서 투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지를 만드는 피조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다시 우리의 일부를 만들어내는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 이미지들 중의 어떤 것도 티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야곱의 사다리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이 이미지들의 사다리를 올라가지만, 그 끝에 도달해서 우리는 그 사다리를 버립니다. 우리가 그린 그림들은 결코 하나님에게까지 우리를 인도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욥처럼 하나님 이미지를 열정적으로 신뢰하는 동시에 그것이 우리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중에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로 옮겨줄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시작된 이 근원 지점으로 되돌아가라는, 그리고 그 분의 존재를 증거하고, 그 분과의 연결을 통해서 살아가는 우리의 영혼을 보호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이러한 의식에 대한 의식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일시된 모든 것을 떠나보내는 영적 훈련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실재의 중심을, 불교에서 말하는 제로 지점을, 탈자기 상태를, 하나님께 자기를 봉헌하는 신비가들의 목표를 바라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무자비한 본능이 지닌 모든 신선함을 수용하기 위해서 의존할만하고 변치 않는 분으로서, 그리고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시는 분으로서 거기에 계십니다. 이 포스트 모던 의식은 그것을 통해서 만물이 살아가는 입구가 되며, 반응과 화육의 기관이 됩니다.
신학적으로, 우리는 부활하여 우리에게 돌아오기 전에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셨던 그리스도를 모방합니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남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자, 원천, 근원 지점,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중심을 지칭하는 것이며, 우리의 이미지들이 흉내낼 수 없는 그 중심은 마치 계속되는 창조의 행위 안으로 유입되는 생명의 강물이 흘러나오는 거대한 공허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본능의 신선함을 훈련시킨다면, 우리는 이 원천에 물꼬를 대게 되고 그때 그것은 우리가 그린 하나님 그림들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 바깥으로 데려가시지 않습니다. 우리라고 해서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의 죽음으로부터 면제받지 않습니다. 끔찍스런 폭격, 대학살, 나라의 분단, 강제 행진,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를 파괴시키는 가학행동, 우리를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불구가 되게 하는 질병 등, 인간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이것들을 사라지게 하지 않습니다. 수십 세기 전에 우리의 선배들이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 사막으로 도망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 당시 사막이야말로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넓은 공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들과는 달리, 이 세상을 떠나 어디로 갈 곳이 없습니다. 우리 시대의 성령은 세상 속으로 내려오시며 하나님은 세상 안에서 우리를 발견하시며 우리가 받고 있는 고통 한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계속해서 하나님의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파괴되는 동안에도 우리는 거듭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인도됩니다.
우리의 신학은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만든 이 집― 만들어진 다음에는 다시 우리를 만드는―을,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 안에 살아있는 그것을 보호하는 기능을 갖습니다. 우리의 증언은 우리에게 있을 곳을 주시는 하나님의 현존이 거할 곳을 마련하는 것이며, 우리를 통해서 세상 안으로 들어오시는 성령의 삶에 대한 동의와 응답입니다. 만물의 근원이 되신 분으로부터, 그리고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은 끊임없이 우리를 창조하시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창조주의 한없는 너그러움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이미지는 우리 안에 있는 본능의 신선함을 지원해주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마음과 뜻과 영혼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 참고 문헌 중 우리말로 번역된 것 ◈
* 앤 율라노프「종교와 무의식」/이재훈 역(한국심리치료연구소,1996)
* 앤 율라노프「신데렐라와 그 자매들」/이재훈 역(-上同-,1999)
* 도날드 위니캇「성숙과정과 촉진적환경」/이재훈 역(-上同-,2000)
* 도날드 위니캇「놀이와 현실」/이재훈 역(-上同-,1997)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