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8월 5일(?)
우리 국군이 트럭을 가지고 와서 나와 몇명의 환자를 태우고 가는데 길에는 하얀 옷을 입은 피난민들이 밀려들어 트럭이 꿈쩍도 못하자 군인이 몽둥이를 가지고 나와서 마구 휘두르자 간신히 길이 열려 대구역까지 왔습니다.
나는 군인들이 조십스럽게 당가에 뉘인채 기차에 실립니다.
"어디로 가나요?"
라고 큰 형이 군인에게 묻자
"비밀 입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누구의 지시인지 모르나 아주 현명한 지시로 그 많은 환자들을 기차가 가면서 작은 도시마다 몇명씩 내려 놓고 가는게 아닌가? 참 멋진 분산방법입니다.
나를 내려놓은 곳은 밀양입니다.
그때의 밀양 역은 아주 한적한 시골입니다.
역에는 조그만 대합실 하나가 전부입니다.
우리를 내려 놓은 환자들은 모두 7명입니다.
우리들은 기차 철로에서 다음에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그냥 기다리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밀양은 한적합니다.저 멀리 둑에 푸른 소나무 같은 것이 길게 늘어선 것외에는 허허벌판입니다.
한참 있자 군트럭이 한대 와서 우리들을 싣고 시내로 들어가는데 우리가 멈춘 곳은 밀양국민학교 입니다.
정문에는 밀양 제 7 육군 병원 이란 간판이 붙어 있습니다.
트럭이 안으로 들어가니 눈에 보이는 것이 맨 군인들 천지 입니다.
그곳은 낙동강 전투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실어와 학교 전부를 병원으로 만들었는데 한 교실마다 45명씩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교실로 옮겨졌는데 45명의 군인환자속에 민간인은 나 뿐이고 조그만 내가 군인들 틈에 끼어들자 모든 군인들이 놀라워 하며 내가 팔에 총을 맞은 것을 보고 안타까워 합니다.
여기서는 담요 2장이 지급됩니다.
한장은 밑에 깔고 한장은 덮습니다.
그런데 군인들의 상처가 모두 달라 아프다고 소리치는 군인들이 많습니다.
어느 군인들은 팔다리가 잘라져 붕대로 감고 있고, 어느 군인은 엉덩이 살이 떨어져 아프다고 소리를 칩니다.
어느 군인은 낙동강에서 조그만 고지 하나를 두고 낮에는 국군에게 빼앗기고 밤에는 인민군들에게 뺏기를 반복 했다고 하며, 인민군의 수류탄이 날라오면 터지기 전에 되받아 던진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던지는 순간 폭발하여 군인의 몸에는 파편들이 새까맡게 달라붙어 의사가 집게로 하나하나 뽑아내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양쪽 눈동자에는 파편이 하나씩 박혀 있는데 곧 일본으로 수송된다고 합닞다.
여기서도 의사와 간호가가 부족하고 의약품이 부족해 이틀에 한 번씩 치료를 한다고 합니다.
날이 더워서 남쪽의 창문들을 다 열러두었지만 반대편 창문은 다 닫아놓고 있는데
그것은 학교의 창고에서는 낙동강에서 전사한 미군들의 시신을 가지고 와서처리하느라고 송장냄새가 코를 찔러 창문을 열지 못한 다고 합니다.
창 넘어로 운동장이 보이는데 대형 가마솥이 길게 늘어서 있고 군인들이 밥을 하는 것이 보입니다.
월남(베트남)인가, 필리핀인가, 혹은 태국에서 수입한 알라미쌀을 푸대채 튿어서 솥에 쏟아 붓고 물을 붓고 장작을 지펴 밥을 하는게 보입니다.
그때만 하더라고 태국이나 월남이나 필리핀등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선진국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미 벼농사 탈곡할때부터 쌀의 돌멩이들을 다 걸러냈는데 한국에서는 아직 그런 것도 못하고, 바가지로 여러번 쌀을 일어서 돌을 걸러내야 했습니다.
밥이되면 군인들이 삽으로 밥을 퍼서 큰 통에 담아 각 교실로 옮기고, 국도 끓여서 그렇개 나누어 주어 모두 밥을 충분히 먹습니다.
나는 큰 형이 늘 밥을 멕여 줍니다.
(계속)
첫댓글 그때 그 암흑같은 전쟁통에도 저런 장면이 있네요 중환자를 일본까지 수송시키는...
참 지금 생각하면 암답합니다 말씀대로 당시는 필리핀이 아시아의 선진국이었고
태국 베트남 심지어 북한도 우리보다 잘살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종말 상전벽해가 되어버린 이나라를 그렇게 만든 선지자들과 해외동맹국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잘읽었습니다
어서오세요 기라성님 찾아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나라를 망친 선조들이 참 원망스럽지요
대원군의 쇄국정치와 쓸데 없는 양반제도가 문제 였어요
그 시절
세계 최 빈곤국인 한국
거기다 전쟁까지 치르고
폐허가 된 분단된 나라
미군들도 남의 나라 전쟁에 나와
시신으로 ?
하여간 낙동강물이 피빛으로 물들었다고
하대요
수많은 시신들이 낙동강에 떠다니고 ....
라아라님 어서오세요
예 그 말은 사실이었다고 합니다.
미국은 지금 낮이지요? 하하하 방가
형광님 글은 역사입니다.
참담하고 아픈 현실이었습니다.
그 힘듦과 어려움 생사의 기로를 읽으며 언제인가 제가 수술을 받게 되었을 때 수술실 앞에서 느끼던 복잡 미묘한 감정이 되살아 나는 듯 느끼게 됩니다. ^^~
아 순수수피아님 ! 어서오세요 감사하니다.
ㅛㅜㅛㅜㅎ리하니요? 크일 날 번했네요 수술이라면 겁부터 나요 감사
형광등등 님. 잘 읽었습니다.
진정한 글은 이렇게 팩트에서 나오는 거죠.
아무리 글을 잘 쓴다 해도 팩트가 없는
오피니언은 공감하며 읽더라도
이렇게 절절하게 느껴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논픽션이라 너무나 소중한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아유 송초님 어서오세요
부족한 글을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부끄러워 집니다.
거짓하나없고 과감도 없이 제가 느낀대로, 본 대로만 쓰는데
제가 쓰면서도 `혹시 잘못 쓴 섯은 없나?` 걱정이 될때가 많아요 감사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유 환타스틱님 성공은 무슨 성공입니까?
저는 그런것 하나도 느끼거나 생각조차 못해요 감사
치열한 낙동강 전투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이 밀양 제7 육군병원으로 이송되어 왔군요~
민간인 환자를 데려다 치료해주려는 군의료진께 감사 드립니다. 이름도 모르고 가난한 나라를 위해 원조해 준 우방국들에게도 감사를..
자유수호를 위해 산설고 물선 나라에 와서 산화하시고 부상당하신 유엔 16개국 우방국의 군인들께도 존경의 예를 드립니다.
1950년의 8월은 얼마나 덥고 두려우셨습니까?
군인들의 비명, 신음소리, 죽음, 주검..
이 모든것을 겪으시고
담담하게 서술하실 수
형광등등님은 진정한 위너이십니다.
아프고 고통스러워도
형님 두분이 곁에 계셔서 힘이되셨겠어요.
안남미 쌀밥
배불리 드시고
빠른 회복의 경과를 기다려봅니다!
자하님 어서오세요 마치 자하님이 그 자리에 계신것 같아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안남미 쌀 납작 보리쌀 옛 생각이 납니다
어쨋든 형님들이 계셔서 다행이였군요
돌아가신 어머님이 얼마나 보고 싶으셨을까 가슴이 메입니다
운선님 어서오세요 감사합니다.
제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 해 주시니 위로가 됩니다 _()_
큰형님과 군인들의 헌신적인 노고가 이렇게 감사한 글을 읽게 되었네요
어린소년이 팔에 총탄을 맞았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자세히 쓰여진 글에 6.25의 참상이 보여집니다
안녕하세요? 리즈향님
제 팔의 총상이 아직도 그 상처가 한뺨입니다.
그때는 살이 다헤어져 뼈가 보였어요 ,감사합니다.
밀양.
그 지명이 저를 몹시도 흥미롭게 만듭니다.
제가 지금 밀양에 살고 있거든요.
밀양 제7육균 병원.
그곳이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조선방직인가 무슨 방직 공장이었는데
전쟁 때 제 7육군 병원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설처럼 들었습니다.
요즘은 마천루를 연상케 하는 고층 아파트 단지로 변했습니다.
후속편을 기다리겠습니다.
아 종이등불님 어서오세요 반갑습니다.
그때는 밀양 국민학교였어요,
그곳이 아파트로 변했나요? 놀래라
그때는 집이 부족해 여기저기 천막을 치고 군인과 피난민들을 수용했었지요 고양하람을 만나니 반갑습니다.
@형광등등 아, 그곳이 방직공장이 아니라 밀양국민학교였군요.
밀양국민학교는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있구요.
밀양국민학교 옆 방직공장이라던가 무슨 공장 자리는
거대한 아파트 숲으로 변했답니다.
제 고향은 밀양이 아니지만
밀양에서 자리를 잡은 지 벌써 30년 가까이 됩니다.
말씀하신 밀양초등학교에서만 10년을 근무하고,
그곳에서 지난 해 8월말 정년퇴직을 하였답니다.
밀양을 기억하시는 분을 만나 반갑습니다.
@종이등불 아 종이등불님 밀양에 사셨다니 놀랍고 반갑습니다.
늦게 찾아뵈어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