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상의 논리가 본질과 현상을 양쪽을 포용하는 지혜가 과연 있을까? 근데 이거는 대성불교에서는 이 양쪽을 포용하는 지혜를 분리 둘이 아니다. 그리고 중도 품질과 현상의 중독 또 다른 말로 일심 한 개 의식 구체적으로 관자신경에는 색즉시공 공즉 시색 아 이런 식으로 표현을 했지요. 그래서 서양 우리가 서양인으로서 막 공부를 하게 되면 이런 과정을 책도 두껍잖아요. 안에 되게 복잡하거든요. 이런 과정을 다 거치해야 되겠지만, 그리고 끝에 대해서 여전히 확신을 가지기가 쉽지 않겠지만 이 질문 오늘 이제 공부할 깨달음의 지도라고 하는 깨달음의 지도 그것의 최종 결론을 알고 공부한다고 할 수 있어요. 이게 참 참 다행스럽고 이제 유리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여곡절은 많지만 깨달음의 지도가 복잡하고 그다음으로 가는 과정이 복잡하지만 그래도 결론을 알고 공부하면 참 이거는 다행스러운 일일 텐데, 결론은 지금 방금 말씀드린 일심 중도 불이익 뭐 연기 이렇게 다양하게 표현되는 색적 시공 공직 시세 이런 식으로 표현되는 것이 우리 마음공부의 결론이라서 결론의 입장에서 보면 책이 굉장히 쉽게 읽힌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의 결론은 뭐냐 하면 현상이 그대로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여기 이제 이제 책 본론으로 들어가면 전성 너머 깨달음의 지도 이렇게 나오잖아요. 여기서는 이 책에 지금 이번 장에서는 동서양의 깨달음의 지도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이 책에는 안 나오지만, 제가 보기에는 깨달음의 지도로서 가장 정확한 것 제 경험으로 비춰봐도 그렇고 그래서 그걸 먼저 잠깐 이야기하고 들어가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깨달음의 지도에서 가장 우리한테는 가장 분명한 모습은 할 수 있어요. 서서해야 되네. 간단하게 쓸게요. 여러분 이미 다 아는 아는 거예요. 깨달음의 지도 한국에서 우리 입장에서는 임재종 스님이에요. 청원 유신 송나라 시대에 청원 유신이라고 하는 스님이 말한 공부 과정 처음 공부할 때는 산은 산이요 산은 산 아니었다 산은 산이었다. 공부를 했더니 산은 산이 아니더라. 산은 산이 아니더라. 세 번째는 산은 그저 산이더라. 그리고 요 과정이 요 과정이 우리 깨달음의 지도에서는 가장 정확한 것 같아요. 그리고 간단하면서도 요점 정리가 잘 되어 있고 특히 저는 개인적으로 그동안에 참선을 해 온 결론은 딱 여대로 진행된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산은 산이요라고 하는 이 말은 현상만 현상만 살아가는 일반인들 입장 한때는 산은 산이다 꼭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공부를 하면 본질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라고 하는 거 우리들의 본성 불성 순수의식 그거를 발견을 하니까 산은 산이 현상은 실체라고 할 수가 없더라. 근데 다행스럽게도 청건 유신의 이 이야기를 샹카라라고 하는 8세기 인도에 어 하여튼 인도 힌두교 전통이 이 사람이 이제 비 지금 서양에서 비이원론이라고 하는 B이원의 전통 논 듀얼리티 둘이 아닌 비의원의 전통을 세운 사람이 샹카나인데 지금 인도의 승자들이 많이 나왔고 또 그 영향이 지금 서구한테는 굉장히 많이 마하리씨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어 영향을 미*기 때문에 상카라에 또 깨달음의 지도 그것도 상당히 똑같아요. 이거랑 첫 번째 현상은 환이다.
현상은 실체가 아니다. 모든 현상은 있는 따라 생겼다가 소리처럼 인년 따라 2년 따라 생겼다가 사라져서 모든 현상은 환이다 음 생별한다. 그것도 찰나생 찰나멸한다. 두 번째 본질만이 실제다. 그런데 세 번째가 현상이 본질이다. 그러니까 지금 현상 똑같이 왼쪽하고 똑같이 현상을 말하고 본질을 말하고 그런데 이것이 현상과 본질이 하나라고 하는 것 비이원.
산은 산이었다가 산은 산이 아니더라. 왜냐하면 본질 입장에서는 산이 환경 같이 그게 실제가 아니더라. 본질만이 실제더라. 그런데 공부가 더 깊어지니까 본질이 그러니까 이게 지금 가장 핵심이에요. 본질이 공부가 깊어지면 본질도 하나의 분별이더라. 인간이 본질이라고 하는 것도 인간이 본질이라고 하면 그 본질이 진짜 본질이 아니고 그게 분별이더라. 따라오실리나 모르겠다. 이게 여기 좀 어려운 부분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본질이다 하면 그 본질을 진짜 본질이 아니고 인간에 의해서 파악된 본질은 진짜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요 대목을 우리한테는 참 좋은 말이 있어요.
법신 법의 몸이라고 이렇게 불러요. 그런데 법신은 법신도 법신인 본질인 법신도 변사다. 변두리 일이다. 이때 변은 양변을 말해요. 양변 양변에 반대말은 중도예요. 중도의 반대말이 양변이다. 이 말은 현상과 본질 세간과 출세간에서 세간도 한쪽으로 치우친 거지만 출세간도 그 반대로 한쪽으로 치우친 거다 이거예요 현상도 치우친 거지만 본질도 치우친 것이라서 양쪽 다 양변 중도가 아니고 양변 그래서 변사다. 이 말은 치우친 일이다. 법신이라고 하면 그것도 법치도 치우친 것이다 그러니까 법신 변사를 보통은 사람들이 법신 언저리라고 표현해요. 법신 언저리이다. 근데 언저리 일이라는 말이 아니고 법신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양변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튼 법신면사 양변에 일이다. 법신도 양변의 일이다. 그래서 결국은 사는 거죠. 산이들아 이 말은 현상이 산이 현상인 산이 고대로 본질이더라 해서 중도가 완성되는 요 세 번째는 중도.
이치는 이렇게 이렇게 간단하지만 실제 수행할 때는 이제 이것이 개인 개인이 이 길을 한번 쭉 걸어야 돼요. 개인 개인이 요 세 가지 저 같으면 제 개인적인 공부 과정으로 빗대어서 말씀을 드려 본다면 마음 공부를 하기 전에는 현상이 다인 줄 알았어요. 이 눈에 보이는 이 세계가 그냥 다인 줄 알았고 그 현상은 주간과 객관 나와 세계 그러니까 내가 세계를 장제로 살아가는 이 인생 이게 지금 다인 줄 알고 살았어요. 근데 보통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사는 거죠? 내가 세상을 상대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인생이죠. 근데 그게 다인 줄 알았다 이거예요. 근데 왕 공부를 보니까 현상이 다가 아니고 본질이 있더라. 근데 본질은 또 어려운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깨어서 그러니까 본질은 변하지 않는 건데 지금 이 순간 저를 보시다가 칠판을 보시면 대상은 저에게서 칠판으로 옮겨가지만 저를 보는 그것은 칠판을 볼 때도 그것 자체는 변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거를 여기는 어려운 게 아니고 그냥 간단한 명료하게 우리 21세기 현 한국인한테는 그냥 지금 깨어 있는 의식이에요. 그래서 이 깨어있는 의식 지금 이 자리에 이 자리에 사람도 있고 책상도 있고 좌복도 있고 의자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다 물질들이죠 맞아요. 다 물질들이죠. 근데 물질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 여러분 어때요? 물질만 있는 건 아니죠. 물질이 있다는 걸 아는 것은 그것은 의식이잖아요. 몸을 움직이는 것은 의식이잖아요. 그니까 지금 여기에 언제나 물질만 있는 건 아니에요. 항상 오히려 물질 이전에 의식은 먼저 있어요. 그래서 이걸 발견하는 거 그것이 본질의 발견 산은 산이 아니더라. 산이 존재하는 거는 내 내가 의식이 이렇게 봐줘야. 산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내 의식이 만들어내는 내 의식이 있고 그 의식 의식의 뭐라 그럴까? 개입이라고 할까? 모든 것이 존재하려면 내 의식이 개입해야만 존재한다. 이거는 마음공부하기 전에도 저는 어릴 때부터 이런 생각은 들었던 것 같아요. 마음공부하기 전에도 너 없으면 우주도 없네. 그런 어릴 때 그런 생각 안 해보셨어요. 내가 없으면 내가 없으면 없잖아요. 내가 없으면 우주도 없잖아요. 이때 나는 몸이 아니고 모든 걸 인식하고 있는 주체로서의 의식이다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의식이 없으면 아무것도 존재할 수가 없어요. 아예 그러니까 의식의 발견 두 번째예요. 그런데 의식의 발견 의식을 발견하고 난 뒤에도 아직 중도에 이르지 못한 것은 지금 돌아보면 그거예요. 의식을 발견하고 난 뒤에도 아직까지 나는 분별심 남아 있어서 분별심 지금 중도에 반대말 양변인데 양변이란 말도 이게 분별심이에요. 분별심의 내용은.
품별심의 내용은 정식이라고 해서 감정과 알음알이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보자마자 좋다 나쁘다 하는 거 그 감정 인간한테는 감정이 있죠. 그리고 식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분별 아름말이라고 하는 것은 뭐 깨달음은 이를 것이다라고 하는 자기도 모르게 그동안에 공부한 것을 통해서 만들어 놓은 고정관념들 고정관념들이 중도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이에요. 선사들은 아주 이걸 경계했죠. 그래서 아무튼 이 사람과 내가 만난 지금 배달의 시도를 가장 정확한 지도는 사는 산이다. 사는 산이 아니다. 산은 그저 산이다. 다 요거에요. 그래서 요 두 번째 의식을 발견해도 아직 정식 감정과 아르마디의 요 방해가 남아 있어서 아직 나가 나라는 게 있고 그리고 남이라는 게 있고 또 나는 남을 나누어서 좋다 나쁘다 하고 또 깨달음은 이러할 것이다라고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깨달음의 삶 법상을 만들어. 놓고 그리고 지금 2번에서 3번을 넘어가는 과정을 지나게 돼요. 근데 3번 어 3번이 되는 가장 핵심은 의식 2번은 의식의 발견이잖아요. 의식을 발견하고 난 뒤에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있으면 내가 있고 의식이 있는 거예요. 본질이라고 하는 것이 있으면 내가 있고 본질이 있는 것이라서 아직 분질이 극복되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이걸 이제 법상이라고 해서 진리라고 하는 상 이걸 아주 경계를 이렇게 하죠. 자 그러면 지금 이번에서 3부로 넘어가는 것은 언제 넘어가느냐 하면 의식 혹은 본질 혹은 공공성이라고 부르는 거 불성이라고 부르는 거 그것이 자기도 모르게 이거다 하고 가지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익어지고 익어지면 챙길 필요가 없게 될 때가 와요. 아 이게 의식이구나라는 그 자각이 측면을 챙겨야 돼요. 챙기다가 그것이 챙길 필요가 없어질 때가 오면 그것이 의식이 안 챙겨도 될 때 그때가 되면 문득 어렵죠 하면서 의식이 내가 챙기는 대상으로 있는 게 아니고 이것이 사라지고 그냥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의식이 이렇게 드러난 것으로 저절로 자각이 되어 버려요.
그러니까 이 말은 눈이 그렇게 본다는 거예요. 알았어. 눈이 이때 이걸 이제 심안이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지금 공부가 우리 공부가 첫 번째는 일상에 살다가 두 번째는 본질을 발견하고 아 이게 의식이구나 하는 걸 한번 딱 발견하고 그다음에 그 의식을 의식의 어떤 감이라고 할까?
이게 의식이라고 하는 것을 길러가면 그게 확실하고 확실하고 확실해지면 더 이상 의식이라고 챙기지 않게 돼요.
그러면 의식이 사라지고 뜻밖에도 따로 의식이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지나가는 소리
소리 혹은 보이는 지금 이 보드마크 눈에 보이는 거 들리는 소리
냄새 맛 촉감 뭐 생각 감정까지
모든 것이 다 어 의식이 이렇게 드러난 것으로 본인한테는 그렇게 보여 버려요. 견문 각지.
그래서 의식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산이 의식이 되어 버리는
그래서 정말로 반야신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 색이 그대로 현상이 그대로 본질인 그리고 그 본질은 가만히 있지 않고 본질은 본질로서 가만히 있지 않고 현상으로 나오고 있고 현상으로 나온 것은 가만히 보면 그것이 현상이 현상이 아니라 본질이고 본질이네 하면 현상이고 현상이네 하면 본질이고 그래서 이제 중도 불이라고 하는 그래서 다시 말하면 현상이 그대로 본질이다라고 여기 샹카라가 표현한
저게 그대로 중도
현상과 본질이 완전히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이를테면 이제 뭐가 뭐가 생기느냐 하면 3번이 되면 고통이 끝나요.
그게 뭐냐 하면 2번까지는 아직도 따로 놀아요? 본질하고 현상이 그래서 자꾸 현상을 떠나서 본질로 가려고 해.
이번까지는 근데 3번으로 딱 이렇게 한 번 돌아나오면 본질에서 현상으로 모든 현상이 본질이네 하고 현상을 본질은 되고,
모든 현상이 그대로 본질이네 하고 돌아나오면 어떤 변화가 생기느냐 하면,
그동안에 본질이 중요해서 현상을 버리고 본질로 가려고 하던 그 도픽하는 심정이 끝이 나버려요. 그래서 번뇌망상을 벗어나서 고요해지려고 하거든요.
번뇌망상을 벗어나서 고요해지려고 하는데
이번에서 3번을 넘어오면 어떻게 되느냐면
번뇌 망상이 본질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현상이 예외 없이 본질이 되어서 번뇌망상이 그대로 어 의식이고 그리고 고통이 고통이 그대로 그것이 말자는 깨달음으로 변해 버려요. 그러니까 모든 것이 깨달음으로 변한다. 의식이라고 하는 깨달음이 따로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것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의식이 된다. 이 말은 모든 것이 깨달음이 된다는 말이에요. 그럼 더 이상 깨달음을 찾지 않게 돼요. 하여튼 요 과정을 한번 이렇게 거쳐서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
번뇌즉 보리 중생즉 부처 이런 말들이
3번을 말하는구나. 근데 요렇게 1번에서 2번을 거쳐서 3번으로 거기 가는 까지의 과정 어 그걸 말로 하자면 깨달음에 지금 마음 공부의 지도라고 이렇게 말을 할 수는 있어요. 그래서 지금 하여튼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고 자 요 과정을 전통마다 조금 조금씩 다르게 표현한다. 예를 들어서 같은 임재종의 같은 임재종에 십우도라는 것이 또 있어서 이걸 세분하면 10가지 소를 풀 찾는 10가지 스텝 단계 이런 식으로도 설명한다. 이게 15도로도 그리고 오늘 책에 나오는 이제 소송 분류에서는 깨달음을 고귀한 지혜의 네 가지 점진적 단계들로서 설명한다. 소송 사과라고 불러요. 네 가지과 열매 결과 소송사과 혹은 성문사과 수성분류 스님들을 성문 부처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공부했던 분이라서 성문 사과라고도 해요. 각 단계는 새로운 차원의 자유를 가져다준다. 첫 번째 단계는 합류라고 불린다. 자 해서 설명이 이제 다음 페이지까지 쭉 이어져요. 근데 요 내용이 우리 우리 같은 대성분류 사람들한테는 금강경 제9분의 금강경 구장에 여기에 그대로 나와요. 우리 같으면 금강경에서 쓰는 언어를 그대로 쓰면 쉽게 들어올 텐데 이걸 영어를 그냥 영어 뜻을 가지고 번역해 놓으니까 조금씩 합류라는 말로 썼는데, 합류가 아니고 금강경에는 정확하게 임류라고 나와요. 그래서 제가 그냥 써 드릴게요. 여기다가 여기서 네 가지 소송 분류에서 말하는 네 가지 수행 수행의 결과로 얻는 경지.
금강경에 나온 말이에요. 수다원 산하항 아나함.
아라한 이렇게 하고 금강정에서는 설명하기를 수다보는 입류 흐름에 들어간다. 성인이 되는 흐름에 들어간다. 임류라고 여기서는 번역을 합류라고 했죠. 근데 원래 정확한 용어 금강정에 나오는 용어는 입류 승인이 되는 흐름에 들어갔다. 그리고 사랑하는 일 한 분 왕래 왕은 간다고 내는 온다거든요. 한 번 갔다 온다. 온다거든요. 한 번 갔다 온다. 아 수다원 사다함 사다함 한 번 갔다 온다. 이 말은 한번 의식이 뭐라는 걸 봤지만 의식을 한번 알아챘지만 그래도 다시 옛날 습관에 다시 빨려 들어가서 일 왕래에 대한 그 설명에는 한 번 의식을 봐도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일곱 번 7번 생을 전전하다가 다시 다시 또 온다. 이렇게 표현을 해요. 그러니까 일곱 번 윤회한다. 이 말은 꼭 일곱 번 다시 태어난다가 아니고 그 정도로 거꾸로 진다. 일곱 번 거꾸로 많이 거꾸로 진다. 이 말이죠? 의식이 뭔지를 알아채도 여전히 옛날 습관은 왕성해서 다시 옛날 습관대로 빨려간다. 여러 번 빨려간다. 그거를 일 왕래라고 해요. 그리고 아나암은 굴레 이제는 옛날 습관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이제는 옛날 습관으로 딸려가지 않는다. 이걸 대승불교에서는 불태전이라고 불러요. 불태전 채는 다시 거꾸로 내려간다. 불태전 이제 거꾸로 내려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을 52 저 환경에 52 완전한 깨달음 52 중에서 48번째 이걸 이걸 보살 팔찌라고 부르는데 48번째 가면 그때는 이제 빡꾸가 없어 만 일곱 번째까지는 다시 다시 받고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덟 여덟 번째 지위를 아나함 불레 불태전 이렇게 불렀어요. 그걸 아라하는 무학이라고 불렀어요. 더 이상 공부할 것이 없다. 아란 수송 분류 입장에서는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 그래서 부처님도 아란이라고 불렀어요. 근데 공부를 해 보면 지금 아 이게 무슨 말이구나 하는 걸 이제 좀 알아 처음에 임유해서 사다항 인류에서 사담 이게 위에서는 두 번째 두 번째 경지를 말하고 그리고 3번 4번은 요 위에는 산은 거저 산이라고 하는 저 경지를 말한다고 할 수 있어요 말로 하자면 그래요. 근데 저는 이렇게 갖다 붙이는 건 별로 안 좋아해서 그냥 소송 사건은 소송 사건대로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구나. 또 선불교에서는 선불교대로 이렇게 표현하는구나 하고 이렇게 이해를 저는 그냥 소화를 그냥 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번 장은 깨달음의 지도를 소개하는 입장에서 그래도 가장 공정한 또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그 부처님이 하신 말씀에 기초를 한 어 그 전통인 소승불교에서 이런 네 가지 과정을 거쳐서 어 공부가 완성 성숙해져 간다 완성되어 간다 이것이 이제 충분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구나 하고 알 수 있어요. 자 그래서 하나하나 이야기하면 굉장히 그 자세하게 말하면 시간이 많이 가니까 지금 여기서 생략합니다. 생략해서 지금 읽어보세요. 네 그러면 이 깨달음의 지도를 또 카톨릭 전통에서는 어떤 식으로 또 표현했는가 그래서 카톨릭 전통에서 가장 이런 과정을 잘 이야기한 분으로 지금 여기 저자가 꼽은 사람은 스페인의 가톨릭 신비주의라고 불러요. 가톨릭 신비주의자인 십자가의 승려한 산부안 들락그루스라고 부르는 분하고 또 그분하고 같이 같이 활동한 이분은 신부님이고 그리고 같이 활동한 산타 테레사 내 아빌라라고 하는 아빌라의 성대사라고 하는 요 두 분을 인용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기독교의 묵상 전통에 따른 지도 이 깨달음의 지도에서는 더 높은 영적 수행의 길을 갈수록 깊어지는 겸손과 정화의 과정으로 그리고 있다. 겸손과 정화는 전부 아상이 타겟이에요. 결국은 가톨릭에서는 신과의 사랑의 힘으로 아상을 겸손과 정화하는가 아상이 무화가 되고 그리고 정화되어 가는 과정 그것을 말하고 있어요. 정말로 확실하게 님을 만나가지고 그 사랑을 완벽하게 사랑을 나누어서 그런데 그 후에는 신성과 연결되는 감각을 잃어버리는 길고 고통스러운 기간이 따른다고 가르친다. 그러한 어두운 밤 그래서 이거를 어두운 밤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가톨릭 신비주의에서는 어두운 밤이라고 하는 게 인간이 차라리 그냥 신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괜히 만나 가지고 그 뒤에 한번 분명히 있긴 있는데 사라져 버린 그것을 다시 찾으려고 하는 그 영혼의 어두운 밤 이거를 이제 아주 그러한 어두운 밤은 성스러운 여행에 꼭 필요한 단계라는 것이다. 성요한에 따르면 먼저 세속적인 일들에 대한 입맛을 잃는 감각의 어두운 밤이 찾아온다. 감각의 어두운 밤 이거를 선에서는 몰잠이라고 불러요. 물잠이 기간 감각의 어두운 밤 이 말은 그 앞에 나오잖아요. 이제는 세속적인 일들에 대한 입맛을 잃어버린다. 그전에는 세간에 좋은 일들이 많아 그런데 다시 말하면 상대 세계에 즐거움에 취해서 살다가 절대를 한번 만나버리면 절대는 너무너무 순수하기 때문에 또 절대 너무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2세간에서의 일들이 시들해져 버려요. 참 불행이에요. 차라리 안 만났으면 좋았을걸 그런데 너무너무 아름다운 절대 미를 본 사람은 이 상대 미에서는 만족할 수가 없게 돼요. 그러니까 하여튼 재미가 없어. 세상이 그래서 그 아까 그 영혼의 노래에서 그 신부가 신랑을 찾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전부 다 이 아름다운 세간에서 이 재밌는 일이 많은데 저 쫙 가시는 분 때문에 저렇게 없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어떤 것을 찾아서 저렇게 실성했구나 하고, 사람들이 그렇게 손가락질을 한다는 거예요. 근데 자기는 모든 사람이 다 자기를 실성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다시 시에 그러니까 참 나는 이 길을 가지 않을 수가 없다는 그래서 이게 감각의 어두운 밤이에요. 세간이 시드러지는 거 그러니까 많은 공부하는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이제 조금 맛을 보니까 그동안에 살아왔던 세간에서의 어떤 쾌락 같은 건 좀 이제 좀 시시해진다. 그래서 흔히 하시는 말씀이 그전에는 친구들 만나서 수다 뜨는 재미로 살았는데 이제는 그 수다 자리가 왠지 그 또는 느낌 뭔가가 이상한 옛날엔 나도 분명히 저랬는데 이제 그런 것보다는 자꾸 이렇게 음 말하자면 자기소개에 있는 이 불성과의 만남 그쪽으로 자꾸 신경이 가고 그쪽으로 관심이 가고 그러니까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되는 이제 그런 과정을 거친다. 그래서 재미가 없다. 사는게 재미가 없다. 다시 말하면 기존의 세간은 재미가 없는데 아직 출세간의 일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잠깐 봤는데도 봤는데 이것이 사라졌기 때문에 하여튼 굉장히 또 이쪽은 또 허무한 느낌이 아직은 있는 그러니까 참 이게 어려운 마음 공부한 사람이 한 번 닥치는 감각의 어두운 밤 이게 먼저 와요 자 그래서 이것은 심각한 상실의 기간이다. 과거에 위안을 주었던 모든 것들이 의미를 상실한다. 가장 찬란한 영광을 맛보고 나서 우리는 가슴의 길에 대해 분명히 알지도 못한 채 분명히 알지도 못한 채 왜냐하면 신랑은 또 떠나가 버리거든 또 떠나가 버리거든 알지도 못한 채 메마르고 황폐한 땅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다시 2세간은 메마르고 황폐해. 근데 출세간도 분명하지는 않아 그러니까 이런 이제 한번 딜레마에 빠집니다. 십자가에 승려하는 이 기간을 자만과 탐욕과 도요로부터 인격을 정화하는 인내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이 기간에 우리는 신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면서부터 비롯된 세상의 슬픔에 대한 깨달음을 심화시킨다. 세상의 슬픔에 대한 깨달음 참 허무한 세상이 세간의 가치들은 알고 보면 이렇게 무상하다. 세간의 무상함에 대한 그것이 이제 갈수록 더 깊어진다. 이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감각의 어두운 밤 다음에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 찾아온다. 여기서는 더욱 깊은 정화와 복종이 요구된다. 이곳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욕의 심판에서 보는 것과 같은 혼란과 비판의 연옥이다. 구약 성서 요번 하느님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정말 깊은 사람이었죠. 근데 그 요한테 어마어마한 불행이 닥치는 거죠? 정말 한 인간이 감내할 수 없을 정도의 어떤 불행이 닥쳐서 요비 그 불행을 이겨내는 과정 그게 아주 처절하게 처절하게 묘사되거든요. 이게 혼란과 비타민의 연옥이다. 가톨릭에서는 하나님을 믿어도 죽으면 바로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이 땅에서의 죄를 이렇게 갚는 이 땅에서의 죄에 대해서 그걸 갚는 지옥과 천국 사이에 연옥이라는 곳이 있었어요. 그 연옥에서 이거를 지내고 그리고 침묵을 간다고 해요. 그 교리가 그래요. 카톨릭의 교리는 사람이 죽어도 하느님의 신앙 때문에 구원은 받지만 그 잽값은 치른다. 그래서 그 기간을 연옥에서 보낸다. 그 뒤에 이제 하늘나라를 올라간다. 그렇게 돼요? 그래서 제가 스페인에 살 때 성당에 가보면 추기경 같은 분들 추기경이나 아니면 그 지역에 굉장히 유명한 귀족들 그러니까 아주 그 권세가들 이런 분들이 그 성당 바닥에 많이 묻혀 있어요. 그래서 보면 사람들이 받게 돼 있어. 그냥 성장 바닥에 추기경 무덤이 이렇게 이렇게 추기경 무덤 위에는 그 빨간 모자를 이렇게 추기경이 평소에 쓰던 빨간 모자 탄탄한 그 모자 밑에 있는 분은 추기경이야. 그런 거 실제로 많이 봐요. 그래서 이제 궁금하니까 물어보잖아요. 아니, 그 높은 추기경께서 왜 이렇게 아무나 막 밟고 다니는 아무나 막 밟는 거예요. 그러니까 왜 여기에 묻혀 있습니까? 실제로 묻혀 있어요. 그래서 물어보면 하는 소리가 추기경 님께서 돌아가시고 성당 바닥에 묻혀서 사람들이 밟아주면 여노계의 시간이 짧아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혼란과 비판의 연옥 이 말은 영혼의 어두운 밤은 죽어서 가야 할 연옥을 살아서 겪는다는 뜻이에요. 세상에 공짜가 없다. 믿음으로서 구원은 받았지만 그러나 죄값은 치른다. 이런 개념이에요. 그게 감각의 어두운 마음과 영혼의 어두운 방 감각의 어두운 방은 이 세계가 별로 재미가 없어지는 그리고 영혼의 어두운 방은 저 세계가 안 나타나는 한번 말씀 봤는데 사라지고 난 뒤에 다시 안 나타나 하여튼 환장하고 미술직 일치 일적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이거 참 많은 사람들이 겪어요. 이 공부 괜히 했다. 예를 들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지. 괜히 했다 싶은 그런 게 있어요. 자 그래서 영혼의 어두운 밤에 찾아온다. 이거는 혼란과 비탄의 영역이다. 이 정화의 가정으로부터 오로지 신만을 향하는 열정적 사랑과 열망이 일어난다. 그래서 그래서 이 저 십자가의 승려한이나 이런 분들의 노래 내용들을 보면 전부 다 신부와 신랑 사이의 사랑의 노래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리고 이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 사랑은 더욱더 커져요. 이해되나요? 그게 신앙의 동력이라고 보는 거예요. 따지고 보면 이게 지금 카톨릭에서만 이런 게 아니고 한용원 스님의 님의 침묵 내 침묵이 지금 영혼의 어두운 밤이다. 날카로운 첫 기세의 추억 그리고 또 남님 그 소식이 없어. 근데 날카로운 츠키스의 추억은 있다 이거예요. 그것 때문에 세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런데 니네 자치는 님은 침묵하고 있다. 그 과정을 이겨내는 게 이제 수행이라고 하죠. 이게 지금 카톨릭이나 또 한영훈의 니매침묵이나 이런 것들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영혼의 어두운 밤을 잘 겪어내는 이에게는 커다란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 성묘하는 이 찬란한 어둠에 깊이 복종한 영혼에게 부어지는 엄청난 엄청난 엄청나게 달콤함은 경명하기가 힘들다고 노래합니다. 이 긴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겸손과 겸손한 인내와 끈기이다. 하여튼 겸손한 인내와 끈기 이거를 풀기 위해서는 감인대라고 감은 감당하고 요 기간을 감당하고 이는 참고 되는 기다림 감인대의 기간 승려는 이렇게 말한다. 가슴의 사랑은 어두운 밤길을 인도하는 촛불이다. 그래서 요즘 역설적으로 철저한 신부님인데, 누구보다도 뜨겁고 뜨거웠던 사랑을 한 사람 근데 그것이 지금 마음 공부하는 사람이 지금 겪게 되는 이 세간으로부터 이해 못 받는 그런데 아직까지 깨달음은 분명하지 않는 그 과도기에 겪게 되는 어려움을 이런 식으로 표현을 했어요. 자 하여튼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 중도 불의 연기 진리 불성 1심 의식 첫 번째 단계는 영적 깨달음이 이런 거구나 하고 한번 확인하는 작업은 필요해요. 그러니까 이것이라고도 표현하는 거 그런데 두 번째 단계에서는 그것이 자기한테 어느새 분별이라고 하는 아르마리가 된다는 사실을 한번 이제 자각을 해야 돼요. 그러니까 자기가 한 번 이거구나 하고 의식이라는 것이 이거구나 하고 하면 그다음에는 의식이라고 하는 아르마리라는 것이 자기한테 또 생기게 돼요. 그래서 진리가 이런 거구나 의식이구나. 중도구나. 불이구나 하는 요거 본질이구나 절대구나하는 그것이 확인된 사람한테는 그것이 또 하나의 그것이 되어가지고 자기도 모르게 그것이 어 분별이라고 하는 아르마리가 되어 버려요. 그거를 한번 깨닫는 것이 두 번째 라는 거예요. 그래서 영적 깨달음과 일상의 빨랫감을 포용하는 양쪽을 포용하는 지혜는 뭐냐면 처음에는 이걸 깨달아야 되지만 두 번째는 이것이 분별식이라는 사실을 이런 것이 따로 없다는 사실을 다시 말하면 핵심이 이것들이 홍하열 색소 때문에 걱정되신다면 이 성분을 놓치면 안 됩니다. 이걸 먹고 당화혈색소가 7.2에서 5.3까지 확 떨어졌어요. 카이스트 박사들이 24년 동안 연구한 RG3 사포닌은 혈당을 불안하게 만드는 인슐린 저항성을 개선해 줍니다. 또 당뇨 합병증과 연결된 산화 스트레스까지 줄여서 당뇨 관리의 핵심을 정확히 겨냥하죠. 절대라는 것이 어떤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번 철저하게 자기가 한번 이렇게 깨달을 때 그러면 어떤 것이니 의식이니 하는 게 전부 다 이게 아르바이트구나. 그래서 그것을 한번 자기가 철저하게 깨달을 때 놀랍게도 일상의 빨랫감이 하나하나가 일상의 빨랫감 하나하나가 영적 깨달음이고 중도고 그리고 연기고 질리고 불순이고 일심이고 시기 일상에 하나하나가 이때 일상에 하나하나 빨랫감은 귀찮은 거 또 괴로운 거 뭐 내가 평소에 싫어하는 것들까지 다 포함해서 좋은 것뿐만 아니고, 나쁜 것도 일상의 빨랫감 그게 깨달음이 되는 거예요. 이게 지금 둘을 양변을 포용하는 지혜가 그래서 결국에는 우리 공부는 분별식이 사라지는 거예요. 우리 공부는 끝내 깨달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깨달음은 지금 이 세계에 먼지티클 하나까지 기분 나쁜 감정 하나까지 전부 깨달음이에요.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이 그냥 의식이에요. 근데 그 의식이 이런 것으로 이런 것이다가 아니라는 거죠? 어떤 것이 아니라는 거지 것이라는 것이 근데 우리는 자기 욕심에 의해서 애고는 항상 어떤 것으로 이걸 잡으려고 해요. 그래서 한번 의식을 알아챈 사람도 깨달은 사람도 자기도 모르게 그 의식을 무언가로 만들어서 자기 나름대로 남은 몰라도 혼자 자기 안에는 꼬불쳐 줄까 그게 들킨다 음 그래서 지금 영적 깨달음과 일상의 빨랫감이라고 하는 이 양쪽을 고용하는 지혜가 있을까 뭐냐면 처음에는 아 이것이 영적 깨달음이구나. 이것이 의식이구나 하는 건 알아채야 되지만 견성해야 되지만 그 변성이 사라지는 거다. 그러니까 그것이 있으면 분별이 안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체험 또 또 자기도 모르게 익으라고 하는 뭐가 있어요. 하여튼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꾸 이렇게 무언가를 지려고 해요. 그러니까 이런저런 모든 체험도 이런저런 개념들 관념 아르말이라고 불러요.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결국에는 아니구나 하는 최종적인 확인이 일어날 때 그때 분별이 사라져요. 분별이 사라지면 그냥 모든 것이 되어 버려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리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되어 버려요. 그렇게 해서 그 모든 거 속에는 번뇌 망상과 괴로움까지 포함되기 때문에 괴로움의 소멸이 일어나요. 괴로움이 괴로움이 아니고 괴로움이 괴로움이 아니고 바로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그 순간 괴로움으로 나타난 의식의 출현인 거예요. 괴로움조차도 여기에 예외가 없어져 버리는 그러니까 괴로움이 오히려 깨달음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까 깨달음이라는 것이 특정한 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깨달음이 되어 버리는 정말 원유가 말한 일심이라고 합니다. 한계의식이라고 하는가 이것이 완전히 자기한테서 구체적으로 일어날 때 모든 종류의 게임이 끝나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신탁의 성령 안에 그 시도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느냐면 첫날 밤에 깨어나서 보니까 신랑이 떠나고 없어 가지고 막 미* 듯이 찾아내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구비 구비 구비 구비 구비를 넘기다가 다시 만나요. 그래서 그러고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 그러니까 그 깨달음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의식이라는 것이 이거구나하고 알아채도 그 의식은 사라져 버려요. 왜냐하면 이거구나 하는 것이 아직 애국이기 때문에 에고의 대상으로서의 깨달음은 사라지게 돼 있어요. 생명하게 돼 있어요. 근데 그 애구의 모든 욕심 분별심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여러분한테 배운 용어가 있어요. 대구에 가장 큰 특징은 제가 여러분한테 배운 거예요. 대구의 가장 큰 특징은 지랄이에요. 지랄 지랄총량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 애고의 모든 지랄이 사그라들 때 항복할 때 밑바닥을 칠 때 이렇게까지 표현할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그럴 때 애고가 정말로 모든 걸 다 놓을 때 먹었던 걸 진짜 포기할 때 뜻밖에도 전체가 다 이게 님이라고 한 사실 전체가 다 한계 의식이라고 하는 이 사실 그러니까 그동안에 내가 왕따시켰던 우리 각자 간 자기도 모르게 왕따 시켰던 나의 인생 파티에 초대하지 제발 오지 말라고 왕따시켰던 것을 내가 받아들이게 될 때 이게 한조각으로 한조각의 의식으로 일심으로 완성되는 이야기 이게 지금 동서 고전의 수많은 에피소드로 펼쳐져 있지만 결국 이거 하나를 우리가 공부하는 이야기예요. 깨달음이란 이렇게 멋있을 거야 하는가 그 알음알이가 사라지면 일상의 발랫감이 깨달음이에요. 기차나 죽겠는 정말 진부하고 지루하고 보잘것 없는 자기의 온갖 생각 감정과 또 자기의 못난 점 있죠. 여러분 없어요. 저는 천지 100가리인데 그거 하나하나가 전부 의식이 근무양으로 나타난 거야. 그러니까 금강경에서 이름이 종이지 실제로는 의식이 나타난 거다. 괴로움은 괴로움이 아니라 이름이 괴로움이지 실제로는 한계의식이 평등한 이것이 온갖 모양으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그걸 정말로 내가 받아들일 때 언제 받아들이나. 이 정식이 행복할 때 에고의 지나리 그칠 때 언제 그치느냐 해보고 포기할 때가 와요. 지난이 온갖 지달을 하다가 드디어 포기할 때가와 그때 뜻밖에도 반전이 일어나서 모든 것이 일상의 빨랫감이 영적 깨달음이 되는 거예요. 이게 완전히 여기에 충돌하고 그러니까 여기에 지금 일어나는 이제 그 음 깨달음의 지도입니다. 방금 드린 말씀이 모든 현상 하나하나가 그대로 본질이다. 만법 규율이 일개합체다. 만법 규율은 색적 시공이고 만법 규율은 모든 현상은 본질로 돌아간다잖아요. 그러면 색적 시공 색이 공이다. 근데 끝이 아니고 공적 시세 본질은 또 다시 색으로 나타납니다. 이게 지금 거의 동시에 색적 시공 공적 시색이 거의 동시에 지금 같이 이렇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참 이걸 어디까지를 본질이다. 어디까지 현상이다 할 수 없이 완전히 적으로 딱 붙어있다. 이게 딱 붙어있다. 이게 이렇게 되려면 결국 분별이라고 하는 현상이니 본질이니 하는 이 분별이라고 하는 나이의 오랜 습관이 한 번은 이렇게 숨이 죽어야 된다 쉬워져야 한다. 이제 그 과정이 그러려면 한번 이게 의식이구나 하는 걸 깨닫고 다음에 그 의식의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사라지고 지금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의식이 되어 버리는 그렇게 해서 현상과 본질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버리는 이제 고객 공부 과정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새벽 배를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첫 마디가 씨였다고 합니다. 이 슬픔에 집을 지은 자 더 이상 지지 않게 하리라. 이게 습단이 파타라고 하는 거기에 나오는 대목이거든요. 부처님께서 요 앞에 생략된 게 뭐냐면 이슬품의 집을 지은 자 위에 두 줄이 생각돼 있어요? 왜냐하면 나는 너를 보았다 해요. 첫 구절이 나는 너를 보았다. 이때 너는 분별심이에요. 분별심이 있을 때는 나 따로 별 따로였어. 근데 나는 너를 보았다. 분별심을 보았다. 그리고 정의하기를 분별심을 뭐라고 했느냐면 집을 짓는 자예요. 그랬거든요. 집을 짓는 자예요. 나로 하여금 분별에 떨어뜨려서 업을 짓게 만드는 자예요. 그러니까 나는 너를 보았다 집을 짓는 자예요. 이 슬픔에 집을 지은 자 더 이상 짓지 않게 하리라. 여기에 지금 부처님의 고도송이라고 알려져 있는 수단이 파타에 나오는 내용들이에요. 조금 더 길어요. 내용은 근데 압축하면 제 것만 해요. 나는 너를 보았다예요. 그러니까 자기 분별을 한번 봐야 돼. 부처님의 깨달음은 자기 분별을 본 거예요. 그 분별부터 벗어나면 전체가 그냥 하나라서 지금 대열이 하여튼 별 별이야. 그 순간에 부처님이 별을 봤을 때 자기라는 것이 있는 게 아니고 이게 별로 그냥 나온 거예요. 이게 분별이 들어가면 부처님이 있고 별이 있고 하겠지만 분별이 없어지면 그 순간 별 하나만 존재하지 아무것도 나머지는 그 순간에는 없지 않나요? 그러니까 지금 창조주가 피조물이 별로 드러나서 별 자체가 피조물이 그대로 창조주가 된 거 사실은 지금도 그래요. 부처님이 별을 볼 때만 그런 게 아니고 지금도 눈앞에 펼쳐진 이것밖에 없어. 이것이 그냥 있는 그대로 불이 중도의 실상이에요. 이것이 금 모양은 이걸 이제 해석을 하면 금 모양은 지금 사람들의 집합이지만 속은 한계 의식이 지금 요렇게 이 모양과 소리와 이런 생각 감정을 이렇게 지금 드러났다가 돌아갔다 하는 지금 그거 하나뿐이다. 이거죠? 그래서 지금 요런 지도보다는 쉬다고 하는 것은 그런 식으로 시가 오히려 실상을 잘 말해 준다. 또 인도시 미주의자인 가게르는 또 이 진흙 같은 이 몸뚱이가 그대로 의식이 이렇게 이 모양으로 드러난 바람을 또 이렇게 일러주고 또 그 밑에는 등가에서는 실질적인 공안의 언어로서 깨달음을 읽어낸다. 수행자가 심오한 식구나. 공안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떠올리며 그것을 참구하면 마침내 마음이 활짝 열리게 된다. 저 같은 경우는 불교 처음 만났을 때 처음 절에 가서 부패에 참석했을 때 그때 들은 구절이 아니? 가니까 모든 법회에 반야신경부터 외우기 시작하더라고요. 근데 반자신경을 이렇게 들어보니까 마침 또 그 하여튼 저한테는 그냥 처음 봤는데 어느 어느 그 줄에서는 보살님이라 그러죠. 어 그분이 이렇게 반야신경을 툭 주더라고요. 저한테 그래서 펴가지고 딱 주더라고요. 보니까 그대로 읽어. 관자재보살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읽어요. 그쪽부터 하여튼 듣다 보니까 색적 시공이 딱 나오더라고 저한테는 그게 그때 딱 걸렸어요. 왜냐하면 그래서 제가 조금 알고 알고 간 입장이니까 색이란 말을 알잖아요. 눈에 지금 보이는 게 색이잖아요. 근데 공이라는 말을 모르겠더라고 공을 낳는데 시간 많이 걸렸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지금 어느 한 구절 불량이든 의록이든 뭐 한 구절이 우리한테는 딱 걸리게 돼 있어요. 인 저는 걸렸어요. 딱 걸리더라고요. 그러니까 그게 이제 공안 같은 거예요. 근데 그게 풀어지는데, 시간이 이제 오래 걸리는 거야. 그러니까 저의 불교 공부는 딴 게 아니고 색적 시공 공적 시세를 내가 이렇게 몸으로 완벽하게 느끼는데 이것이 저의 두려움 업무라고 합니다. 나머지는 그냥 군더더기죠. 지금 색적 시공 공적 실적이라고 하는 반야신경에 처음 부패 갔을 때 그 구절이 그대로 딱와 가지고 풀리지가 않으니까 이거 푸는데 지금 시간이 이렇게 많이 걸린 거죠. 네 아마 여러분도 비슷할 것 같아요. 이 책에서도 수많은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그 에피소드가 나한테 소화가 되느냐 안 되느냐 하면 소화 안 되면 전부 공간들이에요. 말하자면 자 그래서 끊임없이 반복해서 떠올리며 그것을 참고하면 마침내 마음이 활짝 열리게 된다. 그런 후에는 수행자가 발견한 자유를 더욱 깊게 체득하게끔 하는 혹은 잘못된 이해로 빠져들 수 있는 부분에서 길을 밝혀 줄 다른 공간들이 주어진다. 이것들이 모여서 스윙하는 삶에 시적인 지도가 그려진다. 이런 공안과 일화들은 수행자로 하여금 깨달음의 세계를 다음에 공안들과 유행되게 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선불교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수많은 공안들이 있거든요.
공안을 모아놓은 게 공간 48칙을 모아놓은 게
무분관
100칙을 모아놓은 게
벽암록
지금 저기 써 있는 벽암 벽암에서 선책 벽암록 그리고 우리 보조공사의 저자인 진각해심이 모아놓은 1403개인가 공안 모아놓은 선문염송
이라고 하는 아마 세계적인 책이에요. 모든 공원을 다 모아놨어요. 그냥 모아놓은 게 아니고 더라펠 잣나무 그러면 잣나무에 대해서 코멘트해 놓은 모든 사람 걸 다 모아놨으니까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책이죠. 그게 한국의 송강사의 진강의 신국사가 모아놓은 성문 영송이거든요. 그렇다면 그 많은 공안이 뭘 말하는가 계단음은 특정 깨달음이 있는 게 아니고 분별식이 없어지면 모든 것이 깨달음이 된다. 이게 오늘의 주제예요. 다시 깨달음이란 특정한 어떤 것이 아니고 다만 나의 분별식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깨달음이다. 처음부터 영원히 모든 것이 다 깨달음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뭐냐 하면 분별식이 어떻게 하면 사라지느냐의 문제잖아요. 그리고 얼마만큼 철저하게 사라지느냐의 문제잖아요. 그러니까 한 번 분변식이 사라진 사람한테는 그 분별식의 찌꺼기를 설거지해 주는 일 그게 공안이라는 것들이에요. 그러니까 정말로 나의 분별심을 내가 한번 철저하게 이겨내 본 사람한테는 14003가지. 혹은 1700가지 전등록에는 1700가지 에피소드가 나오니까 그중에 핵심을 뽑아 놓은 게 143개의 선문 염송이고 그러니까 그 모든 것들이 나의 분별식을 건드려요. 다시 말하면 내가 분별식이 남아 있는 한은 안 풀려? 한번 볼까요? 그중에 몇 개월 집 이 사람이 해놨잖아요. 예를 들어서 이런 공간들 마주치는 데 보세요. 선산은 이렇게 다그친다. 물에 젖지 말고 바다 밑에서 진주를 캐워라. 그러니까 물에 젖지 말고 바다 밑에서 진지를 캐와라. 이럴 때 일대일로 만나가지고 이런 말을 딱 들으면 아직 분별식이 남아 있는 사람은 얼어붙어 버려요. 이해되나요? 그다음 보세요. 혹은 한솥 한 손바닥이 내는 손뼉 소리를 내어 보라 소리 안 나는데 뒤에 선생님 지금 읽고 계시는데 소리가 안 나는데요. 자 혹은 9분 9분 그 속에 궂은 것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이런 질문을 탁 탁 마주치면 다박이가 분별식임이 있는 사람은 답을 하기가 답을 하기가 어렵다. 이거예요 들어오나요? 이런 게 지금 수없이 많다. 이거예요. 그러면 만약에 분별심이 자기한테 이런 없는 사람은 보세요. 이 말에 안 달려가요. 분별심이 자기한테 없으면 이런 말에 안 달려가 1700개건 1400세. 개건와 만객은 10만 개건 모든 공안에 뭐든 말해. 내가 분배심이 없으면 그 말에 안 딸려가는데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이러이러하는 데는 안 딸려가는데 뜻밖에도 경우가 그랬거든 경호 스님이 공한 집을 다 본 거예요 봤더니 알겠어 그래서 소아가 돼. 그런데 다른 건 다 소화가 되는데 안 딸려가는데 하나에 딱 달려가 뭐냐면 영은 영원 선사가 말한 영어 선사는 복사꽃 피는 걸 보고 깨달은 사람이에요. 근데 그 사람이 말한 나귀의 일이 다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왔다. 여사님이고 바사도레 그러니까 이 글자가 이 글자가 다른 거는 다 자기가 안 딸려가는데 이 글씨한테는 탁 막히는 거예요. 그래서 경어가 그걸 지고 어 그 화두를 지고 수행했거든요. 그러다가 엉뚱한 말에 한마디 얘기 딱 깨졌지. 그러니까 지금 수많은 공한 화두가 있는데 모든 공안 화두는 분별심을 다 끌어버리는 거예요. 그 분별심이 이거 앞에서 꼼짝을 못해. 근데 실력이 꽤 되는 사람은 자기가 이런 걸 넘어 본 사람은 그중에서 이러이러한 것들은 문제가 안 되는데 자기도 모르게 어디에서 탁 걸리게 돼 있어요? 그러면 그걸 가지고 또 또 창고를 하는 거지.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 분별심이 없는 사람한테는 그 어떤 것도 걸리지 않게 되고 보통 사람한테는 100% 다 걸려버려요. 여러분 지금 풀 수 있어요. 물속에 올해 젖지 말고 바다 밑에서 진주를 캐워라 할 수 있어요. 알겠어요. 신청해야 된다니까 그냥 한 소리가 아니라니까요. 그러니까 이런 말들을 딱 질문을 일대일로 딱 당하면 그냥 얼어붙어버려요. 꼼짝을 못해. 그래서 지금 자 제가 제가 이제 도움을 받은 한 구절 이런 저런 공안집에서 지금 별거 아닌데 노파가 암자를 불태웠다 하는 공안이 제일 어려운 공간 중에 하나예요. 그게 책에 제일 마지막에 나와요. 유명하잖아요. 언어 공부 잘하는 스님을 만나서 언어 녹화가 집을 지어서 그 손님을 모셔가지고 10년 동안 정성껏 공략을 올리면서 잘 외호해 가지고 스님의 공부를 도왔다. 10년 만에 스님의 실력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자기 딸에게 음식을 알아내 가지고 공량 올리고 딸한테 식사하시고 난 뒤에 스님 품에 탁 안겨가지고 이럴 때는 어떠십니까? 스님하고 물어봐라 그랬더니 딸이 탁 이렇게 안겨가지고 했더니 스님이 그 고목 그 차가운 바위에 뭐가 뭐 구멍 고무기 나무 떨어지는 것 같다. 하여튼 차가운 바위에 고목나무가 닿은 것 같다. 하여튼 그런 식으로 표현을 했어요. 그래가지고 그 말을 그대로 다른 감동받았다는 거죠? 이렇게 이팔 청순이 안겼는데도 스님이 미동도 하지 않고 차가운 바위 같다. 이렇게 했으니까 이제 그 말을 가서 엄마한테 했더니 엄마가 그런 그런 미* 놈을 내가 지금까지 내가 시봉을 했단 말이냐 하고 당장 쫓아내고 불을 질러 버렸다. 이게 타자 소암이라고 해서 도파가 남자의 불을 질렀다라고 하는 공안이에요. 그러면 이제 그 공안에 마지막 질문은 그 스님이 뭐라고 말을 해야지 안 쫓겨났을까 하는 이제 내용이다 이거예요. 여러분 풀 수 있겠어요? 뭐라고 했어야 그 그 스님이 안 쫓겨났겠어요? 그러니까 지금 보세요. 이제 우리 공부가 지금 초보자 공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말에 모든 공안이 지금 이 파자소암이 왜 어려운 공간이냐면 짧지가 않고 길어요. 스토리가 또 그럴 듯하게 지금 스토리가 쭉 전개되지 않나요? 그러면 걸려든다. 이거예요. 무엇이 걸려드는가 분별식이 어떻게 하면 안좋게 날 것이냐 하는 그 질문에 분별식이 보통 사람들은 거의 다 걸려들어서 뭐라 뭐라고 지금 지금 부살님 한 것처럼 한마디 뭔가 입을 댄다 이거예요. 지금 모든 공안이 공간 자체는 아무런 뜻이 없어요. 그럴 듯한 이야기로 분별심을 움직여 가지고 뭔가를 분별식으로 하여금 이렇게 입을 되게 만드는 게 공안인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봉안의 뜻은 지금 물속에 들어가서 진지를 캐워라. 이런 거 있잖아요. 모든 공안에 뜻은 우리로 하여금 이 분별식을 걸려들게 만드는 것일 뿐인 거예요. 그러면 걸려들지 않는 게 답이에요. 얼마나 간단해요? 지금 제가 누설해서 비밀을 이게 근데 이런 말 들어도 소용이 없더라고 때가 되어야 이게 머리도 안 들어오고 쑥 내려와서 발바닥까지 이게 이 말이 들어오지? 보통 때는 전부 다 들어도 또 또 솟고 또 속고 또 섞고 또 속아 결국에는 모든 공안이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이 여러분 속이는 거예요. 뭘 속이는가 분별심을 그러면 모든 공간을 제시할 때는 그 분별심을 건드리는 거거든 그러면 분별심이 한번 완전하게 소화된 사람한테는 공안이 공안이 아니라 아무런 뜻이 없어 말해. 그래서 숙제 그냥 지나가고 그냥 소위 말하는 상대나. 나나 서로 간에 지금 살아서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살아있다는 이것만 확인하면 되는 거지. 그 말 뜻에 따라가지 않는다는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