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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된 사울
삼상 10:17-27
17 사무엘이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 여호와 앞에 모으고
18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고 너희를 애굽인의 손과 너희를 압제하는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셨거늘
19 너희는 너희를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너희의 하나님을 오늘 버리고 이르기를 우리 위에 왕을 세우라 하는도다 그런즉 이제 너희의 지파대로 천 명씩 여호와 앞에 나아오라 하고
20 사무엘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21 베냐민 지파를 그들의 가족별로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으나 그를 찾아도 찾지 못한지라
22 그러므로 그들이 또 여호와께 묻되 그 사람이 여기 왔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그가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었느니라 하셨더라
23 그들이 달려 가서 거기서 그를 데려오매 그가 백성 중에 서니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 컸더라
24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
25 사무엘이 나라의 제도를 백성에게 말하고 책에 기록하여 여호와 앞에 두고 모든 백성을 각기 집으로 보내매
26 사울도 기브아 자기 집으로 갈 때에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과 함께 갔느니라
27 어떤 불량배는 이르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바치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잠잠하였더라
삼상 10:17-27 / [왕으로 추대되는 사울]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왕을 세워 달라고 아우성을 치자 사무엘이 마침내 민족 대회를 소집하였다. 성년이 된 남자들은 모두 미스바 성소로 모였다. 18) 거기서 사무엘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바로 여러분의 왕이셨습니다. 그분이 애굽에서 여러분을 해방시켜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뿐입니까? 여러분을 사방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분이 아닙니까? 19) 여러분이 환란과 고통에 빠질 때마다 그분은 언제나 여러분을 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제 와서는 여러분이 그분을 저버리고 이방족속들과 똑같이 왕을 세워 달라고 아우성 쳤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의 소원대로 왕을 세워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지파와 씨족별로 줄을 지어 여호와 앞으로 나와 서십시오!' 20) 사무엘이 우선 각 지파의 우두머리들을 여호와 앞으로 불러내어 제비를 뽑게 하였다. 그러자 베냐민 지파가 뽑혔다. 21) 그 다음에 사무엘은 베냐민 지파의 씨족 대표자들을 여호와 앞으로 불러내어 제비를 뽑게 하였다. 그러자 마드리 집안이 뽑혔다. 그 다음에 사무엘이 마드리 집안의 남자들을 여호와 앞으로 불러내어 제비를 뽑게 하였다. 그러자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다. 그래서 사울을 앞으로 나오게 하였으나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22) 온 백성이 여호와께 여쭈어 보았다. `왕이 될 사람이 오늘 이곳에 와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셨다. `그는 지금 마차 사이에 숨어 있으니 찾으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23) 사람들이 뛰어가 마차의 짐짝 사이에 숨어 있는 그를 찾아 데리고 왔다. 그가 사람들 사이로 들어와 서자 그의 키가 온 백성보다 어깨 위로는 더 컸다. 24) 사무엘이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을 보시오! 그는 여호와께서 뽑아 주신 왕으로, 이스라엘의 온 백성 가운데 이처럼 잘 생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똑똑히 잘들 보시오!' 그러자 온 백성이 `임금님 만세!'를 외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25) 사무엘은 왕에게 어떤 특권이 있는가를 온 백성에게 다시 한 번 알려 주고, 그것을 기록하여 미스바의 성소에 보관하였다. 사무엘이 민족대회를 해산시키자 백성들은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26) 사울도 기브아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스라엘의 군인들 가운데서 마음속으로 여호와께 감동받은 용감한 자들이 그를 경호하면서 따라갔다. 27) 그러나 백성 가운데는 소수의 불량배도 있어서 사울을 조롱하였다. `저러한 자가 우리를 외세에서 해방시켜 강대국으로 부흥시켜 주겠는가?' 그들은 이렇게 사울을 멸시하고 비방하면서 그에게 예물도 바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울은 그러한 소리에 대하여 일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을 미스바로 모으고 그들이 요구한 왕을 세우기 위해 제비를 뽑게 합니다.
하나님의 경고(17-19)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애굽인의 손과 압제하는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내어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져버린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경고의 말씀을(8:10-18) 들으면서도 뜻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고의 말씀과 함께 그들의 요구를 따라 왕을 세우도록 허락하십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제비뽑기(20-21) 이미 사울은 사무엘을 통해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제비뽑기라는 적법한 절차를 통해 그들이 원하는 왕을 선택하게 하십니다. 사무엘은 각 지파별로 천 명씩 나오게 한 후 제비를 뽑자 베냐민 지파가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 중 마드리의 가족이 뽑히고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사울은 이미 자신이 왕으로 택함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를 감추는 겸손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왕에 즉위한 사울(22-25) 백성들이 사울은 찾을 수 없자 여호와께 묻기를 “그 사람이 여기 왔나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가 짐 보따리들 사이 숨었느니라”고 알려주십니다. 마침내 백성들 앞에 선 사울은 다른 사람들보다 어깨 위만큼 키가 컸고 백성들이 기대했던 인물처럼 보였습니다.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보느냐고 말하며 모든 백성 중에 이보다 잘난 이가 없다고 선포하자 모든 백성들이 만세를 외쳐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인물됨을 평가합니다.
두 가지 반응(26-27) 사무엘은 왕을 선출한 후에 백성들에게 왕정 시대의 제도를 알리고 책에도 기록하여 여호와 앞에 두고 백성들을 돌려보냅니다. 왕위즉위식을 마치고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은 사울과 함께 갔지만 어떤 불량배는 멸시하며 예물조차도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잠잠하였습니다. 사울의 초기 통치 기간 동안에는 다툼이 없었고 겸손한 모습을 보입니다.
적 용 :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겸손이 아닌 진정한 겸손이 무엇일까요?
제 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에 참전하여 죽었습니다. 각 지방의 젊은이들이 징집영장을 받으면 큰 도시로 집결해서 밤늦게 야간열차를 타고 전쟁터로 떠났습니다. 그 때문에 워싱턴의 기차역에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몰려들 때면 시민들이 나와서 이들에게 차를 대접하며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민들 가운데 밤늦게까지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봉사하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절뚝거리는 다리로 따뜻한 차를 들고 다니며 한 사람이라도 더 대접해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노인을 알아보고 놀랐습니다. 자신에게 따뜻한 차를 타주는 노인은 다름 아닌 루스벨트 대통령이었기 때문입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아마비로 불편했던 몸을 무릅쓰고 밤마다 기차 정거장에 나와서 전쟁터로 떠나는 젊은이들에게 차를 타주었던 것입니다.
호크마 주석
=====10:17
사무엘이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 - '미스바'(Mizpah)는 (1)이스라엘 온 백성이 모이기 좋은 지리적 이점이 있으며(7:5) (2)이스라엘을 오랜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게 했었던 기념비적 장소(7:6)라는 점들 때문에, 사무엘에 의하여 이스라엘이 집합할 곳으로 다시 선택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백성'은 실제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표하는 각 지파의 대표자들일 것이다. 여호와 앞에 모으고 -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 앞에'란 표현은 종종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나 성막 또는 대제사장의 우림이나 둠밈 앞에 모이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의 선출을 위해 제비 뽑으려고 모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아마도 '우림과 둠밈'(출 28:30 주석 참조)을 대제사장이 가지고 모인 듯하다(Pulpit Commentary). 아울러 이것은, 사무엘의 백성 소집이 신적인 권위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10:18
본절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에게 베푸셨던 위대한 구원의 은총을 언급하고 있다. 사무엘은 이같은 언급을 통해 (1)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방의 왕들로부터 구원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며 (2)또한 그 사실을 보여 줌으로써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한 행동이 지극히 어리석고 경솔한 것이었음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10:19
하나님을...버리고...왕을 세우라 하도다 - 여기서 사무엘은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의 행위는 곧 하나님께 대한 반역 행위임을 다시 한번 분명히 밝히고 있다(8:7). 아울러 사무엘은 여기서 왕을 요구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므로, 장차 그 왕으로 인해서 당할 고통도 그들 스스로가 친히 담당해야 될 것을 암시적으로 경고하고 있다(8:9-18). 지파대로 천명씩...나아오라 - 히브리 본문에는 '지파대로'(* , 레쉬브테켐) 다음에 '그리고 가족대로'(* , 우레알페켐)라는 말이 있다. 따라서 이것은 먼저 각 지파를 구별하고, 또가한 각 지파는 각 지파에 속한 가족을 그 가족대로 구분하여야 할 것을 가리킨다.
=====10:20
본문에는 어느 지파, 그리고 그 지파의 어떤 가족, 또한 그 가족의 어떤 인물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울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제비를 뽑는 장면이 언급되고 있다. 여기와 같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는 인물을 선택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제비뽑기가 성경에 많이 언급되고 있다(수 18:6,8;욘 1:7;행 1:20-26). 성경에 언급된 이같은 제비 뽑기 행위는 그 결과가 전적으로 신적인 섭리에 따라 나타난다는 확신에 근거한 것이었다(잠 16:33). 수 14:2;18:10;민 26:55 주석 참조. 한편 혹자(H.W.Hertzberg)는 여기의 제비뽑기가 우림과 둠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묻는 방식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나, 그것은 타당치 않다(F.R.Fay). 왜냐하면 '우림과 둠밈'은 특별한 사항에 대한 가부(可否)의 뜻만을 알 수 있는 신적인 계시의 통로였기 때문이다.
=====10:21
베냐민 지파 - 9:1 주석 참조. 마드리의 가족 - '마드리'(Matri)는 '여호와의 비'란 뜻의 이름으로, 사울 가문의 족장이다(Davidson).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 사람의 이름은 다시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혹자(Ewald)는 '비그리'란 이름이 잘못 발음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기도 한다.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으나 - 제비는 마드리의 가족 중 다시 기드의 집으로 떨어졌고, 마침내 기스의 집안 중 사울에게 떨어짐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다(9:16). 즉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비뽑기가 신적인 뜻에 따라 결정된다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당시 하나님께서는 종종 그러한 방법으로 역사하셨으므로(민 26:55;수 14:2;18:10), 여기서 사울이 제비에 뽑힌것은 하나님의 뜻이자, 또한 사울 왕국의 정통성이 확보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10:22
여호와께 묻되 - 원래 이스라엘은 대제사장의 의복(에봇) 가슴에 부착된(레 8:8) 우림과 둠밈으로 여호와의 뜻을 물었었다(민 27:21). 따라서 여기서도 사울의 존재 유무(有無)에 대해서 대제사장의 '우림과 둠밈'(출 28:30 주석 참조)을 사용했을 것이다(Keil, Smith).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1)그당시 대제사장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았으며(4:18), (2)우림과 둠밈은 단지 가부(可否)를 묻기 위해 사용되는 것으로서, 사울이 어디에 숨었는지를 알기 위한 수단으로써는 적절치 않으며(20절), (3)또한 여기서 우림과 둠밈의 사용을 특별히 언급치 않았다는 점에서, 어쩌면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질문되고 응답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가 행구 사이에 숨었느니라 - 사울은 사무엘의 기름 부음(1절)과 여러가지 징조들(2-6)을 통해 이미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하나님께 선택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이같은 행동은 (1)자신이 왕으로 세워지는 과정에서 혹 일어날지도 모를 여러 가지 사건들을 두려워 했거나, (2)아니면 그의 소심하고 부끄러워하는 성격 때문이었거나, (3)아니면 그의 겸손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행구'(* , 켈림)는 '물건들'이란 뜻으로서, 여기서는 아마도 미스바에 모인 백성들의 '여행용 짐꾸러미'(baggage)를 가리키는 듯하다(Keil).
=====10:23,24
어깨 위나 더 크더라 - 9:2 주석 참조. 여호와의 택하신 자 - 사무엘은 이미 사울이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선택 되었음을 알고 있었지만(9:15-17), 제비의 방식에 의해서 그가 뽑히자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음을 완전히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 외적 풍채만을 놓고 볼 때 사울이 이스라엘에서 가장 훌륭하였음을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이같은 사울의 늠름한 외적 풍채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충분히 매혹할만 하였다(9:2).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 - '왕의 만세'(* , 예히 함멜렉)는 왕이 오래 살기를 비는 말로, 곧 '만세수를 누리소서!'(Long live the king!, NIV)란 뜻이다. 따라서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라는 말은 (1)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을 자신들의 왕으로 매우 만족하게 여겼으며 (2)열방과 같이 왕들이 자신들을 계속 다스려주기를 간절히 바랬음을 잘 보여 준다(8:5,20).
=====10:25
나라의 제도 - 여기 '나라의 제도'(the duties of the kingdom)는 8:9에 언급된 '왕의 제도'와는 그 성격상 다른 것으로, 곧 신정 국가의 왕이 지켜야 될 기본적 의무 조항들을 가리킨다(신 17:14-20). 즉 이방 국가들의 왕의 제도(8:11-17)가 백성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왕 자신의 절대 권력을 위한 것이라면, 여기의 '나라의 제도'는 오히려 왕이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겸허하고 백성들을 하나님의 율법으로 잘 다스리는 신정(神政) 국가하에서의 '왕권의 의무'(the regulations of the kingship, NIV)를 가리키는 말이다(Keil, Fay, Smith). 책에 기록하여...두고 - 이와 같은 것은 고대 중근동의 종주권(宗主權, suzerainty) 계약시에 필수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었다. 즉 그 당시 중근동에서는 왕이 봉신(封臣)과 계약을 맺으면서, 그 봉신이 왕 자신에 대하여 이행해야 할 의무를 책에 기록하여 봉신이 섬기는 신의 신당(神堂)에 보관하였다고 한다(Klein). 이에 따라 봉신은 책에 기록된대로 왕에게 충성을 다바쳐야만 했다. 따라서 여기서의 사무엘의 이같은 행위는 사울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바로 이행케 하려는 의도에서 시행되어졌음이 분명하다. 이같은 점에서 사울은, 그가 비록 열방과 같은 왕이 되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요구를 따라(8:5,20) 세워졌지만, 그러나 그는 이방의 왕들과는 그 성격에 있어 전혀 달라야 했다. 즉 사울은 절대 권력자로서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정 국가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라와 백성을 통치해야만 했다(Kitto, Michaelis). 여호와 앞에 두고 - 이 말은 실로의 성소 안에나 혹은 법궤 앞에 두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당시 실로의 성소는 이미 파괴되었고(4:10), 언약궤는 여전히 기럇여아림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7:1,2). 따라서 이 말은 단순히 여호와의 권위 아래 엄숙히 보관된 사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Lange).
=====10:26
사울도...자기 집으로 갈 때에 -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사울의 통치권 행사가 잠정적으로 보류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울은 그때 자신의 고향 기브아를 수도로 삼아 백성들을 다스리려고 했던 것이다(11:4). 물론 당시는 이스라엘 각 지파들이 나름대로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었고, 또한 왕을 위한 궁전이나 신하 또는 행정 기구 등이 아직 미비된 상태였기 때문에(Leon Wood), 사울이 자신의 고향으로 간 후 얼마간 지도자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 - 이들은 사울이 하나님에 의해 자신들의 지도자로 선택되었음을 분명히 깨달은 자들이다. 한편 '유력한'(* , 하일)은 '힘이 강한', '용감한'등의 의미로서(창 47:6;삼하 17:10), 곧 당시 사울을 자신들의 왕으로 받들어 모시고 호위한 용감한 자들을 가리킨다(Keil). 그와 함께 갔어도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 어떤 용감한 사람들이, 사울을 도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압제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일종의 민병대(民兵隊)로 사울의 주위에 몰려들었음을 뜻한다(Klein;14:52).
=====10:27
어떤 비류 - '비류'(* , 베네 벧리야알)는 '소모시키다', '황폐케 하다'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말로서, '무익한' 혹은 '아무 쓸 데 없는'이란 의미인데(1:16;2:12), 곧 '무가치한 자들'(Worthless follows, RSV)이란 뜻이다. 한편 이 단어는 구약 성경의 몇 군데에서 '왕국에 큰 손상을 입히는 자'란 의미로 언급되기도 한다(삼하 16:7;20:1;23:6). 따라서 본 단어 역시 위와 같은 의미로 이해함이 타당하다. 실제에 있어 여기의 '비류'(匪類)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새로이 선택된 왕을 거역하며, 또한 나라의 평화를 깨뜨린 자들(troublemakers, NIV)임이 분명하다. 어쩌면 이들은 이스라엘의 각 지파 중 특히 강성했던 유다 지파나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자들일지도 모른다(민 1:27,33). 즉 이들은 분명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에서 자신들의 왕이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매우 탐탁치 않게 여긴 듯하다(R.Payne Smith).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 비류들은 사울이 작은 지파의 출신이어서 강력한 지파의 후원을 받지 못할 것으로 보고 이같은 반문을 한 듯하다. 물론 그들은 이같은 외적 사유 외에 사울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택되었음을 믿지 않았던 중요한 내적 사유에 따라 사울을 반대하였음이 분명하다. 예물을 드리지 아니하니라 - 고대 사회에서 '예물'(* , 민하)은 존경심 및 충성심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보다 높은 사람에게 바치는 '공물' 및 '선물'을 가리킨다(창 32:13,19;삿 3:15;6:18;삼하 8:2,6;왕하 8:8). 따라서 비류들이 자신들의 왕으로 선택된 사울에게 예물을 드리지 않았다는 것은 사울을 왕으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노골적인 표현이며, 그러므로 이러한 표현은 곧 사울에 대한 멸시 행위이자 심각한 도전 행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잠잠하였더라 - 문자적으로는 '귀먹은 사람처럼 되다'란 뜻이다. 한편 비류들의 노골적인 불복종과 반역 행위에 대해 사울이 이같이 처신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당시 사울은 왕으로서 완전한 기반을 아직 닦지 못했고, (2)만일 대적자들의 행동에 어떤 제재를 가할 경우 그들이 속한 지파의 엄청난 반발을 두려워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는 초기 사울의 신중함과 자제력을 보여 준다(F.R.Fay).
< 설 교 >
내가 없어질 때 세우신다
삼상 10:17-21
전반적 설명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 가장 행복한 인생이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서, 주님께 부르심을 받고, 세우심을 받고, 사용받기를 원합니다. 설교의 황태자라 불리는 찰스 스펄젼 목사님은 한 나라의 왕이 되는 권세를 준다할지라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설교자의 일과 결코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삶의 가치는 어떠한 직업, 어떠한 겉모습을 가지느냐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삶을 사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사람을,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을 때 쓰시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울의 이야기를 통해서 “내가 없어질 때 세우신다”라는 영적 진리에 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시기로 약속하셨고,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에게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사울은 잃어버린 나귀들을 찾다가 우연히 사무엘을 만나게 된 것 같았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무엘과 사울이 개인적으로 만나게 하셨고, 그 이후에 공식적으로 사울을 이스라엘 앞에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또 한 번의 검증 과정을 통해, 사울을 다만 공식적이고 일방적으로 통보된 왕이 아닌,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에서부터 지지할 수 있는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저는 오늘 사울이 세워지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사람을 세우시고 쓰시는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우리 함께 사울이 걸어간 길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울의 첫 번째 반응
사무엘은 사울을 처음 만나자마자 20절과 같은 말씀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소망이 누구에게 있느냐?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에게 있지 아니하냐?” 사무엘은 여기서 왕이라는 단어도 사용하지 않았고,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의 모든 소망이 너에게 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사울의 반응은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키시려고 하는지, 나에게 어떤 직위나 임무를 주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는 것이 아니었고,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나는 아무런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의 집안은 실제로 능력 있고 강력한 집안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의 베냐민 지파가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고, 또 자신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중에서 가장 작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비교 평가가 아니었고, 하나님 앞에서의 주관적인 평가였습니다. 사울은 여기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삼촌 앞에서 잠잠함(14-16절)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사울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자랑스러운 일을 경험하면 누가 묻기도 전에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에 대해서 자랑하기 바쁘고, 어린 자녀들은 자기가 무엇을 잘 했는지 자랑하기 바쁩니다. 우리는 어떤 말 표현 한 가지를 잘하더라도, 심지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까지,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은근히 내비치거나, 또는 반복적으로 말해서 자랑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때로 간증을 한다고 하면서, 주님께서 해 주신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한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드러내기 원하고, 나 자신을 나타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인정받기를 원하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하고, 칭찬받기를 원하고,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울은 삼촌에게 질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이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것에 대하여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주의 영이 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신비한 영적 체험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주님이 주신 새로운 마음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기서 잠잠하였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자이며, 자격이 없는 자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건들 사이에 숨음(21-22절)
이제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미스바로 모아서, 왕을 뽑는 절차를 진행하였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 중에서 베냐민 지파를 뽑혔고, 베냐민 지파의 모든 가문들 가운데, 마드리의 가문이 뽑혔습니다. 마드리의 가문 중에서는 기스의 가족이 뽑혔고, 결국 사울이 뽑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사울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사울이 어디 있는지 물었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물건들 사이에 숨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사울의 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울은 숨바꼭질을 하려고 숨은 것도 아니고, 장난을 치려고 숨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자기가 아무런 자격이 없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왕이 될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고, 힘도 없고, 지혜도 없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사울의 진심이었던 것입니다.
험담하는 말에 잠잠함(23-24절)
사울은 사람들에 의해 억지로 끌려나오다시피 백성들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온 백성에게 바로 이 사람이 주께서 택하신 사람이라고 공식선언하였고, 백성들은 환호하였습니다.
이제 왕을 공식적으로 세우고 선언하는 모든 절차를 마치고, 백성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사울도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때에 하나님께서 마음을 감동시키신 사람들의 무리가 사울에게 헌신하여, 그를 따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27절을 보니까, 이스라엘의 백성 전원이 사울을 왕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었고, 몇몇 사람들은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라고 말하면서, 사울을 멸시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이렇게 헐뜯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아무런 흠도 죄도 없는 완전한 삶을 사셨지만, 이 땅에 계실 때,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율법박사들, 헤롯 당원들, 산헤드린 공회원들, 그리고 사두개인들로부터 끊임없는 험담을 당하셨습니다. 완전하신 예수님도 험담을 당하셨는데, 흠이 많고 문제가 많은 우리들은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사울의 반응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울은 잠잠하였습니다. 그는 멸시를 당하고, 조롱을 당하였지만, 잠잠하였습니다. 여기서 사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는 너무나 모욕스럽고 화가 나는데 겨우 꾹 참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울은 아마도 이 대적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였을 것입니다. “아멘. 내가 무슨 능력으로 감히 이 백성을 구원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셨으니 하나님께서 해주시면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사울은 잠잠히 그 모든 말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모세도 아론과 미리암의 비방을 받을 때 잠잠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다니엘도 자신을 대적하는 칙령이 재정되었을 때, 그것에 대해 따지지 않고, 다만 잠잠히 그 모든 일들을 받아들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잠잠하다는 것은 털 깎는 자 앞의 어린양과 같은 것이고, 예수님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표시 중 하나는 잠잠한 것인데, 특별히 자신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판단이 이루어지고, 비방하는 말들이 들려올 때, 잠잠한 것입니다.
사울은 지금 사무엘 앞에서 내가 무슨 자격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이후로, 잠잠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삼촌 앞에서도, 백성들 앞에서도, 대적하는 자들 앞에서도 그는 잠잠하였습니다. 이것은 육신적인 힘으로 참은 것이 아니라, 정말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겸손한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잠잠함이었습니다.
왕권의 검증
이제 우리 함께 사무엘기상 11장 1-3절을 보시겠습니다.
1 그때에 암몬 족속 나하스가 올라와서 야베스길르앗을 마주보고 진을 치매 야베스의 모든 사람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을 맺으라.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하니
2 암몬 족속 나하스가 그들에게 응답하되, 내가 너희의 오른 눈을 다 빼내어 온 이스라엘 위에 그것을 수치거리로 두리라는 조건 하에서 너희와 언약을 맺으리라, 하거늘
3 야베스의 장로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에게 이레 동안의 유예 기간을 주어 우리가 이스라엘 온 지역에 사자들을 보내게 하라. 우리를 구원할 사람이 없으면 우리가 네게로 나아가리라, 하니라.
이제 사울이 막 왕으로 선포되었을 때,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바로 사울이 정말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라는 것을 검증하기 위하여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는데 그 모든 일들에는 우연이 없고, 모두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이기 위해 일어났던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 속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갑자기 암몬 족속 나하스가 야베스길르앗를 공격하러 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베스길르앗 사람들은 전쟁을 하기도 전에 항복을 하고, 우리가 너희를 섬기겠다고 사신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나하스는 단순히 항복을 받아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모든 야베스길르앗 거주민의 오른쪽 눈을 다 빼내어 가져오면, 살려주겠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야베스의 장로들은 일주일의 유예 기간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 함께 4-7절을 보시겠습니다.
4 이에 사자들이 사울의 기브아에 이르러 그 소식을 백성의 귀에 고하매 온 백성이 소리 높여 울더라.
5 보라,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따라 오다가 말하되, 무엇이 백성을 괴롭게 하기에 그들이 우느냐? 하매 그들이 야베스 사람들의 소식을 그에게 고하니라.
6 사울이 그 소식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께서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크게 분노하여
7 한 겨리의 소들을 취해 그것들을 여러 조각으로 자르고 사자들의 손으로 그것들을 이스라엘 온 지역에 두루 보내며 이르되, 누구든지 나아와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되리라, 하였더니 주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마음으로 나오니라.
하나님께서는 사울로 하여금 이 소식을 듣게 하셨고, 그 마음에 큰 부담을 주셨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따라, 마음에 주신 부담에 따라, 백성들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언제 물건들 사이에 숨었는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언제 대적하는 자들 앞에서 말도 한마디 못하고 잠잠하였는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담대하게 행하였습니다. 자신의 소들을 여러 조각으로 잘라 이스라엘 온 지역으로 보내어, 나와 사무엘을 따르지 않으면, 그의 소들도 이렇게 만들겠다고 권위 있게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주의 두려움이 온 백성에게 임하여 그들이 한마음으로 사울에게로 집결되었습니다. 우리는 8절 말씀에서 그 수가 30만 명이나 되는 것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11-13절을 보시겠습니다.
11 이처럼 다음 날 사울이 백성을 세 무리로 나누었더니 그들이 새벽 경점에 그 군대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날이 뜨거울 때까지 암몬 족속을 치매 남은 자들이 흩어져서 그들 중 두 사람이 함께 남지 아니하였더라.
12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우리를 통치하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 사람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그들을 죽이겠나이다, 하매
13 사울이 이르되, 주께서 오늘 이스라엘 안에서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라, 하니라.
11절에서 사울이 암몬 족속을 향해서 매우 큰 승리를 거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12절에서 사울의 열심당원들이 생겨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을 멸시하여 함부로 말한 사람들을 끌어내어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도, 사울을 멸시했던 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도 사울과 전쟁을 하여 승리를 거두기 전에는 공개적으로 말만 안했지, 사울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사울에 대하여 멸시한 사람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온 백성 앞에 사울이 누가 보더라도 인정할 만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권위 있게 세워지고 나자 열심을 가지고 나서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무엇인가 정의롭게 말하는 것 같지만, 어찌 보면 비겁하고 거짓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사울의 반응입니다.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와서 소란스럽게 말하고 있었을 터인데, 사울이 와서 한마디 하면서 모든 백성을 잠재운 것입니다. “주께서 오늘 이스라엘 안에서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라.”
여기서 사울은 전쟁 승리의 영광을 주님께 온전히 돌려드리고 있습니다. 이 말속에서 우리는 사울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주께서 오늘 이스라엘 안에 구원을 주셨으니, 아무도 죽일 수 없다. 라고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내가 없어질 때 세우신다
우리는 오늘 사울이 처음 부르심을 받을 때부터, 삼촌 앞에서, 공식적으로 백성들 앞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첫 번째 전투를 승리로 이끈 그 후까지, 사울의 반응과 말들을 통하여, 그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바로 겸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내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울에게는 자기를 내세우는 것이 없었습니다. 자기를 변호하는 것도 없었고, 자기를 방어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잘생긴 나도 없고, 키가 큰 나도 없고, 강력한 집안의 나도 없고, 사울에게는 자기가 없었습니다.
백성들 앞에서 사울이 뽑혔을 때에도 그는 없었고,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도 그의 말속에는 주님만 있었지, 자기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언제 세우실까요? 언제 부르시고, 언제 사용하실까요? 사울과 같이 자기가 없을 때, 바로 그 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소금이 맛을 내려면 녹아 없어져야하고, 한 알의 밀이 열매를 맺으려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 향유의 향기가 퍼져나가려면 옥합이 깨뜨려져야하고, 기드온의 횃불이 찬란하게 빛나기 위해서는 항아리가 깨져야 하는 것입니다. 소년의 오병이어가 5천명의 영혼들에게 공급되려면 주님의 손에서 부서져야하고, 대장장이의 손에 들린 철기가 유용한 도구가 되려면 용광로와 망치질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세우는 자, 자기를 보존하는 자, 자기를 내세우는 자, 자기를 높이는 자, 자기를 주장하는 자, 자기를 사랑하는 자, 자기를 신뢰하는 자... 자기가 남아 있는 자는 하나님께서 결코 사용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지혜나 능력이나 재능을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없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남아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내가 실력이 부족해서 주님은 나를 사용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잘못되고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내가 이 정도 능력이 되니까 주님이 나를 사용하신다는 생각 또한 교만하고 속임 당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식한 어부 베드로를 부르시고, 자기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다는 남자로서의 의리와 충성심이라는 자기 확신마저 산산조각 부수신 다음부터 베드로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젊음이 없어진 아브라함, 자기 확신이 없어진 모세, 자기 강함을 잃어버린 바울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없어질 때 세우십니다.
우리 함께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바울은 자신이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섬기고 수고한 그 원동력이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결심과 노력과 의지로 주님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기준도 이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그리고 역사 가운데 사람들을 부르시고, 세우시고, 사용하신 기준도 이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내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 계시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바로 그 상태가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시는 상태인 것입니다.
나의 자존심, 나의 기준, 나의 고정관념, 나의 생각, 나의 야망, 나의 욕심, 나의 계획, 나의 뜻, 나의 생각, 나의 의견, 나의 선호도, 나의 정당성, 나의 억울함, 나의 상황, 나의 옳고 그름, 나의 경험, 나의 방식, 나의 노력, 나의 결심, 나의 시도, 나의 한계, 나의 모든 것, 나의 자녀, 나의 인생, 나의 생명...
내가 없고, 오직 주님만 우리 마음에 충만한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제한없이 사용하실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많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지혜와 결단력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도무지 신뢰할 수 없고, 오직 주님만 신뢰하는 사람, 나는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 있는 사람을 찾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 앞에 그러한 사람을 발견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면
삼상 10장 17~24절 / 김진홍목사
지난 주 우리는 삼상9장을 통하여 하나님이 사울을 세우시는 내용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눴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사람 세우심’에 대하여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령한 자들만, 하나님의 사촌 쯤 되는 사람들만 지도자로 세우는 줄 알았는데, 사울을 지도자로 세우시는 것을 보면 그렇지만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십니다.
예를 들어, 사울은 삼상9: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이 함께하는 사환에게 이르되 돌아가자 내 부친이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
사울은 사환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이유는 아버지가 잃어버린 암나귀보다는 3일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는 자신들을 더 걱정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걱정하실 아버지를 생각하는 아들 사울의 태도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울의 인간됨이 풋풋하게 묻어납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다른 사람의 입장과 처지를 배려하는 태도를 놓치지 않습니다.
특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현대인의 삶에서 다른 사람의 입장과 처지를 배려하는 태도는 그 사람의 인품을 돋보이게 합니다.
마5:39-41절에 이런 산상수훈의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예수님은 성도들이 기계적으로 이런 반응을 보여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자동적으로 왼편도 돌려대고, 속옷을 달라하면 얼른 겉옷을 벗어주고, 오 리를 가자면 자동적으로 십 리를 가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는 태도가 먼저입니다.
‘저 사람이 얼마나 화가 났으면 내 오른 뺨을 때릴까? 그래, 화가 풀린다면 내 왼편도 마저 때려라.’
그래서 왼편 뺨을 돌려댄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얼마나 궁색하면 남의 속옷을 가지려고 할까? 그래, 사람이 너무 궁색하면 체면 차릴 여유조차 없지. 나도 어려운 적이 있었는데 입겠다면 겉옷도 가져라.’
그래서 겉옷까지 벗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얼마나 외로우면 오 리라도 함께 가자고 할까? 도움이 된다면 십 리라도 가주겠다.’
그래서 십 리를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다른 사람의 처지를 살피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렇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덕목입니까?
사울은 바로 이런 태도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울의 인간됨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한 발자국만 더 물러서서, 한 순간만 더 멈추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다른 사람의 처지를 배려해보십시오.
그럴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훨씬 더 깊은 인간미를 풍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분의 이런 태도를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울을 왕으로 부르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도대체 나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게 있는 걸까?’
‘설령 가슴에 찡하는 뭔가가 있다하더라도 어떻게 그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꼭 해야 할 질문입니다.
1. 왜 이렇게 본문에는 지명과 상황 설명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을까?
본문, 삼상 10장을 읽으면서 첫 번째 느껴지는 인상은 지명과 상황 설명이 유난히 상세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예를 들어 봅니다.
2절 “네가 오늘 나를 떠나가다가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
3절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께 뵈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이 나와 만나리니........”
5절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그리고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데 왜 이런 얘기가 필요합니까?
어떻게 보면 삼상10장1-16절의 내용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삼상9장에서 바로 삼상10장 17절로 넘어가도 이야기의 전개상 문제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지명과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사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사실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하려면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상황을 설명해야 합니다.
누가 했는지, 언제 했는지, 어디서 했는지, 무엇을 했는지, 왜 했는지, 어떻게 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면 그 사실에 대하여 확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삼상10:1-16절의 묘사가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분명하고 구체적인 이유는 당사자인 사울에게 확신을 주기 위함입니다.
사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고 반신반의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울의 모습을 성경은 언뜻언뜻 보여주고 있습니다.
몇 군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삼상9:21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많은 해석가들은 사울의 이런 태도를 ‘겸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겸손’과 ‘자신감 결여’는 다른 것입니다.
저가 보기에는 사울의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삼상 9:25-26절을 보십시오.
“........사무엘이 사울과 함께 지붕에서 담화하고 그들이 일찍이 일어날 쌔 동틀 즈음이라.......”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무슨 얘기가 그렇게 많아 밤새도록 얘기하고 동틀 즈음에 자리에서 일어납니까?
확신이 서지 않아 주저하는 사울과 설득하는 사무엘의 대화가 들려오는 듯하지 않습니까?
삼상10:16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그 숙부에게 말하되 그가 암나귀들을 찾았다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더이다 하고 사무엘의 말하던 나라 일을 고하지 아니하니라.”
왜 그렇게 중요한 나라 일을 말하지 않았을까요?
천기를 누설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사울은 아직도 긴가민가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외부에 반대세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삼상10:12절 “그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비가 누구냐 한지라........”
‘그들의 아비가 누구냐?’ 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사람을 경멸할 때 사용하는 관용어구입니다.
사울한테 이런 말을 사용했다는 것은 사울을 모욕하고, 빈정거리는 거지요.
또 삼상10:27절에서는 사울을 노골적으로 비난합니다.
“어떤 비류는 가로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드리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그는 잠잠하였더라.”
이런 내적, 외적인 상황 때문에 사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회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2. 이런 사울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케 하는 세 가지 만남을 주십니다.
① 첫 번째 만남은 2절의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는 것이고,
② 두 번째 만남은 3절의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는 것이고,
③ 세 번째 만남은 5절의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선지자의 무리를 만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만나리니’라는 동사가 세 번 되풀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2절 “........ 두 사람을 만나리니.......”
3절 “........ 세 사람이 너와 만나리니........”
5절 “.........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만나리니’ 라는 동사가 반복된다는 것은 범상치가 않지요?
‘만남’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의 숫자도 처음에는 두 사람, 세 사람이었지만 나중에는 무리였습니다.
만남의 강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본문은 이런 만남을 ‘징조’라고 합니다.(7, 9절)
결국 삼상10:1-16절에서 이렇게 상세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겠다.’고 사인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을 읽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징조를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가 본문을 묵상하면서 깨달은 진리입니다.
이제 우리의 얘기를 하겠습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혹 부모님은 계획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계획하셨습니다.
부모님이 ‘우리’라는 생명체를 만들기 훨씬 이전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품속에 품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 없는 생명의 지속이 아닙니다.
시 139:13-18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 하심이라.
.........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 보다 많도소이다.”
그렇습니다.
부도덕한 부모는 있을지라도 부적절한 자식은 없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부모의 계획과 상관없이 태어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목적 없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도 우연히 하지 않으시고, 절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calling)이 있습니다.
사울에게만, 목사에게만 소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건강하든 건강하지 못하든, 배웠던 배우지 못했든, 남자든 여자든 우리에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자하는 열망을 가지십시오.
‘도대체 왜 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까? 도대체 왜 나를 이렇게 살게 하십니까? 알고 싶습니다.’라고 진지하게 질문하십시오.
한번 왔다가 한번 가는 인생, 되는대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사인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복음성가-두 손 들고)
두 손 들고 찬양합니다. 다시 오실 왕 여호와께 오직 주 만이 나를 다스리네.
나 주님 만을 섬기리. 헛된 마음 버리고 성령이여 내 영혼 충만하게 하소서
주님 앞에 내 생명 드리리라.
3.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고 싶으면 다음 사항을 참고하십시오.
1) 남보다 더 잘하는 것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유창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농담할 정도로 언어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학이나 음악, 기계를 다루는데 천부적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연구에 의하면, 보통 사람들은 그들이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500-700개의 다른 기술과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의 뇌는 100조의 다른 정보들을 저장할 수 있고, 우리의 코는 1만 가지 이상의 냄새를 식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놀랄 만한 능력 덩어리이며, 하나님의 기묘한 창조물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파악하십시오.
남보다 더 잘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상관이 있습니다.
2) 남보다 더 가진 것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가정환경을 가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부할 기회를 더 많이 가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특별한 경험을 가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더 가졌습니다.
여러분이 남보다 더 가진 것을 파악하십시오.
남보다 더 가진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상관이 있습니다.
3) 남다른 부담감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남다른 부담감을 주십니다.
예를 들어, 다운 증후군 아이를 둔 부모는 다운 증후군 아이들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사람은 알코올 중독으로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사별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사별의 아픔으로 시름하는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남다른 부담감을 갖게 됩니다.
남다른 부담감에 유념하십시오.
남다른 부담감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상관이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 부르심대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자신에게는 보람이 되길 축원합니다.
한번 왔다가 가는 인생, 보람 있게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삼상 10장 19~25절 / 유관지목사
성경을 읽는 가운데 짧은 한 두 절 말씀에서 깊은 깨달음과 도전을 얻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사실은 성경 전체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말씀들인데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넘기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에 숨어있는 그와 같은 오묘한 교훈들을 깨닫게 하는 것이 설교자의 책임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나가 제사장 엘리에게 한 말 가운데 28절의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도 저희에게 큰 깨달음을 주는 말씀입니다.
한나의 이 말은 먼저 우리에게 "그러므로 나도"의 신앙을 가지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나도'의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그러므로'는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으므로'입니다.
우리는 소원하는 것이 있을 때 열심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셔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기도의 응답으로 그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잊습니다. 자기 힘으로 그 일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니 내가 기도했다는 사실조차 잊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들의 기도를 살펴볼 때 먼저 드린 기도를 응답해 주신 일에 대한 감사 내용이 너무 부족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내가 사무엘을 낳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기도 응답으로 그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 기도를 응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다가도 시간이 좀 흐르면 잊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니 대개 그렇습니다. 서원을 했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잊습니다. 한나는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잊지 않았습니다.
오늘 일은 사무엘이 젖을 뗄 때의 일입니다. 젖을 떼기 위해서는 2, 3년쯤 걸립니다. 젖을 떼고 아무래도 사무엘이 제대로 걷기도 하고 말도 할 줄 알아야 여호와의 전으로 데려갔을 터이니 네 살이나 다섯 살쯤 되었을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그래도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이 아이를 주셨다'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이루어진 일인데 잊고 있었던 것이 있지 않습니까? 내 힘으로 그 일이 이루어졌거나 우연히 이루어졌다고 여기고 있던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내가 아들을 얻었으므로' 하는 한나의 믿음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 것들을 기억해내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나도'입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응답해 주셨으므로 나도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하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려 평생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나도'의 신앙을 가져야합니다. '나도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하겠습니다' 하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나도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고 싶은데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가르쳐 주십시오' 이런 내용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하나님 주십시오' '또 주십시오' '더 주십시오' 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늘 달라기만 하는 좋지 않은 버릇을 가진 나라가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지요. 어느 나라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그 나라 식으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이것이 필요합니다'
'나는 이것도 갖고 싶습니다'
'나는 이것도 원합니다'
이 같은 '나는'의 신앙에서, '나도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고 싶습니다' '나도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나도'의 신앙으로 진보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한나의 이 말은 또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라는 믿음을 가지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이것은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도 하나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하고서 시시한 것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24절에 한나가 사무엘을 바치러 갈 때 가지고 간 예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소 세 마리, 밀가루 한 에바(22리터),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갔습니다.
이것만해도 대단한 예물입니다. '하나님 아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도 이것을 바칩니다' 하고 돌아와도 좋을 예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한나는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오랫동안 기도해서 얻은 아들입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한나는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선물을 할 때 주어서 아까운 마음이 들지 않으면 참다운 선물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내가 아끼는 것, 귀한 것을 드려야지 좋은 선물이라는 뜻이지요. 한나는 정말 아끼는 것, 정말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더 많은 것으로 축복하시며 갚아 주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데 그의 평생을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일정한 기간만 바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늙은 다음에는 이 아이가 돌아와서 나를 봉양하도록 해 주십시오'가 아닙니다. 종신 서원을 했습니다. 그의 삶 전체를 바쳤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무엘의 나이 세 살 내지 다섯 살, 가장 귀여울 때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때입니다.
그리고 아직 어릴 때입니다. 24절 끝에 '아이가 어리더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여호와의 전으로 가는 한나의 마음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한나는 마음으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러 그를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갔는데 지금 내 마음이 그와 비슷합니다' 이렇게 중얼거렸을지도 모릅니다.
남편의 다른 부인 브닌나가 자기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자식이 없다고 한나를 괴롭히고 업신여겼습니다. 여자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제 사무엘이 생겼으니 사무엘을 옆에 두고 브닌나에게 '너만 자식 있냐? 나도 있다! 내 자식이 더 똑똑하다!' 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인으로서 그런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한나는 그런 것을 다 극복하고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우리의 봉헌, 우리의 헌신은 온전한 봉헌, 온전한 헌신이 되어야합니다.
불완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분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구약 성경 레위기에는 제물에 대한 규정이 자세하게 나와 있는데 제물의 기본 조건으로 온전한 것이어야 한다, 흠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여기 저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들의 소유를 팔아 하나님께 바치는데 전부를 바치지 않았습니다. 얼마를 감췄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을 당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장로님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립니다. 장로교회의 장로님입니다. 고향이 북한인데 혼자 월남해서 출판사업을 해서 많은 수익을 올렸습니다. 경기도 이천에 땅을 좀 샀는데 거기에 양로원을 지었습니다. '부모님이 북한에 계셔서 내가 부모님을 모시지 못하는데 대신 의지할 곳 없는 연세 많은 분들을 우리 부모님처럼 모시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양로원을 짓고 이름을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나의 이름을 따서 '한나원'이라고 했습니다.
41년 전에 저희 목양교회가 설립되었을 때 처음에 심방을 하며 교회를 돌 본분이 강연섭이라는 여자 전도사님입니다. 노량진에 부녀직업보도원이라는 복지시설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일하시던 분이었습니다. 감리교 교역자 자격을 갖춘 분이 아니고 따라서 법적인 파송을 받은 것이 아니니까 공식적인 담임자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이 강연섭 전도사님은 저희 교회를 떠난 다음에 전도사로 일하다가 은퇴를 한 다음에는 한나원에 들어가서 노후를 보내시다가 15년 전에 그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장로님은 얼마의 시간이 흐른 다음에 이천의 남은 땅에 건물을 하나 더 지었습니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을 지었습니다. 그 동안 이 장로님이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기독교대백과사전, 기독교연감, 이런 책들을 출판하기 위해 한국교회의 역사 자료들을 많이 모았는데 그 자료들을 박물관에 전시하고 보관하고 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지요. 많은 재정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장로님의 온전한 봉헌과 헌신으로 이런 아름다운 일이 있었고 또 지금도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장로님도 연세가 많아져서 지금 이천에 내려와서 기거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한나와 같은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아들을 주셨습니다. 독생자인 예수를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러므로 나의 가장 귀한 것을 여호와께 드립니다. 온전히 드립니다'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찬송가 302장의 가사를 소개해 드립니다. 청년들을 위한 찬송이지만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귀한 것 드려 젊을 때 힘 다하라
진리의 싸움을 할 때 열심을 내어라
모범을 보이신 예수 굽히지 않으셨다
주님께 귀한 것 드려 젊을 때 힘 다하라
구원의 갑주를 입고 끝까지 싸워라
주님께 내 귀한 것과 내 맘과 내 생각도
주 위해 온 몸을 바쳐 맘 다해 섬기면
독생자 보내신 성부 은혜로 갚아주리
주님께 귀한 것 드려 젊을 때 힘 다하라
구원의 갑주를 입고 끝까지 싸워라
우리의 귀한 것 모두 주님께 바치어도
단번에 생명을 주신 그 사랑 못 갚네
하늘의 영광을 버려 우리를 구했으니
그대의 마음을 다 해 주님을 섬기어라
주님께 귀한 것 드려 젊을 때 힘 다하라
구원의 갑주를 입고 끝까지 싸워라
이 찬송은 '주님께 귀한 것 드려 젊을 때 힘 다하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 청년들은 이 가사 그대로 살고, 성도 모두가 주님께 귀한 것 드려 평생 힘 다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하는 한나의 믿음이여러분과 저의 믿음이 되기 바랍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한나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주셨습니까?
우선 많은 자녀를 주셨습니다. 사무엘상 2장 20절과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엘리가 엘가나와 그의 아내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다른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바친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니 그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매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석녀(石女)이던 한나가 4남 2녀, 다산하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제사장 엘리의 축복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성도들이 교역자들에게 여러 가지 제목의 기도를 부탁하는데 그것이 좋은 일임을 알게 됩니다.
한나는 아들 하나를 바쳤는데 하나님은 아들 셋과 딸 둘을 주셨습니다. 한나는 기도할 때 '아들 하나만 주십시오'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섯 배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믿음, 특히 온전한 봉헌을 하는 분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런 축복이 성도들에게 있기 바랍니다.
조금 전에 제가 온전한 봉헌을 해서 이천에 양로원과 역사 박물관을 지은 장로님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장로님, 존함이 한영제(韓英濟)장로님인데 어떤 축복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그 징로님은 통합측이라고 한국교회에서 영향력이 아주 큰 장로교회에 속해 있는데 그 교단에서는 법으로는 장로님도 총회장이 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총회장을 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지요. 감리교회의 감독회장을 장로교회에서는 총회장이라고 부릅니다.
십여 년 전에 이 장로님이 그 교파의 총회장에 선출되었습니다. 한국교회 백여년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축복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사무엘이 어떤 인물입니까?
최초의 선지자입니다.
마지막 사사입니다.
제사장의 일도 했습니다.
통치자였습니다. 사무엘상 7장 15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은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니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한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라고 통치자로서의 사무엘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월드컵 때 이 포지션에서 잘 뛰고 저 포지션에서도 잘 뛰는 멀티 플레이어, 만능 선수들이 박수를 받았는데 사무엘을 멀티 지도자였습니다.
사무엘이 성전에서 봉사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연이은 침공으로 위기에 놓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언약궤를 빼앗겼습니다.
제사장으로서 사사를 겸해 이스라엘을 지도하던 엘리도 죽었습니다.
큰 위기입니다. 이 위기를 수습한 사람이 바로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으고 회개의 기도를 드리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우레를 발해서 블레셋 사람들을 패주하게 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국난 극복의 위인이며 구국의 영웅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초로 임금을 세워 왕정시대가 열리게 하고 통일왕국시대가 시작되게 했습니다. 처음에 세운 임금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자 사울을 폐하고 다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의 자리에 오르게 했습니다.
다윗이 유명한 인물이니까 구약성경에 '다윗기'라는 성경이 잇응 만도 한데 다윗 이야기는 모두 사무엘상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도 사무엘의 그늘 아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누구나 조지 워싱턴을 국부라고 부르며 존경합니다. 이스라엘의 뿌리 깊은 국부라고 하면 사무엘을 들어도 좋을 것입니다.
그 사무엘의 뒤에는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는 믿음을 가진 한나가 있었고 또 엘가나가 있었습니다. 엘가나도 훌륭한 아버지입니다. 경건하고 도량이 넓었습니다.
문제 아동, 문제 청소년 뒤에는 문제 가정, 문제 부모가 있는데 훌륭한 인물 뒤에는 훌륭한 부모가 있습니다.
어제 어느 가정의 돌잔치를 인도하면서 그 부모님에게 '한나와 엘가나 같은 부모가 되십시오' 부탁했습니다.
사무엘을 이와 같이 훌륭한 지도자로 만든 것은 그의 어머니 한나의 믿음과 교육입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여호와의 전에 보내기 전에 그를 품에 안고 '너는 하나님께 바쳐진 아이이다' 이 점을 늘 강조했을 것입니다. 21절 이하의 일을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젖을 먹고 있을 때 엘가나와 그의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서원제를 드리기 위해 올라가는데 한나는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남편에게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서 영원히 있게 하리이다"(22절)고 했습니다.
'이 아이는 하나님께 바쳐진 아이이니 이번에 데리고 갔다가 돌아올 것이 아니라 조금 큰 다음에 여호와의 전에 아주 머물게 하겠습니다'는 뜻입니다.
몇 해 전 미국에 가서 유학 와 있는 어느 젊은 목사님 가정을 방문했다가 어린 아들에게 영어로 말하고 어린 아들도 영어로 대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목사님에게 '목사님, 아드님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했더니 그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유 목사님, 저희는 공부가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서 한국 교회를 위해서 일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서 미국에 정착하는 분들이 많은데 저희는 분명히 돌아갑니다. 그 때가 되면 우리 아들은 자연히 한국말을 배우고 쓰게 될 것입니다. 이왕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는 영어를 익히도록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영어를 쓰고 있습니다. 아들에게도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점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깊은 생각이지요. 그 목사님은 약속한 대로 한국에 돌아와서 수원 부근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한나는 사무엘을 품에 안고 '너는 하나님께 드려진 아이이다' 하는 것을 늘 말했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한나는 모세의 어머니와 같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아기들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지요? 기본적인 인격과 성격은 생후 2년 사이에 형성된다고 합니다.
유아부 교육, 유치부 교육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 교육에 힘입어 사무엘은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제69회 기독교교육진흥주일입니다. 사무엘은 가정에서 먼저 기독교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여호와의 전에서 엘리에게 배웠습니다.
사무엘의 생애에서 아주 감동적인 부분은 그의 은퇴 연설입니다. 사무엘의 은퇴 연설이 사무엘상 12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1절에서 5절까지를 읽어 드립니다.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가 내게 한 말을 내가 다 듣고 너희 위에 왕을 세웠나니 이제 왕이 너희 앞에 출입하느니라 보라 나는 늙어 머리가 희어졌고 내 아들들도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내가 어려서부터 오늘까지 너희 앞에 출입하였거니와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누구의 손에서든지 아무 것도 빼앗은 것이 없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 손에서 아무 것도 찾아낸 것이 없음을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며 그의 기름 부름 받은 자도 오늘 증언하느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가 증언하시니이다 하니라 우리 나라 대통령들도 은퇴할 때 이런 연설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은퇴연설은 이런 식으로 하지요. 그러나 국민들이 '맞습니다' 하지 않습니다.
요즘과 같은 공직자 후보 청문회 제도가 있었으면 사무엘, 문제없이 통과되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청문회 위원들이 '후보자님, 우리가 많이 배웠습니다' 할 것입니다.
사무엘의 이런 청렴결백한 성품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바로 한나에게서 배웠을 것입니다. 한나가 어렸을 때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더라면 사무엘은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물을 먼저 빼앗아먹는 것을 보고 '저래도 되는구니' 하면서 자기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나도'의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는 온전한 봉헌과 헌신의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으로 갚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자녀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한나의 믿음을 본받아 이와 같은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울을 택하여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
삼상 10:17-27 / agaape
묵상하기
1, 사울은 어떤 절차를 거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을 받았습니까?
2,왕으로 세움받는 사울은 자기를 멸시하는 사람들을 어떻게대했습니까?
본문 살피기
1, 사울을 택하신 하나님(17-24)
사무엘은 온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 하나님 앞에 모았습니다. 백성들이 모인 앞에서 공개적으로 왕을 제비 뽑았습니다. 열두 지파 중에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그들 중에 마드리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행구 사이에 숨어 있었습니다. 23절에 그를 데려오니 모든 백성중에 짝할 이가 없을 만큼 키가 크고 훌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사울을 택하셨습니다. 24절에 백성들은 모두 왕의 만세를 외쳐 불렀습니다. 비밀리에 행해진 사울의 기름부음이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온 이스라엘 가운데 공적으로 확정됩니다.
2, 반대자를 품는 왕 사울(25-27)
거의 대부분의 백성들은 사울을 기뻐하여 왕의 만세를 불렀습니다.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은 사울과 함께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백성이 사울의 왕 됨을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비류는 사울을 멸시하고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27a절에 “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27b절에 “ 그러나 사울은 잠잠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서운한 감정을 품거나 그들을 강제로 굴복시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반대한다고 적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적용
하나님은 어떤 절차를 통해 택하신 자를 뽑아 세우시며, 다른 의견을 가진자에 대해서 지도자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먼저, 하나님은 내적 외적 부르심의 절차를 통해서 택하신 자를 뽑아 세우십니다.
부르심에는 내적 부르심과 외적 부르심이 있습니다. 내적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우리 내면에 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외적인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외적인 부르심은 정당한 절차를 밟아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왕을 구하고 제비 뽑은 것은 이스라엘이지만(12:13) 그를 왕좌에 앉을 자로 사울을 택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절차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런 절차를 통해서 간섭하시고 자기의 택하신 자를 뽑아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다음, 지도자는 다른 의견을 가진자를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어떤 지도자에게나 반대자는 있습니다. 이들을 적으로 여기지 않고 다른 의견을 가진 자를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백성은 자신들을 위해 대신 싸워줄 왕을 원하지만, 인간 왕은 백성을 지키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평범하지만 이 위대한 진실을 알고 살아갈 때 시행착오를 줄이고 영적 위기를 자초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는 본질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어야 하지만 비본질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능력 있는 지도자는 다양성 속에 통일성을 이끌어 내는 자입니다.
기도: 주님! 주님께서 비천한 저를 택하여 세워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제게도 반대자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사랑으로 품고 섬길 수 있는 내면성을 덧입혀 주십시오.
왕으로 선포된 사울
삼상 10장 17-27절 / 임근영 목사
17절: 사무엘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사울에게 기름을 부은 후에 이것을 백성에게 확인시키는 절차를 밟기 위해 전에 백성들을 모아 놓고 우상을 제거하게 하여 블레셋을 격파한 적이 있었던 미스바로 불러 여호와 앞에 다시 백성의 대표들을 소집했다. 사무엘이 백성들을 미스바로 불러모은 것은 사무엘이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말할 수 있었으며, 그만큼 그의 권위가 높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3:19-21). 미스바 총회에서 사무엘은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 역사를 회상하는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였다.
18절: 그리고 사무엘은 지도자를 선출하는 추첨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을 거역한 백성의 죄를 질책했다. 즉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시고 모든 압제자의 손에서 건져 내셨는데도 왕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하고 있으며, 이에 따르는 고통으로 얼마나 후회할 일을 원하고 있는가에 대해 백성들을 나무랐던 것이다.
19-20절: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들은 이제 어느 지파의 어느 가문의 누구를 왕으로 세울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 제비는 당시에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인물을 선택하는 방법으로 활용되었다(수 18:6). 그 결과가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수 14:2, 민 26:55).
21-24절: 제비는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사울 가문의 족장이 마드리 가족 중에서 사울이 뽑혀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런데 이 때 사울은 딤보따리 사이에 숨었다.
왕의 선택은 제비뽑기로 정해졌으며, 우림과 둠밈을 사용하여 가(可)와 부(否)를 결정하여 남은 숫자를 점점 제거해 나가다가 제일 마지막에 남은 것이 여호와의 선택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방법은 아간(수 7:1648)과 요나단(14:37-42)을 뽑는 데도 적용되었다. 사도행전에서도 사도를 선출하는데 있어서 제비뽑기가 사용되었는데(행 1:23~26), 제비뽑기는 인간의 분별력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하심을 기대하는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보느냐”(2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사 열방 중에서 그의 증인으로 일하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신 4:6). 그것은 택함 받는 자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에 근거한 것이었다. 사울은 왕이 되기에 합당한 공로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택하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백성의 지도자가 되었다.
사울이 아무 공로도 없이 왕이 되어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은 미천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해 준다. 그러나 장차 그가 왕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는 것은 강력한 자를 낮추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보여준다(고전 1:26).
25절: 사무엘은 “나라의 제도”를 기록하여 “여호와 앞에 두었다.” 이 제도는 “왕의 제도”와는 달리 왕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사항들을 가리킨다(신 17:14-20). 즉 그것은 신정 국가에서 왕이 수행해야 할 의무를 가리킨다.
사무엘은 위험스러운 왕권 제도를 여호와의 은혜로운 율법의 가치로 끌어올리고자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사무엘이 말하는 왕의 제도는 모세의 율법의 핵심인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치리자들은 인간을 유익하게 하는 하나님의 법을 기초로 하여 나라를 다스려야 할 것이다(행 20:20; 딤후 4:2).
26절: 사울과 함께 간 자들은 유력한 자들로서 그들은 아마도 용감할 뿐 아니라 사회적 인지도가 높은 자들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즉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셔서 그들을 만지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울이 여호와의 택함을 입은 자라는 사실을 믿었고 여호와를 향한 신앙으로 충만해 있었는데, 이는 모두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속에 계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울의 왕권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든든한 후원자들을 등에 업고 출발하였음을 보여준다.
27절: 그러나 어떤 비류들은 사울을 멸시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며 예물을 드리지 않았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를 멸시하는 행위 또한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와 동일시되었다. 다윗의 연소를 업신여긴 골리앗(17:42), 다윗의 종교적인 열정을 무시한 미갈(삼 하 6:16) 등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울을 멸시한 비류들과 같은 사람들이다. 사울을 평가절하한 비류들은 왕에게 합당한 예물을 드리지 않았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배후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사무엘상 10:17-27
(작성: 유영진)
[사울이 제비뽑기를 통해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출됨(17-21)]
앞선 1-16절에서는 사울이 사무엘로부터 비밀리에 기름부음을 받고 사무엘이 제시한 증표들을 통해 사울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받았음을 확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7-27절에서는 사울이 제비뽑기란 방식을 통해 공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출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17) 사무엘이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 여호와 앞에 모으고]
사울의 임명식이 진행되는 ‘미스바’는 이전 사사기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스라엘 연합군이 베냐민 지파를 함께 공격하기로 맹세한 곳입니다. 베냐민 지파 출신인 사울이 다른 지파들의 공격을 당하여, 자신의 지파가 소멸할 위기에 처한 곳에서 왕위를 확정받게 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이를 통해 알게 되는바, 하나님께서는 실패나 죽음의 자리에서도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도 돌아온 자들에게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고, 최고의 기회와 능력을 허락하여 주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추가로 미스바는 이스라엘의 군사적 요충지였을 뿐 아니라, 사무엘이 순회하던 중 매년 이곳에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다스렸던 곳으로 여러 상징성이 있기에 이곳에서 이스라엘의 왕을 임명하는 일을 진행하였습니다.
[(18-19)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고 너희를 애굽인의 손과 너희를 압제하는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셨거늘 너희는 너희를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너희의 하나님을 오늘 버리고 이르기를 우리 위에 왕을 세우라 하는도다 그런즉 이제 너희의 지파대로 천 명씩 여호와 앞에 나아오라 하고]
사무엘은 제비뽑기를 통해 공식적으로 이스라엘 왕을 선출하기에 앞서 과거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경험했던 출애굽의 은혜를 회상하게 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와 주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오셨다는 강조점이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그 은혜에도 불구하고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왕으로 세우려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사무엘은 책망합니다. 19절의 ‘우리 위에 왕을 세우라’는 표현은 원문 그대로를 직역하면 ‘왕을 우리 위에 놓으라’가 됩니다. 이는 왕이라는 목적어를 문장의 맨 앞에 놓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요구한 것이 자신들 위에 놓을 왕 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자신들 위에 놓는다고 하여, 그것이 내가 아닌 누군가를 섬기겠다는 의미가 아니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심은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왕을 세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인간적인 욕망을 채우는 방식으로 이스라엘이 통치되길 바라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계산과는 다르게 자신들이 세운 인간적인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욕망을 위해 움직이기보다, 왕 개인을 욕망으로 움직이기를 더 기뻐하였습니다. 인간 왕의 이러한 습성을 하나님께서는 아셨기에, 신명기 17장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고, 말씀을 매일같이 읽고 묵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신명기 17:14-20).
[(20-21) 사무엘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베냐민 지파를 그들의 가족별로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으나 그를 찾아도 찾지 못한지라]
이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을 선출하는 과정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제비뽑기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는 다르게 제비뽑기는 과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뜻을 묻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중 하나였으며, 이 과정을 통해, 인간적인 편법이나, 계산이 아닌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잠언 16장 33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잠언 16:33)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을 선택하기 위해 제비를 뽑는 일이 여러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사 시대 기브아를 공략한 사람들을 선정할 때나(사사기 20:9). 제사장들의 직분을 배치할 때(역대상 24:5),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을 때(사도행전 1:26)에도 제비뽑기라는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볼 때, 결국 제비뽑기는 사람이 제비를 뽑는 형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공증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의 경우, 이미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는데 다시 제비뽑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는가?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개인적으로 부르셨으나 이제는 공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울의 기름부음에 대한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불러주시고,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여 주실 때, 우리에게 개인적으로도 찾아와 주시고 힘주시지만, 그와 다르게 공적으로도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에게 공적인 역할을 허락하시어,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보다 능력있고, 책임감 있게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기회를 주시는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어떠한 역할을 맡기시고, 공적으로 어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면, 사울처럼 그 자리를 피하고 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역할 안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들을 책임감 있게 잘 감당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22) 그러므로 그들이 또 여호와께 묻되 그 사람이 여기 왔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그가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었느니라 하셨더라]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왕으로 선출된 사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황스럽게도 사울은 자신이 왕으로 선별되었음에도 짐더미 뒤에 숨어 사람들을 시선을 피하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점을 놓고 보았을 때, 그는 부끄러움이 많고, 아직 사람들 앞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며, 이스라엘의 왕이 될 준비가 완전히 되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울을 왜 왕으로 선정하신 것이겠습니까? 혹자는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인간 왕을 원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벌을 주기 위해 부족한 왕을 주셨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것은 적절하지 않은 설명으로 보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왕을 주시겠다고 결정하시고, 왕을 주시면 그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사람을 선택하여 보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울이 부족하더라도,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왕정을 이어가면, 왕으로써의 역할을 ‘스스로 왕이 되겠노라’ 자신감을 드러내는 어떤 사람보다 더 잘 감당할 수 있기에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왕과 같이 스스로 ‘내 공간’, ‘내 시간’이라고 주장 할 수 있는 것들이 부분적으로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나는 어떠한 모습입니까? 우리가 스스로 왕과 같이 행동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통치와 생명 안에서 참된 기쁨과 위로를 얻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왕과 같이 모든 것을 갖고 통제하고 가질 수 있어야 행복하고,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실재로 아담과 하와에게는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주어졌지만, 하나님을 대신하여 스스로를 왕의 자리로 올리려 하였을 때, 아담과 하와의 삶에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어리석음을 따르지 않고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 하나님을 내 삶의 왕으로 모시는 훈련을 해야합니다.
[(23-24) 그들이 달려 가서 거기서 그를 데려오매 그가 백성 중에 서니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 컸더라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
사울은 내적으로 부끄러움이 많고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으나 외적으로는 키가 큰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키가 큰 사람이 이들의 눈에 멋지게 보여 만세를 부른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한 왕이 이방 국가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탁월한 군사적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전쟁과 싸움의 방식을 생각해 보았을 때, 키가 크다는 것은 남들보다 전쟁에 유리한 조건을 의미하였으며, 이러한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을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반응은 다윗이 왕이 될 때와 극명한 차이를 만드는 부분입니다. 다윗은 그의 용모와 키가 볼품없어, 사무엘의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이와 다르게 사울은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큰 모습을 보여주며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얻는 자리에 이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쉽게 속는 외모와 다르게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니,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떠한 중심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역할을 감당하는가’를 시간적 간격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외모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미음과 마음의 중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화려하고 주목받는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꾸준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교회 안밖의 다양한 형태의 사람들과 봉사자들을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그때마다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는데, 하나님 나라의 일꾼은 단순히 화려하고, 주목받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짜 일꾼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꾸준하게 그 자리를 지키며, 자신의 역할을 오랫동안 책임감 있게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남들의 시선이나 인기에 연연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신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모습은 예수님을 향한 참사랑과 믿음으로부터 비롯되며, 그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자 열매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25-27) 사무엘이 나라의 제도를 백성에게 말하고 책에 기록하여 여호와 앞에 두고 모든 백성을 각기 집으로 보내매 사울도 기브아 자기 집으로 갈 때에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과 함께 갔느니라 어떤 불량배는 이르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바치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잠잠하였더라]
사무엘이 나라의 제도를 책에 기록하여 여호와 앞에 두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왕권의 세상의 왕권과 그 시작부터가 다른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즉 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왕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왕에 대한 규례를 지켜야 했으며, 이는 왕을 비롯한 모든 백성들이 규례를 지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함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께서 주신 치밀한 가이드에 따라 잘 진행되었으나, 이 과정속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맹목적인 비난을 일삼는 불량배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도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항상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사무엘과 사울이 하는 일을 보고, 그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겠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사울이 그것을 알았음에도 잠잠히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아직 사울이 아직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자신의 백성들을 넓은 마음으로 포용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사울의 이러한 마음을 오래 가지 못하였습니다. 사울은 왕으로써의 자신의 입지가 단단해질수록, 이스라엘 백성들과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함부로 대하였고, 무엇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보다 백성들의 시선과 인기에 더 관심을 보였습니다. 사울이 왕으로써의 처음 모습과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백성들을 존중하는 모습을 끝까지 가져갈 수 있었다면, 사울의 통치는 아마도 실패로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울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아,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가 하나님 앞에서의 처음 모습을 잃어버린 것은 없는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 베드로와 같이 어리석은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음으로 주님과 함께 세상을 넉넉히 이기시는 우리 모든 교우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의 진정한 왕이 되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누구를 왕으로 모시고 살아야 할지 깨닫게 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우리의 모든 결정 속에서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해 주옵시고,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가 되게 해 주옵소서.
특별히 사울을 반면교사로 삼아 처음과 다른 미련한 모습을 따르지 않게 해 주옵시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리에서 성실히 충성스럽게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미스바’라는 베냐민 지파의 실패의 자리에서 사울 왕의 직위를 확정지어 주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확인 할 수 있나요?
2. 사울 왕과 같이 우리안에 잃어버린 처음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3. 우리가 ‘내 것’ ‘내 시간’이라고 주장 할 수 있는 왕과 같은 공간과 시간에서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할까요?
4. 내 주변에 나를 대적하고,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있나요?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어떠한 마음으로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