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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몬과의 전쟁
삼상 11:1-8
1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에 맞서 진 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들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하니
2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3 야베스 장로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에게 이레 동안 말미를 주어 우리가 이스라엘 온 지역에 전령들을 보내게 하라 만일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 네게 나아가리라 하니라
4 이에 전령들이 사울이 사는 기브아에 이르러 이 말을 백성에게 전하매 모든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더니
5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이르되 백성이 무슨 일로 우느냐 하니 그들이 야베스 사람의 말을 전하니라
6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7 한 겨리의 소를 잡아 각을 뜨고 전령들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두루 보내어 이르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8 사울이 베섹에서 그들의 수를 세어 보니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삼만 명이더라
삼상 11:1-8 / [등극하는 사울] 사울이 집에 와 있은 지 한 달쯤 지나서 전쟁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요단강 동쪽에 살던 암몬 족속의 왕 나하스가 길르앗 지역으로 밀고 들어와 야베스 성을 포위한 것이다. 그러자 성읍의 주민들이 나하스에게 애원하였다. `우리의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고 약속해 주시오! 그렇게만 해주시면 우리가 기꺼이 항복하고 노예가 되어 섬기겠습니다.' 2) 그러나 암몬 족속의 왕은 그들의 애원을 조롱으로 바꾸어서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내가 너희의 오른쪽 눈알을 모두 빼어서 온 이스라엘에 씻을 수 없는 수치와 모욕을 당하게 한다면 너희를 살려 줄 뿐만 아니라 너희가 원하는 계약에 기꺼이 응하겠다' 3) 이때에 야베스 장로들이 슬기로운 제안을 하였다. `우리에게 칠일 동안만 여유를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이스라엘의 모든 지역으로 심부름꾼들을 보내겠습니다. 그런 다음에도 우리를 구해 줄 사람이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항복하겠습니다.' 4) 심부름꾼들은 즉각 사울이 살고 있는 기브아 언덕으로 달려와서 그곳의 주민들에게 자기들의 기막힌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온 백성이 큰소리로 울기 시작하였다. 5) 바로 이런 순간에 사울이 겨릿소 두 마리를 몰고 밭에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온 성읍이 울음바다가 된 것을 보고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온 성읍 사람들이 목놓아 울고 있느냐?' 사람들이 야베스에서 일어난 사건을 그에게 알려 주었다. 6) 그러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을 감동시켜 그는 엄청난 분노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7) 그는 몰고 오던 겨릿소 한 쌍을 끌어다가 여러 토막으로 자른 다음 그것들을 야베스의 심부름꾼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스라엘 전지역으로 가지고 가게 하였다. 그리고 사울은 그들에게 어디서나 이렇게 외치도록 하였다. `누구든지 사울과 사무엘을 따라서 싸움터로 나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의 소도 이런 꼴이 될 것이다.' 온 백성은 이 소리를 듣고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런 소식은 여호와께서 직접 전하시는 것인 줄을 모든 백성이 온 몸으로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온 백성이 싸움터로 나갔다. 8) 사울이 베섹에서 온 백성을 집결시키고 검열해 보니 이스라엘 자손이 30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3만 명이었다.
사울이 왕위에 즉위하자 암몬 사람 나하스가 쳐들어와서 전쟁을 치루게 됩니다. 사울의 첫 번 전쟁의 승리는 왕권을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암몬의 침략(1-4) 암몬 사람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를 쳐들어 왔습니다. 길르앗 야베스는 나하스에게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그들을 섬기겠다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나하스는 오른 눈을 빼야 언약을 맺겠노라고 모욕을 줍니다. 이에 야베스 장로들이 이레 동안의 말미를 얻어 이스라엘 전 지역에 전령을 보내어 자신들을 구원할 자가 없다면 어쩔 수 없이 암몬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고 말하자 모든 백성들이 소리 높여 통곡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이라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군사를 소집한 사울(5-8) 사울은 왕이 되었지만 제대로 된 중앙정부와 군사력을 갖춘 조직이 없었기에 여전히 밭을 갈아야 했습니다. 사울이 소를 몰며 돌아오는 길에 야베스 사람들의 통곡을 전해 듣게 됩니다. 이 말을 들을 때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감동하여 분노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를 잡아 각을 뜨고 전령들의 손에 들려 다음의 명령을 내립니다. 그것은 각 지역에 두루 통지하여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들의 소들도 이와 같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에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자 그들이 한사람 같이 사울 앞에 나오게 됩니다. 사울이 베섹에서 수를 세어 보니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 만 명이었고, 유다 자손이 삼 만 명이었습니다. 사울이 왕에 즉위하여 군사를 소집하고 공식적으로 군사들을 징집한 최초의 일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사울로 하여금 실질적인 군통수권자로서 왕의 권위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암몬과의 전쟁의 위기는 사울의 왕권을 세우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발견하게 되고 위기를 기회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게 됩니다.
적 용 : 절망적 위기가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의 기회라고 믿습니까?
어느 마을에서 음악회가 열렸습니다. 그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로 한 지휘자는 형편이 좋지 않아 전부터 입어오던 낡은 예복을 입고 지휘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휘자가 너무 열심히 오케스트라를 지휘해서인지 낡은 예복이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는 예복을 입어야 하지만 지휘자는 한 곡이 끝나자마자 낡아서 찢어진 예복을 벗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셔츠 차림으로 지휘하는 그를 향해 관객들은 수군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지휘자는 주위가 소란해도 전혀 흔들림 없이 차분하게 최선을 다해 지휘했습니다. 그때 관객석 맨 앞에 앉아 있던 한 중년 남성이 조용히 일어나더니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고, 지휘자처럼 셔츠 차림으로 앉았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관객들은 정적이 흐른 듯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둘 겉옷을 벗고, 셔츠 차림으로 오케스트라를 관람했습니다. 그날의 음악회는 지휘자와 관객이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한 감격스럽고 성공적인 공연이었습니다.
호크마 주석
11:1
온 땅 - 어떤 한정된 지역이나 그곳 주민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구에 사는 모든 인간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므로 Living Bible은 '전인류'(all mankind)로, 공동번역은 '온 세상'으로 번역하였다.
구음이 하나이요 - 직역하면 '한 입술'. 바벨탑 사건 이전에는 인류의 언어가 동일했음을 강조하는 환유법적 표현이다. 이러한 언어의 통일성은 인류가 한 조상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입증해 준다.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 직역하면 '한 낱말'. 이는 당시 언어의 형태나 단어, 그리고 뜻이 인종이나 민족, 지역간을 막론하고 같았음을 뜻한다. 이러한 언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부여하신 특별한 의사소통 기능인데 바벨탑 사건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혼잡된 언어는 비록 비교 언어학, 언어 분석학 등이 끝없이 발달한다 해도 인간 머리만으로는 그 통일성을 완전히 밝혀 내지 못할 것이다.
11:2
동방으로 - 대홍수 후 노아 가족 및 그 후손들이 거주하였던 아라랏(8:4)에서 바벨론은 정확히 남동쪽이 된다. 그러나 이를 가리켜'동방' 이라 한 것은 기본 방향만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할수 있다.
옮기다가(* ,나사) - 원뜻은 '잡아뽑다'(사 33:20)로 유목민들이 이동 할 때마다 유숙하기 위해 쳐놓았던 장막의 말뚝을 뽑는 것에서 나온 말이다(민 2:34).
평지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비크아'(* )의 본래 의미는 '나누인 사이',즉 산과 산 사이의 비교적 넓고 평평한 골짜기를 가리킨다. 그러나 70인 역이 이를 '페디온'(* ,넓은 평지)으로 번역하고 있듯이 여기서는 상당히 넓게 펼쳐진 평야 지대를 가리킨다. 이 같은 장소는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길을 나섰던 유목민들의 눈길을 단번에 끌었을 것이다.
11:3
서로 말하되 - 직역하면 '각자 그 이웃에게애기하다'.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배척하면, 인간끼리의 중지(衆智)를 모아 일을 결정하되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결의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내 주고 있는 구절이다.
자 - 서로 격려하거나 무슨 일을 권유할 때 쓰이는 단어로 '준비하자', '시작하자'등의 의미이다. 공동 번역은 '어서' 로 번역하였다.
견고히 굽자 - 문자적 뜻은 '굽고 또 굽자'.햇볕으로 벽돌을 건조시킨는 것이 고대인들의 일방적 방법이었던 점에 비추어 불로서 벽돌을 굽는 이 방법은 당시 그들의 문명이 상당한 수준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증거해 준다<1,2,3,4,5,6,7,8,9절 강해>.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 자연석이 풍족하지 못했던 시날(바벨론)지역에서 가마를 이용, 벽돌을 구워내는 방법을 개발한 것은 문명의 개가(凱歌)였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불에 구운 벽돌은 자연석보다 더 내화성(耐火性)이 강하기 때문이다.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 벽돌과 벽돌을 견고하게 접착시키는 데에 진흙이나 회반죽 대신 역청을 사용하였음을 뜻한다. 여기서'역청'(* ,헤메르)은 '끓다'란 뜻의 '하르마'에서 파생된 말로 바벨론이나 사해 부근의 지하 분수지에서 기름(oil)처럼 끓어 오르는 역청(* ,아스팔토스)을 말한다.
11:4
성과 대를 쌓아 - 여기서 '성'(* ,이르)은 '도시', '성읍'을 의미하며 '대'(* ,믹달)는 '탑'을 의미한다. 이는 곧 대제국 건설과 이를 기념하는 탑을 건설하려 한 것을 뜻하는데 이러한 건축 공사를 실행한 주체는 니므롯 왕조(10:8,9,10,11,12)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 '내가 하늘에 올라...나의 보좌를 높이리라'(사14:13)고 한 사단의 자만과도 같은 자만심의 발로이다. 그러나 하나님 께선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 지리라'(마 11:23)고 경고하신다.
우리 이름을 내고 - 직역하면 '우리 스스로를 위하여 이름을 새기고'. 이는 바벨탑을 건축한 일차적 동기로 무실론적인 인본주의와 허망한 인간의 명예욕을 드러내 준다.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은 각자 벽돌에다 자신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 속에서 바벨탑 건축자들의 이름은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아이로니칼하게 도 자신을 드러냄 없이 주를 위해 겸허하게 살다간 주의 종들의 발자취는 길이 남아 빛나고 있다(히 11:4-40).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 바벨탑 건축의 두번째 동기로 가인의 후예들이 가인이 받은 땅에서의 유리 방황하는 저주(4:12)를 인간적인 수단으로 극복해 보려고 하는 교만과 무지를 드러내 준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인류가 번성하여 땅에 널리 퍼지고 충만하는 것이었지 결코 각 개체들의 자주권이 억압당하는 세계적 단일 제국 형성에 있지아니 하였다(1;28;9:1).
11:5
여호와께서...강림하셨더라 - 간견적 형태의 현현(출 19:20;민 12:5)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 행위를 간섭하시고 중재하시기 위하여 역사하는 것을 뜻하는 신인 동형동성론적 표현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간섭은 자신에 대해 반역하는 교만한 인간들을 징계하고 심판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7,8절) 이를
가리켜 한 유대 랍비는 '하나님이 자비의 보좌에서 심판의 보좌로 내려오셨다' 라고 평하였다.
11: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 '그 중심에 이르시되'(8:21)와 같은 의미로 하나님께서 이미 마음 속에 스스로 결정해 놓았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무리(* ,암) - 동질성이 강조되는 집단. 즉 동일한 목적 아래 힘을 규함하며 협력하는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는 인간들이 죄를 짓는 데 집단적 일체감을 느낀것을 지적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 인류 공동체적 범죄가 가능했던 조건이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단일 언어를 주신 것은 서로 합력하여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도록 하기 위함이었는데 인간은 오히려 이것을 악용하였으나 그 결과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와 선물을 거두어 가신 것은 당연하다.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수 없으리로다 - 직역하면 '이제는 그들로부터 그들이 하려고 마음 먹은 것들을 끊을수 없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추구하는 것을 막을 방도가 하나님께서 없다는 뜻이 아니다.다만 이는 그들의 불순한 생각이 절정해 달해 다시는 돌이킬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뜻일 뿐이다(3:22).
11:7
자 우리가 내려가서 - 5절과 동일한 신인 동형 동성론적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라는 복수형이 사영된 것은 단일한 신성(神性) 가운데 영원하고 동일한 삼위(三位)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해 준다<1:26>. 한편 여기서의 '자'(Come)는 4절의 것과는 대조되는 것으로 삼위 하나님이 서로에게 다짐하며 권유하는 형식의 말인데 이것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 목적이 동일함을 나타낸다(요 6:38,39).
언어를 혼잡케 하여...못하게 하자 - '혼잡하게 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발랄'(* )은 '뒤섞다'는 뜻이다(레 2:4;민 15:6).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하나님께서 어떨까; 언어를 분리, 단절시키셨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본절은 언어란 것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는 문화 유산이긴 하나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강권적인 언어 분리 사역에 따른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분명히 증거해 준다 <1-9 강해>.
11:8
여호와께서...온 지면에 흩으신고로 -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는 단순 히 인류를 징계하려는 데만 그 목적이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이 땅에 충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시고 명령하신 축복이며 따라서 인간의 역반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신이 이를 강권적으로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과 계획을 역사 속에 성취시키시는 신실하신 분인데 우리가 그분의 약속을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굳게 믿을 수 있는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다(삼상15:29).
< 설 교 >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사무엘상 11장
사무엘상 10장 말씀을 통해서 사무엘이 공식적으로 사울을 모든 백성들 앞에서 제비를 뽑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사무엘상 11장 말씀은 사울이 암몬 사람을 쳐서 승리함으로써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암몬 사람 나하스가 요단강 동쪽 지역 므낫세 빈 지파의 영토인 길르앗 야베스를 침략하였습니다. 암몬 족속은 창세기 19장에 보면 롯이 딸과 동침하여 낳은 족속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후 롯은 두 딸과 함께 산에 올라가 굴에 거하였습니다. 이때 그 딸들이 자손을 잇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술을 먹인 후 동침하여 아들을 낳습니다. 큰 딸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고, 작은 딸은 아들을 낳아서 그 이름을 벤암미라고 하였습니다. 모압은 모압 족속의 조상이 되었고, 벤암미는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암몬 사람 나하스의 침공을 받자 나하스에게 봉신 조약을 맺고자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희를 섬기리라”(1). 참으로 굴욕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암몬 족속 나하스는 이와 같은 야베스 사람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더 굴욕적인 제안을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어야 너희와 언약하리라”고 했습니다(2).
요세푸스에 의하면 오른쪽 눈을 뺀다는 것은 전투를 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일이라고 합니다. 옛날에 전투를 할 때 보면 대부분의 병사는 왼손으로 방패를 잡고 왼쪽 눈까지 가리고 오른쪽 눈으로 적을 보고 칼과 창으로 공격을 합니다. 그런데 그 오른쪽 눈을 빼 버리면 전쟁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하스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어야 너희와 언약하겠다”고 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전투를 할 수 없는 자들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치욕적인 모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으로 이스라엘은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모욕은 여호와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3절을 보면 이에 야베스의 장로들은 나하스에게 일주일간의 말미를 달라고 합니다. 그 일주일 동안 이스라엘 전역에 사자들을 보내어 자신들을 구원할 자를 찾아보고 없으면 나하스에게로 나아가겠다고 했습니다. 곧 일주일 동안 전국에 사자를 보내어 구원할 자를 찾아보고 없으면 나하스의 제안대로 오른쪽 눈을 뽑고 봉신조약을 맺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안은 상식적으로 보면 받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하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제안을 받아 주었습니다. 이것은 나하스가 얼마나 자신 만만 하였으며, 거만하였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야베스의 장로들은 사자들을 온 이스라엘 지경으로 보내었습니다.
그러면 사자들의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4절에 보면 “이에 사자가 사울의 기브아에 이르러 이 말을 백성에게 고하매 모든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더니”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서 저자는 야베스의 장로들이 이스라엘 각 지역으로 보낸 사자에 관해서 기술을 할 때에 사울의 기브아에 보낸 사자에 관해서만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야베스의 사자가 사울의 기브아에 이르러 나하스의 말을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지파들은 요단 동쪽 지파들의 위급한 형편에 마음이 아파 모든 백성들이 소리를 높여 울었습니다. 기브아는 요단강 서쪽 예루살렘 위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기브아는 야베스와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사사기서 21장에 보면 야베스의 처녀 400명을 기브아의 베냐민 지파에게 강제로 끌고 와서 결혼을 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 19-21장에 보면 어떤 레위인이 예루살렘에서 첩을 얻었습니다. 이들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이르러 유숙을 하였는데 그 성의 비류들에 의해 욕보임을 당하고 죽게 됩니다. 이에 그 레위인이 첩의 시체를 열 두덩이로 나누어 온 이스라엘 사방으로 보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이 베냐민 지파를 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베냐민 지파가 진멸을 당하고 겨우 육백 명만 살아남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베냐민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딸을 아내로 내어주지 않기로 맹세를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한 지파가 이스라엘 중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베냐민 지파의 멸문을 막기 위해서 이스라엘 지파 중 미스바에 올라오지 아니한 야베스 길르앗 거민을 치고 젊은 처녀 400명을 얻어서 베냐민 자파의 남은 자들과 혼인하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기브아와 야베스는 역사적으로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5절에 보면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울부짖는 백성들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에 백성들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로 우느냐?” 이에 그들은 야베스 사람들의 위급한 상황을 사자들이 말한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었을 때 사울에게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6절에 보면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라고 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되어서 그에게서 거룩한 분노가 크게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사사기서를 공부할 때 본 것처럼 사사시대에 사사들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을 때 일어났던 전형적인 현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사울에게서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사울이 여호와의 전쟁을 지도할 군사 지도자로 변형되는 경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사울은 갑짜기 엄청난 용기와 담력의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곧 사울이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한 겨리 소를 취하여 각을 뜨고 사자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경에 두루 보내어 가로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아니하면 그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즉시 일어나 자신이 몰고 가던 한 겨리의 소를 잡아 각을 뜨고 사자들에게 주어서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두루 보내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아니하면 그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고 하였습니다(7). 이에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두려움이 임하여 한 사람같이 나왔습니다. 그때 모인 백성의 수가 어떠하였습니까? 8절에 보면 사울이 베섹에서 그들의 수를 계수해 보니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 명 이었고, 유다 사람이 삼만 명이었습니다.
9-11절을 보면 모인 무리들이 사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을 전하라고 합니다. 이에 사자들이 돌아가서 야베스 사람들에게 고하자 야베스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습니다(9). 그리고 야베스 사람들이 암몬 족속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내일 너희에게로 나아가리니. 너희 소견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다 행하라”고 합니다(10). 마치 구원자가 자신들에게 없는 것처럼 말을 하여서 그들로 안심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 후에 이튿날에 사울은 백성을 삼대로 나누어 새벽에 암몬 족속의 진을 기습하였습니다.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을 치매 그들이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11). 사울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울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정하는 왕으로 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12-15절 말씀은 사울이 길갈에서 왕으로 옹립되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사울이 가로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 사울로 왕을 삼고 거기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12-15). 백성들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고 한 자들을 끌어내어 죽이자”고 합니다. 그러자 사울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3절을 다시 보면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울은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긴 것이 여호와께서 구원을 베푸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해서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용납하였습니다. 이러한 왕이 하나님께서 세우시고자 하시는 왕입니다. 그러므로 11장에서 구원이라는 말이 중심을 이루며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구원자가 없으면 자신들은 나하스에게 눈이 뽑히고 종이 될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삼손이 눈이 뽑히고 조롱을 당한 모습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자가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사울입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거룩한 영적인 분노가 일어나고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들에게 임하여 한 사람 같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이 일어나고 나서 사울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13절을 다시 보면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사울은 이때 처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주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암몬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승리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무엇을 명합니까? 14절을 다시 보면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라고 합니다.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곳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처음 할례를 행한 곳입니다. 여호수아서 5:1-9절을 보면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죽었는데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오직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마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로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년 동안을 광야에 행하였더니.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치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필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길갈’이라는 이름의 뜻이 ‘굴러가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의 수치를 길갈에서 굴러 버린 것처럼 이제 사사시대의 그 모든 모욕과 수치와 조롱을 굴러버리는 것이 바로 나라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왕을 세우는데 이 왕은 여호와의 구원을 증거 하는 자로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갈에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데 여호와 앞에서 세웁니다. 그리고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립니다. 그러자 사울과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15절을 다시 보면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 사울로 왕을 삼고 거기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길갈에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라는 사무엘의 제안은 단지 왕정을 새롭게 도입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라’라고 번역된 단어가 ‘함무르카’(hk;Wlmh])라는 단어 인데 ‘그 왕국’(the Kingdom)이라는 말입니다. 곧 출애굽기 15:17-18절에서 예언되고 있는 여호와의 다스림을 지칭합니다. 출애굽을 통한 구원 이래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왕국이 아닌 적이 한시도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15:17-18절을 보면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새롭게 하자’라는 말은 이미 출애굽의 구원의 역사 이후로 여호와께서 왕 노릇하신 그 왕국을 새롭게 하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대리자를 왕으로 세워 ‘하나님의 통치’를 새롭게 하자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 왕을 중간에 두고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사무엘의 호소는 결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서는 열왕기 시대의 인간 왕들의 학정을 미리 내다보면서 사무엘의 정신으로 분연히 일어나 인간 왕과 대결할 예언자들의 출연을 미리 내다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하는 왕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크게 대결하는 인간 왕국을 이룬 인간 왕들을 질책하고 탄핵하고 심판했습니다. 이처럼 사무엘이 인정했던 왕정은 인간 왕을 절대화 하는 이교도적인 왕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왕정 곧 예언자적인 감시와 감찰의 영향 아래 있는 왕정이었습니다.
8장에서 우리가 살펴봤듯이 이스라엘 장로들과 유력자들이 처음으로 왕을 요구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에는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하는 배교적인 동기가 작용하고 있음을 아시고 불쾌하게 응답하셨습니다. 사무엘상 8:6-9절을 보면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구한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사울의 경우를 보면 세 가지 절차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언자이자 사사요, 제사장인 사무엘을 통해서 먼저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제비뽑기를 통해서 공개적인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암몬과의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는 것은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도록 하시기 위한 안전 장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왕정 도입을 허락하시면서 왕의 임명과 옹립을 제사장과 예언자들의 감독 아래 두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예언자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을 왕으로 세움으로써 세속 왕권이 전제화 되는 것을 막고 군사적 지도력을 행사하는 직분으로 제한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처음부터 전제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이방 족속의 왕을 가리키는 ‘멜렉’이 아니라 군사령관을 나타내는 ‘나기드’로 불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새로워지는 것은 여호와 앞에 서는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서 자신의 수치를 굴러 보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여호와 앞에 선다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 앞에 서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선다는 것은 모든 언약을 완성하시고 뱀의 머리를 부수어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서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울을 보면서 얼굴과 몸을 고치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언약의 갱신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주님 앞에서 새로워지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뱀과 언약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뱀의 머리를 십자가로 부수어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구원자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사단 마귀가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갈 것입니다. 신명기 28:7절에 보면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자가 이미 나타났으며, 이미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만 우리가 날마다 새롭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우리의 구원자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확신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피조물로써 날마다 기뻐하며 우리 왕의 통치를 온전히 받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사울 왕의 권위
삼상 11:1-11 / 주 바나바
현대를 일컬어 '권위의 실종 및 부재시대' 라고 말합니다. 어느 시대에나 권위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만큼 권위가 땅에 떨어진 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근대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이성을 무한 신뢰하던 모더니즘의 시대를 넘어 현재는 아무 것도 확신할 것이 없다는 포스트 모더니즘시대입니다.
절대적 진리란 없고 오로지 상대적인 것만이 존중 받는 시대입니다. 전통보다는 개인의 취향이 더 존중하는 시대에서 권위는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개인의 능력과 재능을 신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가득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만든 힘과 영향력일 뿐입니다.
종교 영역 뿐만 아니라 도덕적 영역에도 이런 생각이 당연시 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생각을 가진 부모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권위를 행사하지도 않고, 권위 아래 있는 자녀에게 권위를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에 권위자인 어른이 사라졌습니다. 가정에서 부모는 스스로 권위의 자리에서 내려와 탈권위화했습니다. 대신에 그 권위의 자리에 아이를 앉혀 놓았습니다.
가족들이 아이를 왕처럼 모십니다. 부모는 자녀의 시중을 들기 위해 물질적인 것 뿐만 아니라 정신적 투자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란 자녀들이 부모의 권위를 알리가 없습니다. 부모의 권위를 모르니 부모 공경은 고사하고 부모를 공격하는 비참한 상황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부부 관계에도 올바른 권위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동등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역할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남녀가 서로 평등한 동반자로서 만족합니다.
이런 가정의 흐름은 고스란히 교회에도 나타납니다. 교회에 권위주의가 난무하면서 바람직한 권위까지 사라지고 있어 큰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과 위정자의 권위도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권위자가 억지로 권위를 세우려다가 권위주의로 빠지기도 합니다.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권위와 권위주의는 반드시 구분되어져야 합니다. 권위는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한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권위주의는 어떤 일에 권위를 내세우거나 권위에 복종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과거 절대적인 지도자의 권위를 중심으로 조직된 권위주의 국가의 형태로 지내온 정치적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국가 그 자체가 국민보다 우선한다는 사고가 그 근저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권위주의 국가의 통치자들은 권위와 권위주의를 혼동했다고 하겠습니다. 권위주의 때문에 권위를 권위주위와 동등하게 취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잘못된 '권위주의'는 청산해야합니다. 그러나 바람직한 '권위'는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권위에 대한 문제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대로 사울을 왕으로 세워 왕정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본문은 사울이 왕으로 선출 되어 그 첫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백성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지금 시대로 말하면 지도자로 세워지는 권위를 말합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은 어떤 마음과 자세로 국민들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이고, 한 가정이나 공동체에 속한 한 개인에게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며 무엇보다도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분들에게 교훈하시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울이 왕으로서 인정받기 위해서 처음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은 그들의 적국인 암몬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암몬은 이스라엘의 요단강 동쪽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길르앗 야베스에게 전쟁을 걸어 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암몬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조상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나안 땅에 함께 와서 물이 넉넉하고 농사가 잘 되는 소돔과 고모라의 좋은 땅을 먼저 차지하며 부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소돔과 고모라는 타락한 도시가 되어 하나님이 유황과 불로 심판할 때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롯의 가족이 구원을 받습니다.
이때 롯의 아내는 그동안 쌓아 놓은 것이 아쉬워 뒤를 돌아봄으로 소금기둥이 되고 롯과 두 딸만 구원을 받아 산에 있는 동굴에서 삽니다.
그런데 두 딸이 후손을 잇기 위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한 후에 동침을 합니다. 불륜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큰 딸이 술에 취하게 한 아버지와 동침하여 '모압'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이들이 바로 모압 자손이 됩니다.
둘째 딸도 동일하게 나은 아들이 '벤암미' 인데 이들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암몬 자손의 조상'입니다.
이렇게 생겨난 모암과 암몬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시 역할을 하며 괴롭히는 나라로 등장합니다.
바로 이러한 혈통으로 이어진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 지역 길르앗 야베스로 쳐들어와 전쟁을 하자고 시비를 걸자,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란에 빠져 평화협정을 요청합니다.
우리들이 너희에게 조공을 받쳐 섬길 테니 언약을 맺자고 사정합니다. 싸울 용기와 군사의 힘도 구비하지 못한 수치의 모습입니다.
더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말은 본문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조공을 바치며 섬기는 것도 모자라서 오른쪽 눈을 빼야 언약을 맺겠다는 답변합니다. 왜 한 눈만 빼면 언약을 맺겠다고 했을까요?
두 눈을 다 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조공 받칠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한 눈만 빼면 조공은 바칠 수 있지만 한 눈으로는 전쟁을 일으켜 자기들에게 저항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큰 모욕입니다. 이런 모욕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장로들은 암몬 '나하스'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3절입니다. “우리에게 이레 동안 말미를 주어 우리가 이스라엘 온 지역에 전령들을 보내게 하라 만일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 네게 나아가리라.”
이스라엘 장로들의 청원을 암몬의 '나하스'가 들었을 때 아무런 소용이 없는 대책이라고 판단되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이스라엘 전국을 돌아다녀도 7일이 아니라 한 달을 기다려도 구원할 자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전령들의 위급한 성황을 들은 백성들은 통곡하며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진 5절 말씀을 보면 참으로 이상한 장면입니다. 이 때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다가 나옵니다.
아니 이미 기름 부음을 받아 이스라엘 왕이 되었는데 소를 몰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 왕정정치가 완전히 정착 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아직 공식적인 왕으로서 활동할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사울 왕에게 공적으로 '권위'를 입혀주시는 기회입니다.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사울이 공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농부로 일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암몬과의 전쟁을 통해 사울의 왕의 권위를 세워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목할 말씀이 본문 6절입니다.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하나님의 영의 큰 감동을 사울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도력을 발휘합니다. 한 겨리의 소를 잡아 각을 뜨고 전령들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두루 보내라고 명령을 하달합니다.
그러면서 강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그 때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들에게 임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온 백성들이 한 사람 같이 사울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권위를 통한 강한 리더십의 결과입니다.
왕의 권위가 세워지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동원된 군사들의 수를 세어 보니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삼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합해서 33만 명의 군인들이 동원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사울의 모습은 금방 밭에서 쟁기질 하다가 나온 평범한 농부의 몰골인데 암몬과 전쟁을 하자고 소집 명령을 내리자 두려움에 떨고 있던 백성들이 무려 삼십 삼만 명이나 적들과 싸우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아직 왕의 제도가 정착되지 않은 시기인데 이렇게 짧은 시간에 전쟁 할 수 있는 장정만 삼십삼만이 모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권위나 리더십'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사람이 억지로 세운 '권위'는 언젠가 곤두박질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비참하게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위, '영적리더십'으로 사울은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전투 역시 전략적으로 지휘했습니다. 본문11절 말씀입니다.
“이튿날 사울이 백성을 삼 대로 나누고 새벽에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들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한 승리입니다. 사울은 이렇게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모든 백성들로부터 왕으로 확실하게 인정을 받게 됩니다.
사울이 왕으로 인정받기 전에는 어떠했습니까? 불량배들이 이르기를 어떻게 저런 사람이 우리를 구원할 왕이 되겠느냐고 멸시했지만 12절 말씀을 보면 그 떨어진 사울의 자존심과 권위도 하나님이 회복해 주셨습니다.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이렇게 사울은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종교적 의식을 통해서 진정한 왕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왕의 권위'입니다.
이러한 절차를 본문15절 말씀이 말합니다.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이렇게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 사울 왕에게 크게 임하여 하나님이 주신 '리더십과 권위'로 이루게 되었음을 사울 왕이 스스로 인정하고 고백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사울이 이르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
우리들은 본문의 사건과 이야기를 통해 '권위'의 중요성을 발견합니다.
우리들은 그 권위의 근거는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본문은 말씀하십니다. 기독교 리더십의 영적권위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크리스천 리더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교역자이든 평신도 리더이든 교회 지도자이든 간에 크리스천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를 탐구하는 일입니다.
스천 리더십의 권위의 요건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성령충만'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울 왕이 전쟁터에 나가서 승리하기 전에 구비된 그의 권위는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된 일입니다. 바로 ‘영적권위로서의 성령충만’입니다.
을 ‘성령충만’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엡6장18절에서 영적리더십의 권위의 근거를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충만’이라는 것은 ‘완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한번 충만하게 되면 더 이상 충만을 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의 절대적 의미도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상대적인 의미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충만의 양은 받는 그릇에 따라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채워지는 충만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한 예화입니다. 3살 짜리 어린이에게 채워지는 공기의 폐활량과 어른의 그것은 많은 양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둘 다 동일한 충만의 상태임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갓 태어난 신자도 성령충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신앙이 자람에 따라 그 충만의 양이 더 커져야 함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커진다는 것은 성령님을 받는 것이 양적으로 더 증가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성령님은 인격자이셔서 부분적으로 나누어서 받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을 때 신성의 모든 충만 가운데 계신 성령님께서 전인격적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분께 ‘내가 더 온전히 지배를 받는다’는 개념입니다.
내가 더 많이 받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나를 더 많이 ‘주관하신다, 인도하신다, 아무런 장애도, 막힘도, 거리낌도 없이, 자유롭고 편하게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하게 되면 나의 삶의 전 영역을 성령님께서 주관하시고 인도하시고 조절하십니다. 이것이 충만의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전에는 교회 안에서만 은혜와 성령 안에 살았으나 이제는 교인과 대중 앞에서 뿐만 아니라 은밀한 곳에서도 성령님이 주관함을 받고 살아갑니다.
성령충만은 우리들에게 많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지만 한 가지 분야를 예를 든다면 특별히 우리의 말을 통해서 영적인 상태를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에머슨은 “우리들은 우리들의 말로 다른 사람 앞에서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됨됨이, 인격, 마음의 상태가 말에 다 나타나게 됩니다.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을 말로 나타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을 가장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인 우리들의 말에 성령님이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세우는 수단이 나타나게 됩니다. 언어가 변화되어 언어로 축복하는 인생을 삽니다.
또한 성령충만은 계속적으로 체험되는 은혜요, 지속시키고 유지해야 할 은혜입니다.
단순히 이전에 받았던 성령충만의 상태 유지만이 아니라 또 새로이 성령충만을 공급 받아야 합니다.
어제 획기적으로 성령충만 받았다고 해서 계속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자동적으로 지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한번 큰 은혜를 받고 난 다음에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경우를 봅니다. 그런 틈을 타서 마귀가 역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특별한 성령체험을 한 사람들이 그런 체험을 한 다음에 죄의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우리들은 획기적으로 성령충만을 받았을지라도 매일같이 새롭게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책임은 성령님의 역사를 거역하거나 소멸치 말고 성령님을 따라 삶으로써 계속 충만으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우리들은 '권위의 부재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영적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공동체를 아름답게 세우기 위해서는 바로 '성령의 권위'가 우리들의 '영적권위'가 되어야합니다.
그렇습니다. 잃어버린 권위의 영적회복은 성령충만으로 가능합니다.
사울 왕이 성령충만으로 나아갈 때, 용기도 생기고 담대함도 회복되었고,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치와 연합이 이루어져 무능력하고 힘이 없는 이스라엘이 강한 적들을 대항하여 싸워서 이기는 승리의 군대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에는 권위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어떤 권위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위입니다.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살아있는 교회, 축복 받는 가정,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일터의 키는 오직 성령충만입니다.
어느 조직이나, 회사나, 가정이나, 국가에서 지도자가 살면 살고, 그들이 죽으면 죽습니다.
지도자가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리더십이 살면 교회가 삽니다.
우리교회의 사활은 목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 등 구역장 등 영적리더들에게 달려있습니다. 영적권위의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오늘도 이 시대의 성도들의 진정한 영적권위의 회복을 위해 이렇게 축복하십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들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3장9절) 아멘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삼상 11장 01절 ~ 절 / 양인국목사
1.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세상이 말하고 있는 삶의 방식 외의 또 다른 하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 또 다른 길이란 믿음의 삶을 말한다. 믿음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탐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게 하고, 이웃과 더불어 살게 한다. 실제로 믿음의 삶은 우리 자신과 이웃들이 함께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믿음의 삶 외의 다른 삶을 생각할 수 없다. 오늘 믿음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그리고 믿음의 삶을 살 때 어째서 모두가 함께 복된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한다.
2. 본문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암몬이 길르앗 야베스를 침략했을 때 야베스는 싸울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암몬과 협상하려 했다. 그들은 암몬왕 나하스에게 나가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그러나 암몬은 자신들의 힘을 믿고 야벳과 협상하기를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그래서 야베스 장로들은 전령들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게 보내어 자신들을 도와 줄 것을 요청했다.
야베스가 보낸 전령들은 사울이 살고 있는 기브아에도 이르러 그들에게 자신들의 사정을 말하며 도와 줄 것을 간청했다. 기브아 사람들은 그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그들과 함께 울었다. 사울은 그때 밭에서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는데 사람들이 우는 소리를 듣고 그들에게 “무슨 일로 우는지” 물었다. 그리고 백성들로부터 “그들이 지금 어째서 울고 있는지”에 대하여 들었다(11:4,5). 사울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두 가지 일을 행하셨다. 하나는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되게 하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성들 가운데 두려움이 임하게 하여 사울을 따르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일을 행하신 것은 사울로 하여금 왕으로서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 수 있도록 주신 기회였다. 이미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기회를 주시면 믿음으로 행하라고 권고해 주셨고 그가 믿음으로 행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말씀해 주었다. 이 말씀대로 사울은 믿음으로 행하였고 그리고 이로 인하여 암몬과 싸워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여기 믿음의 삶이란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을 때 그 기회를 믿음으로 응답하는 삶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여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다른 언어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었다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과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었다는 말은 표현만 다를 뿐 동일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사울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었을 때, 즉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셨을 때 믿음의 사람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게 될 것이다.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을 때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위엄과 권위와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은 지도자가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사울이 왕으로서 택함을 받았지만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왕으로서 권위를 인정받아야 한다. 실례로서 모세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광야 사십년 동안 인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권위를 갖도록 해 주셨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홍해를 가르심으로 그로 하여금 광야 사십 년 동안 백성을 인도하는 지도자로서 권위를 갖게 해 주셨다. 그리고 모세의 대를 이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의 권위를 높여 주심으로 그로 하여금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을 정복하도록 해 주시기 위하여 요단을 가르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권위를 인정 받도록 해 주시기 전까지는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다만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권위를 덧입을 때까지 기다리는 기간은 그들로 하여금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기간으로서 의미를 지닐뿐이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권위를 허락해 주실 때 그는 이전의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사울의 예는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사울은 본래 소심한 자였다. 그는 잃어버린 나귀를 찾으러 다닐 때, 사환이 선지자에게 물어보자고 제한했지만 그에게 줄 예물이 없다고 하여 그를 찾아가기를 꺼려했던 자였고(9:7), 또한 미스바에서 왕으로 선출 되었을 때 백성들 앞에 나서기가 두려워 행구 사이에 숨어 있던 자였다(10:22).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그를 감동시켰을 때 그는 당시 기브아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서도 찾을 수 없는 담대함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이끌어가는 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능력 있는 자가 되는지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은 우리의 현재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우리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새 마음을 갖게 되고(10:9).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담대함과 뛰어난 지도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11:6,7).
그러나 왕은 이처럼 내적인 준비만으로는 진정한 이미에서 왕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백성이 없는 왕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왕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울을 위하여 두 가지 일을 행하셨다. 하나는 백성들로 하여금 사울을 따르도록 마음에 두려움을 주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울로 하여금 대적과 싸워 승리하도록 해 주신 일이다. 사울이 모압과 싸우기 위하여 군사들을 모집했을 때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주심으로 삼십만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이 모집에 응했다. 또한 하나님은 사울로 하여금 모압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주심으로 이스라엘 중에 어떤 사람도 사울의 왕권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도록 해 주셨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은 연약함에 빠져 무기력한 사람들에게 용기와 담대함을 주어 강한 자가 되게 하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다. 9절의 말씀이다. “무리가 와 있는 전령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라 하라 전령들이 돌아가서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하매 그들이 기뻐하니라” 사울은 한편으로는 군사를 모집하였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자들을 야베스로 보내어 야베스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주었다.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라(11:9)” 이 메시지로 인하여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낙심해 있던 야베스는 비로소 이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기 때문에, 언제나 확신을 가지고 말을 할 수 있고, 또한 이런 말은 낙심한 자들에게 소망을 준다.
바울이 로마로 향해하던 중 유라굴로라는 폭풍을 만났을 때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폭풍으로 인하여 살 소망까지 잃어버린 상태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여러분들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5)” 이와 같은 확신 있는 말은 오직 하나님의 신에 감동될 때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말은 언제나 절망과 좌절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준다.
또한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은 어떤 대적과 싸울지라도 언제나 승리한다. 사울은 자신이 야베스 사람들에게 말한대로 이튿날 군사를 이끌고 대적 암몬과 싸워서 승리를 했다. 본문은 사울과 이스라엘 군대가 얻은 승리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이튿날 사울이 백성을 삼 대로 나누고 새벽에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들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11:11)”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을 받을 수 있고, 이런 사람은 자연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크고 위대한 일들을 행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악을 행하는 자들을 억제하고, 사랑을 증진시키므로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복되게 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에 감동 받는다는 것이 우리의 삶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믿음의 사람들이 언제나 가지고 있는 소원은 하나님이 영에 감동되는 것이다. 여기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의미와 같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 편재, 영원하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지 못하시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은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할 뿐만 아니라 자연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한계도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는 것은 복된 사람을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요청되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는 오늘의 시대에 샬롬을 회복하기 위한 진정한 시대요청이기도 하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에 감동 받게 해 주시고 이로 인하여 우리와 이웃이 복된 삶을 살게 해 주시고 이 시대에 샬롬을 가져다주는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아멘
승리의 비결
삼상 11장 6~11절 / 전승문목사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되는 무서운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인류역사는 단 한 순간도 전쟁이 없었던 적이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피할 수 없는 것,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것, 그것이 전쟁이라는 뜻입니다. 중요한 건 전쟁은 절대로 패배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전쟁은 안 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전쟁에 패배하는 것 그보다 비참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 그것이 바로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은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불가불 전쟁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승리해야만 하는 겁니다.
이것은 영적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사실은 영적전쟁이야말로 반드시 승리해야하는 전쟁입니다. 세상의 전쟁도 패배하면 너무너무 비참해집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이 영적전쟁에서 패배하는 겁니다. 세상의 전쟁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거지만 영적전쟁의 패배는 영원한 패배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전쟁은 마귀와의 전쟁입니다. 공중권세를 잡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무서운 마귀와의 전쟁입니다. 그러니 그 전쟁에서 패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혼을 빼앗깁니다. 영혼이 파괴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지옥에서 영원히 멸망당하게 되는 겁니다. 안타깝지만 영적전쟁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전쟁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마귀와의 이 전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류의 대다수는 이미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인류의 대다수는 이미 마귀에게 패배하여 다 그 수중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현재 지구상의 인류는 대략 80억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구원받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마귀와의 영적전쟁에서 승리하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많은 목사님들이 많아야 2억 명 정도 될 거라고 합니다. 기가 막힌 말입니다. 80억 중에 고작 2억 명 정도만 구원을 받은 겁니다. 나머지 78억은 여전히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겁니다. 78억이나 되는 수많은 영혼들이 여전히 마귀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은 그 실상을 보여주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세상이 어떤 곳인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그걸 알려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특히 구약성경은 영적전쟁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생생한 말씀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책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자칫하면 우리와는 큰 상관이 없는 말씀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구약성경도 우리를 위한 생명의 말씀입니다. 영적전쟁에 관해서는 신약보다도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지나가버린 과거의 전쟁이 아닙니다. 우리와 상관없는 먼 나라 지구 반대편의 전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전쟁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우리의 전쟁입니다. 78억이나 되는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출해내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인 겁니다. 그래서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그 전쟁을 이길 수 있는지 그 승리의 비결을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영적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사실 마귀는 대단히 강력한 존재입니다. 마귀는 절대로 우습게보면 안 되는 무시무시한 존재입니다. 세상에는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마귀와 싸워서 자기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힘으로도 안 되고 지혜로도 안 되고 지식이나 능력으로도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는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마귀를 이기고 영적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방법은 하나입니다. 방법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오직 그 때만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 방법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실까요? 예수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과 함께 사는 존재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는 마귀가 우리를 지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자 하나님과 분리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실 수 없는 분이라 죄 때문에 하나님 곁을 떠나게 된 겁니다. 그래서 마귀에게 사로잡힌 겁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마귀에게 붙잡힌 겁니다. 예수님은 그 죄 문제를 해결해주신 분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하심으로 우리들의 모든 죄를 다 해결해주신 분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용서받습니다. 그리고 죄를 용서받으면 다시 하나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우리도 마귀를 대적하고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그 방법뿐입니다. 영적전쟁에서 마귀를 이기고 승리하는 방법은 오직 그 방법뿐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아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기는 겁니다. 신약성경은 그 방법을 교리적으로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은 그 방법을 예를 들어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예로 들어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알려주는 말씀인 겁니다. 오늘 말씀도 그 말씀입니다. 우리가 영적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이 다스리는 동안에는 어떠한 적도 이스라엘을 침범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이 아니라 새로운 왕을 원했습니다. 이스라엘도 다른 나라들처럼 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세워진 사람 그래서 세워진 왕 그가 바로 사울입니다. 사람들이 원한 사람, 사람들 마음에 맞는 사람, 그가 바로 사울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되자마자 이방민족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마귀역사처럼 끈질기고 집요한 것은 없습니다. 마귀 역시 졸지도 않고 잠들지도 않습니다. 마귀는 쉬지 않고 틈을 노리다가 작은 빈틈이라도 보이면 그 즉시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깨어있으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아니라 사울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사람들이 세운 사람의 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원한 겁니다. 그러자 곧바로 마귀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실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다스리실 때 그때는 꼼짝 못하다가 인간의 왕이 세워지자 곧바로 공격을 시작한 겁니다.
전쟁은 암몬의 침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암몬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나라입니다. 지금의 요르단이 암몬의 영토입니다. 지금도 요르단의 수도는 암만이라고 불립니다. 그 나라가 이스라엘을 침공한 겁니다. 이스라엘의 길르앗 야베스 지역을 침공한 겁니다. 길르앗 야베스는 므낫세 지파의 영토로 요단강 동편에 있었습니다. 비옥한 지역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자주 일어나는 위험한 지역이었습니다. 암몬의 왕은 나하스(נָחָש)라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의 의미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나하스는 히브리어로 뱀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와를 유혹한 뱀 그가 바로 나하스입니다. 그러니까 나하스는 뱀 곧 사탄인 겁니다. 결국 뱀이, 나하스가, 마귀가 이스라엘의 길르앗 야베스를 침공한 겁니다.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은 그 나하스를 당해낼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맥없이 항복했습니다. 싸워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곧바로 항복한 겁니다 :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에 맞서 진 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들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하니”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암몬의 나하스를 사탄을 섬기겠다고 항복한 겁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이렇게 항복하는지 모릅니다. 싸워볼 엄두도 내보지 못하고 마귀의 공격 앞에 맥없이 무릎을 꿇는 겁니다. 그러나 마귀는 순순히 항복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을 요구합니다. 야베스 주민들은 항복하면, 돈만 주면 될 줄 알았습니다. 암몬이 원하는 것은 돈이니까 돈만 주면 물러갈 줄 알았던 겁니다. 그러나 나하스는 돈만을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야베스 주민들에게 오른쪽 눈을 빼라고 요구한 겁니다. 모든 주민들이 다 한쪽 눈을 빼야 살려주겠다고 한 겁니다. 나하스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 모두의 눈을 빼겠다고 소리쳤습니다. 길르앗 야베스를 시작으로 이스라엘 백성 전부의 눈을 빼겠다고 위협한 겁니다.
이게 마귀입니다. 이것이 마귀가 원하는 겁니다. 영적전쟁에서 패배하면 이런 일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마귀와는 타협하면 안 됩니다. 하나를 내어주면 열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한 시간을 양보하면 하루를 요구합니다. 하루를 양보하면 한 달을 요구하고 한 달을 양보하면 일 년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일 년을 양보하면 일생을 요구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그래서 성 프란체스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만약 마귀가 사람의 머리칼 한 올이라도 자기 것이라 부를 수 있게 되면 그는 즉시 그것으로 밧줄을 만들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게 마귀입니다. 아주 작은 약점만으로도 능히 밧줄을 만들어 우리를 꼼짝 못하게 옭아매는 존재입니다. 지난 3년간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이렇게 얽매였는지 모릅니다. 코로나 19라는 특별한 상황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양보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타협하고 그래서 용납하고 그래서 포기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안 됩니다. 그러는 바람에 마귀가 이제는 우리의 영혼을 밧줄로 얽어매고 있습니다. 끊어내야 합니다. 마귀의 올가미를 끊어내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마귀와는 절대로 타협하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은 절대로 타협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귀는 양심이 없습니다. 마귀는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영혼을 완전히 멸망시킬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야베스의 장로들이 이 기막힌 요구 앞에서 일주일의 시간을 얻었습니다. 일주일 안에 방법을 찾지 못하면 죽임을 당하든지 눈을 뽑든지 둘 중의 하나를 해야 하는 겁니다. 그들은 마지막 희망을 사울에게 걸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뽑힌 사울에게 마지막 희망을 건 겁니다. 하지만 사울은 아직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왕으로 뽑히기는 했지만 신하도 없었고 군사도 없었습니다. 아직은 궁궐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되었지만 여전히 밭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직은 사울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불량배라고 부릅니다 : “어떤 불량배는 이르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바치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잠잠하였더라 (10장 27절)” 불량배는 원어로 벨리야알(בְּלִיַעַל)입니다. 무가치한 사람들, 파멸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제나 이런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해주셔도, 사무엘이 뽑아 세워줘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어째서 그들은 사울을 인정하지 않았을까요? 자기가 왕이 되고 싶으니까, 자기를 주장하고 싶으니까,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그게 교만입니다. 그러는 게, 자기가 잘난 줄 아는 것이, 교만인 겁니다. 그런 사람이 불량배입니다. 그런 사람이 벨리야알, 무가치하고 파멸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사울은 그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왕이 되기는 했지만 아직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냥 하던 대로 농사나 짓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야베스에서 보낸 전령이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암몬의 나하스가 그들을 침공하고 모든 백성의 눈을 빼려한다는 끔찍한 소식을 가져온 겁니다. 그 소식을 듣는데 사울의 마음에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한 겨리의 소를 잡아 각을 뜨고 전령들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두루 보내어 이르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그랬습니다. 성령님이 사울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러자 사울이 소를 잡아 각을 떠서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두루 보내었습니다.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사울과 사무엘! 사울은 자신이 사무엘과 함께 있음을 천명했습니다. 자신은 단순한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이 함께하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라는 겁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의 부름에 온 이스라엘이 응답한 겁니다 : “사울이 베섹에서 그들의 수를 세어 보니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삼만 명이더라” 순식간에 33만 명이나 되는 엄청난 군사가 모집된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역사인 겁니다.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까?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마태 7:7~8)”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찾으십시오! 하나님의 방법을 찾으십시오. 문을 두드리십시오! 하늘의 문을 두드리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사울도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영이 성령님이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그래서 군사가 모인 겁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니까 군사가 모인 겁니다. 사울이 그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 “이튿날 사울이 백성을 삼 대로 나누고 새벽에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들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완벽하게 승리한 겁니다. 영적전쟁에서 나하스를 물리치고 완벽하게 승리한 겁니다. 누구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한 겁니다.
참 감사한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사울이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승리라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고 백성들이 그동안 사울을 반대했던 그 불량배들 그 벨리야알들을 죽이자고 했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사울이 이르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 그렇습니다. 그 승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때까지는 사울도 알고 있었던 겁니다. 이때까지는 사울도 그것이 하나님의 승리임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전쟁은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특히 영적전쟁은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승리할 수 있을까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마귀를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함께하실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함께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이 함께하실까요? 예수 믿는 사람! 예수님이 내 죄를 감당하셨음을 믿는 사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는 사람인가요? 그래야 합니다. 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영 곧 성령님이 함께하십니다. 그래야 승리합니다. 그래야 원수 마귀를 이기고 영적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영혼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로 돌아갈 수 있는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