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2): 또 먹는 이야기
처음에는 아이가 별로 많이 먹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적게 먹었다. 이곳에 내려온 다음 날인가, 깨순이 김밥에서 배달을 시켜 먹은 적이 있는데, 내가 김치찌개를 시킬 때, 아이는 라볶이를 시켰다.
“그거 가지고 한 끼가 되겠니?”
“예. 되요.”
“그게 어떻게 한 끼가 되?”
“좀 적게 먹으려구요.”
“왜?”
“배가 부르면 공부도 잘 안 되구요......”
아침은 아예 먹지 않는다.
“아침은 어떻게 하지? 큰아빠는 아침은 안 먹거든.”
“상관없어요. 안 먹어도 되요.”
“그럴 수야 있나? 큰 아빠는 그냥 과일 갈아먹는 것으로 때우는데.”
“나쁘지 않은데요. 저도 그랬어요. 아침은 과일이나 빵 먹었어요.”
그래서 도마도, 귤, 사과를 사다 놓았고, 아이를 태우고 삼례의 유명한 딸기 노점거리에 나가 딸기를 넉넉하게 사다 놓았으며, 버터, 발라먹는 치즈와 더불어 식빵 몇 개와 파운드케익을 사다 놓았다. 그러나, 퇴근해서 보면, 과일이고 빵이고, 거의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렇게 안 먹어서 어떻게 하니? 식욕이 없니?”
“일부러 안 먹으려고 해요.”
“글쎄 그런다고 했지? 언제부터?”
“얼마 안됐어요.”
“언제부터인데?”
“음...... 올해 1월달쯤부터예요.”
“음......”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살다 보면 힘든 일도 만나게 되고 충격인 경험도 하게 되는 법이다.
그러다가 내가 비교적 한가한 주말 저녁에 우리는 익산의 쿠우쿠우에 갔다. 초밥 뷔페이다. 큰아빠도 조카도 실컷 먹었다. 우리는 거의 문 닫을 시간이 될 때까지 죽치고 앉아 뷔페 음식을 즐겼다.
“동주야, 우리처럼 많이 먹은 사람들은 또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처럼 오래 먹은 사람들은 또 없을 꺼야, 그치?”
“예.”
“그런데, 큰아빠.”
“왜?”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말이예요.”
“그래, 지금까지 살아보면서, 뭐?”
나는 약간 긴장하였다. 사실은 그 날이 동주가 여기에 내려온 지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나는 그 동안의 삼례 생활이 어땠는지, 그럭저럭 지낼 만했는지를 물어볼 참이었다. 그런데, 아이는 지난 일주일을 돌아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 전체를 돌아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살다 보면 힘든 일을 겪게 마련이다. 오늘 저녁 외식하러 나온 이 자리에서 아이가 자기의 인생에서 겪은 힘든 경험을 털어놓으면, 나는 어른답게 아무쪼록 힘이 될 조언을 해주어야지.
“큰아빠,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말이예요, 저보다 많이 먹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
“정말이예요. 비슷하게 먹는 사람도 거의 본 적이 없어요.”
“너희 형은 너보다도 더 큰데, 너희 아빠도 그렇고.”
“아빠는 많이 안드세요.”
“형은?”
“형은 일반인보다는 많이 먹는 편이라고 보아야겠지요.” 일반인? 그럼, 자기는 선수라도 된다는 건가? 먹는 선수 말이다.
아이는 자신의 무용담을 털어놓았다. 친구랑 둘이서 소고기, 돼지고기 섞어서 12인분을 먹었다고 말했으며, 아빠랑 회전초밥집에 가서 혼자서 서른 접시를 먹었다고 했고. 아니 서른 다섯 접시라고 했던가...... 이 모든 것은 나중에 아이 아빠가 분명하게 증언해 준 것이다.
그러나 나한테는 증언이나 증인이 필요없다. 나 자신이 증인이니까 말이다. 마치 좀 적게 먹기로 한 결심을 철회하기라도 한 듯, 그 다음날부터 아이는 맹렬하게 먹기 시작하였다. 왕궁온천에서의 식사는 지난번에 썼지만, 내가 놀란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아이가 치킨을 배달시켰는데, 포장지가 책상 상판만큼이나 널찍하였다.
“두 마리를 시켰니?”
“아녜요. 세 마리예요.”
“......”
며칠 전에는 둘이서 장어집에 가서 1키로씩 두 번을 시켰다. (15만원.)
그랬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저그저께 퇴근을 해 들어오니, 아이가 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앓고 있었다. 그저께도 거의 똑같았다. 퇴근하면서 죽 — 본죽에서 만든 소고기 야채죽 —을 사가지고 들어갔으나, 아이는 반도 먹지 못했다. 몸은 많이 나아졌으나 구토가 나와서 음식을 먹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아이는 지금 서울 자기집에 올라가있다. 앓기 전부터 계획되어있던 것이다. 월요일날 내려온다.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그렇게 먹성이 좋은 아이가 밥을 먹지 못하다니...... 이번에 이렇게 앓은 것은 춥게 잔 탓이라고 본인은 말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원인이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은 여기에 내려온 이후 아이가 정상적으로 잠을 자지 못한다. 아주 늦게, 거의 새벽녘에야 잠이 드는 것 같다. 그리고 오후 늦게서야 일어난다. 잠자리가 바뀌었으니 새 잠자리에 적응을 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쩌면 아이의 불면에는 또 다른 원인이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는 지금 -- 어쩌면 올해 1월달쯤부터 시작하여 지금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여러 가지 어려움 중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아이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는다. 나도 물론 전혀 내색을 하지 않는다.
첫댓글 "큰아빠,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말이에요, 저보다 많이 먹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이 대목에서 박장대소 !!
쭉~ 읽어 보니 문득 드는 생각...아마 내가 그랬으면(?) 술독에 빠져 있었겠네 ㅎㅎ
저번에 기모 왔을 때 나에게 술에 의존치 말라 했는데..여튼 동주의 성장통 쾌유 바랍니다~
가여운 우리 동주....'으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겪구 있구나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