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린 비가 내려주어
올봄 들어 우리 지역에 비가 두어 차례 내리긴 했지만 그리 흡족하지 않다. 섬진강 건너 호남에서는 영산강 지류 곳곳의 댐이 바닥을 드러내고 도서 지역은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단다. 지난 주말은 우리나라 전역이 건조 경보 속에 동시다발로 일어난 산불로 산림 당국을 긴장시켰다. 다행히 이번 주중에는 서해안으로부터 다가온 저기압으로 강수가 예보되어 마음이 놓이게 되었다.
하루 내내 제법 많은 강수가 예보된 사월 첫째 수요일이다. 새벽에 잠을 깨 전날 산행기와 함께 ‘오가피 순’을 한 수 남겨 몇몇 지인에게 넘겼다. “산도화 흐드러진 깊은 골 무릉도원 / 다섯 잎 펼쳐 나온 오가피 순을 따면 / 자연인 부럽지 않을 따로 없는 선계다 // 향긋한 풋내음에 쌉쌀한 쓴맛 보태 / 데치면 찬거리로 전 부쳐 안주 삼아 / 가는 봄 붙잡아 두고 혀끝으로 느낀다”
지난달 어느 날부터 하루 한 수 시조를 남겨 그새 20여 수인데 주로 봄에 핀 야생화나 산야초를 글감으로 삼았다. 초등 친구들 단체 카톡에 아침마다 내가 그날그날 쓴 시조와 사진을 올린다. 가장 먼저 회신을 주는 친구는 서울 남산 유명 호텔 요리사를 지낸 친구로 지금도 여의도 어느 식당에서 현역이다. 이 친구는 초등학교가 최종학력이라도 대학 특임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는 날을 무척 기다렸다. 하루를 편히 쉬려는 뜻이 아니라 그간 밀려둔 일이 쌓여 있었다. 드물게 찾는 이발관을 다녀와야 했고 당뇨약을 타는 병원도 가야 했다. 그리고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은 책을 반납하고 다른 책을 빌려와야 한다. 그 말고도 마트에 들려 생필품을 마련하고 공과금 납부에서 의문 사항이 생겨 관공서를 찾아갈 일도 있었다.
아침 식후 아파트단지 맞은편 상가 이발관을 찾았다, 20여 년째 다니는 단골 이발관인데 그래봐야 고작 한 해 한두 번이다. 퇴직 후 작년 여름에 들렀으니 일 년 만에 찾아가 주인에게 오랜만이라고 했더니 오는 길은 잃어버리진 않으셨다면서 고마워했다. 나는 그새 자주 못 와 미안해하면서도 치매는 아직 초기 단계도 아니라고 했다. 이발비는 그새 천원이 올라 1만 6천 원이었다.
이발관을 나와 다녀올 곳은 동네 내과 의원인데 아직 진료가 시작되지 않아 조금 기다려야 했다. 마침 이웃 동 사는 꽃대감 친구가 어디서 구한 칡즙을 보내와 고맙게 받았다. 이후 내과를 찾아 혈당을 재었더니 아주 안정적인데도 의사는 여전히 약국 처방전을 끊어주었다. 당뇨로 동네 내과에 한 번 코가 꿰면 주치의는 좀체 풀어주지 않고 이런저런 검사를 둘러대며 묶어두었다.
약국을 나서니 가늘게 내리던 빗줄기는 굵어졌다. 그러함에도 우산을 받쳐 쓰고 도청 근처 관공서 거리 건강보험 공단을 찾아갔다. 창구 직원에게 지난달 납부 보험료가 지로에 이어 자동이체로 두 번 빠져나가 바로 잡아 놓고 앞으로 고지서는 우편이 아닌 메일로 보내십사고 했다. 이제 남은 일과 수행을 위해 손에는 대출받은 책을 든 채 용지호수 작은 어울림 도서관을 찾아갔다.
평소 자리를 지키던 사서는 아침나절 교육이라 대체 근무자였다. 지난번 빌린 책은 반납하고 오늘 자 지방지를 펼쳐 본 다음 서가에서 새로운 책을 다섯 권 골랐다. 내가 도서관을 찾으면 으레 읽을 책은 다섯 권이 한정이다. 개인 서재나 마찬가지인 도서관에서 두 시간 남짓 책을 열람하고 점심시간이 되어 바깥으로 나와야 했다. 호숫가에서 얼마큼 떨어진 중앙동 오거리 상가로 갔다.
이전 몇 차례 들린 돼지국밥집에서 점심을 때우고 인근 할인매장으로 가 시장을 볼 게 있었다. 코로나가 시들해졌는데도 아내는 손 소독 클린 티슈를 여러 묶음 사 오길 바래서 청을 들어주었다. 마트를 나오니 비는 세차게 내려도 용지호수를 지나 도서관으로 다시 갔더니 오전에 교육을 다녀온 사서가 자리를 지켰다. 창밖은 날이 저물도록 빗방울이 들어도 실내에서 독서삼매로 보냈다. 23.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