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마을 1번지' 광주 고려인마을 산하 고려인문화관(관장 김병학)이 마련한 특별기획전 'K-푸드와 고려인 먹거리 문화의 변천'이 지난달 개막한 이후 관람객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번 전시는 고려인들이 연해주를 비롯한 러시아 극동지역에 정착한 뒤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거쳐 오늘날 대한민국에 귀환하기까지 이어온 삶의 발자취를 음식문화를 통해 조명하고,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지켜온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시민들과 공유하기 위해 마련됐다.
특히 전시장에 소개된 19세기 러시아 문헌 속 한인들의 거주 현황과 농경생활에 관한 기록이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고려인문화관이 소개한 러시아어 자료에는 당시 러시아 극동지역에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던 한인들의 인구뿐 아니라 주거 형태와 농사법, 주요 재배작물, 식생활 등이 비교적 상세하게 담겨 있다.
문헌에 따르면 연해주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의 한인 인구는 1879년 조사 당시 624명으로, 이 가운데 남성이 349명이었다. 이후 별다른 대규모 신규 이주가 없었던 것으로 기록됐음에도 1893년에는 주민이 약 1천90명으로 증가했다.
19세기 연해주 거주 한인들/사진=고려인마을 제공
14년 사이 인구가 약 74% 늘어난 셈이다. 1893년 기록에서는 전체 주민 가운데 남성이 583명이었으며 남자 1천명당 여자는 866명으로 나타났다. 문헌은 이 같은 인구 증가와 성비 변화까지 기록해 당시 한인 정착촌이 점차 안정적인 생활공동체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한인들은 집 주변에 작은 뜰과 부속건물을 두고 가까운 곳에 밭을 일궜다. 가족들이 생활하면서 수시로 작물을 살피고 돌볼 수 있도록 주거지 인근에 농경지를 조성했으며, 일부 농지는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도 자리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특히 러시아 기록은 한인들의 농경지를 매우 정성스럽게 관리된 밭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름철 여러 차례 김매기를 해 잡초를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으며, 두둑과 고랑을 만들어 곡식과 채소를 체계적으로 재배했다.
가장 중요한 작물은 콩이었다. 한인들은 콩을 비롯해 밀과 보리, 귀리, 옥수수, 감자, 완두, 강낭콩 등을 재배했으며 배추와 양파, 마늘, 무, 오이, 호박, 가지 등 다양한 채소도 길렀다. 이 밖에 삼과 참깨, 수수 등도 소량 재배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문헌은 특히 콩이 당시 한인들의 식생활에서 차지한 비중을 강조했다. 한인들에게 콩은 러시아인들의 호밀이나 밀에 견줄 만큼 중요한 작물로, 여러 품종을 재배해 일상적인 먹거리로 활용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수확량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도 남아 있다. 당시 콩은 한 데샤티나(3,300평)의 농지에서 상당량을 수확할 수 있었고, 기록자는 한 가족이 그 수확량으로 1년에서 1년 반가량 생활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다양한 채소 재배 역시 한인들의 식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러시아 기록은 이들이 주로 식물성 식품을 이용했으며, 고기는 비교적 드물게 먹고 우유도 일상적인 식품으로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 같은 자료는 오늘날 고려인 음식문화에서 널리 볼 수 있는 콩과 곡물, 채소 중심의 식문화가 러시아 극동지역 초기 정착기부터 오랜 세월 이어져 왔음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생활사 자료로 평가된다.
고려인문화관은 이번 특별전에서 이러한 초기 농경생활뿐 아니라 고려인 음식문화가 역사적 격변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계승됐는지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극동지역에 마을을 이루고 농업에 종사했던 고려인 선조들은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뒤 전혀 다른 자연환경과 식재료에 적응해야 했다.
이들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새로운 정착지에서도 농사를 이어가며 배추와 무, 곡물 등 익숙한 식재료를 현지 환경에 맞게 재배했다. 동시에 중앙아시아의 식재료와 조리법을 받아들이면서 전통 한식과 현지문화가 결합된 독특한 고려인 음식문화를 만들어갔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단순한 음식 전시를 넘어 러시아 극동 정착과 농경생활-1937년 강제이주-중앙아시아 정착과 음식문화의 변용-대한민국 귀환으로 이어지는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먹거리'라는 생활문화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됐다.
김병학 고려인문화관장은 "19세기 러시아 기록에는 고려인 선조들이 어디에서 얼마나 모여 살았는지는 물론 어떤 방식으로 밭을 일구고 무엇을 재배해 먹었는지까지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며 "고려인의 역사를 정치적 사건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먹거리의 역사로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이어 "콩 한 알과 배추 한 포기에도 낯선 땅에서 삶의 터전을 일군 고려인 선조들의 땀과 생존의 지혜가 담겨 있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이 오늘날 고려인 음식 속에 이어지고 있는 160여 년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보다 쉽고 생생하게 이해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편 고려인문화관은 앞으로도 소장 자료 가운데 고려인들의 이주와 항일독립운동, 강제이주, 농업과 생활문화, 중앙아시아 정착과 대한민국 귀환 과정을 보여주는 사료를 지속적으로 발굴·해석해 전시와 교육 콘텐츠로 선보일 계획이다.
고려방송: 이부형(고려인마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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