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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승리와 견고해진 왕권
삼상 11:9-15
9 무리가 와 있는 전령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라 하라 전령들이 돌아가서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하매 그들이 기뻐하니라
10 야베스 사람들이 이에 이르되 우리가 내일 너희에게 나아가리니 너희 생각에 좋을 대로 우리에게 다 행하라 하니라
11 이튿날 사울이 백성을 삼 대로 나누고 새벽에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들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12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13 사울이 이르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
14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15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삼상 11:9-15 / 사울이 길르앗야베스에서 온 심부름꾼들에게 명령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주민들에게 내일 정오쯤에는 너희가 해방될 것이다.' 하고 전하여라. 암몬 족속에게 포위되었던 성읍에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 안도의 숨을 쉬었다. 10) 그러나 그들은 슬기롭게도 암몬 족속에게 이와 같이 전하였다. `우리는 내일 성문을 열고 나아가서 너희들 앞에 항복하겠다. 그때 너희가 원하는 대로 우리를 처단하여라!' 11) 그러나 그 다음날에는 사울이 벌써 자기의 군인들을 세 부대로 나누어 놓고, 이른 새벽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사방에서 암몬 족속의 진지로 기습해 들어가도록 하였다. 사울의 군인들은 방심하고 잠만 자던 암몬 족속의 군인들을 이른 새벽부터 쳐죽이기 시작하여 정오쯤에는 그들을 거의 다 쳐죽였다. 칼을 피해 달아났던 몇몇 암몬 군인들도 사방으로 흩어져서 더 이상 싸우러 나설 수가 없었다. 12) 사울이 이렇게 암몬 족속을 쳐서 멸하자, 이스라엘 백성이 그를 찬양하면서 사무엘에게 제안하였다. `전에 사울은 왕이 될 수 없다고 떠들던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자들은 이제 저희 손에 맡겨 주십시오. 당장에 죽여 없애겠습니다.' 13) 그러자 사울이 나서서 반대하였다. `오늘은 어느 누구도 죽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몰살당하게 된 것을 여호와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살려내 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14) 사무엘이 온 백성에게 제안하였다. `이제 우리는 길갈로 갑시다! 우리는 거기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만세를 부릅시다!' 15) 그래서 모든 백성이 사무엘을 따라 길갈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여호와의 성소에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많은 짐승을 잡아 제물로 바친 다음에 온 백성이 큰 잔치를 벌이며 즐거워하였다.
사울은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므로 왕권이 견고해졌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백성들을 길갈로 모은 후 여호와 앞에서 화목제를 드리며 사울의 즉위를 재차 선포합니다.
승리의 전쟁(9-11) 사울은 군사소집을 마친 후 야베스에 전령을 보내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라는 소식을 전해 들은 야베스 사람들은 기뻐하며 암몬 족속에게 너희 생각에 좋을 대로 우리에게 다 행하라고 요청합니다. 사울이 소집된 군사들을 삼 대로 나눠 새벽에 기습작전을 펼친 후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을 칩니다. 이로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는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이 전쟁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습니다.
사울의 겸비함(12-13) 사울이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사울의 즉위를 반대했던 자들을 끌어내어 처단하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울은 이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인정하며 결코 보복정치를 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사울이 초기 통치기간 동안에 보여주는 겸비함은 그가 왕으로 선택받았음을 인정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왕권강화(14-15) 사무엘은 사울이 이끄는 군대가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백성들을 길갈로 오게 한 후 나라를 새롭게 하자고 촉구합니다. 이에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인정하고 여호와 앞에서 화목제를 드리며 왕과 백성들이 함께 기뻐합니다. 비로소 사울이 백성들로부터 진정한 왕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왕권이 든든히 세워지게 됩니다.
적 용 : 어려운 일을 해결한 후 그 결과와 영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까?
세계 최대 부호인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가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뛰어난 두뇌로 세계적인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기자의 질문에 빌 게이츠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생각한 것처럼 똑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재능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저는 변화하고자 하는 마음을 생각으로 옮기고 그리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노력했을 뿐입니다.”
호크마 주석
=====11:9
길르앗 야베스 - 1절 주석 참조. 내일 해가 더울 때에 - '해가 더울 때에'는 '해가 뜨거워지기 시작할 때에'란 의미이다(Klein). 따라서 아마 그 때는 정오(正午) 무렵이었을 것이다. 구원을 얻으리라 - 이 말은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간절히 찾아 헤맸던 '구원할 자'(3절)와 동일한 어근을 갖는 단어이다. 결국 이것은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의 간절한 소원이 성취되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또한 이것은 사울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해 반드시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말이기도 하다(10:7).
=====11:10
본절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암몬 족속에 대하여 계략을 꾸미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그때 야베스 주민들은 암몬 왕 나하스에게 그 다음날 항복할 듯이 말함으로써 그들의 경계심을 풀게 하고, 따라서 이스라엘 군대의 공격이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Smith, Fay).
=====11:11
사울이...삼 대에 나누고 - 군대를 삼대(三隊)로 나눈 경우는 사사 시대 기드온(삿 7:16,20)과 아비멜렉(삿 9:43)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으며, 또한 블레셋 족속들에게서도 매우 쉽게 관찰된다. 이같은 전법은 상대방을 여러 방향에서 일시에 협공하기 위한 병법이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이같은 전법(戰法)을 구사할 줄 아는 강력하고 유능한 무사적(武士的) 왕을 간절히 바랬던 것이다(8:20). 새벽에 적진 중에 들어가서 - 여기서 '새벽'은 오전 3시에서 6시까지의 사이를 가리킨다(Keil, Fay). 따라서 본 구절은 이스라엘 군대가 암몬 족속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했음을 보여 준다. 즉 사울은 방심과 자만심에 빠져 깊이 잠들고 있는 암몬 군대의 허(虛)를 찔러 3면 협공 기습 작전을 구사하여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11:12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을 자신들이 바라던 스타일의 왕(8:20)으로서 완전히 인정하였음을 보여 준다. 즉 사울은 암몬과의 전투를 통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암몬과의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이후, 사울의 왕권은 급속히 강화되었을 것이다. 사울이 어찌...다스리겠느냐 한 자 - 즉 미약한 베냐민 지파의 일개 농사꾼이 자신들의 왕으로 제비뽑힌 일에 대해 불만을 품고, 노골적으로 사울에 대해 불복종과 거역의 뜻을 나타내었던 비류들을 가리킨다(10:27).
=====11:13
본절은 사울이 그날의 승리(11절)를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했음을 보여 준다. 사울의 이같은 자세는 그의 초기 겸손과 관용의 성품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사울이 이같이 인정한 이유 중의 하나는, 전투의 장소에 여호와의 선지자 사무엘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날에는...죽이지 못하리니 - 여기서처럼 기쁜날에 형 집행을 보류 또는 사면하는 경우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즉 다윗은 자신이 왕위를 회복한 날에, 자신에게 온갖 모욕을 준 시므이를 용서하였었다(삼하 19:23). 아무튼 여기 사울의 이같은 관용의 태도는 왕국 출발 초기에 사울의 도덕적.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켜 주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와 같은 사울의 겸손과 관용은 이때를 정점(climax)으로, 그의 왕국이 공고화되고 그의 왕권이 강화되자 점차 퇴색되고 사라져 결국 영적.도덕적.정치적인 면에서 실패한 왕으로 전락되고 만다. 이러한 사실을 도표화 하면 아래와 같다.
=====11:14
우리가 길갈로 가서 - 여기의 '길갈'(Gilgal)은 암몬과의 전투가 벌어졌던 길르앗 야베스에서 직선 거리로 약 6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서(수 4:19 주석 참조), 사무엘이 순회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성지(聖地) 중의 하나였다<7:16>. 따라서 온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모일 장소로 이곳이 선택된 이유는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라를 새롭게 하자 - 실상 이스라엘은 왕정(王政)으로의 변화가 이미 이루어졌었다. 즉 이미 사울은 (1)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10:1), (2)사무엘에 의해 기름 부음 받은 일의 정당성을 신적으로 확증받는 징표로서 하나님의 신의 임재를 체험했으며(10:10), (3)백성들의 대표자들에 의해 공개 석상에서 왕으로 인정되었으며(10:19-24), (4)사울 스스로는 백성들이 바라던 모양대로(8:20) 자신의 왕직(王職)을 이미 군사적 차원에서 행사하였기(11:6-11)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길갈에서 사무엘이 해야 할 일은 첫째, 화목제(和睦祭, 레 3:1-17;7:11-21)를 드림으로써 사울과 하나님 사이에 언약적 관계를 형성시키며(Klein) 둘째, 이스라엘 온 백성들에게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졌음을 신적인 권위에 의해 선포하고, 이어 축제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대한 대관식(戴冠式)을 치름으로써 이스라엘 초대 왕의 공식 등극을 추인하고 확증하는 일이었다(Keil).
=====11:15
사울로 왕을 삼고 -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서 사울의 왕위(王位) 등극은 그의 나이 40세 때인(13:1) B.C. 1050년의 일이었다(L.Wood). 이후 사울은 다윗이 차기 왕으로 등극할 때까지 40년간(B.C.1050-1010년)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행 13:21). 한편 70인역(LXX)은 이때 사울이 10:1에 이어 또다시 기름 부음 받은 것으로 해석했으나, 타당성이 없다(Keil). 만일 기름 부음 받았다면, 그 일의 중요도상 다윗의 경우처럼(삼하 2:4;5:3) 또 기록했을 것이다(Lange). 한편, 자유주의 고등 비평가들은 사울의 왕위 옹립 사건과 관련하여, 그 사건이 10:1;10:24;11:15 등에서 세번 중복된다는 사실을 근거로 세 가지 자료설(資料說)을 주장한다(Eissfeldt). 그러나 그것은 중복(du-plication)이 아니라 별개의 다른 사건이다. 즉 10:1은 사울이 사무엘에 의해 개인적으로 은밀히 기름 부음 받는 사건이고, 10:24은 사울이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 앞에서 제비뽑혀 왕으로 선출되는 사건이며, 11:15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울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 앞에서 초대 왕으로 공식 대관식을 거행하는 장면인 것이다(E.J.Young).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 '화목제'는 제물의 한 부분은 제단에 올려져 하나님께 바쳐지며, 그 나머지는 그 제물을 바친 백성들이 공동으로 먹을 수 있는 감사와 기쁨, 그리고 화목과 친교의 제사였다<레 3:1-5 강해, 화목제에 대하여>. 따라서 여기 '화목제'는 승전(勝戰)과 왕의 등극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또한 백성들 간에는 상호 기쁨을 나눈 축제의 제사였다.
길르앗 야베스 전투 - 암몬 왕 나하스는 이스라엘의 길르앗 야베스를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자 야베스 장로들은 사신을 이스라엘 전국에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기브아에 있던 사울은 베섹에서 병력을 소집한 뒤 암몬 족속을 기습 협공했다. 암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지(聖地) 길갈로 내려가 사울을 초대 왕으로 삼아 대관식을 거행했다.
< 설 교 >
나라를 새롭게 하라
사무엘상 11:12-15, 마태복음 6:9-10 / 연동교회 이성희목사
우리나라가 요즘 ‘의리 신드롬’에 빠져 있습니다. ‘의리’라는 말이 때아니게 유행하더니 ‘의리 패러디’도 많아졌습니다. ‘아메으리카노’, ‘성유으리’, ‘믿고 맡기는 으리은행’, ‘레으리잇고’ 등 패러디도 만발하고 있습니다. ‘의리’를 외치던 배우 김보성씨가 CF 출연한 식혜가 대박을 터트렸다고 합니다. 월드컵 본선에서 우리나라는 16강 진출에 실패하였습니다. 홍명보감독의 축구도 런던 올림픽 축구 동메달을 땄을 때의 선수들을 기용해서 자신이 아는 선수만 뛰게 했다고 하여 ‘의리’ 축구라고 들끓고 있습니다. ‘의리’도 아닌 ‘으리’가 갑자기 열풍을 일으킨 배경에 세태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침몰하는 세월호를 버린 선장이나 재난을 수습하는 정부인사도 의리를 버렸다는 것입니다. 의리 없는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의리 신드롬’을 만들었다고들 합니다. ‘의리’는 인간의 삶에 참 중요한 요소입니다.
옛말에 ‘견리사의’(見利思義)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익을 보면 먼저 의리를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예로부터 군자는 의리를 생각하고, 소인은 이익을 생각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사회가 군자는 점점 사라지고 소인배들만 남아 있어 자신의 작은 이익 때문에 큰 것을 놓치고 천하보다 귀한 인명을 하잖게 버림으로 사회를 위험에서 재앙으로, 낙심에서 절망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의리’(義理)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입니다. 의리는 인간의 기본 인성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인성조차도 버리고 찾지도 않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의리가 있어야 합니다. 가정이 새롭게 되기 위해서 가족 간의 의리가 있어야 합니다. 사회가 새롭게 되기 위해서 사회인 사이에 의리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새롭게 되기 위해서 교인들 간에 의리가 있어야 합니다. 나라를 새롭게 세우기 위해서 국민들이 상호 의리를 지켜야 합니다.
나라의 경제나 교회의 발전이 압축성장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기본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나라도 교회도 반드시 행해야 할 마땅한 도리를 배워야 합니다. 인문학이 괄시 당하고, 철학과가 폐과 되고, 기초과학을 기피하고 당장 돈을 벌기 쉽고 눈앞에서 쓰기 좋은 학문만 발달하는 나라는 희망이 없는 나라입니다.
나라나 교회가 겉을 바꾸고, 형식을 새롭게 할 것이 아니라 근본을 바꿔야 합니다. 나무의 잎이 아니라 쓴 뿌리를 제거해야 합니다. 성형으로 얼굴을 다듬을 것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과 풍성함으로 단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도 교회도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요시야왕은 고대 이스라엘의 마르틴 루터라고 불립니다. 그는 부왕 아몬이 일찍 세상을 떠나서 8세에 즉위하였습니다. 재위 8년이 되던 해인 16세에 그는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고 평생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살았습니다. 20세에 우상과 우상의 제단을 다 제거하였습니다. 역대하 34:2에는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라고 합니다. 18번째 해인 26세에 그는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수리하는 가운데 율법 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옷을 찢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나라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룬트비목사님(1783-1872)은 덴마크의 시인이며, 교회의 감독이며, 신학운동인 그룬트비주의의 선구자였고, 덴마크의 국부로 불리는 분입니다. 그는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동포 사랑을 외치며 덴마크를 현대의 부국으로 만든 분입니다. 그는 “교회는 이 일에 앞장서라”고 하여 나라를 새롭게 세웠습니다. 어느 시대나 교회가 나라를 새롭게 합니다.
그 외에도 이스라엘의 건국 수상인 벤구리온, 전후 독일을 새롭게 세운 아데나워수상, 미국을 새롭게 세우고 가장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이 된 아브라함 링컨, 27년의 옥고를 치르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을 타파하여 새롭게 나라를 건설한 넬슨 만델라대통령 등이 다 나라를 새롭게 세운 위인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나라를 새롭게 세웠다고 공인할 만한 전직 대통령을 가지지 못한 것이 민족의 불행입니다.
잠언 4:2에는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도리는 우리 개인이나 민족이나 나라를 새롭게 합니다. 요시야를 비롯한 성경의 인물들, 그룬트비를 비롯한 인류역사에서 나라를 바로 세운 위인들은 절대 변치 않는 신앙적 의리를 가진 분들입니다. 이제 다시 분연히 일어나 우리가 앞장 서 신앙의 의리로 나라를 새롭게 하는 위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길갈에 가서 나라를 세웁니다.
사무엘상 11:14에는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라고 합니다.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길갈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곳, 거룩한 곳, 하나님을 경배하는 의미 있는 곳에 나라를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길갈이 어떤 곳입니까?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넌 후 최초로 할례를 행한 곳입니다. 둘째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 요단에서 가져온 12 돌을 세운 곳입니다. 셋째는 ‘수치가 굴러갔다’고 했던 곳입니다. 넷째는 사울을 왕으로 세운 곳입니다. 다섯째는 엘리야 시대에 선지자를 양성했던 곳입니다. 이런 곳에 나라를 세워야 새로운 나라입니다.
우리나라가 거룩한 자리에 다시 세워져야 합니다. 한반도를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정신적 근간, 영적 뿌리가 좋은 토양에 내려져야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땅이 어떤 땅입니까? 미국이나 러시아나 중국과 같은 넓고 자원이 많은 땅이 좋은 땅입니다. 이런 나라에 가보면 관광자원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몽골이나 CIS 국가 가운데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리키스탄 그리고 남미의 페루 같은 나라를 자원부국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원이 많다고 하여 반드시 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나라가 잘 되기 위해서는 영적 바탕과 정신적 기초가 기름진 곳에 나라를 세워야 합니다. 스위스, 싱가포르, 베네룩스 3국 등을 보세요. 자원이 많아서 부국이 아닙니다. 지하자원은 없지만 영적 자원, 정신적 자원이 풍성합니다. 든든한 영적 기초에 나라를 세웠기에 나라가 든든하고 좋은 나라입니다.
시편 1편은 복이 있는 자를 정의합니다. 복이 있는 자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오만해지지 않으려고 애쓰지 말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복이 있는 자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 애쓰지 말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함께 고향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재산이 많아지게 되자 종들이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겠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롯은 요단 지역 소알까지를 바라보니 온 땅에 물이 넉넉하였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롯은 우선 좋아 보이는 땅을 모양만 보고 선택하였습니다. 외형만 보고 속아서 택한 곳이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죄악의 도시였습니다. 삶의 자리를 잘못 선택하므로 온 집안이 멸망당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이 다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자신은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은 도망가느라 부인하지 않았지만 베드로만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으려고 버티지 말고 아예 옳지 않은 자리를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죄 있는 자리를 피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입니다.
잠언 4:15에는 사악한 자의 길과 악인 길을 두고 “그의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며 돌이켜 떠나갈지어다”라고 합니다. 나쁜 자리를 피하고 지나가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일입니다. 항상 좋은 자리를 지키고 좋은 자리를 지나가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모리아는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라고 찬사를 보내던 자리입니다. 모리아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곳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세운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곳입니다. 이런 곳에 자리를 펴야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십니다. 바로 그런 자리가 나라를 세울만한 자리다운 자리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계시는 호렙산에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곳은 척박한 산꼭대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신 거룩한 곳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돌을 세워 기름을 부었던 벧엘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에서 형님을 만나러 다시 돌아올 때에 야곱의 가문이 큰 환난을 당합니다. 그의 딸 디나가 세겜 사람들에게 욕을 당했고, 디나의 오라버니들은 세겜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성례인 할례를 아들들이 원수를 갚는데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 때 야곱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벧엘은 야곱에게 거룩한 자리입니다. 제단을 세울 가치가 있는 자리입니다.
다윗은 헤브론과 예루살렘에 나라를 세우고 다스렸습니다. 사무엘하 5:5에 보면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고 합니다. 헤브론과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거룩한 자리입니다. 나라를 세울 만한 아름다운 자리입니다.
이성계는 즉위 1년 후에 국호를 ‘조선’이라고 정했습니다. 조선이라고 국호를 바꾼 이유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도읍을 새로 정하게 하였습니다. 도읍의 후보지로서는 계룡산 일대인 지금의 계룡대가 있는 계룡, 지금의 연세대학교가 있는 신촌 일대인 무악 그리고 한양이었습니다. 한양이 계룡과 무악을 제치고 도읍으로 결정되었습니다. 풍수지리 때문에 정한 곳이 한양입니다. 그러나 풍수지리 때문에 좋은 자리, 거룩한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자리에 나라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렸습니다. 우리나라가 평화통일이 되어 평양에 다시 교회가 세워지고 우리나라가 회복되는 꿈을 함께 꾸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의 제헌국회는 이승만의장이 제헌국회의원인 이윤영목사에게 기도하게 하므로 기도로 시작한 국회입니다. 그런데 이런 국회에 웬 오물이며, 웬 최루탄입니까? 길갈에 세운 우리나라, 우리국회가 점점 세속도시로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잘 되고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우선 우리나라의 길갈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2. 화목제를 드리고 나라를 세웁니다.
사무엘상 11:15에는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고 합니다. 길갈에 나라를 세울 때에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므로 나라가 위태로워졌습니다. 성경에는 사무엘 시대에 얼마나 나라가 혼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었든지 하나님의 이상이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적인 혼란기였습니다.
레위기에는 다섯 가지 제사가 있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다섯 가지 제사는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화목제는 향기로운 냄새를 드리는 제사입니다. 번제와 소제는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의무적 제사인 반면에 화목제는 선택적 제사입니다. 정규적 제사가 아닙니다. 감사할 때는 감사제, 서원이 있을 때는 서원제, 자원해서 드릴 때는 자원제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제사가 화목제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봉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나 주정봉헌은 반드시 해야 할 의무적 봉헌입니다. 반면에 감사봉헌, 생일봉헌, 목적봉헌 등의 봉헌은 선택적 봉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은혜의 분량에 따라 하는 봉헌입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보다 자원하여 감사로 하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실 제사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화목제란 히브리어로 ‘쉘라임’입니다. 이 말은 ‘샬롬’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샬롬이란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의미합니다. 이 말은 구원이란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화목제사의 의미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를 ‘구원제’라고도 합니다.
욥기 22:21에는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합니다. 화목이란 밀착시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면 영적인 복, 물질적 복, 명예적인 복, 건강의 복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화목’이란 말의 헬라어는 ‘카탈라소’로서 교환하다, 혼합하다, 상태를 되돌려 놓는다는 뜻입니다. 분리된 관계를 다시 붙여 놓는 것이 화목입니다. 고린도후서 5:20에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계개선입니다. 나라를 새롭게 하는 길입니다.
안병욱교수님의 ‘인생사전’이란 책에는 인생을 바로 살아가려면 삼기(三氣)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패기(覇氣), 의기(義氣), 화기(和氣)입니다. 인간이 바르게 살려면 삼기가 혼연일체가 되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패기란 씩씩한 기상이며 자신만만한 태도입니다. 의기란 의로운 기운이며 올바른 정신이며 정의감입니다. 화기란 화목한 기운이며 훈훈한 정신이며 봄바람과 같은 따뜻한 마음을 말합니다. 인간은 화목한 기운이 있어야 인생을 바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삶도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것이 인생을 바르게 사는 길입니다.
나라의 정신적 기초는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과 화목해야 다른 사람과 화목합니다. 사람과 화목한 사람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과 불화하면 사람과 불화하고, 자연과도 불화합니다.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과 불화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일이 잘 될 수 없습니다. 가정불화는 부부사이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불화입니다. 가정불화는 자녀문제를 야기하고 심지어 청부살인까지 서슴치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국가불화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불화입니다. 이념이나, 계층이나, 이익관계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마구 찢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해야 이런 모든 불화를 불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가장 기본이며 우선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나라를 새롭게 하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불화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귀입니다. 에베소서 4:27에는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합니다. 마귀는 틈만 있으면 벌려놓고 찢어놓습니다. 마귀는 불화하게 하는 선수입니다. 요즘 이단 신천지의 수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게 하려고 온갖 헛소문을 퍼트립니다. 그래서 교회가 문제가 생기고 분쟁이 일어나면 들어가 교회를 찢어놓고 그 교회를 접수합니다.
이들은 교회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교회 곳곳에 우리교회가 구원이 없다고 비난하고 자기 교주의 설교를 들어보라고 하는 편지를 뿌려놓고 가기도 하고, 저에 대한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트리고 다른 교회에 익명의 편지를 보내기도 합니다. 이런 일을 통하여 갈등이 생기면 들어와서 틈새를 벌리고 불화하게 하는 것이 이들의 수법입니다. 틈새 작전은 마귀의 전형적 수법입니다.
지난 번 몽골에 갔을 때 그 곳의 항공사에 근무하는 한인교회 집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우리교회 어느 항공사에 근무하는 집사님이 처음 항공사에 근무할 때에 공항에서 승객의 휠체어 서비스를 맡아서 하였다고 합니다. 좋은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의 자존심으로는 그런 일을 하기엔 마음이 불편할 수도 있을 텐데 그 집사님은 6개월을 묵묵히 그 일을 불평 없이 기꺼이 하더랍니다. 그 때 ‘저 분 참 대단하다. 앞으로 훌륭하게 잘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비록 천해보이고 작은 일일지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하는 사람이 나라를 새롭게 세우는 사람이며 의리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감사하는 마음으로 화목하게 하는 한 사람이 세상에 필요하며, 세상을 새롭게 바꿉니다. 이런 마음으로 나라를 새롭게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 론
중국의 제왕학의 요체는 세 사람의 인물을 곁에 두는 것이라고 합니다. 첫째는 원리원칙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인덕 정치란 무엇인가, 경세제민의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은 올바른 사상을 따라 국가를 건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지략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수한 전략과 전술을 생각하고, 위기 때 나라를 구하고, 발전과 번영을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간언하는 사람입니다. 권력자의 잘못된 길을 용기 있게 직언하고, 잘못을 지적하고, 옳은 길로 돌아올 수 있게 하여야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바르게 만드는 것은 법으로만 되지 않습니다. 칼로도 되지 않습니다. 나라를 바르게 세울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과 화목한 것입니다. 나라의 영적, 정신적 자리가 든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리 길갈에 우리나라를 든든히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려 하나님과 화목하므로 사람과 화목하여 하나님이 주신 이 나라를 다시 든든히 세우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나라를 새롭게 하려면
삼상 11장 12~15절 / 송기성목사(정동교회)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한 민족과 한 국가가 성숙하기까지는 숱한 시련과 반성, 그리고 성찰의 교훈이 축적되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민족과 한 국가의 성숙은 시련과 반성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시련이 없으면 반성이 없습니다. 그리고 반성이 없으면 성숙도 없습니다. 시련의 도전을 반성으로 응전하면 개인이든, 교회든, 국가든 반드시 성숙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은 그 백성에게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삼상 11:14)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그 나라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민족이 겪은 시련을 결코 헛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숱한 시련 속에서 쌓은 반성과 성찰의 교훈을 결코 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의 대한미국, 시련에 서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도 시련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숱한 시련과 반성을 통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겪어야할 시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익혀야 할 반성이 있습니다. 시련과 반성, 그것은 결국 교인과 교회, 나라와 민족을 더욱 성숙하게 할 줄 믿습니다.
1. 지도자를 잘 세워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B.C 1050-1010) 사울의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삼상 9:20)라고 했습니다. 이는 ‘온 이스라엘의 보배’라는 뜻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삼상10:1), 그러자 사울에게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였습니다. 그는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a different person)이 되었습니다(삼상10:6). 하나님께선 그에게 새 마음(new nature, new heart)도 주셨습니다(삼상10:9).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선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제비 뽑힘을 받게 해주셨습니다.(삼상10:21)
하나님께서 사울을 명실공히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사울이 지도자로서 모든 자격을 완벽하게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선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우신 자로 하여금 그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영으로 크게 임하셔서 능력을 주시고 은사도 주십니다. 그리고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시며, 새 마음, 새 성품도 갖게 하셔서 나라를 새롭게 하는 지도자가 되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지도자를 잘 세우면 나라와 민족을 새롭게 하며, 교회와 세상도 새롭게 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1945년 4월 12일, 미국의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루스벨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미국인들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신화적인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1929년부터 시작된 경제 대공황을 뉴딜 정책으로 수 많은 실업자를 구제하며 경제를 살려냈으며, 또한 그는 나치 독일과 일본 군국주의와의 전쟁에서 담대하게 일을 추진했던 탁월한 지도자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후임으로 대통령직에 취임해야 했던 부통령 해리 투루먼의 심적 부담은 막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당시 기자들에게 “하늘의 달과 별과 모든 행성이 나에게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만약 일생에 한 번이라도 기도한다면 지금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라며 기도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해리 투루먼의 부담이 컸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를 잘 세우면 우리도 나라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지도자를 잘 세워야 서울시와 각 지방자치 단체와 지역사회도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신앙공동체에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된 사람,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사람, 변하여 새롭게 된 사람, 그 마음과 성품도 새로워진 사람이 지도자로 세워지면 그가 속한 공동체도 반드시 새롭게 될 것입니다.
2. 반대자들을 잘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된 사울이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힘입어 이스라엘을 쳐들어온 암몬 사람들을 통쾌하게 격퇴시키셨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로부터 능력있는 왕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백성이 사무엘에게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삼상 11:12)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울을 멸시하며 거부했던 반대자들을 처형하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어떤 불량배’(삼상 9:27)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울을 반대했던 불량배들을 처형하는 것이 사울을 위하는 것이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것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백성에게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삼상11:13)라며 반대자들을 처형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은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는 겸손한 고백입니다. 즉 암몬 족속을 물리친 승리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신실한 고백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반대했던 불량배들도 처형할 것이 아니라 관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반대자들을 관용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반대자들을 대하는 태도와 관계가 새롭게 되며, 가정과 교회, 나라와 민족도 새롭게 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 링컨(1809-1865)은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기도와 정적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위대성은 적대자들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 바 있습니다. 그가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그의 정적 스탠튼은 그를 가리켜 ‘긴팔 원숭이’라고 놀리며 무식한 말라깽이라느리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자라느니 등의 악평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측근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탠튼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때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적은 죽인다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복수를 하면 더 많은 적이 생긴다 적을 완전히 없애는 길은 적을 친구로 만드는 길 뿐이다.” 링컨이 후에 암살되었을 때 스탠튼은 그 누구보다 링컨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 인류 최대의 지도자가 누워있다. 이제 그는 모든 시대에 남을 인물이 됐다.”
반대자를 잘 품으면 우리도 나라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반대자를 잘 품어야 화합과 화해, 공생과 공영의 관계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자를 잘 품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된 사람 사울처럼, 나를 반대하는 자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셨음을 기억하고 승리도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시인하는 사람은 그 믿음과 겸손으로 반대자를 잘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삼상11:14)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갔습니다. ‘길갈’은 ‘굴리다’, ‘굴러간다’라는 뜻으로 여리고 평야에 있던 성읍입니다. 이곳은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에서 출생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행하지 못하였던 할례를 행함으로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고 새로운 출발을 했던 성지였습니다(수5:2-9). 따라서 이같은 역사적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사무엘은 순회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벧엘과 미스바와 함께 성지 중의 하나로 삼았으며(삼상 7:16), 사울의 왕국을 새롭게 시작할 장소로 길갈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사무엘의 말대로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갔습니다. 암몬 족속을 격퇴한 길르앗 야베스에서 길갈까지는 약 60km, 150리 길이었습니다. 길갈에서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하나님 앞에서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것과 전쟁 영웅을 왕으로 세우게 된 것은 민족적인 경사요 축제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 사무엘과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화목제를 드림으로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지에 모여 하나님 앞에 화목제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과 먼저 화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화목해야 나라도 새롭게 할 수 있고, 민족도 크게 기뻐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 화목제를 드리며 하나님을 잘 섬기면 나라도 새롭게 할 수 있고, 민족도 크게 기뻐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1945년 11월 28일 망명생활에서 돌아온 후 김구선생님과 함께 예배드린 우리 정동교회 벧엘예배당에서 이 박사께선 “오늘 여러분이 예물로 주신 이 성경 말씀을 토대로 해서 새 나라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반석 삼아 의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매진합시다” 라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48년 5월 31일에 열린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임시의장으로 추대된 그는 새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함께 하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윤영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우리도 나라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야 개인과 가정, 나라와 민족도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실패나 재난, 질병이나 죽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잘 섬기는 사람은 그의 영혼과 육신과 범사까지 잘 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과 늘 화목하며 크게 기뻐하는 축제로서의 인생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애국주일이면서 평신도주일이기도 합니다. 사무엘이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기름을 부은 사울은 평신도였습니다. 사울의 이름은 ‘희망’을 뜻합니다. 사울은 이름 그대로 그 나라와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평신도의 역할, 지도자의 사명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라를 새롭게 하려면 지도자를 잘 세워야 하고, 반대자를 잘 품어야 하며,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를 새롭게 하려면 지도자를 잘 세우고, 반대자를 잘 품으며,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사무엘과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한 것처럼 우리들도 교회를 새롭게 하고 나라를 새롭게 하기까지 먼저 자기 자신과 가정을 새롭게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디딤돌 인생, 걸림돌 인생(1)
안효관목사 / 삼상 11:14-12:5
옛날 시골에 다리가 놓이지 않는 냇가를 건너는 유일한 방법은 돌로 만들어 놓은 징검다리를 통해서 건너가는 것입니다. 같은 돌일지라도 그 돌이 놓여진 장소에 따라서 디딤돌이 될 수도 있고,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법 커다란 돌이 아이들이 건너기 힘든 냇가에 있어서 냇가를 건너는 징검다리가 되어준다면, 그 돌은 분명 디딤돌입니다. 그러나 같은 돌이 자동차가 많이 왕래하는 길 한 가운데 있다면 그건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입니다.
돌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얼마 전 심방을 가기 위해서 집에서 차를 타고 나오는데, 차 굴러가는 소리가 좀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차를 멈추고 내려 바퀴를 살펴보았더니 앞바퀴 하나가 바람이 다 빠져 있는 것입니다. 심방 약속시간이 다 되었고 해서 겨우 교회당에 차를 끌어다놓고 교회 승합차로 심방을 가고 유 집사님께 보험사에 연락해서 바퀴를 좀 갈아놓아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심방 끝나고 와서 물어보았더니 바퀴에 못이 하나 박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작은 못 하나가 바퀴에 박혀서 바람을 다 빼놓아버리니까 자동차가 운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작은 못 하나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못이 목수의 손에 들려져서 나무를 고정시키고 집을 짓는데 사용된다면 그건 아주 유용하게 쓰여진 것입니다. 작은 못 하나도 어떻게 쓰여지느냐에 따라서 유용하기도 하고, 무익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나오는 사무엘은 그 시대의 디딤돌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선지자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적 상황을 사사기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이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사무엘은 역사적으로 암울했던 때에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하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아무도 당시의 사회를 바르게 이끌어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제사가 무너지고,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바로 그런 시대에 사무엘이 등장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전까지는 사사를 중심으로 살아가던 사회였습니다.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은 모두 왕정체계를 갖추고서 막강한 군사력으로 이스라엘을 위협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우리에게도 왕을 달라”고 졸라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왕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그들의 왕이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위에서 사람을 다스리는 왕이 주어지면 그 왕을 통해서 나라의 힘은 강해질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길일뿐만 아니라, 왕을 통해서 백성들은 더 큰 시련과 고통을 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아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주시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왕을 세워달라고 졸라댔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대로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시기로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바뀌는 사회적 변혁기에, 그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사람으로 사무엘이 선택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무엘은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역할을 마친 후에는 조용히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려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 시대의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디딤돌로 살아가는 인생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디딤돌로 사는 사람은 자신을 다른 사람을 위한 발판으로 내놓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른 사람을 짓밟고서라고 내가 더 높은 자리에 서야 성공한 인생이 된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다른 사람의 발에 밟히는 발판으로 내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를 위해서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합니다.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권리나 권익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암묵적으로 세뇌되어온 우리는 내가 손해 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전혀 손해 보려 하지 않고, 나를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손해 보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디딤돌로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그의 희생물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바칠 것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이 먼저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나를 사랑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당신이 먼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을 가리켜서 모퉁이 돌이요(엡 2:20),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다(마 21:4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퉁이 돌’이란 말은 또는 ‘모퉁이의 머릿돌’이란 말은 건물의 기초석이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건물의 가장 아래에서 모든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돌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장 낮은 곳에서 자신을 희생하시며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고,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퉁이 돌이 되시기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자신을 놓음으로서 모든 사람이 그 모퉁이 돌을 밟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한 디딤돌이 되신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옛날에 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는 사랑하는 소년이 하나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그 소년은 나무에게로 와서 나무와 함께 놀았습니다. 놀다 지치면 소년은 나무 그늘 아래서 단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그런 소년의 모습을 보면서 나무는 너무 너무 행복했습니다.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소년도 점점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홀로 있을 때가 많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를 찾아온 소년은 나무와 놀아주기는커녕 뭔가를 사고 싶은데 돈이 없다며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습니다. 나무는 그 소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사과를 따다가 팔아서 돈이 생기면 그것으로 네가 사고 싶은 것을 사려무나.” 소년은 나무 위로 올라가서 사과를 따서는 가지고 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소년을 위해서 자신이 뭔가를 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던 것입니다.
떠나간 소년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나무를 찾아왔습니다. 나무는 너무 기뻐서 나뭇가지를 흔들며 소년을 맞았지만, 소년은 여전히 시무룩했습니다. 소년은 ‘자신에게 집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나무는 소년에게 ‘자신의 가지를 베어다가 집을 지으라.’고 말합니다. 소년은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해 그 나무의 가지들을 베어서 떠나갔습니다. 그래도 나무는 여전히 행복했습니다.
또 다시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제법 나이가 들어버린 소년이 다시금 나무를 찾아와서, 이번에는 ‘바다 건너 먼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배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나무는 ‘자신의 몸통을 베어다가 네가 원하는 배를 만들어 가고 싶은 먼 곳에 다녀오라.’고 말합니다. 소년은 나무의 줄기를 베어 내서 배를 만들어 타고 멀리 떠나 버렸습니다. 자기의 몸통까지 다 주어버렸지만,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소년은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제 나무는 소년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으로 소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미안하다, 이제는 너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사과도 없고, 그네를 뛸 수 있도록 해주고 싶으나 가지가 없고, 몸통마저 없으니 네가 옛날처럼 나무를 타고 오르며 놀 수도 없구나. 미안하구나.” 그러자 늙어버린 소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별로 없어. 난 몹시 피곤해. 앉아서 조용히 쉴만한 곳이나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 쉬기에는 늙은 나무 밑둥이 그만이야. 얘야, 이리로 와서 여기 앉아 쉬려무나.” 나무는 소년을 위해서 마지막 남은 자신의 밑둥이를 내어주었습니다. 늙어 지쳐버린 소년은 나무가 시키는 대로 피곤한 몸을 납작한 나무의 밑둥에 앉아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동화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사랑하는 한 소년을 위해서 자신 모두를 희생하는 정말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을 보며 가슴 찡한 감동을 받게 됩니다. 디딤돌이란 바로 이런 희생을 통해서만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나를 밟히도록 자신을 내어놓지 않으면 디딤돌이 될 수 없습니다.
디딤돌이란 자신은 밟히면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돌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무엘 선지자은 역사적인 위기 상황 속에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데 자신이 디딤돌이 되어 주었습니다. 자신은 스스로 왕이 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온 백성이 그를 존경했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왕이 되겠다고 말한다면 그는 온 백성들로부터 박수를 받으면 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되려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데 가장 앞장 설 뿐입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는 데에 사무엘은 디딤돌이었습니다.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욕구를 채워주는데 그는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팔을 벌리기만 하면 그의 팔 안에는 수없이 많은 것들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팔을 벌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팔을 사울의 발아래 내려 놓습니다. 사울이 자신을 팔을 딛고 왕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여러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움켜쥐고, 더 많은 것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때에, 우리는 조용히 우리 자신을 희생의 자리에 내놓음으로 세상에 디딤돌들이 되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상의 방법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닮아 가는 삶을 통해서 디딤돌이 되어야 합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내가 있음으로 내 가정을 행복한 공동체로 만들어 가는 디딤돌이 되어야 하고, 내가 먼저 섬김으로 우리 교회를 행복한 교회로 세워 가는 디딤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양보하고 먼저 희생함으로 내 직장이 화기애애하고, 내가 한 번 더 져주고 한 번 더 양보함으로 해서 친구들 사이에서도 디딤돌이 되어야 합니다.
디딤돌 인생은 다른 사람을 높이고 자신은 낮아질 뿐만 아니라, 영광의 자리에서 조용히 물러날 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무엘은 이제 자신은 물러갈 때가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역할은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는 것으로 다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드러내 놓고 자신은 역사의 뒤편으로 조용히 물러가려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늘이 자신의 생애에 마지막’으로 알고 마지막 연설을 하는 말씀입니다. 그는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 일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이 역사 앞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제 자신은 역사 뒤편으로 물러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위에 세운 사울이라는 새로운 왕이 그의 역사를 펼쳐나갈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위대하다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곳곳에는 자신이 물러나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물러나지 않음으로 해서 여러 가지 문제와 갈등을 야기시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러나야 할 때에 조용하고 깨끗하게 물러나지 않으면 그 동안 쌓아왔던 모든 인품과 덕망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나바도 스스로 역사 뒤로 숨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안디옥 교회의 첫 번째 지도자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안디옥 교회로 파송 받았고, 안디옥 교회에 가서는 교회를 굉장히 부흥시켰습니다. 교회가 커지자 바나바는 자신 혼자서 안디옥 교회를 섬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회심한 사울을 불러와 함께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 교회는 더욱 성장하게 되었고, 안디옥 교회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모범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를 섬길 때에는 바나바가 '나중에 바울로 이름이 바뀐 사울'보다도 훨씬 더 좋은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소아시아 지역에 선교사로 파송 받은 이후에는 달라졌습니다. 처음 선교사로 파송 받았을 때에는 바나바가 사울을 리드했습니다. 사도행전 13:2절과 7절에 보면 그 두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면서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나바의 이름이 사울보다 앞에 기록함으로서 첫 번째 선교여행은 바울 중심이 아니라 바나바 중심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가 시작되면서 사도행전 13:13절 이하에서는 이름의 순서가 점차 바뀝니다. ‘사울과 바나바’로. 그리고 나중에는 바나바의 이름이 사도행전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대신 바울의 이름이 역사의 전면에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나바는 바울에 대해서 어떤 불평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바나바는 바울에게 있어서 신앙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아무도 사울의 회심을 믿어주지 않을 때 사울을 믿어주었던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아무도 사울과 함께 사역하려 하지 않을 때에도 바나바는 사울을 안디옥 교회로 불러 함께 사역하도록 했습니다. 사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복음의 훈련을 받은 것은 바나바가 아니면 안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그런데 선교여행을 떠나면서부터는 바나바의 이름은 점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사울 - 사도 바울의 이름은 점점 드러나는데, 바나바는 역사 뒤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데도 바나바는 바울에게 은인으로서의 어떤 대우를 받으려 한다든지, 자신이 바울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바나바를 존경스럽게 만든 모습입니다.
내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사람, 마땅히 내가 누려야 할 어떤 특권을 기꺼이 포기하고 조용히 사라질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역사에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쉽게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현실적인 이익에 우리의 눈이 고정되어 있는 한 우리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는 눈을 들어, 좀 더 크고 좀 더 넓은 새로운 시대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현실적인 권리와 이익을 내려놓고 디딤돌과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강경환이란 분의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충남 서산 일대에는 해마다 명절이 되면 독거노인들 집 앞에 깨끗한 천일염 30kg 짜리 포대 수십 포가 놓여 있곤 했습니다. 지금까지 14년째 명절 때마다 같은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가 그렇게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해 그가 바로 강경환이라는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13년 동안 혼자서 명절이 되면 30kg 짜리 소금 포대를 갖다놓았는데, ‘이제는 몸이 약해져 힘이 들어서 혼자서는 못하겠다’고 읍사무소에서 직접 노인들에게 나눠주었으면 좋겠다고 소금 한 트럭을 실고 왔던 것입니다.
염전을 운영하는 그는 두 손이 없는 장애인입니다. 그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13살 때였습니다. 겨울방학 때인 1972년 12월 24일 아침 9시 40분경, 자신이 살던 서산 해안가에서 놀다가 안티푸라민 통과 비슷한 깡통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신기한 그 통을 발견하고는, 나비처럼 생긴 철사가 있어서 그것을 떼어내고 가지고 놀 요랑으로 돌로 깡통을 두들겨댔습니다. 그 순간 그 앞에는 참혹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깡통이 폭발한 것입니다. 그것은 6.25 전쟁 때 묻어놓은 대인지뢰였습니다.
폭발 소리에 놀란 마을 사람들이 그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사흘 뒤에 깨어나 보니 손목 아래 두 손이 모두 절단되고 없었습니다. 두 손이 없는 장애인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는 그게 부끄러워서 중학교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점점 들어가는데 그는 인생을 포기한 채 하루하루 살아갔습니다. 모든 게 귀찮아서 농약을 먹고 죽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17살 때부터는 매일 주막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아침 10시에 주막에 가서 술을 먹기 시작하면 밤 12시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유인물 하나가 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두 팔과 다리 하나가 없는 정근자 전도사가 인근 교회에 와서 간증집회를 한다는 전단지였습니다. ‘나보다 더한 이런 사람도 있구나...’라고 생각하고는 정근자 전도사에게 ‘나도 당신처럼 살 수 있느냐?’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랬더니 ‘당신도 나처럼 살 수 있다’고 답장이 왔습니다. 그 말에 용기를 내어 ‘이런 분이 믿는 하나님, 나도 믿어보자.’ 그리고 교회에 등록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신앙을 갖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뀌어졌습니다. 술을 끊고 열심히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불행한 자신의 삶을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손이 없기에 오른쪽 손목에다가 낫을 테이프로 감고서 낫질을 배웠습니다. 아버지의 농사일도 도왔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에서 만난 여인과 결혼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35살이던 1994년 아버지의 친구가 그에게 ‘너 염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습니다. 그는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주변에서는 두 손이 없는 그가 염전을 한다는 것을 비웃었스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두 손이 없기에 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고 고되었습니다. 하루 두 시간씩 자면서 그는 염전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던 중 1996년 그는 ‘손을 잃은 대신 사랑을 얻었으니 남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어려운 중에서도 명절만 되면 독거노인들에게 소금을 갖다 주었고, 김장철이 되면 소록도에도 소금을 보냈습니다. 생활이 넉넉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려운 중에서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는 지금 서산 충서감리교회 권사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두 손이 없는 1급 장애인이지만 장애인에게 지급되는 장애인기초연금도 스스로 거절했습니다. 지금은 부인과 함께 1만 2천 평의 염전에서 열심히 소금을 만들며 일하고 있습니다. 1년 매출은 약 6천만 원 정도 되지만, 이것저것 다 제하고 나면 순수익이 한 해 1800만 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 약 10%인 200만 원은 반드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1급 장애인도 남을 돕는 일에 쓰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까지 그는 남에게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의 인생은 디딤돌로 바뀌어졌습니다.
남보다 더 많이 가졌기 때문에 디딤돌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보다 더 건강해야만 남들을 위한 디딤돌 인생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배워야만 디딤돌 인생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사랑이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의 말슴을 따라 살면 우리는 디딤돌 인생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목에서 걸림돌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디딤돌이 되어주셨던 것처럼, 주님을 믿는 우리 역시 우리의 삶에서 디딤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디딤돌은 밟힐수록, 그리고 자신이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질수록 그 향기가 더 진해지고 더 멀리 갑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는 지금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느냐? 디딤돌 인생을 살고 있느냐? 걸림돌 인생을 살고 있느냐?
디딤돌 인생 걸림돌 인생(2)
안효관목사 / 삼상 11:14-12:5
여러분, 지난 한 주 동안 디딤돌처럼 사셨습니까? 걸림돌처럼 사셨습니까?
얼마 전에 <블랙>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2005년도에 만들어진 인도 영화인데, 너무너무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미셸이라는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아이입니다. 정신지체아가 아님에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한다는 이유로 8살이 될 때까지 그 아이는 거의 동물에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됩니다. 허리춤에는 깡통을 매단 줄을 달고 다녀야 하고, 손으로 게걸스럽게 밥을 먹고, 조금만 자신의 맘에 들지 않으면 시도 때도 없이 괴성을 질러댑니다. 도저히 그 아이를 집안에서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미셸을 요양원으로 보내려 하지만, 어머니가 마지막 희망을 걸고 전문 선생님을 모셔 교육을 시키자고 제안합니다. 그래서 모셔온 사람이 사하이 선생님이었습니다.
알코올 중독에 가까운 사하이 선생님은 자신의 남은 생애를 그 아이를 위해서 바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미셸의 집에 찾아옵니다. 사하이 선생님은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미셸에게 오직 하나 남은 감각을 통해서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아무 것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고집쟁이 미셸에게 사하이 선생님이 처음 가르쳐준 단어가 블랙(BLACK)이라는 단어입니다. 단어 하나를 가르치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했습니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기 때문에 단어를 가르치기 위해서 손바닥에 입을 대고 단어를 말하면서 입모양을 통해 감각으로 느끼게 했습니다. 그리고 팔에다 수도 없이 알파벳을 써 줍니다. 그러면서 물(water)이란 단어를 가르치고, 꽃(flower)이란 단어를 가르쳐줍니다.
사하이 선생님은 오직 그 아이 하나를 위해서 자신의 생애 전부를 바쳤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미셸을 대학에 입학시켰고, 남들은 4년 만에 졸업하는 대학을 미셸은 12년 만에 졸업하게 됩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한 미셸이 사하이 선생님의 희생적인 노력을 통해서 12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지만, 미셸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사하이 선생님은 그 감격적인 미셸의 대학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합니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입니다. 미셸이 졸업 가운을 입고 병원을 찾아가지만, 선생님은 미셸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병이 너무 깊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짐승과 다름이 없이 살던 미셸이 사하이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가 8살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32년 동안 사하이 선생님은 오직 미셸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한 사람을 위해 32년이라는 자신의 남은 생애 전부를 바쳤던 사하이 선생님이 계셨기에, 버림받고 짐승처럼 살아가야 할 한 여인이 참된 인생을 찾게 됩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아는 헬런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1960)와 그녀의 선생님이었던 앤 설리번(Johanna Mansfield Sullivan Macy, 1866-1936)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만든 영화입니다.
헬렌 켈러가 헬렌 켈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불가능한 것 같은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 전부를 희생했던 앤 설리번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람들 뒤에는 그들을 위해서 희생했던 위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에게는 한나라는 기도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성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에게는 이교도에 빠진 아들을 위해 30년 동안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던 어머니 모니카가 있었습니다. 19세기 최고의 부흥사인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에게는 빚쟁이가 몰려드는 가난 속에서도 신앙으로 아들을 키운 호오튼 부인이 있었습니다.
배후에서 누군가를 위해 디딤돌이 되어주었던 이름 없는 사람들 때문에 위대한 사람이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나는 위대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 기도와 내 희생을 통해서 누군가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내가 디딤돌이 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정에서 디딤돌입니까? 걸림돌입니까? 내가 있음으로 우리 가정이 행복하다면, 내가 우리 가정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디딤돌입니다. 내가 있음으로 가정에 불화가 생기고, 내가 있음으로 가정이라는 자리가 불편하다면 우리는 가정에 걸림돌입니다. 그건 교회에서도 그렇고 직장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내가 있음으로 기쁘고 행복하다면, 내가 그곳에 유익된 사람이라면 나는 디딤돌입니다. 그러나 내가 교회에 있음으로, 내가 그 직장에 있음으로 상처받는 사람이 생겨나고 불화가 있다면 나는 그곳에 걸림돌입니다. ‘차라리 그 사람은 없는 것이 나아!’라는 말을 듣는다면 우리는 분명 지금 걸림돌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디딤돌이었던 사람입니다. 지난주에 말씀 드린 것처럼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이 자신을 밟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한 디딤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데 1등 공신이었지만, 나라를 세우는데 1등 공신으로서의 어떤 대우나 명예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서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디딤돌 인생을 사는 사람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그곳에서 제물이 된다 하더라도 그곳에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필요로 할 때에 언제든지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사울은 왕이 된 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됩니다. 왕이 될 때에는 굉장히 겸손했고, 믿음도 좋았는데, 왕이 되면서 교만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을 버리시고 새로운 왕을 세울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의 집으로 보내십니다. 이새의 아들 가운데서 사울을 대신할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무엘은 새로운 왕에게 부을 기름병을 챙겨 가지고 이새의 집으로 갔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 것으로 자기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모든 일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늙은 사무엘에게 새로운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새의 집으로 갔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으로 가는 그 발걸음을 결코 가벼운 발걸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사울에 대한 실망감 때문만이 아니라, 생명의 위험을 안고 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자신이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긴 했지만, 사울이 여전히 왕좌에 앉아 있었습니다. 만일 사울 왕이 이 소식을 안다면 사무엘을 가만 두지 않을 것입니다. 사무엘이 다른 왕을 세우기 위해서 이새의 집을 찾아갔고, 이새의 아들 가운데서 누군가를 새로운 왕으로 기름을 부었다는 소식이 사울에게 알려지면 사울이 사무엘을 죽이려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이새의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실 때에 사무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니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삼상 16:2)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왔노라고 말하라.’고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으로 갑니다.
옛날에 왕이 있는데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려 하다가는 대역죄인으로 큰 벌을 받습니다. 자신의 목숨만이 아니라 가족들까지도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려 하는 것은 역모를 꾸미는 짓으로 가장 무서운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베들레헴 이새의 집을 향해 가는 사무엘의 모습을 왕좌에 앉아 있는 사울의 입장에서 보면 대역죄로 처단할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무엘은 나라를 살리는 길이 그 길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는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그 길 가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무엘을 이스라엘 역사의 디딤돌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디딤돌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디딤돌 인생을 사는 사람은 자신에게 어떤 고난이나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끝까지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야할 길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복음 증거 하는 일을 사명으로 알았던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그 복음 증거 하는 일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놓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면서 그는 숱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죽을 고비도 참 많이 겪어야 했습니다. 반대하는 무리들과 싸워야 했고, 비방하는 사람들의 온갖 비방과 조롱소리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로지 자신의 사명을 위해서 묵묵히 달려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도 바울을 디딤돌로 하여 복음의 역사가 세계를 향해 뻗어가도록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사명의 길을 갈 때에 때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가라 하시는 길이라면 기꺼이 그 길을 갈 수 있습니까? 아무도 나를 지지해 않아도 주님께서 가라 하신다면 묵묵히 그 길을 갈 수 있습니까? 내가 가야할 사명의 길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주님께서 내게 주신 길이기에 십자가라도 지고 갈 수 있습니까?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에는 디딤돌이 필요 없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굳이 내가 디딤돌이 되지 않아도 됩니다.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길에서,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일을 위해서 주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실 때 그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는 사람이 디딤돌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디딤돌의 인생을 사는 사람은 깨끗한 마음과 순수한 신앙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깨끗하지 못한 사람은 당장 보기에는 디딤돌 같아 보일지라도 후에는 그 깨끗하지 못함 때문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하였느냐?” 그러자 백성들이 일제히 소리칩니다.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뉘 손에서 아무 것도 취한 것이 없나이다.”
모든 백성들이 당시 이스라엘의 사사요 선지자로 사역했던 사무엘을 향하여 그의 생애가 얼마나 깨끗했는가를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5절 말씀에 의하면, 사무엘이 왕으로 기름을 부었던 사울도 사무엘의 깨끗함을 증거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도 사무엘의 일생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깨끗하다는 것을 증거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 사무엘의 역할은 사사였습니다. 그는 선지자이며 동시에 사사였습니다. 사사(士師, Judges)는 백성의 지도자요 재판관이었습니다. 나라가 이방 민족으로부터 압제를 당했을 때에는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전쟁을 통해 민족을 구원하는 일을 했고, 나라가 안정되었을 때에는 백성들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재판관의 역할도 담당했습니다. 재판관의 역할은 자칫 잘못하면 큰 비리에 휘말릴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사무엘이 말한 것처럼, 재판을 핑계삼아 백성들로부터 뇌물을 받을 수도 있고, 심지어 정치적인 지도자요 재판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백성들을 압제하여 백성들에게서 소나 나귀와 같은 재산을 탈취하여 부정축재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그런 모든 불의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지켰고, 깨끗하게 직임을 감당했다고 자부했습니다. 백성들도 그것을 다 인정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다. 만일 사무엘이 자신의 직임을 깨끗하게 감당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백성들이 사무엘이 세운 지도자인 사울을 왕으로 인정할 수 있었겠습니까? 왕은 사사보다도 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입니다. 사무엘이 만일 백성들을 압제하고 뇌물을 받아 불의한 재판을 일삼았다면, 그런 사무엘이 세운 왕은 사무엘보다 더 백성들을 괴롭고 힘들게 할 게 뻔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졸라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무엘이 세운 왕을 인정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그런 모든 것에서 깨끗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이스라엘의 새 역사의 지평을 여는 디딤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불의한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거짓되고 부패한 일들을 얼마나 많이 자행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먼 다른 나라 말고 우리나라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대통령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대통령의 권력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오자마자 비리들이 속속 들어났습니다. 부끄러우니까 일일이 다 열거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늘 비리에 휩싸이게 됩니까? 권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이 없고 힘이 없는 곳에는 비리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우리 같이 권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기업에서 몇 억, 몇 십억, 몇 백 억씩 갖다 주겠습니까? 아마 우리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겠다고 좀 도와달라고 손을 벌리면, 가짢다는 듯이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 권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권력은 그만큼 비리에 노출되어 있고, 비리에 얽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런 비리에서 깨끗할 때에 권력은 참된 힘을 얻을 수 있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데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정치에도 사무엘과 같은 깨끗한 정치인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나라가 더 좋아집니다.
정치인들만 탓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권력이 없다고, 그래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처럼 큰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우리가 그들을 향해서 손가락질을 할 수 있습니까? 권력이 없는 우리의 삶에서 깨끗하지 않으면 우리나 그들이나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권력이 있기 때문에 조금 더 큰 비리에 휘말리는 것이고, 권력이 없는 우리는 작은 것에 휘말리게 되는 것뿐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하여 손가락질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우리의 작은 삶에서 깨끗해야 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신앙인다운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걸림돌도 장소만 바꾸면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도 바꿔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만 되었던 걸림돌 인생도 성령 안에서 새롭게 거듭나고 하나님의 말씀의 정으로 쪼개지면 디딤돌 인생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걸림돌 인생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 안에서 거듭나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니까,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디딤돌 인생을 살아간 사람이 되었습니다.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아라』라는 제목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샬린 파웰이란 여성은 마흔 두 살에 바지 사이즈가 40인치가 넘었습니다. 어머니가 정맥염으로 세상을 떠나자 비만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닫게 되었고, 살을 빼기 위해서 에어로빅 클럽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같은 곳을 오래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뚱뚱해서 ‘저런 사람도 있나?’ 하고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그 시선도 부담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날씬한 에어로빅 선생님이 하는 동작을 도저히 따라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살을 빼려고 에어로빅 클럽에 다녔는데, 살을 빼기는 커녕 뚱뚱하다는 것 때문에 수치심과 절망감만 깊이 느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나 같이 뚱뚱한 사람을 위해 에어로빅 클럽을 만들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빚을 내서 ‘뚱뚱한 사람들을 위한 클럽’을 만들었습니다. 전문 강사도 초빙했습니다. 그러나 두 달 만에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날씬한 에어로빅 강사가 뚱뚱한 사람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직접 에어로빅 강사가 되기로 했습니다. 정말 힘든 시간들이었지만, 지도자 과정을 다 마치고 ‘뚱뚱한 여성을 위한 피트니스 클럽’을 다시 만들어 자신이 직접 가르쳤습니다. 그녀는 클럽에 오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해 주었고, 자신처럼 뚱뚱한 사람들도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동작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만든 ‘뚱뚱한 여성들을 위한 피트니스 클럽’은 미국 전역에 52개의 지점을 둔 큰 회사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몸이 뚱뚱하다는 것 - 그것이 샬린 파웰에게는 인생의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니까 그것이 오히려 성공하는 인생을 만들어준 디딤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디딤돌 인생과 걸림돌 인생은 아주 작은 차이입니다. 내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걸림돌 인생이 디딤돌 인생으로 바꿔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내 삶에 걸림돌은 무엇입니까? 배우지 못한 것? 건강이 좋지 못한 것? 가난한 것? 나이가 많다는 것? 혹시 그것 때문에 걸림돌 인생으로 살고 계시진 않습니까? 그것을 신앙의 눈으로 조금만 바꿔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 인생의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아 내 인생이 디딤돌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디딤돌인가 걸림돌인가?(1)
안효관목사 / 삼상 11:14-12:5, 행 11:19-26
같은 돌일지라도 그 돌이 놓여진 장소에 따라서 디딤돌이 될 수도 있고,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슴드리의 커다란 돌이 아이들이 건너기 힘든 냇가에 있어서 냇가를 건너는 발판이 되어준다면, 그 돌은 분명 디딤돌입니다. 그러나 같은 크기의 돌이 자동차가 많이 왕래하는 길 한 가운데 있다면 그건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돌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종종 교회승합차의 바퀴에 바람이 많이 빠져서 윤명수 집사님을 찾아갑니다. 그러면 집사님은 바퀴를 이리 저리 검사해 보시고는 금새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냅니다. 대부분의 경우 바퀴에 못이나 나사못이 박혀 있어서 타이어가 펑크가 난 것입니다. 못이나 나사못이 자동차 바퀴에 박혀 있으면 타이어 안에 들어 있어야 할 공기를 빼서 자동차를 위험에 빠뜨리게 됩니다. 그러나 똑같은 못이나 나사못이 목수의 손에 들려져서 나무를 고정시키고 집을 짓는데 사용된다면 그건 아주 유용하게 쓰여진 것입니다.
오늘은 2004년도 두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어제까지 특별 새벽기도회를 가졌습니다. 평소 새벽기도회를 할 때보다 3배 가까운 많은 분들이 참석해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특별히 이번 특별새벽기도회는 2004년도를 살아갈 우리들의 신앙을 점검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으로 한 해를 살겠다는 다짐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새해를 맞이하면서 결심했던 것처럼, 또 특별새벽기도회에서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는 올 한 해를 디딤돌 인생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구약에서 읽은 구약의 말씀에 나오는 사무엘은 그 시대의 디딤돌이 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역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선지자입니다. 사무엘 선지자 시대의 시대상을 사사기 마지막 절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이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그는 역사상 암울했던 때에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뚜렷한 기준 없이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하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아무도 당시의 사회를 바르게 이끌어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제사가 무너지고,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바로 그런 시대에 사무엘이 등장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전까지는 사사를 중심으로 살아가던 사회였습니다.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은 모두 왕정체계를 갖추고서 튼튼한 군사력으로 이스라엘을 위협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우리에게도 왕을 달라"고 졸라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왕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그들의 왕이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위에서 사람을 다스리는 왕이 주어지면 그 왕을 통해서 나라의 힘은 강해질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길일뿐만 아니라, 왕을 통해서 백성들은 더 큰 시련과 고통을 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아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주시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왕을 세워달라고 졸라댔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시기로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 왕정시대를 열어갈 주역으로 사무엘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무엘은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역할을 마친 후에는 조용히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려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 시대의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 시대에 디딤돌들이 되어야 합니다. 디딤돌이 되려면 네 가지를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은 그 중 두 가지만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디딤돌은 자신을 다른 사람의 발판으로 내놓아야 합니다. 내 유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시대의 사람 사는 방법입니다. 나는 전혀 손해보려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손해보라고 요구합니다. 손해보며 사는 사람은 세상을 잘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게 오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디딤돌로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그의 희생물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바칠 것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이 먼저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당신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당신이 먼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을 가리켜서 모퉁이 돌이요(엡 2:20),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다(마 21:4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퉁이 돌' 또는 '모퉁이의 머릿돌'이란 말은 건물의 기초석이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건물의 가장 아래에서 모든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돌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라고 하는 영적 건물의 모퉁이 돌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장 낮은 곳에서 자신을 희생하시며 교회를 이 땅에 세우셨습니다. 모퉁이 돌이 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버리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자신을 놓음으로서 모든 성도가 그 모퉁이 돌을 딛고 신앙의 집을 건축해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예수님은 모든 신앙인과 인류의 디딤돌이 되신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는 사랑하는 소년이 하나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그 소년은 그 나무에게로 와서 나무와 함께 놀았습니다. 놀다 지치면 소년은 나무 그늘 아래서 단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그런 소년의 모습을 보면서 나무는 너무 너무 행복했습니다.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소년도 점점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홀로 있을 때가 많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를 찾아온 소년은 나무와 놀아주기는커녕 뭔가를 사고 싶은데 돈이 없다며 근심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나무는 그 소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사과를 따다가 팔아서 돈이 생기면 그것으로 네가 사고 싶은 것을 사려무나." 소년은 나무 위로 올라가서 사과를 따서는 가지고 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소년을 위해서 자신이 뭔가를 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던 것입니다.
떠나간 소년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나무를 찾아왔습니다. 나무는 너무 기뻐서 나뭇가지를 흔들며 소년을 맞았지만, 소년은 여전히 시무룩했습니다. 소년은 '자신에게 집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나무는 소년에게 '자신의 가지를 베어다가 집을 지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소년은 자기 집을 짓기 위해 그 나무의 가지들을 베어서 떠나갔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여전히 행복했습니다
또 다시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제법 나이가 들어버린 소년이 다시금 나무를 찾아와서, 이번에는 '바다 건너 먼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배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나무는 '자신의 몸통을 베어다가 네가 원하는 배를 만들어 가고 싶은 먼 곳에 다녀 오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소년은 나무의 줄기를 베어 내서 배를 만들어 타고 멀리 떠나 버렸습니다. 자기의 몸통까지 다 주어버렸지만,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소년은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제 나무는 소년에게 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으로 소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미안하다, 이제는 너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사과도 없고, 그네를 뛸 수 있도록 해주고 싶으나 가지가 없고, 몸통마저 없으니 네가 옛날처럼 나무를 다고 오르며 놀 수도 없구나. 미안하구나." 그러자 늙어버린 소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별로 없어. 난 몹시 피곤해. 앉아서 조용히 쉴만한 곳이나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 쉬기에는 늙은 나무 밑둥이 그만이야. 얘야, 이리로 와서 여기 앉아 쉬려무나." 나무는 소년을 위해서 마지막 남은 자신의 밑둥이를 내어주었습니다. 늙어 지쳐버린 소년은 나무가 시키는 대로 피곤한 몸을 납작한 나무의 밑둥에 앉아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동화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는 한 소년을 위해서 자신 모두를 희생하는 정말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통해서 감동을 받게 됩니다. 디딤돌이란 바로 이런 희생을 통해서만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나를 밟도록 자신을 내어놓지 않으면 디딤돌이 될 수 없습니다.
디딤돌이란 자신은 밟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돌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움켜쥐고, 더 많은 것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때에, 우리는 조용히 우리 자신을 희생함으로 세상에 디딤돌들이 되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상의 방법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닮아 가는 삶을 통해서 디딤돌이 되어야 합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내가 있음으로 내 가정을 행복한 공동체로 만들어 가는 디딤돌이 되어야 하고, 내가 먼저 섬김으로 우리 교회를 행복한 교회로 세워 가는 디딤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양보하고 희생함으로 내 직장이 화기애애하고, 내가 한 번 더 져주고 죽음으로 해서 친구들 사이에서도 디딤돌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디딤돌은 다른 사람을 높이고 자신은 낮아질 뿐만 아니라, 영광의 자리에서 조용히 물러날 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무엘은 이제 자신은 물러갈 때가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역할은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는 것으로 다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이스라엘 앞에 드러내 놓고 자신은 역사의 뒤편으로 조용히 물러가려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늘이 자신의 생애에 마지막'으로 알고 마지막 연설을 하는 말씀입니다. 그는 사울을 세우는 일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이 역사 앞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제 자신은 역사 뒤편으로 물러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위에 세운 사울이라는 새로운 왕이 그의 역사를 펼쳐나갈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위대하다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곳곳에는 자신이 물러나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물러나지 않음으로 해서 여러 가지 문제와 갈등을 야기시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러나야 할 때에 조용하고 깨끗하게 물러나지 않으면 그 동안 쌓아왔던 모든 인품과 덕망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오늘 신약성경에서 읽은 바나바도 자신이 역사 뒤편으로 물러날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안디옥 교회의 첫째 가는 지도자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안디옥 교회로 파송 받았고, 안디옥 교회에 가서는 교회를 엄청나게 부흥시켰습니다. 교회가 커지자 바나바는 자신 혼자서 안디옥 교회를 섬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회심한 사울을 불러와 함께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 교회는 더욱 성장하게 되었고, 안디옥 교회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모범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를 섬길 때에는 바나바가 '나중에 바울로 이름이 바뀐 사울'보다도 훨씬 더 좋은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소아시아 지역에 선교사로 파송받은 이후에는 달라졌습니다. 처음 선교사로 파송 받았을 때에는 바나바가 사울을 리드했습니다. 13:7절에 보면 그 두 사람의 이름이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나바의 이름이 사울보다 앞에 기록함으로서 그 선교여행은 바울 중심이 아니라 바나바 중심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가 시작되면서 13:13절 이하에서는 바나바의 이름이 사라지고 맙니다. 대신 바울의 이름이 역사의 전면에 나타납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되면서 바나바의 이름은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나바는 바울에 대해서 어떤 불평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바나바는 바울에게 있어서 신앙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신뢰해주지 못할 때에 자신을 신뢰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안디옥 교회를 함께 섬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함께 선교사역을 떠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준 사람이 다름 아닌 바나바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이 전면에 드러나면서 바나바는 그 이름조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바나바는 바울에게 은인으로서의 어떤 대우를 받으려 한다든지, 자신이 바울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바나바를 존경스럽게 만든 모습입니다.
여러분, 내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사람, 마땅히 내가 누려야 할 어떤 특권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역사에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바나바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사도 바울 역시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특권이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할 줄 아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쉽게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현실적인 이익에 우리의 눈이 고정되어 있는 한 우리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좀더 크고 좀더 넓은 새로운 시대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현실적인 권리와 이익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참으로 희한한 모습을 보아야 했습니다. 유아교육법안이 국회에서 통과하려 하자 두 단체가 동시에 국회 밖에서 5일 동안이나 시위를 했습니다. 유치원 교사들이 주축이 된 한 쪽에서는 유아교육법 제정을 촉구했고, 어린이집 교사들이 주축이 된 다른 한 쪽에서는 유아교육법 철회를 외쳐댔습니다. 국회에 상정된 유아교육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자기들의 이익에 막대한 손실이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이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마땅히 있어야 할 의사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주장하기에 앞서 더 큰 것을 함께 보는 시각이 부족했다는 것이 안타까웠던 점입니다. 유아교육법의 근본 취지는 모든 아이들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제공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이들의 미래와 우리 한국 사회의 미래와 직결된 아주 중요한 사안인데도,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기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자기들의 이익만을 소리 높여 외친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FTA(한국-칠레 자유무역협정) 비준 동의안을 놓고도 희한한 시위가 있었습니다. 농민들이 자기들의 생계를 위해 시위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서로 헐뜯고 비난하기에 혈안이 되었던 서로 다른 정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이일을 놓고는 '농촌당'과 '도시당'으로 구별되었습니다. 그들이 정말 농민을 위해서 비준동의안을 반대하는 것인지, 아니면 바로 코 앞에 다가와 있는 4.15총선 때문에 그런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여당과 야당의 구별이 아닌 농촌당과 도시당으로 나뉘어서 국회 안에서 시위를 벌였던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더 나은 것인지 우리는 잘 모른다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나라의 먼 장래를 걱정하고 큰 시각과 안목에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자기들의 이익에 국가와 역사와 미래를 팔아먹는 것 같아 그 역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일이 저 서울이나 국회에서만 일어나는 일입니까? 오늘 우리는 지금 내가 속해 있는 곳에 디딤돌이 되고 있습니까?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까? 내가 거기에 있음으로 해서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이 유익을 얻고 도움을 받는다면 우리는 디딤돌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유익과 나의 권리만을 앞세운다면 당장 우리는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목에서 걸림돌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디딤돌이 되어주셨던 것처럼, 주님을 믿는 우리 역시 우리의 삶에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또 이웃을 위해서 디딤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2004년 새로운 한 해, 여러분은 디딤돌이 되시겠습니까? 걸림돌이 되시겠습니까? 디딤돌은 비록 사람들의 발에 밟힐지라도 그는 오래 동안 향기를 풍기며 그 자리를 지킬 것이지만, 걸림돌은 언젠가 그 자리에서 뽑히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 걸림돌이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뽑아버리실 수 있습니다.
2004년 한 해는 우리 모든 교우님들이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들이 되셔서, 내가 있는 그 자리가 축복의 자리요, 행복의 자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디딤돌은 밟힐수록, 감추어질수록 그 향기가 오래가기 때문입니다.
디딤돌인가 걸림돌인가?(2)
안효관목사 / 삼상 11:14-12:5, 행 11:19-26
여러분, 지난 한 주 동안 여러분의 삶은 디딤돌의 삶이었습니까? 아니면 걸림돌의 삶이었습니까?
지난 주 몇 일동안 집사람을 시골에 보내놓고 아이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없는 집이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한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집사람이 가면서 반찬도 준비해 놓고, 간단하게 요리하면 먹을 수 있는 것들도 마련해 놓았지만, 식사를 할 때뿐만이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아내가 없는 빈자리는 너무도 허전했습니다. 그러면서 역시 집안에는 아내가 있어야 따뜻한 가정이 될 수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없어서 불편했고, 아내가 없어서 허전했다면 가정에서 아내는 역시 디딤돌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내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디딤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내가 있음으로 해서 오히려 불편하고 거북하다면 - 그래서 다른 사람이 생각하기를 '차리리 그 사람은 없는 것이 나아' 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우리는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모든 자리에서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자리에서 똑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정에서는 디딤돌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때로 직장에서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 부분에서는 디딤돌인 사람이 다른 부분에서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한 부분에서는 걸림돌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 다른 부분에서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디딤돌의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걸림돌 같은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그가 속한 곳에서 엄청난 피해를 안겨 주기 때문입니다. 가정 안에 걸림돌 같은 한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가정에 행복을 파괴하고, 따뜻하고 포근해야 할 가정이 전쟁터와 같은 곳으로 변하고 맙니다.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할 교회 안에 걸림돌 인생을 사는 한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그 교회는 상처 입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안식처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아픔의 공동체가 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올 한해를 걸림돌의 인생이 아닌 디딤돌의 삶을 살아가자는 뜻에서 지난 주에 디딤돌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두 가지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로 디딤돌의 삶을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밟고 성장하도록 자신이 희생의 발판이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함으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과 인생의 보람을 찾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디딤돌의 삶을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높이고 자신은 낮아질 뿐만 아니라, 영광의 자리에서 조용히 물러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을 왕좌에 올리는데 1등 공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등 공신의 대우와 명예를 거부하고 역사 뒤편으로 조용히 물러가려 했습니다.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영광을 포기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보다 큰 역사적 안목으로 인생을 보며 역사를 보는 사람만이 스스로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를 새롭게 열어 가십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디딤돌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의 나머지 두 가지 특징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 번째로 디딤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그곳에서 제물이 된다 하더라도 그곳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그를 필요로 할 때에 언제든지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권좌에 오른 사울은 부르심을 받은 초기와는 달리 그는 교만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정치적인 야망을 앞세워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됩니다. 사울에게서 실망하신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시고, 새로운 왕을 세우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의 집으로 보내십니다. 이새의 아들 가운데서 사울을 대신할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무엘은 새로운 왕에게 부을 기름병을 챙겨 가지고 이새의 집으로 갔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 것으로 자기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모든 일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늙은 사무엘에게 새로운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사무엘은 두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새의 집으로 갔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으로 갔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발걸음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라는 사람이 여전히 이스라엘 왕의 권좌에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다른 왕을 세우기 위해서 이새의 집을 찾아갔고, 이새의 아들 가운데서 누군가를 새로운 왕으로 기름을 부었다는 소식이 사울에게 알려지면 사무엘은 사울 왕의 권력에 의해서 반역죄로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사극을 보면, 기존에 왕이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사람을 왕으로 세우려 한다든지, 아니면 차기 왕으로 지명된 왕자 외에 다른 사람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발각되면 그 사람들은 대역죄로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대역죄는 나라에서 다스리는 죄 가운데 가장 큰 죄입니다. 대역죄를 지은 사람은 거의 대부분이 처형을 당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동조했던 사람들도 왕이 살고 있는 곳에서 아주 먼 곳으로 귀향을 가야 합니다.
베들레헴 이새의 집을 향해 가는 사무엘의 발걸음은 왕좌에 앉아 있는 사울의 입장에서 보면 대역죄로 처단할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무엘은 나라를 살리는 길이 그 길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는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그 길 가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무엘을 이스라엘 역사의 디딤돌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디딤돌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디딤돌 인생을 산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소개되고 있는 바나바도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이방 지역인 안디옥 교회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당시 분위기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던 교회역사의 가장 초기였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때입니다. 그래서 오늘 신약 본문 19절에 보면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안디옥 교회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고, 헬라인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안디옥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당시 상황에 비춰본다면 굉장한 사건입니다. 아직도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진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를 급파했습니다. 교회의 파송을 받고 안디옥에 간 바나바의 발걸음은 결코 가벼운 발걸음일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교회가 큰 혼란에 빠질 수도 있고, 자칫하면 바나바 자신이 율법을 거역한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할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안디옥으로 갔습니다. 자신이 안디옥 교회의 디딤돌이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는 안디옥 교회의 디딤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를 바꾸는 디딤돌이기도 했습니다.
또 당시 아무도 가까이 하기를 꺼려했던 사울이라는 청년을 데리고 와서 안디옥 교회에서 함께 사역을 감당했던 것도 모험이었습니다. 그렇게도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이 어느 순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변화되었다고 하는데, 당시로서는 어느 누구도 섣부르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조차도 사울에 대해서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만은 달랐습니다. 그는 사울이라는 청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자기의 목회 사역에 사울을 불려들여 함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바나바는 자기의 안일을 생각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길이라면 그 길이 힘들고 고달프다 하더라도, 또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그 사명의 길을 갔던 사람이 바나바였고, 사무엘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디딤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사명의 길을 갈 때에 때로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 하더라도 주님께서 가라 하시는 길이라면 기꺼이 그 길을 갈 수 있습니까? 아무도 나를 지지해 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개척자의 마음으로 주님께서 가라 하신 그 길을 갈 수 있습니까? 내가 가야할 사명의 길이 힘들더라도 '이 한 몸 바쳐서 충성하리라'는 고백으로 사명의 길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교회에서 디딤돌이 되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위해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그 길이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버거운 길이라 하더라도 기꺼이 그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내가 해야 할 그 일이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 어렵고 힘든 일이라면 더욱 그건 내 사명임을 알고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보다,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힘들고 어려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이 참된 이 시대의 디딤돌입니다.
네 번째로 디딤돌의 인생을 사는 사람은 깨끗한 마음과 순수한 신앙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깨끗하지 못한 사람은 당장 보기에는 디딤돌 같아 보일지라도 후에는 그 깨끗하지 못함 때문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하였느냐?" 그러자 백성들이 일제히 소리칩니다.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뉘 손에서 아무 것도 취한 것이 없나이다."
모든 백성들이 당시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던 사무엘을 향하여 그의 생애가 얼마나 깨끗했는가를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이 왕으로 기름을 부었던 사울도 사무엘의 깨끗함을 증거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도 사무엘의 일생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깨끗하다는 것을 증거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 사무엘의 역할은 사사였습니다. 그는 선지자이며 동시에 사사였습니다. 사사(士師, Judges)란 지도자요 재판관이었습니다. 나라가 이방 민족으로부터 압제를 당했을 때에는 민족을 구원하는 일을 했고, 나라가 안정되었을 때에는 백성들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재판관의 역할도 담당했습니다. 재판관의 역할은 자칫 잘못하면 큰 비리에 휘말릴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사무엘이 말한 것처럼, 재판을 핑계삼아 백성들로부터 뇌물을 받을 수도 있고, 심지어 정치적인 지도자요 재판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백성들을 압제하여 백성들에게서 소나 나귀와 같은 재산을 탈취하여 부정축재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그런 모든 불의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지몄고, 깨끗하게 직임을 감당했다고 자부했습니다. 백성들도 그것을 다 인정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다. 만일 사무엘이 자신의 직임을 깨끗하게 감당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백성들이 사무엘이 세운 지도자인 사울을 왕으로 인정할 수 있었겠습니까? 왕은 사사보다도 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입니다. 사무엘이 만일 백성들을 압제하고 뇌물을 받아 불의한 재판을 일삼았다면, 그런 사무엘이 세운 왕은 사무엘보다 더 백성들을 괴롭고 힘들게 할 게 뻔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졸라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무엘이 세운 왕을 인정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그런 모든 것에서 깨끗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이스라엘의 새 역사의 지평을 여는 디딤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불의한 목적 달성을 위해서 얼마나 거짓되고 부패한 일들을 자행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먼 옛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그것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통령이라는 권력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지난 대선 때에 얼마나 많은 비리들이 있었는지가 조금씩 밝혀지고 있습니다. 한나라 당에서는 600억 원에 이르는 불법 자금을 모았다고 밝혀졌습니다. 돈을 실은 트럭 채 기업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에 이젠 더 이상 할 말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대통령의 주변에서도 비리의 사슬이 끊이지 않고 들추어지고 있습니다. 정말 어느 곳 하나 깨끗한 곳이 없어 보입니다.
왜 그렇게 어마어마한 비리가 그 속에 있습니까? 그곳이 권력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권력이 없는 곳에는 그런 비리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우리 같이 권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기업에서 몇 억, 몇 십억, 몇 백 억씩 갖다 주겠습니까? 아마 우리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겠다고 좀 도와달라고 손을 벌리면, 가짢다는 듯이 코방귀도 뀌지 않을 것입니다. 권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권력은 그만큼 비리에 노출되어 있고, 비리에 얽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런 비리에서 깨끗할 때에 권력은 참된 힘을 얻을 수 있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데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정치에도 사무엘과 같은 깨끗한 정치인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나라에 희망이 있습니다.
정치뿐만이 아닙니다. 가장 깨끗해야 할 교회 안에도 온갖 비리가 들끓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세상을 향해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교회가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제도가 투명하지 못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종교라는 테두리 안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온갖 비리에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의 부흥을 외치는 부흥사협의회 총회가 있을 때마다 거짓으로 회원을 만들고, 회장으로 출마하는 사람이 자기 사람을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 회원들의 연회비를 대납해주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비리를 지적하는 비판의 소리에 대해서는 귀를 막아버립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강단에서 한국 교회의 부흥을 외치며,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을 선포할 수 있단 말입니까?
교단 총회장 선거를 치루기 위해서는 최소한 10억을 써야 한다는 게 이제 상식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선거를 하기 위해서는 돈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상적이고 법이 정한 한도 내에서 사용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깨끗한 선거, 가장 깨끗한 양심을 외쳐야 할 교단 안에서 그런 비리가 자행되고 있는데, 이런 교회가 어떻게 대통령 선거 때에 불법자금을 썼다는 것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또 비판한들 누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니네나 잘 해'라고 오히려 교회를 향하여 비판하지 않겠습니까?
지난 1월 초에 우리 교단 총회장이 시국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교단 총회장님이 시국담화문을 발표했다는 뉴스나 기사거리를 일반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들어보셨습니까? 우리 나라 기독교 가운데 가장 큰 교단이라고 말하는 우리 교단 총회장의 시국 발표문인데 교회 밖에서는 아무도 그 말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를 바가 없이 부패해 있는데, 누가 우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가?
또 소위 대형교회를 만든 성공한 목회자라고 추앙을 받던 많은 목사님들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얼마나 부도덕한 짓을 자행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난달 초 한국기독교 총연합회 공동의장인 50대 중반의 한 목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신문기사가 대대적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발표는 목회 중에 과로로 인해서 돌아가셨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끄럽게도 교인과 호텔방에 들어가 부정을 저지르다가, 교인의 남편이 나타나자 도망갈 데가 없어 호텔 창문 밖에 설치된 에어컨을 10분 동안 붙잡고 있다가 힘이 빠지자 호텔 밖으로 떨어져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더 부끄러운 것은 그분의 장례식을 치루면서 조사를 읽은 한 목사님은 '누가 이분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부정을 저지르다 돌아가신 그분의 죽음 앞에서 통회하며 가슴을 찢어야 할 한국 교회가 오히려 그분의 부정한 죽음을 감싸고 있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더 가슴을 아프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도 사실 이런 불의한 현실 앞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을 뿐이지, 우리도 그런 불의에 노출되어 있고, 불의를 행하면서도 결코 가슴 치지 않는 마비된 양심과 거짓된 신앙으로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신약 본문에 나오는 바나바를 보십시오. 성경은 바나바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양심적이었다는 말입니다. 거짓이 없는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깨끗한 양심과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바나바는 역사의 뒤편으로 조용히 물러갔지만, 그는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 깨끗한 양심과 순수한 거짓 없는 믿음을 가진 바나바를 만났기 때문에 사도 바울 역시 바나바처럼 그의 일생을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진 않지만, 아마도 사도 바울은 바나바를 자신의 사표로 삼고 그를 본받으려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깨끗하지 못한 삶을 살다 간 사람들은 그가 떠나간 뒤에 그의 대한 역사의 평가를 통해서 디딤돌이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됩니다. 디딤돌이었던 것처럼 보였지만, 지나고 보면 역사의 걸림돌이었음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걸림돌도 장소만 바꾸면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도 바꿔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만 되었던 걸림돌 인생도 성령 안에서 새롭게 거듭나고 하나님의 말씀의 정으로 쪼개지면 디딤돌 인생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걸림돌 인생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 안에서 거듭나며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자가 되니까,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디딤돌 인생을 살아간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바라기는 우리 중앙가족 모든 믿음의 식구들은 올 한해를 걸림돌 인생으로 살아가지 않고, 모두 디딤돌 인생으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에 쓰시든지 하나님께서 있으라 하신 곳에서 내게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며, 바로 그곳에서 깨끗한 양심과 더러움이 없는 순수한 신앙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는 온전한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나라사랑
삼상 11장 14~15절 / 최성규목사
사람들은 참 어리석습니다. 있을 때 잘해야 하는데, 잃어봐야 소중함을 압니다. 건강이든, 가족이든, 잃어봐야 그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100년 전, 1910년 8월 29일, 우리는 나라를 잃었습니다. 나라를 잃는다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입니다. 나라를 잃자, 말과 이름을 빼앗겼습니다. 신앙까지 빼앗겼습니다. 자유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소중한 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나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는 두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조국 나라입니다. 기독교인은 두 나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성경의 위인들은 모두 신앙인이자, 애국자였습니다. 모세, 사무엘, 다윗, 에스더 모두 신앙인이자, 애국자였습니다. 예수님과 바울도 신앙인이자, 애국자였습니다. 모두들 자신의 목숨보다 나라를 더 사랑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나라를 위해 일어서야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어렵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사고가 터집니다. 하늘에서, 땅에서, 바다에서 터집니다. 정치하는 사람들, 기업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터집니다. 사무엘은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삼상 11:14)고 외쳤습니다. 이 외침은 우리를 향한 외침입니다. 대한민국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대한민국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생각과 삶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새로워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아봄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애국신앙인이 됩시다.
첫째,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롬 13:1). 국가의 권세도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국가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국가에 엄청난 힘도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롬 13:4). 하나님께서 왜 솔로몬의 기도를 기뻐하셨습니까? 솔로몬의 기도를 보십시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우리는 이 기도에서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는, 국민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내 백성”이 아니라, “주의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국민을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국민 위에 군림하지 않고 국민을 섬겼습니다. 둘째로, 국민을 위해 지혜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정권이나 정부의 업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야 합니다. 국가는 국민 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을 보호하고 국민을 지키는 것이 국가입니다. 국가가 가진 힘은 국민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군인이나 어부들이 희생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약한 자들이 소외되어서도 안 됩니다.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 나와서도 안 됩니다. 주민등록증이나, 대한민국 여권이 울타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자랑이어야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하나님의 국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국가는 모든 힘을 동원해서 국민을 보호해야 합니다. 이것이 나라사랑입니다.
둘째, 국민은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
국가의 나라사랑이 국민은 보호하고 지키는 것이라면, 국민의 나라사랑은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권리보다 의무가 먼저입니다. 자리보다 책임이 먼저입니다. 의무를 감당할 때, 권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책임을 다할 때, 자리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꾸로 가면 문제가 됩니다. 나라를 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망하게 합니다. 권리만 주장하면 사회가 불안해집니다. 자리만 찾으려고 하면 열매가 없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국방, 납세, 교육, 근로라는 4대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의무를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의무와 책임을 다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성전세를 요구할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세금의 의무를 다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것까지도 내주셨습니다(마 17:27).
예수님처럼 의무와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 성경적인 삶입니다(눅 20:25 롬 13:7). 혹시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혹은 억지로 의무를 감당하지는 않습니까? 이제 주님을 위하여 의무와 책임을 감당해봅시다(벧전 2:13). 바울은 주님을 위해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고전 9:12). 이러한 자신을 본받으라고 교훈합니다(살후 3:8,9).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본을 끼쳤고, 사도들은 성도들에게 본을 끼쳤습니다. 이제 구원받은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본을 끼쳐야 합니다. 의무를 초월하여 감당하는 사람이 이 시대에 쓰임 받습니다. 역사를 주도합니다.
셋째, 성도는 나라 위해 기도하자
기도는 기독교인이 나라를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기도하는 정치가가 앞에 서야 합니다. 기도하는 기업가가 많아져야 합니다. 기도하는 교육자가 존경받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국민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과거에 우리나라 믿음의 선배들은 나라를 위해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나라를 위해 구름떼처럼 모여 기도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잘 모이지 않습니다.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은 많고, 애국을 외치는 사람도 많은데 정작 애국자는 없습니다. 존경받는 정치가가 나와야 합니다. 국가 경제를 이끄는 기업가가 나와야 합니다. 바른 교육을 이끄는 스승도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기도하는 국민들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이 나라가 더 건강해집니다. 부흥합니다. 든든해집니다. 우리 국민의 지경이 더 넓어집니다(사 26:15). 기도하지 않는 천만 인보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애국자입니다. 모세가 기도하자,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사무엘이 온 국민과 함께 미스바에 모여 기도하자,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대승했습니다. 에스더가 금식하며 기도하자, 하만은 넘어지고 유대 민족은 높아졌습니다. 느헤미야가 기도하자,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벽이 다시 세워졌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입니다. 그리할 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대한민국에서 이루어집니다.
넷째, 하나님은 나라와 국민을 지키신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것은 신앙고백입니다.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애국가 가사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한 나라의 번영과 멸망도 주관하십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넘어 신본주의여야 합니다. 경제력도, 국방력도, 정치력도 상황에 따라 변하고 무너집니다. 우리가 믿을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만유의 통치자이십니다. 다윗은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대상 29:11)라고 찬양했습니다.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북한보다 못 살고, 동남아 국가들보다 조건이 안 좋았던 대한민국이었습니다.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위기도 여러 번 겪었던 대한민국입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이 성장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경제대국이자 선교대국으로 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한국 교회가 됩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시다. 그리할 때, 대한민국의 지경이 넓어집니다(출 19:5,6).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 위에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렘 33:9).
신앙과 애국은 하나입니다. 대한민국과 나도 하나입니다. 내가 곧 대한민국이고, 대한민국이 곧 나입니다. 나라사랑이 예수사랑이고, 예수사랑이 나라사랑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성도가 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