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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너의 구원자이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1,13-20
13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14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15 보라, 내가 너를 날카로운 타작기로, 날이 많은 새 타작기로 만들리니,
너는 산들을 타작하여 잘게 바수고, 언덕들을 지푸라기처럼 만들리라.
16 네가 그것들을 까부르면 바람이 쓸어 가고, 폭풍이 그것들을 흩날려 버리리라.
그러나 너는 주님 안에서 기뻐 뛰놀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안에서 자랑스러워하리라.
17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물을 찾지만,
물이 없어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탄다.
나 주님이 그들에게 응답하고,
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리라.
18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
19 나는 광야에 향백나무와 아카시아, 도금양나무와 소나무를 갖다 놓고,
사막에 방백나무와 사철가막살나무와 젓나무를 함께 심으리라.
20 이는 주님께서 그것을 손수 이루시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그것을 창조하셨음을,
모든 이가 보아 알고 살펴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1-15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13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14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15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온갖 죄로 벌레와 구더기 같은 삶을 살아온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자처하시며 당신을 신뢰하라고 말씀하신다(제1독서). 세례자 요한은 모든 예언자가 그러하듯이 박해 속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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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너의 구원자이시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며,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잊고 오히려 두려움과 실망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요즘 국제화 시대에서는 세상이 너무 크게 보여 두려움과 불신의 감정에 더욱 쉽게 젖어 듭니다.오늘 독서에서 예언자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 삶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로운 현존을 깨닫게 해 줍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보루이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위로이시며 사로잡힌 이들의 해방이십니다.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물을 찾지만, 물이 없어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탄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도와주러 오십니다.예언자는 바빌론 유배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새로운 탈출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는 첫 번째 해방보다 더 심오한 해방이 될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해방된 다음 광야를 걸어갈 때 이스라엘 백성이 바위에서 솟는 샘물로 갈증을 없앴다면, 이제 주님께서는 광야 전체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이렇게 당신 백성을 위하여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 사랑은, 우리와 함께 지내시려고 하늘에서 내려오셨을 뿐 아니라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당신 목숨을 내주셨던 예수님을 통하여 그 정점에 이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랑을 “보아 알고” 마음으로 깨달아야 합니다.주님께서 2천 년 전에 하신 약속은 “세상 끝 날까지”(마태 28,20)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지내는 것은 사랑에 빠진 이들의 가장 큰 바람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지낸다는 것,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지낸다는 것, 이보다 더 설레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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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은 구세주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였기 때문에 위대합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구세주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만큼 그의 말과 행동은 유다인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삶은 엘리야 예언자에 버금가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임박한 구세주의 출현을 알리는 예언자이므로 구약의 어떤 예언자보다도 더 위대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예언자들이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그는 구세주의 수난을 예표하며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을 완성하는 실체입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그분의 수난 공로로 그분의 옆구리에서 솟아납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약의 백성이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던 구세주의 풍요로운 은총을 누리는 행운아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은총이 골짜기의 샘물처럼, 광야의 연못처럼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채웁니다.
어린 시절 극심한 가난을 체험했던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는 완덕에 오르는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성인은 세고비아 수도원장으로서 관리 행정 업무, 노동 소임 등 모든 일을 열성적으로 하였고, 수도원에서 가까운 언덕 위의 작은 동굴에서 기도하기를 즐겼습니다.
성인은 “사랑이란 대단한 것들을 느끼는 데 있지 않고, 사랑받는 분을 위해 큰 헐벗음과 고통을 겪는 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멸시받는 삶 속에서 완덕의 은총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성인의 삶에서, 우리 구원이 십자가에 달렸음을 깨닫게 됩니다.(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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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이사야 예언서 제2부(40―55장)에는 매우 아름답고 심오한 말씀들이 많이 소개되지만, 이 말씀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벌레 같고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은 아무 힘이 없는 미약한 존재입니다. 나라도 패망하여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신세이므로, 그저 밟혀 죽을 수도 있는 보잘것없고 미천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희망도 이미 다 잃어버리고 그저 주저앉아 있는 이들에게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그들을 돌보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이사야 예언서 신학의 핵심이요 요약입니다. 이사야는 주님을 만나 뵙고서는 “나는 이제 망했다.”(이사 6,5)라고 탄식할 정도로, 하느님께서는 위대하시고 초월적이시며 절대적이신 분이시기에, 벌레 같은 인간이 감히 다가갈 수도, 범접할 수도 없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너의 구원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구원자”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고엘’입니다. ‘고엘’은 빚 때문에 팔려 간 사람을 속전을 주고 되찾아 오고, 어쩔 수 없이 땅을 팔아야 할 처지가 되었을 때, 그 땅을 사 주는 가까운 친족, 곧 ‘구원자’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벌레 같은 야곱”과 친족 관계를 맺으시어, 그 야곱을 끝까지 돌보아야 할 책임을 당신 스스로 부과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벌레 같은 야곱”에게 매여 계십니다. 크신 하느님께서 작디작은 우리를 돌보십니다. 그분께서 오늘 내가 ‘너’를 지켜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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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고 하십니다. 21세기인 지금도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는 못된 세력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아니 오히려, 경제가 발전하고 교육과 문화 수준이 높아질수록, 하늘 나라는 점점 더 좁아져 가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이천년 전에는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했지만, 모두 폭력을 쓰는 자들에게 핍박을 받거나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그것도 모자라,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마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러한 세력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날뛰며 횡포를 부리고 있습니다. 비신앙인들뿐 아니라, 일부 경건하다는 신앙인마저도 적극 가담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사실 경제가 발달하고 지식 수준이 높아갈수록 주님의 뜻을 따라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경제가 밥 먹여 주고, 지식이 권력과 명예를 대신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부르짖을 때도 영적 지도자들마저 속화(俗化)되어 달갑게 여기지 않더니, 오늘날에도 그런 현상은 여전한 듯합니다.
이제 구원으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는 그분을 맞이할 각오를 새롭게 다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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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칭찬하십니다. 아직까지 그보다 ‘더 큰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가 메시아의 출현을 준비하며 철저하게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엘리야’ 예언자라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종말이 되면 사람들을 준비시키려고 그가 다시 온다고 유다인들은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준비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있기에 ‘행사’는 빛이 나고, ‘일’은 성공을 거둡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음으로 요한을 칭찬하셨습니다. 어디에나 주인공 뒤에는 묵묵히 일하는 조연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진정한 주인공은 그들을 잊지 않는 것이지요.
어떤 영화를 촬영하는 자리였습니다. 화려한 배역을 끝낸 주인공은 담배를 피우고 있습니다. 석양을 바라보며 만족한 듯 연기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카메라 뒤쪽에서는 또 다른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습니다. 그는 주인공을 보면서‘혼잣말’을 합니다. “잘 죽어야 할 텐데.” 그는 ‘엑스트라’입니다. 오늘의 배역은 죽는 역할입니다. 그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주인공의 역할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모두가 주인공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착각하며’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뛰어난 조연을 거쳐야 뛰어난 주연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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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하늘 나라가 왜곡되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개인적인 소유물’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이런 엉터리 이론과 가르침이 있었나 봅니다.
사람들은 하늘 나라를 쉽게 오해합니다. 죄짓지 않고 공로가 많은 사람들만 가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는 이들만 모이는 곳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사람들이’가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천국 가기에 당연한 삶’은 없습니다. 완벽한 삶이더라도 그것은 우리 판단이지 주님의 판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실천해야’그분의 허락을 받습니다. ‘사랑의 삶’이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사랑하면 삶이 달라집니다. 아름다워집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면’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삶을 계속해야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율법 준수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러기에 회개와 천국을 이야기하던 요한을 제거하려 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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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과 엘리야가 오늘 복음의 핵심 단어입니다. 두 분은 예언자입니다.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고, 엘리야는 종말에 나타날 예언자입니다. 사람들은 요한을 엘리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착각이 아니라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모두가 통째로 바뀌어 새 하늘 새 땅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입니다. 받아야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말을 하게 됩니다. 가짜가 되는 것이지요. 예언자랍시고 인기에 매달리다 보면 그렇게 됩니다.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그렇게 해서 속화되었습니다. 청중의 뜻을 하느님의 뜻보다 중시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다 보면 배우가 되는 것이지요. 영적 지도자가 대중 스타로 떠오르면 위험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았습니다. 그의 모든 예언은 예수님을 알리는 데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 역할에 충실하다 그는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삶을 기억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오늘 기념하는 루치아 성녀도 명문가의 출신이었지만 사람의 뜻보다 주님의 뜻을 따랐기에 순교하였습니다. 어디서나 주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무척 아까운 것마저도 내놓아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의 자녀나 손주가 의대에 들어가서 의사가 되겠다고 말한다면 어떠시겠습니까? 또 교육대학에 들어가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겠다면 혹시 도시락 싸 들고 적극적으로 말리시겠습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의사나 교사는 현대에 존경받는 직업이며, 안정된 전문직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십니까?
로마 시대에 교사나 의사는 노예의 직업이었습니다. 로마 시대의 귀족 출신 아이가 부모에게 “나는 커서 의사나 교사가 될 거야.”라고 말한다면, 화를 내면서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을까요?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람의 신분과 지위는 얼마든지 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변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 남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으면 그 지위를 이용해서 끊임없이 억압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지위는 절대로 영원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 세상 삶을 마치고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어떨까요?
“제가 살아있을 때 이런 지위를 누렸습니다. 저의 재산은 이렇게 많았습니다.”라는 말들이 의미 있을까요? 의미 있지 않습니다. 또 세상의 지위와 재산이 하늘나라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뜻을 어떻게 실천했고, 사랑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고 하시지요. 바로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세속의 뜻만을 주장하면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펼치기보다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의 모습으로 산다고 해서 하늘 나라를 차지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지위와 재산이 하늘 나라에서도 그대로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지만,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제는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보다는 하느님의 일에 더 관심을 쏟아야 하며, 세상의 뜻보다는 주님의 뜻인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만이 먼 훗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어떤 사랑을 하면서 주님의 뜻을 실천했는지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위대한 사람은 단번에 그와 같이 높은 곳에 뛰어오른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밤에 단잠을 잘 적에 그는 일어나서 괴로움을 이기고 일에 몰두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인생은 자고 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그 속에 있다. 성공의 일순간은 실패했던 몇 년을 보상해준다(로버트 브라우닝).
노예제도는 지금도 있지 않을까?
노예제도가 처음 시작된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타 부족, 타 씨족을 정복하면서 하층민으로 부린 것으로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이 노예제는 19세기 초까지 전 세계적으로 유지되고 있었지요. 우리나라 역시 엄격한 신분 사회로 노예제도가 존재했었습니다. 그러나 천부인권 사상에 근거해서, 즉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과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권리를 가진다면서 노예제가 폐지되었습니다.
그렇다면 21세기인 지금에는 이 노예제가 완전히 없어졌을까요? 강자가 약자에게 함부로 해도 된다고 여기는 모든 곳에 노예제는 아직도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만들려는 곳이 바로 노예제가 유지되는 곳입니다.
인터넷 안에서도 익명성의 벽 뒤에 숨어서 악성 댓글로 폭행을 쓰는 것, 사람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모습 등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마음이 있는 곳이 노예제 잔재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과연 이런 모습을 원하실까요? 약자의 편에서 늘 사랑을 펼치신 주님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그 사랑의 실천을 통해 세상의 잘못된 노예제는 사라지고, 서로를 인정하며 함께 하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올 것입니다.
낡은 옷은 훌훌 벗어버리고 구원의 빛나는 갑옷으로 갈아입어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 시대 당시 사람들은 무척이나 궁금해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대체 누구인가? 또 후발주자인 예수님은 대체 어떤 존재인가?
세상 사람들의 궁금증 앞에 세례자 요한은 이미 자신의 신원에 대해서 명확히 선을 그었습니다. 단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명쾌하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분은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묶을 자격조차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저 그분이 오실 길을 미리 닦는 선구자에 불과합니다. 그분은 주인이시고 나는 종입니다. 그분은 주인공이시고 나는 조연입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시자 세례자 요한은 기다렸다는듯이 손가락으로 정확하게 그분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분, 그분이 저기 오십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십니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내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렸습니다. 이제부터는 저분을 따라가십시오. 저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저분의 제자가 되십시오.”
참으로 쿨하고 쌈박하면서도 지극히 겸손한 세례자 요한입니다. 구세주 예수님의 오실 길을 완벽하게 닦았으며, 마지막으로 멋진 레드카페까지 쫙 깔아놓은 세례자 요한은, 때가 되었음을 알아차리자, 단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구세사의 무대 뒤로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오 복음 11장 11절)
언뜻 들으면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극찬하는 것 같은데, 또 동시에 그를 깎아내리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살짝 세례자 요한을 디스하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구약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세례자 요한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연결한 사람입니다. 그는 역사 안에서 과도기적인 인물로 반은 어둠 속에, 반은 빛속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새시대가 도래했으니 그의 역할은 끝났음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활짝 여신 새시대 사람들은 그분의 빛과 사랑에 힘입어 새사람,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이 시대 사람들은 그분의 은총과 축복속에 있으며, 구원된 사람으로서 구시대 사람들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이제 예언의 시대는 가고, 완성의 시대, 구원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새시대 사람으로서 그에 걸맞는 삶을 계획하고 실천해야겠습니다. 낡은 옷은 훌훌 벗어버리고 구원의 빛나는 갑옷으로 갈아입어야겠습니다.
나에게 폭력을 쓰지 않으면 남에게 쓰게 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인도 영화 ‘당갈’(2016)은 한 때 인도의 레슬링 전국 챔피언이었던 아빠가 두 딸을 레슬링 선수로 키운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아들을 낳아 세계적인 레슬링 선수를 만들고 싶었던 아버지는 그만 줄줄이 딸 넷을 낫게 됩니다. 아버지는 첫째와 둘째 딸에게 레슬링을 가르치고 싶었지만 여성이 레슬링을 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사회 분위기상 공식적인 레슬링교육을 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딸들이 14살이면 팔려가듯 시집을 가야하는 인도 여인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합니다. 아버지는 논 위에 모래사장을 만들고 딸에게 직접 레슬링 훈련을 시킵니다. 머리가 길면 모래가 모리에 박히기 때문에 삭발까지 시켰습니다.
첫째 딸 기타는 실력이 매우 뛰어나서 몇 년 뒤 전국대회 우승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올림픽 대표팀에 들어가 국립체육학교에서 훈련을 받아야했던 기타는 새로운 코치의 말에 따라 그동안 배운 것들을 모조리 버립니다. 그리고 그 새롭게 배운 기술들로 아버지까지 이겨버립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구식 기술을 비웃고 지금까지 자신을 혹독하게 훈련시킨 것에 대해 원망합니다. 머리도 기르고 화장도 하고 세속에 물들어갑니다. 물론 세계대회에서 기타는 매번 예선탈락을 합니다.
패배의 쓰라림에 고통스러워하며 기타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초심으로 돌아갑니다. 머리를 다시 삭발하고 아버지식대로 자신을 혹독하게 다룹니다. 그리고 아버지 가르침에 따라 방어가 아닌 공격위주로 경기를 합니다. 그리고 승리를 이어갑니다. 이에 코치는 분노합니다. 기타가 모든 공을 아버지에게 돌렸기 때문입니다.
기타는 2010 영연방 경기대회 55kg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동생 바비타는 51kg에서 은메달을 획득합니다. 인도 역사상 국제대회에서 여성이 메달을 획득한 것은 그들이 처음이었습니다. 이후 두 자매는 국제대회에서 총 29개의 메달을 따며 인도 여성도 하면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혹독한 훈련을 시켰습니다. 이에 딸도 더 이상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방법으로 아버지에게 폭력을 가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그동안 수고한 아버지에 대한 배신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믿고 자신에게 잘해줬음에도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사랑을 폭력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딸은 나중에서야 아버지가 자신에게 가한 폭력이 좋은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더 혹독하게 대합니다. 이것이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에게 보답하는 길이고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길이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으면 하느님과 이웃에게 폭력적인 사람이 됩니다. 오직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만이 세상에 유익을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당신 자신을 가리킵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께서 주인이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늘나라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표지판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만이 우리의 행복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세례자 요한만이 하느님 나라를 알아볼 수 있었으니 예수님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너무나 혹독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낮엔 뜨겁고 밤엔 추운 곳에서 생활하며 짐승의 가죽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로 허기를 채웠습니다. 옷을 지어입거나 곡식을 경작하지 않은 극기의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맛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가르침을 버렸기 때문에 그 파견한 분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폭력을 가하려면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새로운 요한인 교회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폭력의 결말은 결코 좋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것이 비록 극기의 삶이고 자신을 죽이는 삶일지라도 그 가르침을 따르는 길이 하늘나라에 당도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십자가 외에는 영광의 길이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분야에서든 자수성가했다는 사람들은 다 자신에게 폭행을 가하는 사람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항상 5시에 일어나고 7시에서 9시까지 강의를 하고 이후 12시 45분까지는 집필활동을 하였습니다. 하루 한 끼의 식사를 했는데 정확히 오후 1시에 의사나 상인 등을 초청해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3시 30분에 산책을 하며 다리를 건넜는데 사람들은 칸트가 다리를 건널 때 시계를 맞출 정도였습니다. 산책 후 다시 연구에 몰두하다 밤 10면 정확하게 침대에 누워 하루를 마감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삶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라며 자신을 혹독하게 다루는 칸트를 어리석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사는 모든 사람들을 비웃는 꼴이 됩니다.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데 왜 폭행을 가하느냐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폭력을 가해 하느님과 이웃을 만족시킬 수 있을 때 십자가에 자신을 죽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행복과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됩니다. 나는 누구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습니까?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사를 찾아온 자매님과 이야길 나누었습니다. 36년 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다고 합니다. 눈에 염증이 생겼는데 치료를 제때 하지 못해서 한쪽 눈이 실명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답답했다고 합니다. 의사를 원망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가족들에게 서운한 마음도 있었다고 합니다. 본당에 피정이 있어서 참석했고, 강의를 들었다고 합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으니 옆을 볼 수 있었고, 뒤를 돌아볼 수 있었고, 하느님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남은 시간 성지순례를 다니고, 봉사하면서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어려운 이를 위해서 써 달라고 감사헌금도 주고 가셨습니다. 비록 한쪽 눈은 실명되었지만,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하였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넘어지게 한 돌부리를 발로 차고, 화를 낸다고 합니다. 돌부리를 발로 차니 더 아프고, 화를 내니 부주의했던 자신이 한심해 보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넘어지게 한 돌부리를 파서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합니다. 길을 평평하게 만들어 다른 사람이 넘어지지 않도록 합니다. 돌을 치우니 운동도 되고, 다른 사람이 넘어지지 않도록 했으니 보람이 있습니다. 같은 상황이지만 받아들이는 마음에 따라서 결과는 다르게 됩니다. 저도 크게 넘어진 적이 있습니다. 28년 전입니다. 유행성 출혈열로 중환자실에 보름간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치료가 있었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기도해 주셨고, 어머니께서 곁에 있었습니다. 다행히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남은 시간 하느님께서 덤으로 주셨다고 생각하니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으로 난민이 생기고 있습니다. 가난과 질병으로 피어나지 못한 생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생태계의 파괴로 더불어 살아야 할 생명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철책과 장벽으로 가로막혀 형제들이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있습니다. 욕망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갈증이 나기 마련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건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건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교만과 열등감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교만은 타인의 소중함을 보지 않습니다. 열등감은 자신의 소중함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에서는 세상에서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었어도, 아무리 특출한 능력을 지녔어도, 아무리 멋진 외모를 지녔어도 그것이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저의 외모와 능력에 대해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보다 키가 좀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참을성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힘도 더 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지금 저의 모습으로 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 저의 모습은 다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저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북미주에는 120여 개의 한인 공동체가 있습니다. 공동체를 생각하는 기준을 보면 외형적인 크기나 숫자를 사용하곤 합니다. 땅은 얼마나 큰가, 성당은 또 얼마나 큰가, 신자 수는 몇 명인가, 보좌 신부님은 있는가, 수녀님은 있는가! 또 나누는 기준이 있습니다. 단체들은 다 있는가, 헌금은 얼마나 나오는가! 사실 이런 것은 하늘나라에서는 그렇게 큰 기준의 근거는 아닐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살면서, 천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우리는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잣대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적인 모습, 숫자, 성공 등으로 판단을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판단해야 하는 기준은 세상의 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봉사했는지, 얼마나 겸손했는지, 얼마나 나누었는지를 가지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생각을 바꾸고 마음의 문을 열면 됩니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뀝니다. 우리는 그걸 ‘회개’라고 부릅니다. 마음의 문을 열면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그걸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붙잡아 주는 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이사41,13).
오늘 주님의 모습 따라 나는 많은 분들을 만나고 손을 잡아 주었다. 내가 오늘 잡은 그 손을 하나 하나 기억한다. 그리고 주님의 손길을 생각했다. 내가 부족하기에 나에게 힘이 되어준 손도 있었고, 내가 힘이 부족한 사람에게 힘이 되어주기 위해 잡은 손도 있었다.
황량한 산등성이, 메마른 골짜기, 광야, 메마른 땅, 그곳에서 고생하는 이스라엘, 거짓 사람들이 손을 뿌리쳤지만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또 다시 그들 손을 잡아 주신다. 산등성이에 강물이, 골짜기에 샘물이, 광야에 수원지가 되게 하시려고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손을 잡아주고 계시다. 우리가 창조주 하느님을 살펴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내 오른손을 잡아주신다. 성탄의 이유이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고, 그 길 따라 오시는 주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신다. 세례자 요한이 닦아준 길이 내 길이 되면 그 길로 주님께서 오시어 나의 오른손을 잡아 주실 것이다.
구원은 손을 다시 잡는 일에서 시작됨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성탄구유를 꾸미며 복음을 묵상해 본다.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정말 최고의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구세주가 오실 것을 예언하고 그분의 길을 닦으며 삶의 모든 순간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경우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최고의 예언자로 추앙받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도 없다고 말하며 철저히 겸손하게 구세주가 오실 것을 예언하며 자신은 뒤로 물러났던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배워야 할 중요한 자세는 첫째, 주님의 오시는 길을 닦고 준비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언제나 주님께서 늘 함께 하시며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도록 그분의 자리를 내어드리기 위해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주님이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 드리기 보다는 자신이 그 한자리를 차지하고 그분이 들어오실 자리를 막아버리곤 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모습 속에서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함께하시고 일하실 수 있도록 그분의 길을 내어드리기 위해 늘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도 없다고 말했던 세례자 요한의 모습처럼 우리는 늘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께서 우리의 참된 주인이심을 고백하며 그분의 자비를 청할 때 우리는 그 주님 안에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인정'(마태오 11장 11~15)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주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큰 인물로 여기십니다.
큰 인물하면 모두가 부러워하는 오르지 못할 탑에 위치한 것처럼 보이고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는 존경의 대상일 것입니다.
그런데 ~
세례자 요한은 주님 오실 길을 닦으며 광야에서 외치며 앞으로 오실 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존재가 자신이라고 표현합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을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은 자신을 뽐내거나 자랑하기보다 그분의 위대하심을 자랑합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
인정!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1-15).”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당신이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증언한 그의 증언도 믿을 것이고, 그의 증언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을 것입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이라는 말은, ‘구약시대 사람들’을 뜻합니다.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라는 말씀은, 요한은 구약시대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주님보다 먼저 와서 주님의 길을 준비한 예언자이기 때문에(루카 1,76) 구약시대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을 깎아내리는 말씀이 아니라,
“신약시대는 구약시대보다 더 위대하다.” 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는 메시아를 기다리기만 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메시아께서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사시면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시대입니다.
(구약시대는 ‘구원’을 희망하고 기다리기만 했던 시대였지만, 신약시대는 ‘구원’이 본격적으로 실현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는 구약시대보다 더 위대합니다.)
신약시대는 구원이 본격적으로 실현되는 시대이면서 동시에 그 일을 방해하려는 사탄도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시대입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라는 말씀은, 예언자로서 주님의 길을 준비한 요한을 박해자들이 박해했고, 주님이신 예수님도 박해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지금까지’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당시를 뜻하지만,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글자 그대로 ‘지금까지’입니다. 사탄의 활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종말이 올 때까지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탄에 맞서서 싸우는 신앙인의 싸움은, 또는 신앙인이 받는 박해는 종말이 올 때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라는 말씀은, 사탄과 박해자들이 신앙인들을 박해하는 것은 이 땅에 하늘나라가 건설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 입니다.
그것은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폭력’이라는 말은, 박해자들의 의도와 방법이 모두 악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 그 박해가 신앙인들에게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도 나타냅니다.
(이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또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신앙인들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도 암시합니다. 신앙생활은 꽃길만 걸어가는 생활이 아닙니다. 걸어가다 보면, 꽃길을 만날 때도 있지만, 가시밭길을 더 자주 만나게 됩니다. 언제 어떤 길을 만나더라도, 멈추지 말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만일에 편하고 쉬운 길만 걸으려고 하고, 힘들고 어려운 길은 피한다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은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 외에는 메시아를 준비한 예언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예수님 외에는 메시아가 없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라는 말씀은, “요한이 바로 엘리야라는 것을 믿어라.” 라는 뜻인데, 사실상 “내가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 말라키서를 보면,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라는 예언이 있습니다(말라 3,23).
그리고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할 때,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루카 1,17).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고 증언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바로 엘리야라고 증언하셨습니다. 이 두 증언은 사실상 하나의 증언입니다.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라는 말씀은, “믿고 실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아는 것’과 그것을 ‘믿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알아도 안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 믿는다면 그 ‘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또 ‘진정한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자신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로 생각만 하는 믿음’은 믿음이라고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진짜로 믿는 사람은 믿는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말로만 고백하면 안 됩니다.
자신의 ‘온 삶으로’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참으로 신앙인답게 살면서 자신이 신앙인이라는 것을 ‘삶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 될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자신의 ‘삶의 기준’을, 또는 ‘행동의 기준’을 ‘주님의 가르침’에 맞추어서, 그대로 살고, 그대로 행동하는 것이 신앙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만일에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점점 더 ‘신앙인다운 삶’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으로서 하면 안 되는 일은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하고, 해야 하는 일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절정으로 인생 길안내 끝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세례자 요한보다 인류사에 더 큰 인물 없다고 예수님 선언 하셨습니다.
덧붙여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요한보다는 더 크다 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는 세상의 큰 인물 큰 권력자들 자리는 없다는 뜻일 겁니다.
우리는 눈 있어 이 성구를 보면서도 이 세상에서 최고인물 되려합니다.
하늘과 세상 위치를 뒤바꿔놓고 세상위해 온 정열 다 쓰는 인생입니다.
도리어 하늘을 박해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는 세상실정이란 것입니다,
하늘 예언은 요한에서 끝났고 예수님을 절정으로 인생길안내 끝입니다.
세상중심의 헛길 가는 인생들 눈이 있으면 보고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성 세례자 요한.
곽승룡 비오 신부님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
위의 성경 본문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실제로 이 성경 구절이 다양하게 해석되곤 하기 때문이다. 현대 주석은 다른 식으로 번역하여 그 뜻을 설명하여 제시한다.
여기서 ‘가장 작은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장 어린 사람을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럴 경우, 예수님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식으로 말하기를 원할까라는 질문을 해본다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바라볼 경우 이 구절의 의미는 단순하다. 곧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하지만, 그 보다 젊은 예수님인 ‘내가 최고’이고, 나와 함께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온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 구절에 대한 과거의 해석은 아주 달랐다. 곧 신구약 성경의 가치들이 비교되곤 하였다.
히브리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율법과 예언서들을 받았다. 율법과 예언서는 하느님 은총의 위대한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 선물이 여전히 위대한 것은 성경말씀대로 교회 안에서 여전히 그 선물을 통해 인간을 수락하는 데 있다.
곧 하느님의 아들이 부여하는 세례와 미사성제 안에서 그리스도님과 함께 하나가 되는 일치에 말씀의 실행이라는 선물이 존재한다. 이런 해석은 교회의 구성원인 믿는 이들이 이 말씀의 선물을 통해 자신을 봉헌하고, 구원의 수단과 그것이 지닌 특권을 자각하도록 나를 돕는다.
이처럼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 바로 관찰이다. 관찰이란 또한 성찰이다. 왜 성찰을 해야 할까?
대림시기를 맞아 주님 탄생을 위한 고해성사에 도움이 되는 것이 성찰이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자세히 바라보면, 이 세계를 보는 사람은 매우 드물고 이 세계를 판단하는 사람만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은 성찰인데, 내 시선을 대상과 그 사건까지 가서 접근을 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판단한다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틀,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인식의 틀을 사용해서 그것을 시선 거기까지 가져가지 않고 중간 정도도 못 갔을 때, 아 저것은 무엇이다 어떻다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선악, 시시비비는 다 이렇게 결정된다. 시선을 갖다 붙이는 것까지만 해도 대단한데, 그 집요함을 발동해서 그 시선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이것을 교회는 관찰이라고 한다.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함승수 신부님
요즘 한 개신교 목사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한 말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큰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그 목사는 이미 여러가지 범죄와 추문으로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어 교계에서 제명되었던 사람인데, 요즘은 정부와 대통령을 향한 각종 막말과 부적절한 행동으로 많은 논란을 빚고 있었지요. 그런데 며칠 전 청와대 앞에서 자신을 추종하는 신도들과 정부를 비난하는 집회를 진행하던 중 한 말이 목회자로서는 물론, 한 사람의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서도 부적절했기에 일반인들에게는 조롱의 대상이 됨은 물론, 개신교 교인들에게도 비난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한 말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지금 대한 민국은 누구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냐? 전광훈 목사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있어. 뭐 기분 나빠도 할 수 없어. 이건 사실이니깐. 앞으로 점점 더합니다. 두고 보세요. 앞으로 10년 동안의 대한민국은 전광훈 목사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있다니까? 왜 그런지 알아요? 나에게 기름부음이 임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보좌를 딱 잡고 살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보좌를 딱 잡고 살아요. 딱 잡고. 하나님 꼼짝마.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 내가 이렇게 하나님하고 친하단 말이에요. 친해.”
여러분은 이 사람이 한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본인 나름대로는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표현으로 자신이 하느님과 긴밀히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싶었을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그 반대의 상태임을, 즉 스스로가 하느님과 그분의 뜻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져 있음을 드러내는 꼴이 되고 말았지요. 아무리 예의범절 없는 철부지 같은 사람이라도, 자신이 웃어른과 친하다는 이유로 그분의 멱살을 잡는 제스쳐를 취하면서 반말을 하고 “너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막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그 막말의 대상이 사람도 아닌,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라면 그 심각성은 더 큰 것이지요. 즉, 전광훈씨가 한 막말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권능에 도전하는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가 ‘신성모독’이라는 무리수까지 둔 것은 하느님을 이용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이고 과장적인 표현으로 자신이 하느님과 긴밀히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뜻이 곧 하느님의 뜻이고, 그런 자신의 말을 듣지 않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인’이 된다는 식의 논리를 펴고자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들으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그저 하느님의 권능을 제멋대로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드는 그런 모습이야말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나라에 폭행을 가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믿고 따르는 사람은 그 어떤 이유로도 자신이 믿는 하느님을 두고 막말을 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제멋대로 하느님을 이용하는 ‘폭행’을 가하지도 않습니다.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그분의 뜻을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실천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 더 많이 사랑받으며 더 큰 행복을 누리는 ‘큰 사람’으로 사는 방법입니다.
<하늘나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를 키우기 위해서
더 가지려한다면
삶에서 늘 다음보다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줄이기 위해서
더 버릴 때에
삶에서 늘 다음보다
클 수밖에 없습니다
더 가지는 것을
더 나다움으로 받아들인다면
삶에서 늘 먼저보다
‘있는 나’에게서 멀어집니다
더 버리는 것을
더 나다움으로 받아들인다면
삶에서 늘 먼저보다
‘있는 나’에게 다가섭니다
‘있는 나’에게서
멀어질수록
‘나를 있게 하신 분’과
갈라집니다
‘있는 나’에게
다가갈수록
‘나를 있게 하신 분’과
가까워집니다
‘나를 있게 하신 분’과
갈라질수록
‘있는 나’는
작아집니다
‘나를 있게 하신 분’과
가까워질수록
‘있는 나’는
커집니다
‘있는 나’가 작아져 마침내
‘있는 나’가 없어진다면
‘나를 있게 하신 분’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있는 나’가 커져 마침내
‘있는 나’만 남게 된다면
‘나를 있게 하신 분’과
온전히 하나입니다
‘있는 나’와
‘나를 있게 하신 분’이
갈림 없이 오롯이 하나일 때
하늘나라입니다
사람의 바른 평가는 역사와 현실이 다르다<마태,11/11-15.>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의 영웅이 내일은 졸장부가 되고 오늘의 졸장부가 내일의 영웅이되기도 합니다. 사람의 평가는 평가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ᄂᆞᆸ니다.
저는 70이 훨신 넘게 살면서 대한민국의 최고지도자들은 10여명 현실안에합께 살고 그 실적을 보고 판단의 기준으로 이런 분 저런 분 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위를 세운 이승만 대통령을 민주의의 시작하셨지만 오늘의 발전한 민주주의를 따라 평가하지 못합니다. 그 당시에 지도자들을 보면 다 함께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새 나라를 세우는 데 왕조는 아니었습니다. 정치적인물 하나하나 평가는 역사적 의미가 더 큰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주님이 세례자 요한을 평가하시며 그때 까지 요한 보다 더 큰인물이 없다고 하시면서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이 말씀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세례자요한 시대는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시작하고 완성되지 않은 시대였고 주님이 완성한 하느님의 나라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완선된 였습니다. 이나라에 사는 사람들 사도들부터 교부들 수도회 창설자 믿음을 위하여 순교한 사람들 모두가 세례자요한 보다 위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속성은 왕이시오 사제이시며 예언자이신 주님을 모시고 물과 성령으로 쎄례성사를 받은 공동체의 사람들 주님을 따라 주니므이 왕직 사제직 예언직을 실천하며 살아가며 폭행을 당하는 하느님 나라를지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는 사람들 분명이 요한 보다 낳은 자리에 있지만 믿음을 저버리고 주님을 떠난 유다스같은 사람에게는 그런 자격을 주지 않습니다.
또한 수도원에서 서원하고 죽기를 한하여 끝 까지 살아낸 사람은 높이ㅣ 사야 합니다. 누가 저를 이위대항 대열에 있을 것을 과거의 나의 모습을보고는 몰랐으며 막노동 시장에서 야체 장사 기관에서 급사로 일할 때 저를알본 사람은 없지만 준미의 사도로 일하는 저를 보고 하느님 나라의 요한 보다 큰사람으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저는 왜관수도회의 70년 가까이 함께 살며 수도회를 생활하던 사람들을 역사적 평가를 할라치면 이런 사람 저런 사람으로 평가하지만 시간이지나면서 모두가 수도자로 잘 사시다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 하셨다고 판단됩니다. 이제 우리도 뒤에 후배들이 올바른 역사적 판단을 하도록 잘살아 요한 보다 더 광야의 소리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하도록 후해 없는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어디에 있는 것 보다 그곳에 적합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더 중합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말씀하시는 이 귀는 마음의 귀가 아닌가 싶다. 물리적인 귀는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습성이 있다. 그런데 이 마음의 귀는 듣고 싶지 않는 것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내면 깊이에 있는 양심이다. 오늘 기도 중에 나의 한 모습을 보고 듣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접근하기 힘든 사람으로 생각한다. 왜 일까? 내가 일을 하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을 다그치는 성격이 있다. 때로는 사람들을 난도질할 만큼 다그치는 모습을 본다. 그런 모습은 나 자신안에 있는 긴장을 듣지 못하고 이 긴장을 일에서 푸는 혹은 사람에게 푸는 모습을 듣는다. 나 자신안에 있는 긴장, 무엇인가 이루어야 한다는 집념이 그렇게 만들어 갔다. 이제 이곳에서 그런 것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그 욕심이 긴장을 야기한다는 소리를 오늘 듣는다. 마음의 귀가 열린다.
사람의 마음을 듣는 오늘이 되기를 바라며 일출을 바라보는 자작나무 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떠오르는 하느님의 마음을 듣고자 한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작년의 성탄과 오늘의 성탄이 어떻게 다르십니까? 매년 다가오는 성탄이 올해는 어떻게 다가옵니까? 그냥 이천여 년 전의 탄생 사화를 단순히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내 삶에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기회와 방법은 없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인형과 전례의 형식으로뿐만 아니라 실제 삶 속에 피부로 와 닿는 재림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 왜 그가 큰 인물일까? 그는 다른 예언자들과 달리 구세주를 세상에 알려주는 이이고,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준 모든 계명과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가르침을 자신의 몸으로 지키려고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리켜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14절) 라고 이르십니다. 그러시면서 우리들에게 이르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15절)
우리가 다시 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이고 모시고자 한다면 그분의 말씀을 실현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생전에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이 오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시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지킬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지키기 시작하면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 되고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실 것입니다. 비로소 그때 우리는 엘리아인 요한을 바라보는 사람이 될 것이며, 주님 말씀대로 귀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을 살면서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주님의 말씀을 우리 오늘의 현실에 적용하며 주님을 초대하며 드디어 우리 마음 안에 모시게 될 것입니다.
영적 삶의 목표 -우리 삶 자체가 ‘하늘 나라’가 되는 것-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청도 운문사 회주 명성眀星스님(90)의 전설같은 삶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참 수행자의 삶을 지향하는 모든 이들에게 사표가 될 만한 분이었습니다. 스님에 대한 기사 일부를 인용함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80권의 화엄경 원문 전체를 ‘4년 8개월 15일간’ 새벽마다 두시간씩 필사했다. 그 방대한 한문 글씨들이 마치 인쇄물인 듯 하나도 삐뚤거나 어긋남이 없다. ‘매사 진실을 다하라’는 즉사이진卽事而眞을 좌우명으로 삼는 그답다.
그는 공부는 잘 하는데 일을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공부가 삶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이를 선두에서 보여줬다. 그는 ‘욕자여欲敎餘 선자교先自敎’라는 ‘불치신경佛治身經’구절을 들려준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면 자신부터 교육하라’는 뜻이다. “평범한 스승은 말을 하고, 훌륭한 스승은 설명을 해요. 뛰어난 스승은 모범을 보이고, 위대한 스승은 감화를 줍니다.”-
공부와 삶, 기도와 삶이 하나될 때 감화를 줍니다. 참으로 감화, 감동, 감명을 받을 때 내적변화로 교육의 목적도 달성될 것입니다. 바로 우리 영적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할 바 공부와 삶, 기도와 삶의 일치입니다.
‘평화를 주십사’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평화가 되어야 할 것이며, 기쁜소식을 전하기 앞서 우리의 삶 자체가 기쁜소식이 되어야 할 것이며, 하늘 나라를 선포하기에 앞서 우리의 삶 자체가 하늘 나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삶 자체가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이보다 아름답고 원대한 영적목표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믿는 우리들 모두 이렇게 살라고 불림 받았습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11,11)
‘하늘 나라’ 곧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시작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 입구에 서 있습니다. 하여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들, 그리고 요한 사이에는 일종의 단절, 근원적 새로움이 있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하늘 나라의 실현이요 예수님과 늘 함께 오늘 지금 여기 하늘 나라를 사는 우리들은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크다는 폭탄 같은 선언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처럼 우리 하나하나 ‘하늘나라’가, ‘기쁜 소식’이, ‘평화’가 되어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런 아름답고 고귀한 삶자체가 이웃에게는 감동과 감명, 감화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의 실현은 부단한 시련과 고난을 통과해가야 할 것입니다. 결코 값싼 하늘 나라나 은총은 없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11,12)
아니 지금까지만 아니라 앞으로도 하늘 나라는 계속 폭행을 당할 것이고 폭력을 쓰는 자들은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 하고 무너뜨리려 할 것입니다. 그러니 깨어 종신불퇴終身不退의 정신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여기에서 하늘 나라를, 기쁜 소식을, 평화를 살아 내는 것입니다. 종신불퇴, ‘몸이 다하기까지 물러나지 않는다’는 이 말마디는 성철 큰 스님의 좌우명이기도 했습니다.
“귀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11,15)
깨어 수행자로서의 각오를, 전의戰意를 새로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추호도 두려워할 바 없습니다. 바로 오늘 하느님은 친히 이사야서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 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 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이사41,13.14ㄴ)
우리의 구원자 하느님은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에서부터 근원적 새로움의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이어 바로 하느님은 이런 하늘 나라 비전을 환히 보여 주시며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여기서 ‘그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나 주님이 그들에게 응답하고, 나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리라.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
정말 귀있는 사람은 귀기울여 들어야 할 주님의 복음입니다. 이 은총의 대림시기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근원적 새로움의 하늘 나라를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맙시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우리 하나하나 하늘나라가, 평화가, 기쁜소식이 되어 삽시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 함께 이렇게 근원적 새로움의 하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하여라.”(이사45,8). 아멘.
내 귀는 멀쩡한가요?
남상근 라파엘 신부님
요르단 강으로 수많은 이들이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세례를 받으려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메시지는 다가온 심판에 관한 것이었고 결코 달콤한 위로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요한은 새로운 삶을 위한 결단을 촉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세례는 회개하였다는 표지로 베풀어졌습니다. 당연히 요한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 이들과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오셨던 것이 아니라, 새로워지려는 이들과 기존의 삶을 고수하려는 이들 사이 첨예한 대치 안에 오셨습니다. 희생이 밑바탕이 되어 메시아 시대가 열렸습니다. 정의를 이루기 위해 수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렀고 이 나라를 성장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땀과 노력을 바쳤는지요. 고통의 과거를 잊으면 현재의 의미를 놓칩니다. 그런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가 ‘여인들에게서 태어난 이들 중 가장 큰 인물’이라는 극찬인 것이죠. 그러면 이제 요한과 예수님이 전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임승차는 없습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예수님이 자주 반복하신 표현입니다. 양쪽 귀 모두 잘 들리시나요. 다행히 두 귀가 멀쩡하고 잘 들릴지라도, 정작 귀담아들으며 살고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이 말씀을 오늘 이렇게 알아듣습니다. ‘너희 각오 되어 있지. 너희 이 모든 것 다 견딜 수 있겠지.’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 1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무엇을 위한
폭력인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폭력과 모순
폭행과 집착으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하늘 나라입니다.
폭력속엔
하늘 나라가
없습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를 뿐입니다.
사람만큼
모순된 존재도
없습니다.
하늘 나라의
분명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폭력인 아닌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려주십니다.
기다림을 믿는
사랑의
자녀들입니다.
폭력 앞에서는
모두가 작아지고
기다림 앞에서는
모두가 큰 사람이
되어갑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것은
기다려주는
사랑입니다.
폭력을 멈추고
기다림을 사랑하는
은총의 대림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기다림의 길위에
하늘 나라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오십니다.
폭력의
가면을 벗고
기다림을 배울
때입니다.
예언서의 말씀인
기다림과 순명을
귀기울여
들을 때입니다.
1960년대 미국 렌터카 시장은 허츠(Hertz)가 꽉 잡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에이비스(Avis)는 허츠에 비해 10년 넘게 적자에 시달리던 2위 업체였지요. 이때 이런 광고가 등장했습니다.
“에이비스는 2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더 노력합니다.”
스스로 2위인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더 노력합니다.”라는 문구를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늘 새 차와 같은 느낌이 들 수 있도록 깨끗이 청소했고, 무엇보다도 안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렌터카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람들은 에이비스가 스스로 2위라고 인정했으니까 당연히 더 높은 1위인 허츠를 이용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한다.”는 말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2위라고 스스로를 말한 에이비스 렌터카를 이용하는 고객들이 늘어난 것입니다. 그 결과 두 달 만에 적자에서 탈출했고, 뉴욕에서만 한 달 만에 50% 가량 매출이 증가했습니다.
무조건 일 등만 좋은 것이 아님을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보다는 스스로 부족하다는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에 감동하고 좋아하지 않습니까?
순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뒤의 ‘열심히’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열심히’는 보지 않고서 순위를 더 먼저 보는 것 같습니다. 스포츠 경기도 그렇지 않습니까? 시합에 임하는 선수들의 열심한 노력은 보지 않고 몇 등을 했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심히’에 집중하는 사람은 앞으로 더 나아갈 수가 있지만, 성적만을 보는 사람은 쉽게 좌절과 절망 속에서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라고 하시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하늘 나라에서 절대로 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으로 실망스러운 말씀입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나약함으로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제대로 따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하느님 말씀을 온전히 듣고 따르기 때문에 무조건 더 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듣고 따르기 위한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모습이 변화되어야 할 때입니다. 언젠가 주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또 언젠가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다짐만 하는 우리가 아니라, 바로 지금 또 매 순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일을 하겠다는 다짐뿐 아니라 행동하는 우리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 노력을 통한 변화가 하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해줄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날을 늘릴 수는 없지만 그날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는 있다(샤를로테 루카스).
원(에드윈 마크 햄)
그는 원을 그려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나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으면서,
그러나 나에게는
사랑과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
나는 더 큰 원을 그려 그를 안으로 초대했다.
미국의 작가, 에드윈 마크 햄의 시입니다. 단 하나의 원에서는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으로 부족하면 더 큰 원을 그리면 그만이지요. 즉, 더 큰 나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들이 분명 세상의 어려움들에서 나를 자유롭게 해줄 것입니다.
행복의 수준 차이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눈에 띄는 외모, 풍기는 자신감! 모델이자 영화배우, 달리기 선수이기도 한 에이미 멀린스(Aimee Mullins)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화려함 뒤엔 남다른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상선수임에도 두 다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선천적 기형으로 태어난 그녀에게 의사가 말하길 “이 아이는 절대 걷지도, 운동도 못 하며 타인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살지 못할 것입니다.”
이 사형선고와 같은 말과 함께 에이미의 두 다리는 절단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의족으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미국대학스포츠연맹 주체 “비장애인” 육상대회에 출전해 1996년 세계신기록을 수립한 것입니다. 그리고 피플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에 뽑혔습니다.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장애와 역경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까?” 라고 물을 때, 그녀는 “장애와 역경이요? 그것은 피하거나 넘어서야 하는 장애물이 아닙니다. 그 자체로 나의 자아를 깨우고 능력을 북돋는 신의 선물이죠!”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합니다.
“제 생각에 진짜 장애물은 억눌린 마음입니다. 그렇게 희망도 없이 눌려있는 마음 말이죠.”
[출처: 에이미 멀린스, 마이 드림 스토리, 유튜브]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서 장애 때문에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장애가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장애가 있었기에 사람들의 시선을 더 끌 수도 있었고, 자신의 말이 더 진실성 있게 전달될 수 있었으며, 작은 도전도 더 큰 성취로 다가올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당당함은 두 발을 멀쩡히 지니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을 넘어섭니다. 모든 정상적인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어도 억눌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지만 그녀는 그것보다 못한 상황에서도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에 그만큼 자존감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배부른 돼지가 더 행복할까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 행복할까요? 종교에서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선택하라고 가르치지만 사회에서는 아무래도 배부른 돼지가 되는 게 더 나을 것도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일단 돈이 없어 배를 곯는다면 행복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배부른 돼지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라고 하시며, 세례자 요한이 모든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는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가장 행복하지 않을 때도 보통 사람들의 행복수준을 넘어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큰 사람은 그만큼 행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가장 작은 사람은 지옥에서 가장 큰 고통을 누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란 하늘나라에서 가장 덜 행복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에 오른 사람 중에 가장 덜 행복한 사람도 세례자 요한보다는 행복하다는 말씀이십니다. 이 말씀은 배부른 돼지보다는 아무래도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배부른 돼지는 배만 부르면 더 이상의 행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다 얻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 입장에서는 행복이 꼭 먹는 것만이 다가 아님을 알기에 돼지처럼 배만 채우려는 인간을 불쌍하게 바라볼 것입니다.
물론 돼지도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비웃을 것입니다. 이렇게 바리사이들이 가난해야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정말 가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웃고 그 가르침도 조롱하였습니다. 하지만 분명 행복은 각기 다른 수준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합니다.
보통사람은 에이미 멀린스나 닉 부이치치 같은 이들이 말하는 행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행복할 조건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몸이 온전해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수준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행복의 수준을 넘어선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느끼는 행복은 먹고 마시는 그런 행복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수준에 오른 자존감에서 오는 행복감입니다.
이런 의미로 하늘나라의 수준에 있는 사람이 비록 배고픈 소크라테스처럼 덜 행복하더라도 아직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자녀 수준에 오르지 못한 세례자 요한보다는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 길에 들어섰기에 세상 모든 사람들보다는 세례자 요한이 더 행복합니다.
하느님 자녀가 되면 이 세상 누구도 부러워하지 못할 행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먼저 내가 어떤 수준의 행복을 추구해야하는 사람인지, 즉 돼지인지 소크라테스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인지 하느님의 자녀인지를 먼저 정해야 어떻게 행복을 채울지가 결정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번 수학능력 시험의 성적이 발표되었습니다. 전국적으로 만점을 맞은 수험생이 6명이라고 합니다. 제가 있는 본당에서도 만점을 맞은 학생이 나왔다고 합니다. 공부를 잘한다는 기준은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만점을 맞거나 하나 틀리면 잘하는 것일까요?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갈 정도면 잘하는 것일까요? 공부를 못한다는 기준은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50점을 맞으면 못하는 것일까요?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갈 성적이 아니면 못하는 것일까요? 성적의 높고 낮음이 원하는 대학을 선택하는 기준이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인격의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 쟁쟁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빌라도 유다 총독,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이투래아 영주 필리포스, 리사니아스 아빌레 영주, 가야파와 안나스 대사제가 있었습니다. 성적, 능력, 재력, 권력으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의 시대로 상상한다면 미국의 트럼프, 러시아의 푸틴, 중국의 시진핑, 일본의 아베, 한국의 문재인, 북한 김정은의 시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은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부모님들만큼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이 많은 나라의 부모님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부모님은 자녀의 교육 때문에 ‘기러기 아빠’가 되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밤을 새워 공부해서 1등을 하는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가족’입니다. 가족은 함께 식사하는 것이고, 매주 금요일 저녁은 어김없이 가족들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합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질문하게 합니다. 왜 공부를 하는지 질문을 합니다.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지 질문을 합니다. 그들에게 정답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1등도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 정답을 알게 되는지가 중요합니다. 부모님은 끊임없이 자녀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질문하게 합니다. 질문을 통해서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의 공부의 목적은 성공입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남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행복한 가정을 이룩하면 됩니다. 이런 과정은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고, 경쟁은 누군가를 이겨야 합니다. 이런 성공을 이룩해야 하는 사회는 2등은 별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의 공부 목적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경쟁보다는 서로 협력하는 것이 더욱 필요한 사회입니다.유대인들은 그러기에 나눔과 기부를 어려서부터 생활화하도록 교육을 합니다. 유대인들은 장사하더라도, 하루의 마감 시간이 되면 팔던 물건들을 가게 밖으로 내어놓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그것을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유대인들은 전 세계 인구의 0.2%에 불과하지만, 노벨상 수상자는 129명입니다. 이는 전체 노벨상 수상자의 25%에 이른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는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적을 정하고, 순위를 정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절대평가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 있느냐를 생각합니다. 얼마나 양심을 따라서 살았느냐를 생각합니다. 얼마나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였느냐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는 정원 제한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들어가는 곳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순위를 정해서 시험을 치르듯이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경쟁과 업적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협력과 나눔을 실천한다면, 사랑과 봉사를 할 수 있다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기쁨, 초연, 순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방금 부른 동정녀 공통 저녁성무일도 세 후렴의 가사와 곡이 아름다워 다시 나눕니다.
“1.나는 주님을 위하여 순결을 보존하여 찬란히 빛나는 등불을 들고 신랑인 당신을 마중나가나이다.”
“2.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뵈오리다.”
“3.나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자리 잡았도다.”
특히 세 번 째 후렴은 지금은 프랑스에 계신 예전 떼제 마르코 수사님이 참 좋아했던 구절입니다.오늘은 우리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의 수호자 성녀 오딜리아 동정 대축일입니다. 독일 알자스 지방 출신으로 시각장애인의 수호성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 먼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나 불우한 삶을 살다가 12세 때 세례를 받는 순간 성유가 눈에 닿았을 때 눈이 열렸다는 전설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이후 수녀원에 들어가 수녀원 원장까지 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루멘채치스Lumen Caecis!”, “눈먼이들에게 빛을!” 참 기분좋은 오딜리아 베네딕도 연합회 모토입니다. 바로 성녀의 눈 뜬 기적에 기적에 근거한 오딜리아 연합회의 선교 영성을 단적으로 요약한 말마디입니다. 사랑의 기적입니다. 성녀의 지극한 하느님 사랑에 의한 기적입니다.
정도의 차이일뿐 무지에 눈먼 사람들입니다. 육안은 멀쩡해도 심안이나 영안이 어두운 맹인같은 사람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점차 영안이 밝아져야 할 ‘개안의 여정’중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삶은 여정입니다. 하느님 향한 여정중의 사람들입니다. 하여 여정 앞에 붙는 말도 참 많습니다. 개안의 여정, 회개의 여정, 믿음의 여정, 겸손의 여정, 사랑의 여정, 순종의 여정, 자유의 여정등 끝이 없습니다. 삶의 여정 중에 주님께 가까이 이르게 되고 주님과의 관계도 깊어가면서 주님을 닮아가게 되니 바로 우리 삶의 여정은 ‘성인聖人이 되어가는 여정’이라할 수 있습니다.
성인이 되는 것은 우리 삶의 의미이자 목표입니다. 불자들은 만나면 “성불成佛하십시오” 인사한다는데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성인聖人이 되십시오” 인사하면 되겠습니다. 허무에 대한 답이 바로 사랑의 성인입니다.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깊어가면서 주님을 닮은 성인이 되어가는 여정중의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받은 우리 믿는 이들의 마땅한 의무와 책임이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대대적 전지가 대충 끝난 수도원 정원을 바라보는 것도 큰 기쁨입니다. 부수적인 가지들 다 잘라버리고 본질만 남은 나뭇가지들 사이, 너머 가득한 하늘 배경에 참 많이 눈길이 갑니다. 단순할수록 투명하게 드러나는 하늘 배경, 바로 성인들이 그러합니다. 텅 빈 충만의 성인들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마침 써놓은 글입니다.
-하늘이 보이고/세상이 보이니 참 좋다
시원하다/탁트인 시야다/참 과감한 전지다
부수적인 것들 다 떨어내고/본질로 서 있는 겨울 나무들
바라봄이 기쁨이다/성인들 같다
단순할수록/투명하게 드러나는 하늘 배경/주님이시다!
자꾸 눈길 가는/나무들 사이 너머 하늘 배경/주님이시다!-
성인이 되고 싶습니까?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주님 사랑의 구체적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오늘 대축일 미사 배치된 말씀마다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첫째, 기뻐하십시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주제입니다. 사랑의 기쁨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사랑의 주님을 만날 때 샘솟는 기쁨입니다. 주님은 기쁨의 샘입니다.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기쁨이 없다면 허전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하여 고백성사 보속으로 말씀 처방전을 써드릴 때 가장 많이 찍어 드리는 스템프가 “웃어요”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이사야 말씀이 우리를 기쁨으로 약동케 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맥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마라.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이어 주님을 만날 때의 놀라운 기적을 묘사합니다. 말 그대로 사랑의 기적입니다. 내적으로, 영적으로 완전히 회복된 전인적 구원을 상징합니다. 기쁨의 치유, 기쁨의 구원입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을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바로 대림시기 대축일 미사에 참석한 오늘 지금이 그때입니다. 바로 주님의 사랑의 성체를 모심으로 주님과 하나되는 순간 온전한 치유의 구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작 무서운 것은 육신의 장애가 아니라 마음의 장애입니다. 사랑의 기쁨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마음의 장애를 치유합니다.
둘째, 초연하십시오.
사랑의 초연함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이탈과 초연입니다. 세상 굴레와 우상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입니다. 이탈의 기쁨, 초연의 기쁨이 참 맑고 밝은 사랑의 기쁨입니다. 저절로 기품 있고 향기로운 삶입니다.
참으로 이웃에게 집착없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무엇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 앞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결혼 유무에 상관없습니다. 결혼하든 않든 하느님 중심의 삶을, 그리스도의 중심의 삶을 살아야 마음이 갈리지 않습니다.
때가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의 말씀은 바로 성인처럼, 세상 무엇에도 매이지 않은 참 자유로운 종말론적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성인입니다. 주님을 사랑할수록 이런 초연한 이탈의 종말론적인 삶입니다. 참으로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성인같은 삶입니다.
셋째 순수하십시오.
순수와 열정은 영적 삶의 기본 자질입니다. 주님을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요, 마음의 순수에서 샘솟는 열정의 사랑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입니다.
우리 눈은 우리 몸의 등불입니다. 우리 눈이 맑을 때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습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전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우리를 비출 때처럼 우리 몸이 온통 환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참 은혜롭습니다. ‘사랑-마음-눈-몸’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눈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항구하고 열렬한 주님 사랑으로 마음이 순수해질 때 눈빛도 맑고 밝게 빛납니다. 사랑으로 순수해져서 마음과 눈이 맑고 밝게 빛날 때 몸도 치유되어 맑고 밝게 빛납니다. 사랑이 모두임이 드러납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의 자녀, 빛의 자녀,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성인입니다.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고 불림 받고 있습니다. 비상한 성인의 아니라 참 내가 되는 평범한 성인입니다. 바로 성인의 되는 것이 우리 평생과제이고 우리 삶의 의미이며, 고해인생, 허무인생에 대한 유일한 답입니다. 주님은 성녀 오딜리아 대축일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성인이 되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1.기뻐하십시오.
2.초연하십시오.
3.순수하십시오.-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8,12). 아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모질고 험한 세상을 건너가면서, ‘이 세상에 나 혼자 밖에 없다!’며 울고 있는 우리들, 사방을 둘러봐도 높은 절벽이라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어 절망하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이사야 예언자는 참으로 큰 위로의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이사야서 41장 13~14절)
오늘 내 삶이 아무리 비참하다 할지라도, 오늘 내가 심연의 바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할지라도, 오늘 내가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간다 할지라도, 더 용기를 내어야겠습니다.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서야겠습니다. 어깨를 활짝 펴고 힘차게 걸어가야겠습니다.
놀랍게도 주님께서 우리의 오른 손을 붙잡고 계신답니다. 은혜롭게도 주님께서 항상 내 등 뒤에 서 계시겠답니다. 황공스럽게도 주님께서 친히 도움을 주시겠답니다.
존경하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살아 생전 참으로 은혜로운 한 말씀을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성령과 성모님의 현존과 동행에 대한 명료한 의식은 활기찬 신앙생활의 가장 좋은 비결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활 여정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이나 어려웠던 순간에 늘 성모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모님께서는 우리들의 인생길 가장 중요한 순간이나 어려운 순간에도 언제나 함께 동반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씩 이런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철저하게도 나는 혼자로구나. 주님께서는 내게서 너무 멀리 계시는구나. 나는 철저한 외톨이, 나에게는 아무도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참으로 큰 착각입니다. 우리의 영적 식별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우리 인생의 첫 출발점부터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길에 밀착 동반하고 계십니다.
세상살이에 바쁜 우리가 미처 자각하지 못해서 그렇지, 성령께서 우리 삶의 매 순간 안에 충만하게 현존하고 계십니다.
수많은 근심걱정으로 인해 우리 시야가 가려져서 그렇지, 성모님께서 언제나 우리 앞서 걸으시며 길잡이가 되어주고 계십니다.
이사야 신학에 따르면, 유다 왕국의 멸망, 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하느님 없이 스스로 서려는 하늘을 찌르는 인간의 교만’이었습니다. 주님 없이도 잘 할 수 있다는 오만, 주님을 향한 신뢰의 심각한 결핍이 결국 유다 왕국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사야 예언자는 ‘임마누엘 신탁’을 강조합니다. ‘언제나 우리 사이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두려워 말고 주 하느님께 의지하라.”
우리는 참으로 위대하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세례자 요한을 구약시대의 마지막 인물로 얘기합니다.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그의 임무에 있어서 위대한 인물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위대한 인물입니다. 주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11,11)고 선언하였습니다. 당대의 어느 누구 보다도 뛰어난 사람,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하느님의 사람보다 더 뛰어난 인물로 요한을 칭찬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11,11).하십니다.
이 말씀은 결국 요한은 이미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며 새로운 시대를 살기 시작하였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성취되고 완성되어 거기에 속한 사람은 은총 속에 구원된다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신약의 사람들은 아무리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구약의 어떠한 위대한 예언자보다 더 높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가 그만큼 크다는 말씀입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보다도 더 크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다 주님의 덕분입니다.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세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이미 미래를 준비한 인물이기에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기도 하지만 새 시대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11,12) 하신 것을 보면 세례자 요한 때부터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현존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외치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목이 베어졌습니다.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마귀들의 힘을 빌어 일한다고 비난 받기도 하였으며 사람들은 언덕 위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 하였으며 적대자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으나 결국은 처참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이 하느님 나라가 폭행을 당한 모습입니다.
유혹사화를 보면 사탄은 모든 것을 노립니다. 빵으로, 명예로,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정치적인 유혹으로 적대자들의 뒤에 숨어서 하느님의 통치권을 빼앗으려 하며 그 자리에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어둠의 세력은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함을 우습게 여기고 성을 상품화하며 물질만능주의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세상입니다.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거짓을 합리화하는 권력에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재물 때문에, 명예 때문에 불의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술과 도박 때문에 패가망신을 하고 권력에 집착하다가 제 명대로 못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를 방해하는 세력의 유혹에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폭력의 힘이 크다 하더라도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분명하게 대답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15,5)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
이는 당신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이 구약의 시대와는 본질적인 차이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요한은 메시아가 오리라는 것을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와 계심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이미 그분과 함께 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되는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 새로운 질서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에 갈증을 풀어주고,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이사 41,17-18 참조).
그렇지만,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고,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 1,9-11 참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12)
사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의 모습입니다. 정의와 진리와 사랑의 하늘나라는 불의와 거짓과 미움으로 폭행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물질의 나라가 권세를 부리며 침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에 귀 기울여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 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날에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채비를 마치고서 그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 있으십시오.”(에페6,10-18)
오늘 예수님께서는 증언하십니다.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마태 11,15)
사실, 이에 대해서는 <루카복음>에 따르면, 가브리엘 천사도 “그는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온다.”(루카 1,17)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더 자세하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이 제 스스로 그 뜻을 깨닫도록 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마태 11,15)
그러니, 믿음의 귀를 지닌 우리는 이를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는 곧 당신의 나라가 오심을 알리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라키의 예언에 따르면, 엘리야가 구원자의 재림 때 먼저 와서 그 오심을 알리게 되듯, 이제 요한이 그와 똑 같은 일, 곧 당신의 오심을 알리는 사자라는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요한이 미리 오기로 한 엘리야라면, 당신이 오시기로 한 구세주이심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극찬하신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11절) 그리고 예수께서는 구원사에서 세례자 요한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즉 구약에 예언된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선언하신다. 구세주의 길을 준비하는 위치란 다시 있을 수 없는 위치이며 요한에게 주어진 특권이기도 하다.
세례자 요한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일 것이다. 요한은 어머니 태 안에서 성령을 충만히 받아 “뛰놀았으며”(루카 1,41), 그의 어머니 또한 성령을 받아 예언을 하였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11절)고 하신다. 즉 성령이 충만한 곳에서는 성령을 아주 조금 나누어 받은 사람이라도 죽음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즉 하느님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하늘 나라를 아직 기대하며 싸움터에 있는 이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승리의 관을 받은 것과 아직 군대에 몸담고 싸우는 중인 것은 다르다. 하늘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가장 나중에 성인이 된 사람도 여전히 지상에서 하늘 나라를 희망하며 사는 가장 훌륭한 이보다 더 크다는 말이다.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12절) 하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믿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도 하찮게 여겼다.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을 비난하고, 그분의 적들은 그분을 감싸 주었다. 자녀가 되는 권한이 상속으로 주어졌지만, 가족이 그것을 거부하였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기를 거부하고, 집안의 종들이 그것을 받았다. 이것이 폭행을 당했다는 말이다.
성조들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고, 예언자들이 예고하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광이 이제 믿음으로 다른 민족들에게 넘어가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 이 완전한 말씀께서 율법 아래에서 자유를 기다리던 이를 따뜻이 맞아들여 그에게 아버지의 상속을 주신다면“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13절)는 말이 맞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엘리야라 하셨다. 그가 엘리야의 힘과 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천사도 요한에 대해 같은 말을 했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루카 1,17)라는 말은, 요한이 비록 사람의 모습이서는 엘리야와 달랐지만 바로 엘리야임을 알려준다.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음에도 그렇게 어려웠다면,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앞서 그 길을 마련하러 왔고, 그 사명을 다하였으며, 예수께서 사랑과 봉사로 하늘 나라를 선포하셨다면, 우리의 자세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자세는 사랑과 봉사의 원리에서 길을 발견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마태 11, 1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조금씩 밝아오는
하늘 나라의
빛입니다.
하늘 나라의 빛은
폭행을 당해도
하늘 나라의 기쁨을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성녀 루치아는
하느님을 향한
모든 사랑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빛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그 누구도 더럽힐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우리또한 하느님을
사랑한 시간입니다.
사랑이 사랑을
만나는 빛의
성탄이 됩니다.
사랑 없이
빛이 될 수 없고
사랑 없이
주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빛을 만드신 분께서
다시 빛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빛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기쁨의 대림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이 사진, 제가 찍은 것인데 멋있지 않아요?”라고 사진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저는 “일몰 사진이네요. 아주 잘 찍으셨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신부님, 아니에요. 일몰이 아니라, 일출 사진입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일출과 일몰을 사진 상으로 구분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누구는 일몰은 차가운 느낌을 그리고 일출은 따뜻한 느낌을 준다고 하던데, 저는 차갑거나 따뜻한 느낌을 받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사진 상으로 볼 때에 그냥 똑같아 보일 뿐입니다. 아마 사진을 찍은 당사자만 제대로 알 수 있지 아닐까요?
이 세상 안에서 뜨는 사람과 지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차이를 제3자가 제대로 알 수가 있을까요? 지고 있는 상태인데도 제3자는 뜨고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바로 당사자만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사자만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일은 하지 않고 사람들과 세상 탓을 외치는 사람들이 그리고 더 나아가 하느님 아버지께 불평불만을 맘껏 던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려야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줄일 수 있어 순간적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고도 하지만, 이러한 불평불만에 앞서 내 자신을 더 깊숙이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뜨고 있는 상태에서 또 반대로 지고 있는 상태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분명히 보다 더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선택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구세주가 아닐까 생각했지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과 행동에 큰 관심을 가졌고 또 열정적으로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불평불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로부터 정치적 해방을 가져올 수 있는 힘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으면서 오히려 주님을 준비하기 위해 왔다고만 말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칭찬을 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대신 주님을 준비하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바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뒤로 하고 “내가 구세주다.”라고만 했어도 그렇게 허망한 죽음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늘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을 준비하는 데에만 집중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 앎을 삶 안에서 실천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요?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라고 하시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잘 났다 하더라도 하늘나라의 가장 작은이보다 못하다는 것이지요. 결국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답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증거하며 사는 삶, 주님의 뜻에 맞게 사랑을 실천하면 사는 삶입니다.
오늘의 명언: 혹여 잘못되거나 실패할지라도, 자신이 선택한 방향이라면 나름대로 걸어갈 수 있는 법이거든.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 마지못해 걷는 길이 가장 괴로운 거지(곤도 후미에).
나 역시 죄인입니다.
한 사제가 죄지은 어떤 형제를 교회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그러한 죄를 가지고 어떻게 교회 안에 들어 오냐면서 말이지요. 이 모습을 본 압바 베사리온은 일어나서 그와 함께 나가면서 말했습니다.
“나 역시 죄인입니다.”
초대 교부들의 글을 읽다가 발견한 글입니다.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과연 누구를 판단하고 단죄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죄로부터 자유로울까요? 그 누구나 지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 역시 그러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판단하고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저 “나 역시 죄인입니다.”라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어떨까요?
오늘은 서울대교구 문정2동성당에서의 두 번째 대림특강입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느 시골 장터를 할머니가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계속 “같이 가 처녀, 같이 가 처녀”라고 소리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처음엔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계속 소리가 들리기에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가 서서 소리를 치고 있었습니다.
“갈치가 천원, 갈치가 천원!”
이번엔 진짜 있었던 일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오케스트라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베토벤의 서곡을 연주할 때의 일입니다.
그는 곡의 효과를 살리기 위해서 트럼펫 연주자를 관중석에 앉아 있도록 했다가 솔로로 불게 했습니다.
연주에 들어간 지휘자는 신나게 지휘봉을 휘두르다가 하이라이트인 트럼펫 연주 부분이 되자 갑자기 관중석으로 돌아서서 더욱 힘차게 지휘봉을 휘둘렀습니다. 그런데 들려야 할 트럼펫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크게 당황한 그는 관중석을 향해 다시 지휘봉을 크게 휘둘렀습니다. 그런데도 트럼펫 소리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트럼펫 연주자는 수위에게 망신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수위는 연주자가 관중석에서 트럼펫을 들고 불려고 하자 방해꾼인 줄 알고 두 팔을 잡아 뒤로 젖히고는 자신이 마치 큰일을 해낸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의 지휘자에게 이젠 안심해도 된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처녀란 소리를 듣기를 원하였고, 수위 아저씨는 자신이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임을 인정받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산을 산으로 보지 못하고 물을 물로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혹은 믿고 싶은 대로 보이게 되어있습니다. 미사 때 사제가 그것을 성체로 들면 그것이 무엇으로 보입니까? 밀떡으로 보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몸을 보입니까? 예수님의 몸이라고요?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것은 단순한 밀떡에 불과합니다.
교리 신학원 수업 때 제가 성모님에 대해 개신교인들과 만나면 성경으로 이래저래 설명을 해 주라고 강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 자매님이 외국에서 성경박사를 따고 몇 년 만에 돌아온 자기의 친구 목사님과 만나서 그것을 가지고 토론을 했는데 수긍을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오랜만에 만나서 둘이 싸우고 헤어졌다고 했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만났는데 왜 성모님 이야기를 했느냐고 했습니다. 성경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입니다. 믿는 대로 보이는 것이 성경입니다. 개신교를 믿으면 개신교 식대로 보이고, 천주교를 믿으면 천주교 믿음대로 해석하게 됩니다.
물론 개신교 내에서도 각기 자기 나름대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수백 개의 종파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서로 아무리 자신의 이론을 내세워도 이미 자신이 믿기를 원하는 대로 보이기 때문에 아무리 잘 설명을 해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성경 가져다 놓고 토론을 할 필요도 없고, 남이 가르치는 대로 그대로 따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럴 땐 성경가지고 싸우지 말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성경을 풀어주십니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예수님도 잘 아시고 계셨습니다.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으면’ 아무리 설명을 해도 요한은 구약의 엘리야가 되지 않습니다. 머리가 나빠서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받아들여서 내 삶이 변해야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쓰신 것이 아니라 먼저 당신을 믿는 이들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가 처음에 가지고 있었던 것은 믿음이고 그 믿음에 따라 성경이 쓰이고 정해졌습니다.
이 교회의 믿음을 우리는 ‘교리’, 혹은 ‘성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순서상으로 교리는 성경을 앞섭니다.
제가 한 번 산에 올라가 차를 대접해 주시는 한 스님과 이야기를 나눈 뒤 산 배경을 뒤로하고 “잘 나오게 찍어주세요.”라고 말하며 사진을 찍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사진을 찍으시며 이렇게 중얼거리셨습니다.
“있는 대로 나오는 거예요.”
정말 있는 그대로 나오는 게 사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마음에 안 들어 포토샵을 하기도 합니다. 실재는 안 그렇지만 더 예쁘게 나오면 기분 좋아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마음입니다.
성경도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포토샵 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사진은 있는 그대로 나오지만 우리는 그것을 해석합니다. 불가에서도 보이는 것들이 실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 사라지는 것들이고 우리 자신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보이는 것들을 해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해석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지는 것이기에 성경에 모든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밀떡만 바라보며 그것을 잘 분석해보면 성체라는 답이 나올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대하기 이전에 먼저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믿는 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박해하다가 도중에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자신이 외우다시피 하는 구약을 다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리’입니다. 교리를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으면 성경의 해석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개신교 목사님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김재중 요셉 회장님은 성경을 수백 번을 읽으셨지만 성모님에 대해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신자들이 외우는 성모송을 듣고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대하기 전에 먼저 이것부터 깨달아야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믿기를 원하고 있는가를 말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엠이 주말 봉사를 다녀왔습니다. 2박 3일의 짧은 여정이지만 많은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한 부부들은 많은 눈물을 흘렸고,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지, 대화가 왜 필요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대화가 부족한 부부, 더 많이 사랑하고 싶은 부부, 문제를 풀고 싶은데 방법을 잘 모르는 부부에게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이번 주말을 함께하면서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식당의 벽에 있던 글입니다.
“인생의 날 수는 당신이 결정할 수 없지만
인생의 깊이와 넓이는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얼굴의 모습을 당신이 결정할 수 없지만
얼굴의 표정은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날씨는 결정할 수 없지만
마음의 날씨는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들을 감당하기도 바쁜데
당신은 어찌하여
당신이 결정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걱정하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에서는 세상에서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었어도, 아무리 특출한 능력을 지녔어도, 아무리 멋진 외모를 지녔어도 그것이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저의 외모와 능력에 대해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보다 키가 좀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참을성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힘도 더 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지금 저의 모습으로 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 저의 모습은 다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저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 교구에 본당이 200개가 넘습니다. 본당을 생각하는 기준을 보면 외형적인 크기나 숫자를 사용하곤 합니다. 땅은 얼마나 큰가, 성당은 또 얼마나 큰가, 신자 수는 몇 명인가, 보좌 신부님은 있는가, 수녀님은 있는가! 또 나누는 기준이 있습니다. 단체들은 다 있는가, 헌금은 얼마나 나오는가! 사실 이런 것은 하늘나라에서는 그렇게 큰 기준의 근거는 아닐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살면서, 천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우리는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잣대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적인 모습, 숫자, 성공 등으로 판단을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판단해야 하는 기준은 세상의 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봉사했는지, 얼마나 겸손했는지, 얼마나 나누었는지를 가지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어떻게 하늘 나라를 지킬 것인가? -주님과 함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장 큰 적은 내면의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이 영성생활의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누구나의 원초적 정서가 두려움입니다. 흡사 이런저런 안팎의 두려움에 에워싸여 살아가는 사람들 같습니다. 우리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님 부활상 아래 돌판에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예수님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 희망의 예언자 이사야가 우리를 격려하며 ‘두려워하지 마라’ 연거푸 말씀하십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두려워하지 마라.---내가 너를 도와 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 말씀이 무려 365회 나온다 합니다. 날마다 우리를 '두려워하지 마라' 격려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 뒤에는 어김없이 ‘내가 너와 함께있다’라는 말씀이 뒤따릅니다. 제가 고백성사 보속 처방전 말씀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말씀중 하나도 이사야서 말씀입니다.
“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 내가 도와 준다. 정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준다.”(이사41,10)
제가 이 말씀을 잊지 못하는 것은 제 여섯째 숙부님이 임종전 1주일 정도 이 말씀을 마음에 되새기며 죽음을 준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약속이 고무적입니다.
“나 주님이 응답하고 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리라.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
주님과 함께 할 때 풍요로운 내외적 삶입니다. 우리가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어떻게 하늘 나라를 지킬 것인가?”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답은 “주님과 함께”입니다. '주님과 함께'가 두려움에 대한 근원적 대책입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하늘나라의 실현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바로 복음이 답을 줍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오늘 지금 여기서 시작된 하늘 나라입니다. 그러니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우리일지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주석은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하늘 나라, 곧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시작한다. 세례자 요한은 그 입구에 서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들, 그리고 요한 사이에는 일종의 단절, 일종의 근원적인 새로움이 있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과는 달리 파스카의 예수님과 함께 하늘 나라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며칠전 읽은 어느 자매님의 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여기 나오는 장신부님은 제 대구 가대 동창신부로 지금은 안식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장신부님은 미사강론에 이곳에서 행복하게 사랑하며 사는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게 하늘 나라이니 여기서 잘 살라고, 이왕이면 잘 살다 떠나는 우리의 ‘뒷모습’을 멋지게 보여주자고, 지금 여기서도 소리 없는 고생으로 밥하고 설거지하는 여인들의 모습은 뒷모습이라고, 논에서 쟁기질하는 아버지, 밭에서 호미질하는 어머니 모습도 늘 뒷모습이었다고 하셨다. 이형기 시인의 "낙화(落花)"를 떠올리며 한 해를 넘기면서 나는 어떤 뒷모습을 주위 사람들에게 남기며 떠나는 중인지 돌아보게 하는 강론이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참 의미심장한 인용문입니다. 여기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게 하늘나라란 말은 바로 오늘 여기서 시작된 하늘 나라임을 깨닫게 합니다. ‘뒷모습’이 아름답고 좋은 사람들이 바로 하늘 나라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앞모습보다도 뒷모습이 진한 감동을 줍니다. 그래서 길가다가 인상적인 사람을 만나면 순간 뒤돌아 서서 뒷모습을 바라다 보는 지도 모릅니다. 뒷모습하면 떠오르는 튀임후의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모습입니다. 얼마전 피정지도 강사님의 말씀이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교황님은 사임전 일체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만류로 인해 사임이 쉽지 않았음을 직감하셨기 때문입니다. 퇴임후로도 자기의 거처를 교황청 내의 숙소로 자기를 유폐시킴으로 현임 교황님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하셨고 일체의 스캔들을 미연에 방지했습니다. 전에는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교황님의 책도 읽고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라는 요지의 언급이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성인다운 뒷모습인지요. 살 때의 앞모습보다 떠날 때의 뒷모습이 백배나 중요하고 깊은 감동을 줍니다. 오늘 기념하는 십자가의 성 요한은 물로 성인들의 공통적 특징은 뒷모습이 한결같이 아름답고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이형기 시인의 싯귀처럼 진정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임종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뒷모습입니다.
이미 뒷모습이 아름다운 겸손한 이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가 하늘 나라입니다. 함께 하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을 닮아갈 때 아름다운 뒷모습의 사람들이됩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습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바로 여기서 기인하는 영적전쟁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도, 예수님의 죽음도 이런 폭력의 결과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하늘나라가 여전히 건재할 수 있음은 무수한 순교성인들이 하늘나라를 지켜낸 공덕임을 깨닫습니다. 귀있는 사람은 알아들어야 합니다.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있는 엘리야다. 귀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예수님은 요한의 뒷모습에서 엘리야의 뒷모습을 발견하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귀있는 사람은 알아들으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여전히 폭행을 당하고 있습니다. 세상 끝날 때 까지 계속되는 폭력의 세력과의 영적전투입니다.
이런 어둠의 세력에 대한 최상의 무기가 주님과 함께하는 겸손입니다. 아름다운 뒷모습의 겸손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주님을 따르는 뒷모습보다 더 감동적인, 아름답고 거룩한 모습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날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당신의 뒷모습을 닮게 하십니다.
아멘.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
이는 당신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이 구약의 시대와는 본질적인 차이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요한은 메시아가 오리라는 것을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와 계심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이미 그분과 함께 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되는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 새로운 질서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에 갈증을 풀어주고,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이사 41,17-18 참조).
그렇지만,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고,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 1,9-11 참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12)
사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의 모습입니다. 정의와 진리와 사랑의 하늘나라는 불의와 거짓과 미움으로 폭행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물질의 나라가 권세를 부리며 침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에 귀 기울여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 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날에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채비를 마치고서 그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늘 성령 안에서 온갖 기도와 간구를 올려 간청하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 있으십시오.”(에페 6,10-18)
그리고 혹 우리가 하늘나라를 폭행하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혹 하늘나라를 폭행하고 있지는 않는가?
당신이 계신 제 마음이, 여기 우리 가정과 공동체가 바로 당신의 나라이거늘,
혹 그분의 나라를 외면하고, 도외시 하고 있지는 않는가?
혹 자신도 모르게 함께 계시는 그분을 업신여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저희가, 저희 공동체가 당신 뜻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입니다. 그러니, 오늘 그분의 나라가 저희와 저희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당신의 뜻에 승복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나라를 수락하고 그분께 자신을 허용하는 날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증언하십니다.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마태 11,15)
사실, 이에 대해서는 <루카복음>에 따르면, 가브리엘 천사도 “그는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온다.”(루카 1,17)고 증언하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더 자세하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이 제 스스로 그 뜻을 깨닫도록 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마태 11,15)
그러니, 믿음의 귀를 지닌 우리는 이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사실, 이는 곧 당신의 나라가 오심을 알리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라키의 예언에 따르면, 엘리야가 구원자의 재림 때 먼저 와서 그 오심을 알리게 되듯, 이제 요한이 그와 똑 같은 일, 곧 당신의 오심을 알리는 사자라는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요한이 미리 오기로 한 엘리야라면, 당신이 오시기로 한 구세주이심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번 주일에 들었던 세례자 요한의 선포를 다시 들어봅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 1,7-8)
나도 하늘나라 폭행자는 아닐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하늘나라가 내내 폭행을 당해왔다고 말씀하십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폭력을 쓰는 자들이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얼마나 대단한 폭력을 가졌기에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합니까?
지금까지 저는 폭력을 가지고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자를 특별한 사람들, 이 세상의 대단한 권력자들이나 네로 황제처럼 교회를 박해한 자들로 생각했고 강론 때도 주로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것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고, 나는 하늘나라의 폭행자가 아닌지 생각하니 얘기가 달라졌습니다. 생각해보니 저도 폭력을 쓰는 사람이고 하늘나라를 폭행하였으며 거의 틀림없이 여러분도 어떤 식으로든 하늘나라의 폭행자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의 폭행자를 이렇게 나름대로 정의 내려 봤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우습게 여기고 맘대로 하는 자
-하느님 사랑을 우습게 여기고 맘대로 하는 자
-하느님 백성을 우습게 여기고 맘대로 하는 자
우선 하느님의 뜻을 우습게 여기고 맘대로 하는 것을 보겠는데 여러분보고 하느님의 뜻을 우습게 여기지 않느냐고 물으면 내가 감히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우습게 여기냐고 펄쩍 뛸 것입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틀림없이 하늘나라를 우습게 여기지 않고 그러면 천벌을 받을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드러내놓고 하느님의 뜻을 우습게 여기거나 더 나아가 하느님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습게 여길 마음은 없는데 내 맘대로 할 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지 않고 내 맘대로 할 때, 더 나아가 하느님의 뜻이 뭔지 알면서도 내 맘대로 할 때 입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우습게 여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하느님의 뜻을 우습게 여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 사랑을 우습게 여기는 것을 보겠습니다.
이 역시 우리는 내가 어떻게 하느님 사랑을 우습게 여기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사람의 인정이나 칭찬을 받고자 할 때, 하느님 도움에는 감사치 않고 인간의 도움에는 크게 감사할 때, 하느님에게서는 위로받지 못하고 인간에게서 위로를 받거나 받으려 할 때, 나는 하느님 사랑에 머물지 않거나 머물더라도 하느님 사랑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당연하게 여기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우습게 여기는 것을 보겠습니다.
요즘 갖가지 갑질이 사회적인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본사가 가맹점에게 갑질을 하고, 고객이 서비스 종사자에게 갑질을 하며, 군 고위자가 부하사병에게 갑질을 하고, 데이트 폭력이라는 것이 빈번한데 이런 것들이 다 힘으로 하느님 백성을 함부로 함으로써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겁니다.
얼마 전 저는 오래 전에 만들어진 영화를 봤습니다.
제가 인생과 신앙의 문제로 방황을 하고 그래서 여러 종교를 편력을 할 때 동학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고 그때 동학에 관한 학위논문을 쓰면서 봤던 영화인데 다시 보면서 또 감명을 받았습니다.
동학의 주요 사상이 바로 侍天主시천주 인내천人乃天 사상이지요.
사람이 곧 하늘이니 하늘을 섬기듯 사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천주교뿐 아니라 모든 고등종교는 이렇듯 사람을 그저 사람으로 보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로 보거나 심지어 사람이 곧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을 대할 때 비록 폭력을 가하지 않더라도 그에게서 하느님을 보지 않고 그래서 우월적으로 대할 때 우리도 어떤 식으로든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아무 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리 깊이 파들어가도 끝에 도달할 수 없는 풍부한 광산과 같습니다. 그 안에는 보화를 매장하고 있는 광산이 허다하여 매번 여기저기에서 새 보화와 광맥을 찾아냅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이 먼저 내적·외적으로 고통이라는 작은 문을 통해서 이 영적 지혜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이 보화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거기에 이르지를 못할 것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수녀와 함께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통해, 가르멜 수도회 뿐만 아니라 물욕과 타락으로 얼룩진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1542~1591)가 오늘 우리에게 남긴 말씀입니다.
십가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의 일생은 그야말로 피만 흘리지 않았을 뿐, 허물어져가는 성채같던 우리 가톨릭 교회와 수도회를 되살리기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쳤던 생애였습니다. 타락과 위선, 우상숭배와 세속화와 맞서 싸운 사랑의 순교자로서의 삶이었습니다.
오직 수도회와 보편 가톨릭 교회의 회개와 쇄신, 성장을 위해 갖은 위협과 박해, 투옥과 독살의 위험을 무릅쓴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에게 주어진 인생은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그는 짧지 않은 생애 동안 언제나 동료 수도자들로부터의 오해와 따돌림, 투옥과 독살의 위험에 시달렸습니다.
깊은 지하 감옥 속에서도 유일한 희망이며 의지처였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지어올린 시는 오늘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는 불멸의 시편으로 남아있습니다. ‘가르멜의 산길’, ‘영혼의 어두운 밤’, ‘영혼의 노래’ 등.
십가가의 성 요한 사제가 평생토록 일관되게 강조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 주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위해서라면 너무나도 당연히 치러야할 댓가와 노고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십가가의 성 요한 사제의 생애는 보다 더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가기 위해 발버둥치고 몸부림친 순교자의 삶이었습니다. 그가 아주 강력하게 원칙과 규율을 강조하자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적당적당, 느슨느슨하게 살아가던 수도자들이 더 강력하게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박해하는 것을 넘어 독살하려는 시도도 서슴치 않았던 것입니다.
평생토록 애타게 찾고 갈구하던 주님, 눈을 뜨나 눈을 감으나 묵상하고 관상했던 주님, 지상 최고의 보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체험하고 온 몸으로 느꼈던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영혼이 고통에다 위로와 열망을 두지 않거나 또는 여러 겹으로 된 고통의 숲 속을 거치지 않고서는, 여러 겹으로 된 하느님 보화의 울창함과 지혜에 결코 이르지 못함을 우리가 결정적으로 깨달았으면 합니다. 또한 신적 지혜를 참으로 갈망하는 영혼은 거기에 다다르기 위해 십자가의 숲 속에서 고통받는 것을 원해야 함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하느님 보화의 지혜에 들어가게 하는 문은 십자가라는 문입니다.”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맛보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맛없는 거기를 거쳐서 가라. 모르는 것에 다다르려면, 모르는 거기를 거쳐서 가라. 너 있지 않은 것에 다다르려면, 너 있지 않는 데를 거쳐서 가라. 아직 다다르지 않은 것에 다다르려면, 도중 아무 것에도 발을 멈추지 말라.”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마태오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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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 복음 말씀에서 눈이 멈춘 곳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라는 구절이다.
오늘은 본의 아니게 조금은 어두운 이야기를 해야 할 듯 하다.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해보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 모상을 닮은 인간을 사랑으로 지어내신다.
그리고 커다란 결단을 하신다.
당신께서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에 책임을 지시겠다는 이야기다.
즉,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신다. 창조주 하느님을 거부할 정도의 자유의지였다.
어쩌면 하느님께는 커다란 모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께서 말씀하신 사랑이라는 말에 책임을 지셔야 했고,
그렇게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셨다.
하지만 인류는 처음부터 자유의지를 욕망의 수단으로 사용해왔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가 되었고,
그 안에는 늘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로 채워졌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랑이라는 말에 머뭇거림이 없으셨다.
결국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기로 결심하신다.
보내진 아들은 하느님의 뜻과 하늘나라의 모습과 우리가 영원성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알려주신다.
그리고 그 아들은 자신의 죽음이라는 십자가의 삶으로 사명을 완수한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난 지금 역시 인류의 욕망은 그 끝을 다하지 못하고 움직여지고 있다.
결국 우리 인간의 역사는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역사였다.
그렇다면, 폭행을 당하는 하늘나라의 기분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이런 기분이 아닐까?
요즘 너무도 쉽게 신문이나 방송매체를 통해서 접하게 되는 슬프고도 아픈 소식들.
자식에게 폭행당하는 부모들, 치매로 외딴 섬에 버려진 부모들,
서로의 새로운 삶을 위해 서로 자식을 떠맡지 않겠다고 하는 젊은 부모들에게 버려진 아이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생명을 받았다가 부모의 이기심으로 그 생명을 빼앗기는 낙태아들,
목숨을 위한 최소한의 권리마저 빼앗기고 있는 힘없는 자들,
필요에 의해 취해졌다가 너무 쉽게 버려지는 동물들, 이 외에도 수없이 많은 부조리와 악행은 우리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 아마도 하느님의 마음은 폭행당하는 부모, 버려진 부모, 내던져진 자식, 생명을 빼앗긴 태아,
삶의 기반을 빼앗긴 무력한 사람들, 쓰레기처럼 길가에 내동댕이쳐진 강아지들의 기분과 비슷하지 않을까?
오늘의 복음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민족의 아픔을 생각해본다.
보속(補贖 / penance)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독일이 통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의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보속이라는 개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내 민족이 지은 죄에 대한 참회의 실천으로 받아들이려는 공감대가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보속이라는 개념이 사실 없었다.
불교적 용어인 업보(業報)라는 표현은 있지만 이는 마지 못해 과거나 전생에 지은 허물에 대해 묶이는 것을 말한다.
한(恨)으로 남을 수 있는 수동적인 개념이다.
그렇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대한 폭행의 가해자가 아니라,
그 하늘나라의 뜻을 따라 이 유한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해야 할 또 하나의 작업은 보속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가해자의 한 사람으로서 보속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민족이 남과 북,
그리고 동과 서의 참된 화해와 통합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제일 먼저 요구되는 정신일지도 모르겠다. (2013.12.13)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극찬하신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11절) 그리고 예수께서는 구원사에서 세례자 요한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즉 구약에 예언된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선언하신다. 구세주의 길을 준비하는 위치란 다시 있을 수 없는 위치이며 요한에게 주어진 특권이기도 하다.
세례자 요한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일 것이다. 요한은 어머니 태 안에서 성령을 충만히 받아 “뛰놀았으며”(루카 1,41), 그의 어머니 또한 성령을 받아 예언을 하였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11절)고 하신다. 즉 성령이 충만한 곳에서는 성령을 아주 조금 나누어 받은 사람이라도 죽음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즉 하느님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하늘나라를 아직 기대하며 싸움터에 있는 이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승리의 관을 받은 것과 아직 군대에 몸담고 싸우는 중인 것은 다르다. 하늘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가장 나중에 성인이 된 사람도 여전히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희망하며 사는 가장 훌륭한 이보다 더 크다는 말이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12절) 하늘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믿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도 하찮게 여겼다.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을 비난하고, 그분의 적들은 그분을 감싸 주었다. 자녀가 되는 권한이 상속으로 주어졌지만, 가족이 그것을 거부하였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기를 거부하고, 집안의 종들이 그것을 받았다. 이것이 폭행을 당했다는 말이다.
성조들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고, 예언자들이 예고하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광이 이제 믿음으로 다른 민족들에게 넘어가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 이 완전한 말씀께서 율법 아래에서 자유를 기다리던 이를 따뜻이 맞아들여 그에게 아버지의 상속을 주신다면“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13절)는 말이 맞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엘리야라 하셨다. 그가 엘리야의 힘과 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천사도 요한에 대해 같은 말을 했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루카 1,17)라는 말은, 요한이 비록 사람의 모습에서는 엘리야와 달랐지만 바로 엘리야임을 알려준다.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음에도 그렇게 어려웠다면,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앞서 그 길을 마련하러 왔고, 그 사명을 다하였으며, 예수께서 사랑과 봉사로 하늘나라를 선포하셨다면, 우리의 자세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자세는 사랑과 봉사의 원리에서 길을 발견하는 것이어야 한다.
메마른 영혼에 샘물을 주러 와주시는 주님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와주시니 그들을 핍박하던 자들은 멸망할 것이라 선포합니다. 주님께서는 벌레나 구더기처럼 비천한 이스라엘을 귀하게 여기시어 도와주시는 구원자이십니다(이사 41,14). 그들을 도와주는 힘은 오직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그렇게 구원은 우리 자신의 공로나 의로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의로운 주권 행사에 달려 있습니다(41,17).
주님께서는 메마른 땅에 샘물이 솟게 하시고 광야에 나무가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41,18-19). 오시는 주님께서는 그렇게 메마른 사막과도 같은 우리에게 생명의 샘물을 주시고 영적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만을 갈망하며 그분의 뜻을 실행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주님의 권능과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마태 11,11) 곧 예수께서는 ‘하늘나라’ 자체로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와 계신 하늘나라이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의 터가 바로 예수님으로 인해 드러난 하늘나라입니다. 그렇다면 매순간 삶의 모든 장면에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삶이 되도록 힘써야겠지요. 물론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예수께서 이르십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11,12)
하늘나라는 모두에게 거저 주어지는 사랑이요 선이며 생명이요 자유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와 선과 의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막고, 이미 체험한 하늘나라를 빼앗아가려는 폭력과 악행 또한 끈질기게 이어집니다. 이런 폭행은 다양한 차원에서 직간접적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비하하며 혐오함으로써 내 안의 하늘나라를 짓누르기도 합니다.
이기심과 탐욕에 사로잡혀 남을 무시하고 차별하며 멸시하는 것은 모든 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주님께서 주신 선을 자기것으로 삼는 행동 또한 모두가 행복하도록 초대받은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것이 되겠지요. 주님께서는 다른 이들을 동등하게 대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른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좋음을 보며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는 세상을 바라실 것입니다.
공동체 또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삶의 자리입니다. 공동체는 하늘나라의 표지요 상징이 되어야겠지요. 그런데 공동체가 예수님을 삶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성령 안에서 서로 일치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는 셈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권능을 믿으며,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고 있는 하느님의 선과 지혜와 자비를 키워가도록 힘쓰는 일입니다.
오늘도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습니다. 개인적 악행과 무관심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테러, 자본가들의 끝없는 탐욕으로 하느님의 자리는 약탈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이사 41,14) 하시는 주님께 의탁하며, 불의와 무관심과 시기 질투, 탐욕의 끈을 내려놓고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함으로써 하늘나라가 드러나도록 해야겠습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마태오.11,12)
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신부님
천지 창조 때 하늘이 준 우리의 인간성은 순수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존재요 창조된 우주는 아름다웠습니다. 낙원에는 모든 것이 풍부하였고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생명을 가진 만물은 운명 공동체로 서로가 유기적인 관계로 친교를 이루며 행복했습니다.
순수한 최초의 인간은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하였고 우리는 원죄를 물려받았습니다. 하늘은 사람에게 순수를 주었지만 최초의 사람은 순수를 파괴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준 순수함의 선물을 잃어버리고 부족함이 없던 낙원의 자궁에서 우리는 고통의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순수한 우리의 마음을 욕망에게 내어주었습니다. 낙원에서 누렸던 모든 것을 버리고 나와야 했던 상실의 아픔만큼 큰 욕망이 생겼습니다. 잃어버린 낙원을 세상에서 되찾으려는 욕망으로 서로에게 폭력적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카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사람들의 욕망은 우리가 잃어버린 하늘의 본성을 일깨웠던 수많은 예언자들마저 죽였습니다. 하늘의 음성을 외면하고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만큼 사람들은 폭력적으로 되었습니다. 최초 우리 안에 있던 창조의 순수함을 잊은 만큼 비인간적으로 되었습니다.
폭행당하고 잊어버린 우리의 인간성을 치유하러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최초 하늘이 우리에게 주셨던 ‘복(福)’을 상기시키려고 사랑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의 마음에 사랑의 인호를 새겨 주셨습니다.
사랑의 인호를 마음에 새긴 우리는 최초의 순수를 되찾은 사람들입니다. 파괴적인 욕망의 힘에게 ‘폭행당한’ 내면의 순수한 아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힘을 포기하고 사랑을 고집하는 우리는 다시 태어나실 아기 예수님처럼 연약해집니다. 오실 주님은 우리가 잃어버린 내면의 아기를 새로 탄생시켜 주십니다.
김기환 베드로 수사님
T.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미 하느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계시하셨는데 더 어떤 계시들을 찾고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계시해주실 말씀들을 다 말씀해 주셨고 계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간혹 보게 되면 신비현상들을 찾아 다니고 사적 계시 같은 것에 현혹되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 요한의 말씀대로 더 이상 신비한 계시들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고 바랄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하느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모든 계시들과 말씀들을 다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에 윤회사상처럼 전생에 엘리야였던 사람이 환생했다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정신과 삶을 본받아 살아가는 것을 두고 말씀하신 것일 것입니다.
엘리야가 두려움 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세상에 불의를 고발했던 것처럼 세례자 요한 역시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서 오기로 되어있는 엘리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계시된 말씀 우리에게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들을 읽고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받아들인 말씀대로 두려움 없이 말씀을 전하고 세상의 불의에 맞선다면 우리 또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가 되기도 하며 세례자 요한과 세상에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수 많은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성 프란치스코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도 그러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예언자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이는 주님께서 그것을 손수 이루시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그것을 창조하셨음을, 모든 이가 보아 살펴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말씀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도 주님께서 우리 삶을 이끄시고 다스리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내어 맡기고 의탁하는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계시된 말씀 안에서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며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최원석 님
성인 성녀들이 어찌 성인 성년가 되었을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순수 영혼을 지키위하여서 수없이 많이 매일매일 자신을 비우고 항상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인물들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우리의 신앙의 모범이라 할수 있는 것은 같은 상황 속에서도 그분들은 모든 것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그분과 우리의 차이점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무수히 많은 매질과 넘어지심 ..그리고 십자가에 극형을 받으시기까지 하면서 자신을 찾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찾으셨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성인들은 본 받아 살아가기에 세상 사람들로 부터 매도 맞고 그리고 바보천치라는 소리도 듣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주님과 같은 수고 수난에 나도 같이 동참하게되고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비라고 하나봐요 ..말로는 형언할수 없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실체가 있기에 ..주님을 비롯하여서 다른 성인들의 삶의 강한 한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강한 희망 ..빛에 대한 강한 갈망 ..분명히 주님은 성령안에서 기쁨을 맞보셨고 그리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살기 위하여서는 세상 것은 버려야하기에 아픔이 따르는 것이지요 ..매순간 선택이 따르지요 하지만 주님을 선택으로 인한 아픔도 같이 수반되지만 그렇지만 그 보다 더큰 영광이 우리를 감싸주실것입니다.
아멘 .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마태 11, 1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처음부터
하느님이셨습니다.
결국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십자가로 오셨습니다.
하늘 아래
십자가가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십자가로 시작합니다.
십자가로
성숙합니다.
십자가로
정화됩니다.
십자가의 힘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우리를 깨우십니다.
길을 찾게 하는 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느님을
만나게됩니다.
십자가는 비우고
낮추는 것입니다.
우리의 십자가가
성탄의 자리입니다.
십자가에서
사랑의 의미와
십자가에서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체험하는
은총의 대림시기
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로
오십니다.
언젠가 운동을 한 뒤에 샤워를 시원하게 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온 몸에 비누칠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전화가 큰 소리로 울어대는 것입니다. 비누칠을 이제 막 했을 때였기 때문에 전화를 받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전화벨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전화 좀 받으라고 제게 재촉을 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전화가 아닐까 라는 생각에 결국 비누가 묻어있는 상태로 거실에 나가 급하게 휴대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통화를 한 순간 실망하고 말았지요. 아리따운 목소리를 가진 안내원이 말하는 대출안내 전화였기 때문입니다.
저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굳이 받을 필요가 없는 전화였던 것이지요. 그런데도 꼭 필요한 전화가 아닐까 라는 생각에 거실을 물바다로 만들면서 급히 받았습니다. 대출 받지 않는다며 단호히 거절을 하고서 다시 욕실로 향해서 마무리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이렇게 모든 것 다 팽개치면서까지 임하면서, ‘주님의 일에 대해서도 그런 자세로 임했었는가?’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세상의 말에 대해서는 쓸데없는 것까지 다 들으면서도, 주님의 말에 대해서는 얼마나 경청하고 있었을까요?
솔직히 급한 전화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허겁지겁 전화를 받지만, 위의 경우처럼 쓸데없는 전화일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매번 급하게 전화를 받았던 것은 혹시라도 있을 중요하고 급한 전화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지요. 그 한 번을 위해서 매번 놓치지 않고 전화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에 반해서 주님의 말씀은 매번 중요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단 한 번만 잘 들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한 번도 제대로 행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말고는 아무도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인간은 너무나도 부족하고 나약함을 이야기하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라고 하십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인간의 나약함으로 주님의 말씀을 모두 제대로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하늘에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온전히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기 때문에 더 클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의 모습이 변화되어야 할 때입니다. 언젠가 주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또 언젠가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다짐만 하는 우리가 아니라, 바로 지금 또 매 순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일을 하겠다는 다짐뿐 아니라 행동하는 우리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며, 우리의 영적 크기도 점점 주님께서 원하시는 크기로 변화될 것입니다.
위대한 행동이라는 것은 없다. 위대한 사랑으로 행한 작은 행동들이 있을 뿐이다(복자 마더 데레사).
보물과 지팡이
욕심이 너무 많은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이 할아버지께서 우연히 보물이 가득 들어 있는 동굴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동굴은 잠시 동안만 문이 열렸다가 어느 순간에 문이 닫혀서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보물을 갖고 싶은 욕심이 발동했습니다. 그래서 그 동굴을 힘들게 찾아가서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잠시 뒤에 동굴 문이 열리면서 그 안의 온갖 보물이 보입니다. 언제 닫힐지 모른다는 기억이 나서 얼른 들어가서 몇 개의 보물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동굴 문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더 많은 보물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 정도면 여생을 떵떵 거리면서 잘 살 수 있겠다 싶었지요.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자신의 낡은 지팡이를 동굴 안에 두고 왔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다시 동굴 안에 들어가 지팡이를 집어 드는데, 바로 그 순간에 동굴 문이 닫히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었고, 결국 그 동굴 안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언젠가 읽었던 동화 이야기가 생각나서 적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할아버지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과도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약간의 보물로도 충분한데 더 많은 보물을 차지하려는 우리의 욕심, 보물들로 인해서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은 버려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로 놓지 않는 우리의 욕심.
동굴에 갇혀 버린 할아버지의 모습처럼, 욕심에 갇혀서 주님과의 단절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 주신 많은 보물들, 그 소중한 보물들에 만족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내 것’을 기쁘게 나누어 줄 수 있는 넓은 마음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선물을 통해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 자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드디어 하느님 크신 은총의 선물인 ‘자비의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전 세계 모든 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비의 성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그 어떤 교황님, 그 어떤 성인(聖人)들보다도 더 자비로 똘똘 뭉쳐진 자비의 사도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십니다. 교황님께서는 발길 닿은 곳 마다 외치시는 강론의 요지는 ‘심판보다 자비’입니다.
이토록 은혜롭고 축복된 자비의 해를 맞이해서 이 한해를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이나 고민하시는 분들도 있는 것 같은데...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비의 대명사이신 복음서 안 예수님을 묵상하시면 됩니다. 그것도 어렵다면 자비가 무엇인지 온 몸과 마음으로 명명백백하게 보여주고 계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일거수일투족만 유심히 바라보시면 됩니다.
교황님께서는 발길 닿은 곳이면 어디든지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존재에게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분의 눈길은 언제나 한 방향입니다. 지금 이 순간 누가 가장 고통 받고 있는가? 오늘 이 시대 누가 가장 뜨거운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가?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에게 다가가십니다. 연민과 측은지심으로 가득 하셨던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그저 말없이 그를 안아주십니다. 조용히 그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아직도 독버섯처럼 우리 주변에 버젓이 자리 잡고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을 유심히 관찰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주로 강조하는 하느님 상은 심판과 단죄의 하느님, 공포와 경악의 대상인 하느님입니다. 그들이 틈만 나면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종말의 대홍수요 지진, 전쟁과 싹쓸이입니다.
이렇게 잔뜩 공포분위기를 연출해놓고서는 자기 종교를 믿기만 하면 백퍼센트 구원이요 만사형통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세상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완벽한 평화를 얻는다고 주장합니다. 고통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고 강조합니다. 노력 안 해도 구원 얻는다고 말합니다. 합격, 만수무강, 무병장수를 외칩니다. 가족이고 직장이고 뭐고 소용없다. 지금 남아있는 잔고를 다 챙겨서 자기 교회로 가져오라고 합니다. 백퍼센트 사이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정통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우리 인간은 근원적으로 결핍 투성이의 존재이기에 이 세상에서 겪는 갖은 고통과 실패, 우여곡절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고통에 반드시 의미가 있으니, 그 고통 잘 극복하고 이겨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성덕의 길로 나아가자고 가르칩니다.
죄인이어도 괜찮다. 우리 죄가 아무리 진홍빛 같이 붉다하여도 괜찮다. 하느님 자비는 인간의 죄를 훨씬 능가하시니 안심하라고 격려합니다. 고통뿐인 지상생활이지만 이 세상 지나가면 또 다른 세상, 풍요와 은총으로 가득한 하느님 나라가 기다리고 있으니 기도하면서 잘 견뎌내자고 용기를 불어넣습니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 인간 존재를 사랑하시는지 이 자비의 해에 꼭 깨달아야겠습니다. 죄인인 우리 각자를 향한 하느님의 연민의 마음이 얼마나 큰 것인지 반드시 체험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속적으로 베푸시는 자비를 떠나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 삶인지를 인식해야겠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은 ‘자비’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문으로 ‘宗敎’라는 말은 으뜸가는 가르침을 뜻합니다. 영어로 'Religion' 엉켜 있는 실타래를 풀어서 다시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엉켜있다면 다시 풀어서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엉켜있다면 이 또한 풀어서 평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의 핵심은 ‘비움’입니다. 내가 집착에서 벗어날 때, 참된 평화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엉킨 실타래는 무엇으로 풀 수 있을까요? 이 또한 비움입니다. 내려놓음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인간의 비움은 ‘회개’와 ‘회심’으로 나타납니다.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친하던 친구와 무슨 이유인지 다툼이 생겼고 싸움까지 이르렀습니다. 친구는 저의 목을 잡았고, 저는 친구의 급소를 잡았습니다.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놓으라고 했습니다. 서로가 잡았던 것을 놓았더니 아프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웃으면서 화해를 하였습니다. 지난 토요일, 저는 어릴 적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경찰은 차벽 설치를 하지 않았고, 살수차로 물을 뿌리지 않았습니다. 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평화롭게 자신들의 주장을 이야기 하였고, 행진을 하였습니다. 서로를 자극하지 않았기에 집회도 평화롭게 끝날 수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엉켜있는 문제들이 모두 풀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시작은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지구촌에는 좀 더 복잡하게 엉켜 있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배고픔 때문에, 전쟁 때문에 정든 고향을 떠나서 새로운 터전을 찾아가는 난민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주장을 과격한 방법으로 드러내는 테러리스트들이 있습니다. 한정된 지구의 자원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국가들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지구별의 환경을 파괴하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높은 장벽으로 길을 막는 나라도 있습니다. 엉켜있는 문제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결국 그 문제를 푸는 것도 우리들의 몫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말을 합니다. ‘엘리야’가 온 것입니다. 저는 우리 주변에서 또 다른 엘리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엉켜있는 실타래를 우리가 풀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도록 ‘페이스북’을 만들었던 저커버그 부부의 이야기를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딸을 출산한 저커버그 부부는 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저커버그 부부는 ‘모든 부모처럼 우리는 우리가 사는 오늘의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네가 자라기를 바란단다.’라며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위해 '챈 저커버그 이니셔티브'를 설립하기로 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챈 저커버그 이니셔티브의 초기 사업은 개인화된 맞춤형 학습, 질병 치료, 사람들 연결하기, 강한 공동체 만들기 등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특히 저커버그가 보유 중인 페이스북 지분 중 99%를 살아 있을 때 챈 저커버그 이니셔티브에 기부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세계 7위 부호인 저커버그는 현 시가로 따져 450억 달러(약 52조원)의 페이스북 지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저커버그 부부는 ‘맥스, 우리는 너를 사랑하고 너와 어린이들 모두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 줘야 할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 네가 우리에게 사랑과 희망과 기쁨을 주듯이 너의 삶도 사랑과 희망과 기쁨이 가득하기를 빈다. 네가 이 세상에 무엇을 가져 올지 무척 궁금하구나. 사랑을 담아서, 엄마와 아빠’라는 말로 편지를 마무리했습니다.”
요술 방망이로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비움으로, 회개한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엘리야’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엘리야가 된다면 아무리 복잡하게 엉켜있던 문제들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위대하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세례자 요한을 구약시대의 마지막 인물로 얘기합니다.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그의 임무에 있어서 위대한 인물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위대한 인물입니다. 주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11,11)고 선언하였습니다. 당대의 어느 누구 보다도 뛰어난 사람,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하느님의 사람보다 더 뛰어난 인물로 요한을 칭찬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11,11).하십니다.
이 말씀은 결국 요한은 이미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며 새로운 시대를 살기 시작하였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성취되고 완성되어 거기에 속한 사람은 은총 속에 구원된다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신약의 사람들은 아무리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구약의 어떠한 위대한 예언자보다 더 높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가 그만큼 크다는 말씀입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보다도 더 크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다 주님의 덕분입니다.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세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이미 미래를 준비한 인물이기에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기도 하지만 새 시대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11,12) 하신 것을 보면 세례자 요한 때부터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현존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외치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목이 베어졌습니다.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마귀들의 힘을 빌어 일한다고 비난 받기도 하였으며 사람들은 언덕 위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 하였으며 적대자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으나 결국은 처참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이 하느님 나라가 폭행을 당한 모습입니다.
유혹사화를 보면 사탄은 모든 것을 노립니다. 빵으로, 명예로,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정치적인 유혹으로 적대자들의 뒤에 숨어서 하느님의 통치권을 빼앗으려 하며 그 자리에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어둠의 세력은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함을 우습게 여기고 성을 상품화하며 물질만능주의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세상입니다.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거짓을 합리화하는 권력에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재물 때문에, 명예 때문에 불의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술과 도박 때문에 패가망신을 하고 권력에 집착하다가 제 명대로 못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를 방해하는 세력의 유혹에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폭력의 힘이 크다 하더라도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분명하게 대답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15,5)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늘 나라 -오늘 지금 여기-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하늘 나라’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예수님은 물론 우리의 영원한 꿈이 하늘 나라입니다.하늘 나라의 꿈이 우리 삶의 꼴을 잡아주고 참 나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하늘 나라의 꿈을 잃으면 나도 잃습니다.
하늘 나라 곧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은 그 입구에 서 있습니다. 하여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요한 사이에는 일종의 단절, 근원적인 새로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바로 예수님과 함께 시작된 하늘 나라를 사는 제자들은 물론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큰 인물이라 하지만 이미 하늘 나라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보다 더 크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특권적 위치를 가리킵니다. 세례자 요한은 믿는 우리처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통한 자유와 풍성한 생명을 나누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 복음 말씀을 확증합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 하고 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이 그 희생자들입니다. 하늘 나라의 적대 세력들은 오늘도 여전히 건재합니다. 하여 하늘 나라를 지키기 위한 끊임없는 순교자들입니다. 하늘 나라의 목전에서 주님의 길을 닦은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 장엄한 아름다움입니다. 하여 우리는 아침성무일도 때마다 즈카르야 찬가를 부르며 요한을 기억합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루카1,76).
특히 지금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가 하늘 나라입니다. 저절로 하늘 나라가 아니라 세례자 요한과 함께 기쁘게 주님의 길을 준비할 때 비로소 실현되는 하늘 나라입니다. 희망과 기쁨의 하늘 나라입니다. 결코 언젠가의 하늘 나라가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꽃자리입니다. 그날이 오늘이요 오늘이 영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못 삽니다. 하느님을 만나야 할 자리는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바로 제1독서 이사야를 통한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는 대림시기의 하늘 나라입니다. 엄혹한 바빌론 유배 환경 중에도 이런 꿈이 있어 살아남은 예언자들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런 하늘 나라의 꿈이, 희망이, 비전이 오늘의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의 원천입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 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나는 벌거숭이 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
그대로 오늘의 인생광야에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격려와 축복의 말씀입니다. 두려워서 사람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우리의 원초적 정서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끊임없이 우리를 격려하시고 위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함께 할 때 사라지는 두려움과 불안이요 서서히 열리는 하늘 나라입니다. 몇일 전 일출日出을 보며 써놓은 ‘하느님 맞이’라는 시입니다.
-해뜨는 시간은
하느님 잠깨어 일어나는 시간
아침 일찍 일어나
떠오르는 태양을
잠깨어 일어나는 하느님을 맞는다
자, 새롭게 시작된 하늘 나라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선물인 하늘 나라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온갖 역경 중에도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리어 구원이 피어나게 하여라.”(이사45,8). 아멘.
진리에 투신하며 준비하는 주님의 길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대림시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가만히 지내는 시기가 아닙니다. 이 시기는 치열한 삶의 현실과 하느님의 진리 사이의 긴장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시기입니다. 이 상황을 오늘 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11,12)
오늘 다시 ‘세례자 요한의 외침’이 갖가지 폭력과 불의가 세력을 더해가는 우리네 삶의 한복판에 울려 퍼집니다. 그는 주님의 길을 준비하고, 회개하여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라고 외칩니다. 그것은 곧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말고 하느님 안에서 인간다움의 길을 찾아가라는 촉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구세사적 위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곧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11,11) 요한이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찬사를 받은 것은 당대에 대단한 인기를 누렸음에도 메시아 예수께서 나타나시자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자신을 낮추며 주님의 길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맞아들이기에 앞서 자기 분수를 알아차리는 것이 곧 회개의 첫 걸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주님의 길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보다도 더 크다고 하십니다(11,11).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 이 시대에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작은 사람 하나가 요한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실현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폭행을 당하고 있는 하늘나라를 위해 투신하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하시는 것입니다(11,12).
세례자 요한은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회개를 촉구했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에 따라 불의를 고발함으로써 폭력의 희생자가 됩니다. 그는 헤로데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의 부당한 혼인을 고발하여 미움을 사고 결국 무고한 죽임을 당합니다. 그는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미리 보여주는 전인격적인 투신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도 폭행당하고 있습니다. 권력에 의한 탄압과 인간존엄성의 훼손, 자본의 독점과 편중에 따른 심각한 빈부격차, 언론의 왜곡 보도에 의한 진실의 호도, 정보의 독점에 따른 소외의 심화, 자동화에 따른 일자리의 상실, 민족이나 종교간의 전쟁, 인신매매, 생태 파괴 등 이루 다 입에 담을 수 없는 폭행들로 하느님 나라는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오고,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준비하고 진리를 위해 투신하고 있는지 짚어봐야겠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헤로데나 십자가의 길의 백성들처럼 우리 사회 안에서 불의와 거짓, 미움과 불신, 차별과 배척을 통해 하늘나라를 폭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아가 진리에 투신하며 주님의 길을 준비함으로써 폭행당하는 하늘나라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 요한을 본받는 회개의 대림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공범자
-김홍석 신부님-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수많은 예언자들의 박해와 죽음에 분노를 느낍니다.
어떻게 저렇게 잔인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저렇게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까?
어쩜 저렇게 하느님의 뜻을 저버릴 수 있을까? 구약 시대 전체를 통해 보여지는 하느님의 짝사랑과 인간의 배신에서 분노하고 또 분노합니다.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었던 인류의 원조, 동생을 돌로 쳐 죽였던 카인, 노아의 방주에 오르지 못했던 사람들, 소돔과 고모라의 어리석은 사람들, 우상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 신약 시대를 넘어오며 예수님을 만나 좀 달라질 것 같은 사람들이 율법을 들먹이며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모습을 보고 역시 분노합니다. 유다의 배신, 도망치는 요한,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분노합니다. 그리고 눈물도 흘리죠. 그리고 성경책을 덮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우리는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하늘 나라를 폭행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거리에 널린 수많은 선악과를 따먹고 형제를 말로 쳐 죽이고 흥청망청 살아가며 점집을 들락거리죠. 그거 아세요? 그리고 놀라지 마세요!
예수님을 배신하고 모른 척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 예수님을 못 박는 우리들, 결국 우리는 모두 하늘 나라를 폭행하는 공범자들입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이사 41,13)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사는 게 때론 두렵고 힘듭니다.
사는 게 뭔지?
왜 살아야 하는지 도대체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살 바에야 그냥 다 팽게치고 훌훌 떠나고 싶습니다.
아무도 나를 도와 줄 이도 없고 살아갈 날이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친히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축하합니다.
그분이 도와주시겠답니다.
직접 혹은 누군가를 통해서...
그게 언제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분은 우리처럼 헛말이나 지키지도 못할 언약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니까요.
오늘 그분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봅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그리 되길 축원합니다.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사람
-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는 이 말씀이 "나는 아니다." 하고 싶지만 바로 내가 폭행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거처하는 이는 바로 하느님이시고 하늘나라는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을 거스르는 사람, 하느님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 하느님을 잊은 사람뿐 아니라 그 나라의 본질인 자유, 평화, 기쁨을 방해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폭행자입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귀를 세우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하늘나라를 폭행한 것을 깊이 뉘우쳐야 합니다.
하느님은 내 존재의 근본이고 나를 무에서 존재하게 하신 분인데 근본을 망각하고 하느님께 찬미 감사하는 삶을 살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손상을 입히는 사람입니다.
또한, 하늘나라의 가치인 자유를 거스르며 부자유스럽게 살고 다른 이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람이나, 평화를 전쟁으로 몰아가는 사람이나, 기쁨을 빼앗고 슬픔을 주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박해자입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보다 부자유스럽고, 남의 것을 갈취하려는 사람은 자기 것을 나누는 사람보다 평화스럽지 못하고, 독재적이고 독단적으로 상반된 삶을 사는 사람은 협력적이고 민주적 삶을 사는 사람보다 기쁨이 없는 사람입니다.
권력을 차지하려고 다른 이를 억누르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 남의 것을 거짓과 사기로 빼앗아 자기 주머니만 챙기는 사람, 다른 사람과 소통을 끊고 등을 돌리고 원수같이 살려는 사람, 용서와 자비심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 행동으로 하늘나라를 폭행하고 빼앗으려는 사람입니다.
루카 복음 1장 46-55.에 "권세 있는 자를 내치시고, 부요한 자들은 빈손으로 떠나보내고, 교만한 자를 흩으시며" 당신은 권능을 떨치시며 이런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자를 내치려고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저는 오늘도 하늘나라에 폭력을 가하려는 사람 중에 속하지 않고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안착하고 이루어지게 하는 사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은
언제나 서로에게 있는
하늘 나라마저도
빼앗으려고 합니다.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뿐입니다.
마음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또한
예수님의 사랑뿐입니다.
우리가 행했던
수많은 폭력을
반성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하늘 나라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거짓된 폭력을 멈추고
사랑을 향해야 합니다.
창조는 사랑을
드러내지만
폭력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낼 뿐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순수한 발자국은
사랑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늘 보여줍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관계의 은총에
충실해지는
대림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관계를 파괴하고
파기시키는 것은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만이
폭력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늘 나라의 기쁨은
세례자 요한처럼
존중과 열정의 관계에서
다시 풍요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말을 함부로 하기에 수도생활에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던 어떤 수도회의 수도원장은 수도자들에게 거룩한 수도생활을 위한다는 이유로 말을 하지 못하게 했지요. 하지만 영원히 말을 하지 못하게는 할 수 없기에, 2년에 한 번 그것도 딱 두 마디의 말만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수도원에 입회한 어떤 수도자가 처음으로 2년으로 채우고 두 마디의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는 원장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침대, 딱딱하다.”
그리고 수도자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침묵을 지켰습니다. 또 다시 2년의 세월이 흘렀고 두 마디의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수도자는 원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식사, 맛없다.”
다시 2년의 시간이 지난 뒤, 이 수도자는 자신의 모든 짐을 꾸려 들고 원장 앞에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나, 간다.”
수도원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그의 등에 대고 수도원장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네. 2년간 참았다가 할 수 있는 귀중한 두 마디의 말을 그대는 모두 불평과 불만을 말하는데 써 버리지 않았나? 그러니 견딜 수가 없지.”
내게 단 두 마디의 말밖에 할 수 없다면 과연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긍정의 말입니까? 부정의 말입니까? 곰곰이 묵상을 해보면 나의 말 중에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말이 많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말들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아픔과 상처도 많이 주었고, 또 저 스스로 깨닫지 못한채 주었던 아픔과 상처도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주님께는 어떤가요? 죄로 물든 나의 생각과 행동으로 인해 주님께도 커다란 아픔과 상처를 전달하고 있는 우리들인 것입니다. 죄라는 흉측한 무기로 주님을 끊임없이 폭행하고 있는 우리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주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늘 나라가 이미 왔지요. 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하지요. 세례자 요한의 경고도 또 주님의 말씀도 따르지 않기에 완성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완성을 방해하는 온갖 죄악으로 인해 폭행을 당해 이리 부서지고, 저리 부서지고 있습니다.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늘 나라. 그런데 그 나라는 계속해서 완성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불충함,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모습, 또 한 가지는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을 방해했던 종교지도자들처럼 다른 이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이기심과 욕심으로 하늘 나라는 폭행당하고 있습니다.
내 삶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갖은 폭행을 떠올립니다. 말과 행동, 그리고 마음으로 짓고 있는 죄 등등.... 그러한 폭행들이 사라져 갈 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는 완성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 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줍니다.(1베드 4,8)
abcdefghijklmnopqrstuvwxyz
다음은 1960년에 ‘내셔널 라이브러리 위크’라는 잡지에 실린 독특한 광고입니다.
“‘abcdefghijklmnopqrstuvwxyz’ 공공 도서관에서는 이 글자들을 배열해서 여러분을 울리고, 웃기고, 사랑하게 하고, 증오하게 하고, 호기심을 갖게 하고, 고민하게 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이 스물여섯 개의 작은 기호는 놀라운 일을 합니다. 셰익스피어의 손에서 그것들은 ‘햄릿’이 되었습니다. 마크 트웨인은 그것들을 ‘허클베리핀의 모험’으로 엮었습니다. 제임스 조이스는 그것들을 ‘율리시스’로 짜 넣었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은 그것들을 ‘로마제국쇠망사’로 만들었습니다. 존 밀턴은 그것들을 ‘실락원’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글자. 이 글자들의 배열을 통해서 사람에게 큰 힘을 주기도 하고, 아픔을 줄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 글자들의 배열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글자들의 배열을 하고 있나요? 최악의 글자 배열이 아닌, 최고의 글자 배열을 할 수 있는 오늘을 만들어 보세요.
사람들은 세상 안에서만 서로 비교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1살, 100살, 1000살):영원무궁은 결국 값은 유한:무한입니다. (밉다, 곱다, 절세미인):영원세상도 결국 그 값은 유한:무한이고요, (적다, 많다, 셈불가):영원무량도 결국은 유한:무한일 수밖에요.
그게 바로 이 세상과 영원세상, 육과 영의 관계 공식이라 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 안에서만 서로 비교하지 영원과는 비교 안 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위해 목숨 바친 큰 예언자를 영원세상과 비교했네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오 11,11)”
살면서 두려움이나 걱정이 생겨난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린 여자 아이가 슬픈 표정으로 말합니다.
“아빠가 그러는데 돼지를 키우는 건 돼지고기를 먹기 위해서래.”
이젠 울먹이며 말합니다.
“닭을 키우는 건 닭고기를 먹기 위해서래.”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며 말합니다.
“그럼 아빠가 날 키우는 건.... ”
누군가 SNS를 통하여 보내온 이야기입니다. 말도 안 돼는 이야기지만 ‘아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부모님을 의심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일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하시니 농담처럼 생각하더라도 진짜 섭섭한 일이 벌어지면 ‘내가 진짜 주워온 아이 맞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크레파스를 꼭 사 오라고 했는데 그 가격이 200원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200원을 달라고 매우 졸랐지만 어머니는 매몰차게 빈손으로 보내버리셨습니다. 학교에서 남의 것을 얻어 쓰며 간신히 하루를 버틴 후 집으로 돌아오니 엄청난 음식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그 날이 할머니 기일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차리려면 족히 몇 만 원은 들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에게는 200원을 안 주어 학교에서 혼나게 만들고 이미 돌아가셔 음식을 먹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신 분에게는 그런 음식상을 차려주는 것을 보니, ‘어머니가 아닌 것이 확실하구나’라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슬펐는지요. 세상에 결국 나밖에 없고 어떤 다리인지는 모르나 진짜 어머니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리가 어디냐고 물어보았는데 어머니는 웃으실 뿐 가르쳐주지 않으셨습니다.
결국은 이분이 참으로 나의 어머니인지를 더 시험해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이 나에게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해서 과연 어머니가 맞는지 아닌지 결정을 내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나에게 주시는 모든 사랑과 희생은 어머니가 확실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했습니다. 그때 마음이 얼마나 평화로웠는지요. 어머니가 당신은 배고파도 먹지 않고 가져다주시던 참으로 받았던 빵과 우유, 삼겹살을 해 놓으시고 한 첨도 못 드셨던 것들, 또 손이 다 부르트도록 빨래를 하시던 모습 등은 저의 마음을 평화롭게 했습니다. 어머니가 아니면 누구도 그런 희생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을 아이들도 다 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나의 하느님이시고 아버지가 돼 주심을 믿는다면 더 이상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분이 참 아버지시라는 것을 믿지 못하기에 두렵고 불안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는 그분을 참으로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나에게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구멍이 뚫린 손을 내밀이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시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분께서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증거를 보여주시기에 그 죽음과 부활을 믿으면 자연적으로 우리 안에 평화가 찾아와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이 일시에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에게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두려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 자체가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걱정과 두려움은 부모님일 잃은 아이들이 험난한 세상 앞에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이사야는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시니 절대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다르게 말하면, 만약 두려워한다면 주님께서 우리 손을 잡아주고 계심을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두려움은 삶을 망칩니다. 허우적대기 때문입니다. 물에 빠졌을 때 그 사람을 구하려면 그의 허우적대는 손에 잡히지 말아야합니다. 그 두려움의 힘이 너무나 커서 구하러 간 사람까지도 함께 끌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물 위를 걷다가 두려움 때문에 물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자신을 걷게 해 주시는 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다면 두려움에 걸려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물에 빠졌더라도 그분을 바라보면 동시에 그분이 내미시는 손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왼손도 아니고 오른손을 붙잡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언제나 손을 내밀고 또 손을 잡아주시는 분이 있는데 어떻게 그 손을 보면서 계속 두려움에 떨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 어떤 것에도 두려워하지 말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걱정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부모로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할 도리는 걱정근심을 내려놓고 그분을 온전히 믿고 손을 잡는 것뿐입니다.
하늘을 차지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훌륭한 사람은 누구인가?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의 몫을 다하는 사람, 그리고는 생색내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보는 사람입니다. 구약시대의 마지막 인물로 얘기하는 세례자 요한이 그런 인물입니다.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그의 임무에 있어서 위대한 인물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위대한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11,11)고 선언하였습니다. 당대의 어느 누구 보다도 뛰어난 사람,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하느님의 사람보다 더 뛰어난 인물로 요한을 칭찬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 나라에 있는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11,11).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요한은 이미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며 새로운 시대를 살기 시작하였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성취되고 완성되어 거기에 속한 사람은 은총 속에 구원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신약의 사람들은 아무리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구약의 어떠한 위대한 예언자보다 더 높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가 그만큼 크다는 말씀입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보다도 더 크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다 주님의 덕분입니다.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세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이미 미래를 준비한 인물이기에 구약의 마지막 인 물이기도 하지만 새 시대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11,12).하신 것을 보면 세례자 요한 때부터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현존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언의 시대는 끝이 나고 완성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외치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목이 베어졌습니다.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마귀들의 힘을 빌어 일한다고 비난 받기도 하였으며 사람들은 언덕 위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 하였으며 적대자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으나 결국은 처참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이 하느님 나라가 폭행을 당한 모습입니다.
유혹사화를 보면 사탄은 모든 것을 노립니다. 빵으로, 명예로,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정치적인 유혹으로 적대자들의 뒤에 숨어서 하느님의 통치권을 빼앗으려 하며 그 자리에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어둠의 세력은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함을 우습게 여기고 성을 상품화하며 물질만능주의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세상입니다.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거짓을 합리화하는 권력에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재물 때문에, 명예 때문에 불의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권력의 힘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통제하며 기득권 유지를 위해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술과 도박 때문에 패가망신을 하고 권력에 집착하다가 제 명대로 못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를 방해하는 세력의 유혹에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선택하는데 주저함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폭력의 힘이 크다 하더라도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분명하게 대답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지켜야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예수님께서“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15,5).고 하셨습니다. 사랑합니다.
긍정과 격려의 하느님 -믿는대로 되리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긍정과 격려의 하느님이십니다. 질책과 꾸중보다는 위로와 격려, 비관과 향수(Nostalgia)보다는 낙관과 비전의 하느님이십니다.
얼마 전(12.5일자 복음) 뒤늦게야 강론에 삽입했던 구절이 생각납니다.
"너희가 믿는대로 되어라“(마태9,29ㄴ).
읽는 순간 '믿는대로 되리라.'라는 말마디가 생각나 덧 붙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대로 됩니다.
얼마나 긍정적인지요. 믿음이 있을 때는 긍정적 낙관적 삶이지만 믿음이 없을 때는 부정적 비관적 삶으로 변질됩니다.
어제는 잔뜩 흐린 날씨에 간혹 진눈개비 내리는 어둡고 무거운 날이었습니다. 성탄 츄리 판매하는 일터에 들렸다가 밝은 얼굴로 손님도 없는 빈 자리를 지키는 수도형제가 고마웠습니다.
'아, 기다림의 가난, 기다림의 기쁨이구나. 비움의 가난 자리가 기쁨으로 충만해 지는 기다림의 대림시기이구나. 무엇을 잘 하는 것(to do)도 좋지만 그냥 제자리에 존재하는 것(to be)만으로도 만족하고 감사한 일이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도 자유로워졌습니다.
예수님과 예언자들은 모두 하느님을 닮아 이렇게 평생 긍정과 격려의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여기 수도형제가 대화중 무심코 한 말도 저에겐 귀한 교훈이었습니다.
"나이든 선배들이 짜증 내거나 화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선배들이 자주 짜증내고 화내면 정말 싫어요. 너그럽게 웃으며 웬만한 일에도 '괜찮아!' 격려해 주셨으면 정말 좋고 힘이 나겠어요.“
듣는 순간 '웬만하면, 아니 앞으로는 절대로, 무조건 짜증내거나 화내는 일은 없어야 겠다' 다짐했습니다. '나이들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우스개 말도 생각났습니다.
믿는 대로 됩니다.
좀 부족하고 잘 못 됐어도 '괜찮다' '그럴수 있지!' '그게 현실이지!' 생각하며 너그럽게 받아들임이 백배 좋습니다. 여덟 잘하고, 둘 잘못하면 그냥 둘은 덮어두고 잘하는 면을 집중적으로 부각하고 격려함이 또 백백 낫습니다. 둘을 지적하고 책하면 자존감에 상처만 줄 뿐 잘 교정되지도 않고 관계만 불편해 집니다. 잘하는 여덟가지만 손상을 입고 마음도 위축됩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장점과 단점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부족함과 한계를 지닌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분도 성인도 형제들의 약점을 지적하여 고치려하지 말고,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라' 합니다. 방관이나 무관심이 아니라, 때가 될 때까지 그냥 기다리는, 내버려 두는 무관심의 관심입니다. 이 또한 긍정적 사랑의 발로이자 지혜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11,11).
바로 이것이 예수님은 물론 당시 제자들, 그리고 우리의 건강한 확신이자 자부심입니다. 얼마나 긍정적이고 고무적인 격려의 말씀인지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나라를 살고 있는 너희는 아무리 작더라도 그분 세례자 요한 보다 크다'는 속내가 함축된 주님의 대담한, 자존감을 드높여 주는 말씀입니다. 전혀 기죽거나 위축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귀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11,15).
말마디 안에 함축된 주님의 깊은 뜻을 마음의 귀로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은 또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이사41,13).
우리의 두려움과 불안을 불식시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늘 나의 손을 붙잡아 주고 계신 주님이신데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더불어 생각나는 시편의 고백입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하느님의 빛나는 비전의 희망 앞에 저절로 사라지는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주님은 과거를 향한 향수(Nostalgia)가 아닌 미래의 빛나는 약속된 비전으로 우리의 눈길을, 발길을 돌리게 하십니다.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이사41,18).
긍정과 비전의 하느님이자 이런 하느님을 닮은 이사야 예언자요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믿는대로, 비전대로 됩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은 긍정과 격려, 비전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내 사람이다." (이사43,1참조).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비 신학생들에 대한 신학교 입학 면접을 하였습니다. 학생들의 가정환경, 가치관, 건강, 사제직에 대한 신념을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성적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생들을 선발하는 권한은 신학교에 있기 때문입니다. 32년 전에 저는 어떻게 신학교에 입학을 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습니다. 당시에는 교구 성소국이 체계화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학교에 가서 입학원서를 받아다가, 고등학교에 가서 작성을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기억에 간단한 교리에 대한 시험을 본 것 같고, 산업재해병원(지금의 평화방송 건물)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성소국에서 신학생 입학에 대한 서류 전형과 건강검진을 하고 있습니다. 교구장님의 추천을 받아서 신학교에 입학원서를 내면 신학교에서 심사를 하고, 합격자를 발표하는 과정이 이루어집니다.
고3학생과 일반학생들 합해서 60여명이 면접을 보았고, 신학교 지원은 서울신학교와 인천신학교를 포함해서 30여명이 하게 됩니다. 지원한 학생들 모두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2015년도에 신학생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제성소가 거의 없는 유럽과 북미 교회를 보았습니다. 사제들이 고령화 되어서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불과 50여년 전만해도 유럽과 북미에는 사제성소가 많았다고 합니다. 1000여명의 예비 신학생들이 있는 한국교회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예비 신학생들의 모임을 더욱 충실히 갖으려고 합니다.
‘도토리 키 재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잘나고,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멋진 외모를 가진 사람, 공부를 잘 하는 사람, 부실기업을 다시 회생 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다 고만고만한 능력과 재능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놀라운 능력을 가진 동물들이 많습니다. 덩치가 큰 코끼리나 코뿔소, 사나운 사자나 호랑이, 날쌘 표범과 치타, 하늘을 나는 독수리들이 있습니다. 그런 동물들도 사람들이 보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생각을 하고, 도구를 사용하여 그런 동물들보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에서는 세상에서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었어도, 아무리 특출한 능력을 지녔어도, 아무리 멋진 외모를 지녔어도 그것이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저의 외모와 능력에 대해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보다 키가 좀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참을성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힘도 더 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지금 저의 모습으로 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 저의 모습은 다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저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 안에서 살면서, 천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우리는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잣대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적인 모습, 숫자, 성공 등으로 판단을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판단해야 하는 기준은 세상의 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봉사했는지, 얼마나 겸손했는지, 얼마나 나누었는지를 가지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폭행을 당하고 있는 하늘나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고 하신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11,11) 이는 요한이 작음을 말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늘나라’ 자체로 오셨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와 계신 하늘나라이시다. 이렇듯 인간 세상에서 제아무리 탁월하고 위대하다 하여도 이미 와 계신 예수님과는 비할 수가 없다.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의 터가 바로 이미 와 계신 하늘나라이다. 따라서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이야말로 참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우리는 이 지름길을 바로 알아차리고 제대로 가고 있는가?
예수님께 서는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11,12)고 말씀하신다.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에 대한 성서학자들의 해석은 다양하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와 선을 선포하는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백성들로 하여금 하늘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막고, 이미 체험한 하늘나라를 빼앗아가려 한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하늘나라는 모두에게 거저 주어지는 사랑이요 선이며 생명이요 자유이다. 하느님의 본성이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물질적 가치와 권력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걸림돌이 될 뿐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걸림돌은 자신이다. 자기 자신과의 소외, 자신에 대한 혐오 등은 마음의 어두움을 가져온다. 이 어두움은 삶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친다. 자아분열로 인한 영혼의 어둠 상태는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인 내 안의 하늘나라가 폭행당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나 자신이 탐욕에 사로잡혀 다른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가로막고 빼앗지는 않는지 살펴볼 일이다. 다른 이들 안에 드러나는 은총과 선을 못마땅해 하고 시기하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누구든지 주님께서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권고 8,3). 대인관계에서 자신도 모르게 시기하고 못마땅해 하는 바로 이런 마음의 움직임과 그로 인한 행동이 바로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것이 된다. 언제든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다른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좋음’, ‘선행’, ‘봉사’, ‘지혜로운 태도’ 등을 보며 함께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다.
공동체 또한 걸림돌이 되어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터가 될 수 있다. 우리 각자가 공동체 안에 이미 와 계신 예수님을 삶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뒷전으로 팽개쳐버릴 때, 하늘나라는 폭행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공동체가 성령 안에서 서로 일치하고 희생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우리 힘으로 추구하기보다는 공동체 안에 이미 현존하는 하늘나라를 보고,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고 있는 하느님의 선과 지혜와 자비를 한마음으로 키워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 가운데서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하늘나라에 대한 폭행의 움직임은 겨울 아침의 차가운 공기를 뚫고 매섭게 도전해온다. 우리 모두 끈질기고 강렬한 도전 앞에서 투명한 시선으로 ‘하늘나라를 살기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 열고 듣고 곰곰히 되새기며, 온 마음과 정성과 혼을 다해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바라보는 만큼 그분을 닮게 되고 이미 와 있는 하늘나라의 신비가 꿈이 아닌 생생한 삶의 체험이요 선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이사 41,14) 하시는 주님께 의탁하며 불의와 무관심과 시기 질투, 탐욕의 끈을 내려놓음으로써 그 좋은 하늘나라를 기쁨 중에 받아들이자!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이 함께
산다는 것보다
더 큰 신비는 없습니다.
강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모두 저마다 돌볾이 필요한
하늘 나라의 인격들입니다.
돌보지 않고서는
자랄 수 없는
하늘 나라의 소중한
인격체들입니다.
하늘 나라를 갈망하지만
또한 하늘 나라를 빼앗는
우리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오늘 복음은 일깨워 줍니다.
사랑과 폭력이라는
양면성을 지닌
우리들의 모습을
반성해 봅니다.
폭력은 일시적이지만
사랑은 영원합니다.
하늘 나라와 분리된
삶을 살아가기에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들 삶으로
들어오십니다.
사랑의 생명을 위해
아파하는 새싹처럼
아파하는 하늘 나라를
만납니다.
하늘 나라는
아픔가운데서도
멈추는 법 없이
생명을 탄생시키며
나아갑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의 예언은
예나 지금이나 폭행과
폭력을 멈추는 사랑에 있습니다.
우리의 불안과 공포가
이제는 하늘 나라의
탄생을 기다리는
사랑의 기다림으로
변화되길 기도드립니다.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폭력을 배우는 시간이 아닌
사랑을 배우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삶을 살지않는
예언은 거짓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모든 마지막 예언과 율법은
우리의 삶으로 드러내야 할
우리의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으로만 생각하면 불평을 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을 청하라는 말씀을 단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었지요. 예수님 스스로도 돈 벌려고 노력을 하시지도 않았고, 또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시도하신 적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낮은 자리로 가시면서 오직 사랑만을 보여주셨습니다. 며칠 전에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일컬어서 ‘사오정’이라고 하지요. 이 사오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받아들이는 마음
-강헌철 신부님-
본당 신부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첫자리에 놓이는 것이 강론이다. 날마다 신자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풀어 설명하고 생활 안에서 묵상거리를 주는 것이 부담이 될 때가 많다. 나도 보좌신부 시절에 주일 강론 때문에 밤을 지새우기도 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신부님, 오늘 강론 참 좋았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신자들이“어떤 신부님 강론은 이래서 좋고, 어떤 신부님 강론은 저래서 재미가 없다.”?는 말을 들을 때면 내 이야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왠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함을 느낀다.
똑같은 복음 말씀을 듣고 똑같은 강론을 들어도 마음에 와 닿는 것이 다른 것은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그러나 자기에게 전해지는 복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말하는 기술에 따라 좋고 나쁜 것으로 판단해 버린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부모는 아이의 말을 잘 알아듣는다. 그 이유는 아이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일지 세심하게 살피고 들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도 그렇다. 무심코 들으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될 수 있지만 조금만 세심하게 들으려 하면 나에게 살아 있는 말씀이 된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적극적 응답을 바라시는 것이 아닐까?? ‘받아들이고자 한다면’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 말씀을 통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기 때문이다.
화투놀이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비풍초’라고 말을 하면 자동적으로 ‘*팔삼’을 외친다고 합니다. 아마 화투놀이를 잘 아시는 분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화투놀이를 전혀 알지 못하시는 분들은 어떨까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겠지요. 다른 행동을 하다가도 ‘비풍초’라는 말만 들어도 입밖으로 ‘*팔삼’을 외치니 신기할 수밖에 없지요. 아무튼 의도하지 않아도 습관적으로 나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습관의 중요성을 떠올려 보게 됩니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놀다보면 욕을 많이 하는 친구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있어 그 친구들의 욕하는 모습은 마치 텔레비전에 나오는 어른들 같았고, 영화배우처럼 괜히 멋있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더불어서 친구들 사이에서도 왠지 힘이 있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저희 부모님은 제 입에서 욕이나 부정적인 말이 나오면 크게 혼을 내셨기 때문에, 욕을 해 보고 싶어도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혼잣말로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욕을 말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즉, 욕을 말하려고 하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불쑥불쑥 욕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때 습관이 무섭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쁜 습관도 있지만, 반대로 좋은 습관도 있다는 것이지요. 즉,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내 몸에 좋은 습관이 배어서 남들에게 좋은 행동들을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으며, 하느님과 함께 기쁜 생활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을 떠올려 봅니다. 그는 예수님을 잘 준비하기 위해서 나쁜 습관들을 모두 다 끊어버리지요. 그래서 광야로 들어갔고 그 안에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주님 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사람들을 준비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이 땅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하느님을 만날 수가 있었으며, 그분에게 물로 세례를 베푸는 영광까지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지금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준비는 과연 어떠한가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끊어버리고 있는 나쁜 습관은 무엇이며, 내 몸에 익히고 있는 좋은 습관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요?
좋은 습관들을 많이 간직하고 나쁜 습관을 과감하게 버려야 주님을 잘 준비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쁜 습관들을 없앤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포기하는 경우도 꽤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본인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여기에 주님께서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의지에 도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좋은 습관들이 바로 나의 습관이 되는 오늘을 만들어봅시다. 그 모습이 주님을 가장 잘 준비하는 것이기에…….
삶은 짐이 아니다. 끝없이 과거만을 생각하거나 미래를 위한 계획에만 몰두함으로써, 그리고 현재를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삶을 짐으로 만들어 버린다.(바바하라다스)
오뚝이 선물(‘좋은 글’ 중에서)
무수한 실패를 이겨 내고 음식 체인점을 성공시킨 사람이 있었습니다. 음식점을 수없이 경영하여 실패했던 그였지만 결국 사람들이 체인점을 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에게는 장사를 하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장사의 성공 비결을 듣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그는 아무런 말없이 포장지에 싸인 선물 하나만을 내밀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그 선물을 풀어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의 비서는 도대체 그 선물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사장님, 포장지 안의 그 선물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사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응, 그 안에 든 건 오뚝이야.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넘어지든 다시 일어서는 장난감이지. 나도 남들보다 더 노력하고, 손님에게 정성을 다 하는 등 별 방법을 다 동원해도 실패만 반복했지. 그래서 ‘난 안 돼'라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순간, 아내가 나에게 오뚝이를 선물하더군.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었지. ’한 번만 더 해보자'라고 말이야. 그랬더니 성공하더군."
사장은 마지막 말을 비서에게 던졌고 비서는 싱긋이 웃었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넘어지는 일은 수없이 많네. 그때 다시 일어서는 사람에게 주어진 몫이 성공이라네. 자네도 가슴속에 항상 오뚝이를 세워 두게."
너무나 쉬운 하늘나라 입국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두고 하신 말씀은 꽤나 아리송합니다. 우선은 먼저 세례자 요한을 확 띄웁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극구 칭찬하십니다. 인류 역사상 세례자 요한은 가장 크고 위대한 인물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그 말에 이어 바로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내던지십니다. 그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들었을 때 엄청 기분 상하는 말씀입니다. 완전히 깔아뭉개는 듯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오늘 예수님의 이 상반된 말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위 말씀은 절대로 세례자 요한을 격하시키는 말씀이 아닙니다.세례자 요한을 무시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늘나라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세례자 요한은 한 밤중에 등불을 켜든 시각 장애우와도 같았습니다. 자신이 든 등불로 지나가는 행인들의 앞길을 밝혀주었지만,정작 자신은 빛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 시대를 정리하는 구약의 마지막 대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쉽게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나라의 실체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에 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명확히 볼 수 있었던 신약의 백성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파스카의 신비를 체험하는 오늘의 우리 역시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후 한 가지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동안 하느님 나라는 그야말로 멀고도 먼 곳이었습니다. 도저히 다가서기가 힘든 곳이었습니다. 입국하기가 너무나 어렵고 까마득한 미지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도래 이후 하늘나라는 얼마나 우리와 가까워졌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쉬운 하늘나라 입국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늘나라 입국이 얼마나 쉬워졌는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건 아니다’며 코웃음을 쳤습니다.그리고는 그때부터 백성들과 하늘나라 사이를 가로막는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입국을 위한 방법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수천가지 율법에 대한 철저한 준수가 아닙니다. 엄청난 요구를 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단 두 가지입니다.
이 땅의 오신 예수님을 구세주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분께서 제시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
이 간단한 방법을 통해 이 지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 하느님 나라를 사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
-정찬호-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전령인 엘리야로 선포하시면서,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분명 하느님의 의義를 선포할 수는 있었으나,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를 알지는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 사건’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오로지 십자가 안에서만 하느님의 충만한 계시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학자들은 세례자 요한을 ‘등불을 켜는 장님’에 비유하곤 합니다. 행인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등불을 켜지만, 정작 자신은 그 빛을 향유하지 못하는 장님이라는 것이지요. 이 비유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함’을 잘 설명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사명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1,7)고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이러한 신앙고백이 또 한 번 드러나는 곳은 요한 복음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교회가 밤이 가장 긴 때인 동지 즈음의 12월25일 예수 성탄 대축일에 맞추어, 밤이 가장 짧은 때인 하지 즈음의 6월24일에 세례자 요한 탄생을 경축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저는 주님 손안의 작은 몽당연필입니다”라는 데레사 수녀님의 고백은 바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던 그 목소리였던 셈입니다.
큰 사람과 작은 사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기에 요한이 큰 사람일까요?
어떤 사람이 큰 사람인가요?
제 생각에 목전의 이익만을 보는 사람은 큰 사람이 아닙니다.
비난을 들을 수 없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안 될 때 조급해 하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고통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질 줄 모르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묵상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과 요한의 관계를 보며 남을 작게 만드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요한은 주님을 신발 끈을 풀어드릴 수조차 없는 큰 분으로 받들고 그런 요한을 주님은 사람 중의 큰 사람이라고 추켜세우십니다.
소인배는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도토리 키 재기 하며 서로를 깎아내리고 남을 작게 만들며 자기가 커지려 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작게 만드는 사람은 큰 사람이 아니고 낮출 줄 모르는 사람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요한의 관계를 보면 이런 것을 또 볼 수 있습니다.
인물이 인물을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큰 사람이 큰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이지요.
요한은 주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즉시 그분이 오시기로 된 분임을 알아봅니다.
하늘에서 땅만큼 낮추어 오신 크신 분을 땅에서 하늘 님으로 알아보는 요한은 진정 큰 사람입니다.
에로스에서 아가페로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번은 수업을 듣는 도중 교수 신부님과 자그마한 의견충돌이 있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인간은 끊임없이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만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것처럼, 인간도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어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만족하지 못하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른이 되기를 원하고 어른들은 다시 젊을 때로 돌아갔으면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있었으면 좋겠고 돈이 있는 사람들은 정치를 하고 싶어 합니다. 한 가지가 채워지면 순간적인 만족을 갖지만 또 다른 행복을 찾게 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당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말과 같습니다.하느님께서 세상을 당신의‘필요’에 의해 창조하셨다면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닙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사랑이 필요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인간 없어도 스스로 온전히 만족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나는 네가‘필요’해!”와“나는 너를‘사랑’해!”라는 말을 같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필요는 상대를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는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은‘더’ 사랑하고 싶은 본성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지 나의 필요한 부분을 채우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이기적이지 않은 이유는 바로 나의 필요 때문이 아니라 상대를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본성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행복을 나누어주시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지 당신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한 필요성으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불완전하게 되고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바로‘죄’를 지었기 때문이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 교수님이 설명하시려는 의도는 사람이 더 큰 무엇을 향해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 안에 갇혀계시지 않고 인간을 창조하셔서 인간을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신 것이 바로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본성은 이렇게 밖으로 커져나가는 본성이 있습니다. 만약 남녀가 사랑하게 되었는데 사랑하면서 그 사랑이 주위 사람들에게 대한 사랑으로 넓혀져 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기적이고 곧 소멸될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절대 자신들 안에 갇혀있지 않고 빛과 같이 끊임없이 퍼져나가는 본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교수님 말대로라면 인간이 자신 안에 머물지 않고 만족하지 못하여 열려있는 것이 하느님께서 인간을‘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내가 하느님과 또는 남편이나 아내와 하는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면 사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 부족한 것을 채우려는‘필요’에 의해 만나는 것이고 그것은 참 사랑이 아니게 됩니다. 내가 진정 온전하게 누구를 더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지금 하느님과 또 내가 하고 있는 사랑에 만족하고 있을 때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외로운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이웃을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이용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도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들이 있어야 함은 우리가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시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산대로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모든 사람들보다 이 세상에서는 큰 인물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보다도 더 작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저기,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신다.’라며 그리스도를 알아보았을 만큼 세례자 요한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셨습니다. 이는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실 때부터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큰 성인일지라도 이 세상에 육체를 지니고 살면서는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어 사는 분들보다는 클 수 없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세례를 받았을지라도 육체 안에는 죄의 경향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도 이 세상의 육체를 벗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가장 큰 성인들 중 하나로 크게 빛나실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에 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죄가 들어옴으로 인해 불완전하게 되어 항상 완전함을 찾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없애시고 당신과 인간을 결합시켜 다시 완전함의 지위를 돌려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과 일치하는 만큼 더 완전해지고 죄 이전의‘참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마지막 날에는 죄에 물들지 않은 육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를 지니고 살기 때문에 육체적 욕망을 동시에 지닙니다. 그래서 그것을 채우기 위해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필요로 만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이 큰 인물인 이유는 사막에서 먹지도 입지도 않고 극기의 생활을 하며 육체의 욕망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육체적 욕망을 죽이는 만큼 이웃을 하느님의 아가페적 사랑과 더욱 가깝게 사랑하게 됩니다. 육체적 욕망, 즉 에로스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사람을 필요로 하고 또 그래서 소유하려하지만 아가페적 사랑은 사랑 자체로 만족하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도 인간이 지옥에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너무 육체적이고 소유하려하고 집착하고 또 나의 필요 때문에 사랑한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사랑을 돌아보고 정화해나가야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제 하느님이셨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제가 초등학생 때의 일이었습니다. 몹시 덜렁거리고 장난기가 유난히 심했던 저는 학교 안에서 자주 대형사고를 치곤 했었습니다. 다행히 담임선생님이"부처님"이라고 불릴 정도로 너그러우시고 관대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고를 저지를 때마다 담임선생님의 선처로 적당히 넘어가곤 했었지요.
그런데 한번은 제가 적당히 넘어가기 어려운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현관 앞에 놓인 대형 거울을 제가 통과해버린 것입니다. 거울이 보통 큰 거울이 아니었고, 동창회에서 기증한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새 거울이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교장 선생님까지 그 모습을 보셨으니...담임 선생님이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이 일을 어쩌나? 담임선생님 얼굴을 어떻게 보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울 값은 어떻게 하나? 부모님이 이 일을 알게 되면 어쩌지?" 갖은 걱정에 걱정을 거듭하며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거울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제 얼굴부터 살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조금밖에 다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앞으로는 조심하거라." 하시면서 깨진 유리조각들을 손수 치우셨습니다.
아마도 그날 담임 선생님은 저 대신 교장실로 불려가서 호되게 질책을 당하셨던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그 일에 대해서 한마디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너무도 미안했던 저는 그 뒤로 많이 회개했었지요. 담임선생님을 하늘처럼 여겼습니다. 그리고 담임선생님 속을 상하지 않게 해드리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당시 아직 어린 저였지만 너무도 관대했던 담임선생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느꼈습니다. 그분과 함께 했던 짧은 날들이 마치 천국에서의 생활 같았습니다. 담임 선생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당시 담임 선생님은 제 하느님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큰 사람으로 여겨졌던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이 한가지 사실 때문에 너무도 깜짝 놀랄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 자비의 크기입니다. 하느님 자비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몇 천 배, 몇 만 배나 커서 우리는 깜짝 놀랄 것입니다. 그리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자비가 이토록 큰데 괜히 그렇게 걱정했잖아"하는 후회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나라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곳은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새삼 확인하는 나라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용서와 인내, 사랑이 얼마나 극진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나라입니다.
지옥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비를 거절한 사람들, 다시 말해서 천국을 거절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들기 위한 우리의 조건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거절하지 않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거절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한편 하느님 나라는 역설적으로 죽어서 가는 나라입니다. 우리들의 그릇된 생각과 잘못된 삶을"죽여야"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소유와 욕심에 붙들려있는 한 인간은 천국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우리가 현세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을 푸는 곳이 결코 아닙니다. 천국은 온갖 물질적 풍요와 안락이 약속된 곳도 아닙니다. 진정한 천국이란 우리의 욕망이 절제되고 편리함이 포기된 그러한 세계입니다. 그래서 그곳의 생활은 수도자의 생활처럼 검소하고 질박합니다.
몇 달 전, 새벽 묵상 글에도 썼던 것으로 기억되는데요. 서울 강남의 어느 성당으로 강의를 하러 여유 있게 2시간 전에 출발했다가 강의 시작 바로 전에야 간신히 도착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제 강의를 하러 갈 때면 언제 출발해야 할지가 항상 저의 큰 고민입니다.
그저께 저는 또다시 강남의 모 본당으로 대림특강을 위해 가야만 했습니다. 서울 강남의 교통 상황은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요. 워낙 많이 막혀서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인지를 아무도 예상하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제가 출발하는 시간이 퇴근 시간하고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몇 시에 출발해야 할지를 도대체 모르겠더군요.
결국 저는 몇 달 전의 기억도 있고 또한 사람들 퇴근 시간 때문에 막힐 것을 예상하면서, 아주 여유 있게 3시간 전에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왜 그런지요? 글쎄 길이 하나도 막히지 않아서, 출발한 지 1시간이 채 안되어서 목적지 성당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강의시간까지 2시간이나 남아서 근처의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했지요.
정말로 사람 일이란 잘 모르겠더군요.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늦고 또 이 정도면 딱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일찍 도착하는 것을 보면서, 내 생각이 절대로 옳은 것만이 아님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내 생각이 옳다면서 사람들에게 힘주어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일까요? 그런데도 우리들은 내 생각을 어떻게든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갈등과 다툼이 생깁니까? 이러한 상태에서 주님께서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시면서 보여주셨던 사랑을 따르기보다는 대신 미움과 판단과 단죄라는 폭력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고도 하십니다. 이 폭력을 쓰는 자는 당시에 요한의 세례를 거절하고 하느님의 계획을 묵살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고집했으며, 하느님까지도 자기들 생각대로 놀아주기를 바랐습니다. 잘못된 것은 하느님의 탓으로 돌리고 잘된 것은 자기들 공로로 돌렸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폭력을 쓰고 있으며, 이들의 폭력에 의해서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도 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따르고 있습니다. 내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며, 항상 자기 공로만을 드러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하느님 안에 포함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내 안의 한 부분 정도로만 생각하는 아주 작은 분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 역시 지금 하늘나라에 폭행을 하는 폭력을 쓰는 자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그 모습에서 당연히 벗어나야 합니다. 즉, 이제는 이기심과 욕심으로 폭력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 하늘나라를 완성하는데 일조를 담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이 바로 대림을 사는 마음가짐이 아닐까요? 귀 있는 사람은 들어야 합니다.
나는 당신 머릿속의 지식이 아니라 당신의 친절한 마음씨 때문에 당신을 사랑한다.(W.H.데이비스)
못생긴 톨스토이를 아시나요?(‘좋은생각’ 중에서)
러시아에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소년은 자라면서 자신의 못생긴 외모에 심한 콤플렉스를 가지게 되었다. 너무 넓은 코와 두터운 입술, 작은 눈과 긴 팔다리를 볼 때마다 그렇게 태어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친구들은 그의 외모를 보고 놀려 대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점점 소심해지고 작아지는 자신을 느꼈다. 외모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절망한 그는 신에게 자신의 소원을 들어 달라며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신이 있다면 저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소서. 외모를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시면 제 모든 것을 바쳐 기쁘게 해 드리겠습니다.”
날마다 자기 전에 이렇게 기도했지만 소년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성장하면서 자신이 글쓰기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점점 문학에 대한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하기 시작한 그는 어느 날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 온 ‘외모 콤플렉스’를 단숨에 해결할 만한 답을 얻었다.
그는 말했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에 있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깨끗한 인격이 모여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이를 깨닫게 된 그는 더 이상 외모 때문에 고민하지 않았다. 이 소년이 바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다. 사람들은 그를 역사에 길이 남을 작가로 기억할 뿐 아무도 ‘못생긴 사람’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신은 모든 사람에게 한 가지 이상의 재능을 주었다고 한다. 혹시 자신에게 콤플렉스나 열등감이 있다면 재능이 있는 다른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여 최고가 되어라.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저 당신을 최고의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다.
“여자에게서 태아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다시 광야를 향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언자로서의 삶, 말만 들어도 왠지 그럴 듯 해보입니다. ‘있어’보입니다. ‘나도 그렇게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어 보입니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앞으로 몰려들었겠지요.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품위 있고 장엄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는 하늘을 찌르겠지요. 추종자들은 늘 나를 큰스승으로 떠받들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언자들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전해야할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위해 밤샘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참전달자로 계속 존재하기 위해 부단히 화려한 도시를 떠났습니다. 황량하고 고독한 광야로 계속 깊이 들어갔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보십시오. 그의 나날은 그야말로 ‘초근목피’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주식은 날아다니는 메뚜기였습니다. 음료수는 전혀 가공되지 않은 들꿀이었습니다. 그가 걸치고 있었던 의상을 보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무슨 원시인입니까? 낙타털옷에 가죽띠입니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서였습니다. 맑은 정신으로 계속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결한 영혼을 계속 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확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온통 만연해 있는 세상의 죄악과 타락 앞에 당당히 맞서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끝도 없는 자기 비움의 삶, 뼈를 깎는 자기 통제의 연속, 자아 포기, 자기 연마, 자기 부정의 나날이 세례자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에 목숨 걸고 투신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철저한 겸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태양으로 떠오르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보십시오. 참 예언자로서의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양성했던 제자들에게 ‘바로 저분이시다. 저분을 따라가거라!’라며 제자들을 떠나보냅니다.
예수님 앞에 자신은 ‘신발 끈조차 묶어드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며 자신을 끝도 없이 낮췄습니다.
연극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더욱 부각되도록 조연으로서 역할에 최선을 다했던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주인공이 나타나시자 아주 조용히 무대 뒤로 사라져간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세례자 요한처럼 깊은 내적 광야를 향한 우리 각자의 여행을 시작하기 바랍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편리하고 안이한 삶을 버리고 불편한 삶, 그러나 주님께서 기뻐하실 그 삶을 선택하면 좋겠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께서 점점 성장하시고, 그에 반비례해서 나는 점점 작아지기를 바랍니다.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실 분
-방교원 신부님-
폭력이라면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 전쟁, 파괴 등을 쉽게 떠올리지만, 역설적이게도 폭력이라는 단어에는 생명이라는 의미도 숨어 있답니다. 이것은 그리스어 ‘비오스’(생명)와 ‘비아조마이’(폭력)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는 것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법을 거스르는 경우에 비아조마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폭력의 뿌리는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법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었던 에덴 동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우리는 에덴 동산으로부터 시작된 폭력이 얼마나 빨리 퍼져나가고 강하게 되는지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생명이신 하느님께서는 동생을 죽인 카인의 탄원을 들으시고 그의 생명을 보장해주십니다.
그 어떤 폭력도 자비로운 하느님을 거스를 수 없고 하느님 그분만이 세상의 폭력을 없앨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창세6,11). 우리는 이런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시고 오래 전에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이신 그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이 땅에 평화를 주러 오신 그분을 만져볼 수 있고 살펴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작은 것이 정말 크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예수님께서 큰 인물이라고 할 때 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몸집이 크다는 것은 물론 아니리라.
포용력이 크다는 뜻도 아닐 것이다.
생각하는 스케일이 크다는 뜻도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룬 업적이 크다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크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하늘나라에서 큰 것을 말함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하늘나라에서 큰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같은 마태오 복음18장에서 이에 대해 제자들이 묻자 주님께서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하고 대답하십니다.
그렇다면 낮출 수 있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산처럼 높아서 큰 것이 아니라 바다처럼 낮아서 넓고 큰 것입니다.
바다는 가장 낮기에 가장 넓어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정도로 큽니다.
노자의 말씀과 닿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갈수록 커져야 하고 나는 갈수록 작아져야 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다고 한 세례자 요한은 큰 사람입니다.
다른 식으로 또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비어낸 만큼 커집니다.
허허실실(虛虛實實)의 이치입니다.
비운 만큼 채울 수 있는 여백이 커집니다.
사람으로 가득 찬 여관은 예수님을 모실 여백이 없었습니다.
비어있던 마구간과 구유는 사람의 아들 중에 가장 큰 사람보다 더 큰 분 하늘 땅 통 털어 가장 크신 분을 모실 수 있었습니다.
서양화를 보면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 늘 있습니다.
여백으로 더 많은 것을 얘기하는 우리 한국화와 같은 여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귀 있는 사람인가?
-김영수-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 공생활 당시에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그동안 믿고 따라온 율법에 반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주 개혁적인 것이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또 메시아를 기다리는 그들로서는 당시의 고행자인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몹시 불편했다. 세례자 요한은 고행을 하면서 스스로 미래에 오실 분을 위한 길잡이라고 선포하며 많은 사람에게 회개할 것을 외치며 또한 이를 행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바로 그분임을 선포했다.
요한은 성경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으로 표현된다. 그런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예수님은“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라고 최고의 평가를 하신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모든 예언서와 율법서에 적힌 메시아가 자신이며,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오는 길을 닦는 예언자 엘리야임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지 못하고,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니 답답한 예수님은“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하셨으리라.
우리의 현실도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우리를 돌아보자. 주일미사 참례가 신앙 생활의 모든 것이라 생각하는 주일 신자는 아닌가? 성당 내에서 미사 중에 회개하고 평화를 구하고 자비를 바라며 복음화를 마음속으로 약속했다가 성당 문을 나서면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의 율법에 자신을 내맡기고는 성내고 탐내고 다투며 남에게 상처 주고 빼앗고 하지 않는가? 미사 시간마다 늘 하느님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겨 본다. 하지만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의 말씀을 실천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려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는 귀를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내 귀로 전해지는 말 중에 진정 하느님의 말씀이 무엇이지. 그 말씀이 왜 내게 전해졌는지. 말씀의 참뜻을 헤아리고 가다듬어 생활로 이어지는 실천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우리가 세례자 요한보다는 못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기억해 주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귀 있는 사람인가, 귀 먹은 사람인가? 나에게 좋은 말씀은 듣고 나를 힘들게 하는 말씀은 거역하는 그런 사람은 아닌가? 하느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들려온 것은 언제였던가?
기다림 2
-장재봉 신부님-
오늘 독서를 통한 하느님의 고백을 들으면 ‘이제는 그 바보 같은 사랑을 그만 두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인간사랑은 결코 헤아릴 수 없다고 하지만 “벌레 같은 야곱”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인줄 뻔히 아시면서도 “오른 손을 붙잡아 주고” “도와주리라”고 다짐을 하시니 정말 이해하기 힘듭니다.
세상에는 신도 많고 종교도 다양합니다.
단언하건데 그 많은 종교는 모두 뇌물을 요구합니다.
상이 잘 차려진 제사일수록 기도의 힘이 세지고 더 많은 복채를 통해 더 큰 복을 받게 된다하니 그렇습니다.
오직 그분의 이스라엘, 그리스도인들의 제사만이 ‘속죄제’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해결될 수 없는 죄, 세상의 것으로는 결코 얻지 못하는 구원의 역사가 그분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는 현장이 미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곧 믿음이며 사랑이며 희생이어야 할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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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한 세월이 430년입니다.
세상의 어느 민족도 400년을 꼬박 노예로 지내는 일은 인류 역사상 전무하다고 합니다.
긴 세월은 자신의 주체를 흐리게 할 것이고 긴 시간은 서로를 동화시킬 것이며 긴 시간을 참아내지 못한 민중의 궐기와 반항의 역사가 일어나기 마련이라 합니다.
말라키 예언자를 통해서 이르신 하느님의 약속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말라 3, 23)는 말씀은 350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을 전한 마태오사가의 집필시기를 따지면 거의 400년이 흘렀을 것이라 꼽아집니다.
그 긴 세월,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예언이 사라지고 역사가 뒤바뀌는 와중에서 이스라엘인들의 갑갑함이 얼마나 컸을까 싶습니다.
호세아에게 들려주신 하느님의 절규를 기억하며 죽어간 숱한 세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면서도 아무런 확신을 얻지 못하고 사라진 세대도 있었습니다.
무조건 믿고 기다린 그들의 간절한 시간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적었던 마태오사가의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에게만 들리는 복음, 믿는 자에게만 보이는 메시아, 그것을 몰라보는 이스라엘이 안타까워서 펑펑 눈물을 쏟았을 것도 같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은 잊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내게 와서
“두려워 마라”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 일은 받아들이는 마음에만 가능합니다.
이미 곁에 와 계신 그분을 두고 누구를 찾으십니까?
그분을 기다린다면서 무엇에 분주하며 무엇에게 휘둘리며 무엇을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참으로 무엇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양을 한 마리 잃은 양치기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양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이를 잘 알고 있는 동네 사람들도 함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양을 못 찾으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을 때에도 그 양치기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평화로운 얼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가 주인인지 모르겠네. 우리는 이렇게 걱정하고 있는데, 정작 주인은 태평하니 어떻게 된 일이야?”라고 말들을 하기 시작했고, 그 중 한 명이 양치기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왜 걱정하지 않습니까?”
이에 양치기는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저는 하나 남은 저 언덕까지 다 뒤져보고 양을 찾지 못하면, 그때 걱정하겠습니다.”
아직 하나의 언덕이 남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언덕을 살펴보지 않은 상태에서 미리 걱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미리 걱정부터 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해결 실마리가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걱정부터 할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물론 걱정을 하고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걱정만 할 뿐이지요.
이렇게 걱정 속에 사는 모습을 주님께서는 원하실까요? 걱정으로 인해서 힘들어하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주님께서는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힘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원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그리고 복음 말씀을 통해서 힘을 계속해서 주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힘을 주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세례자 요한도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보다도 크지 못하니, 잘난 체하지 말라는 말씀일까요? 물론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는 다른데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세례자 요한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는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 예수님을 철저히 준비하기는 했지만, 예수님의 기쁜소식인 복음을 알지 못했으며 구원사업에도 직접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의 가장 작은 이라도 그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기에 요한보다는 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복음을 알고 있으며,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하고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세례자 요한도 누리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선물을 주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선물을 왜 주실까요? 우리가 잘 나서? 아니지요. 바로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힘을 주시기 위해서 무상으로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걱정으로 주님의 선물을 걷어차는 미련한 행동은 하지 말고, 자신감 있게 생활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역시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자신감을 잃지 마세요.
대통령의 유머(‘행복한 동행’ 중에서)
2004년 6월 11일, 워싱턴 내셔널 커씨드럴 성당에서는 도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온 많은 조문객들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조지 부시 대통령이 조문사를 읽는 도중,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부시 대통령은 물론이고 고 레이건 대통령의 부인 낸시 여사와 아들, 딸 등 유가족들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부시 대통령이 레이건 대통은 생전에 유머가 많은 분이었다며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고 레이건 대통령은 영화배우 출신의 공직자라서 영화와 관련된 농담을 곧잘 했다. 1981년 정신병자가 쏜 총에 맞아 위급한 상황이었는데도 낸시 여사에게, “영화에서처럼 납작 엎드리는 것을 깜빡했지 뭐요.”라는 농담을 했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대통령 내외는 백악관 초청으로 유명 피아니스트의 연주회에 참석해 관람을 하고 있었다. 연주회가 끝난 뒤 무대로 올라가던 낸시 여사가 실수로 발을 헛디뎌 우스꽝스럽게 넘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얼굴이 빨개졌다. 이때 레이건 대통령이 큰소리로 말했다.
“여보, 넘어지는 일은 분위기가 무시 썰렁해서 박수나 웃음이 필요할 때 쓰기로 한 방법이었잖소!”
그 순간 많은 사람들이 큰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평소 유머 감각으로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했던 고 레이건 대통령은 자신의 장례식장에서도 특유의 유머로 마지막까지 웃음을 선사했다.
하늘 나라의 작은 이
세례자 요한의 삶을 생각하면, 잉태 때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주님을 위한 도구로서 생활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남들처럼 부귀영화를 좇지도 않았고, 광야로 나가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을 취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생활을 했던 이유는 곧 오실 주님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과연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말하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철저히 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았던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
평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아온 세례자 요한도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보다도 못하다고 하는데, 하물며 잠시의 시간도 주님을 위해 제대로 봉헌하지 못하고 있는 나는 과연 하늘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 수가 있을까요? 그러면서도 뻔뻔하게 주님을 따른다고 말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주님께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청만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부족한 우리인데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정말로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네요.
귀찮은 잔소리
-김명희-
제게는 딸아이가 두 명 있습니다. 한 명은 고등학교 1학년이고 또 한 명은 중학교 2학년입니다. 한창 사춘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얼굴에는 사춘기의 표상인 여드름이 덕지덕지하고 그놈의 여드름 때문에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아침마다 학교에 가려면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밥은 안 먹어도 샤워는 해야 하고 늦었다고 징징대면서도 드라이기와 고대기를 집어 들고 머리를 다듬느라 요란을 떱니다. 옆에서 보다 못해 단정한 머리가 어울리니 풀어 헤치지 말고 단정하게 묶으라고 하면, 아이들은 대뜸 엄마는 유행을 모르고 너무 촌스럽다고 합니다. 오랜만에 외식을 하려고 나서다 보면 아이들은 여기저기 일부러 찢어놓은 청바지를 입고 나옵니다. 얌전한 바지로 갈아입으라고 하면 남들은 다 보기 좋다고 하는데 엄마는 왜 그러느냐며 다른 아이들도 다 이런 거 입고 다닌다고 대들기도 합니다.
시험공부를 할 때도 음악을 크게 틀거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습니다. 소리 좀 줄이라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친구의 채팅 창이 나타나면 금방 채팅을 시작합니다. 엄마인 나는 옆에서 바라만 봐도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울 지경입니다. 공부할 때는 공부에 집중해야 하니 음악을 끄라고 충고하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잔소리 좀 그만 하라고 합니다. 저는 딸들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로서 아이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크다고 알려주십니다. 그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훌륭한 이라고 예수님 친히 칭찬을 아끼지 않은 인물인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당신보다 앞서 오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그 사람임을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또한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딸들이 저의 말을 귀찮은 잔소리로 여기는 것처럼 저 또한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그저 그런 잔소리인 양 들어 넘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매일매일 너무 바쁘고, 지금 중요한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한가하게 무슨 천국 이야기냐고, 천국은 아주 머나먼 미래의 일이라고 말입니다. 당신이 오리라 한 그분이시고, 당신의 나라는 이미 제 가까이에 와 있고, 당신은 제가 저의 딸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하고 계시는데도 말입니다.
“사랑으로, 사랑하신 하느님을 보는 사람들의 나라”
-홍성만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구약의 수많은 예언자들이 구세주를 예언했지만, 세례자 요한처럼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길을 내면서 직접 준비를 시킨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과 더불어 앞으로 일어날 구원의 역사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은 이어집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에서의 그 '하늘나라'는 다름 아닌 구세주로 인해 드러나게 될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사랑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마주 보는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사랑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직접 뵙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충만합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완전합니다.
이를 향해 전진하는 우리들은 순간순간 하느님을 포착하나 부족한 사랑으로 이내 놓치고 맙니다.
그래서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살을 취하시어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랑을 사시면서 나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실 주님을 기억하니 마음 설렙니다.
사람에게 호소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중재자를 통하지 않고 직접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심으로써 하느님 친히 그들에게 힘을 주시고 도우실 것임을 확신시키신다. 지렁이나 벌레처럼 약하고 보잘것없어 핍박을 당해도 저항하지 못하는 무력하고 무가치한 존재인 이스라엘을 하느님께서는 몸소 도와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산과 언덕처럼 높이 솟아 권세를 휘두르며 이스라엘을 압박하던 나라들을 짓뭉개시리라. 마치 타작한 곡식을 키질함으로써 껍데기를 바람에 날려버리고 알곡만 모으듯이 적대국들을 날려버리시고 이스라엘을 모으시리라. 마실 물이 없어 빈사상태에 빠진 자들을 살리듯이 그들을 죽음의 상태에서 구하시고, 벌거숭이산에 강물이 흐르듯이 그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안겨주시리라. 그들을 바빌론의 포로생활에서 해방시키시어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시리라.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죄의 종살이에서 인류를 해방시키시고 풍부한 생명을 주시리라.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하시는 것을 그들이 보고, 알고, 체험함으로써 오직 하느님만이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의 후손들아, 돌아오너라! 극악한 반역자들아, 하느님께로 돌아오너라.”(이사 31,6)
“나는 너의 악행을 먹구름처럼 흩어버렸고 너의 죄를 뜬구름처럼 날려 보냈다. 나에게 돌아오너라. 내가 너를 구해 내었다.”(이사 44,22) 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모든 죄와 악행을 다 잊으시고 용서하시며 돌아오라고 호소하신다. 불효를 저지르고 집을 나간 자식을 애타게 찾아 헤매는 아버지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향해 애타게 부르짖으신다.
“배반한 자식들아, 돌아오너라. 너희의 마음을 바로잡아 나를 배반하지 않게 하여주리라.”(예레 3,22) 하고 말씀하신다. 모든 것을 당신께서 해주실 터이니 돌아오기만 하라고 사정하신다. 그러나 “이 백성은 얻어맞으면서도 아픈 줄을 모른다. 죽도록 맞고서도 타이르시는 말씀을 귓전으로 흘려버린다. 얼굴에 쇠가죽을 쓴 것들, 도무지 하느님께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예레 5,3)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 간구하며 호소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느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은 침묵 속의 하느님이며, 우리를 외면하고 거절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에게 호소하시며 당신께 돌아오라고 부르짖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스르고 외면하며 들으려 하지 않는다. 모든 관심사가 자신에게만 있고 자신의 목소리만 높여 소리치기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에 가려 하느님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
하느님의 소리가 들릴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목소리가 잠잠해질 때 비로소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게 된다. 그래서 하느님을 체험한 이들은 공통적으로 하느님께서 자신을 먼저 부르시고 찾으셨으며, 자신은 그 부르심을 이면하고 살다가 뒤늦게 부르심을 체험했다고 고백하곤 한다.
하느님은 지극한 사랑이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는다. 사랑은 성을 내거나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으며,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내고, 사랑은 가실 줄을 모른다.”(1고린 13,4-5.7-8)
사랑은 끝없는 용서요, 부르심이며, 호소요 절규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의 사랑을 호소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찾으시고 부르신다.
오늘 우리를 찾으시고 부르시며, 우리에게 호소하시고 절규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부르심에 응답하는 하루가 되자!
회개의 시작은 첫마음으로
-민경철 신부님-
참으로 좋은 뜻으로 시작했고, 순수하게, 열심히, 소신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살아온 모습이었는데 어느 날 하나의 권력단체가 되어버린 이들을 본 적이 있을까요? 조직적이 되고, 체계가 잡혀가면서 힘을 과시하려고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게 제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너무나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왜냐면 그 모습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야훼 하느님을 위해서 이 한생 바치겠다고 큰 뜻을 품어 공부를 시작하고, 세상에 나섰는데, 집단 속의 한 구성원으로 살다보니까 자연스레 그들만의 생각과 분위기에 묻혀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또 권력이 되다 보니까 이에 도전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겠지요.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하늘 나라의 수호자와 전도자가 아니라 오히려 하늘 나라를 폭행하고 있는 범죄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여자들 가운데서 태어난 이들 중 가장 큰 인물이라고 높이 사시는데 요한은 ‘회개’를 외친 인물이었습니다.
‘첫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더 넓고 더 깊게
-오영숙 수녀님-
감옥에 갇힌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물었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요한의 제자들을 돌려보낸 후 예수께서는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우리는 우리가 본 것, 들은 것에 대해서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틀림없이 내 눈으로 보았다”고, “확실히 내 귀로 들었다”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면 내가 본 것과 들은 것이 얼마나 사실과 다른지, 내 주관적이었는지, 나 중심적이었는지를 깨달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분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예언서와 율법이 예언한 요한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기에 그를 배척하였습니다. 우리 또한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많은 핑계를 대며 받아들이지 않고 이러한 것을 합리화하지는 않는지요? 이러한 우리의 태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데 크나큰 장애가 되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더 넓고 더 깊게 세상을 바라보지 않을 때, 하느님의 눈으로 마음으로 살아가지 않을 때 이 세상에서부터 이루어 나가야 할 하느님의 나라는 점점 멀어져만 갈 것입니다.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 김상조 신부님-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이 말씀은 "내가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라는 말씀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 말씀도 마찬가지일텐데, 요한이 한 일을 보고 예수님이 직접 그 사람됨을 인정해주신 말씀이다. 요한의 사명은 지난 주일 복음말씀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것, "그분의 길을 곧게 내는"것, "골짜기는 메우고 산과 언덕은 낮추고. 굽은 데는 곧게 하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는" 것이었다. 요한은 그 사명을 훌륭하게 수행하였고,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 극도의 칭찬을 받았다. 예수님도 당신의 사명을 훌륭히 수행하실 것이었다. 요한의 사명이 훌륭해서일까? 요한이 특별한 은총을 받아서였을까? 요한은 어떻게 자기 사명을 수행해냈을까? 우리의 사명은 보잘것없는 것인가? 우리는 특별한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인가? 요한의 사명과 우리의 사명은 다른 것일까?
아니다. 우리의 사명도 요한의 사명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도 그분의 길을 곧게 하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낮추고 굽은 길은 곧게 하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만들어야 한다. 오늘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이해하고 충분히 받아들이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능력이 안된다" 하지 않고, 기꺼이, 요한처럼 아주 기꺼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도 해낼 수 있는 사명일 것이다. 우리는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일 게다. 요한처럼 위대한 사람만이 굽은 길을 곧게 할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한, 예수님처럼 특별한 사람만이 거친 길을 평탄하게 할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 우리 스스로가 하늘나라에 폭행을 가하고 있을지도 모을 일이고, 만일 그렇다면,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힘들 것이다.
안내자와 그리스도인의 역할
-이찬홍 신부님
복음에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두 가지 평가를 내리십니다.
처음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라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라는 말씀입니다.
첫 부분은 이해가 잘 됩니다.
그러나, 둘째 부분 곧,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크다.” 라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어떤 인물입니까?
복음에서 알려주듯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요, 그 어떤 예언자보다 더 크고 위대한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시기로 예언된 엘리야 예언자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예수님 보다 먼저 오시어 예수님의 길을 닦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맞이할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한 요한이.. 세상에 태어난 인물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면, 과연 하느님 나라는 어떤 사람이 갈 수 있는 나라일까요?
얼마나 더 위대하고 대단한 사람이라야 갈 수 있는 나라일까요?
우리의 최종 목적은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중에 몇 명이나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을까요?
저 같은 니나노는 생각조차 하지 말고, 진작 포기해야할 것입니다.
복음을 묵상하며, 예수님의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임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알려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닦고 사람들에게 주님을 전해준 사람입니다.
안내자로서 사람들에게 다가갔고, 안내자로서 생활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안내자로서 지녀야할 모습, 자세에 대해 알려주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안내를 받은 사람임과 동시에 안내자입니다.
사제로서 저는 안내자입니다.
미사와 성사집행을 통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주고,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안내자 입니다.
어제부터 성탄 판공성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고해실안에서 고해성사를 청하는 분들께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해주고, 죄를 용서하는 사죄경을 염해줍니다.
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격려해 주고 다시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실제, 성실하게 성사에 임하는 분들은 죄의 용서를 받고, 하느님의 은총의 물로 목욕을 해서 기쁜 마음으로 고해실을 나섭니다.
그런데, 사제로서 제가 그렇게 신자 분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주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안내해 주면서도 정작 저 자신은 예수님과 멀어질 수도... 구원에 길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남들은 구원해 주면서도 저 자신은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은 예수님께 인도해 주면서 저 자신은 예수님과 멀어지는 것!’
‘안내자로서는 충실했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충실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안내자로서 제가 경계하고 늘, 조심해야할 모습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본당에 쉬는 교우 방문이 한창입니다.
며칠 후면, 여러분들이 인도한 예비신자 분들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 성사가 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안내자로서, 쉬는 교우들에게 다가갔고, 아직,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예수님을 전해주고, 교회로 인도해 왔습니다.
이런 모습이 안내자로서의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남은 그렇게 잘 인도해주면서도, 정작 여러분스스로는 안내하는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
구원에 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멀어지고, 구원에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우리 모든 신앙인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그래도 저보다는 낫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하느님을 만났을 때, ‘삶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지만,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 말씀은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 어떠한 희망을 전해주는 말씀도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세레자 요한이 구약에 마지막 예언자요, 하느님 보시기에 훌륭한 일을 한 인물이라도, 우리가 얻은 지위, 곧 하느님 자녀라는 칭호는 얻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심지어는 예수님께 까지 세례를 베풀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예수님께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우리 눈에 훌륭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준 그리스도인이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교회는 구원의 보편성을 갖고,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을 합니다.
하지만, 그 구원의 가능성은 명확하지가 않고 좀 에매 모호합니다.
아무리 예수님 마음에 드는 일을 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한다 하더라도...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였지만, 구원의 기쁜 소식은 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인도했지만, 스스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헤로데에서 죽음을 당하여 순교했지만, 순교 의미에 대해..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에 동참한다는 참된 순교의 의미는 알지 못했습니다.(교만으로 똘똘 뭉친 저만의 생각일까요?)
그러나, 우리는 세례를 받은 신앙인입니다.
구원이 명확하고, 구원받는 다는 확실성이 있습니다.
때문에, 요한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보다 덜 위대하지 않을까 감히, 교만한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자 요한은 위대한 분입니다.
비록, 안내자로서 충실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충실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안내자로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충실해야 함을 알려줍니다.
안내자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충실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혹, 안내자로서 구원을 받더라도 명확하지 않음을...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이요, 예언자입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진리를 알려준 세례자 요한께 감사드리며, 우리도 안내자로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충실할 것을 다짐하며 이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도록 합시다. 아멘.
<작은 자>
-이현철 신부님-
작은 자는 남들이 자기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뿐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해서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작은 자는 자신의 재능이나 덕행이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며 서슴지않고 말째의 자리에 자신을 놓을 뿐 아니라 그러면서 기뻐합니다.
작은 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는 정직하기 때문에 자신의 재능, 시간, 물질, 덕행 등 모든 것이 홀로 선하신 하느님께로부터 거저 받은 것임을 알고 있으므로 아무 것에 대해서도 오직 하느님의 영광과 남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시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꺼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작은 자는 남을 이해하기 위해서 자신을 죽이고 자기가 남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결코 흥분하거나 분개하지 않습니다. 화를 낸다는 것은 자기가 옳고 남이 그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작은 자는 사람들이 칭찬해 줄 때에나 비난을 할 때에나 항상 평화중에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보시는 그대로이지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은 자는 진심으로 통회합니다...
오늘 복음(마태 11, 11-15)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찍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 없었다..."라고 하십니다만 세례자 요한은 스스로 작은 자라고 하며, 장차 내 뒤에 오실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자라고 자신의 겸손함을 보입니다. 이번에 성직자로 수품을 받은 저 젊은이들이 이러한 작은 자로서 충실한 사목생활을 하여 주님으로부터 세례자 요한처럼 큰 인물로 칭찬받기를 기도드리립니다. 그리고 먼저 하늘나라에 가서 '보기드문 큰 키'라고 지금 칭찬을 받고 있을 민성기 신부님의 많은 저서중 '하늘로부터 키재기'라는 책에서 일부 발췌하여 퍼드립니다.
<신학생 시절, 가르멜수도회의 동갑내기 신부 장석훈 베르나르도는 창경궁을 거닐면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
"요셉아, 나이 마흔될 때까지는 나서지마라. 침묵해라. 공부해라. 세상이 너를 필요로 할 그때까지…" 그 사이 세월이 훌쩍 지났습니다. 어느새 불혹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묵상한 글들을 책으로 묶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책으로 묶는 것은 어제의 삶에 애착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여름방학이 끝나 다시 서울로 돌아와 혜화동 보나벤뚜라 수도원에 머물고 있던 초가을 9월 17일, 너무나 뜻밖이었던 그 여름 사건을 떠올리며 끄적이다가 아래의 졸시를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
<하늘로부터 키재기>
세우려 한다
세우려 한다
한없이 세우려 한다
오르려 한다
오르려 한다
한없이 오르려 한다
재려 한다
재려 한다
한없이 재려 한다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한없이 세우고
한없이 오르고
한없이 재려 한다
누가 더 높이 쌓았는지
누가 더 높이 올랐는지
한없이 쌓고 오르고 재려 한다
사람은 땅에 사는 동물
사람은 땅으로부터 높이를 재는 동물이다
보이는 것의 기준은 땅이기에...
허나 보이지 않는 게 있다
사람들은 그를 하느님이라 불렀다
하느님은 하늘에 사시는 분
하느님은 하늘로부터 높이를 재는 분이시다
오늘에야 사람들은 불현듯
하늘로부터 키재는 법을 알았다
하늘로부터 키재기를 시작한다
난쟁이의 키가 커져 보인다
바벨탑은 낮아지고
난쟁이의 키는 커졌다
내리고프다
무너뜨리고프다
오, 캐노시스! *
갑자기 비가 내리고
세상이 바로 보인다.
※ 캐노시스 : 어원은 희랍말의 kenosis로서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를 나타내는 의미로 많이 쓰여지고 '비움'이라는 뜻을 지닌다.
하늘로부터 키를 재는 지혜, 이러한 지혜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첫째 순결하고 다음은 평화롭고 점잖고 고분고분하고 자비와 착한 행실로 가득 차 있으며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답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주도록 하십시오" (야고 3, 13-18).
세상의 이치에서 볼 때 작아진다는 것, 내가 작아진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같아 보이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작아지는 그 곳, 바로 그 곳에는 낯설음이 있습니다. 왠지 어색하게 낯설은 그 곳에서 우리는 여느 세상과는 다른 새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작아지기를 어색해 하고 낯설어 하는 것은 세상이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그 새로움에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새로움과 낯설음,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육화하시어 우리와 같은 피조물로까지 작아지시고 십자가상에서 수모를 당하시면서까지 보여주고자 하셨던 세상, '새 하늘과 새 땅' (묵시 21, 1)이 자리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크게 되는 변화는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역사의 신비입니다(마르 4, 31).
정현종 선생의 「섬」이라는 단순한 시가 있습니다. 그 전문은 이렇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저는 이 시를 대하면서 시인이 노래하는 이 '섬'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습니다. 이 섬은 사람들 사이에 있습니다.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사이에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우리는 곧잘 이런 말을 합니다 :
"사람이라고 다 사람인가?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디오게네스가 찾아 헤매던 사람이나, 정현종 선생이 노래 한 '섬'을 저는 같은 맥락에서 보고 싶습니다. 사람다운 사람, 사람다운 사람은 찾기가 어려운 만큼 우리 눈에도 잘 띄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동경하고 한번은 꼭 가보고 싶은 섬처럼, 한번은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 비록 드러나지 않아 우리 눈에 뜨이지 않을 뿐이지 우리들 가운데, 우리와 함께 분명히 있습니다.
누구일까?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참으로 어렵습니다. 참으로 나 자신이 변화되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요청됩니다. 나의 삶의 자세를 세상의 상식적인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나 자신이 작아지고 또 작아져야 하는데 그것이 쉬울 리 없습니다. 자존심을 뭉그러뜨려야 하는데 그것이 쉬운 일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 (루가 14, 11 : 18, 14)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처럼 낮아지게 됩니다" (마태 18, 4).
작음, 작아진다는 것, 작아지는 것이야말로 하느님 앞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이며 신앙인에게 없어서는 안될 덕입니다. 작아지고 작아질수록 그만큼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의 시간, 나의 공간, 우리의 시간, 우리의 공간을 비우면 비울수록,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기면 여길수록, 세상의 눈으로 보아 바보가 되고 어리석어 보이면 보일수록, 하느님의 신비로운 역사, 하늘나라가 이 땅에 내려오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우리 안에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 작아집시다!
우리가 작아질 때 예수께서 우리 안에 육화하실 것입니다."
상품이 되어가는 성탄준비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감옥에 갇혀 있던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마태 11,3) 하고 묻게 한 대목과 연결된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바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라는 대답 대신에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4절)고 하셨다.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간 뒤에 예수께서는 구원역사 안에 차지하는 세례자 요한의 사명과 역할에 대하여 증언하신다.(7-19절) 오늘 복음은 그 증언의 핵심부분이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모든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으로(9절) 인정하신다. 또한 말라기 예언자가 특정한 때에 올 것으로 예언한 ‘특사’와 ‘엘리야’로 인정하신다.(14절) 말라기 예언자는 “보아라,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말라 3,1), 그리고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을 앞두고 내가 틀림없이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낸다.”(말라 3,23)고 하였다.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기 직전에 그 길을 닦을 야훼의 특사가 먼저 올 것이며, 세상 종말에 야훼의 심판이 있기 전에 불수레를 타고 승천했던(2열왕 2,11) 엘리야가 다시 와서 이스라엘의 화해와 재건을 도모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특사(선구자)와 하느님의 세상심판을 준비하는 엘리야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자로 인정되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은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을 없었다.”(11절)는 말로 극에 달한다. 이는 실로 놀라운 극찬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요한보다는 크다는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극찬이 너무 심했다는 생각에 복음사가가 하향조정을 목적으로 덧붙인 말일 수도 있겠다. 허나 세속의 굴레를 벗고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을 뵈오며 사는 이라면 그가 아무리 작은이라 할지라도 요한보다 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극찬은 세례자 요한의 인품이나 인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구세사적 위치와 역할에 있다. 문제는 세례자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과 메시아의 실제적 도래로 시작된 하느님나라가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예언이 요한에게서 끝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른 예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야훼의 특사요 엘리야인 요한을 잡아다 옥에 가두었고,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하늘나라의 열쇠를 쥐고 그 문을 잠가버렸으며, 하느님나라의 상속자인 예수님조차도 세상의 배척과 폭행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세상도 마찬가지로 하느님나라를 배척하고 폭행하고 있다. 세상이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면 그분의 나라도 알 리가 없기 때문에 배척할 리도 폭행할 리도 없다. 그러나 세상은 하느님도 알고 그분의 나라도 안다. 그러면서도 세상은 하느님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모습을 보인다. 참으로 이율배반적이 아닌가. 그것은 성탄이 세상에 이득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세상은 성탄을 상품으로 생각하고 한 몫 잡을 기회로 삼는다. 아니면 놀 수 있는 휴일로, 선물을 주고받을 계기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교회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 하지만 상품이 된 성탄 안에 정작 예수님이 계시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기부정으로부터 시작되는 참된 삶
배달하 신부님
오늘과 내일 복음 말씀은 마태오복음 11장 중반부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세례자 요한을 구약의 위대한 불사조 엘리야 예언자의 귀환이라고까지 말하면서 세례자 요한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그처럼 위대한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왜냐하면 과연 세례자 요한의 어떤 삶이 예수님 마음을 이처럼 크게 사로잡을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다면 그것을 통해서 우리 인생길의 한 이정표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세례자 요한은 어느 모로 보든 타인의 평가나 시선을 의식하며 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영혼이 자유로운 삶의 주인공입니다. 요한이 그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살 수 있던 힘이면서 동시에 예수님마저 매료시킬 수 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세례자 요한과 관련된 복음의 증언들은 의외로 간단하면서도 공통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런 공통점을 가장 잘 전해 주는 부분이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 곧 요한의 정직한 자기부정 대목입니다. 이 부분을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담겨있는 마태오복음 5장 37절 말씀에 대입해서 보면 예수님이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세례자 요한의 위대함의 실체가 무엇인지 잘 드러납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명언,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말 못지않게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인가 ‘아니요’인가 바로 그것이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절체절명의 중요한 삶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특히 아닌 것을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야말로 세례자 요한과 가장 가깝게 닮아갈 수 있는 지름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참된 삶은 자기부정과 함께 시작된다.’는 칼라일 T. Carlyle의 말이 세례자 요한의 삶을 지나서 마침내 나의 삶이 되는 복된 대림절의 하루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성공인가? 실패인가?>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마태 11,13-14)."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라는 말씀은 '구약성경은 세례자 요한에서 끝났다.' 라는 뜻인데,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이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에 새로 추가된 예언서도 없고, 세례자 요한 이후에 더 이상의 예언자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라는 말씀은 '메시아를 준비하기 위해서 엘리야가 미리 올 것이라고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는데, 세례자 요한이 바로 그 엘리야다.' 라는 뜻입니다.
지금 세례자 요한이 마지막 예언자이고 엘리야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 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메시아이니까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다, 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당시에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을 먼저 강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엘리야에 관한 예언은 말라키서에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 3,23-24)."
(이 구절은 구약성경의 맨 마지막 구절입니다.)
그런데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메시아를 준비하는 엘리야로서 세례자 요한의 임무 수행은 성공일까? 실패일까?
'결과만 놓고 보면' 실패입니다.
복음서에는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상황을 보면 이스라엘을 변화시킬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받아들인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태오복음 21장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보면, 밭 임자가 소출을 받아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내는데, 종들은 모두 실패했고, 마지막으로 보낸 아들도 실패합니다.
이야기를 거기까지만 읽으면 종들과 아들은 모두 무능하고, 그들을 보낸 밭 임자도 무능하게만 보입니다.
실제로 구약시대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을 보면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애를 많이 썼지만 성공한 예언자는 별로 없었습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박해를 받고 고난을 당하고 죽었습니다.
예언자들이 무능한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이 무능한 것인지?
다시 세례자 요한의 경우를 생각하면, 요한이 실패한 예언자라면 말라키서의 예언은 틀린 것이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 말한 '결과만 놓고 보면'이라는 말을 수정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무능하신 것도 아니고, 예언서에 기록된 예언들이 틀린 것도 아니라면, 예언자들의 활동을 평가할 때 '결과'나 '실적'이 아닌 다른 면, 즉 그들의 활동 자체를 보아야 합니다.
구약시대 예언자들과 세례자 요한은 '죽을 때까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임무 수행을 위해 노력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들의 임무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입니다.
만일에 박해를 받는 것이 힘들고 죽는 것이 무서워서 예언 활동을 중단했다면 그것이 바로 실패입니다.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시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그 사람들 자신들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몇 명이나 입교시켰는가?' 그것만을 기준으로 선교활동을 평가하고 시상식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흔들림 없이 끝까지 자신의 길을 갔고, 그래서 그는 성공한 예언자이고, 성공한 엘리야입니다.
그가 몇 명이나 회개시켰는지, 또 몇 명이나 예수님에게로 보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각 개인의 신앙생활을 평가하는 기준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업적이나 실적을 얼마나 남겼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끝까지(죽을 때까지) 성실했는가? 가 중요합니다.
(아무런 업적이 없어도 성덕만으로 성인품에 오른 성인들이 많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