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래 순을 따서
사월 첫째 목요일은 한식으로 고래부터 4대 명절에 해당한다만 요즈음은 유의미한 절기가 아니다. 설과 추석을 제외하고 단오절도 우리 지역에서는 별달리 전해온 세시풍속이 없었다. 춘분과 곡우 사이 청명은 한식과 겹치거나 하루 이틀 사이로 따라왔다. 우리 속담에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가 있다. 이는 ‘오십 보, 백 보’와 마찬가지로 비교 우위에 별다른 차가 없음이다.
전날은 오랜 가뭄을 해갈시켜 줄 비가 제법 내렸다. 그간 밀려둔 소소한 일을 처리하면서 금쪽같은 시간을 보냈다. 이발관을 찾아 덥수룩한 머리숱을 정리하고 용지호수 작은 도서관에서 마음의 빈 곳간을 채웠다. 날이 밝아온 새벽은 생활 속 남기는 글을 탈고하고 몇몇 지기들에게 카톡으로도 시조를 한 수 넘겼다. 어제 빗속에 용지호수 수면에 뜬 수련 잎과 물닭에 대한 묘사였다.
흐린 하늘로 출발하던 날씨가 개길 기다려 자연학교 등교를 미적댔다. 새참에 해당할 이른 점심까지 때우고 빈 배낭을 둘러메고 길을 나섰다. 집 앞에서 105번 시내버스로 동정동으로 나갔다. 정류소에서 북면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길바닥에 은행나무 수꽃이 떨어져 눈길을 끌었다. 올해는 모든 봄꽃이 일찍 피더니 곡우 무렵에 피는 은행나무꽃도 피어 수분을 마치고 떨어졌다.
온천장을 지나 내봉촌으로 가는 버스를 타서 굴현고개를 넘어간 외감 동구에서 내렸다. 마을 안길을 지나니 텃밭 밭둑에 자라는 매실나무는 꽃이 저문 자리마다 수분을 마친 자잘한 꼬투리를 맺어 커갔다. 과육이 채워져 동글동글한 매실들이 영글면 두어 달 뒤 농부 손길로 수확될 테다. 달천계곡 입구에서 남해고속도로 터널 곁 단감농원을 지나 양미재로 오르는 숲으로 들었다.
어제 흡족하게 내린 비로 평소 건천이던 개울에는 물이 제법 흘러갔다. 가랑잎이 삭아 부엽토가 쌓인 숲길을 걸으니 카펫을 깔아놓은 듯 등산화 바닥에 와 닿는 촉감이 좋았다. 오리나무를 비롯한 활엽수들은 연초록 잎이 돋아나 싱그러움을 더했다. 양미재 못 미친 너럭바위에 앉아 한동안 명상에 잠겨 시간을 보냈다. 내가 양미재로 오를 때면 빠지지 않고 쉬어가는 너럭바위였다.
쉼터에서 일어나 양미재 십자 등산로 갈림길에 이르렀다. 고개를 넘으면 곧장 구고사가 나오고 산정마을로 내려선다. 왼쪽은 천주산으로 가는 산등선이면서 산허리도 트레킹 길이 개설되어 있다. 오른쪽은 작대산으로 가면서 역시 산허리로 트레킹 길이 뚫어졌다. 내가 산에 들어 할 일은 다래나무 순을 채집함이다. 두 곳 다 자생지를 알고 있는데 오른쪽의 작대산 가는 길로 들었다.
아까 동정동에서 버스를 갈아타려다 길바닥에 수북한 은행 수꽃을 봤다. 은행나무꽃이 필 때면 숲에서는 다래나무 순이 나왔다. 다래 순은 참취나 고사리만큼이나 흔한 산나물로 사하촌 식당에서 묵나물 밑반찬으로 빠지지 않았다. 다래나무는 응달의 돌너덜 주변을 서식지로 삼았다. 양미재에서 양목이고개로 가는 산등선을 돌아가다가 다래나무 군락지에서 여린 순을 따 모았다.
다래 순 채집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손쉽게 배낭을 채워 양목이고개로 내려서니 절정을 지난 산벚나무꽃은 꽃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야생으로 자란 고목 돌배나무는 하얀 꽃이 피어 눈이 부실 정도였다. 개복숭아의 산도화는 저물고 있었다. 고갯마루에서 중방마을로 가는 등산로로 내려섰다. 산짐승들도 찾아와 목을 축여갈 샘터에서 나도 물을 들이켰더니 갈증이 가셨다.
숲을 빠져나간 감계 신도시에서 시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한 친구에게 전화를 넣었다. 퇴직 후 문인화 화실로 나가 소일하는 친구다. 배낭에 든 다래 순을 건네받으십사 했더니 흔쾌히 응했다. 시내로 들어 귀가 전 친구를 만나 식당을 찾아 수육을 안주 삼아 맑은 술을 비우면서 화실 근황과 안부를 나누었다. 다래 순이 담긴 봉지를 건넸더니 등짐이 줄어 발길이 가벼웠다. 23.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