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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장 여섯을 하나로 (9)
진(秦)나라와 연(燕)나라가 혼인을 맺은 그 해, 연문공이 재위 29년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세자가 군위에 오르니, 그가 곧 연역왕(燕易王)이다.
연역왕은 재위 10년째부터 왕호(王號)를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호에 '왕(王)'자가 들어간 것이다.
이로써 조(趙)나라와 한(韓)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왕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연역왕(燕易王)이 새로이 군주가 됨으로써 연나라는 졸지에 진혜문왕의 사위의 나라가 되었다.
진(秦)나라로서는 더욱 잘된 일이었다.
- 진나라와 위(魏)나라의 화친.
- 진나라와 연(燕)나라의 혼인.
이것만으로 합종(合縱)이 깨어졌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소진의 합종책을 적극 후원한 조나라 임금 조숙후(趙肅侯)는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즉각 소진(蘇秦)을 불러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선생이 진(秦)나라를 배척하는 육국 합종을 주장하여 종약을 맺었는데,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 벌써 위(魏)ㆍ 연(燕)나라가 진나라와 우호를 맺었으니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오?"
"이래서야 합종(合縱)이라는 것을 어찌 믿을 수 있겠소? 만일 내일이라도 당장 진(秦)나라가 우리 조(趙)나라로 쳐들어오면 대관절 선생은 어찌할 작정이시오?"
소진(蘇秦)은 원래부터 합종이 그다지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워낙 각 나라 간의 사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이처럼 빨리 위(魏)ㆍ 연(燕)나라가 진(秦)나라와 우호를 맺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할 지경이었다.
"신이 지금 당장 연(燕)나라와 위(魏)나라로 달려가 두 나라 왕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내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단단히 다짐을 받아오시오."
소진(蘇秦)은 먼저 연나라로 가 연역왕(燕易王)의 사죄부터 받아낸 후 돌아오는 길에 위나라를 들르기로 마음먹었고, 드디어 연(燕)나라를 향해 출발했다.
그런데 예상치 않은 사태가 발생했다.
소진(蘇秦)이 연나라 수도 계성을 향해 가는 도중 제선왕(齊宣王)이 연문공이 죽은 틈을 이용해 군대를 일으켜 연(燕)나라 국경을 침공한 것이다.
소진(蘇秦)이 계성에 당도했을 때는 제군(齊軍)은 연나라의 성 열 개를 빼앗고 돌아간 뒤였다.
이 일로 인해 소진은 연역왕을 만나 진(秦)나라와의 혼사를 책망할 여지가 없었다.
오히려 연역왕으로부터 심한 원망을 들어야 했다.
"우리 선군(先君, 연문공)께서는 선생의 권유를 듣고 합종(合縱)에 가입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오? 선왕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동맹국인 제(齊)나라가 우리 나라의 성 열 개를 빼앗아갔으니, 무슨 합종이 이렇단 말이오?"
"나는 제(齊)나라가 빼앗아간 열 개의 성을 돌려받기 전에는 결코 합종 동맹에 가담하지 않겠소!"
아무리 언변이 좋은 소진이라 하더라도 상황이 이러한 데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소진(蘇秦)은 난감했다.
'꼬이는군. 어떻게 하면 합종(合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소진(蘇秦)은 몇 날 며칠을 고심했으나 좀처럼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는 미봉책(彌縫策)을 쓰기로 했다.
'어차피 영원한 것은 없지 않은가?'
소진(蘇秦)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성품의 사람이었다.
돌이켜보면 합종(合縱)이란 것도 결국 천하의 안녕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秦)나라에서 자신을 써주지 않은 것에 대한 앙심으로 발상해낸 것이 아닌가.
그래서 대개의 사가(史家)들은 소진을 사상가로서보다는 술책가로 평가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소진(蘇秦)은 연역왕을 찾아가 말했다.
"왕께서는 신을 제(齊)나라로 보내주십시오. 신이 제왕(齊王)에게 말하여 빼앗긴 성들을 왕께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연역왕(燕易王)은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했다.
"성을 돌려받지 못하면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마시오."
"신 또한 그러한 각오로 임치로 갈 작정입니다."
소진(蘇秦)은 연나라를 떠나 임치성으로 향했다.
소진의 재산은 세 치 혀였다.
그가 연역왕에게 호언장담(豪言壯談)하고 연나라를 떠나온 것 역시 자신의 세 치 혀를 믿고서였다.
그는 제선왕(齊宣王)을 알현하자마자 말했다.
"신은 한 가지를 조의(弔意)하고 또 한 가지를 축하하고자 왕을 찾아왔습니다."
제선왕은 영문을 몰라 물었다.
"무엇을 조의하고 무엇을 축하한단 말이오?"
소진은 앙연(怏然)히 대답했다.
"신이 듣기로 굶주린 사람이 아사 직전에 처해 있어도 오훼(烏喙)만은 먹지 않는다 했습니다. 그 까닭은 그것이 뱃속으로 들어가면 굶어죽는 것과 똑같이 해롭기 때문입니다."
"지금 연(燕)나라는 약소하지만 연왕은 진왕의 사위입니다. 왕께서 연나라의 성 열 개를 빼앗았으니, 이 때문에 제(齊)나라가 진나라와 원수가 되는 것은 어찌 생각지 않으십니까?"
"만일 연(燕)나라가 선봉이 되고 진(秦)나라가 그 뒤를 따른다면, 제(齊)나라가 어찌 그 화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왕께서 연나라의 성 열 개를 빼앗은 것은 곧 오훼를 먹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신은 조의(弔意)를 표한 것입니다."
오훼(烏喙)란 한방에서 쓰는 풀의 이름이다.
초오두(草烏頭), 또는 오두(烏頭)라고도 한다.
독성이 있어 많이 먹으면 목숨까지도 잃는다.
제선왕(齊宣王)은 소진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금세 어두운 표정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소진(蘇秦)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모름지기 사태를 잘 제어하는 사람은 능히 화(禍)를 복(福)으로 바꾸고, 실패를 성공으로 이끈다고 하였습니다. 왕께서 비록 연나라의 성 열 개를 빼앗긴 하셨지만 늦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열 개의 성을 연(燕)나라에 돌려주신다면 연왕(燕王)은 매우 기뻐할 것이요, 진왕(秦王) 또한 틀림없이 흐뭇해할 것입니다. 이것은 곧 원수를 없애고 대신 반석처럼 튼튼한 친구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연(燕)과 진(秦)이 동시에 왕을 지지하고 돕는데, 왕께서 어찌 패업의 도(道)를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이런 까닭으로 신은 왕께 축하를 올린 것입니다."
소진의 언변은 능란했다.
제선왕(齊宣王)은 때로는 두려운 표정을 짓기도 하고 때로는 기쁜 표정을 짓기도 하다가 대답했다.
"선생의 가르침에 따르겠소."
연나라는 빼앗긴 성 열 개를 고스란히 돌려받았다.
이로서 소진(蘇秦)은 겨우 깨어지기 직전인 합종(合縱) 동맹을 유지시켜 놓았다.
소진이 성을 돌려받고 계성으로 돌아오자 연역왕(燕易王)은 전과 달리 대대적으로 그를 환영했다.
"선생이야말로 천하기재요! 돌아가지 말고 아예 여기에 머물며 과인을 도와주시오."
소진(蘇秦)은 위나라로 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계성에 주저앉았다.
이때부터 소진은 연나라에 머물며 연역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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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연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