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발걸음의 무덤
뒤늦은 발걸음은 늦지 않은 발걸음과 몇 발짝쯤 차이 아닐까
골목의 어느 쪽으로 멀어졌는지 모르려면 몇 발짝쯤 늦어야 할까
늦어지는 사이에 창문은 몇 개가 닫히고 버스는 몇 대가 지나가고 눈은 몇 눈금만큼 쌓이고 낙엽은 몇 장이 떨어져야 할까
그걸 알면 후회와 사랑 사이의 거리를 알 수 있을까
당신 눈 밑은 검고 뒤늦은 발걸음이 터덜터덜 돌아와 밤을 뒤집어쓰고 오래 운 것 같다
늦은 발걸음을 가진 눈동자 밑에는 검은 무덤이 생겨나나 보다
무덤은 모르는 것들이 자는 자리
후회와 사랑의 거리를 알지 못하는 지각遲刻이 자는 자리
시퍼런 일
모르는 사람이 와서 내 밑둥을 잘라 볕 좋은 곳에 눕혀 놓았다 익지도 않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 후숙되리라는 말을 들었으나 나의 일 같지 않았다
버려진 어머니와 버린 아버지가 내게는 있어서 후숙이 필요했으나 돌이 되는 일이 그보다 빠를 것 같았다
나를 잘라 눕혀 놓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그사이 붉은 비가 몇 번 내렸고 검은 눈이 몇 번 내렸다
염소를 길렀는데 어린 염소가 태어나기도 했는데 계절을 넘기지 못하고 밑동이 잘리는 염소가 꼭 하나씩 있었다
그런 일 말고도 마르거나 젖는 것에 관여한 일들이 사이사이 있었으나 익지는 않았다
나의 일이었으나, 나의 일이 아니라고 오래 시퍼렇게 있었다
양철 우산
빗방울 소리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 양철 우산을 쓰고 싶다는 당신은 양철 지붕 아래서 오래 잠들었던 사람 같다
독이 든 생감자를 먹었을지 아카시아 가시에 손톱 밑을 찔렸을지 알 수 없으나 당신은 오랜 잠에서 깨어난 사람 같다
입을 맞추었을까, 양철 지붕 열기가 목에 걸린 감자를 익혔을까
어느 지붕도 양철 지붕처럼 비를 울리지는 못하고, 이곳은 비가 자주 오는 곳
당신은 깨어나지 않는 잠들이 사는 박물관 옆에서 자랐을 것 같고 양철이 울릴 때마다 깊은 잠 속으로 돌아갈 것 같다
그런 당신을 깨우는 습관을 나는 언젠가 잊을 것 같다
천세진 시인
시인, 소설가, 문화비평가, 인문학 칼럼니스트, 웹진 《초록의자》 발행인 겸 주간.
시집 『양철 우산』걷는 사람 2026,6 1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