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대 마르코 신부
연중 제9주간 수요일
마르코 12,18-27
하느님의 존재방식 : 순수현재
앞장에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예수께 와서,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로마황제에게 주민세(인두세)를 바쳐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물었다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17절)는
놀랄만한 명답(名答)을 듣고 물러갔다.
오늘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께서 와서
구약의 수혼법(嫂婚法)을 부활과 관련지어 질문을 던진다.
그들의 질문은 구약의 수혼법(창세 38,8; 신명 25,5-10)에 근거를 둔 것이긴 하다.
수혼법에 의하면 남편이 죽게될 경우 가장 가까운 형제로부터 친척까지(룻기 4,1-8)
미망인과 결혼해야하고, 이렇게 하여 낳은 첫 아들은 고인의 아들로 인정하여
이스라엘 가문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말한다.
그러나 칠 형제가 모두 맏형의 부인을 두고 자식 없이 살다 죽었다면,
부활 때 그 여인은 일곱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질문은
너무 과장된 가공(架空)의 질문이라 하겠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이 질문은 사실상 두 가지 측면을 의도하고 있다.
하나는 그 시대에 통하던 부활사상을 우습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된다면 예수까지 난처하게 만들 심상이었다.
우선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신약성서에서 "사두가이파 사람"은 94번 등장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보다 훨씬 드물게,
모두 14번 등장하는데, 마르코와 루카복음에 각각 1번(마르 12,18; 루카 20,27),
마태오복음에 7번, 그리고 사도행전에 5번 등장한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정확한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통치하기 시작했던 기원전 333년까지 거슬러가야 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침공한 모든 곳에 헬레니즘 문화를 퍼뜨린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이때부터 기원전 63년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던 때까지의 과정에서
지도층의 유다인들은 크게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에세네파, 열혈당원(젤롯당원),
꿈란공동체 등으로 분리된다.
비록 여러 번 나라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였지만 야훼신앙과 율법준수에 대한 정신은
누구보다 강했던 유다인들이다.
헬레니즘 문화와 이교도의 신과 여신의 숭배를 강요하던 희랍의 프톨로메오 왕가와
셀레우쿠스 왕가의 통치는 약탈과 박해로 이어지고,
결국은 유다인들의 무력(武力)저항을 불러오게 되고, 하스모네 가문의 마따니아가
선봉에 선다.
마따니아의 저항운동은 "하시딤"(경건한 자, 율법에 충실한 자들) 무리와 결탁하면서
막강한 힘을 얻게 되었고, 그의 아들 유다(마카베오)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유다는 마카베오항쟁을 일으켜 셀레우쿠스 군대를 무찌르고 기원전 164년 12월에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그 후 해마다 성전봉헌 축제(하누카)를 지낸다.
이를 계기로 종교적인 상황은 호전되었지만 정치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문제는 유다의 동생 요나단에 와서 벌어진다.
그와 그 일가는 헬레니즘 세력과 오히려 결탁, 협정 등을 통하여 유다를 통치하는 실세로 둔갑하였고,
다윗 시대 이후로 사독 가문이 맡아왔던 대사제장직을 겸하는 탐욕을 부렸던 것이다.
이에 "하시딤" 무리들이 결별을 선언하고
"분리된 자", "의로운 자"로 자처하는 율법 경건주의자들이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며, "경건한 자"로 자처하는 "에세네파" 사람이다.
후자는 속세를 떠나 사해 근처에 모여 꿈란 공동체를 이루었다.
나머지는 끝까지 무력으로 종교와 정치의 자유를 꾀하려는 열혈당원에 속한다.
결별을 선언한 자들이 모두 떠나고 남은 무리들이 바로 하스모네 가문의 후손들인
사두가이파 사람들인 셈이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당시의 대사제장직을 독차지하고 최고의회 산헤드린의 구성원으로서
당대 최대의 권력을 누리는 자들로서 율법에 대하여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단지 모세에게서 비롯된 율법, 즉 모세오경의 권위만을 인정하고
구전(口傳)된 율법이나 계율, 조상의 전통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모세오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기원전 2세기경부터 싹튼 부활사상을 믿지 않았으며,
천사의 존재, 사후(死後)의 상벌, 묵시론적인 사변과 같은 새로운 개념들을 철저하게
부정하였다.(사도 23,8)
원래 기득권은 변화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법이다.
사실 이스라엘은 예수의 출현으로 적지 않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고 날로 많은 추종자를 얻어 가는 예수를 위험한 인물로 간주하여
배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두가이파의 가공할 질문에 예수께는 성서와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먼저
탓하신다. 구약의 수혼법과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가 그런 오류를 빚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두 가지 의도를 내포한 답변을 시도하신다.
첫째는 육체부활의 의미를 밝히시는 것이고,
둘째는 하느님께서 죽은 이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의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아무래도 세상에 빗대어 천국을 상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육체의 부활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할 때 육신도 함께 부활한다면, 그 육신이 어떤 모양일지는
지금의 육신의 틀을 벗어나 생각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무지하게 더울 때, 시원한 곳을 천국이라는 생각,
무지하게 배고플 때 한 술의 밥이 천국이라는 생각,
사막에서는 오아시스가, 유목민들에게는 어렵게 찾아낸 푸른 풀밭이
천국과도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육신의 부활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차원임을
분명히 하신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과 발현에서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는 차원이다.
예수께서는 모세에게 하신 하느님의 계시말씀(출애 3,6)을 새롭게 해석하여
이 계시가 이미 부활사상을 내포하고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늘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눈에는 아브라함도 이사악도 야곱도 모두 죽었다.
인간이 죽어야 하는 이유는 태어났기 때문이다.
즉 시작이 있기 때문에 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반면에 하느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시니 늘 영원하시다.
이를 계시 신학적 언어로 "순수현재"(pura praesentia)라고 한다.
순수현재란 하느님의 존재방식으로 과거와 미래가 없는 늘 순수한 현재(現在)의
상태로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가 죽었던, 살았던, 살 것이든,
늘 살아 계신 하느님이신 것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