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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헌석 칼럼을 인용합니다. 한헌석칼럼 24호 다시 화림으로 - 보충 1 - 함경도 동북면의 안시성으로 |
글쓴이: 한헌석 조회수 : 247 08.10.06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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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선왕조실록 태조실록에 (목조 이안사가) 지원(至元) 원년(1264) 갑자 5월에 황제의 선명(宣命)을 받아, 그대로 알동(斡東) 천호(千戶)에 충원(充員)되었다. 지원(至元) 11년(1274) 갑술 12월에 훙(薨)하니, 공주(孔州) 【곧 경흥부(慶興府)이다.】 성(城) 남쪽 5리(里)에 장사하였다. 후일에 함흥부(咸興府)의 의흥부(義興部) 달단동(韃靼洞)에 옮겨 장사하였으니, 곧 덕릉(德陵)이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장 A면
’태조가 이로 인하여 변방을 편안하게 할 계책을 올렸는데, 그 계책은 이러하였다.
“ 북계(北界) 41) 는 여진(女眞)과 달단(韃靼)과 요동(遼東)·심양(瀋陽)의 경계와 서로 연해 있으므로 실로 국가의 요해지(要害地)가 되니, 비록 아무 일이 없을 시기일지라도 반드시 마땅히 군량을 저축하고 군사를 길러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될 것입니다."
세 종실록지리지 함흥부편 ’정릉은 이성계의 아버지 환조(이자춘)의 묘가 있고, 의릉은... 덕릉은... 안릉이며...화릉이다. 현릉 선릉도 이 부근에 있고 묘소들은 남쪽으로 함관령이 걸쳐 있고 동북쪽으로는 장성이 휘돌아 감고 있는데, 이 땅은 달단(TATAR) 땅이다.’
- 함흥, 영흥, 함관령, 쌍성총관부, 동북면, 삭방도, 화림, 카라코름의 지명들은 위 인용문으로 볼 때, 아무다리아강 중하류 지방의 화림(화리즘 콰리즘 호라산 카라쟌 지방)에 상도 대도 이전의 몽골의 수도인 카라코름이 있었고, 또한 함흥, 영흥, 함관령, 쌍성, 동북면, 삭방도가 있어서, 遼人과 타타르(몽골 즉 말갈)가 섞여 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遼人 출신인 이성계의 가계가 몽골의 다루가치가 되어 함흥의 실력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성계 시대가 되면, 사병 2000명을 거느릴 정도로 되었던 것이다.
물 론 여기가 칭키스칸이 중앙아시아를 침략하기 위한 교두보이기도 하다. 사마르칸트의 서쪽 200리에 갈한국이 있는데,-대당서역기 P24에 의하면, ’갈한국에서 서쪽으로 400리를 가면 포갈국(부화[-위서, 북사] 포활[-당서] 현재의 부하라)이 있다’고 했으니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의 사이에 카라코름이 있다.
- 대당서역기 P24의 주석에 ’서방문헌에 KHARGHANKATH(카르한카트>칼한카르>갈갈>걸걸)라고 표기하는 나라를 말한다.’고 나와 있다. 케시는 걸사비우(말갈)의 근거지이고, 갈한국은 걸걸중상과 걸걸조영(대중상과 대조영)의 근거지다. 이 칼한카르(혹은 카람코르)가 카라코름이 되는 것은 몽골어의 음운도치의 일반적 현상이다.
수 양제를 깨뜨린 양만춘장군으로 유명한 안시성이 발흐(함흥)다. 바로 아무다리아강 건너 북쪽에서 걸사비우와 걸걸중상과 걸걸조영(대조영)이 이 안시성으로 와서 양만춘장군 휘하에서 또 당과 대결하게 되는 것이다. 사기 대원열전의 대하조에 보면 ’대하는 대원 서남쪽 2천리, 규수(女+爲 水-아무다리아강) 남쪽에 있다.....대월지가 서쪽으로 옮겨간 뒤로 그들(대하)을 쳐서 깨뜨려 속국으로 만들어 다스리고 있다.... 그들의 수도는 란시성(藍市城-藍은 魯甘切 LAN)이라고 부르는데, 시장이 있어서 여러가지 물건을 매매하고 있다.’
- 수양제를 깨뜨린 양만춘장군으로 유명한 안시성이 발흐다. 란시성, 함흥의 다른 이름이 합란부(哈蘭府)인데, 워낙 국제 교역의 시장으로 유명해서 합란市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것이 합이 생략되어서 란시성 혹은 안시성이 되었다. 이 합(哈)은 원사와 집사에서 카 혹은 하로 발음되는, 말하자면 카(하)의 발음부호다. 환(칸)한 혹은 밝안은 똑 같은 스키타이어다. 밝안시성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밝자를 생략하면 안시성이 되는 것이다.
한헌석칼럼 21호 다시 화림으로 - 야르(YALU)강을 따라서 - 함흥 회령 부령 카라코름 쌍성(영흥) 온성 |
글쓴이: 한헌석 조회수 : 179 08.10.04 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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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견문록에서 마르코 폴로가 여행하는 화림 지방에서 세 지점을 언급하고 있는데, 1. 야치(鴨赤, 鴨池, 鴨水, 압물, 아물 - 현 차르조우[야르주)) 2. 카라쟌(화리즘, 화림, 현 우르겐치 혹은 히바) 3. 차르단단(쿠냐 우르겐치)를 분석해 보자.
1) 야치(아물)는 현 차르조우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회령 斡木河, 阿木河 五音會 鰲山 會山이라고 했다.(회령도호부 조) 이 위치는 철문관의 남쪽 요지인 테르메즈까지 400킬로미터, 원 우르겐치(쿠냐 우르겐치)까지 500킬로미터의 거리가 되는 화림지방의 중심 포인트가 되어서 아무다리아(아무르,야르[YALU])강을 그 지명으로 쓸 만하다. 알목하 아목하 오음회는 아무하의 발음을 표시하고 있고, 오산은 아물城에서 물은 생략하고 아성(야르성)이라고 발음한 것이고, 회산은 河城의 발음을 표시한 것이다.
이 차르조우에서 동쪽으로 아무다리아 강을 건너서 100킬로미터 지점에 부하라가 있다. 최두환칼럼 728호에서 인용하면, ‘富寧: 鍾城郡石幕·富居·寧山 이 부녕현은 실제로 부거(富居)와 녕산(寧山)을 합하여 만든 고을인데, 부거현은 폐현되었다고 그《신증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이 富居는 "부가참(富家站)"에 읍을 설치하여 도호부로 만든 것이 부녕도호부이므로, 이 부가(富家)·부거(富居)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바로 "Bukhara(부카라·부하라: 북위 40도 동경 64도)"인 것이다.
이 부하라의 동쪽 10킬로미터 지점에 카간이 있다. 한헌석칼럼 14호에서 언급한 대로 대당서역기의 갈한국이고 카라코름(KARGHANKATH)이다. 그런데 구글어쓰를 찾아보면 이 카간을 코곤(KOGON)이라고 표기해 놓았다. 이게 무슨 말일까? 전에 코칸트도 코곤이라고 했었다. 이것은 공관(公官)이라는 말이다. 가르간 혹은 구르간이라면 더 명확해지는데, 바로 國官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번에는 동관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입니다.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世祖 39卷, 12年(1466 丙戌 / 명 성화(成化) 2年) 6月 28日(丁卯) 2번째기사
함길도 관찰사가 동관진 절제사의 여진인 동태 보고를 아뢰다
함길도 절도사 정문형(鄭文炯)이 동관진 절제사(童關鎭節制使)의 정장(呈狀)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지금 보청포(甫靑浦)에 거주하는 올량합(兀良哈)의 가응거리(加應巨里)를 불러서 물으니, 대답하기를, ‘우을미거 올적합(亐乙未車兀狄哈)의 야당지(也堂只)가 일찍이 올량합(兀良哈)과 틈이 있었는데, 지금 군사를 거느리고 와 둔쳐서 우마(牛馬)를 쳐 빼앗으려고 하므로. 올량합(兀良哈)의 2백여 인이 올적합(兀狄哈)의 가졌던 잡물(雜物)을 다 빼앗아 버리니, 올적합(兀狄哈) 등이 손해를 보고 돌아갔습니다.’ 하였고, 또 시응거리(時應巨里)에 거주하는 올량합(兀良哈)의 구린거(仇麟巨)와 우린거(亐麟巨) 등이 강(江) 밖의 오지암(烏知巖)에 와서 둔치고 있었으나, 우리 군사가 이를 알고서 미리 방비한 까닭으로 침구(侵寇)할 수가 없어서 이미 돌아갔습니다. 신(臣)이 가만히 헤아려 보건대, 고령(高嶺)과 동관(童關) 등지에 횡행(橫行)하는 도적은 비록 성명(姓名)은 변했지마는 그 실제는 같은 도적이니, 다시 염탐해 알도록 했습니다.”
하였다.
12월 27일(정해)
동관 첨절제사 임효곤을 개차하다 |
병조 판서(兵曹判書) 정괄(鄭佸)이 와서 아뢰기를,
“ 동관 첨절제사(潼關僉節制使) 임효곤(林孝坤)이 변방(邊方)에 부임(赴任)하는 것을 꺼려하여 병이 들었다 핑계를 대고 사직(辭職)하였으니, 매우 옳지 못합니다. 무인(武人)은 힘이 강성(强盛)할 때 임용(任用)해야 하는데, 임효곤의 나이가 거의 노인이 되어가니, 만약 이때를 넘긴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동관(潼關)은 진실로 요해지(要害地)이니 반드시 마땅한 사람을 가려서 위임해야 할 것입니다. 청컨대 개차(改差)하지 말고 아울러 병을 칭탁하는 까닭을 추국(推鞫)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 동관(潼關)은 평소 임기 응변(臨機應變)해야 하는 지역이다. 임효곤(林孝坤)은 진실로 병이 있으니, 만약 뜻밖의 변고(變故)가 있게 되면 활을 잡고 적(敵)을 제압할 수 있겠는가? 개차(改差)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임효곤은 북정(北征)에서 돌아올 때 말에서 떨어져 다쳐 침질과 뜸질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말하였고, 그 때 또한 그것을 본 사람도 있으니, 임효곤을 불러 병(病)의 허실(虛實)을 상세히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정조 즉위년 병신(1776, 건륭 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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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0일(기사)
동관 첨사(潼關僉使) 이만익(李萬益) 등에게 활과 화살을 지급하였다
○ 하교하기를,
“ 지금 내린 활과 화살을 동관 첨사 이만익, 천마 첨사(天摩僉使) 홍집(洪集), 식송 만호(植松萬戶) 최익서(崔益瑞), 영달 만호(永達萬戶) 김서정(金瑞貞), 막령 만호(幕嶺萬戶) 이정후(李挺厚), 청수 만호(淸水萬戶) 백순일(白純一), 인차외 만호(仁遮外萬戶) 조순(趙洵) 등에게 지급하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고종 9년 임신(1872, 동치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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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 등의 시임 진장을 개차하고 후임에 절충장군 김낙휘 등을 차송하겠다는 병조의 계 |
○ 병조가 아뢰기를,
“ 북병영(北兵營)의 관할인 동관(潼關), 미전(美錢) 두 진은 모두 국경의 요충지입니다만, 성해(城廨)와 군물(軍物)이 매우 무너지고 쇠퇴하였는데도 시임(時任) 진장(鎭將)이 수거(修擧)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모두 개차하고 그 대임에 절충장군(折衝將軍) 김낙휘(金洛輝)ㆍ김석주(金錫疇)가 모두 이러한 직임에 합당하니 특별히 차송하라는 대원군의 뜻을 받들어 오늘 정사에서 거행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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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코름(하라호름)은...몽골이 제국을 서역으로 확대하면서 새로세운 신 왕도이니 거긴 맞을 수도 있겠습니다...그러나 원 발원진 현 몽골 동부가 맞을듯 합니다...바로 옆이 차가타이 한국인데...대원의 각 제국들의 동력 고향이자...차가타이한국의 라이벌 대원국자리가 거기만을 중심으로 있을 공간치곤 너무 좁습니다...알타이 남부만 지나면 몽골초원인데...대제국 고려도 좌지우지했던 몽골이...현 몽골만 못 들어가 놔뒀을 리도 없고...그 당시는 그곳도 쓸남한 땅이였으니...내 버렸던 땅일수도 없어 보입니다,
칭기스칸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쳐들어갑니다. 몽골은 서역에 있던 서융이고, 흉노/철륵/돌궐/여진/말갈의 후예입니다. 고려사에서 서방을 북방/동북방으로 위조하였기 때문에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오랑캐라고 하는 북방민족은 천산이서에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현 몽골이 쓸만한 땅인지는 더 고찰이 필요한것 같습니다. 또한 설사 현 몽골이 옥토라도 타림분지를 먹어야 가능한 것이고 발원지가 현 몽골라는 말씀은 더 전략적인 측면의 분석이 필요하며, 수천킬로미터를 본거지를 이동한여 세력을 키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봅니다.
고려를 처 들어갈 땐...당연히 신장지구(요동?)로 내리 쐈을 것이니...고려의 황도 타클라마칸 일대서 보기엔...서북쪽에서 내려오는 이치겠지여...
몽골의 발상은 동쪽입니다...거길 현 몽골이 아니라 가정해도...타타르를 치고 들어가 차자타이 킾착크 한국을 만듭니다...그럼 서부 러시아에서 타타르를 북유럽으로 치고 들어갔단 얘기가 되고...그 서남쪽 호라즘(훌레그 한국)이...현 유럽이 된단 모순이 생깁니다...비잔틴은 영구에나 있어야 하는 모순이고여...그러니 고향과 발원지는 오히려 더 동쪽으로 현 외몽골 동부 헨티로 봐야 하며...점차 타타르를 밀고가...중앙아와 러시아를 먹은 연후...그 공로와 힘을 인정해...고려에게 오아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며...힌이 커진 징기스칸의아들 오고태가...고려를 넘보게 되는 이치로 보입니다...
현 외몽골에서 천산으로 오든...카자흐(차가태 몽골)나... 러시아(킾착크 몽골)에서 천산으로 오든...오로지 대 기마군단이 들이닥칠 거의 유일한 진격로는...이르티쉬 상유인...현 신장성 북부로 보입니다.
그래,서북에서 밀고 들어왔으니...서북에서 온 걸로 하는 이치지...그 발원지는 원(元=완안부)는...현 외몽골이 맞을듯 합니다...대원제국의 기틀이 마련된 내몽골 일대를 다 먹은 싯점부턴 명분상의 황제 지역이...현 내외몽골일까 합니다,
조선시대엔...태종때 현 원나라 지역이 거의 다 와해되어...그냥 명목만 북원으로 찌그러져 있었고...알타이 서북의 깊착크 지역만 타타르 몽골인들이 건재해...거기만을 몽골이라 칭한걸...잘못 해석해서일 겁니다.
부거(富居): 북(鐘)을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종성이 부녕이고, 부녕은 부거와 녕산을 합친 것이라고 했으므로, 부거는 종을 뜻하는 것입니다. 부거에서 "부하라, 북소로"가 나온 것입니다. 마침 동관이 여진어로 쇠북을 뜻합니다.
종을 엎어놓은 모양처럼 생긴 산을 부하라에서 찾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현 부하라의 반경 45리지점에 큰 산이나 설산이 나와 주어야 합니다.
산해경 서산경에 종산(鐘山)이 나옵니다. 이 지역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겠습니다.
산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장을 잘 살펴보세요. 돌을 쌓아서 만든 성이라고 했으며, 종을 엎어놓은 모양입니다. 부하라에 올라온 사진을 보면 회교사원, 즉 돔 형식의 사원이 있습니다. 이것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부하라에 산성을 쌓을 만한 산이 있습니다. 鐘城이 백산(小白山) 부의 남쪽 45리에 있으니 진산(鎭山)이다. 봄과 여름에도 눈이 있다. 동건산(童巾山) 부의 북쪽 25리에 있다. 모양이 종(鐘)을 엎어놓은 것과 같다. 부의 명칭이 이 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 신증의 내용에 나타난 동건산과 그 지명의 유래는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