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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성시대 jeangenie
지난번에 포스팅한 이기 팝 1탄은 여기에!
지난 글 끝에쯤에서 이야기했던 1972년 런던 도체스터 호텔 기자회견에서 찍힌 사진 투척하고 시작한당^^
↑ "하핳하하하핫 칭구야 하하하하핳" 보위와 이기 팝
#6. 글램
1972년 7월 RCA 음반사에서는 런던 도체스터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바다 건너 미국 기자들까지 초청해.
한 달 전에 보위의 <지기 스타더스트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앨범이 나왔고
그 해 가을에 미국 투어를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리 언론의 관심을 끌어보기 위해서였어.
보위의 초대를 받고 영국행을 택한 이기 팝과 루 리드도 모습을 드러냈어. <벨벳언더그라운드>를 탈퇴한 루 리드는
같은 해 첫 솔로 앨범을 발표했지만 대중과 평단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어. 그러다 보위와 보위 밴드의 기타리스트 믹 론슨의
프로듀싱으로 같은 해 11월 유명한 <트랜스포머Transformer> 앨범을 내고 <벨벳> 활동 시절이래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게 돼^^ 영화 <트레인스포팅>으로 더 유명해진 "Perfect Day", 그리고 "Walk On The Wild Side" 모두
그 앨범에 수록된 노래들이야! 한편, 1집과 2집 모두 상업적으로 실망스런 결과로 이어진데다
멤버들의 알코올이나 약물중독 때문에 거의 해체 직전에 이르렀던 이기 팝과 스투지스 역시
보위의 도움을 받아 이듬해 2월 <Raw Power>라는 앨범을 발표하게 돼!
↑ (위) 한담 중인 보위와 루 리드,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마크 볼란Marc Bolan의 그룹 <티렉스T-rex> 티셔츠를 입고 있는 이기 팝
(아래) 계속 혼자 뭔가를 읽고 있는 이기 팝. 왼쪽 사진에서 마주앉은 여자는 보위의 당시 아내였던 앤지.
런던에 거처를 마련한 이기는 몇 해 전에 새로 밴드에 합류한 제임스 윌리엄슨James Williamson과 곡 작업을 하기로 했고
마땅한 충원 멤버를 영국에서 찾을 수 없자 미국에 있던 애쉬턴 형제(론 애쉬턴 & 스콧 애쉬턴)를 불러들여.
크레딧에는 보위가 믹싱을 맡았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 보위가 크게 손 쓸 수 있는 부분은 없었대; 어쨌든 이 카오스적인 앨범은
평단의 호의적인 평을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판매량은 신통치 않았어.
게다가 이기와 멤버들의 마약 중독이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지고 엄청난 돈이 약값으로 날아가버리자
레코드사와 매니지먼트사 모두 그들과의 계약을 파기해려. 밴드는 결국 74년에 해체되고 만당.
이기는 그 길로 LA의 정신치료시설에 입소하고, 2년 뒤 보위가 다시 불러낼 때까지 거의 은퇴한 것처럼 지내게 되지ㅠㅠ
↑ 글램glam 시기의 루 리드와 이기 팝. 진한 메이크업과 화려한 의상이 특징이지. 특히 루 리드는
사진에서는 잘 안 보이지만 정말 팬더곰처럼 화장을 했당! 73년에는 그야말로 가부키; 수준에 이름!
↑ (위) 유명한 레오파드 가죽재킷을 입고 있는 이기 팝. 60년대부터 패션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런던에는
당시까지도 <비바Biba>를 비롯한 온갖 창의적인 숍들이 넘쳐나고 있었어.
저 재킷은 존 도브와 몰리 화이트John Dove and Molly White가 1971년에 제작한 거래.
(아래) 포토그래퍼 믹 록Mick Rock과 루 리드, 1975년. 글램 시대의 아이코닉한 사진들 대부분이 믹 록의 손에서 나왔어.
위의 레오파드 재킷을 입은 이기 팝 사진은 물론, 보위, 루 리드, 스투지스의 앨범 커버 모두 믹 록의 작품이야!
루 리드는 보위의 런던 공연 무대에도 같이 오른당. 72년 5월과 7월에 각각 한 번씩.
같이 <벨벳언더그라운드>의 "White Light/White Heat", "I'm Waiting For The Man" 같은 곡을 연주했어.
(20여 년 뒤, 보위의 쉰 번째 생일날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똑같은 무대가 재연되지!^^)
↑ 1972년 7월 8일 로열페스티벌홀 공연 장면. 보위, 루 리드, 기타리스트 믹 론슨.
↑ 공연 당일 루 리드와 보위. 그리고 아래는 2007년의 두 사람^^
↑ 루 리드는 말하고 보위는 듣고, 보위는 상대방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똑같음^^
이기 팝에 관해 포스팅 중이지만... 하아.... 나는 개인적으로 보위의 대인관계 기술이나 인간관계가 정말 놀라워.
루 리드 할아버지는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뮤지션인데 사실 좀 괴팍하심; 상대가, 특히 언론사 기자들이
'헛소리'다 싶은 얘기를 꺼내면 진짜 가차없이 무섭게 몰아붙이시는;;; 지금은 좀 유해지셨을지 모르지만
잘못하다간 진짜 맞는 수도 있음. (보위도 한번 당했다는 소문이 있...;;;;)
#7. 가십
기사와 소문이 맞다면, 79년도에 루 리드의 보위 구타사건이 있었어^^;
루 리드의 공연이 있던 날이었고, 음악지 기자들 몇몇이 루 리드와 보위가 저녁식사를 하고 있던 레스토랑에 들어가게 돼.
두 사람은 아주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대화 중이었대. 루 리드는 위 사진처럼 보위 어깨에 손을 올리고 이야기하고, 보위는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두 손을 모은 다소곳한 자세로 루 리드 얘기를 듣고 있었고. 근데 보위가 루 리드의
다음 앨범 프로듀싱을 맡고 싶다는 얘길 하면서 그 전에 먼저 마약을 끊었으면 좋겠다고 얘길했나봐. 여기서 일단
루 리드가 무섭게 소리를 질러서 잠깐 분위기가 험악해졌어. 하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듯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돌아왔는데
보위가;; 똑같은 얘길 다시 꺼낸 거야. 루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보위한테 주먹을 휘둘렀는데, 사람들이 들러붙어
말린 뒤에야 자리를 떴대. 눈물이 글썽글썽해진 보위는 애꿎은 기자한테 화를 내고, 의자를 걷어차고
레스토랑을 나가면서 층계에 놓인 화분을 다 걷어찼대. 그리고 다음날 스태프를 보내서 손해변상했다 함^^;
이제 이기 팝이 겪은 황당한 에피소드 얘기를 해볼게. 때는 1973년, 이기 팝과 스투지스는 미국에서 공연 중이었어.
이기 팝의 진가를 일찌감치 알아보고, 이기 팝과 그 밴드한테 열띤 애정을 보냈던 사람들 중에
정말 뜻밖에도 엘튼 존Elton John이 있었어! 엘튼 존은 이기의 공연을 보고 이기가 왜 아직 대스타가 되지 못했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말하기도 했대. 그날도 스투지스 공연을 보고 열광한 엘튼 존은, 그 다음날 공연에는
이기 팝을 위해 깜짝쇼를 선보이자는 생각을 하게 돼. 그 깜짝쇼란 바로.... 고릴라 옷을 입고 무대에 올라가 춤을 추는 거였어;;
↑ 당시에도 물론 마약에 절어있던 이기 팝은 자기가 정말 애틀랜타 한복판에서 고릴라의 습격을 받는 줄 알았대.
사진 속에 기타리스트 제임스 윌리엄슨의 얼굴 표정 보여?
다행히 윌리엄슨이 주먹을 날리기 직전에 엘튼 존이 인형 머리를 벗었대^^;
#8. 니코
스투지스의 셀프타이틀 데뷔 앨범 <The Stooges>(1969)의 프로듀싱을 맡은 사람은 다름 아닌 <벨벳언더그라운드>의
존 케일John Cale이었어. 그 인연도 있었고, 또 스투지스의 매니지먼트를 맡았던 대니 필즈Danny Fields의 인맥도 있어서
밴드 멤버들은 그 해에 앤디 워홀의 팩토리를 방문하게 돼. 온통 은박지로 뒤덮인 공간에 괴짜란 괴짜들은 전부 모여있는 그곳이
미시건 앤아버 출신의 멤버들한테는 어색하기 그지없었어. 그런데 다른 멤버들로서는 뜻밖에도
이기가 워홀의 뮤즈이자 팩토리의 슈퍼스타팩토리의 왕언니 니코Nico와 서로 어울려 다니기 시작한 거야. 아홉 살 연상에
키도 훤칠한 니코가 이기의 손을 잡고 이기를 마치 아들내미처럼 데리고 다녔대^^ 한지만 니코의 주변 사람들은
니코가 이번에도 "또 한 명의 시인"을 만나 사귀는 구나 하고 생각했대. 언제나 니코는 대단히 똑똑하고 예술적이면서 광기어린
괴짜들한테만 진심으로 마음을 열 수 있었나봐.
(덧붙이자면, 니코의 키는 대략 178센티미터 정도였던 것 같아. 5'10''였다고 함.
루 리드의 노래 "베를린Berlin"에도 "In Berlin, by the wall, you were five foot ten inches tall"이라는 가사가 나오지!^^)
↑ (위로부터) 연주 중인 존 케일(흰색 목장식+단발머리)과 루 리드, 탬버린을 든 니코, 대니 필즈와 니코
니코의 본명은 크리스타 패프겐Christa Paffgen. 1938년에 나치 치하의 독일 쾰른에서 태어났어.
이듬해에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니코의 아버지도 참전해 머리 부상을 당해 전사하셔. 전쟁이 끝나고 1946년에
니코는 어머니와 함께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기고, 어머니는 재봉일로 생계를 잇는다. 니코도 열세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베를린의 대형 백화점인 카데베KaDeWe에서 속옷 파는 일을 시작해. 바로 거기서 픽업돼 모델 일을 하게 된 니코는
이후 평생에 걸쳐 유럽과 미국을 떠돌아다니며 생활하게 된다.
↑ 60년대 초, 광고와 잡지 모델로 활동했던 니코
이기를 만난 니코는 아예 이기를 따라 미시건에 있는 밴드 멤버들의 집 "펀하우스Fun House"로 거처를 옮기기로 한다!
뉴욕 첼시호텔에서 머물던 그녀가 집 뒤로 옥수수밭이 펼쳐진, 남자애들 넷이 사는 집에 자진해서 들어간 거야.
↑ 펀하우스 밖에 앉아 있는 멤버들. 왼쪽부터 데이브 알렉산더, 이기 팝, 론 애쉬턴, 스콧 애쉬턴.
이 때 촬영된 흥미로운 영상이 있어. 도미니크 드 메닐Dominique de Menil이라는 유명한 예술품 수집가의 아들이었던
프랑수아가 니코를 좋아해서 니코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대. 그러자 니코는, 나 지금 미시건에 와서 살고 있으니
찍고 싶으면 이리로 오라고 했고, 그 말에 프랑수아는 비싼 카메라와 장비를 챙겨 들고 정말로 펀하우스를 찾아간 거야.
프랑수아 드 메닐, 니코, 그리고 이기 팝은 일종의 뮤직비디오를 찍는다. 프랑수아가 택한 장소는 갈아엎은 감자밭.
밭 여기저기에 인형이 세워지고, 거대한 십자가가 불타고,
얼굴을 희게 칠한 이기는 애처로운 강아지처럼 감자밭을 이리저리 뛰어다닌당.
* "Evening of Light"(프랑수아 드 메닐, 1969)의 영상은 여기서 볼 수 있어.
이기는 니코가 굉장히 강인한 사람이었다고 말해. 자아가 강했고 자기 예술에 대한 포부가 컸대.
이기 팝의 음악이나 퍼포먼스에 대해서도 꼬박꼬박 의견을 달았고. 이기는 초창기 한동안
위 영상에서처럼 얼굴에 흰 칠을 하고 공연하는데, 그것 역시 니코의 제안이었다고 해. 하지만 그런 이면에는
대단히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 숨어있었고. 이기 팝은 이렇게 얘기한당, 아직은 그녀의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이 드물지만
언젠가는 반고흐가 그랬듯 니코의 예술에 사람들이 "와아아-"하는 날이 올 거라고.
↑ 1974년 6월 1일 같이 무대에 오르고 그 때 연주한 음악을 라이브 앨범으로 낸 네 명의 아티스트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브라이언 이노Brian Eno, 니코, 존 케일, 케빈 에이어스
#9. 다시 베를린
일종의 자기검열이기도 했고 무거운 이야기는 되도록 피하고 싶어서 다른 포스트에도 그랬고 이 글에서도
마약 얘기는 그냥 "마약"으로 통칭해왔어. 사실 이기 팝과 밴드 멤버들, 루 리드와 그 일당들이 중독됐던 건 헤로인이고
보위가 힘들게 극복한 건 코카인 중독이었지. 보위와 이기 팝이 정신적 "청소"를 위해 떠난 베를린은 "마약을 구하기가
비교적 어려웠던 곳"이라고 썼지만, 사실 코카인을 구하기가 어려웠지 헤로인은 그렇지 않았어. 그래서 아마 이기가 보위보다
"청소"하기가 더 어려웠을 거야. 베를린 생활은 희망과 절망이 공존한 생활이었어. 이기 팝은 아직 정상적이고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잘한 살림들은 일단 보위가 맡았던 것 같아. 직접 차를 몰고 카데베 백화점에 가서
식료품을 사오는 일, 등등. 보위와 이기 팝, 보위의 비서 코코 슈왑 이렇게 세 사람은 낮에는 주로 미술관에 가고
밤에는 베를린의 명물인 화려한 나이트클럽을, 주말에는 반제Wannsee 호수를 찾았대. 보위와 이기 팝은 자전거를 타고
나치 시대의 유물과 전쟁 폐허를 둘러보기도 하고,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모이는 카페에서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어.
↑ (위) 1976년 후반 베를린에 정착했을 때, 코코 슈왑의 생일 파티를 열어주고 있는 보위와 이기 팝,
1977년, 베를린 노천카페에 앉아있는 세 사람.
(아래) 하우프트슈트라세 155번지 아파트 전경,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이기 팝.
↑ (위) 브라이언 이노, <Low> 앨범 작업 중인 보위, 토니 비스콘티, 브라이언 이노
(아래) 가사를 쓰고 있는 보위, 1977년 한자 스튜디오.
그들 일행이 즐겨 찾았던 곳 중의 하나는 트랜스섹슈얼 댄서 겸 배우 로미 하그Romy Haag가 운영하는 나이트클럽
<셰 로미 하그>였어. 이기 팝의 앨범 <The Idiot>(1977)에는 "Nightclubbing"이라는 노래가 실려있지!
보위가 "Boys Keep Swinging"(1979) 뮤직비디오에서 여장을 하고 등장하는 것도
로미 하그의 클럽 무대에서 영감을 얻은 걸지도 몰라.
↑ 아마도 1977년 1월일 듯? 로미 하그의 클럽에서 열린 보위의 서른 살 생일파티 장면이야.
이기 팝과 보위 사이에 앉은 여자가 로미 하그^^
보위, 이기 팝, 코코 슈왑 세 사람은 20세기 초 다리파Die Brucke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브뤼케 미술관을 자주 찾았어.
이기 팝의 앨범 <The Idiot>의 커버 사진이 에리히 헤켈의 <Roquairol>(1917)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라는 얘긴 벌써 했지?
보위는 베를린에서 이기 팝에게 화구를 사주고, 붓이나 캔버스 쓰는 방법 같은 기초적인 것들을 가르쳐줬대.
이기 팝도 그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지금껏 아주 개성 있는 그림들을 그리고 있어. 전시회도 열고!^^
덧붙이자면, 이기 팝의 앨범과 마찬가지로
보위의 앨범 <"Heroes">의 커버도 헤켈의 동명의 판화에서 영감을 얻은 거라는 설이 있었어.
그런데 알고보니 다른 견해들도 있더라. 발터 그라마테Walter Gramatte의 자화상, 심지어는
에곤 쉴레Egon Schiele의 자화상이 영감이 된 것 같다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어.
↑ (위 왼쪽부터) 에리히 헤켈, <Roquairol>(1917); 에곤 쉴레, <팔을 든 자화상>(1914);
발터 그라마테, <히덴제 섬에서의 자화상>(1920년경)
(아래) 보위 사진 전시회에서 저 아이코닉한 "Heroes" 사진의 주인공, 포토그래퍼 스기타 마사요시.
이 분이 바로 내게 멘붕을 선사해주신 할아버지ㅠㅠ 최근에 열린 사진 전시회를 관람했던 어느 일본인의 블로그를 읽었는데
내내 전시장에서 자리를 지키고 계시던 스기타 씨는 친절하게도 직접 관람객들한테 사진 설명을 해주기도 했대.
그런데 바로 이 사진! 앞에서...... 이건 보위가 머리 정리를 하고 있을 때 셔터를 눌러 우연히 나온 포즈라고 그랬다는 거야ㅠㅠㅠ
#10. 스기타 마사요시
스기타 마사요시는 주로 지기 스타더스트 시절부터 보위를 찍어온 포토그래퍼로 유명한데, 이기 팝도 보위와 함께
70년대 후반 일본을 방문하면서 스튜디오에서 이런저런 촬영에 참여하고 그랬던 것 같아.
1981년에 발표한 앨범 <Party> 커버에 실린 사진도 스기타 마사요시의 작품!
1977년이나 그 이듬해에 찍은 것 같은데, 81년에 가서야 빛을 보게 된 사진이야^^
↑ 왼쪽 사진에서 보위 오른쪽에 앉은, 점퍼 입은 사람이 젊은 시절의 스기타 마사요시.
스기타 마사요시는 이기 팝과 보위가 이기의 서른 번째 생일 케이크를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오른쪽 사진처럼
일상적인 사진들도 많이 찍었어^^
#11. 가족
1984년 <피플People> 매거진 12월호에는 낯선 모습의 이기 팝 사진이 실려......
......바로 청소기를 돌리고 있는 이기 팝!^^
무려 60년대 후반부터 뮤지션으로 활동해왔지만 상업적 성공과는 요원하기만 했던 이기 팝은
보위가 1983년에 메가히트급 앨범 <Let's Dance>에서 "China Girl"을, 이듬해인 1984년에 "Tonight"과 "Neighborhood Threat"을
커버해 발표하면서, 갑작스레 그리고 마침내 금전적 풍요와 명성을 얻게 돼. 1984년에 이기 팝은
그 전 해에 일본 투어 공연 때 만난 아사노 스치라는 여자와 결혼을 한당. 스치와의 결혼생활은 1999년까지 이어져.
"난로를 열고 불 붙은 성냥개비를 들이대는 것처럼" 살아왔고 그러는 동안 "몇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고백하는
서른일곱의 이기 팝은, 이제야 마침내 안정된 생활에 정착한 듯했어. 아내한테 영어를 가르쳐주고,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는 아내와 함께 패브릭 숍을 찾아 다니고, 청소기도 돌리면서 말이야^^
기사에는 이기의 어머니 루엘라 오스터버그 여사의 소감까지 등장한다. "우리 아들은 이제 아주 새 사람이 됐어요.
이젠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고, 신문도 읽고, 크로아상으로 아침을 먹는 평범한 생활을 즐긴답니다."
"옛날에는 또래 어머니들마다 저한테 그랬죠. '우리 아들도 짐(이기 팝의 애칭)처럼 말 잘 듣고 상냥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 이기 팝의 본명은 제임스 오스터버그James Osterberg. 원래는 속눈썹이 길고 수줍음 타는, 공부 잘 하는 소년이었어.
아버지는 고등학교 영어교사였는데 학생들을 엄하게 다루는 편이었대. 그런데 이기 팝의 가족은
집을 마련해 살지 못하고 주로 트레일러 파크를 전전하며 생활했다고 해!
이기는 미시건대 인류학과에 지원해 합격해. 하지만 지지부진한 교과과정을 못 견디고 몇 개월만에 그만두고
인류학 책을 혼자 찾아 읽으면서 레코드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을 시작해.
기사에서 이기 팝은 이렇게 말한다. "전 대학에서 인류학 수업을 들었고,
부족주의나 원시사회에 대해 배운 것들이 저한테 큰 영향을 미쳤어요.
↑ 고등학교 시절 가입해 활동한 밴드 중 하나였던 <이구아나Iguanas>.
이 밴드명에서 이기 팝의 스테이지네임 "이기"가 탄생했어^^
↑ 이기 팝한테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아들의 이름은 엄마 성을 딴 에릭 벤슨.
90년대엔 밴드들의 로드매니저로 일하면서 아버지 일도 돕고 그랬어.
↑ 이기 팝은 1999년에 만난 승무원 출신의 글래머러스한 여인 니나 알루와
지금까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한당^^
#12. 영화
이기 팝은 80년대에 연기 수업을 받고 80년대 후반부터 각종 영화에 출연에 출연하게 돼.
<시드와 낸시>(1986), <커피와 담배>(2003)에서는 자기 자신으로 등장하고,
프랑스 애니메이션 영화 <페르세폴리스>(2007)의 영어 더빙에 참여하기도 하고! 나는 특히
조니 뎁이 주연을 맡은 영화 <데드맨>(1995)에서 이기가 연기한 '성경책에 집착하는 복장도착자' 캐릭터를 잊을 수 없어^^
이기 팝과 조니 뎁, 그리고 영화감독 짐 자무시는 사적으로도 친분이 두텁하고 해.
#13. 제임스 윌리엄슨
2009년 해외토픽에는 이런 뉴스가 있었어. 젊었을 때 밴드 생활을 하다가 일찌감치 음악생활을 접고
대학 학위를 따고 평범한 기업에 입사해 마침내는 부사장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이
때이른 사표를 내고 다시 원년 멤버들과 밴드에 합류했다고. 이 뉴스의 주인공이 바로 기타리스트 제임스 윌리엄슨이었어!
↑ 무려 소니전자 기술표준부문 부사장이었던 제임스 윌리엄슨!
↑ 이기 팝과 함께 활동할 당시의 제임스 윌리엄슨. 오른쪽 위는 패티 스미스와 함께 찍은 것!
앞에서 본 고릴라 분장을 한 엘튼 존 사진에서 엘튼 존을 노려보던 사람이 바로 윌리엄슨이었지^^
윌리엄슨은 1979년에 이기 팝의 앨범 <Soldier>에 참여한 것을 끝으로 완전히 음악을 접고
전자공학 공부에 매진, 캘리포니아 폴리테크닉 주립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소니에 입사한당^^
회사에서는 이기 팝이니 스투지스니 음악이니 하는 얘기를 일절 안 했기 때문에
회사의 공학도 너드들은 자기 동료가 그 유명한 이기 앤드 스투지스의 멤버였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대!
↑ 다시 기타를 잡은 제임스 윌리엄슨. 그런 동료를 흐믓하게 쳐다보는 이기 팝^^
윌리엄슨이 합류하게 된 건, 스투지스의 원년 멤버이자 애쉬턴 형제의 형 론 애쉬턴이 그 해 초에
갑작스레 유명을 달리한 게 계기였어. 론 애쉬턴의 빈 자리를 윌리엄슨이 메우게 된 거지.
그래서 이제 활동하는 스투지스 멤버는
이기 팝(보컬) + 제임스 윌리엄슨(기타) + 스콧 애쉬턴(드럼) + 마이크 와트(베이스) + 스티브 맥케이(색소폰)야.
이기 팝 포스팅은 이렇게 마무리할게^^
나는 원래 보위 팬이고, 이기 팝도 보위를 통해 알게 됐고 알아나가는 과정이라
겉핥기 식으로밖에 못 썼지만 재밌게 읽었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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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내가 가장 저아하는 60-70년대 음악들 ㅜ.ㅜ 이런거 싸줘서 너무 좋다ㅜㅜㅜㅜㅜㅜ
난 벨벤언더 그라운드랑 루리드.팬이야ㅠㅠ
언니 거마우ㅏㅇ ㅜ.ㅜ 내가 지금 취해사ㅜ 내일 다시 전확히 읽어여겠어ㅠㅠㅠ 수고했어 언니ㅠㅠㅠ
우와 이런글 섹시해....
벨벳.. 내 중딩시절을 앗아간 영화 ㅋㅋㅋㅋ
대대대형 연어.... 글 좋아.....
ㅠㅠㅠ 너무 좋아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