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또 다른 “나”의 이해를 위하여
-영(靈)의 실재(REALITY)에 대한 추론
서양 사상의 큰 흐름을 한 줄로 표현하자면 2300여년전에 쏘크라테스가 던진 질문에 대하여 예수는 God의 피조물로서 신을 섬기는 존재라고 규정하고 그후 1800년이 흐른 후 칸트에 의하여 인간 이성에 존재하는 신성을 가진 존재로 변화 발전한다. 칸트 이후 인간의 이성을 관장하는 마음[靈]을 연구하게 되며.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 대세를 이루어 철학은 과학과 접속되는 계기를 맞게 된다. 현대에 일부의 철학은 과학을 도입하여 뇌과학으로 발전하고 순수철학은 훗설의 현상학과 화이트헤드적 과정철학으로 발전하여 신을 유추하고 논증하려 하며, 뇌과학은 우리의 정신작용을 추적하여 신의 궁극적 실체를 찾으려고 한다. 또 천체물리학은 우주에서 우주의 근원을 밝힘으로 신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그 기술을 발전시켜왔다. 물리학은 미세물리학으로, 생물학은 분자생물학에서 생명의 신비를 찾아가고 있다. 결국 물리학은 서로 연계하며 천체물리학은 빅뱅이론과 대우주의 사진을 만들어 내고 분자생물학은 고도의 유전공학으로 발전하여 인간이 새로운 종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한 경지에 이르고 있다. 언듯 보면 인간의 능력이 신에 버금갈 만한 위치에 이르러있다. 현대 물리학은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으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있으며 모든 물리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이의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학문적 배경에서 호킹스의 블랙홀과 르메트르의 빅뱅이론은 천체물리학의 정설로 수용되고 이론물리학자 힉스의 미세입자 추적도 영국 왕실의 지원까지 받으며 추진되고 있다. 전기한 바와 같이 과학은 현재까지 성경에 표현된 신의 본질이며 우리의 육체와 연계된 영[靈:spirit]을 찾는 작업에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그 가능성을 열어 놓음으로해서 유신론자들에게는 기존의 신관이 허위가 되고, 교회는 맹목의 신앙을 강요하는 기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여기서 기현상이라 함은 기독교 신학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표현이다. 그들은 교리를 비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신앙인의 기본 자격에 무조건적 믿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 표현은 필자의 사상적 자유에서 기술한 것으로 전혀 어떤 종교도 비판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 그러면 과연 성경에 신의 본질로 밝혔고 인간의 구성인자중의 한쪽이라는 영[靈]의 실체는 이해가능한 것인가? 필자는 그 답을 얻기 위하여 계시종교중에서 신을 만난 사람을 조사하여 보았다. 영이 신의 본질이라면 그들의 얘기를 통하여 어떤 언급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다. 기독교 신학은 신을 만난 사람으로 모세와 예수를 꼽는다. 모세는 구약에 출애급기에 등장하는 사람으로 십계명을 신에게서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신의 본질을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여기서 논외로 간주하기로 한다. 신약에는 예수가 또한 신을 만난 기록이 보이며 신의 본질은 바로 영[spirit]이라고 성경의 여러 곳에 보이고 있다. 마호멭은 천사를 만난 것으로 되어 있어 그 경전은 참고 하지 않았다.
중국의 사상가들은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었다. 그들의 천(天)에 대한 개념은 지극히 자연주의적 사상이며 정치적이며 제민적인 특성을 가질 뿐 신의 계시에 의한 교시는 아니었다.
그러다 한국의 근세사에 신을 만난 사람이 있었음을 알았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수운이다. 놀라운 것은 그가 직접 집필한 기록들이었다. 예수가 무학자인데 반하여 그는 유학자(儒學者)인데다 도교, 불교적 지식을 갖고 있는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교시는 중국의 사상이나 석가의 영향은 전혀 없이 예수의 얘기와 많이 닮아 있었다. 다만 보다 구체적으로 신과의 대화를 직접 기록을 했다는 점에서 연구자로서의 신뢰성은 훨씬 더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정신 문화사에 신의 계시를 받은 인류사적 대 사건이 있었던 사실을 너무나 까맣게 모르고 살아온게 사실이다.
여기서 필자는 그의 집필 내용의 신뢰성을 검토하기로 했다. 그는 약 160년전 헌종, 철종 시대를 살았던 분으로 관료의 부정과 부패가 극심한 시기로 사회적 혼란이 극치에 달하고 서민은 겨우 목숨을 연명하던 시대이었다. 그는 그의 선조의 생각과 같이 늘 구세제민에 뜻을 두고 산 가난한 유생이었다. 그는 그 큰 뜻을 이루기 위해 현자를 찾아 나섰고 결국 스승을 만나지 못한 그는 오랜 구도 생활 끝에 신과 조응하는 기회를 얻는다. 그의 일생은 신의 전언을 실천하는 삼년간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가족 모두가 비참한 도피생활 끝에 몇 년 후에 역시 관의 추적에 의하여 사망에 이르게 된다. 자신은 물론 가족과 많은 사람의 죽음을 예지한 사람의 말이 허위일 수 있겠는가? 보통 사람도 죽음을 앞에 두면 거짓을 말할 수는 없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허언의 목적은 부귀나 권력, 재산에 관계한다. 그러나 그러한 세속적 가치는 그에게 한 낱의 쌀 알 보다 못한 것이었다. 그의 집필 내용 모두가 진실인 것은 확실하다는 믿음이 섰다. 그의 기록에 보이는 신의 전언은 기상천외한 내용들이었다. 그도 예수와 같이 신은 영[靈]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두 사람이 그 본질을 똑같이 표현하는 신은 과연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다른 존재인가? 필자는 여기서 두 종교간의 유사성에 놀랐다. 각 종단의 1세인 예수와 수운의 3년간의 공생활과 권력자에게 의한 순교, 2세인 베드로와 해월의 사양어린 순교, 그리고 수많은 순교자들의 유사성, 이것이 과연 인간적인 일들일까? 근 1천 800년이 넘는 시차를 두고, 더욱이 중동과 극동이라는 지리적 거리를 두고 어떻게 이렇게 닮을 수가 있는가? 필자는 두 위대한 인류의 스승인 신의 전언자로서 그들의 교시의 차이를 심도 있게 공부하였다. 필자는 그 차이를 느끼며 신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운이전 신이 추상과 상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신인데 반하여 수운은 신의 실재[reality]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영의 실재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람은 한울님을 모두 모시고 있으며 그 존재 양상은 “내유신령, 외유기화(內有神靈 外有氣化)” 이다. 결국 두 분간의 차이는 영의 본질을 표현하는 방법론적 차이에 있었다. 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예수의 신학이 유일신적 절대적 신이라면 수운의 신학은 유일신적이며 동시에 범재신론적 신이다. 만일 예수가 높은 교육을 받은 후에 신을 만났다면 어떠한 표현을 했을가 심히 궁금한 점이다. 그리고 수운은 이 신[한울님]은 만물에 모두 있으며 우주에 가득하며, 모든 현상과 변화의 진리자로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필자는 이 실재를 알기 위하여 천체 물리학과 미세 물리학을 파고들었다. 어디엔가는 그 흔적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첫댓글 영혼(정신.영)=신=창조자 라는 뜻인지..명확하지 않은 추측 .추론 은 현실 더더욱 불확실성의 미레대한 큰 혼돈과 대재앙
그리고 우주질서의 파멸이 초래되지 않을까 . 크게 공포에 떱니다. 예수. 수운. 그분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지 신은 아니지않습니까. 그 말씀의 진의를 믿던 ,믿지않던 그건 각자가 행할 몫입니다. 주제가 너무나 엄청나 저 같은 범인이 토을 단다는 것이 죄송스럽고 부끄러운 마음 뿐입니다 .저는 여기서 끝을 맺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신(mind)과 영(spirit)은 그 개념이 약간 다르다고 봅니다. 예수와 수운은 신[god,한울님]을 영(spirit)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인식을 위한 노력이나 사고가 자연을 변화 시키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인간의 행위가 신의 변화를 능가하지 못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대재앙등의 걱정은 기우입니다. 왜냐하면 무한의 공간과 영원한 시간적 존재와 인간이라는 한정적 존재가 결코 합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난, 뭐가 뭔지 잘 모르고 이제까지 살아오고 얼마 남은 생을 마치려 하는데...



영이 있는지 신이 있는지... 관심없으니 ...
이런 논쟁은 멀리 떠나거라
우리 43회는 기우회, 당구클럽, 산악회, 43골프... 이런 모임만 존재할 따름이오
인간의 인간됨은 사고능력에 있고, 이 사고의 경향성은 그 사람의 인격형성의 기틀이 된다고 봅니다. 인류의 정신 문화 지향의 방향은 인간 가치의 발견과 고양에 있다고 봅니다. 인류의 역사는 타 개체의 자유와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자연법 해석 오류의 비극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예제도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그런 것들입니다. 사회적 합의에 의한 실정법을 어기지 않는 한 누구에게나 타인의 사고와 행위를 규제할 권리는 없습니다.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자유는 칸트의 자유의지적 발로라고 보아주기를 바랍니다. 이제 2-3회로서 끝맺게됩니다. 관심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