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2일 여행에서
1박2일 여행으로 대박님 복뎅이님 돈만다케님 함께 국제시장 여행을 다녀 왔습니다.
12시 30분 KTX를 타고 부산역을 도착하여 제일 먼저 우리들에 보급자리인 숙박인 파다라이스 호텔로
짐을 풀고 해운대가 바라다 보이는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수 없이 좋았다.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모래 축제가 한참이였다. 그날 50만명이 해운데 모래축제에 참여 했다고 하는데
정말 인파로 장관을 이루웠다.
날씨는 넘 좋았고 인파들은 모래 위에 뒹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쇼를 하고
춤을 추고 박수과 갈채로 함께 어울려 해운대의 시내는 떠들써 했다.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듣고 왔답니다.
호텔 시티투어로 야간에 황련산을 다녔왔답니다.
부산 시가지가 한눈에 보이는 야경은 정말로 환상이였고
광안대교와 영종대고 그리고 서울의 도곡동 타워팰리스을 연상케하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높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다는 80층 아파트인 해운대의 두산위브더제니스가 보인다
다음날인 월요일은 해동용궁사인 파도가 출렁이는 바닷가 기암괴석 위에 세워진 절로 동해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돋이 광경이 매우 유명한 해돋이 관광객들로 분빈다도 하네요.
국제시장과 해운대시장 깡통시장들 들러보고
보수동 책방골목은 국제시장 입구 대청로 사거리 건너 보수동 쪽으로 난 사선 방향의 좁은 골목길에 집결된 책방을 말한다. 8ㆍ15 광복 직후 오늘날의 국제시장이 태평양전쟁으로 주택가가 철거되어 빈터로 놓여 있을 때 일본인이 남기고 간 책을 난전을 벌여 팔았는데, 그 장소가 개인소유가 되자, 보수동 앞길로 책 장사들이 한 두 사람 자리를 옮겨 앉게 되면서부터 오늘의 골목이 형성되는 바탕이 되었다.
6ㆍ25전쟁으로 임시수도가 되었을 때는 피란민이 가져온 귀중한 책을 생활을 위해 팔고, 피난 온 학교 교수들과 학생들이 필요에 의해 사들이는 수요와 공급이 늘어나자 본격적인 임시건물이 서게 되어 헌 책방 골목이 형성되었다. 한때는 개인이 가진 헌 책들이 이 헌 책방 골목에 모여들어 진귀본이 나오면서 헌 책방의 임시건물은 보다 더 늘어났다.
당시에는 약 70채가 되는 책방으로 중,고등학교 학생과 대학생들이 많이 찾아 들어 학생들이 요구하는 헌책이 사들여지고 팔려 가곤 하였다. 60년대 초 출판문화가 거의 자리를 잡지 못했을 때는 학생과 지식인들이 자신의 헌책을 내다 팔고 다시 남들이 보던 헌책을 되사오거나 헌 잡지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생겨난 보수동 헌책방 골목은 지금까지 전국에 몇 안 되는 유명한 책방골목으로 자리잡고 있다. 최근에는 신간서적도 20~30%까지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 할 수 있으며, 헌책인 경우 책의 상태 따라 가격이 결정된다.
1996년부터는 보수동 책방골목축제를 열어 도서무료교환, 고서전시회 등 행사를 개최하여 시민들의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들러오고 올라왔답니다.
국제시장
부산국제시장 B동
국제시장 모자
국제시장 장남감
국제시장 전통매듭
국제시장 가방
국제시장 개량한복
국제시장 우산
모자가 넘 예뻐서
함께 떠나요..
머리 악세사리
비가 오면 생각나는 장화
색색의 각종 밥통 나들이품
국제시장의 구제옷 가게
손수 공방 내가 참 좋아하는
해외 여행 떠나고 싶당
조화꽃의 아름다움
요넘도 내가 좋아하는 토종
젓가락의 모음들
여성의 상징 뜨게질 한때는 나도 조끼도 ......
작은 소품들 재료
우산에 뜨게질로 만든 아름다운 선률
부산 국제시장
부산 중구 신창동4가
약도
부산하면 누구나가 국제시장을 들먹이게 될 만큼 국제시장은 우리나라 상품 유통 역사에서 길이 지워질 수 없는 확고한 좌표로 남을 만하다.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을 중심으로 하는 일대에 자리 잡고 있는 국제시장이 그와 같이 부산을 상징하는 소비 중심 시장으로서 발돋움하기 이전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45년 8ㆍ15 해방을 맞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8.15 해방이 되자 일본 사람들이 이 고장에서 철수해 가면서 이른바 전시통제물자(戰時統制物資)를 한꺼번에 팔아넘겨 돈으로 챙기러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최대의 소비 시장이었던 중구 부평동 공설 시장 일대에 갖가지 물자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런 물자들이 그 무렵만 하더라도 드넓은 빈터였던 오늘의 국제시장 자리를 장바닥으로 만들어 자연 발생적으로 상설 시장을 이룩했던 것이 국제시장의 발생 배경이 된 것이다.
그러던 국제시장 자리 장바닥은 귀환 동포들이 부산으로 몰려들면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런 무렵의 국제시장 자리 장바닥은 「돗대기 시장」 으로 불렸었다. 이 「돗대기 시장」이라는 이름은 분명하게 풀이 되고 있지 않다.
다만 짐작컨대 이것저것 할 것 없이 가리지 않고 있는 대로 싹 쓸어 모아 모개로 물건을 흥정하는 도거리 시장이 됐던 데서「돗대기 시장」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만일 그런 뜻이 담겨 있는 이름이 국제시장 이전의 「돗대기 시장」 이라고 한다면, 도거리로 떼어 흥정한다는 뜻이 담긴 「돗대기 시장」이라는 이름이 더 걸맞은 이름이 될 것 같다. 사실상에 있어서도 국제시장 이전의 시장 이름을 「돗대기 시장」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와 같은 「돗대기 시장」이 오늘날에 불리고 있는 「국제시장」이라는 이름으로 통하게 된 것은 1950년 6ㆍ25 동란 이후로부터의 일이었다. 6ㆍ25 동란으로 말미암아 부산으로 피난 왔던 피란민들이 생활 근거지로 삼아 갖가지 생활필수품을 거래했던 시장이 이른바 「돗대기 시장」이었던 것이다. 6ㆍ25 동란 이후 국내에서 생산되지 못하고 있던 생활필수품을 비롯한 별의별 상품들이 부산항을 근거지로 밀수입됐었고, 그와 같은 밀수입 상품들이 그 무렵 우리나라 시장의 경제의 심장부를 이루고 있던 「돗대기 시장」에서 영남 지방 일대는 말할 나위가 없고 전국 주요 도시 시장으로까지 공급 확산해 갔던 것이다.
말하자면 국제적인 상품들을 도거리로 거래하는 판매망이 이 「돗대기 시장」을 중심으로 이룩됐던 것이다. 따라서 누구의 입에서 먼저랄 것도 없이 「돗대기 시장」은 국제적인 상품들이 거래되는 뜻에서 「국제시장」이라는 이름으로 통하기에 이르러 던 것이다.
그러던 시절의 「국제시장」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이 밀수 외국 상품들이 범람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중으로 잘못 흘러 나 온 유엔군 군수 물자까지 흔하게 거래되고 있기도 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상품들 가운데는 외국 옷감을 비롯한 장신구와 화장품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더구나 이와 같은 밀수 외래품들 가운데는 고급 상품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그와 같은 외국 상품 인기에 편승하여 가짜 외국 상품들도 국제시장에 숱하게 나돌기도 했었다.
이러한 국제시장은 1952년에 1천 2백 50만환(1백25만원)이던 총매상이 그로 부터 9년 뒤인 1961년에는 1백 64억 5천 7백 60만원(16억 4천 5백 76만원)에 이루어 10년이 채 못 되는 사이에 총매상의 신장세는 1천3백배를 넘는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이와 같은 국제시장도 1960년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개발되어 나간 부산진구 서면 일대의 시장에 다소 상품 유통 중심 기능을 넘기었으나, 오늘까지 우리나라 최대 시장의 하나로 군림하고 있다.
출처 : http://yongdusanpark.bisco.or.kr/cyber/cyber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