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필라델피아 선수들은 1980년 칼튼과 슈미트라는 당대 최고의 투수 타자를 내세워 간신히 월드시리즈 우승하기 전까지..
창단 후 근 100년간을 월드시리즈 우승 못하고 지내던 놈들이죠.
필라델피아 필리스라는 팀이 전 세계 프로 스포츠팀을 통틀어 역대 총 패수 1위라는 불명예스런 기록을 갖고 있는 팀이기도 하구요.
사실 익스팬션된 팀 아니고 가장 늦게 우승을 차지한 허접팀이죠.컵스가 1906년 이후 우승을 못 하고 있지만 필라델피아도 참 힘들었을 겁니다.
뭐 창단 된 1883년부터 17승81패라는 경이적인 성적으로 7위팀과 무려 23게임차 성적을 내며 앞으로도 꼴찌를 도맡아 할 것이라는 분위기를 풍깁니다.
어쨌든 이 팀은 완전 허접팀으로 헤메고 있다가 1915년 처음으로 NL우승을 하죠.
당시 출루율,장타율,득점,타점,홈런,볼넷 1위를 차지한 크라바스와 그 이름도 유명한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가 31승에 1.22의 방어율 241K로 그의 3번의 트리플 크라운 중 첫번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었죠.
알렉산더는 이해 트리플크라운은 물론 완투,완봉,WHIP,투구 이닝,승률 등 투수가 할 수 있는 상은 모두 휩쓸죠.
그러나 당시 20세의 베이브 루수가 투수로 18승 8패 2.44의 성적을 이루고 있던 보스턴에 패합니다.당시 루스는 투수론 안 나오고 타자로만 1타수 무안타였네요.
첫 경기를 3:1로 이기긴 했습니다만 4경기 연속 1점차 패배라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면서 NL우승으로 만족합니다.
그 후 1918년부터 1949년까지 꼴찌를 무려 17번 꼴찌에서 두 번째 7번했으며 4위 한 번 5위 2번이라는 처참한 성적을 냈죠.(당시는 리그에 8팀)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30년간 1,2,3위는 커녕 4위 딱 한 번하다니..
5할을 딱 한 번 넘었는데 4위할 때 78승76패로 한 번 넘은 것 외에는 5할을 넘은 적이 없다니..지금 템파베이 수준을 생각하면 될 듯 합니다.
특히나 1938년부터 1942년까지 5년연속 100패를 넘기는 대 기록을 작성하기도 합니다.
롤렌이 팀과 재계약에 난항을 겪을 때 팀 역사를 되돌아보라고 했는데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당시 필라델피아엔 필리스만 아니라 현재는 오클랜드에 있는 어슬레틱스도 있었는데..
이 팀도 만만치 않은 허접팀이었습니다.필리스가 꼴찌를 17번했다고 했는데 어슬레틱스는 AL에서 16번 꼴찌를 하며 양리그 꼴찌끼리 월드시리즈를 했다면 필라델피아가 명문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어슬레틱스는 1929년과 30년 월드시리즈 2연패를 하고 31년에도 AL우승을 하는 등 잘 나갈 때도 있었다는 것이 4위 한 번에 그친 필리스완 다른 점이죠.
그러다가 1948년엔 감독을 벤 챔프맨에서 더스티 쿠그에서 에디 소이어로 2번이나 교체합니다.
1949년 에디 소이어 감독 밑의 필라델피아는 32년만에 팀 최고 성적인 3위를 기록하며 주위를 놀라게 하는데요.
그건 시작에 불과했습니다.그들에겐 1950년 WHIZ KIDS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음 이제야 본론이군요--;)
그럼 그들이 왜 휘즈 키즈인가를 짚고 넘어가기로 하죠.
휘파람 부는 아이들이란 뜻의 휘즈 키즈가 그들의 별명으로 붙은 이유는 그들이 당시 메이저리그 최연소 팀이었기 때문입니다.
불펜진을 제외한 주전 대부분이 20대 선수들로 구성된 팀이 놀라운 성적을 올리며 NL을 제압했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었죠.
쿨 파파 벨님이 설명하신 젊은 "Whitey" 리치 애쉬번(나중에 결국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죠.은퇴 후 필리스 해설도 얼마 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해리 칼라스와 오랜 기간 한 선수구요.)과 286승도 대단하지만 505피홈런이라는 역사상 최고의 기록으로도 유명한 로빈 로버츠외에 후에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선수는 없었지만..
단일 시즌 마무리 최고 시즌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는 짐 칸스탄티가 무려 152이닝을 던지며 16승 7패 22세이브 2.66의 방어율로 스탠 뮤지얼을 가볍게 제치며 MVP를 수상하고..
로빈 로버츠도 23세였지만 20승을 올리며 에이스 역할을 했고..
MVP4위에 오른 델 에니스가 0.311 31홈런 126타점을 올리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낸 것에 영향을 입어 NL을 제압합니다.
그러나 1949년부터 1953년까지 월드시리즈 5연패라는 기록을 세우는 막강 양키스에 4:0으로 완패를 당하는데 당시 양키스는 요기 베라,조니 마이즈,조 디마지오,필 리주토 등의 후에 명예의 전당 4인방의 막강 공격력을 보유하고 있었죠.
필라델피아는 역시나 1,2,3차전을 1점차로 패하며..
월드시리즈에서 7게임 연속 1점차 패배라는 경이로운 업적을 남깁니다.
다행히(?)4차전엔 3점차로 지면서 기록은 마감되었지만..
필리스는 정규시즌 74번 등판하면서 한 번도 선발로 나온적 없는 MVP콘스탄티를 선발로 내세웠지만 1:0으로 패하고..
2차전 로빈 로버츠도 잘 버텼지만 연장 10회에 결승타를 허용 2:1로 패배..
3차전은 8회까지 2:1로 이기고 있다가 9회 끝내기 안타로 2:3역전패 하며 결국 양키스가 쉽게 시리즈를 이기고 맙니다.
그 후로 필라델피아는 70년대 후반 폴 오웬스 씨 등이 그렉 루진스키와 마이크 슈미트라는 걸출한 팜 스타를 발굴해내며 당시 전성기를 맞을 때까지 또다시 슬럼프에 빠집니다.
참고로 폴 오웬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필라델피아 마이너리그 최고의 선수에게 Paul Owens Award를 수상하고 있죠.지금의 마이클 아버클 씨도 상당한 수완가로 그가 취임한 93년부터 매년 드래프트 1,2라운드 지명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진입했죠.(고움즈,롤렌으로 시작해 버렐,롤린스,울프,마이어스,앤더슨 등등..)
10번 가까이 100패를 넘기던 필라델피아가 역사상 최초로 100승을 넘기는 해는 1976년으로 77년에도 101승을 기록 2년 연속 100승을 넘깁니다.(그 이후론 100승을 못 넘기죠.)
그리고 대망의 1980년 칼튼은 사이영상 슈미트는 MVP를 수상하면서 지구 우승을 차지합니다.
당시 몬트리올을 한 게임차로 제치고 지구 우승을 했는데 시즌 마지막까지 혼전이었죠.
그러나 동률로 맞은 몬트리올과의 마지막 3연전에서 1,2차전을 모두 마이크 슈미트의 결승 홈런으로 승리를 따내며 휴스턴과 NLCS를 펼칩니다.
1차전은 칼튼의 호투로 승리했지만 2,3차전을 연속 연장전에서 내주며 위기에 몰린 필리스..
그러나 4.5차전을 반대로 모두 연장전에서 승리하며 캔자스시티와 월드시리즈에서 만나죠.
브렛과 슈미트의 최고 3루수 대결로도(1980년 브렛은 AL MVP 슈미트는 NL MVP였죠.) 관심을 끌었던 월드시리즈..
필라델피아는 익스팬션 팀에게 월드시리즈를 내줄 수 없었는지..(메츠는 먼저 우승했지만--;)슈미트의 맹활약에 힘입어 창단 근 100년만에 우승을 합니다.
그 후 1983년..또다시 휘즈 키즈가 뭉칩니다.WHIZ가 아닌 WHEEZE KIDS였죠.
헥헥거리는 아이들--;이란 뜻의 휘즈 키즈는 1950년과는 반대로 노장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슈미트,칼튼,맥그로 등에 42세의 피트 로즈..41세의 토니 페레즈..39세의 조 모건 등 EX-빅레드머신인 노장 트리오 등이 버티고 있었죠.
NL우승까진 하지만 1차전을 이기고도 4연패를 당하는 모습을 보이며 또 다시 월드시리즈 우승엔 실패합니다.
그 후 헤메다가 다시 93년 개스하우스 갱스라 불리며 토론토에 도전하지만 미치 윌리암스가 끝내기 홈런을 내주며 6차전에서 패하고 그 후로 2001년까지 또 5할 이하의 시즌을 보내며..
<p style="line-height:200%;"><font face="굴림" size="3">1950년대 당시는 무척이나 뛰어난 중견수들이 양산된 시기였습니다.
양키스의 왕자 미키 맨틀, 다져스의 듀크 슈나이더 Duke Snider. 전문가들이 역대 최고의 중견수들이라고 꼽는 이 선수들이 모두 같은 시대인 1950년대에 선수생활을 했지요. 생각해보면 그때 야구를 보았던
팬들은 참 행복했을 겁니다....^^ 뭐, 그중에서도 역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단연 윌리 메이스. 역사상 최고의 5-tool Player. 통산 0.302의
타율. 660홈런 338도루 3283안타 1903타점. 8년연속 100타점과 100득점이라는 진기록, 또한 당시만해도 루스, 폭스 Jimmy Foxx, 랄프 카이너 Ralph Kiner만이 넘어섰던 50홈런의 고지를 흑인 최초로 등정하였고 당시 NL 최고 기록이었던 멜 오트 Mel Ott의 511홈런 기록을 넘어서며 내셔널 리그 홈런기록을 갈아치웠죠(물론 애런에 의하여 깨지기는 했습니다만). 더군다나 57년 처음 제정된 골든글러브 중견수부분
첫 수상자였고, 13년 연속 골든글러브 수상이라는 부록까지. 그는 역대 외야수 최다 PO(Put out) 기록자(7095개)일 정도로 광범위한 수비범위를 자랑했었던 최고의 수비수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너무도 잘
<p style="line-height:200%;"><font face="굴림" size="3">그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1950년 기적의 팀 필리스로 돌아가야겠죠. 기적의 신동들, Whiz Kids의 선봉에 섰고 일각에서는 역사상
최고의 수비력을 갖춘 중견수로 평가받는 선수. 1950년 당시 시즌 초반 만해도 피 위 리즈 Pee Wee Reese, 듀크 슈나이더, 로이 캄파넬라, 재키 로빈슨으로 이어지던 부룩클린 다져스가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였지만, 필리스는 애쉬번을 선봉으로한 Whiz Kids를 내세우며 돌풍에 돌풍을 거듭했지요. 허나 그 돌풍은 시즌 막판까지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매직 넘버를 몇 경기 남겨 놓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은 파죽의...... 죽쑤기 시합(--;)를 보여주었고... 게다가 우승이 달려있던 마지막.... 10경기에서 2승 8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올리면서 결국은 시즌
한 경기를 남겨 놓고는 부룩클린 다져스에 한게임차로 쫓기게 됩니다. 게다가 시즌 마지막 경기는 바로 그 팀 부룩클린 다져스와의 경기였죠. <br>
9회까지 1:1의 스코어를 기록하는 팽팽한 상황. 9회말 다져스의 칼 에이브럼스Cal Abrams이 안타를 치고 나가더니 1사에 2루. 거기에 필라델피아의 투수인 로버츠 Robin Roberts는 조금 지쳐 있던 상황. 마무리 콘스탄티 Jim Constanty 역시 아직은 투입할수 없던 상황. 로버츠가 던진 공은 뒤이어 중전 안타가 되고, 발빠른 주자 에이브럼스는 곧바로 홈으로 질주합니다. 그때, 중견수를 보고 있던 오늘의 주인공, 애쉬번은 그 공을 잡아 빨랫줄 같은 송구로 애이브럼스를 간발차 아웃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렇게 해서 끝날뻔 했던 경기는 연장에 돌입하죠. 그리고 10회초 딕 시슬러Dick Sisler의 3점 홈런으로 필리스는
4:1 승리를 거두며 월드시리즈에 진출하게 됩니다. 그당시 애쉬번의
그 송구는 메져 역사상 가장 멋진 수비중 하나로 손 꼽히고 있구요. 다져스에게 당시 6년동안 최종전에서 우승을 날려먹는 희대의 불운중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장면이었죠.</font></p>
<p style="line-height:200%;"><font face="굴림" size="3">애쉬번은 통산 안타의 85%가 단타라는 빈약한 장타력 때문에 그다지
많은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통산 0.308의 타율에 아마도 제가 알기로는 은퇴직전 시즌에서 3할을 기록한 마지막 타자일겁니다. (정확하지는 않은데 규정타석을 채우면서 일 거예요.) 그는 맨틀, 슈나이더,
메이스, 애런, 클레멘테 같은 최고급 외야수들과 같은 시대를 보냈다는 사실이 그의 평가를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그다지 유명하지
않을뿐 최고의 외야수중 한명이었죠.</font></p>
<p style="line-height:200%;"><font face="굴림" size="3">에궁... 가끔 샛길로 종종 빠져나가는 것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애초에
삼천포로 빠져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핬군요. 헐... 무려 두 단락을 다른 사람 이야기로...-.-; 쩝, 메이스에 대한 기록은 제가 굳이
설명하는 것보다는 인터넷을 뒤져보면 얼마나 위대한지 눈으로 보면서 느끼는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라기 보다는 설명하기 귀찮아서요...-.-;) 어떻게든 각 선수간의 분량은 맞춰야겠다는 기분에 무의식적으로 지껄인 헛소리라고 생각하시고...-.-;</font></p>
유명한 별명이죠. 이전 세대에서 좌완 투수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 좌완 투수들에게 일괄적으로 붙었던 레프티Lefty라는 별명처럼, 이 행크
아론의 별명도 행크라는 이름을 가진 선수에게 통상적으로 붙어버리는 별명중 하나입니다. 뭐 Hank라는 이름이 그다지 흔한 이름은 아니어서 몇 명 안되기는 하지만요....^^ 컵스의 플래쉬 고든 Tom Gordon같은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고요. 고든이라는 선수에게 통상적으로 붙는 별명이 바로 플래쉬인것처럼요. (플래쉬 고든의 원조는 1940년대
양키 제국의 유명 유격수였던 조 고든Joe Gordon이 원조죠.) 만약에
텍사스의 행크 블레이락도 홈런을 뻥뻥 질러대는 성향의 선수가 된다면 해머링이라는 별명이 붙게 될겁니다...^^ 좌우간요. 행크 아론의 별명, 해머링의 원조는 이전 세대 유명한 홈런 타자 행크 그린버그였는데요...^^ 지금은 해머링 행크라하면 당연히 아론을 떠올릴 만큼, 행크의 위상은 대단하죠. </font></p>
<p style="line-height:200%;"><font face="굴림" size="3">역대 최다 홈런 기록자로 알려진 행크 아론은 알려진 것처럼 홈런만
쳤던 타자는 아니었죠. 뭐, 그시대의 거의 대부분의 유명선수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는 강력한 핀치력에 뛰어난 주루플레이, 멋진 수비능력을 함께 갖춘 선수였습니다. 어찌보면 메이저리그에 도루의 새바람을 몰고온 모리 윌스 Maury Wills가 아직까지 HOF에 기록되지 못한
것도, 같은 시대에 양산된 이러한 전형적인 5-tool Player의 빛에 가렸다고 볼수도 있구요. (그래도 같은 포지션의, 같은 취향의 선수였던
애퍼리시오 Luis Aparicio가 결국은 HOF에 선출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HOF 자격심사에 대한 비 공정성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네요.)</font></p>
<p style="line-height:200%;"><font face="굴림" size="3">아론은 755개의 홈런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다른 600 클럽 선수들이
그러했던 것 만큼의 파괴력을 가진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가
파괴력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루스, 메이스, 본즈등에 비교하여 그렇게까지 특출난 시즌은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미덕은 단연 누구도 따라올수 없는 성실함과 꾸준함이었고, 이는 통산 한시즌 최다홈런은 47개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루스의 기록을 뛰어넘을 수 있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죠. 그는 자신이 뛰었던 24년간 한 번도 두 자리수 홈런을 놓친 적이 없었던 데다가 데뷔 첫 해와
메이저 첫 인생을 시작했던 아론.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기회를 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선수는, 과거 메이스의 데뷔 첫시즌 월드시리즈 진출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바비 톰슨이었죠. 당시만해도 2루 포지션에서 열심히 수비부담과 싸우고 있던 아론이었는데, 당시
주전 외야수였던 톰슨이 스프링캠프에서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던 거죠. 이에 브레이브스는 20살의 젊은 2루수, 아론에게 기회를
주었던 거죠.</font></p>
<p style="line-height:200%;"><font face="굴림" size="3">그는 메이스나 뱅크스등과는 조금 다른 인생역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과 피부색이 같은 '흑인'이었지만, 메이스가 조금은 편안한 환경에서 야구를 했던데에 비해 그는 '흑인'이었다는 이유로 차별적인 대우를 받아야했죠. 최초의 그는 시카고 인근의 흑인들에 대한 차별대우가 덜한 인디애나 폴리스 클라운스 clowns(광대들.....-.-;)에서 야구 일생을 시작했는데요, 당시 나이 겨우 15살. 그러나 클라운스 같은
경우는 그 닉넴에서 느껴지다시피 대우못받고 돈없는 흑인들의 가능성없는 야구팀이었죠. 거기서 유격수를 맡으며 온갖 차별대우를 받아야했고, 가능성이 인정되어 $7,500의 당시 흑인치고는 거액에 밀워키
브레이브스와 계약하면서도 이러한 생활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추후에 브레이브스는 남부쪽, 당시 흑인에 대한 차별대우가 극심했던 지역인 애틀랜타로 이전하였는데요. 그러면서 그에 대한 대우는 땅끝까지 떨어져야했죠. 당시 미국 남부에는 'Jim Crow법'(흑인 차별 법안)이 실행되고 있었고, 아론은 자신의 백인 팀동료와는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같은 호텔에 머무를 수도 없는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아야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환경 속에서 꾸준히 커리어를 올려가며 74년, 베이브 루스의 기록에 도전하게 되었을때.<br>
그 때 그가 받은 협박 전화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죠. 그 날짜가 74년
3월 12일이었는데, 매일같이 경기를 쫓아오는 루스 추종자들,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야유, 아무리 꾸준함의 표본으로 알려진 그였지만 슬럼프가 찾아오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그의 기록을 경신하기는 했지만 그가 다시 루스의 기록과 타이를 이루고, 경신하는 홈런을 치기까지는 무려 1달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야 했죠. 그
홈런이 터져나온 날은 74년 4월 8일. 4회. 다져의 알 더닝 Al Downing을 상대로 좌중간을 가르는 홈런을 터트렸고요 이로써 아론은 기나긴
<p align="center"><font face="Verdana" size="2" color="purple"><b>애들랜타의 부사장이 된 행크....^^</b></font></p>
<p style="line-height:200%;"><font face="굴림" size="3">그러나 인종차별의 시선은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습니다. 결국 행크는 갖가지 살해위협과 야유속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고
당시 행크가 프로를 시작한 이래 가장 적은 게임수를 기록하고 맙니다...(112경기) 그 다음해에는 남부의 극심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성화를 이기지 못해 고향팀인 브루워스로 이적해야했고, 그 이듬해에는
은퇴를 해야했습니다. (물론 당시 우리나라 나이로 44살이었으니 은퇴하고도 남을 나이기는 했습니다만...-.-;)<br>
참, 세계 야구 역사상 이렇게 힘들게 기록한 아론의 홈런 기록을 넘어선 인물이 단 한명 있죠. 일본 프로야구의 왕정치. 일본명 오 사다하루. 훨씬 적은 경기의 22시즌을 뛰며 868 홈런을 뛴 이 친구는 74년 행크가 루스의 홈런기록을 경신한 직후 600홈런을 넘어섰는데요. 그에대한 이벤트의 일환으로 행크가 이 선수와 함께 홈런 레이스를 벌인
적이 있었죠. 우리나라 나이 42살의 고령이었던 행크는 이 자리에서
30대 중반의, 나름대로 젊은(?) 선수였던 왕정치를 10-9의 스코어로
이기는 괴력을 과시했다고 합니다...^^ (어디선가 들었는데 스코어가
확실치는...-.-;)</font></p>
<p style="line-height:200%;"><font face="굴림" size="3">좌우간 이제는 메이저리그의 가장 변혁적인 시기 1950~60년대의 필두에 선 이 두 선수가 이루어 놓은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99년 NBC의 20세기 야구 선수에 대한 투표가 있었는데 당시 순위는 1위
루스, 2위 윌리메이스, 3위 타이캅, 4위 월터존슨, 5위 행크 아론이었죠. 투표결과가 증명하듯 그들의 역할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대단한
것이었고, 이들의 등장으로 시작된 니그로리거들의 메이저리그 참여는 한창 서부개척에 열을 올리던 미국의 역사와 맞물리며 큰 역할을
차지하였습니다.</font></p>
<p style="line-height:200%;"><font face="굴림" size="3">당시 메이저 리그는 거의 모든 프랜차이즈가 동북부연안과 오대호 연안에 치우쳐 있었죠. 뉴욕에 세팀, 필라델피아에 두팀, 보스턴에 두
팀, 그리고 클리블랜드, 워싱턴등등. 신시내티와 세인트 루이스를 제외하고는 지나칠정도로 편중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는데요. 여기서
시카고를 제외한 모든 중복 연고 팀은 각각 전미의 야구 전파라는 명목아래 서부와 남부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 제기될 수 밖에 없는 결정적인 난제는, 바로 교통 수단이었죠. 당시만해도
NL이나 AL 모두 단일리그 형태를 띄고 있었는데 아무리 비행기를 타더라도 LA에서 뉴욕까지 오는데에는 무지막지한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단일리그가 가지는 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는 해도 당시 교통수단으로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리그운용을 하기에는 무리가
따랐었죠. 그래서 여기서 나온 제안이 바로 디비젼의 구분이었죠. 하지만 당시 메이저 각 리그의 팀은 겨우 8팀 씩에 불과했고, 각 리그를
다시 2개의 디비젼으로 나눈다고 하더라도 겨우 4팀씩만으로 디비젼이 이루어지는 (당시로는)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리그 운영이 난제로
작용하게 되었죠. 결국 그러한 난제를 타파하기 위한 방법은 팀 증설이었고요.<br>
만약에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에 입성하지 않아서, 흑인 진출이 더더욱 늦어졌다면, 아마 이러한 팀 증설 이야기는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선수들이 턱없이 부족했을 테니까요. 그러나 이미 로빈슨, 메이스, 애런등의 선수들을 통해 흑인 선수들의 가능성을 보았고, 그들의 공급은 사무국이 원하는 수요를 충족시키는데 충분한 수치였죠. 더군다나, 브렌치 리키를 통해 어느정도 개념이 잡히기 시작한 팜시스템이
더욱 체계화되면서 중남미 선수들의 공급이 원활해지기도 했고요. 더욱이 루이스 애퍼리시오 같은 스타급 중남미 선수들이 그런 상황을
</font><font face="Verdana" size="2" color="#8080FF"><b>이상으로 중편을 마칩니다. 가끔씩 느끼는 건데, 제 글은 쓰다보면 이유없이 메이저 역사의 조류에 대한 부분이 포함되면서 대학 레포트 같은 성향을 띄게 된다는...-.-; 제 나름의 뒹구는 재주이자, 등 비빌 곳이
그 부분 밖에 없어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쩝...<br>
어제 예비군 훈련 받고 오느라 조금 피곤하네요... 비는 대체 왜 오고 지랄인지... 짱나게... 쩝.... 그래서 좌우간 다시 이야기를 끊고 하편을 나중에 내놓도록 하겠습니다. 예비군이 짜증만 나는 일이기는 합니다만
이럴때는 나름대로 쓸모가 있네요. 이런 식의 이유라도 끌어다붙여 글
쓰기 귀찮아 졌을 때, 중단할 만한 이유가 되어주니까요....-.-;</b></font></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