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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2년 12월 4일 주일 오전 예배
시편 설교 : 시편 85편
성경낭독 : 사 11:1-10; 마 3:1-12
본문 : 시 85:1-13
제목 : “포로 귀환 후의 백성이 알아야 할 세 주제”
주일 오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131편 1,2,3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 34편 6,7,8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 130편 2,4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19편 3 (고정)
설교 후 찬송 – 시 85편 1-4
성찬식 찬송 – 시 65편 5,6 (고정)
폐회찬송 – 시 102편 9 (고정)
* 아멘찬송은 해당 시편으로 할 것
포로 귀환 후의 백성이 알아야 할 세 주제
시편 85편은 ‘포로 회복’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시편입니다. 제일 첫 구절에서부터 그러한 진술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로 돌아오게 하셨으며”
그리고 이 시편은 시간순으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시면 의미를 파악하기 쉽습니다. 시편 85편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세 시간대로 구분되어 있는데,
1) 1절부터 3절까지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포로 회복은 이미 일어났고, 이 포로 회복에 대해 말합니다. 특히 포로 회복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1절), 그래서 “야곱의 포로된 자를 돌아오게 하셨다”(1절), 그리고 이것을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셨다”(2절), “모든 분노를 거두시고 진노를 돌이키셨다”(3절)는 식으로 설명됩니다.
2) 그리고 4절부터 7절까지는 ‘현재의 삶’입니다. 이 부분은 학개서나 말라기, 혹은 에스라나 느헤미야 같은 성경을 마음속에 그려보시면서 읽으시면 크게 도움이 됩니다. 말하자면 이 현재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섞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포로로부터 귀환하였기 때문에 희망이 여기 담보되어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불안이 여기에 함께 있고, 동시에 우리가 방금 말한 성경들에서 볼 수 있듯이 회복을 통해 돌아온 백성들의 삶은 썩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포로로부터 회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가 짓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4절부터 7절을 읽어보시면 어렵지 않게 이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4절은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그치소서”라고 합니다. 여전히 주께서 분노하고 계시다는 인상을 귀환한 백성들이 갖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5절은 “영원히 노하시겠나이까!”입니다. 같은 심정을 볼 수 있죠? 6절과 7절은 ‘희구’입니다. 6절에서 ‘부활’이라는 소재로 회복을 바라면서 7절에서 명시적으로 “인자하심”, 곧 헤세드를 주시고, 또 “주의 구원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3) 이어서 8절과 9절에서 결심을 말한 후에 시편은 마지막 부분인 10-13절로 맺어집니다. 10-13절 말씀은 이 시의 대미로서 ‘영광스러운 미래’를 손에 잡히는 듯이 그리고 있습니다. 시편 85편은 우리가 지금 오후에 배우고 있는 이사야서와도 매우 관계가 깊습니다. 이사야의 마지막 부분이 회복과 함께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그리고 있는데, 시편 85편의 이 마지막 부분에 우리가 이사야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그런 이미지가 쏟아지면서 커다란 소망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10절에서는 “긍휼”과 “진리”가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춤합니다. 11절에서는 같은 단어들을 다시 한 번 요약하여 말하면서 “진리가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합니다.
이렇듯 시편 85편은 ‘과거-현재-미래’의 시간 구도 속에서 포로 귀환의 경험과 현재 상태, 또 미래에 대한 소망까지를 완전히 집어 넣어 노래함으로써, 우리들에게 아주 선명한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 부분에서 각각 한 주제씩을 갖고 와서 살핌으로써, 이 정황 속에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중요한 가치들을 점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죄를 덮으시는 하나님
문장 구조 : 2절
시의 첫째 부분을 봅시다.
요약하면서 잠깐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셨고”, “포로되었던 자들은 돌아”왔습니다(1절). 시인은 이것을 주께서 백성의 죄를 사하셨기 때문이라고 진술합니다(2절). 우리가 이 첫 부분에서 특히 주목하려 하는 사실은 2절의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저희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시편은 대개 문학적이기 때문에 이 부분의 문구는 이렇습니다.
“주의 백성의 죄를 사했다”라는 앞부분과 “저희 모든 죄를 덮으셨다”는 뒷부분이 의미상 같은 것을 말하지만 다른 단어들로 표현됩니다. 정확히 읽으면
“사하셨다(들어올리셨다) / 죄악을 / 당신의 백성의”
“덮으셨다 / 모든 죄를 / 그들의”
두 부분 모두에서 “죄”가 사용되지만, 히브리어에는 ‘죄’라는 단어가 여러 개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 어감을 풍성하게 합니다. “주의 백성의 죄”라고 할 때의 앞부분에는 죄에 ‘아본’을 사용하고, “저희 모든 죄”라고 할 때의 뒷부분에는 죄에 ‘하타트’를 사용합니다. 비슷한 어감의 동사이지만 앞에서는 “들어올리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뒤에서는 “덮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렇게 시편 85편 2절은 대구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신 것을 반복하여 말하면서 각기 다른 용어를 통해 그 어감이 풍성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매우 시적인 문체로 그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 32:5와의 관계성
그런데 여기에서 주께서 그들의 죄를 “덮으셨다”라고 말씀한 부분에 좀 주목해 보도록 합시다. 여기 “덮다”라는 말에는 ‘카사’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단어에 주목할 이유는 시편 32편에서 죄와 관련하여 이 단어가 사용될 때의 용례와 여기 85편에서의 용례와의 상관성 때문입니다.
시편 32편 5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우리는 시편 32편에서 시인이 죄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한 동향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대하여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라고 한 다음에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않았더니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였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시편 85편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단어 두 개가 같은 방식으로 사용된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시인은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대하여 “숨기지 않았더니”, 주께서 자기의 죄를 “사하여 주셨다”고 했는데, 이때 “숨기지 않았다”의 “숨기다”와 “사하여 주셨다”의 “사하다”가 모두 오늘 시편 85편에 나옵니다.
이것을 정리하자면 이렇게 됩니다.
• 시편 32편에서 시인은 죄를 하나님께 “숨기지” 않았습니다. ‘카사’입니다.
• 시편 85편에서 하나님은 시인의 죄를 “숨깁”니다. 우리가 아까 들은 우리 번역에서는 “덮다”였습니다. 이 단어가 ‘카사’입니다.
• 그리고 시편 32편에서도 하나님은 죄를 ‘나사’, 곧 들어올리셨고, 시편 85편에서도 하나님은 죄를 ‘나사’, 곧 들어올리셨습니다. 이 말은 의역하자면 “사하셨다”입니다.
즉 우리는 시편 85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고”, “숨기신다”(우리 번역에서는 덮으신다)는 말씀을 보았는데, 똑같은 두 단어를 모두 사용하는 시편 32편은 “우리가 죄를 숨기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시편 32편과 85편의 종합 속에서 죄와 관련한 중요한 통찰을 하나 얻게 됩니다. 이를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숨기지’(카사) 않고 아뢰면
하나님께서 그 죄를 ‘숨겨’(카사)주신다.”
여기 ‘숨김’과 ‘숨김’의 놀라운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자기의 죄를 ‘숨기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숨겨’주십니다.
달아나는 우리, 그리고 사죄의 조건
범죄한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피합니다. 아담의 범죄 현장에서 보듯이, 죄를 지은 인생은 하나님의 눈앞으로부터 달아나려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절대로 하나님의 눈앞에서 달아날 수 없습니다”라는 지식을 가장 잘 가지고 있었던 아담과 하와, 첫 사람들은 죄를 짓자 즉시로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났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인식’, 우리의 ‘죄책감’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 하지만 죄를 지을 때, 혹은 짓고 난 후의 나의 마음 상태는 어떤가요? 우리는 죄를 짓고 있을 때 혹은 죄를 짓고 난 후에, 가장 먼저 신의식을 느낍니다. 뒤통수가 따가움을 느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 죄를 바라보고 계심을 의식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입니다! 슬금슬금 그 자리로부터 피합니다. 그 이야기를 하나님께는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가 죄를 지은 영역 근처에는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와 관련된 주제로 마음속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저지른 그 죄의 영역에 대하여는 기도할 때에도, 하루를 살아갈 때에도 하나님께 언급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배를 드리려고 교회당에 나와 앉아 있어도, 설교 주제 속에서 내가 저지른 그 죄악은 등장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혹여라도 내 양심을 찔리게 만드는 이야기가 목사의 설교 속에 나오면 그 설교에 대해 화를 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숨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편 32편과 85편은 우리에게 분명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숨기지 않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숨겨주신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죄의 첫 시작은 ‘하나님 그분께 자신의 죄를 숨기지 않음’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만 사죄의 가능성이 생깁니다. 하나님께 말하지 아니하고 숨길 때, 우리의 죄는 그대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여호와께 숨기지 않을 때만 역사합니다.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신자가 죄를 범하였을 때, 심지어는 오늘 시편 85편의 배경에서처럼 죄를 지어서 그 형벌로 포로로 끌려가 있는 정도의 극악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에게 보장하시는 바는 “네가 죄를 나에게 숨기지 않는다면!”, “네가 너의 죄를 내 앞에서 등 뒤로 감추려고 하지 않고 나에게 아뢰기 시작한다면!”...... “그렇다면 내가 너의 죄를 숨겨주겠다!”라는 사실입니다!
기억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비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 가장 강력하게, 그분께 나아와 죄를 토로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짓더라도, 죄 가운데 머물지 맙시다. 그리고 가장 먼저 우리의 자비하신 아버지께 우리의 죄를 고백합시다. 바로 거기에만 참된 사죄의 첫 시작이 있습니다.
부활
시의 두 번째 부분, 곧 ‘현재의 삶’ 부분에서 둘째 주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둘째 주제는 6절에 주목합시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
정황
시편 85편은 명백하게 포로 귀환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리고 설교의 서론에서 잠깐 말씀드린 대로 이 포로 귀환기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얽힌 시대였습니다.
1) 우선은 그들에게 ‘소망’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러 번 살핀 대로 포로로부터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실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포로로 끌려갔으나 귀환하지 않은 백성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입니다. 즉 포로로부터 돌아온 사람들은 무려 6-70년간 일구어 왔던 이방 땅에서의 삶의 터전을 모조리 버리고, 허허벌판 아무것도 없는 이스라엘 땅에, 오직 이 땅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이라는 사실 하나만을 바라보고 돌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적 열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대강 살려고 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2) 하지만 이들은 곧장 ‘현실적 어려움’에 부딪쳤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가 학개서 설교를 통하여 들은 것처럼, 그들의 이런 열심과 소망들은 핑크빛 결과물들을 빚어내지 않았습니다. 성전을 짓고, 성벽을 건설하고, 이제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리는 한량 없는 축복 속에 강대한 기업, 부강한 국가를 이루리라 생각했던 그들은 즉시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첫 시발점이 될 성전 건축 하나조차 이민족들의 방해와 간섭으로 가로막히고서는 이들은 즉시 패배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성전 건축에서는 손을 놓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판벽한 집이 가하냐!”(학 1:4)는 하나님의 호통이 있기까지 그들은 실의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들의 이런 마음을 시편 85편의 둘째 부분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합니다. “여호와의 진노가 여전히 우리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여호와께서는 언제까지 진노하실 것인가?”,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죽음과 부활
포로로부터 귀환한 이 암울한 상황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시인이 이 상황을 ‘죽음’으로 보았다는 점입니다. 6절 말씀은 “우리를 다시 살리사”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살리다”라고 했으므로 죽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시인은 이스라엘의 포로와 그로 인한 상태를 ‘죽음’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의 상태로부터 “다시 살리사”, 곧 시인은 ‘부활’을 고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주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죽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우리는 간혹 사람들을 통해서 “죽겠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 죽겠다”라는 말도 흔히 듣게 되고, 이러지도 못하는 양쪽의 사이에 끼어 있게 될 때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죽겠네”라는 이야기도 듣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입버릇처럼 나오는 말이기도 하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진지하게 죽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내가 진심으로 죽겠다고 생각하는 상황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진심으로 죽을 것 같다고 느끼십니까? 큰 빚을 지게 되었을 때, 도박 중독이나 알코올 중독에 걸렸을 때, 불면증이 너무 심해서 잠을 잘 수가 없을 때, 큰 병에 걸렸을 때, 자녀가 방탕하여 완전히 그릇된 길로 접어들었을 때......우리는 이런 여러 가지 상황들 속에서 “죽겠다”는 생각, 곧 ‘죽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시편 85편에서 시인이 “우리는 죽어 있으므로 우리를 다시 살려, 곧 부활시켜 주심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정황에서일까요? 다시 살려달라는 간구가 6절에 나오므로, 그가 어떤 정황 속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는 5절을 보면 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발분하시겠나이까?”
우리는 5절과 6절의 연결 속에서 포로로부터 귀환한 하나님의 백성들, 그중에서도 이 시인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려고 했던 주의 자녀들이 ‘진실로 무엇을 죽음으로 여겼는지’를 확연히 보게 됩니다.
5절에 의하면 신자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진노하시고 계신 상황”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낯을 가리우고 계신 상황이지요. 여러분이 예배를 마칠 때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우리를 향하여 드시고 비취시면서 이 한 주간도 우리와 함께 계시옵소서!”라고 강복을 들으면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것이 없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는 하는데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기 때문에 에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한 주간의 삶 가운데 삼위 하나님의 인도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 그것이야말로 신자들에게 ‘죽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포로로부터 귀환하였던 주의 백성들에게 ‘진정한 공포’가 무엇이었는지를 확연히 깨닫게 됩니다.
성경에는 ‘여호와의 임재’가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임재는 처음에는 족장들 중에 ‘임마누엘의 약속’ 형태로 있다가(“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에게도 야곱에게도), 공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성막을 건축하였을 때 임합니다. 이는 나중에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에도 동일하게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과 ‘함께 계시겠다고’ 계속해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사무엘상 같은 곳에 보면 이후 포로기의 약간의 예고편처럼, 여호와의 임재가 이스라엘 땅을 떠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법궤는 이스라엘을 떠나 블레셋 땅에 갔고, 여호와의 임재는 이제 이스라엘 진중에서가 아니라 블레셋 땅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중에 계시지 않고 이방 백성 중에 화와 재앙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예고편이 결정적인 실제 형태로 나타나는 곳이 에스겔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그룹 마차는 성전 문지방을 넘어 이스라엘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에서 ‘재앙의 시대’를 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떠나버리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물어도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라기 시대 이후로 거의 500년간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마카비서나 요세푸스의 기록 등에 중간기 시대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중간기의 역사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중간기 시대의 가장 강력한 특징은 여호와께서 응답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비로소 그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임했다”는 진술이 다시 나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이스라엘을 버리고 떠나셨고, 최후에 하나님께서 아들로 오시기까지 이 떠나심은 이스라엘에게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 또 학개와 말라기를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포로 귀환 후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진정한 공포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그치시지 않으실까!”, “하나님께서 영영히 노하실까!” 4절과 5절이 말하는 그들에게 있었던 참된 공포는 이것이었습니다.
시인이 여기에서 간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려주십시오!”, “우리를 부활시켜 주십시오!” 그러므로 여기 부활이란, 여기 새 생명이란, 다시금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의 백성들에게 있어 죽음이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떠나시고 진노 가운데 계시는 것이며, 부활이란 하나님께서 그들과 다시 언약 관계를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 저주 가운데 머물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신자입니다. 새로 시작한 사업이 고객 타게팅이 정확하게 되어 매출이 두 배로 불었습니다. 지역구에서 세 번째 당선되어 다시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다음 대선 주자로 유력합니다. 새로 발표한 논문이 학계에서 굉장한 반응을 얻어냈습니다. 카페를 새로 시작했는데 인플루언서들의 극찬을 받고 매일 눈코 뜰 새가 없이 손님들로 북적입니다. 열심히 돈을 모아 드디어 건물을 하나 매입했는데, 근처에 대단지 개발이 시작되면서 땅값이 폭등했습니다.
이렇게 삶에서 승승장구하는데, 실제로는 신앙적 견지에서의 그의 삶은, 세상적 승리에 도취되어 하나님께서 계신지 어떠하신지에 관심도 없고, 하나님께서 진노하고 계시는 것에 대해서 인식도 없으며,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신앙적 삶, 주일에 설교를 통해 쏟아지는 “주의 백성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라는 말씀들에 졸고 있는 그런 종류의 삶......이렇게 사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음 가운데 있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제아무리 자기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있어도, 여호와께서 나를 향하여 등을 돌리셨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습니다.
세간의 기복신앙에서는 사업이 잘 되고 있고 인간관계가 술술 풀리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내게 복 주시고 계시는 증거’라고들 하지요. 하지만 빌 게이츠도 워런 버핏도 이건희도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을 몰라도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들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그분의 얼굴 빛 가운데서 사는 삶, 그야말로 ‘코람데오’의 삶,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의 삶입니다.
시인은 노래합니다. “우리는 죽어 있습니다!” 포로로 끌려 갔다 왔지요. 그건 불순종에 의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시 기회를 주셔서 포로로부터 귀환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다시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진노는 멈추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귀환한 백성들의 삶은 곤고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시인은 외치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활시켜 주십시오!”
우리는 이 둘째 문단에서 ‘신자에게 죽음은 무엇인가’라는 주제와, 따라서 ‘우리에게 부활은 어떤 의미인가?’라는 주제를 발견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혹 죽어 있지 않은지, 또 부활의 삶을 영위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항상 자신을 살펴야 할 때입니다.
은혜와 진리의 나라
마지막으로 ‘미래’의 부분에 등장하는 희구는 이 시를 마무리지으면서, 또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운 소망을 품게 합니다. 9절 말씀은 우리가 둘째 주제에서 살폈던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그 떠나셨던 영광’이 다시 돌아오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이다”는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이 땅, 곧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돌아오시기를 소원하는 간구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다시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 돌아오실 때의 모습이 10절과 1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긍휼과 진리”가 만납니다. “의와 평화”가 입맞춥니다. 10절의 이 내용을 11절에서는 앞의 둘에서 진리를, 뒤의 둘에서는 의를 뽑아서 다시 한 번 서술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오고, 의는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이 10절과 11절에 나오고 있는 내용들 중에 “의와 평화”는 잠깐 미뤄놓고(이 두 주제도 따로 다룰 만한 중요한 주제입니다), 앞의 둘, 곧 “긍휼과 진리”를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긍휼과 진리”를 히브리어로 읽으면 여러분에게 좀 더 친숙한 단어가 됩니다. “긍휼”은 ‘헤세드’이고, “진리”는 ‘에메트’입니다. 진리는 우리 번역 그대로 보셔도 좋지만 ‘헤세드’는 좀 더 익숙한 번역은 “인자”나 “자비”입니다.
즉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돌아오실 때, 바로 그때 그분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나라가 다름 아닌 “헤세드와 에메트의 나라”, 그리고 “체덱과 샬롬의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헤세드와 에메트의 나라”를 생각해 봅시다.
1) 성경에서 ‘헤세드’와 ‘에메트’를 동시검색하면 원튼 원치 않든 눈에 너무나도 확연하게 그림이 그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주목해야 하는 첫 구절은 출애굽기 34장 6절입니다.
출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로,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헤세드)와 진실(에메트, 진리)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출애굽기 34장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헤세드와 에메트의 하나님”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며,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진리가 충만하십니다.
이 출애굽기 34장의 정황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 자신을 “헤세드와 에메트의 하나님”으로 드러내셨습니다.
2) 이후 우리는 다른 성경들에서 이 “헤세드와 에메트의 하나님”이 구현된 왕국의 모습들을 여기저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 열왕기상 3장 6절에서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이 행한 일을 평가할 때 “내 아비 다윗이 성실(에메트)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헤세드)를 베푸셨다”고 씁니다. 하나님의 뜻이 구현된 왕국의 성격은 헤세드와 에메트의 나라입니다.
• 이사야 16장 5절 말씀은 “다윗의 장막에 왕위는 인자함(헤세드)으로 굳게 설 것이며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에메트)으로 판결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역시 다윗을 통하여 세워지는 하나님의 왕국은 헤세드와 에메트의 나라입니다.
• 호세아나 스가랴에는 이것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 나라에 대한 책망의 말씀으로 헤세드와 에메트가 나옵니다. 호 4: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에메트)도 없고 인애(헤세드)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슥 7:9 “만군의 여호와가 이미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에메트)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헤세드)와 긍휼을 베풀며”
3)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시편에는 시적 표현으로 이 나라를 그리는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 시 25:10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헤세드)와 진리(에메트)로다.”
• 시 40:11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헤세드)와 진리(에메트)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 시 57:11 “대저 주의 인자(헤세드)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에메트)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우리는 헤세드와 에메트의 조합이 다음의 사실을 밝히 보여주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 헤세드와 에메트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왕국은 헤세드와 에메트의 나라입니다.
• 그러므로 주의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면(다윗처럼!) 거기에는 반드시 헤세드와 에메트가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계속해서 배우는 대로 ‘신자로 자라 성장하는 것’은 나에게 맞추어져 있던 초점을 하나님과 이웃에게로(‘이웃에게’는 ‘하나님께’의 실천적 국면이다)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또 그분의 나라가 어떤 성격인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성장한 주의 백성의 면모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지금의 모습이 마치 죽음과 같은 중에 있고, 그래서 부활을 고대하면서 말했는데, 시의 셋째 부분인 ‘미래’에 대한 기술에서는 바로 이 부활의 나라의 성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바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분의 진리가 밝히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 하나님께서 자비하신 분이신데, 그분의 나라가 임한 교회 안에 ‘자비, 인자, 오래참음, 인애, 이해해줌, 기다림, 넉넉히 베풂’ 같은 이 헤세드의 요소들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이땅에 있다는 것(9절)은 이 헤세드가 교회 가운데 충만하다는 의미입니다.
2) 하나님께서 진리의 하나님이신데, 그분의 나라가 임한 교회 안에 ‘말씀을 사모함, 진리 가운데 행함, 경청을 원하는 마음, 주의 깊게 듣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 행하는 행동이 말씀에 일치하는지를 대보는 것’과 같은 이 에메트의 요소들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이 땅에 있다는 것은 이 에메트가 교회 가운데 충만하다는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것까지 함께 말하도록 합시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성경은 어떻게 묘사했습니까?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헤세드)와 진리(에메트)가 충만하더라”
그렇습니다! 헤세드와 에메트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인 충만으로 나타났습니다. 곧 헤세드와 에메트가 가득한 교회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
정 리
오늘 시의 세 문단을 따라, 또 시간의 세 구도를 따라 세 주제를 살폈습니다.
1) 내가 여호와께 죄를 숨기지 않을 때 비로소 여호와께서 내 죄를 숨기우심을 기억합시다.
2)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무엇인지, 또 그로부터의 ‘부활’은 무엇인지를, 여호와와 연관하여 늘 생각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등을 돌리시고 계시면, 신자는 그것으로 죽은 것입니다.
3) 끝으로 헤세드와 에메트의 나라를 상기합시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분의 진리가 내 삶 가운데, 또 이 교회의 삶 가운데 넘치도록 합시다. 불의와 이기심으로 가득한 교회는 겉으로 교회라는 명패를 내걸고 있어도 사탄의 왕국입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분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또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이 여기 이 땅에서도 우리들, 곧 이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