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중세판타지물에서 촉발된 서양사의 갑작스런 범람으로 인해 많은 분들이 동양사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 없이 단지 피상적으로 뭐가 우수하니 열등하니 하는 성급한 관념들을 형성하고 계신 것 같은데(꼭 여기 분들이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이와 관련해 몇가지 부분들을 지적하고 싶네요.
동서양의 갑옷 차이는 무기/군사편제/정치제도/전쟁개념/자연환경 등의 차이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생긴 겁니다. 어디가 더 무기제조술이 뛰어나거나 전술이 발달해서 생긴 차이가 아닙니다.
우선 무기체계의 차이를 보면, 동양에서는 복합식 활이 오래전부터 크게 발달했기 때문에 전투의 대부분을 원거리 무기에 의존했습니다. 이러다보니 접근전은 상당히 꺼리게 되고, 그래서 더더욱 원사무기에 의존하게 되는 순환이 벌어졌죠. 또한 말이 많았기 때문에(동양에서 전투의 대부분이 벌어지던 지역이 말을 대규모로 방목하던 북부의 초원지대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왜 군대에서 기병의 비율이 높았는지는 쉽게 이해가 가시겠죠?) 기병전이 중심이었고, 전술체계 자체가 전반적으로 방어성보다는 기동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발달했습니다. 암만 갑옷이 좋고 무기가 좋으면 뭐합니까? 적을 따라잡질 못하면. 따라서 괜히 무게를 늘려 활동성을 제약하는 방식보다는 효율적으로 군대의 위치를 이리저리 옮기면서 적의 전략적 약점을 가격할 수 있는 경갑 위주로 갑주가 발달했지요. 동양의 전쟁상황에서는 경갑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접근전을 혐오하고 꺼려했던 동양에서는 근접전에 수동적으로 말려드는 것 자체가 사실상 전투의 패배를 의미했고 전투의 우열은 그 이전에 결판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러한 전술적 차이는 양국의 정치조직의 차이와도 큰 연관이 있습니다. 즉, 동양의 정치체제가 서양보다 훨씬 중앙집권적이었기 때문에, 동양의 전쟁은 대규모의 징집병을 중심으로 자주는 아니지만 광대한 지역에 걸쳐 커다란 세력끼리의 싸움이 주를 이뤘던 데 반해, 봉건영주 중심의 서양의 전쟁은 주로 소수의 기사 위주로 된, 지방 영주들간의 소규모 국지전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당연히 동양병사들이 평균적으로 훨씬 가난했죠. 그리고 전면전 위주의 동양에서는 전술보다는 전략적 거점 확보가 중요했기 때문에 전장의 범위도 훨씬 넓었습니다. 군대의 이동거리가 훨씬 길었다는 얘기죠. 이런 상황에서 서양처럼 중무장을 한다는 것은 바보짓일 뿐입니다.
이러한 전쟁방식의 차이는 축성술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중앙집권체제였던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성들은 지역방어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성벽의 길이나 규모 자체는 훨씬 크지만 성벽의 높이는 대체로 낮은편이죠. 반면 서양의 성들은 영주의 거처를 중심으로 한 거점방어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성벽길이는 짧지만 높이가 상당히 높죠. 흥미있는 사실은 같은 동양이라도 외침으로 인한 전면전이 적고 유목민 궁기병을 상대할 필요가 없었으며 봉건적 정치체제가 오랫동안 유지됐던 일본의 성들은 서양과 유사한 거점방어형 성이라는 겁니다. 동양에서 유독 일본의 중갑과 도검이 발달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죠.
또한 전쟁동기의 차이도 들 수 있습니다. 동양에서의 전쟁은 대부분 약탈하러 내려온 유목민과(초원지대의 정기적인 기근으로 인해 유목민들은 주기적으로 남쪽의 정착민들을 약탈해야할 생존적 필요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약탈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고자 했던 농경민간의 싸움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약탈이 목적이었지 상대방의 제거가 목적이 아니었던 반면, 서양의 전쟁은 초기 바이킹들의 위협이 일단 사라진 이후부터는 주로 영주들간의 권력싸움으로 야기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전투의 목적이 상대방의 제거였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중요한 전술의 차이를 가져왔는데, 동양에서는 상대방을 쫓아내기만 하면 성공이었으므로 접근전을 굳이 할 이유가 없었던데 비해 서양에서는 접근전이 언제나 불가피했죠. 즉 경제적 동기가 강했던 동양의 전쟁에서는 대부분의 '전투'가 무장군대가 비무장 농민을 공격하면 농민은 도망가고 정착민 쪽에서 역시 무장한 요격부대가 출동하면 쳐들어왔던 약탈부대는 알아서 물러나는 식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공격자 입장에서나 수비자 입장에서나 기동성이 가장 중요했지(적 수비군이 없는 지역을 잘 골라 순식간에 쳐들어가서 약탈해야 하니까) 기동성을 오히려 갉아먹을 수 있는 근접전투력 강화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겁니다. 어쩌다 접근전이 일어나는 경우는 주로 공성전에 국한되었고 평지에서의 싸움은 상대적으로 기피됐는데, 공성전에서 갑옷을 입는 건 그다지 효율적인 게 아닙니다. 반면 정치적 동기하에 수행됐던 서양의 전투에선 공격대상이 적 비전투원이 아니라 군대 자체이므로 기동력보단 근접전투력이 중요했죠.
한마디로, 서양의 군사체계와 동양의 군사체계는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점입니다. 양 문명의 무기, 갑옷, 전술, 축성술, 연락/보급체계, 군사편제 등등은 이러한 각자의 상이한 상황과 목적에 맞게 최적화된 것으로 어느것이 더 우수하냐 하는 것은 무의미한 비교일 뿐입니다. 서양의 기사단이 동양에 가면 비싸기만 하고 파리하나 못잡는 초허접 애물단지가 될 것이고, 동양의 경기병이 서양에 가면 밀 서리로나 연명하는 시시한 산적떼밖에 못될 겁니다.
그냥 대충 갈겨쓰다보니 글이 너무 두서가 없어져서 죄송하네요. 그래도 대충 무슨 소린지는 아시겠죠^^;;
ps: 그리고 한가지 덧붙이자면, 많은 분들이 플레이트아머의 방어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동양이나 서양이나 갑옷의 주된 목적은 화살방어에 있었지 근접전에서 쓰는 충격무기들을 막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사무기보다는 아무래도 강력한 충격무기들에 대해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는 갑옷이 엄청나게 두꺼워져야 하는데(당시의 제련기술이 그리 높은 수준이 아니었단 점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그러면 갑옷이 지나치게 무거워져 전투수행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접근전이 일단 벌어지면 제아무리 강력한 플레이트아머라도 상대방이 휘두르는 철퇴나 창 앞에서는 별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플레이트 도배한 기병은 있었어도 플레이트 도배한 보병은 없었던 원인입니다. 보병이 그렇게 활동성이 떨어지는 갑옷 입고 전투하러 나섰다간 제아무리 갑옷이 좋다 해도 순식간에 적군의 밥이 되니까요. 실제로, 서양갑옷 발달의 역사는 점점 강력해지는 활에 대응한 것이었다고 보면 무방합니다. 결국 중세말 중국에서 석궁이 전래되고 이것이 개량까지 거치면서 중갑은 최종적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맙니다. 화약무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도 한참 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석궁의 인력은 동양에서 쓰이던 복합활과 비교해 특별히 강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조작이 쉽다는 게 장점이었죠. 이런 사실은 동양에서 왜 중갑이 일찌감치 자취를 감췄는지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플레이트메일이 정교한 디자인으로 무게에 비해 활동성도 좋은 대단히 우수한 갑옷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 외양의 화려함만큼이나 방어력도 압도적이었다는 믿음은 잘못된 것이란 점을 지적하고 싶네요. 요컨대 근접무기에 대한 방어력은 플레이트 아머나 다른 종류의 아머나 별수 없다는 점에선 큰 차이가 없다, 오히려 활동성이 더 좋은 경갑의 장점도 무시할 수 없다, 다만 원사무기에 대한 방어력은 플레이트아머가 뛰어났지만 이 역시 강력한 활(석궁, 복합활, 장궁 등) 앞에서는 결국 별수 없다, 따라서 효용성은 어디까지나 구식 원사무기가 사용되던 시절에나 있었던 것이다 뭐 이런 얘깁니다. 플레이트아머가 유독 유럽에서만 등장하고 다른 문화권에선(심지어 바로 인접해서 늘상 함께 치고박고하던 이슬람문화권까지) 거의 채택되지 않았던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댓글글쎄요...동양의 기병이 부담해야 했던 무게가 기사들보다 월등히 무거울까요? 플레이트란 놈이 사실상 30대의 물건이고 이슬람 중기병이 착용했던 체인도 20대 초중반의 무게입니다. 여기에 전통적으로 마갑을 입힌 동양의 중장기병들은 마갑의 무게까지 부담해야 했습니다. 물론 서유럽에서 경기병이 큰 비중을 하지하지 못했던것이 사실입니다만, 아시아의 중장기병들도 오히려 더한 무게를 감당해야하는ㅡ특히 괴자마ㅡ 기병이 존재하지 않았습니까?
송대의 보병 갑주는 32킬로까지 나가는데, 이건 호플리테스들이 감당했던 무게와 유사한, 즉 한 인간이 효율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까지 존재했다고 압니다. 거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중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의 전쟁은 중병들끼리의 백병전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원거리무기의 위력이 아무리 뛰어나다한들 백병전 이전에 피로와 소규모손실, 진형 밀집등을 유도하는 것이지, 상대가 레귤러라면 원거리 무기의 효용은 상당히 제한되거든요.
이미 이릉의 흉노전때만 해도, 한군은 체계적인 보병 백병전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삼국시대에도 단병접전이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군에게 치명타를 가한것은 당의 중보병의 장창충격전이었구요. 물론 투사무기의 효율과 위력에서 동서양에 큰 차이가 있었고 전쟁수행방식에도 차이를 주었음은 분명하지만, 서양 중갑, 동양 경갑이란 등식을 적용하기란 어렵다고 봅니다.
물론 중세 동서양의 중앙집권 여하에 따라 전투방식에 차이가 있었다는 것은 훌륭하신 지적입니다만, 그것을 중ㅡ경갑으로 연결시키시는 것은 조금 성급하셨다 생각합니다. 유럽의 장거리이동능력의 부재는 중갑이라기보다 병참에서 찾아야 합니다. 국가가 미약하니 장기간의 원정을 수행할 물자와 보급이 불가능하다는거죠. 실제 유럽기병보다 더한 중기병을 운용했던 금을 비롯한 동양의 군대의 기동성은 결코 떨어지는게 아니었고,
백년전쟁 당시 흑태자는 중기병 때문이 아니라 병참수레 때문에 결전을 강요당해야 했습니다. 실제 중기병은 여러필의 말을 소유하기 때문에 경기보다는 느릴지 몰라도 군의 속도를 절대적으로 잡아먹는 보급수레보다는 훨씬 나은 기동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목기병이 미칠듯한 기동력을 자랑했던 것은 경갑이라기보다ㅡ유목민 정예의 절반 가량은 중기였습니다.ㅡ보급을 기병이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고
갑옷건도 체인메일만 해도 근접전에서 얼마나 뛰어난 방어력을 자랑하는지는 중세 연대기에 잘 나타나있고, 플레이트의 경우도 경면장갑 도입은 분명히 근거리 대결을 의식한 것입니다. 경면장갑의 도입으로 충격을 흘려보내 대처할 수 있었거든요. 거기에 서양 검술 역시 상대의 공격에ㅡ피한다ㅡ가 가장 추천되는 대처법이었습니다. 오히려 원거리 무기의 효용이 떨어졌던만큼 근거리 무기에 대한 대처가 더 절실했구요. 이미 장궁병이 유럽을 뒤흔들기 이전부터 관절과 어깨, 가슴에 부분적인 플네이트가 도입되고 있었구요
실지 푸아티에나 아쟁쿠르에서 롱보우는 판금갑옷에 치명상을 주지 못했습니다. 대신 화살비는 치명적인 전술적 실책을 반복한 프랑스군의 과도 밀집을 강요했고, 이들을 처리한것은 역시 중갑을 갖추고 말에서 내린ㅡ푸아티에나 오레전투도를 보면 기사와 같은 무장을 한 보병기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ㅡ잉글랜드 기사에게 격퇴되었지요. 석궁과 합성궁의 경우 장력은 석궁이 훨씬 뛰어납니다. 대신 중간에 운동량의 손실이 많지만 살상력은 합성궁을 능가하는 경우가 많았고, 활의 개인적 능력차에 의한 우연성을 줄어주는데도 효과가 있었습니다.
오우~ 본글도 훌륭하고 답글도 훌륭하군요. 제 의견을 말해 보자면 사실 판금갑옷 자체가 본격적인 전장에서의 목적에서라기 보다 서양의 봉건문화속에서 점차 중앙집권으로 향해가는 과정에서 VIP의 보호를 목적으로 발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게이볼그님 말씀처럼 이미 이전에도 주요 부분을 보호해 주는 플레이트가 있었지만 그것은 동양권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존재했었습니다. 사실 정말 뛰어난 플레이트 완갑의 경우 대부분 그 수명이 짧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플레이트가 짧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완벽한 갑옷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약류의 무기가 등장하면서 별로 효용이 없어졌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동양권에서는 일찍부터 중앙집권으로 인한 권력의 집중으로 주요 인물이 전장에서 직접 대적할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정 수준 정도의 체인메일이나 두정갑 정도의 갑옷으로도 그 효과를 볼 수 있었고 비용대 효과면에서도 꽤 효율이 있었으니 그런 플레이트가 나올 이유가 없었죠, 동양권에서 중기병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서양의 그것처럼 소수 기병의 전투라기 보다 대규모 기병의 접전이었고 그러한 유지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풀플레이트 같은 것은 참 곤란한 방어구였겠지요. 결국 글쓰신 분의 말처럼 중앙집권으로 인한 전쟁양식의 차이가 이러한 방어구의 발달을 방해(?) 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게이볼그님 말씀중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전투가 중기병의 접전능력에 따라 결정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삼국시대 이전이나 동양의 중세 - 명칭을 짓기가 애매하네요 - 이전에는 그러한 접전 방식의 전투가 꽤나 중요한 요소였고 그에따라 중기병이 큰 역할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이후 전투를 보면 중기병은 중요한 수단일 뿐 그것이 전장 전체를 좌우 했다고 보기는 힘드네요. 전술적 국면에서의 잇점은 있지만 말이지요.
음...중기병이 아니라 중병이라고 했어요ㅇㅅㅇ 굳이 중기병, 중보병을 전부 포함해서, 그 전투의 가장 치명적인ㅡ전체 사상자 수보다는 중요순간의 결정적인 피해의 의미로ㅡ중갑을 갖춘 군대의 백병전이 성패에 큰 영향을 준다는거지요ㅇㅅㅇ 매복과 기습이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상대의 대열을 허무는건 투사무기보다는 얘네들이거든요ㅇㅅㅇ;;;
그리고 상대 군대의 중추가 공세에 무너지지 않으면 승리라고 해도 결정타가 될 수 없듯이요. 동양에서 궁시의 중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결정적으로 그날의 성패를 좌우하는것은 근접전이고, 궁시는 그 때까지 여건을 아군에게 최대한 유리한 상황으로 이끄는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ㅇㅅㅇ 물론 이점에 대해서는 제 설명에 문제가 있었나봅니다 ㅡㅁㅡ;;; 페로페로님의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게이볼그님 말씀중에서 두가지 지적하고 싶은 게 있군요. 첫째, 시대적으로 봤을 때 동양에서도 중갑이 쓰이긴 했지만 그것이 등자와 석궁의 보급이 늘어남에 따라 당대 무렵부터 눈에 띄게 쇠퇴했는데, 님이 동양 중갑의 예로 든 것들이 대부분 중갑이 쇠퇴하기 이전시대의 것들이라 생각됩니다. 두번째는, 물론 동양에서도 중갑병이 쓰였습니다만 그것이 군대에서 전체적으로 차지하던 비중이 어느정도였느냐 하는 것은 다른문제입니다. 왼손잡이도 당연히 오른손을 쓸 수 있듯이요.
그리고 동양의 전투방식에서는 접근전을 극도로 기피했다는 사실은 여러 기록에서 보입니다. 몽고족 같은 경우는 칼이나 창을 들고 얼굴을 맞대는 전투는 야만시했고 접근전이 일어날 것 같으면 자신들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지 않은 한 무조건 달아났습니다. 중국의 전술도 기본적으로 유목민을 상대하는 데 중점을 두고 발달했기 때문에 비슷했고요. 요는, 충격전이 전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동양에서는 서양에 비해 훨씬 적었다는 겁니다. 충격전에 익숙하지 않은 군대는 따라서 충격전에 대한 내성이 무척 약하므로 먼저 백병전으로 공격당하는 쪽이 바로 질때가 많았습니다.
임진왜란때 일본 사무라이군대의 돌격에 와르르 무너졌던 우리나라의 경우가 좋은 예죠. 제가 본문에서 전쟁의 승패는 양군의 충돌 전에 사실상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 게 이런 뜻입니다. 물론 님 말씀처럼 백병전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죠. 상대적으로 덜중요했다는 것이죠.
예. 백병전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덜한건 맞습니다만ㅡ그건 위에도썼고ㅡ가장 결정적인 요인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몽골군 역시 경기병이 이리저리 뛰고 흔들어도 가장 치명적인 타격은 중장기병의 공격으로 결정되었으며 이를 위해 몽골군 기병의 사십 퍼센트는 중장기병으로 구성되어 있고 몽골군의 기록화에서도 중장기병의 돌격을 묘사한 그림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아가 등자 도입 이후 동양은 오히려 극심한 장갑 인플레를 겪습니다. 개마기병이 전 동아시아에서 백년도 안되는 사이에 크게 퍼지게 되죠. 357년 동수묘를 기점으로 온몸과 말을 갑주로 감싼 기병은 중국과 유목민에서 동시에 나타납니다. 물론 우리나라도 그 트렌드에 편승했고 이는 카레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당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됩니다
게이볼그님 견해를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만 그런데 님이 간과하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중장병을 결정적인 순간에 투입하는 것과, 중장병으로 결정적인 순간을 이끌어내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양의 경우에는 전자의 성격이 보다 강했겠지요. 현대전에서 승리를 가장 크게 좌우하는 건 공군이지만 병력은 육군이 제일 많고 적 영토를 점령하는 것도 육군인 것과 비슷한 이치라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유럽군의 중갑 비중이 높았냐 하면, 주력부대인 기사들은 거의 중장이었습니다만 일반 창병은 갬버슨만 입고 전장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동서양의 대결이라 할만한 리그니츠에서도 몽골군은 최종적으로 중장기병을 돌격시켜 폴란드군을 붕괴시컸습니다. 물론 이 상황에서 최종돌격 때 몽골기병들도 적지 않은 손실을 입어야 했을정도로 기사들은 전투능력이 남아있었구요
예. 물론 그점에서 동양에서 궁시의 비중이 컸다는 점은 인정합니다만, 현대 공군처럼 육군 진입전에 전투불능에 가까운 사태를 유도할 수 있냐는 점에서 궁시의 위력과 중요도는 그 기준에 크게 못미칩니다. 그점 때문에 백병전의 요소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이며 유능한 지휘관이라면 그 상황까지 이끌어갈 궁수와 근접병력의 비율과 배치를 적절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논의가 좀 부분에 치우친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중갑병, 싸구려 징집병, 기병, 궁병 등으로 이뤄진 군대의 기본구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습니다. 제 포인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양의 사회적/정치적 환경차에 의해 전쟁개념에 큰 차이가 생겼고, 그것이 전술과 무기체계에 반영되었다는 얘기였습니다. 이런 차이가, 예컨대 동양에서는 플레이트메일처럼 극단적인 보호구가 등장하지 않았고 서양에서는 기사가 전투초반부터 싸움의 주력을 맡게 되었다는 식의 차이가 생긴 원인이라는 얘기였죠. 게이볼그님께서 제 의도를 조금 오해한 나머지 동서양의 유사점에 대해 강조
첫댓글 글쎄요...동양의 기병이 부담해야 했던 무게가 기사들보다 월등히 무거울까요? 플레이트란 놈이 사실상 30대의 물건이고 이슬람 중기병이 착용했던 체인도 20대 초중반의 무게입니다. 여기에 전통적으로 마갑을 입힌 동양의 중장기병들은 마갑의 무게까지 부담해야 했습니다. 물론 서유럽에서 경기병이 큰 비중을 하지하지 못했던것이 사실입니다만, 아시아의 중장기병들도 오히려 더한 무게를 감당해야하는ㅡ특히 괴자마ㅡ 기병이 존재하지 않았습니까?
송대의 보병 갑주는 32킬로까지 나가는데, 이건 호플리테스들이 감당했던 무게와 유사한, 즉 한 인간이 효율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까지 존재했다고 압니다. 거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중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의 전쟁은 중병들끼리의 백병전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원거리무기의 위력이 아무리 뛰어나다한들 백병전 이전에 피로와 소규모손실, 진형 밀집등을 유도하는 것이지, 상대가 레귤러라면 원거리 무기의 효용은 상당히 제한되거든요.
이미 이릉의 흉노전때만 해도, 한군은 체계적인 보병 백병전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삼국시대에도 단병접전이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군에게 치명타를 가한것은 당의 중보병의 장창충격전이었구요. 물론 투사무기의 효율과 위력에서 동서양에 큰 차이가 있었고 전쟁수행방식에도 차이를 주었음은 분명하지만, 서양 중갑, 동양 경갑이란 등식을 적용하기란 어렵다고 봅니다.
물론 중세 동서양의 중앙집권 여하에 따라 전투방식에 차이가 있었다는 것은 훌륭하신 지적입니다만, 그것을 중ㅡ경갑으로 연결시키시는 것은 조금 성급하셨다 생각합니다. 유럽의 장거리이동능력의 부재는 중갑이라기보다 병참에서 찾아야 합니다. 국가가 미약하니 장기간의 원정을 수행할 물자와 보급이 불가능하다는거죠. 실제 유럽기병보다 더한 중기병을 운용했던 금을 비롯한 동양의 군대의 기동성은 결코 떨어지는게 아니었고,
백년전쟁 당시 흑태자는 중기병 때문이 아니라 병참수레 때문에 결전을 강요당해야 했습니다. 실제 중기병은 여러필의 말을 소유하기 때문에 경기보다는 느릴지 몰라도 군의 속도를 절대적으로 잡아먹는 보급수레보다는 훨씬 나은 기동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목기병이 미칠듯한 기동력을 자랑했던 것은 경갑이라기보다ㅡ유목민 정예의 절반 가량은 중기였습니다.ㅡ보급을 기병이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고
기병이 부족했던 중국의 경우, 일사가 삼십리 였던것으로 미루어보아ㅡ고구려 역시 주필산 전투 전, 하루에 삼십이리를 전진했습니다ㅡ그다지 뛰어난 기동력을 보유한것 같지는 않습니다
갑옷건도 체인메일만 해도 근접전에서 얼마나 뛰어난 방어력을 자랑하는지는 중세 연대기에 잘 나타나있고, 플레이트의 경우도 경면장갑 도입은 분명히 근거리 대결을 의식한 것입니다. 경면장갑의 도입으로 충격을 흘려보내 대처할 수 있었거든요. 거기에 서양 검술 역시 상대의 공격에ㅡ피한다ㅡ가 가장 추천되는 대처법이었습니다. 오히려 원거리 무기의 효용이 떨어졌던만큼 근거리 무기에 대한 대처가 더 절실했구요. 이미 장궁병이 유럽을 뒤흔들기 이전부터 관절과 어깨, 가슴에 부분적인 플네이트가 도입되고 있었구요
실지 푸아티에나 아쟁쿠르에서 롱보우는 판금갑옷에 치명상을 주지 못했습니다. 대신 화살비는 치명적인 전술적 실책을 반복한 프랑스군의 과도 밀집을 강요했고, 이들을 처리한것은 역시 중갑을 갖추고 말에서 내린ㅡ푸아티에나 오레전투도를 보면 기사와 같은 무장을 한 보병기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ㅡ잉글랜드 기사에게 격퇴되었지요. 석궁과 합성궁의 경우 장력은 석궁이 훨씬 뛰어납니다. 대신 중간에 운동량의 손실이 많지만 살상력은 합성궁을 능가하는 경우가 많았고, 활의 개인적 능력차에 의한 우연성을 줄어주는데도 효과가 있었습니다.
에에 이상 제 의견을 갈겨놓았습니다만;; 분명 카레님의 의견 역시 훌륭하신 지적이며 좋은 글 올려주신데 감사드립니다
오우~ 본글도 훌륭하고 답글도 훌륭하군요. 제 의견을 말해 보자면 사실 판금갑옷 자체가 본격적인 전장에서의 목적에서라기 보다 서양의 봉건문화속에서 점차 중앙집권으로 향해가는 과정에서 VIP의 보호를 목적으로 발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게이볼그님 말씀처럼 이미 이전에도 주요 부분을 보호해 주는 플레이트가 있었지만 그것은 동양권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존재했었습니다. 사실 정말 뛰어난 플레이트 완갑의 경우 대부분 그 수명이 짧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플레이트가 짧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완벽한 갑옷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약류의 무기가 등장하면서 별로 효용이 없어졌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동양권에서는 일찍부터 중앙집권으로 인한 권력의 집중으로 주요 인물이 전장에서 직접 대적할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정 수준 정도의 체인메일이나 두정갑 정도의 갑옷으로도 그 효과를 볼 수 있었고 비용대 효과면에서도 꽤 효율이 있었으니 그런 플레이트가 나올 이유가 없었죠, 동양권에서 중기병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서양의 그것처럼 소수 기병의 전투라기 보다 대규모 기병의 접전이었고 그러한 유지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풀플레이트 같은 것은 참 곤란한 방어구였겠지요. 결국 글쓰신 분의 말처럼 중앙집권으로 인한 전쟁양식의 차이가 이러한 방어구의 발달을 방해(?) 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게이볼그님 말씀중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전투가 중기병의 접전능력에 따라 결정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삼국시대 이전이나 동양의 중세 - 명칭을 짓기가 애매하네요 - 이전에는 그러한 접전 방식의 전투가 꽤나 중요한 요소였고 그에따라 중기병이 큰 역할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이후 전투를 보면 중기병은 중요한 수단일 뿐 그것이 전장 전체를 좌우 했다고 보기는 힘드네요. 전술적 국면에서의 잇점은 있지만 말이지요.
게이볼그님 리플 잘 봤습니다. 역사게시판엔 언제나 빠지지 않으시네요
음...중기병이 아니라 중병이라고 했어요ㅇㅅㅇ 굳이 중기병, 중보병을 전부 포함해서, 그 전투의 가장 치명적인ㅡ전체 사상자 수보다는 중요순간의 결정적인 피해의 의미로ㅡ중갑을 갖춘 군대의 백병전이 성패에 큰 영향을 준다는거지요ㅇㅅㅇ 매복과 기습이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상대의 대열을 허무는건 투사무기보다는 얘네들이거든요ㅇㅅㅇ;;;
그리고 상대 군대의 중추가 공세에 무너지지 않으면 승리라고 해도 결정타가 될 수 없듯이요. 동양에서 궁시의 중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결정적으로 그날의 성패를 좌우하는것은 근접전이고, 궁시는 그 때까지 여건을 아군에게 최대한 유리한 상황으로 이끄는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ㅇㅅㅇ 물론 이점에 대해서는 제 설명에 문제가 있었나봅니다 ㅡㅁㅡ;;; 페로페로님의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아항... 그랬군요, 제가 잘 못 봤나 보네요...^^;
게이볼그님 말씀중에서 두가지 지적하고 싶은 게 있군요. 첫째, 시대적으로 봤을 때 동양에서도 중갑이 쓰이긴 했지만 그것이 등자와 석궁의 보급이 늘어남에 따라 당대 무렵부터 눈에 띄게 쇠퇴했는데, 님이 동양 중갑의 예로 든 것들이 대부분 중갑이 쇠퇴하기 이전시대의 것들이라 생각됩니다. 두번째는, 물론 동양에서도 중갑병이 쓰였습니다만 그것이 군대에서 전체적으로 차지하던 비중이 어느정도였느냐 하는 것은 다른문제입니다. 왼손잡이도 당연히 오른손을 쓸 수 있듯이요.
그리고 동양의 전투방식에서는 접근전을 극도로 기피했다는 사실은 여러 기록에서 보입니다. 몽고족 같은 경우는 칼이나 창을 들고 얼굴을 맞대는 전투는 야만시했고 접근전이 일어날 것 같으면 자신들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지 않은 한 무조건 달아났습니다. 중국의 전술도 기본적으로 유목민을 상대하는 데 중점을 두고 발달했기 때문에 비슷했고요. 요는, 충격전이 전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동양에서는 서양에 비해 훨씬 적었다는 겁니다. 충격전에 익숙하지 않은 군대는 따라서 충격전에 대한 내성이 무척 약하므로 먼저 백병전으로 공격당하는 쪽이 바로 질때가 많았습니다.
임진왜란때 일본 사무라이군대의 돌격에 와르르 무너졌던 우리나라의 경우가 좋은 예죠. 제가 본문에서 전쟁의 승패는 양군의 충돌 전에 사실상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 게 이런 뜻입니다. 물론 님 말씀처럼 백병전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죠. 상대적으로 덜중요했다는 것이죠.
예. 백병전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덜한건 맞습니다만ㅡ그건 위에도썼고ㅡ가장 결정적인 요인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몽골군 역시 경기병이 이리저리 뛰고 흔들어도 가장 치명적인 타격은 중장기병의 공격으로 결정되었으며 이를 위해 몽골군 기병의 사십 퍼센트는 중장기병으로 구성되어 있고 몽골군의 기록화에서도 중장기병의 돌격을 묘사한 그림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아가 등자 도입 이후 동양은 오히려 극심한 장갑 인플레를 겪습니다. 개마기병이 전 동아시아에서 백년도 안되는 사이에 크게 퍼지게 되죠. 357년 동수묘를 기점으로 온몸과 말을 갑주로 감싼 기병은 중국과 유목민에서 동시에 나타납니다. 물론 우리나라도 그 트렌드에 편승했고 이는 카레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당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됩니다
당대에 이르러 중국에서 중장기병은 쇠퇴하지만 유목민은 아닙니다. 거란의 정예 오르도 기병은 아홉벌의 갑주를 갖춰야했고 대규모의 황실 친위군 역시 초기 중장기병보다는 못해도 중무장 해야했고, 극단적으로 여진족은 괴자마라는 유례가 없는 쇳덩어리들을 선보입니다
게이볼그님 견해를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만 그런데 님이 간과하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중장병을 결정적인 순간에 투입하는 것과, 중장병으로 결정적인 순간을 이끌어내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양의 경우에는 전자의 성격이 보다 강했겠지요. 현대전에서 승리를 가장 크게 좌우하는 건 공군이지만 병력은 육군이 제일 많고 적 영토를 점령하는 것도 육군인 것과 비슷한 이치라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유럽군의 중갑 비중이 높았냐 하면, 주력부대인 기사들은 거의 중장이었습니다만 일반 창병은 갬버슨만 입고 전장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동서양의 대결이라 할만한 리그니츠에서도 몽골군은 최종적으로 중장기병을 돌격시켜 폴란드군을 붕괴시컸습니다. 물론 이 상황에서 최종돌격 때 몽골기병들도 적지 않은 손실을 입어야 했을정도로 기사들은 전투능력이 남아있었구요
예. 물론 그점에서 동양에서 궁시의 비중이 컸다는 점은 인정합니다만, 현대 공군처럼 육군 진입전에 전투불능에 가까운 사태를 유도할 수 있냐는 점에서 궁시의 위력과 중요도는 그 기준에 크게 못미칩니다. 그점 때문에 백병전의 요소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이며 유능한 지휘관이라면 그 상황까지 이끌어갈 궁수와 근접병력의 비율과 배치를 적절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아 그리고 당 이후의 송대에서 갑옷생산량은 정점을 이룰정도로 크게 성장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송대의 폭발적 생산량 증가와 병력규모의 확대 탓일 수는 있습니다만, 송대에 이르러 갑주, 특히 보병용 갑주의 중요성이 크게 증가한 것은 사실이라 봅니다
논의가 좀 부분에 치우친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중갑병, 싸구려 징집병, 기병, 궁병 등으로 이뤄진 군대의 기본구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습니다. 제 포인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양의 사회적/정치적 환경차에 의해 전쟁개념에 큰 차이가 생겼고, 그것이 전술과 무기체계에 반영되었다는 얘기였습니다. 이런 차이가, 예컨대 동양에서는 플레이트메일처럼 극단적인 보호구가 등장하지 않았고 서양에서는 기사가 전투초반부터 싸움의 주력을 맡게 되었다는 식의 차이가 생긴 원인이라는 얘기였죠. 게이볼그님께서 제 의도를 조금 오해한 나머지 동서양의 유사점에 대해 강조
(유사점이 많았다는 점에 대해선 저도 십분 동의합니다.)하시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게이볼그님과 제 견해는 그다지 상반되지는 않는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덕분에 토론이 훨씬 풍부해진 것 같네요^^
좋은 글, 좋은 토론이네요. 많이 배웁니다. 전쟁은 역사의 흐름속에서 발생하는 이벤트 정도로 인식하고 있지만, 깊은 관심을 가진 분들의 풍부한 이야기 거리를 살펴보는건 꽤나 큰 즐거움이군요.
오호~~ 토론은 역시 이런 맛이야
그러게요..
아주 잼있습니다. 유익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