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현대의 전설을 간직한 길상사를 가다
나는 길상사를 현대의 전설을 만들어 낸 신비의 절로 알고 있다. 그래서 찾아가 보고 싶은 절이었다.
서울의 아들네 집에 가서 하룻밤을 지내고 올 일이 있었다. 낮에는 시간의 짬을 낼 수가 있었다. 내 기억 속의 길상사는 서울의 중심지에 있으므로, 이번 기회에 절을 다녀오자고 마음 먹었다. 아들이 차로 절까지 데려다 주었다.
절을 찾아가는 길은 차의 네비로부터 안내받기로 했다. 늦은 오후였지만 시내의 중심가에 위치한다면 다녀오기에 여유로운 시간이다. 그런데, 차는 중심가가 아니고 성북구 쪽으로 달려가더니 북한산 아래쪽으로 갔다. 예전에 가나 아트를 다녀왔던 일이 있었다. 그때의 느낌에 부자촌이구나 싶었는데, 바로 그 길을 타고 북악산을 오른다. 내 기억 속의 위치와는 많이 다르다. 북한산 자락은 바위들과 잎을 떨군 나무들이 산골 풍경을 만든다. 네비의 안내가 목적지에 닿았다고 한 곳은 절집의 문 앞이었다. 성북구의 오르막 길은 예전의 부자들이 살던 동네로 오르는 길이다. 설강이 오르막 길을 지나면서 초정 선생에게 서예를 배우러 15년이나 다녔던 길이라서 낯설지 않다고 한다.
새로 지은 듯 절문이 제법 우림하다. ‘삼각산길상사’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문 안으로 보이는 법당이며, 전각들의 형태가 예사 절과는 많이 다르다. 기와지붕을 한 주불전은 ‘극락전’이었다. 나는 50년 쯤 전에 학회에 참석하러 서울에 와서 마물렀던 여관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보다. 옛티가 나는 단층 한옥으로 기억한 옛 모습을 많이 닮았으나. 절을 안내하는 글은 여관이 아니고,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정이었다고 하니, 지난날의 우리 일행이 그런 요정에 들릴리는 없었다.
박정희 정부 시절은 고급 요정이 정치의 장이었고, 대원각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고 하였다. 요정의 주인은 김영한(1916-1999)이라는 여자분이었다. 첫 결혼에 실패하고, 요정의 기생이었던 그녀는 23세 잠시 일본 유학도 다녀온 신여성이었다.
이때 백석 시인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서 영어 선생을 하면서 시를 썼다. 그리고 요정을 출입하면서 김영한을 무척 좋아하였다. 자야(子夜)라고 부르면서, 그녀의 이름을 넣은 시를 써서 자신의 사랑 감정을 토로했고, 김영한은 그 구절을 할머니가 되어서도 외우고 있었다. 둘은 3년이나 동거했다고 한다. 김영한의 회고에 의하면 백석은 자야더러 만주로 가서 살자고 하였으나 자기는 따라가지 않았단다. 해방과 육이오라는 우리나라의 비극적인 현대사는 함흥이 고향인 백석은 이북으로, 자신은 서울에 살도록 하여, 몸은 떨어진 체 마음 속의 그리움만 간직하고 살았다는 것이 ‘자야’로 불린 김영한의 회고였다.
김영한은 지금의 길상사 자리에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차려서 많은 돈을 벌었다. 돈을 많이 벌었지만 몸이 늙어가면서 그리움으로 공허하고, 허망한 마음은 더 짙어졌다. 법정 스님을 찾아가서 불교에 귀의했고, 법정은 ‘길상화’라는 법명을 주었다. ‘자야’는 법정스님에게 이 땅을 기증했다. 그리고 백석과 떨어져서 혼자서 살아온 사랑이야기도 이 절에 묻었다.
자야는 1985년부터 법정에게 이 절을 불교에 기증하겠으니 절을 지어달라고 여러 차례 말하였으나 법정을 거절했다고 한다. 법정 또한 ‘무소유’가 생활 철학이었으니, 1000억으로 평가된 재산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으리라.
1995년 6월 13일에 ‘길상사’라는 이름의 사찰을 열고 대한 불교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등록했다. 송광사는 법정 스님이 출가한 사찰이어서 서울에 소재하면서도 송광사의 말사로 등록하였다. 기증하겠다는 말을 꺼내고, 기증을 받아주기를 거듭 부탁하기를 10년이나 계속하였다는 것이다. 그때 법정이 김영한더러 1000억의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고 하였더니 ‘그분(백석)이 나를 불러준 시 한 줄보다는 가볍다’고 대답했다. ‘자야’라는 이름이 더 아름답다고 함으로 현대판 전설을 만들었다. 거짓 사랑이 불꽃놀이하는 밤하늘보다 더 현란하게 빛을 내는 세상에, 백석 시인의 시 한 줄이 더 아름답다는 그녀의 말이 현대판 전설을 만들었다. 길상사의 개원 법회가 열리던 1997년 12월에 고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하여 축복해주었다는 사실도 전설이 되었다.
나에게 감동을 준 전설의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백석-자야-법정으로 이어지는 사랑 이야기였다. 아름답고 따뜻한 이야기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절집의 문은 우림하고 높다. 평지 가람의 구조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지 가람의 구조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불이문을 들어서면 바로 눈 앞에 나타나는 법당이 그 절의 주불전이다. 이 절의 주불전은 ‘극락전’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으니, 아미타 부처님을 모신 법당이다. 그런데 법당 건물이 일반 사찰의 법당 건물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포로 높이 올리고 단청을 화려하게 입힌 사찰 건물이 아니고, 평범한 일반가옥의 기와집 모습으로 지붕이 낮으막하다. 이 건물은 원래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운영할 때의 중심 건물이라고 하였다. 몸단장을 짙게 한 기생들이 술 접대를 하고, 남정네들이 숲판을 벌이면서 속세의 사랑놀이를 하던 건물이 절의 주불전이 되었다니. 이것도 의미를 담을 것 같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요사채도 절집의 구조가 아니다. 조용한 산골짜기를 배경으로 들어서 있는 고급 음식점이 더 어울릴 듯하다. 그러나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검은 바위와, 다듬지 않는 자연의 나무들이 서 있어서 고요한 절의 분위기를 만드는데 딱 어울린다. 행자실, 정향당, 길상헌 등의 요사체가 무질서하게 서 있고, 군데군데에는 작은 건물들이 있다. 스님들의 수행처라는 안내판이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속세가 펼쳐져 있는 곳에서 이처럼 조용한 사찰로 둔갑하였다니, 이것이 바로 전설이다. 넒디 넓은 사찰의 이곳저곳으로 난 길을 따라 산책하는 사람들도 간간이 보이다.
최근에 읽은 글에 백석 시인과 사랑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고 김영한이 만들어 낸 조작이라고 하였다. 대학교수가 쓴 글이니, 이것이 더 사실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사실이 아닐지라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백석 시인과의 사랑 이야기는 아름답지 못한 남녀관계로만 점철된 그의 삶에서(첫 결혼의 실패 그리고 요정에서 만난 남자들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그가 가지고 싶은 욕망인지도 모른다. 백석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깨워주는 왕자가 아니고, 자야라는 여인의 욕망 속에 왕자의 모습으로 스쳐지나간 길손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야의 꾸며낸 사랑 이야기가 더 절실한 전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백석이 워낙 유명한 시인이라서 백석을 백마를 탄 왕자로 떠올리지만, 백석은 그의 욕망을 채워주는 과객일 뿐이니 잊어버리고, 자야라는 여인만을 떠올려야 하리라.
1999년에 김영한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이 절에 뿌렸다. 2010년에는 법정스님도 입적했다. 법정스님의 진영각이 이 절에 세워졌다. 이 절을 이야기할 때는 백석과 자야가 전설의 이야기라면 김영한과 법정이 주인공인 주인공인 현실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이 절은 절 마당에 들어서도 절의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띄엄띄엄 서 있는 건물들이 절집과는 너무 다르다. 다르다기 보다는 아니다가 더 맞을 것이다. 왜냐면 길상사는 건물들이 절의 구조에 맞도록 배치되어 있지 않다. 요정이었던 건물에 절집의 현판만 달아놓았기 때문이다. 산자락의 여기저기에 스님의 수행처인 작은 건물이 흩어져 있다. 그 사이로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다.
지금까지의 절집 답사에서 절집에 들어서면 아내는 으레 법당으로 가고, 나는 절 마당을 돌아다닌다. 길상사에서도 그랬다. 아들과 나는 산책로를 따라 절의 경내를 한 바퀴 돌았다. 간간이 바람이 불면 나목이 된 나뭇가지가 작은 목소리를 낸다. 그리고는 다시 침묵한다. 절의 고요로움은 산골 절에 못지 않다.
나는 내일이면 쉰이 되는 아들과 우리집의 앞날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책로를 걸었다.
아내의 얼굴이 사색이다.
“내일, 계약서를 써야 하는데. 내용을 적어둔 메모지가 없어졌어. 전화기를 꺼낼 때 떨어졌나 보다. 아주아주 중요한 건데.”
“절 마당에 떨어졌겠지 찾아보자.”
“새끼 손가락만한 종이 조각이라서 세세히 살펴보아야 할거야.”
아내는 이 말을 남기고 메모지를 찾는다면서 법당으로 되돌아 갔다. 나는 아들과 함께 절 마당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메모지는 보이지 않았다. 산책로에도, 우리가 기웃거렸던 절의 구석구석까지 찾으려 다녔다. 아내는 우리보다 더 열심히 찾으려 다녔다.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어두운 얼굴이었고, 나도 무거운 마음으로 절문을 나셨다.
“이것 아니야, 여기 종이 조각이 떨어져 있네.”
내 말에 아내는 ‘맞다’라고 했다. 얼굴이 활짝 펴졌다.
“당신이 법당에서 기도하였으니, 부처님의 가호를 받은 거야.”
나는 그랬다고 믿는다. 아내는 절에 들리면 반드시 법당에 들려서 부처님에게 기도한다. 아내에게 부처님의 가호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믿는다.
이 이야기도 절집 담사기에 보태야 겠다.
첫댓글 제가 본 길상사와 김영한과 백석의 사랑이야기를, 올려 주신 글로 인해 더 깊이 보태어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백석 전기를 보면, 길상사의 주인 김영한(자야)의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영남대 이동순 교수의 백석 연구글에서 처름 자야 이야기는 김영한의 조작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만약에 조작이라면, 홍도처럼 사랑을 사고파는 세상에서 살았던 분이 갖고 싶었던 욕망이 바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아닐까요. 그래서 백석 시인과의 이야기는 또 다른 아픔을 준다고 생각하고 읽으면, 가슴이 저리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