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2. 1. 19. 수요일.
날씨가 흐리고, 오전에는 눈이 제법 내렸다.
바깥은 무척이나 추울 게다.
직장으로 출근해서 일하는 사람들, 특히나 야외에서 노동하는 분들이 안쓰럽다.
얼마나 추울까?
<한국국보문학카페" '자유게시방'에는 '남산 한옥마을'의 사진들이 잔뜩 떴다.
사진을 퍼왔다.
남산 한옥마을에 있는 건물
내가 아랫처럼 댓글 달았다.
퍼서 여기에 올려서 내 글감으로 삼는다.
내 댓글 1)
글 고맙습니다.
저는 2014년 3월에 방문.
당시에 쓴 일기에서 조금 퍼옵니다.
' ... 박영효, 민영휘 등 구한말 양반네의 고건물을 이전해 온 뒤 재건축한 가옥 안에도 기웃거렸다.
고건물 안에는 법사(불교)가 스님 몇에게 강의하는 듯 했고, 훈장이 제자들에게 훈육하는 듯 했고, 한약초와 한방식재료로 만든 한의약품 소품도 매매하는 것 같았다. 옛날의 부엌살림이며, 옛 아궁이며, 짚으로 만든 짚문화의 소품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서 구경이면서도 옛문화의 교육도 될 듯싶었다.
영내에는 다섯 채의 고가옥이 있었다.
옥인동 윤씨가옥,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재실, 관훈동 민씨가옥,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가옥,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가옥이다.
남산골 한옥마을에는 또 여러 관광자원이 즐비했다.
청학지, 천우각, 서울남산국악당, 파금정, 서울천년 타임캡슐광장, 망북루, 관어지, 관어정, 청류장 등 숱한 구경거리가 시선을 끌었다.
위 박영효가 누구일까요?
서해안 산골에서 자리잡았던 내 조상들은 뭐하고 있었대유?
저런 한옥 한 채도 후손한테 남겨주지 못했으니...
내 댓글 2)
남산 한옥마을에는 박영효의 저택이 있는데도...
박영효 .... 1872년 2월, 그의 나이 열두 살 때에는 선왕 철종의 딸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결혼했다.
이듬해 4월에는 임금의 사위로 금릉위(錦陵尉)로 봉해지고,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려지게 됨으로써 그의 앞날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탄탄할 것처럼 보였다.
훗날 친일파가 되어서...
위 건물을 사진으로 다시 보면서... 많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과거 왕족, 권문세가들은 얼마나 호의호식했을까요?
조선조 왕족과 양반은 전체 인구 10%, 나머지 90%는 일반백성과 노비계급인 천민들. 노비들이 전체 인구의 40%였다는 설도 있지요.
저런 가옥에서 살면서 '여봐라 ~'하고 길게 소리를 지르면 '예잇~ '하는 하인배들이 우루루 몰려와서 대령할 듯.
저도 이씨왕조 시대에서 태어났더라면 '어흠'하면서 아랫것들한테 명령을 하달하겠지요.
제 어린시절 서해안 산골마을에서는 '뗏집'이 많았지요. 잡초 뿌리가 많은 '떼'를 삽으로 조심스럽게 네모 형태로 떠서 그것으로 방벽을 쌓아올린 흙집, 초가지붕...
덕분에 한옥마을 사진을 봅니다.
엄지 척!
이 글을 쓴 배경이다.
나는 2014년 3월에 이 남산 한옥마을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식장에 참가했다.
결혼식이 끝난 뒤 남녀 동창생과 함께 한옥마을을 돌면서 구석구석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그날의 일기를 무척이나 길게 자세히 썼다.
일기 가운데 극히 일부만 퍼서 위처럼 댓글 달았다.
구한말... 친일파였던 박영효의 건물도 이곳으로 옮겼기에 양반 세도가들의 위세를 다시 엿본다.
' ... 박영효(1861 ~ 1939년)는 문벌정치가 한창이던 시기에 손꼽히는 양반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판서 박원양(朴元陽)으로 손색없는 양반 신분이었다.
1872년 2월, 박영효 나이 열두 살 때 선왕 철종의 딸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결혼했다. 혼인 3개월 만에 영혜옹주가 병사했다. 3년상을 치루니 박영효의 나이는 15살, 왕가의 법에 따라 그는 재혼할 수도 없었다. ...'
나는 서해안 산골마을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내가 태어난 때는 1949년 1월 말이니 그 당시는 과거 이씨조선조의 왕조시대도 아니고, 일제식민시대가 끝난 뒤인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선 지 2년 째였다.
내가 살기 시작했던 때의 산골마을에서는 기와집이 고작 두서너 채였을 게다. 대부분은 흙덩어리로 벽을 바르고, 볏짚으로 지붕을 이었다.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은 목재가 아닌 '뗏집'이나 지었다.
* 벽지도 없어서 그냥 흙벽이었다.
'떼(띠풀)'는 잡초이다.
꽃대 순은 '삐비'이기에 이것을 뽑아서 먹었다. 아이들의 간식거리이다.
풀뿌리가 제법 길고, 그 뿌리가 흙덩어리를 단단하게 엉켰다. 이런 띠풀을 삽으로 사각지게 떴다. 뗏장이다. 흙벽을 차곡차록 위로 쌓아서 벽을 만들었다.
내 어린시절에는 위와 같은 기와집 한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상조차도 못했다.
내가 기억하는 1950년 6·25사변 이후의 시대상은 정말로 후졌고, 찌질이었다. 엉성하게 지은 초가집들이나...
아래 사진은 뗏장을 뜨는 식물인 '띠' 풀이다.
이런 잡초가 지금 서해안 산골에 있는 내 텃밭에서 자꾸만 번진다.
텃밭농사를 짓다가 함께 살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는 처자식이 사는 서울로 되올라왔으니 내 텃밭은 잡목과 잡초들이 주인 행세를 하기에 이런 '띠'가 자꾸만 번진다. 삽으로 파내기가 무척이나 어려울 정도로 실뿌리가 서로 꽉꽉 엉켜서 쩔었다.
나한테는 별것이 다 글감이 된다.
이씨조선은 서기1392 ~1910년 8월 28까지 519년간 이어졌다.
한양 종로를 중심으로 한 대궐들이며, 권문세가의 한옥들이 즐비했을 터.
위 남산골 한옥마을은 이조 말엽에서나 ... 지금의 건물들은 대체로 근자에 새로 지은 것들이다.
다른 곳에서 건물을 뜯어서 옮겨왔을 터.
그런데도 그 위용은 엄청나게 드세다.
그런데 내 조상들은 뭐했대유?
조선조에서는 '경주최씨'는 그저 '최씨고집'으로 치부되어서 뒷자리로 밀려났다.
우리나라 성씨 본관으로 따지면 '경주최씨'는 인구 숫자로는 6위이나 조선조 공직에 오른 순위은 아마도 76 ~ 80 순위일 게다.
특히나 서해안으로 밀려난 내 조상들은... 오죽이나 절절 기었을까 싶다.
2022. 1. 19.
잠시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