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야
박장호
지천 자전거 길에서 죽은 뱀을 보았다. 바퀴에 깔려 말라붙은 형상이 내 글씨 같아 돌아와 공책에 옮기니 꿈틀거리며 소리를 낸다. 들릴 듯 말 듯 따라가니 소야다. 불의의 죽음이 도착한 뜻밖의 글자에 일몰 어스름처럼 한자가 내려 소야小夜는 작은 밤이고, 작은 밤은 저녁이고 오늘 저녁은 혼자다. 피붙이와 정붙이 들이 예전 얼굴 그대로 왜 혼자냐고 입을 모아 소란이다. 단지 네가 친정 갔을 뿐인데 스탠드에 혼자 앉은 유년의 체육이 떠올라 나는 원래 혼자 있는 습관이었다. 혼자 있는 집을 빈집이라 불러 왔다. 내가 있는 걸 나만 있다고. 뜻밖에 네가 왔다. 이제 네가 없는 집이 빈집이고 네가 없을 때 나만 있다. 빈집에 나만 있는 저녁이다. 저녁은 작은 밤이고 작은 밤은 소야다. 라면을 올려놓고 소야를 느낀다. 오래된 악기에 쌓인 먼지 나의 것이 아니었던 소야곡 밤에만 꽃을 피운다는 외래 식물 이런 것들로 사람인 양 슬픔이 나를 만끽하는데 소야라는 소리는 색깔이 하얘서 여름도 겨울이게 하는 정조가 있다. 창밖으로 뻗은 가느다란 손목 손바닥에 내려앉는 눈 닿자마자 사라지는 눈 처럼 지우고 싶은 기억들 차마 반성할 수 없는 부끄러움들 받아선 안 될 용서들 나와 겨뤄 보겠다고 버린 직업들 백지가 된 이력들 살아는 있지만 사는 것 같지 않아 라면 국물이 자작해지도록 흘리지 않은 눈물들 이런 것들이 희미하게 끝내 사라지지 않는 소야 같아 이제 어디로 번져야 하나 작은 밤을 소야하는데 열쇠를 밀어 넣는 문밖 소리 ‘나만 있던’ 내가 ‘내가 있는’ 내가 된다. 뭐 하고 있었냐는 물음, 그냥 있었다는 대답 자고 온다지 않았냐는 물음, 그냥 왔다는 대답 내용 없이 풍성한 대화로 하얗게 익어 가는 밤 하얀 밤은 소야, 소야는 우리의 밤 소야라는 소리 그 느낌처럼 소박해지자, 다정해지자 별도의 다짐 없이 살아만 있어도 살아는 있는 거라고 밤에 핀 꽃이 아침에도 시들지 않아 꺾을 수 없는 죄 가운데 가만히 있는 정이 많은 탐스러운 나의 다육 소야
—계간 《시사사》 2022년 겨울호 ----------------------- 박장호 / 1975년 서울 출생.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3년 《시와 세계》로 등단. 시집 『나는 맛있다』 『포유류의 사랑』 『글자만 남은 아침』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