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한글새소식(619호 / 2024.3.)에서 옮겨왔습니다. -가꿈이
|우리말과 우리|
한국인 이름의 최신 동향
이서라
단국대 영어과 초빙교수
leesurah@gmail.com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국내 여성 가수 그룹 ‘블랙 핑크’는 ‘로제’, ‘리사’, ‘제니’, ‘지수’ 네 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네 명의 이름이 공통으로 주는 인상은 이름에 받침이 없어 발음하기 쉬우며, 영어식 이름과 유사해 해외 팬들도 쉽게 발음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중 ‘제니’는 본명을 활동명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영어 이름이 아닌 한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지수’도 본명으로 부르기 쉬우면서도 성별에 구애 없이 사용되는 이름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한국인의 이름이 항렬이나 사주를 고려해 지어진 이름이 많아 음절이 복잡해 부르기 어려운 이름이 많았으나, 최근에는 ‘블랙핑크’ 멤버들의 이름처럼 음절 구조가 간결해 부르기 쉬운 이름이나 이국적인 어감을 가진 이름, 그리고 성별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 이름을 선호하는 경향으로 명명 방식이 변화하고 있다.
국내에서 출생 신고된 한국인의 이름 자료는 대법원(https://open.scourt.go.kr/)에 요청해 얻을 수 있다. 대법원에서 얻은 자료를 통해 지난 10여 년간 출생 신고된 한국인 남녀 이름을 분석해 본 결과, 인기 있는 이름 가운데 받침이 없는 남자 이름으로는 ‘시우’, ‘지호’, ‘지후’가, 여자 이름으로는 ‘지우’, ‘지유’, ‘수아’가 많이 쓰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이름들은 받침이 있는 이름보다 발음하기에 더 쉽고 부드럽게 들릴 수 있다. 받침이 있더라도 그 자음이 공명 자음 ‘ㄴ, ㄹ, ㅁ, ㅇ’인 경우 다른 자음에 비해 비교적 발음하기 쉬운 경향이 있다.
최근 가장 인기 있는 남녀 이름은 ‘서준’과 ‘서윤’으로, 두 이름 모두 마지막 글자의 자음이 ‘ㄴ’으로 끝난다. ‘ㄴ’은 한국인 남녀 이름 마지막 글자에 가장 많이 쓰이는 자음이다. 마지막 글자의 자음과 관련해 최근 남녀 이름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변화는 ‘ㄹ’과 ‘ㅁ’이 증가한다는 점이다. 특히 ‘ㄹ’로 끝나는 이름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한 현상은 남녀 이름 모두 끝 글자로 ‘율’ 자를 많이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 이름에서는 ‘솔’, ‘설’, ‘하늘’ 등의 고유어 이름이나 ‘이엘’, ‘나엘’과 같이 외래어 풍의 이름이 증가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개별 이름자의 경우, 남녀 이름 모두 ‘지’로 시작하는 이름이 가장 인기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로 시작하는 이름의 인기는 1980년대부터 시작해 최근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남자 이름의 경우 ‘준’과 ‘우’로 끝나는 이름이 가장 많았고, 여자 이름은 ‘은’과 ‘아’로 끝나는 이름을 가장 많이 선호했다. 여자 이름의 경우 최근 들어 ‘율’과 ‘린’으로 끝나는 이름도 부쩍 인기를 얻고 있다. 남녀 이름에서 받침 없는 이름의 인기가 증가하고, 받침이 있더라도 공명 자음인 ‘ㄴ, ㄹ, ㅁ’이 선호되는 추세로 보아 최근 한국인의 이름은 과거 세대의 이름에 비해 음운적으로 간결해지고 있으며, 점점 더 부드러운 어감과 소리에 비중을 두어 이름을 짓는 경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의 이름은 대부분이 두 글자로 되어 있으며 외자 이름을 짓는 것은 흔하지 않은 작명법이다. 외자 이름은 주로 남자의 이름에 나타나지만, 최근에는 여자의 이름에서도 높은 비율로 증가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세 글자 이름은 주로 여자의 이름에 더 많이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남자의 이름에서도 증가하는 추세다. 예전에는 남자 이름에 선호되던 외자 이름이 여자 이름에서 증가하고, 세 글자 이름이 남자 이름에서 증가하는 현상은 이름의 중성화 현상과 사회에서 나타나는 남녀 수평화 기조와 관련지을 수 있다.
외자 이름으로 인기 있는 남자 이름은 ‘율’, ‘준’, ‘윤’, ‘건’이며, 여자 이름은 ‘봄’과 ‘율’이 선호되고 있다. 세 글자 이름 가운데 남자 이름으로 ‘다니엘’, 여자 이름으로는‘ 에스더’가 가장 많은 쓰인 이름이다. 외래어 이름을 제외하면 남녀 세 글자 이름 모두에서 고유어 이름의 비중이 높았으며, 특히 여자 세 글자 이름에서는 몇 가지 흥미로운 특징이 발견되었다.
먼저 ‘박서율’, ‘김민하’와 같이 성과 이름을 모두 쓴 형식의 이름과 ‘미나박’, ‘유리김’과 같이 서양식으로 이름과 성을 배열한 형식의 이름이 관찰되었다. 이는 최씨 성을 가진 경우에 ‘최박서율’, ‘최김민하’ ‘최미나박’ ‘최유리김’으로 불리게 된다. 이러한 이름은 부모의 성을 모두 사용해 작명한 것으로 보이며 성 평등적 명명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릴리수’, ‘루나솔’, ‘소리엘’과 같이 외래어나 한자어 또는 고유어를 결합한 특이한 이름들이 드물게 나타났는데, 이러한 이름은 개인주의 가치관이 확대되면서 독특하고 개성 있는 이름을 지으려는 부모들의 시도로 보인다.
최근 한국인 이름에 나타난 주목할 만한 변화는 성별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중성적인 이름에 대한 선호도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성적 이름(unisex name)은 남녀 모두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이름으로, ‘다온’, ‘라온’, ‘하온’, ‘수현’, ‘시현’, ‘연우’, ‘서우’, ‘지우’, ‘지율’, ‘하율’, ‘재이’ 등의 이름이 최근 남녀 이름 모두에서 공통으로 많이 발견되었다. 이 밖에도 영어식 이름으로 쓸 수 있는 한글 이름이나 ‘로운’, ‘루다’, ‘루리’ ‘이든’과 같이 성과 조화를 이루어 사용하는 고유어 이름, 그리고 ‘이안’ ‘로아’ ‘로하’ 같이 이국적인 어감을 지니는 이름도 눈에 띄는 이름들이었다. 이러한 이름들은 모두 부르기 쉬운 이름이면서 동시에 남녀 구분 없이 쓸 수 있는 이름이다. 최근 한국인의 이름은 음운적으로 점차 간결해지고 있고, 남녀 이름의 음운 차이가 줄어들어 중성화하는 변화를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앞으로도 이러한 추세는 계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