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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센테 알레익산드레1977년 노벨상 만찬 연설
1977년 12월 10일
수상자가 노벨상 만찬에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감사 연설은 호르헤 파드론(Jorge Padrón)이 스페인어로 대독했다.
국왕 폐하, 왕실 전하 여러분,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이토록 뜻깊고 기쁜 이 자리에서, 대부분의 분들은 육신으로 직접 이곳에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저처럼 마음으로 이 자리에 함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 목소리는 후스토 호르헤 파드론(Justo Jorge Padrón)이 훌륭하게 대신해 주고 있습니다.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한자리에 모이고, 모두가 노벨상의 부름과 그 근본적인 인간주의적 호소 아래 함께하는 자리에서, 저는 이전에 다른 곳에서도 표현한 바 있는 한 가지 생각을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느낍니다.
그것은 바로 이 높은 영예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 연대의 상징이라는 사실입니다.
노벨상은 인간이 매우 다양한 활동 분야에서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주목함으로써 인류의 진보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그 모든 발걸음은 결국 공동의 운명 속에서 인간 사이의 소통과 연대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을 향하고 있습니다.
노벨의 이 숭고한 뜻 아래, 그리고 오늘 우리를 한 지붕 아래 모이게 한 이 자리에서, 저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국민과 그 국민을 이루는 모든 사람을 위해 마음으로 잔을 들어 올립니다.
그러므로 저의 축배를 유럽의 이 등불, 자유와 정의와 진보를 향한 노력의 모범인 이 나라에 바치고자 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잔을 들어,
스웨덴 국민을 위하여,
그리고 오늘 이 순간 그 국민을 드높게 대표하고 있는
스웨덴 한림원을 위하여
축배를 들겠습니다.
Vicente Aleixandre
Nobel Banquet Speech · 10 December 1977
《Les Prix Nobel. The Nobel Prizes 1977》
Nobel Foundation, Stockholm, 1978
비센테 알레익산드레1977년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
1977년 12월 12일
문학인의 생애에서 이토록 중요한 순간을 맞아, 오늘과 같은 일을 마주한 한 인간이 느끼는 감동과 감사의 마음을 제가 구사할 수 있는 가장 웅변적인 말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나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매우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가정 분위기의 혜택을 누렸습니다. 나의 불안정하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기질은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여러 직업에 종사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나는 상법을 가르치는 교사였고, 철도회사의 직원이었으며, 경제 분야의 기자이기도 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내가 말한 이 불안은 나를 특별한 하나의 기쁨으로 이끌었습니다.
읽는 것,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쓰는 것.
열여덟 살 때, 시인 수업을 시작한 나는 아직 자신의 진정한 중심을 찾지 못해 모험적이라고 부를 만한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몰래 첫 시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내 삶의 운명과 그 방향을 결정한 것은 육체의 쇠약함이었습니다.
나는 만성적인 질병으로 심하게 앓게 되었습니다. 다른 모든 일, 말하자면 육체와 관련된 활동들을 포기하고 이전의 생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렇게 생긴 빈자리는 곧 다른 활동으로 채워졌습니다. 육체적인 노력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의사들이 명한 휴식과도 쉽게 병행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잊을 수 없는, 모든 것을 압도하는 침입이었습니다.
문학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가 활동의 공백을 완전히 채웠습니다.
나는 온전히 자신을 바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오직 그때에야 나는 이후 결코 나를 떠나지 않을 열정에 사로잡혔습니다.
고독의 시간, 창조의 시간, 명상의 시간.
고독과 명상은 내게 하나의 자각과 하나의 관점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그 뒤로 한 번도 잃은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모든 인간과의 연대에 대한 자각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언제나 이렇게 말해 왔습니다.
시는 그 말의 정확한 의미에서 소통입니다.
시는 시인이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들의 연속입니다.
한 편의 시, 한 권의 책은 각각 하나의 요구이며, 하나의 요청이며, 하나의 물음입니다.
그 대답은 말없이 이루어지고 암묵적이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독자는 읽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 그 대답을 합니다.
그것은 시인이 질문하고 독자가 침묵 속에서 온전한 대답을 건네는 정교한 대화입니다.
노벨상이 한 시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나는 여러분과 몸과 마음으로 함께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벨상은 마치 하나의 응답과도 같습니다.
점진적이지도 않고,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닌 응답.
수많은 목소리가 한꺼번에 모여, 동시에, 갑작스럽게 내놓는 응답입니다.
관대하고도 기적적으로 하나가 된 공동의 목소리가 시인이 인류에게 끊임없이 던져 온 질문에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한꺼번에 모여 동시에 들려오는 목소리의 상징에 감사드립니다.
스웨덴 한림원은 내가 영혼의 감각으로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에 나는 이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한편 나는 오늘 내가 받은 것과 같은 상은 언제나, 그리고 예외 없이, 해당 작가―이 경우에는 나 자신―를 형성한 문학적 전통을 향한 상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와 예술은 언제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그 전통 속에서 한 명의 작가는 기껏해야 새로운 미적 표현으로 이어지는 사슬의 작은 고리 하나를 담당할 뿐입니다.
다른 비유를 사용한다면, 그의 근본적인 임무는 살아 있는 횃불을 젊은 세대에게 넘겨주는 것입니다.
그 젊은 세대는 다시 힘겨운 투쟁을 계속해야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시인이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실현하기에 충분한 힘과 생명력을 지닌 예술적 흐름 속에 놓이는 행운을 얻지 못한다면, 거의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재능이 조금 부족한 시인이라 하더라도 진정 창조적이고 살아 있는 문학운동 속에서 성장할 행운을 얻는다면 어쩌면 더욱 성공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좋은 별의 보호 아래 태어났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스페인 문화에는 매우 중요하고도 급속한 혁신의 과정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발전은 누구에게도 비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설가 갈도스, 시인 마차도, 우나무노, 후안 라몬 히메네스, 그리고 그보다 앞선 베케르.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
산문작가 아소린과 바로하.
극작가 바예인클란.
화가 피카소와 미로.
작곡가 마누엘 데 파야.
이러한 인물들은 저절로 생겨난 것도 아니고 우연의 산물도 아닙니다.
나의 세대는 이러한 따뜻한 환경, 이러한 원천, 이토록 비옥한 문화적 토양의 도움을 받고 그 속에서 풍요로워졌습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어쩌면 우리 가운데 누구도 아무것도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이 자리에서, 나는 이전 시대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형성해 준 내 동포들의 이 풍요로운 묘상(苗床)과 나의 말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나와 같은 세대의 친구들은 어쩌면 진정한 것이었을지도, 혹은 우리 자신만의 독특한 것이었을지도 모르는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은 눈앞에 가장 잘 보이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직전의 전통만이 아닙니다.
나는 그보다 더 오래된 또 하나의 전통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더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우리와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전통.
바로 스페인 황금세기의 고전들입니다.
가르실라소, 프라이 루이스 데 레온, 산 후안 데 라 크루스, 공고라, 케베도, 로페 데 베가.
우리 역시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고, 그들로부터 적지 않은 자극을 받았습니다.
스페인은 갈도스의 세대를 거쳐, 그리고 뒤이어 98세대를 거치면서 스스로를 열고 세상에 자신을 내놓았습니다.
그 결과 먼 과거에서 흘러온 풍요로운 생명의 수액 전체가 압도적인 힘으로 우리에게 흘러들 수 있었습니다.
1927년 세대는 갑작스러운 섬광처럼 우리 눈앞에 드러난, 끊임없는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과거의 찬란한 세계에서 아직 살아 있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평범하고 수준 낮은 것만을 제외하고는.
우리 세대는 회의주의나 과묵한 절제가 아니라 긍정과 열정을 향했습니다.
가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디에서 왔든 우리에게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혁명적이었다면, 우리가 혁명적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제 맞서 반응하려 했던 바로 그 가치들까지도 먼저 사랑하고 흡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단단한 발판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우리 자신의 운명을 향해 위험한 도약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므로 초현실주의자로 출발한 한 시인이 오늘날 전통을 옹호한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전통과 혁명.
이 두 단어는 서로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수직적인 전통만이 아니라 수평적인 전통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던 길의 바로 옆에서 자극적이고 형제애 넘치는 경쟁으로 우리를 도와준 전통입니다.
내가 젊었던 시절, 우리와 같은 경주를 달리던 또 다른 젊은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훌륭한 시인들과 함께 살고, 함께 작업하고, 그들과 더불어 나 자신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이었습니까.
동시대인이라는 자격으로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에게 나 자신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 모두를 깊이 사랑했습니다.
내가 그들을 사랑했던 것은 바로 내가 그들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른 것은 동료 시인들과의 차이와 대비를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이웃과 얼굴을 마주할 때에만 진정한 개성을 획득합니다.
우리의 인격이 형성되는 인간적 환경의 수준이 높을수록 우리에게는 더욱 좋은 일입니다.
이 점에서도 나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사람들의 공동체 가운데 하나와 함께하며 내 운명을 실현할 행운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들의 이름을 부를 때가 되었습니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라파엘 알베르티,
호르헤 기옌,
페드로 살리나스,
마누엘 알톨라기레,
에밀리오 프라도스,
다마소 알론소,
헤라르도 디에고,
루이스 세르누다.
그러므로 나는 연대와 공동체, 그리고 동시에 차이와 대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것이 내 영혼에 가장 깊이 새겨진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내 시 대부분의 뒤편에서 가장 뚜렷하게 들리는 것도 바로 그 심장의 고동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과 시를 바라보는 나의 방식이 이 감정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시인, 진정으로 결정적인 시인은 언제나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본질적으로 그는 보는 사람이며,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예언’은 물론 미래에 대한 예언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과거와 관계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한 예언입니다.
시인은 밝히는 자이며, 빛을 겨누는 자이며, 인간을 질책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자신의 운명의 말이라고 할 수 있는 ‘열려라 참깨’를 지니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시인은 인간이면서 인간 이상이 될 수 있었던 존재입니다.
그가 시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지혜’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 지혜는 그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힘, 어떤 정신이 그의 입을 통해 말합니다.
그것은 그의 민족과 그 고유한 전통의 정신입니다.
시인은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딛고 서 있습니다.
그러나 발바닥 아래에서는 거대한 흐름이 모이고 더욱 강해집니다.
그 흐름은 그의 몸을 통과하여 마침내 그의 혀를 통해 밖으로 나옵니다.
그 순간 불타는 그의 육체를 통해 말하는 것은 대지 그 자체, 깊은 대지입니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는 시인이 위쪽으로 자라납니다.
이마가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이 솟아, 그는 별빛 어린 목소리와 우주적인 울림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자신의 가슴을 스치는 것을 느낍니다.
그때 모든 것은 형제애이며 공동체입니다.
조그마한 개미도, 때로 그의 뺨이 닿는 부드러운 풀잎도 그와 분리된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둥소리 한가운데에서도 들려오는 그들의 섬세한 음, 그 은밀한 소리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나는 시인을 무엇보다도 세공인의 작업이 결정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작품의 완성도는 시인이 점차 성취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거칠고 부적절한 표면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인류에게 내놓는다면 그 메시지는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지칠 줄 모르는 세공이라 해도 내면의 공허함까지 감출 수는 없습니다.
어떤 시인들은―이것은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출발점의 문제입니다―‘소수를 위한 시인’입니다.
그들은 예술가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위대한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교하고 제한된 주제, 세련된 세부, 그리고 수많은 세부로 이루어진 우리 문명을 표현하는 개인들에게서 세심하게 음미되는 정수에 몰두함으로써 자신만의 개성을 획득합니다.
말라르메가 부채를 노래한 시들은 얼마나 섬세하고 깊었던가요!
반면 다른 시인들은―이 경우에도 그들이 얼마나 위대한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인간 안에서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것을 향합니다.
인간을 미묘하게 서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을 향합니다.
그들은 인간을 자기 시대의 문명 한가운데에서 바라보면서도, 지쳐 버린 옷 아래에서 변함없이 빛나는 인간의 순수한 알몸을 감지합니다.
사랑, 슬픔, 증오, 죽음.
이것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런 시인들은 근원적인 시인들입니다.
그들은 인간 안의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것에 말을 겁니다.
그들은 자신을 ‘소수를 위한 시인’이라고 느낄 수 없습니다.
나 자신도 바로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나와 같은 종류의 시인에게는 내가 ‘소통의 소명’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의 가슴속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의 목소리는 어떤 의미에서 공동체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잠시 동안 그 공동체에 자신의 열정적인 목소리를 빌려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에서도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생깁니다.
시는 오직 부분적으로만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해석이 가능한 이 영역에서 시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서도 그들에게 이해되는 참으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뜻밖의 일이 일어납니다.
독자는 마치 기적처럼 자신과는 상당 부분 다른 문화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자기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의 심장은 소통하며 현실의 두 차원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현실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받아들인 새로운 집이 그에게 부여한 현실입니다.
이 말은 독자가 아니라 다른 언어로 번역된 시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도 똑같이 성립합니다.
시인 역시 꿈속에서 만나는 어떤 인물처럼 자신 안에 서로 다른 두 인격이 완벽하게 공존하는 것을 느낍니다.
번역된 작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 안에서 두 개의 인격을 느낍니다.
하나는 이제 자신을 감싸고 있는 새로운 언어의 옷이 부여한 인격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아래에서 여전히 존재하며 자신을 주장하는 본래의 진정한 인격입니다.
따라서 나는 마지막으로 시인에게 상징적인 대표자의 역할을 요구하며 이 말을 마치고자 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존재 안에 인류와 연대하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열망을 위해
노벨상은 창설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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