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암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신앙의 움이 튼 한국천주교의 발상지이다.
이벽(李蘗)은 1779년 기해년 섣달 그믐 눈오는 날 천진암 주어사에서 당대의 학자 권철신과 정약전 등이
유불선(儒彿仙 강학회를 개최 한다는 소문을 듣고,(己亥冬講學于天眞菴), 서울 수표동 집에서 100여리를 짚신 감발하고,
눈 덮인 산길을 걸어서 천진암 주어사를 (走魚寺雪中)찾아 갔을 때는 자정 무렵으로, 잠자던 스님들을 깨워 동행케하고,
맹수의 습격을 막기 위해 쇠방망이를 짚고, 캄캄한 밤중에 앵자산을 넘어 천진암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참석자들은 촛불을 밝히고,
경서(經書)를 담론(談論)하고, 있었는데(李檗夜至 張燭談經), 이 자리에서 이벽(李蘗)이 천학(天學)을 논증(論證)하므로
미처 날이 새는것도 몰랐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10여일간 강학회를 통하여 그들은 천학(天學)을 신봉(信奉)하게 되었다.
한국천주교회발상지천진암성지위원회는 천진암강학회의 역사와 그 의미를 되새기는 설명문을 그 자리에 세웠다.
그 설명문 일부를 그대로 옮겨 천진암강학회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려고 한다.
天眞菴, 이곳은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주역 이벽 성조께서 1770년부터 1784년까지 학업과 修道에 전념하던 李檗 聖祖의
讀書處와 講學堂 天學道場이 있었던 곳으로 1777년경부터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권상학 김원성 이총억 등 젊은 선비들이 여 함께 天學을 연구 실천하였으며 때로는 권철신 같은 당시 저명한 학자들도 참여하는, 천주교교리연구와 실천의 講學會도 종 열어서 학문적 수준에 있던 天學(天主敎)을 종교적 신앙 차원으로 승화 시켜 천주교 기도와 십계명 준수를 위해 음력으로 주일을 제정하고 지키고, 천주교 신앙 수련의 道場이 있었던 곳입니다.
이벽 성조께서는 천진암 天學道場에서 젊은 선비들에게 新敎之說, 즉 天主敎를 가르치고 天文學 地理學 數學 曆學
幾何原本과 같은 新學文도 가르쳐 여기서 이벽 성조께 공부한 丁若鏞 선생은 훗날 正祖 임금을 도와 우리나라
문예부흥과 대화를 위해 크게 공헌하였으니 이곳은 정약용 선생이 주로 10세 前後부터 20세 前後까지 자주 와서 머물고 늙어서는 65세 때에도 찾아와 며칠씩 머물던 丁若鏞 선생의 母校이기도 합니다.
한국천주교 발상지 강학당터의 표지석이다.
그 전면에서는 '天眞庵講學堂址'와 '1779년 경부터 1786년 경까지 약 7年間 講學'이라고 밝히고 있다.
강학당터의 표지석 뒷면이다. 그 뒷면도 아래에 그대로 옮겨 싣는다.
이곳은 韓國天主敎會 創立者 洗子 若翰 德祖 李檗 曠菴 公께서 1770년 경부터 1783년 경까지 10餘年間을 머무시며
讀書하시고 1778년과 1779년을 前後하여 2.3年間은 아주 隱居하시며 學問硏究와 信仰修道 및 門徒敎育에 熱中하시어
당시 丁氏, 李氏 형제들과 賢友賢士들이 참여하는 講學會가 1785년 경까지 7年餘間 종종 開催되던 天眞菴 講學堂 遺址이다.
정학술이 기록한 <니벽전(李檗傳)>의 내용을 보면, 천진암에 모이던 젊은 선비들이
천주교 교리는 물론 당시로는 새롭고 신기한 여러 가지 학문을 듣고 배웠음을 알 수 있다.
“무술(戊戌, 1778)년 이벽선생은 25세 되던 해에 성호 이익(星湖 李瀷) 선생 제자들과 어진 벗들과 선비들,
정씨(丁氏), 이씨(李氏)네 자제분들과 함께 학문에 힘썼다. 북경에 사절로 갔던 무관(武官) 홍군사(洪軍士)한테서 천학 서적들을
한 상자 받으시고, 밤낮으로 읽은 후, 깊이 묵상하고 연구함으로써 의심나는 점을 터득하고는, 산수가 좋은 곳을 찾아 노닐며
주유천하하였다. 그러다가 광주(廣州)에 이르러 원앙산사(鴛鴦山寺, 일명 앵자산, 천진암)에 은거(隱居)하매,
도(道)를 닦는 벗들(道友)이 무리를 지어 모여(衆徒)를 이루게 되었고, 이벽 선생은 이들에게 [성교요지(聖敎要旨)]를 지어,
마치 교과서처럼 받아쓰게(下筆) 하였다.”
“기해(1779)년 이벽선생이 26세 되던 해에는 어진 벗들과 학문에 힘쓰는 제자들이 선생을 웃어른으로 모시며(爲上),
제자들이 무리를 지어 산사에 모여들게 되었다. 이 때 광암 이벽 선생은 기묘한 학문에 아주 박식하여 천문학(天文學)과
지리학(地理學), 의학(醫學)과 복술(卜術), 철학과 인간의 품성과 운명에 관한 학문에도 달통(達通)하였으며,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서 자세히 풀어 대답하는 것이 흐르는 물처럼 막히는 데가 없었고,
그 문하에는 젊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마치 총림(叢林)과같이 단체를 이루어
그 명성이 세간에 자자하여 널리 전해지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은 광암 이벽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지었다.
선학이 인간 하계에 내려오니(仙鶴下人間)
그 풍체 신처럼 높이 당당하게 보이고(軒然見風神)
날개깃 백설처럼 휘날리니(羽翮皎如雪)
닭과 오리가 미움과 시새움에 사네.(鷄鶩生嫌嗔)
우는 소리 온 세상을 진동시키고(鳴聲動九소)
맑고 명료하여 세속의 혼미함을 뛰어 넘었네.(嘹亮出風塵)
가을바람 타고서 홀연히 날아가 버리니(乘秋忽飛去)
인간의 노력이 슬프고 공허하도다.(悟悵空勞人)
다산 정약용은 그의 시풍의 특이한 비유법을 사용하여 광암 이벽의 역사적인 역할과 사상과 이상을 학(鶴)에다 비유하였고
광암의 활동이나 그 정신을 반대하였던 무리들을 천박한 닭(계)과 오리(무)의 시새움으로 비유하여 읊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산은 이벽의 죽음을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벽이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려 구차하게 배교를 하였다거나 평소의 신념을 져버렸다고 생각되는 점은 찾아볼 수 없다.
이벽이 세상에 왔다 간 것을 마치 하늘의 선학이 내려왔다가 잠시 머물다 간 것으로 보고 있다.
"천진암 성지는 한국에서 천주교 신앙의 움이 트고 천주교회 신앙생활이 싹이 돋은, 신앙의 고향이며
사람과 장소와 思想에 있어 즉 儒 佛 天이 함류하여 새 宗敎史가 이루어진, 우리 겨레 정신문화의 특징이고
우리나라의 자랑이며 한국천주교의 뿌리요, 얼굴입니다."-韓國天主敎會 發祥地 天眞庵 聖地委員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