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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네 가지 의혹하는 모양을 밝히는 것이니, 이른바 어떤 한 성품이 질직(質直)하지 않아 삿되게 총명하고 거만하며 도심(道心)이 엷은 사람은 사지(四智)를 알지 못하고 사의(四疑)를 일으키는 것이다.
次明四種疑惑相者 謂如有一性非質直 邪聰我慢 薄道心人 不了四智 而起四疑
그 첫째 의심이란 성소작지로 만드는 일을 의심하는 것이니, 이른바 십념으로 염불하면 저 국토에 왕생한다는 경전의 말을 듣고 그 까닭을 몰라 의심하는 것이다.
一者疑成作事智 所作之事 謂聞經說十念念佛 得生彼國 由不了故 生疑而言
즉 불경에 말하기를 “선업도(善業道), 악업도와 죄와 복이 영원히 없어지지 않아 무거운 것이 앞에서 끌고 가는 것은 이치에 어긋남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일생 동안 갖은 악을 다 짓고도 다만 십념으로 모든 죄를 다 멸하고 저 국토에 왕생하며, 정정취에 들어가서는 삼도(三途)를 영원히 떠나 끝까지 물러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본래부터 온갖 번뇌를 일으키고는 삼계(三界)에 얽매어 서로 묶고 있는데, 어떻게 2륜(輪)의 번뇌를 끊지 않고 바로 십념으로 삼계를 벗어날수 있겠는가” 한다.
이런 그릇된 생각의 의심을 다스리기 위하여 사의할 수 없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그것은 부처님 지혜에 큰 힘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如佛經說善惡業道 罪福無朽 重者先牽 理數無差
如何一生無惡不造 但以十念能滅諸罪 便得生彼 入正定聚 永離三途 畢竟不退耶
又無始來 起諸煩惱 繫屬三界而相纏縛 如何不斷二輪煩惱 直以十念出三界外耶
爲治如是邪思惟疑 是故說名不思議智 欲顯佛智有大勢力故
가까운 것을 먼 것으로 만들고 먼 것을 가까운 것으로 만들며,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만들고, 가벼운 것을 무거운 것으로 만드는 등 진실로 이런 일이 있지만 그것은 사량(思量)의 경계가 아니니, 그러므로 바로 우러러 믿어야 하는 것이다.
경전의 말씀은 스스로의 얕은 식견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니, 만일 믿음을 내고자 한다면 사실을 들어 말해야 할 것이다.
能以近爲遠 以遠爲近 以重爲輕 以輕爲重 雖實有是事 而非思量境 所以直應仰信
經說不可以自淺識思惟 若欲生信 應以事況
비유하면 천 년 동안에 섶을 쌓아 그 높이가 백 리인데, 팥알만한 불로 하룻 동안 그것을 다 태워 버린다 하자. 그렇다면 그때에 과연, ‘천년 동안 쌍은 섶을 어떻게 하룻동안에 다 태워 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앉은뱅이가 제 힘으로 부지런히 나아가 여러 날만에 1 유순을 갔는데 그가 남의 배를 타고 풍세(風勢)에 의해 하룻동안에 천 리를 갔다면, 과연 그 때에, ‘앉은뱅이 신세로 어떻게 하룻동안에 천리를 갈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해서 되겠는가?
세간의 뱃사공도 이런 생각 밖의 일을 할 수 있거늘, 어찌 여래 법왕(法王)님의 힘으로 그런 사의할 수 없는 일을 하지 못하겠는가.
譬如千年積薪 其高百里 豆許火燒 一日都盡 可言千年之積薪 如何一日盡耶
又如벽者 自力勤行 要逕多日至一由旬 若寄他船 因風帆勢 一日之間 能至千里 可言벽者之身 云何一日至千里耶
世間船師之身 尙作如是絶慮之事 何況如來法王之勢 而不能作不思議事耶 (앉은뱅이벽=辟+足)
이것을 첫째 의심을 대치하는 것이라고 한다.
是爲對治第一疑也
둘째 의심이란 이른바 묘관찰지로 관찰하는 경계를 의심하는 것이니,
이 경에서 부처님의 지혜를 찬탄하기를 “묘관찰지로 모든 법을 관찰하면 그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어서, 이변(二邊)을 멀리 떠났으면서도 또한 중도(中道)에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중생들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의심하기를 “지금 물건 다는 것을 볼 때 물건이 무거우면 내려가고 물건이 가벼우면 반드시 올라간다. 그런데 만일 가벼워도 올라가지 않고 무거워도 내려가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런 말은 말만 있고 뜻은 없는 것이니, 인연으로 생기는 법도 그런 줄 알아야 한다.
만일 실로 없는 것이 아니라 하면 곧 있다는 데에 떨어지고, 만일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곧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없는 것이 아니면서 있을 수도 없고, 있는 것이 아니면서 없는 것에 떨어지지도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곧 무거우면서 내려가지 않고 가벼우면서 올라가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이런 말은 말만 있고 실(實)이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二邊 - 상대하는 두 가지 입장. 대립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주장. 예를 들면, 유(有)와 무(無), 득(得)과 실(失), 선(善)과 악(惡).
第二疑者 謂疑妙觀察智 所觀之境
如同經中歎佛智云 妙觀察諸法 非有非無 遠離二邊 而不著中
由不了故 生疑而言 如今現見稱物之時 物重卽低 物輕必擧 若言輕而不擧 重而不低 如是說者 有言無義 因緣生法 當知亦爾
若實非無 便墮於有 如其非有 卽當於無
若言非無而不得有 非有而不墮無 卽同重而不低 輕而不擧
故知是說 有言無實
그러나 이와 같이 양(量)을 헤아리는 것은 곧 여러 극단[邊]에 떨어지는 것이니, 이른바 혹은 다른 것에 의지한 것은 실로 있고 공(空)이 아니라고 집착하여 무거우면 기우는 것에 떨어지고, 혹은 인연으로 생긴 것은 공(空)이어서 없는 것이라고 집착하여 가벼우면 올라간다는 것에 떨어지며, 혹은 속(俗)은 있고 진(眞)은 공이라고 헤아리면서 2변(邊)을 모두 저버려 상위론(相違論)에 떨어지고, 혹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헤아리면서 한 중변(中邊)에 집착하여 우치론(愚痴論)에 떨어진다.
如是稱量 卽墮諸邊 或執依他實有不空 墮增益邊 或執緣生空無有 墮損減邊 或計俗有眞空 雙負二邊 墮相違論 或計非有非無 著一中邊 墮愚癡論
이것은 저 “석론(釋論)”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곧 우치론이다.
그러므로 이런 그릇된 헤아림의 고집을 다스리기 위해 일컬을 수 없는 지혜를 안립(安立)하여, 모든 법은 매우 깊어 말을 떠나고 생각을 끊어 생각하거나 헤아릴 수 없지만 그 말대로 뜻을 취한 것임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如釋論云 非有非無 是愚癡論故
爲治此等邪稱量執 是故安立不可稱智 欲顯諸法甚深 離言絶慮 不可尋思稱量 如言取義
또 저 “유가론”에서 “매우 깊어 보기 어려운 법이란, 이른바 일체의 법이다.
왜냐 하면 첫번째의 아주 깊고 보기 어려운 법은 이른바 일체 법의 자성으로서 모든 희론(戱論)을 없애고 언어의 길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설(言說)에 의지하여 있기 때문에 비로소 취할 수 있고 볼 수도 있고 깨달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매우 깊어 보기 어려운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如瑜伽說 云何甚深難見法 謂一切法
何以故 第一甚深難見法者 所謂諸法自性 皆絶戱論 過言語道
然由言說爲依止故 方乃可取可觀可覺
是故諸法甚深難見
이것을 둘째 의심을 대치하는 것이라 한다.
是爲對治第二疑也
셋째 의심이란 이른바 평등성지(平等性智)등으로 두루 제도한다는 뜻을 의심하는 것이다.
第三疑者 謂疑平等性智等 齊度之意
저 경의 “모든 중생은 다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는 이는 다 보리를 얻는다”라는 말을 듣고 그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의심하기를
“만일 여래와 중생이 다 불성이 있고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여 모두 위없는 보리를 얻게 한다면, 비록 중생이 많다 하더라도 반드시 다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최후의 부처님은 남을 이롭게 하는 공덕이 없을 것이니 그것은 교화 받을 이가 없기 때문이며, 부처가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니 그것은 공덕이 없기 때문이다. 교화하는 일이 없이 공덕이 있을 리 없고, 공덕이 없이 부처가 된다는 것도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런 그릇된 억측으로 대승을 비방하고 평등하게 널리 구제하는 뜻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런 협소(狹小)한 의심의 집착을 다스리기 위하여 대승의 넓은 지혜를 굳게 세워 부처님의 지혜를 밝히려 하는 것이다.
如聞經說 一切衆生 悉皆有心 凡有心者 當得菩提 由不了故 生疑而言
若如來衆生 皆有佛性 悉度一切有情 令得無上菩提者 是卽衆生雖多 必有終盡 其最後佛 無利他德 所化無故 卽無成佛 功德闕故 無化有功 不應道理 闕功成佛 亦無是處
作是邪計 誹謗大乘 不信平等廣度之意 爲治如是狹少疑執 是故安立大乘廣智 欲明佛智
운반하지 않는 것이 없고 싣지 않는 것이 없어 일체가 모두 무여(無除)에 들어가기 때문에 대승이라고 하고, 그 운반하고 싣는 것이 처음도 끝도 없기 때문에 넓은 지혜라 한다.
왜냐 하면 허공은 그지없기 때문이며, 중생은 수가 없고 삼세는 짬[際]이 없기 때문에 생사도 처음도 끝도 없다.
無所不運所不載 一切皆入無餘 故言大乘 其所運載 無始無際 故名廣智
所以然者 虛空無邊故 衆生無數量 三世無際故 生死無始終
중생이 처음도 끝도 없으면 부처님도 처음도 끝도 없을 것이니, 만일 부처에게 처음 된다는 일이 있다면 그 전에는 부처가 없을 것이며, 따라서 성스러운 가르침도 없을 것이요, 성스러운 가르침이 없으면 듣는 이도 없을 것이며, 말이 없으면 익힐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부처가 되었다면 그것은 인이 없이 과가 있다는 것이니 다만 말만 있고 실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에게는 처음이 없는 것이다.
衆生旣無始終 諸佛亦無始終 若使諸佛有始成者 其前無佛 卽無聖敎 無敎無聞 無言無習
而成佛者 卽無因有果 但有言無實
由是道理 諸佛無始
그러나 실로 처음이 없다 하지만 어떤 부처도 본래 범부가 아니었던 일이 없을 것이며, 비록 다 본래 범부였더라도 계속해 올라가면 처음이 없을 것이리, 이로써 중생이 끝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로 끝이 없다 하더라도 한 사람도 뒤에 부처가 되지 않을 이가 없을 것이며, 비록 뒤에 다 부처가 되더라도 계속해 가면 끝이 없을 것이니, 그러므로 평등성지가 제도하지 않는 것이 없으면서 한정이 있는 것이 아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雖實無始 而無一佛本不作凡 雖皆本作凡 而展轉無始 以是准知衆生無終
雖實無終 而無一人後不作佛 雖悉後作佛 而展轉無終 是故應信平等性智 無所不度 而非有限
그 때문에 대승의 넓은 지혜를 굳게 세우는 것이니, 이것을 셋째 의심을 대치하는 것이라고 한다.
所以安立大乘廣智 是爲對治第三疑也
넷째 의심이란 대원경지를 의심하는 것으로 이른바 경계를 두루 비추는 뜻을 의심하는 것이니 어떻게 의심하는가?
第四疑者 謂疑大圓鏡智 遍照一切境義 云何生疑
그는 이렇게 말한다.
즉, “허공이 가없기[無邊] 때문에 세계도 가없고, 세계가 가없기 때문에 중생도 가없으며, 중생이 가없기 때문에 심행(心行)의 차별과 근성과 욕망 등이 다 가없을 것인데, 어떻게 그것을 다 알 수 있겠는가?
점점 닦아서 아는가? 혹은 닦지 않고 단박 비추어 아는가? 만일 닦지 않고 단박 안다면 모든 범부들이 다 평등하게 비추어 알 것이니, 다같이 닦지 않기 때문이며 다른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또 만일 점점 닦아 마지막에 점점 다 알 수 있다면, 일체의 경계는 가 없는 것이 아닐 것이니 가 없으면서 다함이 있을 수는 없다. 이렇게 진퇴(進退)에 따라 다 성립 될 수 없는데 어떻게 두루 비춘다 하여 일체종지라 할 수 있겠는가?” 한다.
그래서 이런 두 관문의 의심을 대치하기 위해, 같음이 없고 짝이 없는 최상의 뛰어난 지혜를 굳게 세워, 이와 같은 대원경지를 밝히려는 것이다.
謂作是言
虛空無邊故 世界亦無邊 世界無邊故 衆生亦無邊 衆生無邊故 心行差別 根欲性等 皆是無邊際 云何於此 能得盡知
爲當漸漸修習而知 爲當不修 忽然頓照 若不修習而頓照者 一切凡夫皆應等照 等不修故 無異因故
若便漸修 終漸得盡知者 卽一切境非無邊際 無邊有盡 不應理故 如是進退 皆不成立 云何得普照 名一切種智
爲治如是兩關疑難故 安立無等無倫最上勝智 欲明如是大圓鏡智
삼지(三智)를 뛰어 넘어 등류(等類)가 없고, 이제(二諦)의 밖에 홀로 있어 둘이 없으며, 양관(兩關)의 이표(二表)에 초연하여 관계가 없으므로 다만 우러러 믿을 뿐이요, 비량(比量)할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같음이 없고 짝이 없는 최상의 뛰어난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
超過三智 而無等類 二諦之外 獨在無二 兩關二表 迢然無關 只應仰信 不可比量 故名無等無倫最上勝智
어떻게 여기에 대해 우러러 믿음을 일으킬 수 있는가.
비유하면 세계가 끝이 없지만 허공 밖을 나가지 않는 것처럼, 온갖 경계가 무한하지만 모두 한 마음안에 들어간다.
부처의 지혜는 모양을 떠나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고, 지혜와 한 마음은 완전히 같아 둘이 없는 것이니, 그것은 시각(始覺)이 곧 본각(本覺)과 같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한 경계도 이 지혜 밖을 벗어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다하지 않는 경계가 없으면서도 한정이 있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무한한 지혜로 가없는 경계를 비추기 때문이다.
云何於此起仰信者
譬如世界無邊 不出虛空之外 如是萬境無限 咸入一心之內
佛智離相 歸於心原 智與一心 渾同無二 以始覺者 卽同本覺 故無一境 出此智外
由是道理 無境不盡 而非有限 以無限智 照無邊境故
이것은 저 “기신론”에서 “일체의 경계는 본래 한 마음으로서 상념(想念)을 떠난 것인데, 중생들이 망녕되게 정계를 보기 때문에 마음에 분별과 한계가 있게 되고, 망녕되게 상념을 일으켜 법성(法性)에 맞지 않기 때문에 결단해 알지 못하지만, 모든 부처님은 본다는 생각을 떠나 두루하지 않는 것이 없나니, 그것은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니,
이것은 곧 모든 법의 성품으로서 그 자체가 일체의 망녕된 법을 환히 비추며, 큰 지혜의 작용과 무량한 방편으로 중생들의 이해하는 능력에 따라 모든 법의 이치를 다 열어 보이나니, 그러므로 이것을 일체 종지라고 하며, 이것은 같음이 없고 짝이 없는 최상의 뛰어난 지혜라고 한다.
그것은 보는 바가 없기 때문에 보지 않는 것이 없나니, 이것을 넷째 의심을 대치하는 것이라 한다.
如起信論云 一切境界 本來一心 離於想念 以衆生妄見境界故 心有分齊 以妄起想念 不稱法性故 不能決了 諸佛如來離於見相 無所不遍 心眞實故
卽是諸法之性 自體顯照一切妄法 有大智用 無量方便 隨諸衆生所應得解 悉能開示一切法義 是故得名一切種智 是爲無等無倫最上勝智
無所見故 無所不見 如是對治第四疑也
만일 이것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말과 같이 뜻을 취해 유변(有邊)이나 무변(無邊)에서 다 허물을 떠나지 못할 것이니, 유변이 아닌 문을 의지하여 짐짓 무변을 말했을 뿐이다.
만일 누구나 이런 사의(四疑)를 해결하지 못하면 비록 저 국토에 나더라도 변방에 살게 될 것이며, 또 만일 어떤 사람이 앞에서 말한 사지(四智)의 경계를 밝게 알지 못하더라도 마음의 눈이 열리지 못했다고 스스로 겸손하여, 부처님을 우러러 생각하면서 한결같이 엎드려 믿으면, 그런 사람은 그 행품(行品)을 따라 저 국토에 왕생하되 변방에 살지 않을 것이며, 만일 변방에 난다면 그들은 별류(別類)로서 구품(九品)에 나지 못할 것이니, 그러므로 함부로 의혹을 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然若不得意 如言取義 有邊無邊 皆不離過 依非有邊門 假說無邊義耳
若人不決如是四疑 雖生彼國而在邊地 如其有人 雖未明解如前所說四智之境 而能自謙 心眼未開 仰惟如來 一向伏信 如是等人 隨其行品往生彼土 不在邊地 生著邊者 別是一類 非九品攝 是故不應妄生疑惑也
兩卷無量壽經宗要(終)